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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Ⅰ
- ▣웨스터룬드2성단▣클림트-키스와 황금▣고흐-연한물감▣잭슨 폴록-혼돈속의 패턴▣『모나리자』-갈라짐▣몬드리안-직선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Ⅰ https://blog.naver.com/ohyh45/222432983359
① 허블 우주망원경과 웨스터룬드 2 성단. ② 클림트와 황금. ③빈센트 반 고흐의 연백 물감.
④ 잭슨 폴록의 혼돈 속에 패턴. ⑤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갈라짐. ⑥ 피트 몬드리안의 직선.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Ⅱ https://blog.naver.com/ohyh45/222434226736
⑦ 샤갈과 스테인드글라스. ⑧ 모네와 색채 혼합. ⑨ 파울 클레와 자기조립.
⑩ 안견의 수묵화와 스며들기. ⑪ 커피 얼룩과 잉크젯 인쇄. ⑫ 백남준과 브라운관
1. 허블 우주망원경과 웨스터룬드 2 성단
허블 우주망원경이 찍은 웨스터룬드 2 성단 사진. 원병묵 제공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덕분에 별들로 가득한 밤하늘을 볼 기회가 많았다. 저녁 무렵 집집마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면 동네 가득 나무 연기가 자욱했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동네방네 놀다가 밤늦게 집에 들어오면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보며 마당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별똥별이 떨어질 땐 무슨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한껏 즐거웠다.
그 시절 밤하늘은 어찌나 밝던지 금방이라도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신비롭고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했다. 자연을 가까이 접하는 동안 자연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고 언젠가 자연의 비밀을 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과학자의 꿈은 그렇게 영글어 어느새 물질의 비밀을 탐구하며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는 과학자가 되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만들어 하늘을 처음으로 관측한 1610년 무렵 인간의 시선은 태양계를 넘지 못했다. 인간의 시선이 우리 태양계와 우리 은하를 본격적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은 에드윈 허블이 캘리포니아 패서디나 근처 윌슨산 천문대에서 우리 은하 밖 천체들을 관측하기 시작한 1920년대다.
그러나 허블을 포함한 천문학자들은 언제나 비구름과 대기 현상이 빛을 방해하지 않는 더 높은 곳에 망원경을 설치하고 싶어 했다. 그 바람은 마침내 1990년 4월24일 실현되었다.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를 쏘아올려 비구름과 대기권 저 위에 ‘허블 우주망원경’을 설치한 것이다. 이제 우주에서 맘껏 깨끗한 우주를 관측할 수 있다.
2015년 4월23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허블 우주망원경 발사 25주년을 기념하여 허블 우주망원경이 찍은 대표 사진들을 공개했는데, 그중 하나가 여기에 실린 ‘웨스터룬드 2’(Westerlund 2) 성단 사진이다.
2009년에 찍은 이 사진 속 성단은 지구로부터 약 2만 광년 떨어진, 생긴 지 200만년 정도밖에 안 되는 아주 젊은 성단이다. 사진에서 밝게 보이는 부분은 성단에서 강한 항성풍이 날아오는 곳이다.
이 항성풍이 가스와 충격파를 끊임없이 쏟아내는데, 이것이 별의 탄생을 촉진한다. 사진에는 이제 막 태어난 수천개의 젊은 별들과 우리 은하에서 가장 밝고 가장 거대한 별들이 포함되어 있다.
웨스터룬드 2 성단 사진의 환상적인 풍경 앞에서 과학자들은 ‘측량 가능한’ 사실들을 찾고,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을 찾는다. 과학자들은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인식과 증명의 경계를 탐색하지만, 예술가들은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의 한계를 넘고자 몸부림친다.
과학자들은 물질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자 하고, 예술가들은 물질을 통해 세상을 표현하려 한다. 이 성단 사진에서 물질에 관한 과학과 예술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물질과 예술’을 주제로 한 연재의 첫 작품으로 이 사진을 선택했다. 이 사진은 과학과 예술의 공존 지점을 잘 보여주는 최고의 작품이다. 이 사진의 중앙은 허블 우주망원경에 탑재된 ‘광시야 카메라 3’(Wide Field Camera 3, WFC3)를 이용하여 가시광선과 근적외선 영역의 노출을 합성하여 얻었다.
사진 주변은 ‘탐사용 고성능 카메라’(Advanced Camera for Surveys, ACS)에서 얻은 가시광선 사진을 합성한 것이다. 광시야 카메라 3는 다양한 필터와 프리즘을 이용해 가시광선은 물론 자외선과 적외선 검출이 가능하고 넓은 시야각으로 지상에서 볼 수 없는 천체의 다양한 현상을 정밀하게 관측할 수 있다.
즉, 웨스터룬드 2 성단 사진은 적, 청, 녹 삼원색 필터로 찍은 가시광선 사진, 적외선 검출기로 얻은 적외선 영상을 정밀하게 합성해 재구성한 것이다. 천문학자들과 광학기술자들, 컴퓨터 공학자들의 협업이 별과 물질이 생성되는 순간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창조주의 손’을 보고, 누군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전율하기도 하며, 천문학자는 별 생성 비밀을 캐내기 위해 눈을 반짝일 것이다. 물질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입자와 가스로 이뤄진 항성풍의 충격파가 만들어낸 기묘한 형상과 패턴, 그 사이에 숨겨진 법칙을 몹시 궁금해할 것이다.
웨스터룬드 2 성단 사진은 별의 생성 과정과 물질의 기원을 보여주는 절묘한 작품이다. 웨스터룬드 2 성단은 1960년대 이 성단을 발견한 스웨덴 천문학자 벵트 웨스터룬드의 이름을 딴, 약 3천개의 별들로 구성된 거대한 집단이다.
사진 중앙에 아주 밝고 무거운 별들이 빽빽하게 모여 있고, 이들 어리고 무거운 별들에서 나오는 강력한 항성풍과 자외선 복사 에너지가 주변 먼지와 가스 구름을 밀어낸다. 성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항성풍과 에너지가 별들이 태어나는 거대한 먼지기둥과 산등성, 계곡 같은 환상적인 하늘 풍경을 만든다.
이 아름다운 장면은 마치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 같다. 밝은 별 주변의 붉은 점들은 갓 태어난 어두운 별들의 모습으로, 이들을 만든 먼지와 가스로 이루어진 거대한 둥지에 안겨 있다. 사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밝고 푸른 별들은 성단에 속한 별들이 아니고 앞쪽 어딘가에 위치한 별들이다.
허블 우주망원경의 가시광선과 근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이 사진에서 붉은색 음영은 수소 가스, 청록색의 대부분은 산소 가스다. 물질의 생성 비밀을 간직한 우주는 그 자체로 가장 완벽한 예술 작품이다.
‘물질’(物質)은 사물의 본바탕을 일컫는 말이다. 사물의 구성 요소인 물질은 일정한 질량과 크기를 갖는다. 물질은 압력과 온도에 따라 기체, 액체, 고체의 상태가 끊임없이 변하고 ‘물성’(物性)이라는 고유한 성질을 가진다. 물성은 물질의 성격이다.
물질이 갖는 고유의 전기적, 자기적, 열적, 기계적, 광학적 특성과 그 근원을 알면 물질을 잘 활용할 수 있다. 현대 물리학은 물질을 ‘쿼크’와 ‘렙톤’이라는 기본 입자와 중력, 전자기력, 약력, 강력이라는 네 가지 기본 힘으로 설명한다.
물질의 질량은 원자핵을 구성하는 쿼크와 렙톤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강력에 기인하고, 물질의 크기는 원자핵을 도는 전자의 궤도가 불확정성 원리와 전자기력 때문에 일정한 공간이 필요한 원자 크기에서 비롯된다.
우주는 물질의 기원이다. 우주는 암흑 에너지, 암흑 물질, 원자, 광자, 중성미자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우주의 질량과 에너지 대부분은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에서 비롯된다.
은하와 성운의 회전 속도나 서로 충돌하는 은하들의 기묘한 형상, 우주의 가속 팽창 등에서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의 권능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중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이 약 95%를 차지하고 있고, 우리가 관측하는 물질은 우주의 5% 정도일 뿐이다. 어쨌든 우주는 물질로 가득하다.
우주는 쿼크와 렙톤, 빛과 입자,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 초신성 폭발과 중성자별 충돌 등등 이 모든 물질이 서로 얽히고설키고 서로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풍경을 만든다. 이 환상적인 풍경 앞에서 과학자들은 ‘측량 가능한’ 사실들을 찾고,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을 찾는다.
과학자들은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인식과 증명의 경계를 탐색하지만, 예술가들은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의 한계를 넘고자 몸부림친다. 과학자들은 물질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자 하고, 예술가들은 물질을 통해 세상을 표현하려 한다. 이 성단 사진에서 물질에 관한 과학과 예술의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우주가 물질로 가득한 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중심에 물질이 있다. 자연을 표현한 예술에서 과학의 원리를 찾을 수 있고, 물질의 이해로부터 예술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앞으로 과학과 예술을 잇는 물질의 본질에 대해, 그리고 물질을 이용한 예술의 표현에 대해 살펴볼 예정이다.
프랙털을 표현한 잭슨 폴록, 나노 입자를 사랑한 구스타프 클림트, 물의 패턴을 그린 채성필 작가, 다 빈치와 반 고흐가 그린 난류, 현대 과학의 난제인 커피 얼룩 효과, 모래 알갱이가 보여주는 복잡성, 불완전한 유리의 아름다움, 버블과 거품의 단단함, 변하지 않는 빛을 만드는 구조색 등 ‘물질과 예술’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으로 파헤쳐 보고자 한다.
허블우주망원경이 본 우주의 신비
별의 힘, 허블 우주망원경의 광각 천체 카메라3이 적외선 영상으로 전에 없이 세밀하게 말머리 성운을 촬영했다. 천문학의 대표적인 관측 대상으로 꼽히는 말머리 성운은 밝은 배경에 검은 형체로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허블 우주망원경을 통해 성간먼지와 성간가스의 장막안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사진을 보면 NASA가 쏘아 올릴 제임스 웹 적외선 우주망원경이 앞으로 어떤 활약을 펼칠지 짐작할 수 있다고 르베이는 설명한다.
우주의 절경, 허블 우주망원경으로 나선은하 NGC 1300 을 촬영한 이 유명한 사진에는 연푸른색의 어린 별들과 밝은 은하핵 주변을 나선형으로 휘도는 먼지 층, 그 뒤에서 빛나는 은하들의 모습이 상세히 담겨 있다. “보고 있으면 넋을 잃게 되는 사진이죠.” 르베이는 평한다.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우주에 펼쳐진 불꽃놀이, 밝게 빛나는 어린 별 무리가 먼지로 가득한 타란툴라 성운 속의 빈 공간을 환히 밝히고 있다. 허블 우주망원경의 천체 사진을 대중에 공개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는 졸탄 르베이는 이 사진에 담긴 역동성에 큰 매력을 느낀다며 이렇게 말한다. “별들은 지금도 생성되거나 소멸하고 있어요. 엄청나게 많은 물질이 소용돌이치고 있죠.”
은하의 왈츠, Arp 273이라고 알려진 두개의 나선은하는 중력의 상호작용으로 휘어졌다. 이 은하들은 지구에서 3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서로 접근하며 합칠 준비를 하고 있다. “내 눈에는 두 개의 나선은하가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아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서로의 주위를 돌다가 마침내 합치게 될 겁니다.” 르베이는 말한다.
*참고자료 [1] 김항배, <우주, 시공간과 물질>(컬처룩, 2017년) [2] 나사, ‘허블 우주망원경’ (https://www.nasa.gov/mission_pages/hubble/story/index.html) [3] 네이처, ‘허블 25주년 기념 뉴스’(http://www.nature.com/news/cosmic-confetti- celebrates-hubble-s-25th-birthday-1.17408) [4] https://www.spacetelescope.org/images/heic1509a/ |
[출처] :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 1. 허블 우주망원경과 웨스터룬드 2 성단/ 한겨레신문, 2017. 12. 14.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23601.html#csidxbe2dc5d8c2011e1b1d0820f26a94652
허블우주망원경(Hubble Space Telescope, HST) 애틀랜티스우주왕복선과 분리되는 허블우주망원경 허블우주망원경(Hubble Space Telescope, HST)은 1990년에 지구 저궤도로 발사된 우주망원경으로 현재도 가동 중이다. 허블은 최초의 우주망원경은 아닐지언정 가장 크고 가장 쓰임이 많은 우주망원경 중 하나이며, 천문학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연구 도구이자 공공관계 구축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허블의 명칭은 천문학자인 에드윈 허블의 이름에서 본뜬 것으로, 콤프턴 감마선 관찰위성, 찬드라 엑스선 관찰위성,스피처우주망원경과 함께 NASA의 거대관찰위성 (Great Observatories)의 일원이다. 1990년 디스커버리에서 분리된 허블 2.4미터의 주거울을 갖춘 허블의 주요 장비 네 가지는 근자외선,가시광선,근적외서 스펙트럼을 관찰한다. 허블의 궤도는 지구의 대기권의 방해를 피해 지상 망원경과 비교해서 배경광의 영향을 대폭 줄일 수 있으므로 해상도가 매우 높은 영상을 얻는데 적합하다. 허블은 역대 가장 상세한 가시광선 영상들을 촬영함으로써 먼 시공간의 모습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우주 팽창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한 것처럼, 허블이 이룩한 수많은 관측은 곧 천체물리학 난제의 돌파구로 이어졌다. 허블은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유럽우주기구의 협력으로 건조되었다. 우주망원경과학연구소(STScI)는 허블의 관찰대상을 지정하여 관찰결과 자료를 처리하는 역할을 하고, 고다드우주비행센터는 우주선을 조작하는 역할을 한다. 우주망원경의 개념은 1923년이라는 이른 시기부터 등장했다. 허블은 1970년대에 투자 받아 1983년에 발사되기로 계획되었으나, 계획이 기술문제로 인한 지연과 예산 문제, 그리고 1986년 챌린저 참사로 난항을 겪는다. 1990년에 최종적으로 발사되었을 때, 허블의 주거울이 정확하지 않게 설치되어 망원경의 성능에 지장을 주었다. 1993년 정비 임무를 통해 원래 설계되었던 성능으로 광학적 수정이 이루어졌다. 허블은 우주비행사를 통해 우주에서 정비할 수 있도록 설계된 유일한 망원경이다. 1990년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의 발사 후, 주요 장비 다섯가지를 포함하여 망원경의 수리, 업그레이드, 시스템 대체를 위한 5회의 우주왕복선 임무가 뒤를 이었다. 다섯번째 임무는 2003년의 컬럼비아 참사 이후 안정성 차원에서 취소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공적인 논의가 빠르게 이루어진 뒤, 마이크 그리핀 NASA국장이 다섯번째 정비 임무를 승인하여 2009년에 완수된다. 망원경은 2018년 현재도 운용 중이며, 2030년-2040년까지 계속 운용될 것이다. 허블의 뒤를 잇는 제임스 웹우주망원경(JWST)은 2021년 3월에 발사될 예정이다. [위키 백과] |
2.클림트의 『키스』와 황금 - 황금으로 그린 사랑의 두 얼굴
너무나 다른 모습의 두 연인은 키스를 하는 동안 서로를 꼭 붙들고 있지만, 키스가 끝나면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황금빛 장식의 대조에서 연인의 사랑이 가진 절망과 갈망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1908년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 <키스>가 처음 공개되자마자 벨베데레 궁전 오스트리아 미술관은 직접 그림을 구입해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너무나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겨 한 번도 외부로 이동시킨 적이 없다. 벨베데레 궁전 오스트리아 미술관 소장.
찬란한 빛을 내는 황금은 인류에게 가장 아름다운 불변의 가치로 오랫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예술에서 황금은 가장 고결하고 가장 화려한 무엇을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한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하고, 부의 정도를 나타내기도 한다.
황금은 지리적으로 단절된 다양한 문화권에 있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보물로 여겨지는 물질이다.
황금의 불변성은 물과 공기, 대부분의 화학물질과 거의 반응을 하지 않는 물성에서 비롯된다. 물질의 고유한 특성인 물성은 이렇듯 물질의 가치를 결정하는 근원이다.
금은 화학적 불변성 외에도 물리적으로 독특한 특성이 있다. 특히 예술 분야에서 중요한 물성이 금의 연성과 전성이다. 금은 화합물이나 합금이 아닌 순수한 순금일 때 고체 상태에서 거의 파괴되지 않고, 변형이 쉬우며, 원자 수준까지 얇게 만들 수 있다.
한쪽 방향으로 잡아당겼을 때 잘 늘어나는 특성을 ‘연성’(延性)이라 하며, 두드려 얇게 펼 수 있는 특성을 ‘전성’(展性)이라 한다. 금은 연성과 전성이 가장 뛰어난 물질이다. 금은 두드려 아주 얇은 막으로 만들 수 있다. 실제로 금 1g을 얇게 펴면 1㎡의 금박을 만들 수 있다.
금은 전기와 열이 잘 통하고 부식에 강하며 인체에 해가 없어 현대 과학기술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중요한 금속이다. 인류는 불변의 가치를 지닌 금을 화폐나 부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사용해왔다. 중세 시대에는 연금술사들이 가장 만들고 싶어 했던 금속이었다.
최근 국제공동연구팀은 우주 공간에서 두 중성자별이 충돌하는 과정을 관측하여, 인류 문명에 중요한 금, 텅스텐, 우라늄, 납 등의 무거운 원소가 중성자별 충돌 과정에서 생성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금은 이렇듯 머나먼 우주에서 만들어져 우리에게 전해졌다.
110년간 한번도 벨베데레 떠나지 않은 그림
황금빛을 사랑한 화가가 있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한 구스타프 클림트는 금박을 사용하여 화려한 황금빛을 띠는 그림을 그리길 좋아했다. 그의 그림 중 가장 사랑받는 그림이 연인의 입맞춤을 표현한 <키스>(Der Kuss, 1907~1908년)이다. 사랑의 순간을 황금을 이용해 그린 클림트의 그림은 물질과 예술의 연결 관계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이 소장되어 있는 벨베데레 궁전은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하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다. 지난여름 빈을 방문하는 동안 이 그림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한쪽 벽면에 걸린 가로와 세로 모두 180㎝인 아담한 그림이 넓고 어두운 방 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연인의 키스 장면을 묘사한 이 그림은 화려한 황금빛으로 장식되어 보는 사람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림 앞에 서 있으니 마치 그림 자체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1908년 클림트의 이 그림이 처음 공개되자마자 벨베데레 궁전 오스트리아 미술관은 직접 그림을 구입해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은 이 그림을 너무나 특별하고 소중하게 여겨 한 번도 외부로 이동시킨 적이 없다.
벨베데레 궁전이 소장한 클림트 컬렉션 중에서도 <키스>는 단연 독보적인 작품이다. 클림트는 19세기 말 모더니즘이 태동하던 오스트리아 빈에서 가장 성공적인 화가였으며, 동시에 여성의 관능미를 거침없이 표현한 에로티시즘 화가로서 논쟁의 중심에 선 인물이었다.
유화와 금박을 함께 사용한 클림트의 화법은 너무나 유명한데, 황금빛을 나타내기 위해 실제로 값비싼 금박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클림트는 금세공업자였던 아버지에게서 금박을 다루는 기술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 1903년 이탈리아 라벤나 지역을 여행하면서 우연히 비잔틴 모자이크 작품을 접한 클림트는 깊은 감명을 받는다.
이후 독특한 자신만의 화법을 개척하며 금박 기술을 활용해 여인의 고혹적인 매력과 사랑의 환희를 주제로 화려하고 자극적인 그만의 화법을 완성한다. 황금빛을 그림에 사용한 그의 절정의 시기를 클림트의 ‘황금시대’라 한다. 그림 <키스>는 그의 황금시대에 그린 가장 빛나는 그림이었다.
떠난 연인에게 바친 그림, <키스>
클림트는 비밀스러운 화가였다. 자신의 그림 작업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무런 설명도 남기지 않았다. 그림 작업은 작가 자신과 모델이 되어준 여인과의 비밀스러운 작업이었으며, 그 과정은 본인들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화가인 자신을 알고 싶으면 자신의 그림을 연구해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어쩌면 작품으로만 소통하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클림트는 그림의 여러 모델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림에 담고 싶었던 그는 대상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탐색하고 싶었던 것 같다. 평생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았지만 그가 가장 사랑한 에밀리에 플뢰게라는 여인과 평생 정신적인 사랑을 나눈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림 <키스>의 실제 모델이 에밀리에 플뢰게라는 주장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일화에 따르면, 클림트는 플뢰게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정신적인 사랑만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다 클림트가 다른 여러 모델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 플뢰게가 그를 떠난다. 클림트는 크게 후회하면서 플뢰게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깨닫고 그의 사랑을 고백하는 <키스>를 그리며 용서를 구한다. 그 고백에 감동한 플뢰게는 결국 돌아온다. 플뢰게는 클림트가 운명할 때까지 그의 연인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클림트는 그가 그린 거의 모든 모델과 잠자리를 했을 정도로 성적 욕망에 집착하면서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여성 편력이 심한 문제적 인물이었다. 윤리적 관점에서 클림트는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클림트와 플뢰게의 관계는 단순한 정신적인 사랑의 관계를 넘어 오랜 세월 절망과 갈망을 함께 나눈 복잡한 애증 관계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대중에게 사생활이 노출되길 꺼린 클림트는 그림에 대한 설명이나 자신에 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플뢰게도 클림트와 주고받은 편지를 모두 없앴다. 그래서 클림트를 알 수 있는 단서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의 그림에 대한 해석이 제각각인 이유다.
아무런 설명 없이 그림만 보고 작가의 의도를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클림트는 어떤 단서도 남겨 놓지 않았기에 오직 그림으로만 그의 생각을 읽어야 한다. 그림의 구도, 장식, 컬러 등으로 단서를 찾을 수 있지만, 그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특징이 바로 ‘황금빛’이다.
다시 <키스>를 유심히 살펴보자. 황금빛으로 표현된 키스하는 연인의 모습은 사랑의 본질을 잘 표현한다. 사랑의 가치는 고결하고 아름다운 황금과 같고, 사랑의 순간은 키스의 짜릿함처럼 찬란하고 화려하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사랑의 기억은 영원으로 이어진다.
사랑은 두 사람만의 보물이며 가장 화려한 순간이다. 황금빛은 온전한 사랑의 환희를 뜻한다. 동시에 사랑의 위태로움도 담고 있다. 황금빛은 사라질 것에 대한 간절함 또는 절망의 다른 표현이다. 너무나 소중해서 잃고 싶지 않은 사랑의 속성을 뜻한다.
황금빛으로 장식된 무늬도 작가의 상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지만 남녀의 사랑은 부자연스럽고 대조적이다. 그림에서 사실적이며 섬세하고 매끈하게 그려진 피부와 평평하고 화려한 옷의 장식이 대조를 이룬다.
남성의 옷에 그려진 흑백의 네모와 여성의 옷에 그려진 색색의 동그란 무늬도 대조적이다. 옷에 새겨진 황금빛 소용돌이 무늬도 남녀가 다르다. 여성의 소용돌이는 중심을 향하지만 남성의 것은 밖으로 향한다. 꽃밭 위에서 열정적으로 온몸을 굽혀 키스하는 남성과 절벽 끝에서 위태롭게 키스를 받는 여성의 자세는 어딘가 불안하다.
너무나 다른 모습의 두 연인은 키스를 하는 동안 서로를 꼭 붙들고 있지만, 키스가 끝나면 이들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황금빛 장식의 대조에서 연인의 사랑이 가진 절망과 갈망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황금빛 금박을 사용해 사랑의 갈망과 절망을 그린 그의 그림에서 “나를 알고 싶으면 그림을 보라”고 했던 클림트의 마음을 읽어보자. 살면서 기적 같은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키스>에서 특별한 감동을 느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키스>의 황금빛은 어떤 사랑을 꿈꾸고 있을까?
[출처] :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 2.클림트의 『키스》와 황금 - 황금으로 그린 사랑의 두 얼굴/ 한겨레신문, 2018. 1. 11.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27423.html#csidxef7706e56828a41ae98869bd756259e
3.빈센트 반 고흐의 『피아노를 치는 마르그리트 가셰』(1890년)
- 고흐의 연백 물감 -, 백색의 열정과 절망
빈센트가 아연백을 쓰면 연백을 사용할 때보다 더 효과적으로 임파스토를 잘 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빈센트는 뒤늦게 아연백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마르그리트의 피아노 치는 모습을 그린 한 달 후 생을 마감한다.
좀 더 일찍 연백보다 아연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면 임파스토 기법을 더 잘 표현할 뿐만 아니라 납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했을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피아노를 치는 마르그리트 가셰>(1890년). 바젤미술관 소장
1890년 7월29일 파리 근교 오베르, 37살 무명 화가가 짧은 생을 마감한다. 화가는 밤낮 그림에 몰두했지만 더는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절망만 남았다. 그를 지켜보던 한 사람은 안타까워했다.
“그는 무너졌던 거야. 누구도 그럴 수 있어. 삶은 강한 사람도 무너뜨리곤 해. 이 사회는 아픈 사람한테 등을 돌렸어.”
그는 정말 노력했고 뭔가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 8년 동안 800여점의 작품을 그렸다. 그럼에도 겨우 한 점만을 팔았을 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절망은 우울증을 가져왔다. 그를 진단한 한 의사는 증언했다.
“그는 캔버스마다 빛나는 별을 그렸네. 하지만 그 별들이 깊고 텅 빈 외로움에 둘러싸여 있지. 그는 미래를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어. 동생이 자신을 뒷바라지하는 동안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한 사실에 몹시 괴로워했네. 그는 자기 때문에 동생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했네.”
그가 죽은 뒤 화가의 진심을 알아본 한 소녀는 그의 무덤에 꽃을 갖다 놓았다. 그가 훌륭한 예술가였고 꽃을 좋아한다는 것을 기억했다.
“지금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에요. 그에겐 어떤 생명도 너무 작거나 가치 없지 않았죠. 그는 모든 것을 감사하고 사랑했어요.”
이 슬픈 이야기는 지난해 개봉한 영화 <러빙 빈센트>이다. ‘반 고흐’로 잘 알려져 있지만 오늘은 ‘빈센트’라 부르고 싶다. 19세기 후반 아주 짧고 강렬한 생을 살았던 빈센트의 영향은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더욱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나도 이 영화를 보면서 한 무명의 젊은 화가가 겪었을 고뇌와 고통의 과정을 지켜봤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빈센트의 무덤에 꽃을 갖다 놓은 소녀, ‘마르그리트 가셰’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백색으로 가득한 마르그리트의 드레스에 담긴 열정과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
물감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을까
스위스 바젤 미술관에 가면, 마르그리트의 모습이 그려진 빈센트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다. 마침 지난달 스위스를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바젤 미술관을 찾아갔다. 이른 아침 문을 열자마자 미술관을 들른 덕분에 아무도 없는 방에서 그의 그림을 한참 감상할 수 있었다. 묘한 매력이 있는 그림이었다.
드레스는 분홍색을 띤 백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오렌지색 반점이 있는 녹색의 벽을 배경으로, 녹색 점이 가득한 빨간색 카펫과 짙은 보라색의 피아노가 마르그리트 앞에 놓여 있다. 마치 모든 요소가 소녀에게 집중 조명을 선사하는 것 같다. 동생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빈센트는 이 그림을 아주 좋아했고 특히 채색에 정성을 들였다.[1]
빈센트는 드레스의 백색을 표현하기 위해 두 가지 안료를 사용했다. 하나는 납(Pb)이 들어 있는 ‘연백’(lead white)이며 다른 하나는 아연(Zn)이 주성분인 ‘아연백’(zinc white)이다. 아연백은 아연과 산소가 결합한 산화아연으로 물에 녹지 않고 공기 중에서 매우 안정하며 인체에 무해하다.
오늘날에도 아연백은 공업용, 의약품, 안료로 널리 사용된다. 특히 빛을 잘 반사하여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는 선크림의 원료이기도 하다.
연백은 19세기 말까지 서양 미술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납이 들어간 연백은 납중독이라는 치명적인 위험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묘한 색감으로 화가들을 사로잡았다. 연백을 특히 사랑했던 제임스 휘슬러는 납중독에 이른 대표적인 화가다.
심각한 납중독은 생명을 위협하고 정신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전창림 박사는 그의 저서 <미술관에 간 화학자>에서 연백을 “화가를 죽인 흰색 물감”이라 했다.
빈센트가 사용한 물감에 납이 함유된 사실을 후세 과학자들이 밝혀냈다. 그의 정신장애와 죽음에 납중독이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빈센트의 독특한 화풍을 대표하는 노란색에는 산업혁명 때 개발된 ‘크롬 옐로’(chrome yellow)가 자주 사용되었는데, 여기에도 납이 들어 있었으며 매우 치명적이었다.
오렌지색에 사용된 붉은 안료 ‘연단’(red lead)에도 납이 있으며, 크롬 옐로나 연단은 햇빛을 받으면 하얗게 변색되기도 했다.[2]
그가 아연백을 일찍 썼더라면
빈센트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유명하다. 그가 사용한 ‘임파스토’(impasto)는 물감의 질감과 입체감을 살리는 회화 기법으로, 물감을 캔버스 위에 바로 짜서 섞은 뒤 두껍게 덧칠한다. 물감이 다 마르면 붓 자국이 마치 캔버스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보인다.
빈센트의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에서 이글거리는 별과 소용돌이를 표현할 때도 백색 안료를 덧칠한 임파스토 기법이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빈센트는 사물의 상세한 표현보다는 전체 느낌을 강조했던 인상파 화가였으며 임파스토 기법은 그에게 생명이었다. 그런데 이 기법이 성공하려면 물감의 물리적 특성이 매우 중요하다.
임파스토 기법을 실현하려면 물감과 관련된 ‘유변학’(rheology)이 중요하다. 유변학은 물질의 변형과 유동에 관한 과학으로, 콜로이드, 고분자, 생체 물질 등 복잡한 화학 조성을 가진 물질에 힘을 가했을 때 나타나는 탄성, 변형, 유동 현상 등을 다룬다.
음식이나 화장품 등에서 유변학적 특성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먹는 젤리는 고체와 액체 성질을 모두 가진 ‘점탄성’ 물질이다. 고체처럼 일정한 형태를 가지지만 아주 단단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액체처럼 변형이 쉽지만 자유롭게 흐르지도 않는다. 물감은 그림을 그릴 동안 액체와 같지만 마르면 고체와 같다.
2014년 프랑스 과학자들은 <백색 페인트의 유변학: 반 고흐는 그의 유명한 임파스토를 어떻게 얻었나>라는 제목의 연구 논문에서, 19세기 말 자주 사용된 백색 안료의 유변학적 특성을 비교했다.[3]
놀라운 사실은 대표적인 유변학적 특성인 항복응력과 탄성률에서 아연백이 연백보다 훨씬 더 좋았다.
이 결과의 의미는 명백하고 간단하다. 빈센트가 아연백을 쓰면 연백을 사용할 때보다 더 효과적으로 임파스토를 잘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빈센트는 뒤늦게 아연백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마르그리트의 피아노 치는 모습을 그린 한 달 후 생을 마감한다.
좀 더 일찍 연백보다 아연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면 임파스토 기법을 더 잘 표현할 뿐만 아니라 납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했을 것이다.
빈센트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가장 강렬한 빛을 발하는 별이 되어 수많은 후세 사람들에게 예술혼을 불어넣어 주었다. 빈센트의 천재성과 진심을 이해했던 마르그리트는 죽기 전까지 미혼으로 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빈센트가 남긴 그녀의 피아노 치는 모습은 1934년 바젤 미술관이 수집할 때까지 44년 동안 그녀 침실에 걸려 있었다.
아마도 빈센트를 향한 존경과 사랑으로 오래도록 간직했을 것이다. 영화 <러빙 빈센트>에서도 빈센트를 향한 그녀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빈센트의 죽음을 추적하는 아르망 롤랭에게 그녀는 이렇게 질문한다.
“당신은 그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나 궁금해하면서 그의 삶에 대해선 얼마나 알죠?”
불꽃같은 생을 살았던 빈센트는 사후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가장 존경받는 화가가 되었다.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한 젊은 무명 화가 빈센트의 삶은 비극이었다.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오늘날에도 젊은 예술가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독성이 있는 물감은 현재 사용이 거의 중지되었고 예술에 대한 인식도 많이 개선됐다.
하지만 여전히 무명 예술가들은 사회적 관심에서 소외돼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젊은 예술가에게 가난과 아픔은 상징처럼 되었다.
영화 <러빙 빈센트>에서 우체부 조셉 룰랭은 빈센트의 죽음에 사회가 책임이 있다고 증언했다. 예술에 몰입하도록 무명 예술가를 보호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사회는 아픈 사람을 돌봐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김승섭 교수의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핵심 주장도 이와 같다.
이른 아침 스위스 바젤 미술관의 넓은 빈 방에서, 마르그리트를 그린 빈센트의 그림을 홀로 바라보며 나는 안타까움에 사로잡혔다. 빈센트가 물감의 과학을 좀 더 잘 알았다면 그의 건강과 예술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예술과 과학은 서로 더 깊이 소통해야 한다.
*참고 자료: [1] http://vangoghletters.org/vg/letters/let893/letter.html. [2] S. Everts, Chemical & Engineering News 94, 32-33 (2016). [3] J. Salvant Plisson et al., Colloids Surf. A 458, 134-141 (2014). |
[출처] :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 3.빈센트 반 고흐의 『피아노를 치는 마르그리트 가셰』(1890년) - 고흐의 연백 물감 -, 백색의 열정과 절망 / 한겨레신문, 2018. 2. 8.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31516.html#csidx618e7e9945118bfbee61740c4eae879
4.잭슨 폴록의 『가을의 리듬』 - 저 혼돈 속에 패턴이 있다
폴록의 <가을의 리듬>과 프랙털
미국 오리건대학 물리학자 리처드 테일러 박사는 폴록의 그림에서 숨겨진 패턴을 분석하여, 무질서한 듯한 패턴이 실은 ‘질서’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질서는 ‘프랙털’이었다.
프랙털은 1975년 수학자 브누아 망델브로가 발견한 ‘질서와 혼돈의 중간 지점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자기 복제 유사성이 있는 도형 패턴’을 말한다. 테일러 박사는 1999년 과학저널 <네이처>에 이 결과를 발표하여 예술과 물리학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잭슨 폴록의 <가을의 리듬>(1950년 작).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1942년 페기 구겐하임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며 예술계의 주목을 받기 전까지, 미국을 대표하는 추상 표현주의 예술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은 그저 평범한 화가였다. 그가 현대 미술의 대가로서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는 이전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기법을 착안했기 때문이다.
폴록은 캔버스 위에 물감을 흘리거나 뿌리는 ‘드립 페인팅’(Drip Painting)을 최초로 개발했다. 너무나 유명한 그의 기법은 1943년부터 1952년까지 전성기를 맞는다. 당시 미술계는 즉각적으로 새로운 예술의 범주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했다.
그의 유명세는 미술의 중심을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올 정도였다. 1956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그는 변덕스러운 천재 예술가로서 수많은 독창적인 작품을 남겼고, 현대 미술과 추상 표현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늘 소개할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한 폴록의 대표작 <가을의 리듬>(Autumn Rhythm)이다. 이 작품은 그의 미술적 기술과 감성이 가장 성숙했던 1950년 10월에 제작됐다.
검은색 페인트가 복잡한 선의 골격을 이루고, 흰색, 갈색, 청록색 선이 복잡한 그물을 구성해 시각적 리듬과 공간적 감각을 부여했다. 수평과 수직의 대조적인 선들이 만드는 혼돈과 조화가 특징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비현실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가을 풍경의 경쾌한 리듬처럼 색채와 선이 어울려 자연을 연상하게 한다.①
나는 지난주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하는 동안 현대미술관(MOCA)을 찾았다. 이곳에서 폴록의 작품 <넘버 1>(Number 1, 1949년 작)을 직접 감상할 수 있었다. 현대미술관에는 모두 네 점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데 그중 단연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 <넘버 1>이다.
폴록의 작품은 실제로 볼 때 감동이 더 크다. 멀리서 보면 복잡하고 무질서한 패턴으로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 서서 보면 다양하고 독특한 패턴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 마치 우주 멀리서 지구를 보면 별로 큰 특징이 없지만 가까이 갈수록 지표의 다양한 모습이 보이는 것과 같다. 작고 다양한 패턴들이 모여 큰 패턴들을 이루며 조화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폴록의 드립 페인팅은 당시 전통적인 화법에는 없던 네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첫째, 그림 작업에 이젤, 팔레트, 브러시를 사용하지 않는다. 둘째, 고급 물감 대신 값싼 공업용 페인트를 사용한다. 셋째,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수평적으로 작업한다. 넷째, 색채의 그물로 관찰자의 시선을 끊임없이 이끌어 구성 요소 전체로 초점을 분산시킨다.②
폴록이 새로운 미술의 양식을 개척할 수 있었던 비밀은 무엇일까? 나는 폴록의 성공을 그가 예술가지만 ‘과학자처럼’ 물질과 자연을 탐구했기 때문이라 믿는다. 그는 그 당시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과학을 예술 작업 과정에서 ‘직관적’으로 터득했다. 두 가지 근거를 들 수 있다. 하나는 그가 물감을 조합하고 제어할 줄 알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자연의 프랙털을 작품에 추구했다는 것이다.
흩뿌려진 페인트서 발견한 물리법칙
일부 미술사학자와 물리학자들은 폴록의 작품이 그저 우연의 산물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미국 보스턴대학 미술사와 하버드대학 수학자로 이루어진 공동 연구팀은 폴록의 작품을 분석하여 그가 페인트를 캔버스 위에 흩뿌리는 방식에서 물리법칙을 찾아냈다.③
연구팀은 빨간 페인트의 흔들리는 선과 소용돌이 모양이 특징인 작품 <무제>(Untitled, 1948~49년 작)를 분석하여, 두꺼운 유체가 로프의 코일처럼 스스로 접히는 ‘코일링’(Coiling)이라는 유체 불안정성 때문에 독특한 형상이 만들어져 있음을 알아냈다.
유체의 형태는 점도와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점성이 높은 액체는 빠르게 움직일 때 직선으로 떨어지지만 움직이는 평면에 천천히 부으면 구겨지거나 로프 형상을 이룬다. 우리 일상생활에선 꿀을 떨어뜨릴 때 바닥에 꿀의 줄기가 돌돌 말리는 코일링을 볼 수 있다.
이 현상을 다루는 최초의 물리학 논문은 1950년대 후반에 나왔다. 하지만 폴록의 1948~50년 작품을 보면 그가 이미 이 모든 것을 알았던 것 같다.
폴록은 여러 종류의 페인트를 잘 섞어서 코일링 효과를 적절히 조절했다. 브러시를 사용하거나 페인트를 붓는 대신, 막대로 페인트를 찍어 올려 연속적인 물줄기를 만들어 캔버스로 흘려보내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팔을 다른 속도로 움직이며 코일링의 양을 알맞게 조절할 줄도 알았다.
폴록의 작업은 물리학자가 유체역학 실험을 하는 것과 꽤 비슷했다. 물질의 특성에 따라 여러 조합을 고려해 최적의 조건을 찾는 과학 실험 같았다. 그는 깨닫지 못했을 테지만, 유체역학을 어떻게 활용할지 ‘직관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폴록은 드립 페인팅 기법을 고안하면서 결과적으로 물리법칙을 활용한 셈이다.
잭슨 폴록의 <넘버 1>(1949년 작). 미국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소장
자연을 닮은 ‘프랙털’ 패턴
미국 오리건대학 물리학자 리처드 테일러 박사는 폴록의 그림에서 숨겨진 패턴을 분석하여, 무질서한 듯한 패턴이 실은 ‘질서’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질서는 ‘프랙털’이었다.
프랙털은 1975년 수학자 브누아 망델브로가 발견한 ‘질서와 혼돈의 중간 지점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자기 복제 유사성이 있는 도형 패턴’을 말한다.
폴록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던 시기는 망델브로가 프랙털을 발견한 때보다 약 20~30년 앞선다. 폴록의 기법이 성숙할수록 프랙털의 복잡성은 매년 꾸준히 증가했다. 테일러 박사는 1999년 과학저널 <네이처>에 이 결과를 발표하여 예술과 물리학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④
프랙털은 정수가 아닌 ‘프랙털 차원’을 가진다. 선은 1차원, 평면은 2차원, 부피는 3차원이다. 종이 위에 그려진 프랙털 선은 1차원과 2차원의 중간 차원을 갖는다. 선의 복잡성이 클수록 선은 2차원에 가까워진다.
1943년 폴록의 초기 작품들은 프랙털 차원이 1에 가까웠다. 이후 10년 동안 폴록의 그림에서 프랙털 도형은 더욱 정교해져 차원이 1.7까지 증가했다. 이 결과는 폴록이 프랙털을 숙달하는 데 오래도록 노력했음을 뜻한다.
인간은 1.4 정도의 프랙털 차원에 익숙하다. 자연에 가장 널리 퍼진 프랙털 도형은 1.3에서 1.5 사이의 프랙털 차원을 가진다. 인간의 뇌는 혼돈과 질서 사이에 있는 자연의 프랙털 패턴을 좋아한다.
테일러 박사 연구에 따르면, 프랙털 도형을 보고 있으면 마음과 신체의 생리적 스트레스가 60%까지 감소될 수 있다고 한다.⑤ 프랙털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 약을 쓰지 않고도 스트레스를 현저히 줄일 수 있다.
예술과 과학은 자연을 추구한다
프랙털은 구름, 번개, 해안선, 파도, 나뭇잎, 강줄기, 은하계 등과 같이 자연의 형태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인간의 뇌는 자연을 닮은 패턴을 편안하게 느끼며 생리적 공명을 일으켜 안정을 찾는다. 프랙털은 자연의 본질이다. 무질서하게 보이는 폴록의 그림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의 패턴이 자연을 닮았기 때문이다.
물질과 자연을 탐구했던 폴록의 경우처럼, 과학자가 자연의 비밀을 밝히기 전에 예술가가 먼저 자연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자연은 인간에게 ‘아름다운’ 미적 대상이며 예술가는 ‘본능적으로’ 예술로 자연을 모방한다.
과학자도 자연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이해하고 활용한다. 자연을 탐구하고 끊임없이 그 본래 모습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예술과 과학의 본질은 같다.
*참고 자료: ①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488978. ② https://www.moca.org/collection/work/number-1. ③ A. Herczynski, et al. Physics Today 64, 32-36 (2011). ④ R. Taylor, et al. Nature 399, 422-422 (1999). ⑤ R. Taylor, Scientific American 287, 116-121 (2003) |
[출처] :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4.잭슨 폴록의 『가을의 리듬』 - 저 혼돈 속에 패턴이 있다> / 한겨레신문, 2018. 3. 15.
5.다빈치의 『모나리자』와 갈라짐 - 저 신비로운 미소가 수명을 단축했다
레오나르도의 스푸마토 기법은 모나리자의 은은한 미소를 만들어 주지만 결과적으로 이 기법을 쓸수록 얼굴 피부가 갈라지는 ‘크랙’ 현상을 피할 수 없다. 스푸마토 기법의 숙명은 아름다움을 영원히 가꾸고 싶지만 노화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과 닮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1503~1506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16세기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 도시들은 미술가들에게 매우 특별한 환경이었다. 당대의 뛰어난 과학적 발견들이 피렌체 미술가들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과학과 예술의 융합 토대 위에서, 미술가들이 원근법 법칙을 연구하기 위해 수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인체 구조를 탐구하기 위해 해부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과학과의 결합은 미술이 단순한 기능적 작업이 아니라 지적인 작업으로서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학과 예술이 함께 번창했던 16세기 피렌체에서 과학과 예술의 천재가 탄생할 수 있었다.[1]
이탈리아 토스카나 한 마을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h, 1452~1519)는 젊은 시절 당시 피렌체의 대표적 화가이자 조각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다. 베로키오 공방은 매우 번창했다.
레오나르도는 이곳에서 관찰법, 원근법, 안료 사용법 등 미술의 기초와 과학적 탐구 방법을 다양하게 배웠다. 자연과 사물에 대한 그의 뛰어난 관찰력과 표현력은 베로키오 공방에서 꽃 피웠다.[2]
미술가로 시작한 레오나르도의 호기심은 점차 깊어졌다. 창의적 실험 정신으로 미술, 음악, 의학, 과학, 발명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도전했다. 그의 업적은 다양한 실험이 가능했던 공방의 특별한 환경과 그의 천재성이 만난 결과였다. 그에게 예술은 자연을 탐구하는 방식이었다.
공방에서 30구 이상의 주검을 해부하며 인체를 탐구하거나, 곤충과 새의 비행을 관찰하며 비행기구를 고안하고, 파도와 조류의 법칙을 연구하며, 바위와 구름의 형태에 관심을 기울이고, 물체의 색채에 미치는 대기의 영향을 탐구하며, 초목이 성장하는 법칙과 음의 조화에 관한 연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자연에 대한 깊은 탐구는 레오나르도에게 예술의 기초가 되었다.[1]
모나리자 미소는 왜 신비한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그의 대표작 <모나리자> 앞엔 언제나 수많은 관람객으로 북적인다. 작품 명성에 비해 실제 그림 크기는 약간 작다. ‘리자’(Lisa)라는 이름을 가진 피렌체의 한 여인을 그린 그림으로 알려졌지만 진짜 모델이 누군지는 모른다.
이 그림이 유명한 이유는 그림 속 인물이 마치 살아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앞에 서면 마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마저 든다. 사물을 정확하게 관찰했던 레오나르도는 그림과 관찰자 시선의 작용을 고려하여 여인의 얼굴 그림을 신비롭게 표현했다고 한다.
왜 <모나리자>가 위대한 작품인지 살펴보자. 레오나르도의 그림에는 사물의 윤곽을 흐릿하게 처리하는 ‘스푸마토’(sfumato, ‘연기가 자욱한'(smoky)이란 뜻의 이탈리아어) 기법이 처음 사용된다. 스푸마토 기법으로 눈과 입술의 윤곽을 모호하게 남겨 표정의 신비로움을 더했다.[1]
그래서 그림 속 여인의 표정을 종잡을 수 없다. 희미하게 미소 짓는 얼굴은 슬퍼하는 것도 같고, 기뻐하는 것도 같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슬프면 그림도 슬프게, 행복하면 그림도 행복한 모습으로 보인다. 여인의 미소는 관찰자의 심리를 그대로 반사한다.
그림엔 사람들이 모나리자 얼굴에서 생동감을 느끼도록 하는 요소들이 숨어 있다. 모나리자 얼굴은 좌우가 비대칭인데 실제 사람 얼굴도 약간 비대칭이다. 그림에서 자신의 오른쪽을 향하는 모나리자의 얼굴과 왼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엇갈려 있다.
이것도 실제와 유사하다. 사진을 찍을 때도 사람들은 정면보다는 비스듬히 서서 얼굴 방향과 엇갈리게 시선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그림의 배경에도 비밀이 있다. 왼쪽 풍경의 지평선이 오른쪽보다 낮아 약간 기울어진 듯한 느낌이다.
이 때문에 관찰자가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얼굴 모습이 조금씩 다르게 보인다. 실제 사람의 얼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느낌이 고스란히 모나리자 얼굴에 담겨 있다.[1]
모나리자의 미소에 신비로움을 더해준 스푸마토 기법은 오랫동안 여러 번 물감을 덧칠한 결과다. 아주 섬세한 붓질로 안료의 두께를 미세하게 조절하여 스푸마토 효과를 얻어낸 것이다. 실제로 레오나르도는 모나리자를 1503년 처음 그리기 시작하여 4년 만에 거의 완성했지만 이후 여생 동안 여러 번 덧칠하면서 계속 다시 그렸다.
2010년 프랑스 과학자들은 형광 엑스선 분광법으로 <모나리자>를 분석하여 얼굴의 밝은 부분과 그림자 부분에서 여러 겹의 안료 층을 발견했다. 형광 엑스선 분광법은 작품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분석 원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엑스선을 쬐어 주면 원자 안에 있는 전자가 에너지를 흡수하면서 약간 들뜬 상태가 되었다가 다시 형광 엑스선을 내보낸다. 형광 엑스선의 에너지를 분석하면 물질의 화학 결합 정보를 알 수 있다.
유럽 방사광 가속기에서 실시한 분석으로 스푸마토 기법의 정체를 알아냈는데, 모나리자 뺨의 분홍색 바탕 위에 갈색 안료가 얇게 칠해져 있는 부분은 두께가 머리카락 굵기보다 1/3에서 1/50배까지 작았고 윤곽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다.
이렇게 얇게 안료 두께를 제어하려면 아주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다. 레오나르도가 혁신적인 예술가였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3, 4]
덧칠할수록 갈라진다
모나리자의 은은한 미소를 담아내기 위해 도입된 스푸마토 기법에서 안료의 갈라짐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덧칠하며 모나리자 뺨의 신비로운 미소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렇게 안료로 그린 그림 위에 여러번 덧칠하면 용매가 마르면서 안료의 ‘갈라짐’이 발생한다. 마치 건조한 땅이 갈라지는 것처럼.
가뭄 동안 땅이 갈라지는 현상과 햇볕을 오래 쬔 페인트가 갈라지거나 미술 작품의 안료가 갈라지는 현상의 원인은 같다. 물리학과 재료과학에서 안료가 갈라지는 현상을 ‘크랙’(crack)이라 한다.
안료가 마르는 동안 용매가 빠져나가면서 남아있는 용질의 ‘응력’(stress, 물질의 변형을 일으키는 외부에서 오는 단위면적당 힘)이 점차 증가하다가 어느 임계 응력값을 넘으면 순간적으로 크랙이 발생한다.
입자의 크기가 작을수록 견뎌야 하는 응력이 커지면서 임계 응력값을 넘을 가능성도 커진다. 미술 작품의 안료는 입자의 크기가 매우 작거나 완전히 녹은 상태여서 크랙 발생 가능성이 높다. 특히 안료가 두꺼워지면 임계 값을 넘기가 쉽다. 여러번 덧칠한 안료 층에서 크랙이 자주 발생하는 이유다.
실제로 모나리자의 사진을 확대해서 보면 얼굴과 가슴 부분에 크랙이 많다. 스푸마토 기법이 많이 활용된 얼굴 이마나 뺨 주변은 다른 곳보다 크랙이 더 많다. 2016년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 과학자들은 모나리자의 크랙이 땅의 갈라짐과 같다는 사실을 확인했다.[5]
작품의 숙명과 보존
크랙은 작품의 ‘지문’과 같다. 제작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기도 하고 오랫동안 안료 ‘노화’의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유한 크랙 패턴은 작품의 진위를 판정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최근 미술 작품에서 독특한 크랙 패턴을 연구하는 과학자도 있다.[6, 7]
크랙 패턴을 원래대로 보전하거나 크랙 발생을 완벽하게 억제하는 보존 기술은 아직 개발되어 있지 않다.
불행하게도 레오나르도의 천재적인 미술 작품은 대부분 미완성이며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레오나르도의 유명한 벽화 <최후의 만찬>도 원래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에서 식당으로 사용하던 긴 홀의 벽화로 그려졌다.
[1]
예수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던 성경 이야기를 매우 실감 나게 그린 이 작품이 실은 식당 천장에 그린 벽화였으니 보존 상태가 좋을 리 없다.
예술 작품은 불멸일까? 아니면 숙명이 있을까? 물질을 매개로 하는 예술 작품은 물질의 수명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인류의 귀중한 유산으로서 예술 작품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임무는 후대 인류에게 매우 중요하다.
안료가 마르면서 갈라지는 현상은 안료를 사용하는 미술 작품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크랙 발생의 원인을 이해하고 제어하는 새로운 과학기술 연구가 지금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레오나르도의 스푸마토 기법은 모나리자의 은은한 미소를 만들어 주지만 결과적으로 이 기법을 쓸수록 얼굴 피부가 갈라지는 ‘크랙’ 현상을 피할 수 없다. 스푸마토 기법의 숙명은 아름다움을 영원히 가꾸고 싶지만 노화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과 닮았다.
*참고 자료: [1] E. 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예경) [2] 강영주 외, <서양 미술 사전>(미진사) [3] P. Ball, Nature 466, 694 (2010) [4] L. de Viguerie, et al. Angew. Chem. Int. Ed. 49, 6125-6128 (2010) [5] F. Giorgiutti-Dauphine, et al. J. Appl. Phys. 120, 065107 (2016) [6] J. C. Flores, Soft Matter 13, 1352-1356 (2017) [7] M. Leang, et al. Soft Matter 13, 5802-5808 (2017) |
[출처] :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 5.다빈치의 『모나리자』와 갈라짐 - 저 신비로운 미소가 수명을 단축했다 / 한겨레신문, 2018. 4. 12.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40369.html#csidx4ebd02d686faa46887525ff79b008b3
6.피트 몬드리안의 『빨강, 검정, 파랑, 노랑, 회색의 구성』(1920년)
- 몬드리안과 직선, 세상은 선과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관점에서 인간의 비참함과 사회적 부당함은 불평등의 결과였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불평등이었고 이를 해결하는 것이 그의 예술 목표였다.
그는 크기와 색상과 관계없이 구성 요소가 ‘동등’하다면 항상 조화로운 구성이 가능하다 믿었다. 구성 요소가 서로 동등성을 획득할수록 인간 사회가 더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다.
피트 몬드리안의 <빨강, 검정, 파랑, 노랑, 회색의 구성>(1920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소장
네덜란드 추상 예술의 거장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의 그림은 단순하고 독특하다. 강렬한 검은색 선이 만들어내는 단순한 기하학적 패턴에 삼원색·무채색이 채워진 직사각형 그림을 보면 누구나 그가 그린 그림임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이렇게 단순한 그림을 그린 그가 미술사에선 가장 순수한 예술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가장 실용적인 예술을 탄생시킨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어떻게 저런 단순한 그림이 걸작이라는 평을 받는 걸까? 저 단순한 패턴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 단순함에 도달하기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몬드리안의 예술 세계엔 현대미술과 과학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실마리가 숨어 있다. 이제 그의 삶과 작품을 살펴보자.
그는 1872년 네덜란드 한 시골의 엄격한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마추어 화가였던 아버지와 화가였던 삼촌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암스테르담 미술아카데미에서 당시 유행했던 차분한 색조의 정물화와 풍경화 같은 미술 양식을 배우며 평범하게 성장했다.
1911년 프랑스 파리로 가서 당시 혁신적인 미술 양식을 여럿 접했는데, 특히 미술계를 주도했던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에 상당한 자극을 받았다. 1912년부터는 아예 입체주의에 정통하겠다는 다짐으로 본격적인 예술 인생을 시작한다.
1910년대 초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는 이미 상당한 발전과 변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 흐름을 완전히 따라잡지 못했다. 1914년 네덜란드에 머무는 동안 제1차 세계대전이 터져 이후 5년 동안 파리에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1]
사물의 본질에서 탄생한 새로운 예술
파리를 떠나 네덜란드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매우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그는 입체주의를 따라잡기 위해 전념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물의 형태가 수직과 수평의 대립으로 요약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 통찰은 그의 예술관을 완전히 바꾼다.
그가 발견한 수직·수평 패턴은 공간의 모든 위계를 없애고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아름다움으로 환원한다. 그는 피카소와 브라크가 가장 두려워했던 추상과 평면성을 받아들여 입체주의와 전혀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킨다.
1915년~1916년에 그린 그림에서 그가 완전히 새로운 기하학적 패턴으로 전진했음을 알 수 있다.[1]
그와 동일한 양식을 간파했던 예술의 동반자 테오 반 두스뷔르흐(Theo van Doesburg, 1883~1931)를 만난 것도 이때쯤이다. 1917년 둘은 네덜란드를 기반으로 ‘데 스테일’이라는 이름의 예술 그룹을 결성한다.
데 스테일은 네덜란드어로 ‘De Stijl’, 영어론 ‘The Style’로 ‘스타일’ 또는 ‘양식’을 의미한다. 이들이 창안한 새로운 예술 운동을 ‘신조형주의’라고 하는데, 네덜란드어로 ‘Neo-Plasticisme’, 영어로는 ‘The New Plastic Art’이며 ‘새로운 조형 예술’을 뜻한다.[2]
몬드리안의 <승리의 부기우기>(1943~1944년). 네덜란드 헤이그 시립미술관 소장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는 또 한 번 중요한 경험을 한다. 1919년 천문학자 에딩턴은 개기일식이 일어날 때 태양 중력으로 빛이 휘는 현상을 관측하여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이 소식은 파리에 널리 알려졌고 예술가들도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3]
이 예술가 중에는 몬드리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또한 과학과 수학이 급격하게 발전하던 당시 유럽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는 과학처럼 예술에서도 보편적인 원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의 형태 속에 숨겨진 불변의 실재를 예술로 드러내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의 기하학적 추상 회화 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철학적 예술 이념을 견고하게 구축한다. 그는 물리적 자연 세계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 추상 회화를 추구한다.
수직선과 수평선, 직선의 교차와 직사각형, 공간을 채우는 삼원색과 무채색의 조화를 탐구하며, 새로운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순수미술 장르를 개척한다.
1920년 그가 그린 최초의 신조형주의 구성을 보여주는 작품 <빨강, 검정, 파랑, 노랑, 회색의 구성>을 보자. 가로와 세로의 검은 선이 교차하고 삼원색이 적절히 배치된 구성이 이때부터 자리 잡았다.
그의 작품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기반이 되는 철학은 단순하지 않다. 그의 관점에서 인간의 비참함과 사회적 부당함은 불평등의 결과였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불평등이었고 이를 해결하는 것이 그의 예술 목표였다. 그는 크기와 색상과 관계없이 구성 요소가 ‘동등’하다면 항상 조화로운 구성이 가능하다 믿었다.
구성 요소가 서로 동등성을 획득할수록 인간 사회가 더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에게 예술은 불평등을 해소하는 수단이었다. 자유로운 예술이라면 구성 요소가 일정한 상호 동등성을 획득하고 순수한 관계를 회복하여 인간과 사회를 계몽할 수 있다. 그의 예술은 순수하고 동등한 ‘구성’을 예시로 보여주며 새로운 유토피아를 보여주는 청사진 역할을 한다.[4]
그는 새로운 이념을 알리고 싶어 100편이 넘는 글을 남겼다. 1926년 발표한 글 ‘신조형주의 일반 원리‘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회화의 기본 요소는 삼원색과 무채색의 직사각형 평면 또는 프리즘이다. 요소의 동등성이 중요하다. 크기와 색상이 동등한 가치를 가질 때 평형이 발생한다. 평형은 구성 요소가 배치되는 비율과 생생한 리듬을 만드는 관계에 의해 실현된다. 모든 대칭은 배제되어야 한다.’[4]
실제로 몬드리안 패턴에는 반사 대칭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5]
순수와 실용의 예술적 승리
1920년대 파리에서는 시공간이 결합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의 4차원 개념에 감탄하며 이 새로운 과학 지식을 자신의 예술에 통합하려는 예술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의 동반자 반 두스뷔르흐가 동적인 대각선을 도입한 것도 이 무렵이다. 과학적 보편성에 감탄한 몬드리안과 달리 반 두스뷔르흐는 회화 공간에 대각선을 도입하여 시공간의 존재를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몬드리안은 대각선을 파괴적인 요소로 간주하여 직선만을 고집했다. 극단적으로 예술의 본질과 순수함을 추구한 몬드리안은 대각선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신조형주의를 이끌던 둘은 대각선 도입을 두고 벌인 갈등으로 1925년 결별한다.[3]
이후 몬드리안은 독자적으로 신조형주의를 발전시켜 나간다. 1920년대 신조형주의 회화 어휘를 거의 완성한 그는 1930년대에 이르러 선·면·색의 정체성까지 없애려 했다. 1940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이후 현대적인 도시 문화와 재즈 음악에 심취하며 점차 이전의 엄격한 구성 원칙을 버리고 화려하고 경쾌한 구성 방식을 채택한다.
1940년대에 그는 면을 구분한 검은 선을 삼원색으로 채우고, 선·면·색을 뒤섞는다. 초기 작품에서는 수직과 수평의 직선을 교차시켜 역동적인 정반합 대립을 추구했지만, 이제 그 대립의 관계를 다시 해체한 것이다. 당시 헤겔의 변증법을 접한 그는 공간의 역동적 긴장이 자연스럽게 평정될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1]
1944년 뉴욕에서 생을 마감한 그의 마지막 유작인 <승리의 부기우기>(1943~1944년)에서 과거의 모든 시도를 뛰어넘기 위해 고심 끝에 마름모 형태의 그림 틀을 도입한다. 그가 마지막 작품에 ‘승리’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 그는 대각선을 시도했던 옛 동료와 예술적 화해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직선을 고집했던 자신의 예술관(‘정’)을 반추하며 대각선을 도입했던 동료와 갈등(‘반’)을 거쳐 마지막 승리(‘합’)를 얻는다.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변증법적 완성을 이룬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전 작품들 또한 기울여보면 대각선이 나타나며, 직선과 대각선에 심미적 차이는 없다.[6]
몬드리안은 신조형주의 이념을 통해 회화와 건축의 통합을 기대했다. 미술이 분해되어 건축을 통해 환경에 흡수된 유토피아를 꿈꿨다. 실제로 오늘날엔 그래픽 디자인과 건축 분야에서 몬드리안 패턴을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현대적인 건물에서 몬드리안 패턴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신조형주의 이념을 3차원 물리 공간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와 논의가 활발하다. 그만큼 그의 기하학적 패턴은 보편성과 실용성이 뛰어나다. 몬드리안 패턴은 컴퓨터로도 쉽게 재현할 수 있다.[7]
몬드리안은 사물과 공간의 본질을 파고들어 아름다움에 더 가까이 다가갔고 새로운 예술의 돌파구를 찾았다. 그는 과학의 보편성에 영향을 받아 예술의 보편성을 찾고자 노력했고 마침내 새로운 예술을 창조할 수 있었다. 순수와 실용을 모두 성취한 그야말로 진정한 예술의 승리자가 아닐까.
*참고 자료: [1] 할 포스터 외, <1900년 이후의 미술사>(세미콜론) [2] 강영주 외, <서양 미술 사전>(미진사) [3] S. Michalowski and G. Smith, Nature 470, 38 (2011) [4] L. Veen, International Journal of Art and Art History 5, 1 (2017) [5] Editorial, Nature 555, 414 (2018) [6] R. Taylor, Nature 415, 961 (2002) [7] J. Stevanov and J. M. Zanker, Leonardo (in press) |
[출처] :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 6.피트 몬드리안의 『빨강, 검정, 파랑, 노랑, 회색의 구성』(1920년) - 몬드리안과 직선, 세상은 선과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 한겨레신문, 2018. 5. 17.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45160.html#csidx9da2b59722079da9e6e5018593a697c
[출처]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Ⅰ - ▣웨스터룬드2성단▣클림트-키스와 황금▣고흐-연한물감▣잭슨 폴록-혼돈속의 패턴▣『모나리자』-갈라짐▣몬드리안-직선|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