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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비극
Ⅰ. 머리말
1. 연구의 목적
1392년 7월 17일에 조선의 시조로 등극한 이성계는 1년쯤 뒤에 명나라 황제 주원장을 접촉하였다. 위화도 회군의 전모와 아울러서 자신의 조선 개국과 초대 국왕 즉위에 대한 인준을 요청하는 글을 적어, 전 밀직사 조임趙琳, ?~1408으로 하여금 명나라 수도 금릉에 들어가 주원장에게 전하게 하였다.1
두 달쯤 뒤에 주원장이 자신의 위화도 회군에 대한 칭송과 더불어서 자신의 조선 창업과 국왕 즉위를 인준하는 칙서를 보내오자, 이성계는 곧바로 감사하는 회신을 보냈다. 정도전을 시켜서 들여보낸 그 글에, “억만년이 되어도 항상 조공하고 축복하는 정성을 바치겠다.”는 다짐이 적혀 있었다.2
이로써 굴신屈身을 감수하는 사대외교가 개시되니, 명나라의 후안무치한 횡포로 임금과 백성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600년 전의 조상들이 명나라의 극악무도에 시달린 흔적이 즐비하다. 명나라 황제들과 그들의 수족들은 정복자나 점령군처럼 조선을 착취하였다. 그 중심에 나이어린 화자火者 149명과 소녀 114명(미녀 16명, 요리사 42명, 창가녀 8명, 하녀 48명)을 입맛대로 데려다가 소모품처럼 쓰고 버린 만행이 있었다.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에 따르면, 미녀로 진헌된 공녀貢女들의 부모형제도 ‘황친’이라는 이름으로 숱한 고초를 겪었다. 황제에게 바쳐진 딸, 동생, 혹은 처제가 죽은 뒤에도 황제의 초청을
1 『太祖實錄』 卷1, 太祖 1年 8月 29日. “遣前密直使趙琳赴京進表曰.”
2 『太祖實錄』 卷2, 太祖 1年 10月 25日. “遣門下侍郞贊成事鄭道傳, 赴京謝恩, 獻馬六十匹.”
[일반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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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거나 임금의 명으로 외교사절로 뽑혀서 더위·추위·바람·눈·비 등과 싸우며 먼 길을 다녀와야
하였다. 그런데 명나라 황제들의 요구로 조선에서 진헌된 공녀들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좀
더 자세히 소개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도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측면들이 꽤 보인다. 대표적인
것 세 가지만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황제의 명을 받고 나와서 미녀들을 뽑아간 명나라 사신들의 오만과 탐욕이 제대로 소
개되지 않았다. 둘째로, 진헌된 처녀들의 아버지·오빠·형부 등이 다양한 방법으로 국익에 기여한
측면을 조명한 연구는 많으나, 그들이 고생한 부분을 조명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셋째로, 미
녀로 뽑혀 들어간 황씨 처녀의 임신경험이 황제에게 탄로 나 하마터면 심각한 외교문제가 야기될
뻔하였던 위기상황을 자세히 다룬 연구를 찾아보기 어렵다.
1년 전에 필자가 「(명나라 황제들이 조선의) 꽃다운 청춘들을 제 맘대로 데려갔다.」라는 제목으
로 공녀 진헌과 송환을 자세히 소개하였으나, 영락제 재위기간(태종 8년부터 세종 6년까지)에 진헌된 여덟
공녀의 비극적 말로는 충분히 다루지를 못했다. 관련된 자료들이 『태종실록』과 『세종실록』 곳곳에
두서없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어서, 그 맥락과 연결고리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3.
그러므로 이 연구에서는 영락제의 명을 받고 나온 명나라 사신들이 미녀들을 직접 간택한 과
정, 황제에게 미녀들이 진헌된 이후에 태종이 황친들을 외교사절로 활용한 내역, 그리고 태종 연
간에 미녀로 뽑혀서 황제에게 바쳐진 공녀 여덟 명의 비극적 최후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해보겠다.
나머지 8명은 진헌된 이후의 기록을 찾기 어렵거나 비극적 삶과 거리가 멀어서 고찰 대상에서 제
외하겠다. 따라서 이 연구의 주된 목적은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을 토대로 태종 연간에 명나라
영락제에게 바쳐진 여덟 명의 공녀와 관련된 기록 가운데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부분들을 확인이
가능한 범위에서 자세히 밝히는 데 있다고 하겠다.
2. 선행연구 현황
조좌호는 1960년에 「이조 對명 공녀考-한국 여인 애사의 일척」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조선 초
기 공녀 연구의 교두보를 마련하였다.4 조좌호의 논문은 『조선왕조실록』 국역본이 나오기 전에 화
자와 공녀의 진헌을 차례로 조명한 것인데, 실록 원문의 행간까지 섬세하게 읽어낸 안목과 통찰이
매우 뛰어나다. 다만, 가장 먼저 영락제에게 바쳐진 여덟 처녀의 비참한 최후를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지 않은 점은 ‘옥의 티’로 지적할 수 있겠다.
그보다 3년 전에 유홍렬이 「고려의 원에 대한 공녀」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나, 조선으로부터
명나라에 바쳐진 공녀들은 다루지 않았다.5 조좌호의 연구 이후로 40년이 지나도록 조선 초기 공
3 조병인, 『세종의 苦(고): 대국의 민낯』(서울: 정진라이프, 2018), pp. 19~81.
4 조좌호, 「이조 對명 공녀考: 한국 여인 애사의 일척」, 『해원 황의돈 선생 고희기념 사학논총』(동국대학교 사학회 황의돈 선생 고희기념 논총편
찬회, 1960), pp. 307~342.
5 유홍열, 「고려의 원에 대한 공녀」, 『진단학보』18(진단학회, 1957), pp. 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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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에 대한 연구가 없다가, 2000년대 초반에 정구선이 조선 초기의 공녀 역사가 포함된 두 권의 저서를 연달이 내놨다.6 하지만 마찬가지로 영락제에게 공녀로 바쳐진 여덟 처녀의 비참한 말로는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을 뿐더러, 본의 아니게 황제와 친척으로 엮여서 갖은 고초를 겪은 황친皇親들의 애환을 다루지 않았다.
정구선의 두 번째 저서가 출간되고 2년쯤 뒤인 2006년에 조선 초기의 진헌녀들을 포함한 공녀의 역사를 여성학적 관점에서 조명한 이숙인의 연구가 발표되었다. 이숙인은 공녀의 역사를 ‘중세기 한국을 보는 창’이라며 네 가지 관점을 밝혔다. 첫째로, 1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공녀에는 국가의 욕망과 남성의 욕망이 응축되어 있다. 둘째로, 공녀는 한 역사시기에 자행된 특수한 사건에 불과한 것이기보다, 용어나 내용은 다르지만 언제나 있어왔고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현재성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셋째, 그녀 자신들은 제물이 되었지만, 한편에서는 그녀들로 이익을 챙기는 다양한 집단을 가능케 했다.7
이숙인은 논문의 목차를, “공녀의 역사”, “공녀 사냥에 온 나라가 뒤집히다.”, “끌려간 공녀들 어떻게 되었나?”, “누이 팔아 출세하다.”, “공녀의 ‘조국’”, “공녀: 변방 ‘국민’, 이등 ‘시민’” 등으로 구성하여, 약소국가 여성들의 기막힌 참담과 위정자들의 비정한 위선을 잘 드러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조선 초기 영락제에게 공녀로 진헌된 여덟 처녀의 참혹한 최후는 깊이 다루지 않았다.
그 이후 5년 가까이 후속 연구가 없다가, 2011년부터 2018년까지 8년 동안 임상훈이 조선 초기 공녀들에 대한 5편의 연구를 연달아 발표해, 이전까지 가려졌던 공녀의 역사를 잘 밝혀주었다.8 2011년 발표된 논문은 본문이 중국어로 되어 있어 참고하는데 한계가 있지만, 후미에 국문초록이 충실하게 첨부되어 있어서 줄거리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그 외에, 2012년과 2017년에 태종과 세종 연간에 여동생을 둘씩이나 진헌한 대가로 승승장구한 한확韓確, 1400~1456의 행적과, 그에 의해 황제에게 바쳐진 한씨 자매의 기구한 운명을 다채롭게 조명한 한희숙의 연구가 발표되어, 공녀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9 또, 2019년에는 서인범이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다가 영락제가 죽자 함께 순장된 언니 한씨와, 선덕제(5대)의 후궁이 된 이후 정통제(6대)와 경태제(7대) 연간에 명나라 황실에서 어른 대접을 받으며 모국인 조선의 국익향상에 기여한 동생 한씨(한계란)의 이야기를 단행본으로 내놨다.10
6 정구선, 『공녀: 중국으로 끌려간 우리 여인들의 역사』(서울: 국학자료원, 2002), pp. 14~103; 정구선, 『중세시대의 환관과 공녀』(서울: 국학자료원, 2004), pp. 113~204.
7 이숙인, 「공녀: 변방 ‘국민 이동 ’시민」, 『여성이론』14(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6), pp. 166~184.
8 임상훈, 「어여지란(魚呂之亂) 연구」, 『전북사학』39(전북사학회, 2011), pp. 369~390; 임상훈, 「명초 조선 공녀의 성격」, 『동양사학연구』122(동양사학회, 2013), pp. 173~208; 임상훈, 「명초 조선 공녀 친족의 성장과 대명 외교활동-권영균과 한확을 중심으로」, 『명청사연구』39(명청사연구회, 2013), pp. 1~38; 임상훈, 「명초 조선 여인들의 명궁에서의 삶」, 『여성과 역사』 27(한국여성사학회, 2017), pp. 1~21; 임상훈, 「대명황제의 조선인 총비-권현비」, 『역사문화연구』67(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8), pp. 215~240.
9 한희숙, 「조선 초기 한확의 생애와 정치활동」, 『한국인물사연구』18(한국인물사연구회, 2012), pp. 261~298; 한희숙, 「조선 초 명 선덕제 후궁 공신부인 한씨가 조선에 끼친 영향」, 『여성과 역사』26(한국여성사학회, 2017), pp. 142~169.
10 서인범, 『자금성의 노을: 중국 황제의 후궁이 된 조선 자매』(파주: 역사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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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비극
Ⅱ. 영락제의 미녀 요구와 태종의 진헌
1. 경차관 파견과 명나라 사신의 오만
태종이 즉위하고 8년째 되던 해 4월, 명나라로부터 다섯 명의 사신이 왔다. 그 전에 조선에서
들여보낸 말 3천 필의 값을 지불한다는 칙서를 가져온 것인데, 공식 의전이 끝나자 몰염치한 요구
를 내놨다. 황제로부터, “조선 국왕에게 어여쁜 여자 몇 명을 뽑아달라고 말해서 데려오라.”는 지
시가 있었던 사실을 문서가 아닌 말로 밝힌 것이다.11
사신으로부터 영락제의 요구를 전달받은 태종은 곧바로 대신들에게 임무를 분담시켰다. 이어
서 금혼령을 선포하고, 각 도에 경차관을 내보내 미인들을 뽑아오게 하였다.12 천민이나 노비가 아
니면서 나이가 13세부터 25세 사이인 양가집 처녀 중에서 미색이 있는 여자들을 뽑되, 노비가 없
는 양반과 서민의 딸은 제외하게 하였다. 아울러 나라에서 경차관을 내보냈다는 소문에 민심이 동
요하거나 어린 딸을 몰래 혼인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차관들에게 특명을 내렸다.
그 요지는, 지정받은 지역에 도착하면 감사의 지시를 기다리지 말고 곧바로 전담자(차사원)를 지
정하고 규정에 따라 역마를 주어 각 고을에 보내서 수령의 보고를 받게 하라는 것이었다. 만약 지시
를 어기고 딸을 혼인시켰거나 숨긴 자가 있으면 수령까지 사법절차에 회부하라고 하였다. 위반자
가 4품 이상이면 감사에게 보고하고, 5품 이하이면 경차관이 직접 사법절차를 진행하라고 하였다.13
그런데 민심이 흉흉하였던지, 각도에 경차관을 파견하여 처녀를 간택하는 일이 농민을 소요시
키지 않도록 중등 이하의 처녀는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그로부터 열흘쯤 뒤에 임금이
왕비와 함께 내전에서 친히 처녀들을 면접하였다. 영의정부사 하륜河崙, 1347~1416과 좌의정 성석린
成石璘, 1338~1423이 창덕궁 광연루 아래에 나아가 서울에서 선발된 처녀들 가운데서 일흔세 명을 선
발하였다. 일주일쯤 뒤에 임금이 광연루 아래에 나아가 친히 처녀들을 골랐다.
닷새 뒤에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여 나라가 국장 준비로 분주하였을 기간에도 처녀간택 절차가
계속되었다. 얼마 뒤에 전국 각지에서 미녀로 선발된 서른 명의 처녀가 서울로 올라왔다. 출신지
역은 경상도 여섯 명, 전라도 네 명, 충청도 세 명, 개성 유후사 열두 명, 경기도 네 명, 황해도(풍해
도) 한 명이었다.
그 가운데서 의정부의 정승들이 7명을 뽑았다. 부모의 3년 상이 끝나지 않았거나 형제가 없는
외동딸들은 돌려보냈다. 열흘쯤 뒤에 사신들을 경복궁으로 초청하여 두 정승과 함께 마음에 드는
처녀들을 고르게 하니, 사신단의 대표 격인 황엄黃儼, ?~1423이 데려갈 만한 미색이 없다며 심술을
부렸다.
목청껏 고함을 지르며 경상도에 가서 처녀들을 뽑아온 박유를 결박하더니, “나라의 절반인 경
11 『太宗實錄』 卷15, 太宗 8年 4月 6日. “朝廷內史黃儼·田嘉禾·海壽·韓帖木兒等來.”
12 세부적인 간택절차는 박미선의 논문 「조선 초 간택의 시행 배경과 운영」, 『조선시대사학보』 71(조선시대사학회, 2014), pp. 129~154 참조.
13 『太宗實錄』 卷15, 太宗 8年 4月 16日. “置進獻色採童女, 禁中外婚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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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도에 미색이 왜 없겠느냐?”고 다그쳤다. 박유가 불량한 마음을 품고서 일부러 못생긴 처녀들을 뽑아왔다고 억지를 썼다. 그리고서도 박유에게 곤장을 치려다가 그만두더니, 눈을 부라리며 가마에 걸터앉아 정승을 능멸하였다.
임금이 보고를 받고서 지신사 황희黃喜, 1363~1452를 성급히 보내 가까스로 황엄의 분노를 가라앉혔다. ‘어린 처녀들이 부모 곁을 떠나게 된 것을 상심하여, 끼니를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먹어도 음식 맛을 몰라서 외모가 수척해졌다.’고 둘러댄 뒤에 처녀들을 중국식으로 화장을 바꿔서 다시 고를 것을 권하니 황엄이 화를 풀었다.
그런데 일곱 처녀를 중국식으로 화장을 시켜서 사신들에게 다시 보이던 날 세 명의 처녀가 목숨을 건 연기를 펼쳤다. 사전에 서로 은밀히 짰던지, 대담하게도 죽음이 따를 수도 있는 연기를 태연하게 해냈다. 평성군 조견趙狷, 1351~1425의 딸은 중풍 환자처럼 입을 삐뚜름하게 하고 있었고, 이조참의 김천석金天錫, ?~1411의 딸은 중풍 환자처럼 머리를 흔들었으며, 전 군자감 이운로李云老의 딸은 장애인처럼 다리를 절룩거렸다.
황엄 등이 보고서 다시 또 격앙된 목소리로 분통을 터뜨리자, 태종이 조견과 이운로에게 딸을 잘못 가르친 죄를 물어서 각각 개령(경북 김천)과 음죽(경기 이천)으로 귀양을 보내고, 김천석은 직무를 정지시켰다. 대신 처녀들 셋은 퇴짜를 맞았으니, 아버지들도 속으로는 각자의 딸들을 기특하게 여겼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간택에 실패한 태종은 각 도에 공문을 보내고 순찰사들을 파견해 처녀들을 다시 뽑아오게 하였다.
지난번에 감사, 도순문사, 경차관 등이 처녀들을 신경써서 선발하지 아니하여 보고에서 빠진 자가 많다. 수령과 품관, 아전, 하급 관원, 향교 생도 및 일반 백성의 집에 미녀가 있으면 모두 선발하여 정결하게 머리를 빗기고 단장시켜 사신의 검열을 기다리도록 하라. 만일 처녀를 숨기고 내놓지 않았거나, 꾀를 써서 선발을 피하게 한 자가 있으면, 예외 없이 엄하게 다스려라. 통정(정3품 문관) 이하는 순찰사가 직접 사법절차를 진행하고, 가선(종2품 문무관) 이상은 중앙에 보고하되, 모두 ‘왕명을 거역한 죄’를 적용하여 직첩(관직 임명장)을 회수하고 가산을 몰수하라.14
순찰사들이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떠나는데, 황엄이 사람을 내보내 엿보게 하였다. 이틀 뒤에 황엄을 다시 경복궁으로 초청하여 중국식으로 치장한 처녀들을 보여주었다. 황엄이 한 명씩 살펴보고 나서, ‘쓸 만한 처녀는 서너 명뿐이라.’고 투덜대며 서른한 명을 뽑더니 인원이 너무 적다며 자신이 직접 지방에 가서 처녀를 뽑겠다고 하였다.
이틀 뒤에 한첩목아韓帖木兒와 기원奇原이 지방에 가려고 하직 인사를 하러 대궐에 들어오자, 태종이 두 사람을 말렸다. 지방에 가본들 모두 농가의 자식들뿐이라서 미녀를 고르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알아듣게 구슬렸다. 두 사람이 돌아가서 황엄에게 그대로 전하니, 황엄이 펄쩍 뛰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자기들이 지방에 가겠다고 한 것은 임금을 떠보기 위해서였다며 조만간 명
14 『太宗實錄』 卷16, 太宗 8年 7月 3日. “分遣各道巡察司, 更選處女, 又使內官一人從之, 名曰敬差內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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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비극
나라로 돌아가겠다고 심통을 부렸다. 태종이 듣고서 황희를 보내 공손한 말로 듣기 좋게 만류하
니, 황엄이 비로소 누그러졌다.15
같은 날 사간원에서 네 가지 재변災變을 내세워, 처녀를 숨긴 자 외에는 처벌하지 말 것을 건의
하였다. 첫째로, 사신이 서울 근교에 도착하던 날 지진이 있었다. 둘째로, 전국 각지에서 처녀들을
뽑아 올리기 시작한 이래로 음산하고 요사스러운 기운이 천지에 번졌다. 셋째로, 순찰사들을 떠나
보낸 뒤로 여름과 가을의 환절기에 황충이 벼를 갉아먹었다. 넷째로, 선선한 바람이 연일 불어 재
앙에 속하는 이변異變이 반복하여 나타났다.
사간원의 건의가 받아들여졌는지 여부에 대하여는 실록에 관련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처녀 간택은 계속되었다. 전국에서 미녀로 뽑혀온 여든 명을 황엄 등이 경복궁에서 40여 일 동안
연달아 여섯 차례 심사하여 최종적으로 일곱 명을 골랐다. 이때에 황해도 평주(평산)의 지평주사 권
문의權文毅가 간택된 딸을 보내지 않으려고 관원을 속여서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처음에 황해도 순찰사 여칭呂稱, 1351~1423이 돌아와서 황엄에게, ‘권문의의 딸이 권집중의 딸보
다 자색이 못하지 않다.’고 슬그머니 일러주었다. 황엄이 듣고서 권문의의 딸을 속히 보기를 원했
는데, 권문의가 딸의 병을 칭탁하고 고의로 시간을 끌었다. 의정부에서 지인知印 양영발을 보내 독
촉하니 권문의가 마지못해서 딸을 치장시켜 보내는 척하다가 양영발이 말을 달려 먼저 떠나가자
딸을 머물게 하고는 이내 보내지 않았다.
황엄이 듣고서 주변 사람들에게 들리도록 “국왕이 저 정도의 하급 관리도 제재하지 못하니, 세
도가에 미색이 있다 한들 부모가 내놓겠느냐?”고 이죽거렸다. 태종이 전해 듣고 성이 나서 권문의
를 순금사에 가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5일이 지나도록 권문의의 딸이 서울에 도착하지 않고,
황엄은 막말을 해가며 성질을 부리자, 태종이 여칭을 순금사에 가뒀다.16
결과적으로 권문의의 딸은 뽑히지 않았으니, 딸을 지키기 위해 사신과 임금을 속이는 모험을 감
행한 권문의의 용기가 가상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때에 만약 권문의가 자신의 딸을 제 때에 순순히
올려 보내서 황엄의 심사를 통과하였다면 그대로 명나라로 뽑혀 들어갔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2. 미녀 5명 선발과 진헌사절단 출발
권문의의 소동이 있은 이후로 사신들이 경복궁에서 두 차례 더 처녀들을 살펴보고 그중에서
오십 명을 골랐다. 며칠 뒤에 사신들이 다시 경복궁에서 세 차례 처녀들을 보고 마흔네 명을 골랐
다. 닷새 뒤에, 창덕궁에 거처하던 태종이 경복궁에 가서 사신 황엄과 전가화田嘉禾와 함께 처녀들
을 보고 최종적으로 다섯 명을 뽑았다.
다섯 처녀 모두 현직 관원들의 딸이었으며, 18세 1명(권씨), 17세 2명(임씨, 이씨), 16세 1명(여씨), 14
15 『太宗實錄』 卷16, 太宗 8年 7月 5日. “黃儼等再擇處女.”
16 『太宗實錄』 卷16, 太宗 8年 9月 3日. “下呂稱于巡禁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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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최씨) 1명이었다. 출신지 분포는 한성부 3명(권씨, 여씨, 임씨), 인천 1명(이씨), 수원 1명(최씨)이었다. 권씨만 아버지가 죽었고, 나머지 네 명은 아버지가 살아있었다.
다섯 처녀가 최종 선발되는 사이 사신 기원의 요청으로, 여칭이 석방되고 권문의도 풀려났다. 며칠 뒤에 태종이 최종 선발된 다섯 처녀에게 술과 과일을 내려주었다. 잇따라서 채단으로 지은 중국식 여성복장을 나눠주고는 승정원의 대언(승지)들에게 황엄의 여자 보는 안목을 비웃었다.
황엄이 뽑은 처녀들의 인물이 너무 형편없다. 임씨의 딸은 꼭 관음보살의 화상같고 애교와 자태가 없으며, 여씨는 입술이 넓고 이마는 좁은데, 그런 여자들이 무슨 미인이냐.17
하지만 설령 사신들이 추녀들을 뽑았어도 따라야 하였기에, 다섯 처녀의 집에 혼수비용으로 쌀과 콩 30석과 상포 1백 필씩을 내려주었다. 황엄도 처녀들에게 필요한 물품의 목록과 동행할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서 태종에게 보냈다. 물품 목록에는 추위에 대비한 방한용 모자, 버선, 솜옷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며칠 뒤에 처녀 권씨 등 다섯 명이 왕비를 방문해 하직 인사를 드리니, 왕비가 후하게 위로하였다. 9일 뒤에 예문관 대제학 이문화李文和, 1358~1414를 진헌사로 임명하여 사신들과 함께 처녀들을 데리고 명나라로 들여보냈다. 이문화는 다섯 처녀에 포함된 이씨의 큰아버지였다. 이문화 외에 네 명이 보호자 겸 물품 책임자로 따라갔다. 권씨는 오빠 권영균權永均이, 여씨는 아버지 여귀진呂貴眞, ?~1410이, 최씨도 아버지 최득비崔得霏, ?~1428가 동행하였으나, 임씨는 보호자 없이 혼자서 떠났다. 아버지 임첨년任添年이 병석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태종이 처녀를 진헌하는 사실을 숨기려고, 황제에게 종이를 바치러 들어가는 행차처럼 가장시켰다. 앞서 황제가 요구해온 종이 2만 1천 장 가운데 두꺼운 흰색 종이 6천 장을 포장해 보내서, 처녀들이 탄 가마들이 백성들의 시야를 가리게 하였다.
황엄이 서울을 떠나면서 임금에게, 2등으로 매겨진 처녀 스물일곱 명의 혼인을 금할 것을 요구하였다. 임금이 듣고서, 여자가 혼기를 놓치면 곤란해진다며 금지의 기한을 정해줄 것을 청하자, 황엄이 이문화가 돌아올 때에 기한을 알려주겠다고 대답하였다.
이문화가 종이 뭉치와 더불어서 함께 가져간 문서에는 다섯 처녀의 생년월일, 출생시간, 부친의 관직, 본관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 그 뒤로 하녀 열여섯 명과 화자 열두 명을 함께 보낸다는 문구가 짧게 덧붙여져 있었다.
처녀들이 출발하던 날 부모형제와 친척의 울음소리가 큰길을 메우자, 길창군 권근權近, 1352~1409이 그 현장의 애절하고 기막힌 광경을 시로 써서 남겼다. 그날 이전에 세간의 아이들 사이에 동요
17 『太宗實錄』 卷16, 太宗 8年 10月 11日. “上如景福宮, 與黃儼、田嘉禾等, 更選處女, 被選者凡五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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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비극
가 널리 퍼져 있었는데, 권근이 또 다른 시를 지어서 그 의미를 애절하게 풀이하였다. 18
10여일 뒤에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나이가 19세 이하인 모든 처녀, 사신이 혼인시키지 말
라고 낙점한 처녀, 소집명령에 응하지 않은 처녀들의 혼인을 금하게 하였다. 말하자면 나이가 스
무 살을 넘어 혼기를 놓친 처녀들 가운데 사신이 혼인을 금하라고 낙점한 처녀가 아니면서 소집
명령에 착실히 응한 노처녀들만 혼인이 가능해진 것이다.
3. 황제의 불만과 미녀 2명 추가진헌
이문화가 소년 소녀 서른 명과 함께 서울을 떠나고 5개월쯤 뒤인 다음해 4월에 다섯 처녀의 소식
이 전해졌다. 전년 5월에 태조가 죽어서 영락제가 조문사절을 보내준 것에 감사를 표하러 들여보낸
영안군 이양우李良祐, 1346~1417와 여천군 민여익閔汝翼, 1360~1431이 정보를 가져온 것이다. 그 내용인즉슨,
마침 순행 차 북경에 머물던 영락제가 권씨 처녀와 그녀의 오빠 등에게 벼슬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이양우와 민여익은 1등으로 매겨진 권씨가 먼저 부름을 받고 황궁에 들어가 현인비顯仁妃19 작
위를 받고, 처녀들을 따라간 혈육들도 황제로부터 관직과 예물을 받은 사실만 보고하였다. 하지만
나머지 네 처녀도 이내 황제에게 불려 들어가 순비順妃(임씨), 소의昭儀(이씨), 첩호婕好(여씨), 미인美人(최
씨) 등의 작위를 받았다.20
하지만 황엄이 다섯 처녀를 고른 뒤에 태종이 괜히 황엄의 심미안을 비웃은 것이 아니었던가 보
다. 이양우와 민여익이 돌아오고 20여 일쯤 지나서, 태감 황엄·감승 해수海壽·봉어 윤봉尹鳳 등 세 명이
황제가 조선의 국왕 내외에게 내리는 특별선물을 가지고 사신으로 왔는데, 황엄이 구두로 앞서 들여
보낸 다섯 처녀에 대한 황제의 불만과 더불어서 미녀 두 명을 더 들여보내라는 황제의 지시를 전했다.
지난해에 너희들이 들여보낸 처녀들은 모두 그다지 곱지가 않았다. 살찐 여자는 너무 뚱뚱하고, 마른 여자는 너무 가냘프고, 작은 여자는
너무 작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너희 국왕의 성의를 생각해서, 비妃로 봉할 자는 비로 봉해주고, 미인美人으로 봉할 자는 미인으로 봉
해주고, 소용昭容으로 봉할 자는 소용으로 봉해주었다. 그러니 혹시 뽑아놓은 처녀가 더 있으면, 한두 명을 다시 들여보내라. 21
모든 책임은 처녀들을 잘못 뽑은 사신들에게 있다고 하여도, 진헌한 처녀들을 황제가 탐탁지
않게 여겼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2주일쯤 지나서 황엄과 해수가 명나라로
출발하자, 임금이 모화루에 나아가 전송하였다. 그 자리에서 황엄에게 전년에 뽑은 처녀들의 혼
인을 허락해줄 것을 청하자, 황엄이 동의하면서, ‘만약 절색을 얻거든 즉시 보고하되, 반드시 다른
18 『太宗實錄』 卷16, 太宗 8年 11月 12日. “黃儼等以處女還京師, 上餞于慕華樓.”
19 『태종실록』 9년 4월 12일의 기사에는 이양우와 민여익이 임금에게, 황제가 권씨를 ‘현인비(顯仁妃)’로 책봉하였다고 보고한 것으로 적혀 있
으나, 영락제실록인 『명태종실록(明太宗實錄)』과 명나라 역사서인 『명사(明史)』에는 권씨가 ‘현비(賢妃)’로 책봉된 것으로 적혀있다. 임상훈,
앞의 논문(2017), 각주 16 참조.
20 임상훈, 앞의 논문(2017), p. 8.
21 『太宗實錄』 卷17, 太宗 9年 5月 3日. “太監黃儼、監丞海壽、奉御尹鳳至, 上以淡彩服率百官, 出迎于慕華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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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핑계대고 아뢰도록 하라.’고 조건을 달았다.
그날로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진헌색을 설치한 뒤에 곧바로 전례에 따른 간택절차를 진행하였다. 이후 약 80일 동안 고르고 골라서 정윤후鄭允厚, ?~1419의 딸(18세)과 송경宋瓊의 딸(13세)을 최종적으로 간택해, 호조참의 오진에게 두 처녀의 신상명세를 주어서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에게 올리게 하였다. ‘절색을 얻거든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대고 아뢰라.’고 한 황엄의 당부를 따라서, 상왕(정종)의 풍병 치료약을 구입하러 사람을 들여보내는 것처럼 위장하였다.22
3개월쯤 지나서 황엄과 기보가 앞서 영락제가 요구한 말 수출을 재촉하러 오더니 어린 송씨 처녀는 놓아두고 그녀보다 다섯 살 위인 정씨만 데리고 돌아갔다.23 그런데 임금이 마음먹고 신경 써서 간택한 정씨를 사신들이 탐탁지 않게 여겼다. 황엄이 서울을 출발하면서, “정씨가 미색이 아니니, 처녀를 다시 뽑아놓고 기다리라.”고 하여 곧바로 금혼령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황엄 일행이 정씨와 함께 서울을 출발해 황해도 용천참에 이르러서는 정씨를 그곳에 놓아두고 자기들끼리만 가버렸다. 황제가 해수를 보내서, “처녀를 데려오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유는 일행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요동지역에서 명나라 군대와 원나라 군대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어서 정씨를 안전하게 데려가기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황엄은 그런 사정을 일체 숨긴 채, “날씨가 너무 추워서 처녀를 데려갈 수 없으니, 화창한 봄에 다시 와서 데려가겠다.”고 연막을 쳤다. 떠나면서는 정씨에게 몸을 잘 가꾸고 있으라고 주의를 주더니 동행하던 관원에게 “미녀를 더 뽑아놓으라.”고 재차 상기시켰다. 하지만 태종은 미녀를 다시 뽑지 않았다.
그 다음해 2월, 전년 10월에 황제에게 신년을 하례하러 명나라로 출발했던 유정현柳廷顯, 1355~1426이 돌아와 자신이 현인비 권씨와 일가라는 이유로 황제로부터 환대를 받았다고 아뢰었다. 그로부터 약 7개월 뒤에 현인비 권씨와 함께 명나라에 뽑혀 들어간 여씨의 부친인 광록소경光祿少卿 여귀진이 죽었다.
며칠 뒤에 명나라로부터 전가화와 해수가 전년에 말 1만 필을 보내준 것에 감사하는 황제의 칙서와 말 값 지불에 관한 명나라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나와서는 처녀 진헌을 요구하였다. 황제의 지시가 있었다고 말하자 태종은 처녀를 새로 뽑지 아니하고 사신과 함께 정윤후의 집을 방문해 전년에 황해도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정씨를 보여주었다. 열흘쯤 뒤에 사신들이 정씨를 데리고 명나라로 향하니 정씨의 부친인 정윤후와 더불어서 어린 화자 두 명과 하녀 네 명을 딸려서 보냈다.24
22 『太宗實錄』 卷18, 太宗 9年 8月 15日. “欽差太監黃儼到國, 欽傳宣諭:”
23 그 편에 현인비가 태종의 후궁인 정의궁주에게 백은 1백냥을 보내와서 상의원에 보관하게 하였다. 『太宗實錄』 卷18, 太宗 9年 10月 21日. “顯仁妃遺貞懿宮主白銀一百兩, 命藏之尙衣院.” 정의궁주는 7년 전인 1402년(태종 2) 3월에 태종이 왕비의 격한 반발을 무릅쓰고 후궁으로 맞아들인 성균관 악정(樂正) 권홍의 딸이다. 『太宗實錄』 卷3, 太宗 2年 3月 7日. “納成均樂正權弘女于別宮.”
24 『太宗實錄』 卷20, 太宗 10年 10月 28日. “內史田嘉禾、海壽等, 以鄭氏還京師, 其父, 前知宜州事鄭允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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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비극
Ⅲ. 진헌녀 권씨의 요절과 황제의 연민
1. 황제의 권씨 신임과 극진한 대우
정씨를 들여보내고 일주일쯤 지나서 태종이 명나라에 들어가 현비가 된 권씨의 오빠 권영균
을 대궐로 불러서 연회를 열어주었다. 권영균이 부친의 3년 상喪을 마치고 황제의 명에 따라 장
차 입조入朝하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뒤에 권영균이 출발을 고하니 임금이 현인비를 위한 선물로
홍저포 10필, 흑마포 10필을 주었다.
그런데 5개월쯤 뒤에 권영균이 명나라로부터 돌아와, 현인비 권씨의 부음을 아뢰었다. 자신이
서울을 출발하기 일주일 전인 1410년(태종 10) 10월 24일에 동생이 병으로 죽었다고 하였다. 권씨
가 명나라에 도착해 황제에 의해 현인비로 책봉된 사실이 태종에게 보고된 날짜가 1409년(태종 9)
4월 12일이니, 길게 잡아도 명나라에 들어가고 2년 만에 죽은 셈이다.
비록 아주 짧은 기간이라도 권씨는 살아생전에 황후에 버금가는 지위와 권력을 누렸던 것 같다.
명나라의 역사가 기록된 문헌에 따르면 권씨는 짧은 생을 살고 갔어도 외모가 빼어난데다가 인품이
훌륭하고 옥퉁소를 잘 불어서 명나라에 도착한 직후부터 영락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궁중의 일을 총괄하던 황후가 숨을 거두자 황제는 권씨에게 황후 역할을 대행하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식주 일체를 권씨에게 맡기고 매우 만족스럽게 여겼다. 임상훈은 2018
년에 권씨에 대한 영락제의 각별한 애정을 속속들이 분석한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25
죽은 권씨의 시신은 임시로 그녀가 숨을 거둔 제남로에 묻었다고 하였다. 제남 백성들로 하여
금 부역 대신 권씨 묘를 수호하게 하였는데, 장차 앞서 죽은 노황후와 합장할 계획이라고 하였다.26
노황후는 영락제의 황후였다가 권씨보다 4년 전(영락 5년)에 죽은 서황후徐皇后를 일컬은 것이다.
명나라 역사서에 따르면, 권씨는 원나라 군대와 싸우러 북벌에 나선 영락제를 따라갔다가 이
기고 귀환하던 길에 임성臨城(지금의 하북성 서남부의 형대시[邢臺市] 임성현)이라는 곳에서 숨을 거뒀다. 그녀
의 시신은 역현嶧懸(지금의 산동성 남부의 조장시[棗莊市] 역성구)에 묻혔다.27 대신들의 반대로 서황후와 합장
되지는 못했으나, 묘소는 현재까지도 잘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28
2. 황친 전원에게 명나라 관직 제수
권영균의 보고에 따르면, 현인비 권씨에 대한 황제의 대우가 그 이전의 다른 후궁에 비해 갑
절이나 후했었다. 그런 권씨가 갑자기 죽자 황제가 슬픔을 가누지 못하여 말을 할 때마다 눈물을
25 임상훈, 앞의 논문(2018), pp. 215~240.
26 『太宗實錄』 卷21, 太宗 11年 3月 29日. “光祿卿權永均, 回自京師.”
27 『명사(明史)·후비전(后妃傳)』1, pp. 1375~1376.
28 박현규, 「명 영락제가 사랑했던 조선 여인 권현비 묘소」, 『한중인문학연구』29(한중인문학회, 2010), pp. 327~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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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금고 탄식을 쏟아내느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권영균에게 광록시경光祿寺卿을 제수하는 고명誥命을 내려주었다. 여동생 권씨를 따라서 처음 황제를 만났을 때 제수받은 관직에 대한 임명장을 그제야 받은 것이다.
이틀 뒤에, 황제에게 신년을 축하하러 명나라에 들어갔던 형조판서 임정林整, 1356~1413과 부사 한성부윤 정역鄭易, ?~1425, 광록소경 정윤후 등이 함께 돌아와 두 가지를 보고하였다. 먼저 정윤후가 아뢰기를, 황제가 자기 딸을 총애하여 아비인 자신에게 벼슬과 예물을 주었다고 하였다. 황엄이 정씨를 데려가면서 미색이 아니라고 하였던 사실을 상기하면 황엄의 심미안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 다음에는 임정이 명나라 예부에서 받아온 자문을 바쳤다. 임금이 펼쳐보니, 황친이 된 광록시경 권영균, 광록소경 정윤후·여귀진·이문명과 홍려시경鴻臚寺卿 임첨년, 홍려소경鴻臚少卿 최득비 등에게 봉록을 주라는 내용이었다. 황제가 여섯 명에게 봉록을 내렸는데 길이 멀어 가져갈 수가 없으니 조선에서 대신 그들에게 매월 봉록(광록시경 26석, 광록소경 16석, 홍려시경 24석, 홍려소경 14석)을 주라는 것이었다.
얼마 있다가, 명나라에 들어가 현인비의 죽음을 애도하고 황제에게 위로를 전할 조문사절단을 구성하였다. 현인비의 숙부(고 권집중의 아우)인 판전농시사 권집지權執智를 단장으로 임명하였다. 단장인 권집지를 진향사進香使로 삼아 백저포·흑마포 각각 50필을 주어 제사비용으로 쓰게 하고, 제문도 써주었다.29 권집지 일행이 떠나간 직후에 명나라를 다녀온 권영균 등을 위로하는 연회를 열었다.
70일쯤 뒤에 명나라 예부의 자문에 따라 황친인 권영균·이문명·임첨년·최득비의 녹과를 정했다. 의정부에서 건의한 대로, 명나라 정3품인 광록시경 권영균은 조선의 종1품보다 한 등급 낮춰서 정2품 녹과를 주고, 정5품인 광록소경 이문명은 조선의 정3품보다 한 등급 낮춰서 종3품 녹과를 주고, 정4품인 홍려시경 임첨년은 조선의 정2품보다 한 등급 낮춰서 종2품 녹과를 주고, 종5품인 홍려소경 최득비는 조선의 종3품보다 한 등급 낮춰서 정4품 녹과를 주도록 하였다.30
그런데 이날의 결정에 따라 이조에서 네 사람에게 정부로부터 봉록을 받을 수 있는 녹패祿牌를 지급하자 사헌부에서 원윤과 정윤31의 녹과에 비해 지급기준이 너무 높다며 녹과 대신 월봉을 줄 것을 건의하여 그대로 따르게 하였다.
3. 황제의 제사를 가져온 사신의 탐욕
한 달쯤 지나서 영락제가 조선에서 정씨를 바친데 대한 보답으로 29종류의 약재를 보내왔다. 그런데 약재를 가져온 태감 황엄이 태종에게 구두로, ‘황제가 자색이 있는 여자를 더 원한다.’고 전했다. 그뿐만 아니라, 앞서 정윤후의 딸을 데려간 사실을 조정관원들이 모르기 때문에 조선에
29 『太宗實錄』 卷21, 太宗 11年 4月 20日. “遣判典農寺事權執智如京師.”
30 『太宗實錄』 卷22, 太宗 11年 7月 5日. “定光祿寺卿權永均等祿科.”
31 조선시대에 즉위한 군주의 궁인 사이에 태어난 아들과 군주의 양첩이 낳은 장자에게는 원윤(元尹) 작위를, 천첩의 장자에게는 정윤(正尹) 작위를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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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비극
서 요청한 약재들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속이고 나왔다고 하였다. 명나라의 영락제도 조선의 태
조도 미녀 진헌의 야만성을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명나라 사신들의 전용숙소인 태평관에서 태종이 환영연회를 열었는데, 황엄이 황제가 죽은
여귀진에게 제문과 향과 제물을 하사하는 자문을 내놓으며 유족들에게 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어서 구두로, 황제로부터 ‘불경을 베껴서 서역에 보낼 종이를 보내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전
하자, 태종이 1만장을 보내겠다고 대답하였다.32
이후 황엄이 현인비 권씨의 친정집을 방문해 유족들에게 애도와 위로의 말을 전했다. 틀림없
이 권씨의 오라비 권영균으로부터 후한 대접과 함께 푸짐한 선물을 받았을 것이다. 또 다른 황친
인 임첨년·정윤후·최득비 등이 번갈아 돌아가며 황엄을 위해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고 선물을 안
겨서 그의 탐욕을 채워주었다.33
황엄이 황친들의 집에 이를 때마다 제 입으로 먼저, "이 집에서도 틀림없이 내게 베를 줄 테지,
나는 발이 고운 베를 귀하게 여기지.”라고 떠벌였다. 권씨와 함께 뽑혀간 여씨 처녀의 아비로 1년
전에 사망한 여귀진의 집은 방문하지 않고, 대신 여귀진의 묘를 찾아가 제사를 올렸다. 이후로 8
일을 더 머물다 제 나라로 갔다.
그 사이 광록소경 이문명이 죽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황엄 일행이 돌아가고 나서 조선에
서 명나라에 들여보낼 처녀를 간택한 흔적이나, 명나라에 들여보낸 흔적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명나라 황제가 조선 국왕에게 처녀 진헌을 독촉하였다는 기록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 연유는 분
명치 않으나, 조선으로서는 참으로 다행이었다고 할 것이다.
두 달쯤 지나서 임첨년과 최득비가 입궐하여, 북경에 들어가 황제에게 월봉과 고명을 받게 된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니 임금이 두 사람에게 각각 저마포 12필과 6필씩을 내려주었다. 그로부터
4개월쯤 뒤에 명나라가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기려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황제에게 새해를 축하하러 명나라에 들어갔던 지의정부사 정탁鄭擢, 1363~1423과 부사 참지의정부사
안성安省, 1344~1421이 돌아와 황제가 북경에 새로 큰 운하를 파서 조운을 통하게 하고 순행에 대비해 궁
궐을 짓고 있다고 아뢴 것이다. 북경에 새로 짓고 있었다는 궁궐은 자금성을 가리킨 것이었다.
영락제가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옮기려하자 태종은 경계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해 10월경
의정부에서 의학醫學·악학樂學·역학譯學 분야 학도들을 명나라 수도로 유학보낼 것을 제안하자, 정
승들에게 경각심을 불어넣었다. 영락제가 의심이 많아서 조선인이 들어가면 반드시 환관을 시켜
서 은밀히 사찰을 벌인다며 원나라와 한 집안처럼 지냈던 고려 때와 착각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
것이다.34
32 『太宗實錄』 卷22, 太宗 11年 8月 15日. “朝廷使臣宦官太監黃儼來.”
33 조혁연, 「조선 전기의 貢女와 그 친족에 대한 시혜」, 『백산학보』107(백산학회, 2017), pp. 281~299.
34 『太宗實錄』 卷24, 太宗 12年 10月 26日. “議政府請遣醫樂譯三學如京師習業, 不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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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현인비 독살설과 조선 조정의 동요
1. 황제를 문안하기 위한 사절단 파견
3개월 뒤에 황제의 생일이 돌아와 형조판서 최이崔怡, 1356~1426를 들여보내 축하를 전하게 하였는데, 최이가 요동에 이르러 황제의 북경 방문 계획을 알려왔다. 마땅히 문안사절을 보낼 필요성을 느끼고 의정부의 의견을 물으니, 영의정 하륜이 세자를 추천하였다. 임금이 너무 과하다고 말하자, 다시 왕자를 추천하였다. 임금이 나이가 어리다며 난색을 표하자, 다시 부마駙馬를 추천하였다.
이때 마침 부마인 권규權跬, 1393~1421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장인인 임금이 의사를 타진하니 몸을 일으킬 수 있으니 기꺼이 가겠다고 하여 여칭과 함께 보내기로 하였다. 그런데 두 사람이 아직 북경으로 떠나기 전에 성절사를 따라갔던 통사 임밀林密이 북경에서 돌아와 명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한다고 아뢰어, 조정 안팎이 술렁였다.35 사실은 북벌계획을 숨기기 위한 영락제의 연막전술이었는데 조선에서는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권규와 여칭에게 말 20필을 예물로 주어서 문안사절로 들여보내고, 2주일쯤 뒤에 다시 황친들인 권영균·임첨년·최득비·정윤후 등 네 명을 문안사절로 들여보냈다. 명나라에 들어가서 황제를 따라서 북경에 와 있을 딸도 만나보고, 일본정벌 계획도 알아오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권영균의 경우는 여동생이 3년 전에 죽었는데도 황제의 신뢰가 두터워 사절단에 포함되었다.
두 달쯤 지나서, 앞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들어간 최이가 돌아와, 4월 초1일에 황제가 북경에 도착하였다고 보고하였다. 한 달 반쯤 뒤에 권영균 등이 귀국하고, 이틀 뒤에 권규와 여칭도 돌아와 명나라 대궐의 환관에게서 듣고 온 정보들을 보고하였다. 골자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황제가 장차 흉노를 친히 정벌하려고 군사 1백여 만 명을 징발하여 이미 상도上都(만리장성 북쪽의 도시. 제너두)로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둘째는, 요동에 사는 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제주의 마필은 전에 원나라에서 방목하던 것이니 말들을 모두 중국으로 옮기라고 건의하였다는 내용이었다.
권규와 여칭이 보고를 마치자 영의정 성석린이 나서서, 제주의 마필을 가까운 섬으로 옮겨서 기르자고 제의하였다. 임금이 옳게 여기니 성석린이, 환관 윤봉이 권영균에게 ‘황제가 전함 3천척을 건조해 장차 일본을 공격하려 한다.’고 말한 사실을 밝히니, 대신들이 웅성거리며 함길도와 평안도에 무신을 보내고 군사훈련을 실시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대신들을 안심시켰다. 먼저 앞서 황제가 일본과 화친하니, 여러 대신이 일본과 함께 조선을 공략할 것을 염려하였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과거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잇따라서, 황제가 권영균을 옛날과 다름없이 신임할 뿐만 아니라, 황제의 북방점령에 따른 요동순시는 조선
35 『太宗實錄』 卷25, 太宗 13年 3月 20日. “賀正使通事林密, 回自京師啓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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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비극
을 치려는 뜻이 아니라고 일러주었다.36
열흘 뒤에 임첨년·최득비·정윤후 등이 북경에서 돌아오니, 나흘 뒤에 임금이 세 사람을 권규·
여칭·권영균과 함께 광연루로 불러서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로부터 40일쯤 지나서 2년 전에 죽은
이문명의 아들 이무창李茂昌, ?~1421과 광려소경 여귀진의 조카 여간呂幹 등을 북경에 들여보내 황제
를 문안하게 하였다.
4개월쯤 지나서 이무창과 여간이 황제를 알현하고 돌아오자, 두 사람과 권영균·정윤후 등 네
명에게 각각 내구마 1필씩과 동일한 양의 저화(지폐)를 주었다. 그 후 5개월쯤 지나서 황제문안사절
로 칠원군 윤자당尹子當, ?~1422을 또 들여보냈다. 윤자당은 어미는 같으면서 아버지는 서로 다른 이
숙번의 형이었다. 두 달쯤 뒤에 황제가 북벌(원나라 군대 정벌)을 위해 북경을 떠나자, 권영균·임첨년·
최득비·이무창·여간 등을 다시 또 문안사절로 들여보냈다.
2. 여씨의 현비독살 소식과 해법 논의
다섯 황친이 북경으로 떠나고 나서 한 달 반쯤 뒤에, 윤자당의 통사로 북경에 들어간 원민생
元閔生, ?~1435이 돌아와 복명하였다. 6월 초4일에 황제가 친정에 나서 북방을 평정하고 8월 초1일
에 북경으로 돌아와 승전조서를 내렸음을 밝히고, 현지에서 베껴온 황제의 조서를 바쳤다. 그리
고 이어서 충격적인 소식을 보고하였다. 현인비 권씨는 함께 뽑혀 들어간 여씨가 독살한 것이니,
권씨의 오빠인 권영균에게 자세하게 들려주라는 내용이었다.37
여씨가 권씨를 독살하였다는 황제의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 누명을 쓴 것이었다. 누명을 씌
운 자는 명나라 상인의 딸로 황제의 후궁이 된 여가呂家라는 여인이었다. 처음에 중국인 여씨가 성
씨가 같음을 구실로 조선 여인 여씨에게 접근해 동성애를 제의하였다. 이에 조선 여인 여씨가 따
르지 아니하자 앙심을 품었다가, 권비가 병으로 숨을 거두자 황제에게 ‘여씨가 독약을 차에 타서
권씨에게 주어서 마시게 하였다.’고 누명을 씌웠다.
황제는 그녀의 말을 사실로 믿었고, 그 결과로 여씨와 궁인 환관 수백 명이 죽었다. 여씨가 권
씨를 독살하였다는 소식에 크게 충격을 받았을 태종은 의정부와 육조를 불러서 상황을 알리고, 여
씨의 어미와 친족 전원을 의금부 옥에 가두게 하였다.
원민생이 보고한 내용 중에는, 황제가 북정을 마치고 북경으로 돌아와 1백여 명을 참수하였다
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진군도중에 탈영한 병사와 정벌에 참여한 병사의 처첩 가운데 다른 남자와
간통한 여자들을 매일 친히 판결하여 궐문 밖에서 목을 베었다고 하였다. 이틀 후에 윤자당이 뒤
따라서 도착하니, 임금이 영의정 하륜·좌의정 남재南在, 1351~1419·우의정 이직李稷, 1362~1431과 육조
판서와 더불어 편전에서 윤자당 등을 인견하고 향후의 대책을 토론에 붙였다.
36 『太宗實錄』 卷26, 太宗 13年 7月 18日. “上止之曰: "卿等勿疑。曩者帝與日本和親, 群臣皆曰:”
37 『太宗實錄』 卷28, 太宗 14年 9月 19日. “命囚呂氏之母與親族于義禁府.”
고궁문화 제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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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씨는 비였고 여씨는 미인이었으니, 지위의 차이는 있었어도 본처와 첩의 관계는 아니었다. 또 여씨가 독약을 써서 권씨를 죽였다는 말도 사실 여부가 애매하고, 멀리 있는 황제가 진노했다는 말 한마디에 여씨의 친족을 모조리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38
임금이 말을 마치자, 남재와 이직이 합세하여 우선 가둬두었다가 권영균이 돌아온 뒤에 황제의 뜻을 들어보고 결정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아뢰었다. 임금이 옳게 여기고 여러 재상에게 두루 물으니, 우대언 한상덕이 ‘사직을 무너뜨리려고 음모를 꾸민 죄(모반)’나 ‘종묘나 왕릉 혹은 왕궁을 파괴한 죄(대역)’를 적용해 친족들을 노비로 삼는 방안을 제의하였다.
한상덕의 논리는, 권씨가 황후가 되지 못하고 죽었으니 여씨에게 황제나 ‘황후를 죽인 죄(시해)’를 적용해 삼족을 멸하는 것은 너무 과하고, 그렇다고 하여 ‘모의하여 고의로 사람을 살해한 죄’를 적용하면 너무 가볍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영의정 하륜이, 위로는 황제를 노하게 하고 아래로는 모국에 수치를 안긴 자의 친족을 살려두면 안 된다며 강경대응을 고집하였다.
하지만 임금은, “여씨가 처형된 것으로 충분하다.”며 한상덕의 의견을 취하여 여씨 어미 장씨만 관청의 노비로 붙이고 여씨의 친족들은 모두 석방하게 하였다. 그러자 하륜이 보다 더 거세게 강경론을 펼쳤다. 여씨의 아비는 이미 죽었으니 어미라도 죽여서 뒷사람을 경계하고, 황제의 기대에도 부응하자는 것이었지만 상황이 바뀌지 않았다.
임금이 하륜을 달랠 말을 궁리하고 있는데 남재와 이숙번李叔蕃, 1373~1440이 힘을 보탰다. 두 사람 모두, 단지 원민생의 말만 듣고서 여씨의 어미를 죽이는 것은 온당치 않다며, 권영균이 돌아오거든 황제의 의중을 물어보고 방향을 정하자고 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여씨의 어미 장씨만 옥에 남겨두고 여씨의 친족들을 모두 풀어주게 시키더니, 닷새가 지나자 장씨마저 석방하게 하였다.
3. 황친들의 연속적인 가교역할 수행
여씨의 어미를 풀어주게 한 직후에 우의정 이직과 예문관 제학 이은을 북경에 들여보내 황제가 북방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게 하였다. 그로부터 두 달 남짓 지나서, 황제를 문안하러 북경에 들어갔던 권영균·임첨년·이무창·최득비 등이 돌아와 복명하였다.
권영균 등의 보고에 따르면, 황제가 말하기를 ‘여씨는 의리를 저버리고 환관 김득과 함께 비상砒礵을 사서 약에 타서 권비에게 먹이고, 다시 국수를 말아먹는 차물에 타서 먹여 권비를 죽게 하여서, 내가 여씨와 그녀의 측근들을 다 죽였다.’고 하였다. 그리고서는 일행을 54일 동안 붙잡아두고 수시로 연회를 열어주며 떠나는 날까지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 사이 권영균은 북경에서 1백 20리 떨어진 천수산에 조성된 현인비의 묘를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39 이상과 같이 자세하게 보고를 청취한 태종은 보름 뒤에 권영균 등을 광연루 아래로 불러서 연회를 열어 위로하였다.
38 『太宗實錄』 卷28, 太宗 14年 9月 21日. “欽問起居使尹子當回自京師.”
39 『太宗實錄』 卷28, 太宗 14年 12月 4日. “權永均、任添年、李茂昌、崔得霏等, 回自北京啓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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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비극
그로부터 사흘 뒤에 원민생이 북경에서 돌아와, 자기가 황제에게 여씨의 어미가 이미 처형되었
다고 말하니 황제가 옳게 여기더라고 아뢰었다. 겁도 없이 거짓말을 지어서 황제를 속인 것이다.
그로부터 이틀 뒤에 3개월쯤 전에 진하사로 북경에 들어갔던 이직·이은·권총·이징이 돌아왔다.
얼마 뒤에 해가 바뀌어 정월도 중반이 지났는데, 사헌부에서 홍려소경 이무창의 죄를 청하였
다. 황친인 이무창이 1년 전에 문안사절로 명나라에 들어가면서 내자시의 종인 황득룡을 몰래 데
려간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하지만 사실관계를 청취한 임금은 황득룡만 죄를 주고 황친인 이무
창은 죄를 묻지 말게 하였다.
그 다음해 5월 권영균·임첨년·이무창·정윤후·최득비 등이 북경에 들어갔다가 4개월 뒤에 돌
아왔다. 그들의 보고에 따르면, 황제는 일행을 특별히 후하게 대접하면서, (죽은 권비와 친척 사이인)원
민생이 빠진 이유를 묻고는, “다음에는 꼭 함께 오라.”고 하였다. 또 내관 황엄을 시켜서, 뒤에 오
는 사신 편에 대형 석등잔 10개를 들여보내고, 이후로는 부름이 있을 때만 들어오라고 하였다.
20여 일 뒤에 임금이 권영균 등 네 명을 광연루로 불러서 술자리를 베풀고, 명나라를 다녀온
노고와 공로를 치하하였다. 바로 다음 날 희천군 김우金宇, ?~1418를 북경에 들여보냈다. 그 사이 황
제가 남경을 다녀와서 문안사절로 보냈던 것이다. 대형과 소형을 합하여 석등잔 10개를 예물로
주어서 가져가게 하였다.40
황제에게 바쳐진 처녀들 못지않게 그녀들의 혈육들도 덩달아서 고초를 겪었다. 처녀들이 뽑혀
서 들어갈 때 보호자로 따라간 일 외에도 외교사절로 차출되어 북경을 왕복하는 고역을 반복해서
겪었다. 들어갈 때마다 딸(혹은 여동생)을 만나는 기쁨은 있었겠으나, 왕복 6천2백20리(의주↔북경 편도 1,244
킬로미터=3천1맥10리) 길을 반복해서 오가느라 숱한 고생을 겪었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권영균은 황제에게 바쳐진 여동생이 이미 세상을 떴는데도 문안사절로 뽑혀서 먼 길을
오갔으니, 마음고생이 더욱 심했을 것이다. 개중에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출세와 신분상승의 기회
로 삼았던 사례도 있었던 것 같다.41 하지만 예외적인 한두 명에 그칠 뿐이고, 나머지 다수는 어명
을 거역할 수 없어서 마지못해 북경을 오갔을 개연성이 높다.
40 『太宗實錄』 卷32, 太宗 16年 10月 12日. “遣熙川君 金宇如京師, 以皇帝還駕南京, 故欽問起居也.”
41 한희숙, 앞의 논문(2012), pp. 261~290; 임상훈, 앞의 논문(2013), pp.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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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단원으로 차출된 사람
출발일자
귀환일자
소요기간
문안사절
1차
권규 여칭
1413.3.27
1413.7.18
110일 안팎
2차
권영균(오빠) 임첨년 최득비 정윤후
1413.4.10
1413.7.28
110일 안팎
3차
이무창(이씨 오빠) 여간(여씨 4촌)
1413.9.10
1414.1.06
115일 안팎
4차
윤자당
1414.6.02
1414.9.21
110일 안팎
5차
권영균 임첨년 최득비 이무창 여간
1414.8.05
1414.12.4
115일 안팎
6차
이직 이은 권총 이징
1414.9.29
1414.12.24
85일 안팎
7차
권영균 임첨년 이무창 정윤후 최득비
1416.5.13
1415.9.18
125일 안팎
8차
김우
1416.10.12
미상
미상
9차
권진
1417.윤5.12
1417.7.30
80일 안팎
10차
임첨년 이무창 최득비 송희경(정씨 형부)
1417.6.12
1417.10.19
130일 안팎
조문사절
임첨년·한확·최득비
1424.10.17
1425.3.01
135일 안팎
표1. 황친들이 대명對明 외교에 동원된 내역
<표1>은 태종실록을 토대로 황친들이 외교사절로 활약한 내역을 집계한 것으로, 최득비 5회, 이무창 4회, 권영균·임첨년 3회, 정윤후·여간 2회, 송희경·한확 1회씩 명나라를 다녀왔음을 보여준다. 명나라에 뽑혀간 딸(여동생, 조카, 처제)을 만나보는 기쁨과 국익도모에 기여한 측면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추위·더위·바람·눈·비 등과 싸우며 먼 길을 왕복하느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을 것이 분명하다.
Ⅴ. 미녀로 진헌된 여덟 공녀의 말로
1. 임신한 공녀 진헌과 황제의 격노
권영균 등 네 명이 북경을 다녀오고 6개월쯤 지나서 느닷없이 금혼령이 내려지고 진헌색이 설치되었다. 전년 10월 2일에 하정사로 들어가는 이도분의 통사로 북경을 따라갔던 원민생이 돌아와, 황제가 미녀를 요구한다고 은밀히 아뢰었기 때문이었다.42
의정부 찬성 김한로金漢老, 1358~?와 판한성부사 심온沈溫, 1375~1419을 진헌색의 제조로 임명하여, 각 도에 사람을 보내 미녀를 뽑아오게 시켰다. 뽑혀온 처녀들 중에서, 종친부의 부령副令을 지내고 죽은 황하신黃河信의 딸과, 지순창군사를 지내고 죽은 한영정韓永矴의 딸을 상등으로 뽑았다.
한 달 반쯤 뒤에 주문사로 북경에 들어갔던 원민생이 돌아와, 황제가 조선에서 뽑아놓은 처녀들의 용모에 대해 물으며 선물을 후하게 내리더니, 명나라 태감 황엄과 소감 해수를 내보내 처녀
42 『太宗實錄』 卷33, 太宗 17年 4月 4日. “禁中外婚嫁。賀正使通事元閔生回自京師, 密啓帝求美女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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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비극
들을 데려갈 뜻을 밝혔다고 아뢰어, 나흘 뒤에 임금이 황씨 처녀와 한씨 처녀를 편전으로 불러서
만나보았다.
보름 남짓 지나서 황엄과 해수가 도착하더니, 이틀 뒤에 둘이서 황씨 집을 찾아가 황씨를 만나
보았다. 그 다음 날 임금이 두 사신을 경복궁 경회루로 초대해 잔치를 베푼 뒤에 근정전으로 이동해
황씨와 한씨를 포함한 십여 명의 처녀를 보여주고 뜻대로 고르게 하였더니, 한씨를 1위로 뽑았다.
닷새 뒤에 황엄과 해수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황씨 집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황씨가 병을 앓고
있을 뿐더러, 눈물자국이 있는데도 분과 연지를 바르지 않은 것을 보고 황엄과 해수가 노발대발하
며 통역이던 원민생에게 호통을 퍼부었다.
철없는 것들이 전하의 지극한 성의를 여사로 여기고 늙은 어미와 어린애들을 가까이 있게 하여 황씨가 병이 난 것이다. 곁에서 시중
을 드는 내시들도 철이 없도다.43
임금이 전해 듣고 어의 양홍달을 황씨에게 보내 병을 치료하게 하고, 경험이 풍부한 내관 노희
봉을 사신들에게 보내 노여움을 달래게 하였다. 이후로 아무 일 없이 그대로 공녀로 진헌되지만,
황씨는 이때 홀몸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상심에 빠졌던 것인데, 사정을 털어놓
지 못하여 애꿎은 원민생이 덤터기를 썼던 것이다.
임금도 황씨의 임신 사실을 알 리가 없었기에, 보름쯤 뒤에 황엄과 해수가 한씨와 황씨를 데리
고 북경으로 출발하였다. 도총제 노귀산과 첨총제 원민생이 각각 진헌사와 주문사로 따라가고, 한
씨의 오빠 부사정 한확과 황씨의 형부 녹사 김덕장이 보호자로 동행하였다. 시녀 각 여섯 명씩과
화자 각 두 명씩을 딸려 보냈는데 길가에 나와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44
황제가 처녀들을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던지, 처녀들의 입조를 재촉하는 사신을 또 내보
냈다. 그런데 북경에 들어가던 도중에 황씨가 복통을 일으켰다. 의원이 갖가지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이후로도 통증이 계속되자 밤마다 여종을 시켜 손으로 배를 문지르게 하였다. 그러던 어
느 날 음부에서 가지처럼 생긴 핏덩이가 나오자, 황씨가 여종을 시켜서 뒷간에 버리게 하였다. 다
른 여종들도 상황을 알아챘지만 비밀이 지켜졌다.45
그사이 문안사절로 들어갔던 임첨년·최득비·이무창·송희경 등이 돌아와 북경소식을 보고하였
다. 두 달쯤 뒤에는 사신들과 함께 처녀들을 데리고 명나라에 들어간 노귀산과 원민생이 돌아와, 처
43 『太宗實錄』 卷34, 太宗 17年 7月 21日. “海壽遣僉摠制元閔生、通事金時遇, 以暗花粉色茶鍾一.”
44 『太宗實錄』 卷34, 太宗 17年 8月 6日. “使臣黃儼、海壽以韓氏、黃氏還.”
45 여기에 소개한 이야기는 7년쯤 세월이 지난 뒤인 세종 6년(1624) 10월 17일자 기사로 실려 있는 내용을 옮겨온 것이다. 따라서 황씨가 사신
들을 따라가던 도중에 아이를 낙태한 사실이 황제에게 알려져 황씨가 멸시와 천대를 받은 사실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영락제가 죽은 뒤의 일
로 추정된다.
고궁문화 제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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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들이 북경에 도착한 이후에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그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46
10월 초8일에 황씨·한씨가 통주通州로부터 먼저 들어가고, 원민생 일행은 초9일에 북경에 들어가서 10일에 조현하니 황제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도중에 황씨가 복통으로 고생한 일을 아뢰니, 황제가 있다가 황씨에게 약을 먹였느냐고 물었다. 원민생이 대답하기를, “도중에 병이 심해서 걱정이 많았다.”고 아뢰니, 황제가 “너희 국왕이 지극한 정성으로 힘든 일을 해냈다.”고 칭송하였다.
그런 다음에 화제를 바꾸어서, “한씨가 대단히 총명하고 영리하니, 돌아가서 왕에게 그대로 전하라.”고 말하더니, 한확에게 광록소경 관직과 함께 선물을 후하게 내리고 황씨와 한씨의 집에도 금·은과 비단 등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여인의 운명이 판이하게 갈렸다.
한씨는 도착한 직후부터 황제가 ‘총명하고 영리하다’고 인정하여 줄곧 황제의 총애를 받은 반면, 황씨는 임신했던 경험이 들통 나서 발붙일 곳 없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당시는 아무도 그런 줄을 몰랐다가 7년쯤 지나서 영락제가 죽은 뒤에야 황씨가 명나라에서 겪은 일들이 국내에 알려졌다.
세종 6년 10월 27일의 기사에 따르면, 황씨와 한씨가 북경에 도착하고 얼마 있다가 황씨가 위기에 처했다. 황씨의 임신 경험을 알게 된 황제가 그 까닭을 추궁하니, 황씨가 일찍이 남성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실토하였다. 그보다 앞서 황씨의 성경험을 짐작케 하는 두 개의 실록기사가 보인다. 우선, 일행이 서울을 떠나기 전에 김덕장이 황씨의 방에 앉아있는 것을 황엄이 창밖에서 목격하고 김덕장을 호되게 꾸짖은 일이 있었다. 그 뒤에 황씨의 여종이 은밀히 발설하기를, 처음 떠날 때에 김덕장이 처제인 황씨에게 나무 빗 한 개를 선물로 주었다고 하였다.
황제가 불같이 화를 내며 황씨를 뽑아 보낸 태종에게 문책하는 칙서를 보내려 하자, 한씨가 가까스로 설득해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처음에 궁인 양씨로부터 상황을 전해들은 한씨가 울면서 황제에게 매달리며 애걸하였다. 태어나서 제 집에만 머물렀던 황씨가 뽑혀 들어오기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를 임금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느냐며 임금에게 칙서를 보내지 말 것을 청했다. 황제가 감동하여 황씨에 대한 응징을 위임하니, 한씨가 황씨의 뺨을 때렸다.
2. 어여의 난魚呂之亂과 황제의 응징
4개월쯤 세월이 흐르고 나서 통역으로 따라갔던 최천로崔天老가 먼저 돌아와 ‘영락제가 한씨를 총애하여, 황제가 임금에게 보내는 예물들을 가지고 내관 육선재가 요동에 이르렀다.’고 아뢰었다. 10여 일 뒤에 노귀산·원민생·한확·김덕장 등 네 명이 북경에서 돌아와 황제를 만나서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아뢰었다. 그런데 임금에게 황씨의 이야기를 아뢴 흔적이 『태종실록』에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들이 북경을 떠나고 나서 황씨의 일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46 『太宗實錄』 卷34, 太宗 17年 12月 20日. “盧龜山、元閔生、韓確、金德章回自北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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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비극
열흘쯤 뒤에 마침내 육선재가 황제가 태종에게 보내는 예물을 가지고 도착하였다.47 창덕궁
에 이르러 칙서와 예물을 전달한 육선재는 명나라로 돌아가기 전에 어떤 자리에서 “황씨는 성격
이 험악하고 온화한 빛이 없어, 전생에 몹쓸 짓을 많이 저지르고는 그 죄를 갚지 못하고 태어난 여
자 같다.”고 악담을 하였다.
하지만 그가 떠난 뒤에 아무런 소동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변죽만 올리고 황씨 사건의 자초
지종은 말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육선재가 다녀가고 8개월쯤 지나서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
고 세종이 새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그 다음해 2월 광록소경 정윤후가 죽으니, 황제가 왕현을 시
켜서 제사를 내보내 정윤후의 넋을 위로하게 하였다.
2년쯤 뒤에 이문명의 아들인 광록소경 이무창이 죽으니, 임금이 부의로 미두米豆 10석과 종이
70권을 내렸다. 그 직후에 정윤후의 아들 정인귀가 나랏일로 북경에 들어가는 조숭덕을 따라가서
황제를 알현하였다. 아버지의 3년 상이 끝나서, 황제가 아버지에게 제사를 내려준 것에 감사를 표
하려고 간 것이다.
그런데 그 무렵 명나라 궁중에서 이른바 ‘어여의 난魚呂之亂’48이 발생해, 광분한 황제에 의해 수
천 명이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했다.49 처음에 조선에서 들어간 여씨 여인에게 동성애를 제의하였
다가 거절당하자 여씨에게 누명을 씌워 죽게 한 명나라 상인의 딸 여씨가 어씨魚氏라는 궁녀와 서
로 껴안기를 일삼다가 영락제에게 여러 차례 현장을 들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락제가 두 여자와의 옛정을 생각해서 특별히 눈감아주었는데, 본인들이 지
레 겁을 먹고 함께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이에 영락제가 진노하여 상인의 딸 여씨의 여종들을 심
문하니, ‘여씨가 황제에게, 조선 여인 여씨가 권비를 독살하였다.’고 무고하였다는 자백이 나왔다.
그 자백을 토대로 2천 8백 명의 연루자를 가려내 모두 친히 죽이니, 순식간에 나라가 생지옥으
로 변했다. 어떤 여인은 황제의 면전에서, "자기의 양기가 부족해서 여씨와 어씨가 서로 좋아한 것
인데, 누구를 탓하느냐.”고 욕을 퍼부었다. 황제의 광란이 시작되자 봉천奉天·화개華蓋·근신謹身 세
전殿에 벼락이 떨어져 모두 타버렸다. 궁중사람들이 듣고서 황제가 천변을 두려워하여 살육을 멈
출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황제는 개의치 않고 날마다 미친 듯이 사람들을 죽였다. 50
47 『太宗實錄』 卷34, 太宗 17年 12月 29日. “內史奉御善財奉勑書至.”
48 이 사건은 극단적인 잔혹성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조차 관련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조좌호는 앞의 논문(1960), p. 35에
서 ‘어여의 난’의 발생 시점을 홍희제(4대 황제 인종) 즉위년 1424년(세종 6)으로 소개하였고, 임상훈은 앞의 논문(2011)에서 그 시기를 1421
년(세종 3)으로 소개하는 차이를 보였다. 본 논문은 당시의 상황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임상훈의 판단을 따랐다. 그래야지 ‘서울에 있던 한씨
의 어미 김씨가 죽은 뒤에, 황제가 하사한 제사를 가져온 사신(왕현) 편에 한씨가 따로 제문을 보냈다는 세종 6년 7월 4일자 기사와 앞뒤가
들어맞는다.
49 이하에 소개한 줄거리는 『세종실록』 6년 10월 17일자 기사를 축약한 것이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참 뒤의 실록기사를 미리 끌어온 것
인데, 이 사건의 전모가 자세하게 국내에 알려진 것은 그보다도 한참 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상훈의 추측에 따르면, 중간에 윤봉이 사신
으로 와서 대강의 윤곽을 알려주었으나, 사건의 전모가 자세하게 전해진 것은 1435년(세종 17)에 극적으로 귀환한 김흑의 입을 통해서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임상훈, 앞의 논문(2011) 초록 참조.
50 『세종실록』에 따르면, 시간이 지난 뒤에 영락제가 후세에 전할 생각으로, 화공을 시켜 여씨가 젊은 환관과 서로 끌어안고 있는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가, 어씨(魚氏)를 생각해서 수릉 곁에 파묻었는데, 1422년 7월에 영락제가 죽고 황태자가 홍희제로 즉위하여 그 그림을 파내버렸다고
되어있다. 『世宗實錄』 卷26, 世宗 6年 10月 17日. “前後選獻韓氏等女, 皆殉大行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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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공녀들의 몰살과 영락제 횡사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황제의 패악에 조선에서 뽑혀 들어간 여인들도 무참히 짓밟혔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임씨(임첨년의 딸)와 정씨(정윤후의 딸)는 목을 매어 자살하고, 황씨와 이씨(이문명의 딸)는 국문을 거쳐 참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함께 국문을 거쳐서 똑같이 참형에 처해진 황씨(황하신의 딸)와 이씨의 처신이 완연히 달랐다. 황씨는 국문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많이 끌어넣어 모두 죽게 만든 반면, 이씨는 죽기 직전까지도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혼자서 죽겠다.”며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생지옥 하에서도 한씨(한영정의 딸, 한확의 누이)와 최씨(최득비의 딸)는 천우신조로 죽음을 피했다. 먼저 한씨는 황제에 의해 빈 방에 갇힌 상태에서 여러 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는데, 한씨를 지키던 내시가 때때로 먹을 것을 넣어 줘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녀의 여종들은 모두 죽었다. 최씨는 그보다 앞서 황제를 따라서 남경을 갔다가, 현지에서 병이 들어 한참을 체류하다가 참극이 끝난 뒤에 올라와 극적으로 살았다.
그 다음해 5월 태종이 죽어서 세종이 명실상부한 임금이 되었는데, 10개월쯤 지나서 한확의 모친 김씨가 숨을 거뒀다. 『세종실록』에는 그런 기사가 없는 상황에서, 박상진은 김씨의 죽음이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의 후궁이 된 큰딸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을 얻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추정하였다.51
해가 바뀌어서 설날이 막 지났는데,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러 북경에 들여보낸 최운崔雲이 데려갔던 통사 김지金祉가 돌아와, 최운이 북경에서 있었던 일들을 적어서 보낸 글을 바쳤다. 최운이 보낸 글에는, 황제가 최운을 최득비의 친족으로 착각한 일과 황제가 최득비와 한확의 안부를 물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 외에 황제가 윤봉을 불러서 최운 일행에게 술과 밥을 대접하게 하였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4개월쯤 뒤에 황제의 명을 받은 왕현이 제사를 받들고 와서 한확의 집을 방문해 죽은 김씨의 넋을 위로하였다. 그런데 며칠 뒤에 주문사로 명나라를 다녀온 원민생과 통사 박숙양이 먼저 들어와, 황제가 입맛을 돋궈주는 별미식품들을 원한다고 보고하였다. 두 사람이 임금에게 아뢴 황제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짐이 늙어서 입맛이 없으니 밴댕이와 붉은 새우젓과 문어 같은 것을 들여보내게 하라. 권비가 살았을 적에는 진상하는 먹거리마다 모두 마음에 들었는데, 그녀가 죽은 뒤로는 상차림, 술[酒] 양조, 의류 세탁 등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52
권비는 앞서 명나라에 뽑혀 들어가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다가 2년 만에 죽은 권영균의 여동생
51 박상진,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서울: 가람기획, 2007), pp. 291~292.
52 『世宗實錄』 卷25, 世宗 6年 7月 8日. “奏聞使元閔生通事朴淑陽先來啓曰: .”
29
명나라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비극
을 말한 것이니, 권비가 살았을 적에 영락제가 그녀를 얼마나 신임하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런
데 황제의 먹거리 요구를 보고한 민생이 ‘황제가 처녀들을 요구하였다.’고 가만히 보고하였다.
황제를 알현할 때에 배석하였던 내관 해수가 원민생에게, ‘미모가 빼어난 처녀를 2명쯤 들여보
내라.’고 말하자 황제가 만족스런 표정으로 크게 웃으면서 ‘요리에 능하고 술도 잘 빚으면서 나이
가 20살부터 30살 사이인 하녀 5~6명도 아울러 뽑아 보내라.’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원민생을 통해 황제의 요구를 청취한 세종은 세 정승과 육조의 판서들을 불러서 의견을 들어
본 뒤에,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진헌색을 설치하였다. 또 각 도 감사에게 명을 내려서 황제에게
바칠 은어·연어·문어 등을 철따라 잡아 간이 맞게 말려서 올려 보내게 하였다. 그밖에도 여러 가
지 힘든 일들을 인내로 참으며 북경으로 들여보낼 처녀들을 최종적으로 정하기 직전에, 뜻밖에 영
락제의 부음이 전해졌다. 고령의 몸으로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달단군(몽골의 후예) 토벌에 나섰다가
졸지에 야전에서 횡사하는 액운을 당한 것이다. 명나라에는 청천벽력이었을 변고가 조선에는 다
시 있기 어려운 크나큰 축복이 되었다.
그해 9월 1일에 평안도 감사로부터, ‘명나라의 영락제(64세)가 7월 18일에 야전에서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그날로 뽑아놓은 처녀와 화자들을 모두 역마에 태워서 집으로 돌려보냈다..53 하
지만 앞서 미녀로 뽑혀 들어가 여비麗妃가 되어서 영락제의 총애를 누리던 한씨는 강제로 목숨이
끊겨서 죽은 영락제의 묘에 순장되었다.
구분
단원으로 차출된 사람
받은 작위
사망
시기 처녀 나이 보호자 연도 원인 나이
1차
(5명)
1408년 11월
(태종 8)
권씨 18세 권영균 현인비(현비) 1410년 질병 20세
임씨 17세 임첨년 순비(順妃) 1421년 자살 30세
이씨 17세 이무창 소의(昭儀) 1421년 참수 30세
여씨 16세 여귀산 첩호(婕好) 1413년 낙형 21세
최씨 14세 최득비 미인(美人) 1424년 순장 29세
2차
(1명)
1410년 10월
(태종 10)
정씨 18세 정윤후 - 1421년 자살 29세
3차
(2명)
1417년 7월
(태종 17)
황씨 17세 황하신 - 1421년 참수 21세
한씨 미상 한영정 - 1424년 순장 미상
표2. 태종 연간에 미녀로 뽑혀서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생애
<표2>는 영락제 재위 22년 동안 조선에서 미녀로 뽑혀서 공녀로 바쳐진 여덟 처녀의 말로를
요약한 것으로, 한 명도 예외 없이 30살 이전에 세상을 떴음을 보여준다. ‘미상’으로 되어 있는 마
지막의 한씨 역시 뽑혀갈 때의 나이를 아무리 높게 잡아도 30살을 넘겼을 가능성이 낮다. 1차로
53 『世宗實錄』 卷25, 世宗 6年 9月 1日. “命退回各道處女及火者, 竝皆給驛.”
고궁문화 제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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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진 다섯 명은 모두 작위를 받았으나, 이후로 보내진 3명은 공식 작위를 받지 못했다.
여덟 명의 공녀가 명나라에서 생존한 기간은, 2년(권씨), 4년(황씨), 5년(여씨), 7년(한씨), 11년(정씨), 13년(임씨, 이씨), 16년(최씨)에 불과하다. 태종 8년에 처음으로 바쳐진 다섯 명 가운데 황제의 총애를 누렸던 권씨(현인비)는 고작 2년도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그 나머지 일곱 명은 남의 모함을 받아 누명을 쓰고 죽거나, 난리 통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혹은 황제가 죽은 뒤에 함께 순장되었다.
Ⅵ. 동생 한씨 진헌과 공녀들의 극적 생환
1. 여비麗妃 한씨의 최후와 유모 김흑
영락제의 부음이 전해지고 얼마 있다가 명나라로부터 사신 네 명이 동시에 나왔다. 황태자였던 영락제의 아들 주고치朱高熾(46세)가 홍희제로 등극한 사실을 알리러 이기와 팽경이 오고, 영락제의 부고를 전하러 유경과 진선이 온 것이다. 그런데 그 이름은 분명치 않으나, 함께 온 네 명 가운데 누군가가 임금에게 조선에서 황제에게 바친 여덟 공녀의 비참한 말로를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에 ‘어여의 난’ 때 용케도 죽음을 면했던 한씨와 최씨가 황제의 묘에 순장되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사신에 의하면, 황제가 죽자 30여 명의 궁인이 더불어 함께 순장되었다. 순장할 여인들을 강제로 죽이던 날, 뜰에서 모두에게 음식을 먹이고 나서 함께 마루에 끌어 올리니, 곡성이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는,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 버리니, 모두 밧줄에 목이 졸려서 숨이 멎었다.54
한씨가 죽기 직전에 유모 김흑을 돌아보며, “내가 죽거든, 내가 죽거든....”하고 유언을 남기려하였으나, 말이 끝나기에 앞서 곁에 있던 환자가 걸상을 빼내니 한씨와 최씨가 함께 황제를 따라갔다. 순장될 자들이 마루에 올라가기 직전에 새 황제 홍희제가 친히 들어와 고별인사를 전하자, 한씨가 울면서, “우리 어미가 노령이니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하니, 황제가 즉석에서 허락하였다.
그런데 한씨와 최씨가 죽고 나서 새 황제가 김흑을 조선으로 송환하려고 하자, 궁중의 여인들이 나서서 극구 말렸다. 그 이유인즉슨, 그녀가 귀국하여 ‘어여의 난’을 퍼뜨리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황제를 만류한 여인들의 말이 어떤 경로를 통해 조선에 전해졌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54 최진아, 「韓·中 여성 교육서의 서사책략과 문화이데올로기-15세기 明·朝鮮의 《內訓》을 중심으로」, 『중국인문과학』44(중국인문학회, 2010), pp. 279~292; 임상훈, 앞의 논문(2017), pp.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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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비극
근래 있었던 ‘어여의 난’은 이제까지 유례가 없었던 큰 사건입니다. 조선은 나라도 크고 임금도 어질어서 중국 다음으로 여길 만할
뿐더러, 옛글에 이르기를, “처음에 불교가 여러 나라로 퍼져나갈 때 조선으로 중화中華를 삼으려다가, 나라가 작아서 중화로 삼지 않
았다고 합니다. 또, 전대에는 요동의 동쪽이 조선에 속하였으니, 조선이 다시 요동을 차지하면 중국도 맞서기가 어렵게 될 것이니, 이
러한 변란이 조선에 알려지면 곤란하옵니다.55
궁중 여인들의 반대에 직면한 새 황제는 조선에서 환관으로 뽑혀 들어간 윤봉을 불러서 김흑
을 조선으로 보내줄 묘안을 물었다. 김흑이 귀국해서 ‘어여의 난’을 누설할 가능성을 염려해 그녀
의 입을 봉쇄할 방도를 물은 것인데,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질문을 받은 윤봉이, “사람마다 제각
기 마음이 다르니 소인이 어찌 알 수가 있겠습니까.”라며 몸을 움츠리자, 황제가 김흑을 돌려보내
는 대신 특별히 공인恭人으로 봉해주었다.
이 무렵 조선에서는 황친인 임첨년·한확·최득비 등을 조문사절로 임명하고, 편전에서 연회를
열어 위로하였다. 하루 뒤에는 북경에 들어갈 세 명에게 여행경비로 각각 베 80필을 주게 하고, 한
확에게는 여행경비와 별도로 40필을 더 주도록 하였다. 20필은 영락제의 영전에 향을 올리는 데
쓰고, 나머지 20필은 영락제와 함께 순장된 여동생의 영전에 향을 올리는 데 쓰라고 한 것이다. 하
루 뒤에 임첨년과 최득비가 먼저 출발하고, 한확은 사정이 생겨서 닷새 뒤에 출발하였다.
2. 선덕제 등극과 한씨의 여동생 진헌
여비 한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조문사절단이 출발하고 두 달쯤 지나서 광록대경 권영균이
숨을 거뒀다. 16년 전인 태종 8년 11월에 공녀로 진헌된 여동생이 영락제의 후궁(현인비)이 되어
각별한 신임과 총애를 받은 덕분에 평생 귀인 대접을 받다가 죽은 것이다. 『세종실록』을 편수한
사관들은, “영균이 갑자기 부유하고 귀하게 되어 나라의 권력자들과 어울리며 교만하게 굴었으
며, 주색을 좋아하다가 일찍 죽었다.”고 적어놓았다.
그 다음해 3월 첫째 날, 영락제의 죽음을 조문하러 북경에 들어갔던 임첨년·한확·최득비 등
이 귀국하니, 세종이 세 사람을 위해 연회를 베풀고 노고를 치하하였다. 이날 연회에 효령대군
이보李補, 1396~1486, 경녕군 이비李裶, 1395~1458, 함녕군 이인李䄄, 1402~1457, 영돈녕부사 유정현, 좌의정
이원李原, 1368~1429, 지돈녕부사 이담李湛, ?~1431,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 1370~1447, 그리고 여섯 대언 등
이 배석한 것으로 미루어 임금이 각별히 신경을 썼음을 짐작할 수 있다.
80일쯤 뒤에 명나라로부터 황제가 내린 제사를 가지고 김만이 사신으로 와서 권영균의 유족
을 방문해 제사를 올렸다. 그 직후에 명나라 황제가 홍희제에서 선덕제로 바뀌었다. 홍희제는 성
품이 침착하면서 독서를 좋아하고 행동에 절도가 있었으나, 건강이 나빠서 즉위하고 2년도 채 안
되어 아들에게 황제자리를 넘겼다.
그런 곡절이 있었던 관계로, 홍희제가 황제로 있었던 동안은 명나라로부터 어린 화자나 미녀
55 『世宗實錄』 卷26, 世宗 6年 10月 17日. “前後選獻韓氏等女, 皆殉大行皇帝.”
고궁문화 제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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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뽑아서 보내라는 요구가 없었다. 하지만 황태자였다가 홍희제의 뒤를 이어 새 황제인 선덕제가 된 주첨기朱瞻基(27세)는 나이어린 소녀들을 유독 좋아하는 호색한이었다.
선덕제는 황제가 된 다음 해 3월, 조선에서 화자로 뽑혀 들어간 윤봉과 백언을 사신으로 내보내 미녀를 뽑아서 들여보내라고 요구하였다. 그때 사신으로 나온 윤봉과 백언은 조선에서 선덕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신을 보내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하는 칙서와 예물을 전하기 위해 모국을 방문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서울에 도착하여 의식에 따라 칙서를 전달한 윤봉은 황제가 특별지시가 있었다며 구두로 그 내용을 전했다.
조선에 가거든 왕에게, ‘나이 어린 소녀들을 뽑아 놓으면 내년 봄에 사람을 보내 데려오겠다.’고 전하라. 또, ‘음식을 만들 줄 아는 여자종들도 함께 뽑아서 들여보내라.’는 말도 전하도록 하라.56
윤봉의 말을 통해 선덕제의 요구를 청취한 세종은 곧바로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실무를 전담할 진헌색을 설치하였다. 소녀들을 뽑는 방식은 2년 전에 적용했던 방식을 똑같이 따르게 하였다. 4개월 동안 전국의 고을을 뒤져서 11살부터 16살 사이의 소녀 다섯 명을 선발하였다. 윤봉 일행은 먼저 출발하고, 한 달쯤 뒤에 상호군 김시우가 다섯 소녀의 신상명세를 가지고 뒤따라갔다.
시우가 돌아오는 편에, 윤봉이 ‘처녀들을 더 들여보내라.’는 서찰을 보내와, 7명을 뽑아서 들여보냈다. 전년에 뽑아둔 5명 중에서 3명을 고르고 4명을 새로 뽑아서 7명을 채웠다. 새로 뽑은 4명 중에는 총제 성달생의 딸도 포함되어 있었다. 요리를 담당할 하녀 10명도 함께 들여보냈다. 전년에 뽑아둔 6명과 새로 뽑은 4명을 합한 인원이었다.
이때 사신들이 일곱 처녀 이외에 한확의 여동생인 한계란을 뽑아놓고 갔다. 먼저 뽑혀 들어가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다가 영락제와 함께 순장된 한씨의 여동생이 뛰어난 미색이라며 특별히 한계란을 발탁한 것이다. 그런데 그 배후에 한씨의 오빠인 한확의 입김이 작용한 모양이었다. 사신들이 돌아갈 무렵 한씨가 돌연 병이 나서 함께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때 한씨가 오빠인 한확에게 막말을 하였다.
친오빠인 한확이 약을 구해다가 동생인 한씨에게 먹으라고 권하니, 한씨가 약을 먹지 않고, “언니를 팔아서 이미 부귀가 극진한데 무엇을 더 바라고 약을 쓰려 하느냐.”고 독설을 퍼부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집갈 때 가져갈 혼수품으로 마련해둔 침구를 칼로 찢어버리고 지녔던 재물도 모두 친척들에게 나눠주었다.57
5개월쯤 뒤에 명나라로부터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범영과 유정이 사신으로 왔다. 그보다 앞서 세자를 황제에게 보내기로 황제와 협의가 되었는데 황제가 돌연 세자가 아직 학문에 힘쓸 나이인
56 『世宗實錄』 卷31, 世宗 8年 3月 12日. “爾去朝鮮國, 對王說年少的女兒選下者等, 明春着人去取.”
57 『世宗實錄』 卷36, 世宗 9年 5月 1日. “處女韓氏, 永矴之季女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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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비극
데다 여행이 어려울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세자를 들여보내지 말라고 전해온 것이다.
그래서 이미 서울을 출발해 요동까지 갔었던 세자가 서울로 되돌아오고 칙서를 가져온 사신들
도 서울에 왔는데, 사신들을 따라온 수행원이 임금에게 명나라 소식을 자세하게 전한 모양이었다.
사신들이 도착하여 엿새 째 되던 날 임금이 전날 사신의 수행원 황철로부터 들었다며 대신들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내용인즉슨, “황엄이 죽은 뒤에 관棺이 베이는 벌을 받았고, 그
의 아내와 노비들은 관에 몰수되어 종이 되었다.”는 줄거리였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명나라에 뽑혀 들어가 권씨를 독살한 혐의로 능지처참된 여씨 여인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전에 사신으로 다녀간 윤봉에게서 들었다며, “아무런 죄가 없는 여씨가, 영
락제 때 명나라 궁중을 제 마음대로 주물렀던 황엄의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은 사실이 마침내
밝혀져, 나라의 수치가 좀 씻어졌다.”고 소회를 밝힌 것이다.58
1년쯤 세월이 흘러서 홍려소경 최득비가 죽으니, 임금이 관곽과 쌀·콩을 아울러 20석과 종이
70권을 내려주었다. 그로부터 7개월쯤 뒤에 선덕제의 명을 받은 김만이 제문과 제물을 받들고 와
서 최득비의 영전에 바쳤다. 그해 7월 명나라로부터 창성·윤봉·이상이 사신으로 와서 한씨 처녀
를 데려갔다. 사신들이 돌아가기 전에 중궁이 한씨를 경회루 아래로 초대해 송별연을 열어주었다.
이틀 뒤에 한씨가 사신들을 따라 북경으로 출발하였다.
총제 조종생이 진헌사로 들어가고 한씨의 오빠인 광록소경 한확도 함께 따라갔다. 양갓집 부
녀자들이 한씨의 행차를 바라보며, “언니가 들어가 순장된 것도 애석한 일인데, 동생이 또 간다.”
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한씨를 일컬어 ‘산 송장’이라고 수군
거렸다.59
하지만 명나라에 들어간 한씨는 선덕제(5대)의 후궁이 되어서 황제의 두터운 신임과 총애를 누
렸으며, 선덕제가 죽은 뒤에는 정통제(6대)를 거쳐 경태제(7대)에 이르기까지 명나라 황실에서 어른
대접을 받으며 모국인 조선의 국익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런 한씨가 뽑혀서 들어간 뒤로는 명나라로부터 음식을 잘하는 요리사와 노래를 잘하는 여가
수들을 뽑아서 보내라는 요구가 잇따라, 이후 약 5년에 걸쳐서 요리사 32명과 여가수 8명을 들여
보냈다. 그런데도 세종 재위 16년에 또다시 요리사 진헌을 요청해, 10명을 뽑아서 실습을 시키는
데, 선덕제의 부음이 전해졌다.
서른일곱 살이던 선덕제가 즉위한 지 12년 만에 돌연 죽은 것인데, 조선의 임금에게는 생각지
도 못한 뜻밖의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세종은 곧바로 강의와 실습을 중단
하고 처자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58 『世宗實錄』 卷38, 世宗 9年 10月 30日. “呂氏之死, 實本國之恥, 而今稍雪矣.”
59 『世宗實錄』 卷42, 世宗 10年 10月 4日. “三使臣陪韓氏, 至有垂泣者, 時人以爲生送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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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녀·여가수·요리사 등 53명 송환
선덕제의 부고와 유언이 전해지고 3개월쯤 지나서, 미녀로 뽑혀 들어간 공녀들의 몸종으로 따라갔던 하녀 아홉 명, 여가수 일곱 명, 요리사 서른일곱 명이 단체로 귀국하였다. 나이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국정을 관장하던 태황태후가 자비를 베풀어 여인들을 돌려보내준 것이다. 영락제가 즉위한 이후로 도합 98명(요리사 42명, 여가수 8명, 하녀 48명)이 뽑혀간 가운데 약 절반 정도인 53명이 살아서 왔다.
돌아오지 못한 45명(46%)에 대하여는 실록에 아무런 기록이 없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상 명나라 현지에서 모두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덕제 재위 중에 미녀로 뽑혀 들어간 8명의 생사에 관해서도 한씨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은 실록에 기록이 없다. 돌아온 여인들이나 그들을 인솔해온 조선인 환관들이 소식을 전했을 법도 한데, 아주 짧은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다. 오직 한확의 막내 여동생 한계란의 경우만 생애기록이 소상히 전해질 뿐이다.60
그런데 돌아온 53명 가운데 영락제와 함께 순장된 여비 한씨의 몸종이었던 김흑이 포함되어 있었다. 임금 앞에 나아간 김흑은 홍희제의 미망인으로부터 받은 ‘공인(5품)’고명을 바치며, 태황태후의 자비로 여인들이 돌아오게 된 사연을 자세하게 아뢰었다. 고명에는 김흑 본인의 노고와 더불어서 한씨 부인이 생전에 어질고 맑은 마음으로 황제를 섬겼다는 내용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너 김씨는 고 강혜장숙여비康惠莊淑麗妃(한씨)의 유모였다. 여비麗妃(고려에서 온 왕비, 즉 한씨)는 공손히 선황제(영락제)를 섬겨서 ‘어질고 정숙하다.’는 칭송을 듣다가, 영락황제께서 승하하시자 몸을 버려 순장되어, 조정에서 봉작과 시호를 내려서 어질었던 행실이 빛나게 하였다. 너는 옛날에 그녀를 뒷바라지한 공로가 있어서 특별히 공인으로 봉하니, 이 광영을 공경하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61
보름 남짓 지나서 세종이 김흑 등을 대궐로 불러서 대화를 나누었다. 짐작컨대 이 자리에서 김흑이, 여씨 여인이 영문도 모르고 누명을 쓰고 참혹하게 죽은 이야기와 ‘어여의 난’의 전모를 상세히 전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흑이 보고를 마치자 임금이 일행에게 음식을 먹여서 내보낼 것을 지시하였다. 김흑 등이 각각 비단 등을 바치니, 쌀·콩·무명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두 달쯤 뒤에 원민생이 세상을 떴다. 『세종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에 따르면, 원민생은 중국어에 능통하여 중국을 21번(통역 14회, 사절단장 혹은 부단장 7회)이나 다녀왔다. 또 현인비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영락제로부터 특별히 후한 대접을 받았다. 이를 기회로 임금이 황제에게 청하는 일마다 승낙을 잘 받아와, 나라에서 특별히 토지와 노비를 내리고 벼슬을 정헌대부까지 올려주었다.62
60 한희숙, 앞의 논문(2017), pp. 141~169.
61 『世宗實錄』 卷68, 世宗 17年 4月 26日. “使臣李忠·金角·金福等, 奉勑率處女從婢九名、唱歌婢七名、執饌婢三十七名來, 上迎至景福宮, 受勑如儀.”
62 『世宗實錄』 卷69, 世宗 17年 7月 30日. “前仁順府尹元閔生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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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비극
Ⅶ. 맺음말
이상에서 자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명나라 황제인 주원장에게 문서로,
“억만년이 되어도 항상 조공하고 축복하는 정성을 바치겠다.”고 약속하는 바람에, 아무런 죄도 없는
조선의 어린 소녀들이 강제로 황제에게 진헌되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다 참혹하게 생을 마쳤다.
황제의 명을 받고 미녀들을 뽑으러 나왔던 명나라 사신들의 오만과 탐욕이 말할 수 없이 심하
였다. 미녀들을 직접 간택하기 위해, 조선에서 미녀로 뽑아놓은 처녀들을 데려가기 위해, 혹은 처
녀들의 부모가 죽어서 황제가 내려준 제사를 전한다는 구실로 시도때도 없이 조선을 드나들며 내
키는 대로 헤집고 다니며 온갖 폐단을 일으켰다.
영락제 재위 22년 동안 여덟 명의 어린 소녀가 공녀라는 이름으로 황제에게 진헌되었으며, 여
덟 명 전원이 30살을 넘기지 못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1차로 뽑혀 들어간 다섯 명 가운데 권
씨 처녀는 미모가 빼어나면서 두뇌가 총명하고 재주가 많아서 영락제의 총애를 누렸지만 2년을
넘기지 못하고 병으로 숨을 거뒀다.
3차로 뽑혀 들어간 한씨 처녀도 권씨 못지않게 미모가 출중하면서 머리회전이 빠르고 처신이
슬기로워 영락제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영락제가 숨을 거두자 함께 순장되는 비운을 맞았다. 한씨
와 함께 미녀로 뽑혀 들어간 황씨 처녀는 임신경험이 탄로 나 온갖 멸시와 천대를 당하다 황제에
의해 목이 잘렸다. 나머지 여섯 명도 하나같이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남의 모함을 받
아 누명을 쓰고 불에 달군 쇠붙이로 고문을 당하다 죽거나, 난리 통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혹은
난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허망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 결과 태종 재위 기간에 미녀로 뽑혀서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명의 공녀가 명나라에서 생
존한 기간은, 2년(1명), 4년(1명), 5년(1명), 7년(1명), 11년(1명), 13년(2명), 16년(1명)에 불과하였다.
미녀로 뽑혀서 황제에게 공녀로 진헌된 처녀들의 아버지, 오빠, 형부 등도 공녀들의 보호자 겸
외교사절의 임무를 수행하는 고초를 겪어야 하였다. 형식적이나마 사위, 매제, 혹은 동서 격인 명
나라 황제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행차를 하거나, 혹은 군대를 이끌고 적과 싸워서 이기고 돌아오
면 문안사절단을 구성하여 왕복 2개월이 걸리는 먼 길을 무시로 다녀와야 하였다. 국익증진에 기
여한다는 자부심과 보람도 컸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더위·추위·바람·눈·비 같은 악조건이 수시로
닥쳤을 것을 감안하면, 자부심이 컸던 만큼 숙식과 이동 등에 어려움이 컸을 것이 분명하다.
끝으로, 이상과 같이 최선을 다하여 조선개국 초기에 미녀로 뽑혀서 황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잔혹사와 그 혈육(황친)들의 애환을 함께 복원해보았으나, 자료와 지면의 한계 등으로 더 깊이 파헤치
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이번 연구가 6백 년 전에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
게 나라에 의해 억지로 황제에게 바쳐졌다가 꽃다운 나이에 비참하게 죽은 처자들의 억울함을 조금
이라도 달래주고, 현재도 진행형인 약소국가의 설움과 시련을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고궁문화 제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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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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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문화 제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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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주제어
공녀 | 진헌 | 순장 | 황친 | 문안사절단
명나라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비극
이 연구는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을 토대로 조선 초기에 미녀로 뽑혀서 명나라 황제에게 공녀로 바쳐졌다가 불과 얼마 뒤에 비참하게 죽은 어린 소녀들의 잔혹사를 추적해본 결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영락제 재위 22년 동안 여덟 명의 어린 소녀가 공녀라는 이름으로 황제에게 진헌되었으며, 여덟 명 전원이 30살을 넘기지 못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1차로 뽑혀 들어간 다섯 명 가운데 권씨 처녀는 미모가 빼어나면서 두뇌가 총명하고 재주가 많아서 영락제의 총애를 누렸지만 2년을 넘기지 못하고 병으로 숨을 거뒀다. 3차로 뽑혀 들어간 한씨 처녀도 권씨 못지않게 미모가 출중하면서 머리회전이 빠르고 처신이 슬기로워 영락제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영락제가 숨을 거두자 함께 순장되는 비운을 맞았다. 한씨와 함께 미녀로 뽑혀 들어간 황씨 처녀는 임신경험이 탄로 나 온갖 멸시와 천대를 당하다 황제에 의해 목이 잘렸다. 나머지 여섯 명도 하나같이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남의 모함을 받아 누명을 쓰고 불에 달군 쇠붙이로 고문을 당하다 죽거나, 난리 통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혹은 난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허망하게 죽음을 맞았다. 그 결과 태종 재위 기간에 미녀로 뽑혀서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명의 공녀가 명나라에서 생존한 기간은, 2년(1명), 4년(1명), 5년(1명), 7년(1명), 11년(1명), 13년(2명), 16년(1명)에 불과하였다.
미녀로 뽑혀서 황제에게 공녀로 진헌된 처녀들의 아버지, 오빠, 형부 등도 공녀들의 보호자 겸 외교사절의 임무를 수행하는 고초를 겪어야 하였다. 형식적이나마 사위, 매제, 혹은 동서 격인 명나라 황제가 남경에서 북경으로 행차를 하거나, 혹은 군대를 이끌고 적과 싸워서 이기고 돌아오면 문안사절단을 구성하여 왕복 2개월이 걸리는 먼 길을 수시로 다녀와야 하였다. 국익증진에 기여한다는 자부심과 보람도 컸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더위·추위·바람·눈·비 같은 악조건이 수시로 닥쳤을 것을 감안하면, 자부심이 컸던 만큼 숙식과 이동 등에 어려움이 컸을 것이 분명하다.
조병인
前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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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영락제에게 진헌된 여덟 공녀의 비극
Abstract
A Study on Eight Young Girls presented to
Ming’s Yongle Emperor
Keywords
presented girl | dedication | burial of the living with the dead (as an attendant on the death of his lord) | relative of emperor |
greeting delegation
This study examines the tragic life of the young girls who were singled out by early Joseon dynasty
as the fairest of the fair, presented to the Ming’s Emperor, and passed away miserably. In
total, eight young girls were chosen to be dedicated to the Yongle Emperor, who ruled the Ming
Empire for 22 years. All of them sorrowfully died before the age of 30.
At first, five girls were presented. Among them was Miss Kwon, who was outstandingly beautiful
and remarkably brilliant, who enjoyed the Emperor’s special affection but fell ill and died
within two years. Miss Han, the third to be devoted, also enjoyed the Emperor’s concern and
affection due to her refined appearance and noticeable intellect; however, she was buried alive
along with the dead Emperor.
Miss Hwang, presented together with Miss Han, was pitiably scorned and killed by the Emperor
when he became aware of the fact that she had been pregnant. The remainders suffered
an equally tragic fate. All six women died by torture, suicide, or cruel massacre. As a result, the
eight presented girls’ lives had barely lasted two years (1), four years (1), five years (1), seven
years (1), 11 years (1), 13 years (2), and 16 years (1).
Fathers, brothers, or brothers-in-law of the presented girls suffered hardship as their guardians
and as diplomats for the nation. They had to pay visit to the Emperor, who was only formally
their son-in-law or brother-in-law, whenever he arrived in Beijing or won a battle against the
enemy. This was not an easy task because of both the long distance and the frequent nominations.
In fact, although they were proud of their contribution to national interests, unusual
weather such as extreme heat, cold, wind, snow, rain, etc., could cause trouble in line with eating,
sleeping, and transportation.
Cho Byung In
Former senior researcher, Korean Institute of Crimin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