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 본문: 시 92편
- 제목: 진짜로 왕이 오셨네.
◆ 기도
아버지.. 긍휼히 여겨 주소서. 오늘은 반가운 손님들이 오셔서 교제했습니다. 그분들의 오랜 사역에 상처와 아픔, 고통이 분명 존재했을텐데 얼굴이 해처럼 빛날 수 있었던 까닭이 궁금했습니다. 별 대답을 듣지는 못했으나, 예수께서 함께 계셨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왕되신 예수여, 왕이신 주를 바르게 섬기고 의지하여 저도 비본질의 욕심과 번뇌에서 자유케 하옵소서.
◆ 본문살핌
하나님이 기름부으시는 왕은 가난한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그들의 자손을 구원하고, 압제자의 손을 꺾으시는 분이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공의와 지혜로 다스리며 판단할 것이다. 그가 다스리는 시대에는 의인이 흥왕하고 평강이 넘칠 것이다. 열방이 다스림을 받으며 스스로 예물을 드릴 것이요 모든 민족이 그를 섬기게 될 것이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구원자요 그들의 생명을 존귀히 여기는 분이시다. 그들이 생명을 보존한 즉 예물과 찬송과 기도를 왕에게 올릴 것이다. 그의 이름이 영원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통해 복을 얻으며, 그분의 복되심을 노래할 것이다. 경외로운 놀랍고 독창적인 일들을 행하시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영원히 하리라며 시인은 말을 맺는다.
◆ 묵상
이런 메시야를 기다렸구나. 이런 왕을 기다렸으니 예수가 밉고 싫지. 불교의 시초가 된 싯다르타는 소국(小國)의 왕자 신분을 버리고 홀로 나와서 도를 얻는 길을 걸었으므로, 그의 부왕 외엔 그에게 자신의 미래적 풍요와 행복을 기대하는 이가 애초에 없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을 거점으로 세계를 통치할 왕이 나타나 공의와 풍요가 공존하는 살맛나는 세상이 열리길 기대했으니 예수님의 언행이 마지막에 다다를수록 꼴보기 싫었겠 구나 싶다. 실망 정도가 아니라 신앙의 개념조차 흔들렸겠다 생각이 든다.
나는 성난 군중보다는 이런 타입에 가까웠다. "예수님은 거기 가만히 계세요. 제가 알아서 당신의 왕국을 건설해 바치겠습니다. 응원만 좀 해주세요!" 오늘 낮의 교제를 통해 슬며시 꺼내어졌던 나의 과거가, 그런 맘 가졌던 것이 사실이라 증언해 준다. 그러다 잘 안되니까 혼자 뻗고 화내고 하나님께 치받았다. 가룟유다가 따로 없다.
세상 가장 가난하고 궁핍하다 해도, 생명을 잃고 무덤에 누운 자보다 처참하기가 더한 이가 또 있을까? 바로 그런 처지가 되었을 때, 곯아터진 썩은 몸이 죄와 허물을 줄줄 흘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자기주장과 의지의 빛이 꺼지며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영혼의 빛으로 붙들 수 있었다. 사실 이미 이 모든 지난한 과정이 통과될 것임을 알고는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맛보고 싶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신앙은 개인적 깨달음을 넘어서서 그것의 체험이 삶으로 통과될 때 성숙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지금은, 그리스도가 왕되신, 다스리시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어쩌면 예전보다 나아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상황마다 평강과 감사가 마음에 들어오고, 주변의 모든 일들에 온유와 화평이 예전보다는 좀더 많이 첨가되기 시작했다. 나에게 있어 열방은 내 주변과의 모든 관계다. 그 관계를 유지하고 대하는 방식도 성령님의 조언과 기대 쪽으로 점점 기울고 있음을 느낀다. 너무 미미하고 미묘한 전진이기에 거의 나만이 느낄 수 있지만, 그래도 사실임엔 틀림없다.
왕의 통치, 메시야의 정복 아래 누려지는 평강과 풍요는 오늘 실제로 내 안에서, 내 삶에서 일어나고 있다. 삶에 대한 다짐이 아닌 주신 것들에 대한 감사로, 오늘의 묵상을 맺고 싶다.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시72:19).
◆ 마침기도
아버지 감사합니다. 평강의 왕을 세워주셔서 제 삶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도무지 왕이 무엇인지, 왕께 복종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날뛰던 어리석은 새 생명을 오늘 여기까지 이끌어 오신 구주의 은혜, 목자되신 은혜를 인해 감사드립니다. 오늘의 행복도 주께서 주신 것이니, 저를 긍휼히 여겨 주소서. 날마다 바른 판단, 올바른 것으로 선택하게 도와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