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88
5월12일[부활 제5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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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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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mLj-j6D-Fn8 (김보습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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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나처럼 큰 죄인에게 친구 맺기를 신청하십니다!>
인디언 사회에서 이런 멋진 속담이 있습니다. ‘친구는 내 슬픔을 자기 등에 지고 가는 사람.’ 혹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친구 단 한 명이라도 있었는지요?
내 슬픔, 내 고통, 좌절을 자기 등에 지고 가는 사람!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해주고 극진히 아껴주는 사람, 지치고 힘들 때 그의 얼굴만 떠올려도 다시 살아야겠다는 힘과 용기를 주는 사람, 존재 자체만으로도 눈물겹도록 감사한 사람, 억만금을 다 준다 해도 바꾸고 싶지 않은 사람...
그런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때로 황량하고 거칠며, 때로 모질고 험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든든한 친구 한 명 쯤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런 친구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인지라, 세월이 흐르면서 존재의 취약함과 한계가 드러나고, 상처와 실망을 주고받으면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 우리네 보편적인 인간관계의 모습인 듯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친구, 늘 든든한 친구, 세상 모든 사람이 떠나가도 끝까지 나를 떠나지 않고 내 곁을 지켜줄 영원한 친구가 한 분 우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원래 우리의 하느님이요 창조주이자 구원자셨습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께서 이 땅에 육화강생 하셔서 우리 곁에 가까이 오셨습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눈에 포착되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따뜻하고 자상한 목자요 스승으로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와 은총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스승이요 목자요 아버지이신 예수님께서 또 다시 당신의 권위와 위치를 포기하시고, 이제 아예 우리와 친구가 되자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친구 맺기를 신청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자기 낮춤이며 겸손입니까?
주님께서는 나처럼 흠 많고 허물투성이인 사람에게도 친구 맺기를 하자고 다가오실 것이니, 이 얼마나 은혜롭고 기쁜 일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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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_wL03gRzx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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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하면 무조건 들어주십니다>
기도해도 들어주시지 않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1. 부정한 동기, 2. 회개 없음, 3. 약한 믿음, 4. 하느님 계획과 반대되는 기도, 5. 끈질기지 못함 등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것은 ‘자격 없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은총을 줘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에 계속 은총을 소비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내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 열매를 맺는 가지인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영화 ‘몬테 크리스토 백작’(The Count of Monte Cristo, 2002)은 친구의 여인을 사랑한 페르난도가 친구 에드먼드를 반역죄로 몰아 탈출할 수 없는 감옥에 갇히게 하여 자신이 친구의 아내와 결혼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에드먼드는 결혼식 당일에 체포되어 샹티요 감옥에 갇히고, 그의 미래와 사랑을 모두 빼앗깁니다. 그는 감옥에서 고독과 절망에 시달리며 13년을 보내게 됩니다. 이 감옥에서 아베 신부를 동료 수감자로 만나고 그에게 글도 배우고 검술도 배워 결국 탈출에 성공하여 몬테크리스토 섬에 숨겨진 보물도 찾습니다.
에드먼드는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파리 사회에 재진입하며, 그의 적들을 하나씩 파멸시킵니다. 그는 페르난도 몬데고를 파산시키고, 그의 이전 상사인 덩글라르를 범죄자로 만들며, 그의 배신자인 빌포르를 미쳐버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에드먼드는 복수의 경로가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를 사랑했던 메르세데스가 그들의 아들을 키우기 위해 페르난도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페르난도는 지금까지 키운 아이가 자기 아들이 아님을 알고 나서는 그 아들마저 죽이려 합니다. 이미 복수에 지쳐있었던 에드먼드였지만, 자기 아들을 지키기 위해 페르난도를 죽이고 결국 복수를 완성합니다.
우리에게 들어오는 성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처럼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 성령님을 살리는 길은 열매가 유지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란 사랑입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 아들을 죽이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가지를 잘라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해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가지는 열매를 맺어야 수액을 청할 자격을 얻게 됩니다. 기도하면서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받은 성령께 아버지를 향해 칼을 치켜들게 만드는 일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라고 계속 성령님을 보내시지는 않습니다.
아들은 195cm, 아버지는 134cm인 부자가 있습니다. 배구 선수 한성정 씨와 그의 아버지 한은범 씨입니다. 한은범 씨는 어렸을 때 사고로 뼈가 튀어나오며 자라지 못하는 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는데 다행히 몸이 정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보다 더 키가 커서 배구 선수로 뽑혔습니다.
누구보다 자랑스러운 아들을 아버지는 몰래 응원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까, 주변에서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하고 염려하며 경기장에 가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다른 부모님은 배구장에 오시는데 아버지는 왜 안 오시냐”라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네가 괜히 기죽을까 봐”라고 답했습니다. 한성정은 “오히려 그 말씀이 너무 서운했다”라고 합니다. 아들은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 아버지가 오시면 제가 더 힘이 나고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가 아버지 욕하면 내가 가만히 두지 않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고 그 이후부터는 한 경기도 빠지지 않고 수백 킬로를 달려서 경기장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무 이유 없이 아버지를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고 사랑할까요? 사랑은 준 것을 되돌려 받는 것입니다. 아들은 자신을 위해 아버지가 한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손을 매만지며, “날 위해 온갖 일을 다하셨다. 내가 어릴 적, 차가운 물 속에서 오랫동안 수도 관련 일을 하며 동상에 걸리셨다”라며 “요즘에는 손도 잘 구부러지지 않는다. 지문도 거의 없다”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피를 흘리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열심히 훈련하여 좋은 선수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집도 지어드리고 차도 사 드렸습니다. 남들이 훈련을 땡땡이치고 도망갈 때 한성정 선수는 그럴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지신을 위해 피땀을 흘리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은총을 받으려면 그 은총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아버지께 청하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지켜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이 청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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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팬데믹이 끝나면서 신문사에도 손님들이 찾아오곤 합니다. 올해에도 선배 신부님이 한 분 왔습니다. 공항으로 마중 나가면서 손님맞이가 시작됩니다. 오는 길에 마트에 들려서 장을 봅니다. 숙소에 들어오면 간단한 안내를 합니다. 세탁기 사용법, 문의 비밀번호,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위한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알려줍니다. 지하철을 타려면 매트로 카드를 빌려줍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지내면 됩니다. 기상시간이나, 식사시간은 따로 정하지 않습니다. 아침식사를 하지 않는 분들도 많고, 여행을 왔으니 편한 시간에 일어나는 것도 좋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좋아하는 분은 공원이나 산으로 가고, 문화를 좋아하는 분은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합니다. 직원미사에 함께 하기도 하고, 주일미사에 같이 가기도 합니다. 후배 신부님도, 동창 신부님도, 선배 신부님도 잘 지내다 가면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모처럼 교구의 이야기도 듣고, 사제들이 함께 있으니 신학교 생각도 나고 좋습니다. 신학교에서 부르던 성가가 있습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 한지고, 형제들이 오손도손 한데 모여 사는 것 오직 하나 하느님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 한 평생 주님의 집에 산다는 그것”
신학교에서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6시에 일어났습니다. 6시 30분에 아침기도와 미사가 있었습니다. 8시에 아침식사가 있었습니다. 9시부터 수업이 있었습니다. 12시에 양심성찰이 있었습니다. 12시 30분에 점심식사가 있었습니다. 2시 30분에 오후 수업이 있었습니다. 6시에 저녁식사가 있었습니다. 7시 15분에 묵주기도와 저녁기도가 있었습니다. 10시에는 취침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10년을 신학교에서 지냈습니다. 규칙이 있어서 불편하기도 했지만 규칙이 있어서 학업과 기도를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애벌레는 땅을 기어 다녀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나비가 되면 땅을 기어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생은 신학교의 규칙을 지켜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사제가 되면 굳이 신학교의 규칙을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시간을 조절하고, 절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당에서도 식사 표시만 하면 되었습니다. 안 먹는다는 표시를 하면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기도시간을 따로 정하지는 않지만 알아서 기도하는 시간을 만들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유로운 시간이 좋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만의 기도시간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영적인 갈망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티오키아 교회에 사도들을 보내면서 공동체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교회는 아직 유대인들의 관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티오키아의 교회는 이방인들의 교회였기에 유대인들의 관습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교회는 함께 모여서 기도하였고, 이방인들의 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유대인들의 관습인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지켜야 했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의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환영하였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는 조상들의 제사문제 때문에 선교에 어려움을 겪었고, 박해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조상들의 제사는 한국의 고유한 관습이며 전통이었는데 교회는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교회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인정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설날과 추석에 조상들에 대한 차례를 지낼 수 있도록 규정을 마련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율법의 굴레를 씌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사랑이라는 날개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율법과 규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언제나 기도할 수 있고, 항상 감사드리며, 늘 기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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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5주간 목요일)
예전에 성소국에 있을 때입니다. 직원이 출산 휴가를 가면서 임시로 직원을 뽑았습니다. 일을 하는 사람의 유형은 4가지 정도 있습니다. 해야 할 일도 잘하지 못하고, 출근은 늦고, 퇴근은 빠른 직원입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은 하고, 출근과 퇴근이 정확한 직원입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믿음이 갑니다. 해야 할 일도 잘 하지만, 사람들을 기쁘게 맞이하는 직원입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기분이 좋습니다. 해야 할 일도 잘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로 분위기를 바꾸는 직원입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오래 같이 일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임시로 온 직원이 4번째 경우였습니다. 잘 모르는 것은 늦게까지 배우려고 하였습니다. 어수선한 책장도 깔끔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일정표 관리도 늘 해야 하는 일과 특별한 일을 구분하여 정리하였습니다. 홈페이지에 사진을 올리는 것도 주제별로 보기 좋게 올렸습니다.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두었는데 결혼 생활도 아름답게 할 것 같았습니다.
신앙생활도 4가지의 유형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곧 시들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일에 금세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입니다. ‘때문에’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덥기 때문에, 춥기 때문에 성당에 못 나온다고 합니다. 본당 신부님 때문에, 대모 때문에 성당에 못 나온다고 합니다. 몸에 걸치는 장신구처럼 마음에 들면 성당에 가고, 그렇지 않으면 가지 않습니다. 주일 미사에 참례하고, 피정과 교육에도 참석하지만 의무감으로 성당에 오는 사람입니다. 죄책감과 두려움 때문에 성당에 오기에 기쁨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 분들의 마음이 활짝 열려서 신앙이 감사와 기쁨으로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주일미사는 물론 평일 미사에도 참례하는 사람입니다. 본당의 여러 단체에서 봉사합니다. 반 모임에도 자주 참석하고, 대자들에게도 신앙의 모범을 보입니다. 밤하늘에 별들이 있어서 아름답듯이 이런 분들이 있어서 공동체가 활력이 넘치게 됩니다. 기름진 땅에 떨어진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듯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산해숭심(山海崇深)’이란 말처럼 영성이 깊은 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있는 분들입니다. 기도, 말씀, 봉사의 삼위일체를 이루는 분들입니다.
성직자들의 유형도 4가지 정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듯이 목자로서 자질이 부족한 사제입니다. 편을 가르기도 하고, 말과 행동에 품위가 없습니다. 성사를 기분대로 집전하고, 강론 중에 훈계하거나 야단치는 사제입니다. 취미활동에 집중하느라 공동체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사제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제입니다. 형식과 법에 얽매여 있는 사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비난하셨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모습을 보이는 사제입니다. 복음의 기쁨이 아니라 복음의 의무로 사는 사제입니다.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타인의 작은 티를 먼저 보는 사제입니다. 겸손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사제입니다. 어르신들에게 예의를 다하고, 청소년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사제입니다. 장례가 나면 거리가 멀어도 기꺼이 연도를 가는 사제입니다. 본당에 활력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더욱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제입니다. 교우들은 물론 동료 사제들에게도 존경받는 사제입니다. ‘덕향만리(德香萬里)’라는 말처럼 사제의 인품이 주위에 진한 감동을 줍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재물보다 가난을 택하고, 건강보다 아픔도 택하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도 택하는 사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임시직이었지만 아름다운 향기를 보여준 성소국의 직원처럼 우리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성직자들이 주님께서 지고 가셨던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가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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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12-17: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다른 모든 계명도 지키게 될 것이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모든 계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라는 말씀은 바로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주님께서는 친구들뿐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러니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그분과 사귄다는 말이다. 사귄다는 것은 친구가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친구가 되게 해 주셨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우리는 단계적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의 삶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그분과 사귈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따르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하셨는데, 이제 제자들은 하느님의 친구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따랐으며, “하느님의 벗”(야고 2,23)으로 불렸다. 지혜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지혜가 사랑에 도달하면, 그 지혜는 우리를 하느님의 친구로, 하느님의 자녀로 만든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7절) 사랑은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이다.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도록 그분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것은 가지가 나무와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우리가 그분과 떨어져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하였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는 삶이다. 우리의 삶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의 열매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확실히 남아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가지가 온 세상에 뻗어나가게 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하셨다. 그 열매로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들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고, 열매를 맺는 이가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께 참된 영광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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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17)
여기서 ‘계명’이라는 말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하는 ‘주님의 명령’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가 당신의 계명이고, 명령이라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이 하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하게 되는 것인가? 사랑을 강요할 수 있나? 싫으면 못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말과 계명(명령)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계명(명령)’이라는 말은, 싫어도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강제 명령’이 아니라, 뜻으로는 ‘권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극진히 사랑하셨기 때문에(요한 13,1), 제자들 앞에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면서 그들을 섬기신 분, 그래서 사랑 실천의 모범이신 분입니다.(요한 13,14-15)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사랑하셨기 때문’이지, ‘본을 보여 주기 위해서’ 억지로 하신 일이 아닙니다. <“낮추고 섬기니까 사랑이다.”가 아니라, “사랑하니까 낮추고 섬긴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5-8)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신 것은 아버지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인간들도(요한 3,16)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웃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은, 당신이 본을 보여 주신 대로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당연히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말씀은, ‘낮춤’과 ‘섬김’은 적당히 하다가 멈춰도 되는 일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는 데까지 가야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친구’ 라는 말은, 주인의 소유물(종)이 아닌 사람, 즉 ‘친구처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답게 이웃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친구가 아니었다가 친구로 신분이 상승된 사람이 아니라, 원래 예수님의 친구인 사람, 즉 처음부터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있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고, 안 믿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거나 부정하거나 그것에 무관심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전에는 종이라고 불렀다가 이제는 안 부른다는 뜻이 아니라, “너희는 처음부터 종이 아니었다.”라는 뜻입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너희가 종이라면(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내가 너희를 구원하려고 메시아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라는 말씀은, “처음부터 너희는 나의 친구였다.”, 즉 “처음부터 너희는 하느님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처음부터 너희는 하느님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너희를 구원하려고 내가 이 세상에 왔다.”라는 뜻입니다.
<“알려 주었기 때문에 친구가 되었다.”가 아니라, “친구니까(사랑하니까) 알려 주었다.”입니다. 여기서 ‘알려 주다.’라는 말은 ‘구원하다.’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인간들에 대한 사랑’과 ‘구원사업’은 전적으로 하느님과 예수님의 자비이고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너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예수님 뜻’에 합당한 것을 청하는 것이고, 그것은 구원과 생명입니다. 아무거나 청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은 ‘같은 것’임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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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구약 성경에서 아브라함(이사 41,8)과 모세(탈출 33,11)는 ‘하느님의 벗’으로 불립니다. 신앙의 정수를 살아간 아브라함과 모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숨김없이 알려 주시고(창세 18,17 참조), 모세와는 얼굴을 마주하여 사귀셨습니다.(탈출 33,11; 신명 34,10 참조) 사실 하느님의 벗이 된다는 것은 인간 편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로, 오직 하느님께서 호의로 베푸신 매우 예외적인 은총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서로 사랑하여라.” 하신 주님의 당부로 시작하고 마칩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이는 당신의 친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친구는 주인에게 복종하는 종과 달리, 벗의 뜻을 헤아리고 진심으로 동의하여 그를 따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과 맺는 친밀한 관계와 사랑에서 우러나는 자유로운 순종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들은 할례를 비롯한 지난날의 복잡한 규정들을 이방계 신자들에게 억지로 강요하지 않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일(우상 숭배)과 피째 고기를 먹는 일(‘생명[피]은 오직 하느님의 것’)과 불륜을 금하는(가정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계명만을 요구함으로써, 개종한 형제들도 ‘주님의 벗’이 되어 자유롭게 순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배려는 “서로 사랑하여라.” 하신 주님의 뜻과 일치합니다.
주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친구로 삼아 주셨는데, 내가 어찌 누구를 미워하고 내 벗이 될 자격이 없다 하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은 주님을 닮아 목숨을 다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는 삶에 있습니다. 나를 뽑아 세우신 주님 앞에서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사랑과 구원의 열매를 맺는 그분의 사랑받는 포도나무로 영글어 가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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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주님께서 택하셨습니다>
인류가 살아온 역사나 시대를 살펴보면 태평성대가 있었는가 하면 아주 고난의 시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태평성대가 되기도 하고 고난의 시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지요.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조직이 있지만 그것을 발전시키고 풍요롭게 하는 것은 극히 몇몇의 사람들입니다. 특히 지도자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지요. 아무리 태평성대를 누리던 나라도 지도자가 판단력이 부족하면 한 순간에 위기 상황을 맞게 됩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 세대에서 아무리 탄탄하게 잘 가꾸어 놓았어도 자식 대에 판단력이 흐려지면 부도가 나고 파산을 당하게 되지요.
이것은 나라나 기업뿐만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는 운동에서조차도 리더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선종하신 요한 바오로2세 교황님은 특히 유럽 교회가 어려웠던 시기에 교황으로 선출되어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신 교황님으로 아마도 세계 역사에 큰 인물로 남을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 안에서도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신 분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2002년 월드컵이 우리나라에서 개최되었을 때 우리 축구가 4강에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축구가 4강에 오른 주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네덜란드 출신 거스 히딩크 감독의 사람을 뽑을 줄 알고 쓸 줄 아는, 그리고 그 사람들을 활용할 줄 아는 인간 경영 능력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은 성당에서도 똑같습니다. 강론과 고백성사만 없으면 신부 할만하겠다는 얘기를 더러 듣습니다. 강론과 고백성사를 안 하면 사제로서의 존재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강론과 고백성사 못지않게 사제로서 중요한 일은 복음적인 사람들을 교회의 봉사자로 뽑아서 쓰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목위원들, 반장, 구역장, 단체장들을 임명하고 직원들과 심지어는 수도자까지도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는 것이 사목자의 큰 일 중의 하나인 것이지요.
본당의 봉사자들이 참으로 복음적인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서 그 본당의 분위기는 큰 차이가 납니다. 본당 신부가 하느님 안에서 기도하면서 복음적이며 하느님의 사람인 인물을 봉사자로 뽑아서 바른 지향으로 함께 할 때 그 공동체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공동체로 거듭 성장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이 생기기도 하지요.
사회에서는 지도자들이 자기의 판단과 능력과 경험만을 가지고 사람들을 뽑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은 개인의 능력으로 뽑고 뽑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뽑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면서 바른 지향으로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올바른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교회의 봉사자를 뽑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할례나 음식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에 따른 세례로써 구원받는다는 것을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결정하고 그것을 안티오키아 교회에 알리기 위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갈 사람을 뽑았던 것입니다.
뽑힌 사람들은 교우들 가운데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바르사빠스라는 유다와 실라스였지요. 이렇게 교회에는 항상 봉사자들이 필요합니다. 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반장, 구역장, 단체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뽑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직분을 이행하면서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한다는 식의 태도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소명에 감사 드리면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지요. 아직 나는 하느님께서 뽑아주셨다는 체험을 별로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신앙이 무르익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예언자들을, 초대교회 때는 사도들을,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에는 사목자를 통해서 교회의 일꾼을 부르십니다.
본당 신부의 요청 자체가 하느님의 제안이요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요청에 겸손한 마음으로 응답하는 것이 봉사자로서의 모습이지요.
한편 뽑힌 사람들은 그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뽑혔다고 모두가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12제자를 뽑으셨지만 모두가 다 성공하지는 못했지요. 그중에 대표적으로 실패한 사람이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입니다. 실패한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뽑혔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기 욕망을 따랐던 것이지요.
하느님께 뽑힌 사람이 절대로 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자기의 의지나 욕망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나를 뽑아주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고 거기에 성실하게 응답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느님께 뽑힌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로 하느님께 뽑힌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뜻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산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자기 뜻대로 하고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또 편가르기를 하게 되지요. 내 뜻과 다르면 공격하고 밀어내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볼 줄 알고 함께 가는 것이지요. 또 하느님께서 택하여 뽑아 주신 사람에 대해서 그 공동체 구성원은 함께 응답해야 합니다. 자칫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기도하지 않으면 뽑힌 봉사자들은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봉사자로 뽑혀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옆에 있는 신자들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반장이 되어 이웃집을 방문했는데 잡상인 취급을 받는다면 상처가 되지요.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잡상인 취급을 할 수가 있습니까? 격려하고 함께 하며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바른 모습일 것입니다.
‘어서 오세요. 힘드시지요?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러한 격려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뽑힌 사람이 더욱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뽑힌 사람은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공동체 구성원들은 그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서 함께 가는 것, 이것은 공동체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께 뽑힌 사람은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는 하느님께 맡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고도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봉사자들이 열심히 하고 상처받는 경우가 있지요. 결과까지도 자기가 만들어 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감옥에 갇히고 죽을 고비를 맞고 환난과 시련을 계속 겪지요. 그런 상황에서도 사도들은 상처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열매를 맺어주는 분은 하느님이시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까지도 자기들이 맺으려고 생각했다면 감옥에 갇혔을 때 크게 실망하여 좌절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다는 믿음으로 감옥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고 죽음 앞에서도 담담할 수가 있었지요.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는 사도들의 자세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세 번째, 봉사자로 뽑힌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드러내야지요. 자기가 드러나는 순간부터 하느님은 가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드러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고 공격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 뽑힌 봉사자들은 하느님만을 드러내야 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끝없는 죽을 고비 속에 멸시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주님만을 드러내고자 노력했지요. 오히려 그 모든 시련을 특권으로 생각하기까지 했습니다. 자기를 드러내면 눈에 보이는 것에 연연해하고 집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때가 되도 물러날 줄 모르고 물러나고도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지요.
오늘도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봉사자들이 뽑히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예수님의 말씀에 최선의 응답을 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공동체 그리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본당은 복음적인 사람들이 위에서 말한 조건들을 갖추고 열심히 활동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럴 때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공동체로 거듭거듭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본당 신부를 통해서 부르셨을 때 '예'하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하느님의 사람으로 뽑혀서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최대한 동참하여 격려하고 감싸면서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 신자로서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류를 바꾸고 기업을 바꾸고 또 성당과 모든 단체를 변화시키는 바탕은 좋은 건물이나 좋은 환경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일 때 그 공동체는 더욱 성장할 수 있지요.
하느님께서 뽑은 사람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더 좋은 사람이 뽑힐 수 있도록 노력하며 하느님께서 부르셨을 때 '예'하고 응답할 때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공동체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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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신앙에도 나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10대와 30대, 70대가 이해하는 사랑이 각각 다르듯이, 신앙의 나이 또한 사랑에 대한 이해와 실천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태어나고, 걷고, 자라고, 집을 떠나 독립하고, 우리가 이렇게 하루하루 성장하듯이 우리의 신앙도 사랑을 얻고, 이해하며, 사랑의 기준에 따라 매 순간 ‘예.’ 또는 ‘아니요.’라고 응답하면서 성장해 나갑니다.
어떤 때는 예수님의 친구로 살다가, 어떤 때는 예수님의 종으로, 또 어떤 때는 예수님의 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분의 친구로 살지 않아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 주시며,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복음 10장 29절-37절 참조)에서는 누가 나의 이웃 곧 친구인지 또는 친구가 아닌지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이라는 개념이 이스라엘 땅에 사는 사람으로 한정되어 이해되던 당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랑을 알고, 사랑을 느끼며, 사랑을 실천하는 많은 이를 ‘이웃’ 곧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이지 않고 구체적입니다. 이 구체성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대한 응답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과 가장 먼 이웃은 누구입니까? 이를 가르는 기준이 필요성이나 다른 현세적 이유는 아닙니까?
우리는 사랑을 통하여 모두 가까운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의심과 망상, 두려움과 원망 속에 있지 말고 진실되게 사랑을 실천하며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사람이 타고난 사명이며 그리스도인에게는 소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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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은총과 자유의 교회>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결의를 한 다음, 예루살렘 교회는 이방인 신도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유다와 실라를 대표로 뽑아 바오로 일행과 함께 안티오키아로 파견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에 의하여 최초로 설립된 교회이며, 대부분의 사도들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공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사도들과 원로들은 이방인 신도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격려하고 공의회의 공적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방인 신도들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은 교회의 공적인 가르침이 아니며 잘못된 주장이다.
바르나바와 바울로의 가르침이 올바른 가르침임을 공적으로 인정한다. 다만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지 말고, 피나 목 졸라 죽인 짐승도 먹지 말 것이며,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라.
이러한 결정을 한 예루살렘 공의회의 주체는 곧 성령과 사도들이다. 사도들은 이러한 편지를 보냄으로써 그들에게 헛된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고,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도록 권면했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이 편지를 읽고 격려를 받았으며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 공의회의 가르침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였다. 공의회의 공적인 결정에 따라 교회는 유대교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걸어간다.
사도들을 비롯한 초기 신도들은 모두가 유다인이었고, 같은 하느님을 믿으며, 같은 성경을 경전으로 삼았다. 다만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님이심을 믿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만이 교회와 유대교가 달랐을 따름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선포했으나 유대교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유대교와 다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공의회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유대교와 결별하였고, 율법의 제약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게 된 것이다. 공의회는 다만 몇 가지 점에 유의하도록 권면한다.
먼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지 말라는 점이다. 이는 이방인 전교 과정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공의회는 이 음식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으나 바오로는 각자의 양심에 맡김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다.(1코린 8,1-13; 10,27-28; 갈라 2,11-14)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음식을 먹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로 빗나가지 않도록 하며,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 피나 목 졸라 죽인 짐승을 먹지 말도록 한 것은 구약에서 금지한 것이다.(창세 9,4; 레위 17,14; 신명 12,16.23)
목 졸라 죽인 짐승은 피가 몸속에 남아 있으므로 먹지 말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피를 먹지 못하도록 규정한 것은 피가 생명을 뜻하기 때문이었다.(레위 17,11)
그리고 음란한 행동을 금했다. 이는 이방인들이 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음란한 행동을 말한다. 음행은 자신의 몸에 죄를 짓는 것으로 사람의 몸은 성령께서 계시는 성전이기 때문에 (1코린 6,17-20), 또한 우상숭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탈출 34,15-16; 레위 20,5) 이를 금했던 것이다.
이로서 교회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졌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가 되었다. 다만 신도들이 지켜야 했던 몇 가지 규정은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것으로 신앙이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세속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도록 하는 규정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은총과 자유의 종교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간에게 구원이 주어졌고, 인간은 자유를 누리며, 자유 속에서 그 은총을 받아들임으로써 구원된다.
오늘,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자유를 폐부 깊숙이 숨 쉬며 느끼는 하루가 되자. 세속의 욕망에서 벗어나 자유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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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후회 없이 사랑하여라>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증거되고, 기회는 많지만 실제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말하지만, 자신을 내려놓고 양보하는 희생의 사랑보다는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유를 주지 못하고 일방적이며, 상대를 속박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을 이유로 붙잡고 집착하며 기대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상처를 주고받으며 후회합니다. 조건을 내걸지 않고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 안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 외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2-1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데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심한 모욕과 침 뱉음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라고 선언하시며 당신 친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벗으로 삼으시고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사실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모두를 바쳤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미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 마지막 남은 것을 주는 행위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모두를 내놓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할 기회는 끊임없이 주어지지만 지금 놓치면 그 기회는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다음에 오는 기회는 또 다른 기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나의 일방적인 방식으로 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너무 많은 사랑을 요구하여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고, 아무런 구속이나 강요가 없이 자유를 주는 사랑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이는 날로 기뻐하고 자유롭도다. 사랑은 짐을 모르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기에….”(성녀 젤뚜르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자유를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사랑할 수 있게 하려고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유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게 사랑의 노예가 되는 데 있습니다.”
"사랑은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잘 꾸며놓은 연극, 그저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번 해 본 빈말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피에르 신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자유를 주는 사랑, 고통을 감당하는 헌신적 희생의 사랑에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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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계에서 가장 기부를 잘하는 나라는 어디일까요? 낯선 사람 도와주기, 금전적 기부, 자원 봉사 시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세계기부지수(영국자선단체 자선자원재단과 미국 여론조사업체 갤럽이 매년 발표합니다) 순위에서 4년 연속 1위를 차지한 나라가 있습니다. 동남아에 있는 미얀마(2022년은 5위입니다)였습니다. 이 나라의 1인당 국민 총생산(GDP)은 우리나라의 1/30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훨씬 더 잘 사는 우리나라의 순위는 어떻게 될까요? 조사 대상 119개국 중에서 88위였습니다. 코로나 이후 꼴찌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2022년 보고서에 나오는 상위 10개국 중 우리보다 못 산다고 평가받는 나라가 너무 많습니다. 1위 인도네시아, 2위 케냐, 6위 시에라리온, 8위 잠비아, 9위 우크라이나. 모두 1인당 GDP가 현저히 우리보다 낮은 나라입니다.
기부는 돈 많고 여유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보다 행복한 사람, 행복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남을 위해 기부한 뒤에 심리적 포만감 상태가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된다’라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이렇게 남을 위한 행동으로 엔도르핀 분비가 정상치의 3배까지 올라가며, 혈압이나 콜레스테롤 수치가 낮아지고, 옥시토신 호르몬 분비가 증가해서 불면증과 만성 통증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봉사활동이나 선한 일을 쳐다보기만 해도 인체의 면역기능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마더 데레사 성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만 봐도 건강해진다는 ‘마더 데레사 효과’)
주님께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명령하시지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이 사랑의 실천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받기 위함일까요?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각자를 위해, 우리가 모두 잘살 수 있는 특히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을 때가 많습니다. 사랑 자체가 결국 나를 위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여러 이유를 들어 사랑할 수 없다고 단정 짓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금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라는 분이 먼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모범을 따라 우리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종이 아닌, 주님의 친구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만을 사랑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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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의 벗님>
요한 15,12-17 (나는 참포도나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의 벗님>
벗이라
부르시는
우리의 벗님
벗으로
삼으시는
우리의 벗님
벗에게
모두 알려주시는
우리의 벗님
벗을 위하여
목숨 다해 사랑하시는
우리의 벗님
벗이 되었으니
서로 사랑하라시는
우리의 벗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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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결정을 할 때>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원로들은 사도 회의의 결과를 안티오키아 교회에 알리면서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우리는 이렇게 결정했다고 하지 않고 성령과 같이 결정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는 무엇을 결정하고,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지 성찰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할지는 아주 쉽게 답이 나왔습니다. 무엇을 하든 사랑으로 해야겠다고 말입니다.
청소를 해도 사랑으로 하고, 공부를 해도 사랑으로 하고, 대화를 해도 사랑으로 하고, 요리를 해도 사랑으로 하는 겁니다.
특히 요즘 저는 여기 밥상을 하면서 저의 조리가 정성을 넘어 사랑이 되고, 식탁에서의 봉사와 대화가 사랑이 되고 영적 대화가 되게 하려 애썼습니다.
이렇게 애를 써왔지만, 오늘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말씀을 접하면서 부족함, 곧 '성령과 함께'가 빠져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잘못을 범하곤 합니다. 뭐든 사랑으로 하기로 잘 결정했다고 안심하였는데 사랑으로 하기로 성령과 결정하지 않고 그래서 사랑도 성령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저 혼자 그리고 제힘으로 하려 하는 잘못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옳고 좋은 것을 하기로 결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결정하고 완수하느냐가 또한 중요합니다.
그래서 요즘 제가 등급 매기기를 자주 하는데 결정과 관련하여 등급을 매기면 이럴 것입니다.
결정에 있어서 제일 미성숙한 것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결정을 남에게 미루는 것일 겁니다. 결정 장애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수준으로 결정 못하는 경우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결혼이든 수도원 입회든 결정을 제때에 못하여 뒤늦게 수도원에 지원하는 비율이 높아지는데 부모의 사랑이 넘쳐서 부모가 대신 결정하고 그런 부모 밑에서 결정에 책임지고 싶지 않은 자녀가 순종의 미명하에 결정을 미루다 보니 그리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에 비해 스스로 결정하고 그것도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정하면 그만큼 성숙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럴 경우, 자기 결정에 책임지기 위해서 결정한 바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성실할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서 잘하는 것도 성숙함이지만 같이 결정을 내릴 줄 아는 것이 더 성숙합니다.
같이 결정 내리지 못하고 독불장군식으로 결정한다면
이런 결정을 가지고 성숙하다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이 결정을 내릴 줄 아는 것보다 우리 신앙인에게 더 성숙한 것이 바로 오늘 초대 교회 사도들처럼 성령과 함께 결정을 내리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런 원의로 중요한 결정을 하기 전에 ‘성령 송가’를 부르며 회의를 시작하는데 시작은 그렇게 하고 실제로는 자기주장들을 내세웁니다.
이런 경우 이것을 절반만 성공한 것이랄까, 절반만 성숙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모르지만,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성령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함을 오늘 초대 교회 사도들의 결정으로부터 배우는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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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서로 사랑하여라”>
- 주님과 우정(友情)의 여정 -
“내 영혼아 잠 깨어라,
거문고야 기이타야 잠을 깨어라
새벽을 흔들어서 나는 깨우리라.”(시편57,9)
화답송 시편이 좋습니다. 꼭 새벽을 흔들어 깨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입니다.
“나
‘소’씨라면
이름은
무조건 ‘소나무’로 하겠다”
소나무 사랑을 고백한 짧은 시입니다. 예전 언제나 거기 그 자리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껴안아보며 쓴 짧은 자작시 입니다. 한곳에 오래 정주하다 보면 정주의 산과 나무들에 대한 애정도 날로 깊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써온 시들을 보면 산과 나무가 소재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요즘 5월 신록의 나무들이 장관입니다. 특히 날마다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 즐비한 수도원길 하늘길, 새벽길을 걸을 때면 나무들의 사열을 받는 듯 가슴을 활짝 펴고 하늘을 우러러 별들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똑바로 걷곤 합니다. 저절로 느껴지는 충만한 기쁨, 충만한 행복입니다. 2009년 심었던 애목들이 2023년 14년만에 이처럼 울창한 숲을 이룬 나무들이 되었습니다.
오랜시간이 흐른후 나무들은 모르지만 사람들은 나무의 성장을 알 듯, 우리의 내적 성장도 나무처럼 우리는 몰라도 하느님은 아실 거란 생각이듭니다. 얼마전 원장 강론중 아기가 얼마나 주변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모르듯, 사람도 얼마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모를거란 언급도 생각납니다.
사랑의 성장이요 성숙입니다. 육신은 날로 노쇠해가도 사랑은 날로 성장, 성숙해갔으면 좋겠습니다. 내적성장과 성숙을 상징하는 사랑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우리 베네딕도회는 섬김의 학교로 정의하지만, 같은 규칙서를 사용하는 형제회인 시토회는 사랑의 학교로 수도공동체를 정의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사랑의 학교, 인생에 대한 정의입니다. 졸업이 없는 평생학인이요, 아무리 공부해도 하느님 사랑에 비하면 사랑에는 언제나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추기경님은 고등학생 같습니다.”
예전 살아계실 때 도봉산을 산행하던 김수환 추기경이 도선사에 잠시 들렸을 때 장난기 가득한 젊은 스님이 던진말에 추기경님의 유머가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
“나 재수생입니다.”
모두가 폭소를 터뜨렸다는 일화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랑의 학교를 졸업 못하고 여전히 재수생으로 머문다는 뜻이겠습니다. 아마 평생 사랑의 학교를 졸업 못하고 재수생으로 머물다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사랑도 보고 배워야 합니다. 사랑도 선택이요 배움이요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평생 배우고 공부하고 실천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나이만 먹었지 사랑에 무지한 이들이, 여전히 사랑에 참으로 미숙한 철부지 어른들이 많습니다. 사랑의 학교, 사랑의 여정입니다. 과연 성장하는 나무처럼 날로 성장하는 사랑의 여정인지 묻습니다. 엊그제부터 오늘까지 3일간 요한복음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금과옥조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어제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명하신 주님은 오늘은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어떻게? ‘주님인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분명히 드러나는 사랑의 롤모델인 예수님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을 배워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순수한 사랑, 집착없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초연한 사랑,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 산을 순식간에 불살라 버리는 ‘산불’같은 사랑이 아니라 ‘생명과 빛’의 ‘봄볕’같은 무사無私한 부드럽고 따뜻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요즘 제 집무실옆 짧은 길, 꽃길이지만 순간 꽃들을 보며 아카시아꽃 그윽한 꽃향기를 숨쉬며 꽃길을 걸을 때는 주님의 사랑을 만끽하는 파스카의 꽃이된 듯 충만한 행복을 느낍니다. 계속되는 복음 말씀의 진리가 참 좋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아,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영예로운 칭호가 주님의 친구입니다.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 감동입니다. 주님의 친구답게 주님 사랑에 목숨을 건 수도자들입니다. 저 역시 주님의 절친(切親)답게 날마다 한밤중 일어나 주님 사랑에 목숨을 걸고 강론을 씁니다. 하루하루 주님 사랑에 목숨을 걸고 절실하고 절박하게 주님과 우정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소수의 엘리트에 속한 것이 아니라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누구에게나 주어진 영예로운 칭호, 주님의 친구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종이 아니라 주님의 친구답게 품위있게 사랑하며 살아갑니까? 날로 성장 성숙하는 주님과 우정의 여정입니까? 주님의 친구답게 살아간다면 결코 함부로 되는대로 생각없이 막 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친구답게, 참 맑고 향기로운 사랑에 사람입니다. 사랑할 때 사람이니 우리말의 묘미가 기막힙니다. 이렇게 영원한 도반이자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우정과 함께 가는 형제 도반들과의 우정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우정의 여정과 더불어 함께가는 형제자매들과의 깨끗한 사랑의 우정입니다.
이의 빛나는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입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 원로 사도들이 인정한 두 제자의 사랑입니다. 유다와 실라스를 이들과 동행시키며 안티오키아 교회에 전한 서간문 일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 이보다 행복한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주님의 절친인 제자들입니다. 제가 볼 때, 바르나바와 바오로뿐 아니라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베드로, 야고보를 위시한 모든 사도들과 원로들 역시 주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입니다. 주님 사랑에 목숨을 내놓았던 무수한 주님의 절친들인 순교자들 덕분에 이렇듯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2000년 유구한 살아 있는 전통을 살아가는 가톨릭교회입니다.
마지막 복음 말씀도 결정적이요 은혜롭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 하나하나 주님께서 친구로 뽑았으니 풍성한 사랑의 열매로 친구답게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절친들이 되어 주님을 날로 닮아감으로 주님의 뜻에 정통하기에 이들이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그대로 받아들일 것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꽃향기보다 더 깊고 그윽한 향기가 열매 향기입니다.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익어가는 사랑의 열매 향기는 얼마나 마음을 설레게 하는지요! 저는 날마다 주님 뵈올 기쁨에 한밤중 설레는 마음으로 일어납니다. 설렘하니 생각나는 기사가 있어 그대로 인용합니다. 참 곱고도 아름다운 ‘설렘’이란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25년 이상 한국적 성화를 그려온 심순화 가타리나 화백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가톨릭신문 2023.5.7.11면).
“제 작품활동의 원동력은 설렘입니다. 하느님과 성모님을 만나는 설렘입니다. 저는 이 설렘 때문에라도 아마 죽을 때까지 붓을 놓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여 첫사랑의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의 모든 수행에 임한다면 정말 멋지고 매력적인 삶이겠습니다. 참으로 ‘설렘의 사람들’인 주님의 절친들인 사도회의 원로들의 결정은 얼마나 멋지고 지혜로운지 사랑은 분별의 잣대임을 입증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품위있는 편지의 전범을 보여줍니다. 안티오키아 교회 공동체는 편지를 읽고 그 격려 말씀에 기뻐하였다 합니다. 참으로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충실할수록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에, 형제들 서로간의 사랑의 우정도 깊어져 기쁨의 향기 가득한 삶이 될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하늘 닿도록 당신 사랑 크옵시기에,
구름에 까지 당신 진리 미치시기에,
높직이 하늘 위에 주여 나타나소서,
온땅에 빛나소서 당신의 영광”(시편27,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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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
<예수님의 사랑법!>
오늘 복음(요한15,12-17)은 '새계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새계명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13.17)
'예수님의 사랑법!'
우리를 위한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사랑법은, 조건없이 내어주는 '베품 사랑'입니다. 완전히 내어주는 '아가페 사랑'이며, '펠리칸 사랑'입니다. 한없이 낮아지는 '겸손 사랑'입니다. 내가 먼저 다가가고 손을 내미는 '희생 사랑'입니다. '용서와 화해 사랑'입니다. 실행하기가 참으로 힘든 '원수와 박해자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랑'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도 보이고, 예수님의 사랑법이 아닌 내 사랑법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도 눈에 보입니다.
인도의 큰 지도자였던 간디가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닌지... "나는 예수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오늘 하루만이라도 한번 곰곰이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새계명을, 예수님의 사랑법을 따라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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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4-c-_UB3F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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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목숨을
내놓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타오르는
사랑이신
예수님을 통해
목숨을 내놓는
진짜 하늘을
봅니다.
하늘의 명령을
들어야 합니다.
밥과
목숨 사이에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 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내놓아야
얻게되는
사랑의 신비
목숨의
신비입니다.
사랑의 최전방에
언제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목숨을 내놓아야
완성되는
사랑입니다.
진정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여 주십니다.
보여주려는
것에만
보이는 것에만
마음을 빼앗기며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목숨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목숨 아래서
서로를 사랑해야 할
오늘입니다.
청하고 보듬고
껴안아야 할
목숨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목숨을 통해
사랑의 명령이
다름아닌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서로 사랑하듯
서로의 마음을
알아듣는
사랑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병든 사랑이 아닌
건강한 사랑의
방향은 언제나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
사랑다운 사랑
사람다운 사람이
그립습니다.
목숨다운
목숨의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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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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