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아인가,영웅인가?/ 세속적 쾌락위해 영혼을 판 탕자 /본능에 충직한 인본주의자 대비/ 르네상스 갈등 모순 선명히 극화/
“인간의 참된 자기실현은 어떻게”말로가 집필활동을 했던 영국 르네상스 시대는 종교개혁,영토확장,고전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점차 내세 중심의 중세 그리스도 문화에서 탈피,현세의 삶에 관심을 갖고 지상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던 시기다.
그러나 아직도 신 중심의 중세적 세계관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인간 중심적 사고와 현세에 대한 갈망은 중세적 세계관의 기존 가치와 격렬한 갈등을 일으켰다.
르네상스 시대의 개인은 불운을 감내하며 무한의 세계를 열망하는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이자 동시에 ‘존재의 대사슬’의 일부로 우주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는 미미한 존재로 파악되었다.‘파우스트 박사의 비극’은 바로 이러한 르네상스 시대의 갈등과 모순을 그대로 투영한 당대의 대표적 비극이다.
악마와 결탁하고 마술에 의거해 24년간 지상의 쾌락을 마음껏 향유하기로 작정한 파우스트 박사.그는 중세 최고의 학문인 신학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르네상스적 가치들인 ‘권력,명예,전지전능,24년간의 육체적 쾌락’을 위해 영혼을 악마에게 팔았다.
또한 파멸을 무릅쓰고 하나님에 대한 신성한 경배 대신 그리스 문명의 상징인 헬렌과의 입맞춤 및 육체적 쾌락을 선택했다.그는 중세적 가치관에 과감히 도전했으며 근원적인 기독교 교리를 위반했다.
그렇다면 그는 비뚤어진 반항아인가 아니면 위대한 르네상스적 영웅인가.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규율의 위반자로서 조롱의 대상이요,르네상스 인본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위대한 영웅이자 초인이다.
그러나 말로는 이 작품에서 전통적인 기독교와 급진적인 인본주의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않은 채 양자간의 피할 수 없었던 갈등을 극화한다.말로는 한편으론 파멸을 무릅쓰고 현세적 쾌락을 추구하는 파우스트 박사의 인본주의적 열망을 칭송하지만,다른 한편으로는 중세 기독교 교리를 전달하는 매체였던 도덕극의 양식에 의존하면서 기독교적 가치를 역설한다.
일례로,이 극의 첫 장면은 파우스트 박사의 무한한 열망을 시적 언어를 매개로 해 신성한 경지로 끌어올리고,이로써 파우스트 박사를 개인의 영혼을 구속하는 기독교 제도와 학문 체제에 의문을 던지는 용감한 초인으로 미화한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선과 악의 의인화에 기초한 중세 도덕극의 틀 속에 신성모독의 죄를 저지른 뒤 파멸을 기다리는 가련한 파우스트 박사를 그리고 있다.
즉 말로는 영웅적 갈망으로 가득차 있는 파우스트 박사의 의도적 기독교 교리 위반행위를 신비화시킴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기독교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며,또한 동시에 중세의 사슬을 끊고 탈출하려는 르네상스 영웅 파우스트 박사가 결코 중세적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한다.
파우스트 박사에게 주어진 24년간은 초자아에서 벗어나 놀이꾼으로서의 본능을 마음껏 발산했던 축제기간이라 할 수 있다.축제때 사람들이 그동안 사회적 종교적 도덕적 제약과 구속에서 벗어나듯 파우스트 박사는 24년 동안 모든 제약에서 벗어난다.
이 기간에 파우스트 박사가 섬기는 신은 자신의 감정이며 정신적 고뇌 대신 장난 놀이,그리고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데 온 힘을 바친다.파우스트 박사가 참여한 축제의 절정은 그와 헬렌의 만남이다.육감적인 헬렌이 큐피드와 함께 등장했을 때 파우스트 박사는 헬렌과의 입맞춤 속에서 천상의 세계를 발견한다.
정신적 고뇌를 안고 기독교적 ‘천국’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던 그는 이 헬렌과의 축제적 삶에서 최고의 행복을 만끽한다.그러나 그는 축제라는 감정이 요구하는 삶 또한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24년간의 축제와 놀이의 종말은 오직 혼돈과 파멸뿐이었다.축제에 참여해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현세에서 누릴 수 있는 각종 즐거움을 모두 누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옥행을 선택했던 파우스트 박사.그는 분명 자신의 파멸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점에서 그는 추락한 기독교인이지만 인간적 본성을 힘차게 주장한 위대한 르네상스인이 되었다.그러나 동시에 그는 바로 그 파멸을 통해 신의 섭리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기독교 정신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에는 두가지 길이 있다.하나는 관례적인 길을 그대로 따라 가는 것이며,다른 하나는 알려지지 않거나 금기시된 심연을 용감하게 선택하는 것이다.전자가 현명한 삶의 방식이라면,후자는 비극적이지만 영웅적인 삶의 방식이다.어느 길을 택하느냐는 각 개인에게 달려 있다.
그런데 파우스트 박사는 후자 즉 매우 유혹적인,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택한 뒤 금지된 장난을 벌였다.그러나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완전히 알고 있었으며 자신이 선택한 것의 결과인 파멸을 겸허히 받아들였다.이 극의 코러스가 미지막으로 지적하듯 우리는 ‘법에 위배되는 것’을 과감히 추구했던 그 용기 때문에 파우스트 박사를 존경해 마지 않지만 ‘악운’을 선택했던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해선 현명하지 못하고 자기 파멸적인 것이었다고 진단한다.
◎말로우는 누구/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영국 르네상스 대표적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1564∼1593)는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으로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영국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극작가다.구두 제작자 집에서 태어나 일약 당대를 휩쓰는 대작가가 된 그는 파커 장학금으로 케임브리지의 베넷 대학에 진학한 뒤 신학을 포기하고 문필업에 종사했다.말로는 당시 독일에서 인기를 끌었던 ‘파우스트 박사의 역사’(1587년,1592년 영어로 번역)에 의거,독일의 대문호 괴테보다 3백년 전쯤에 ‘파우스트 박사의 비극’(1592년 집필 추정)을 집필하였으며 이는 르네상스 이래 현재까지도 최고 비극작품의 하나로 손꼽힌다.
말로는 ‘파우스트 박사의 비극’ 외에도 엘리자베스조 르네상스적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무한한 욕망지식욕 권력욕 황금욕을 실험하려 했던 초인들을 주인공으로 ‘맴빌린 대제 1부와 2부’‘말타의 유태인’‘에드워드 2세’ 등을 집필하였다.
폭풍과 같은 정열로 작품을 발표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활발하고 정열적인 삶을 살았던 말로는29세에 그리니치 근방의 선술집에서 암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