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주 / 장옥관
따듯하게 데워 먹어야 한다 엿기름 우린 물에 밥알 삭힌 감주, 감주는 물이 아니라 삭힌 밥알로 먹어야 한다고 일러준 사람 북北에서 온 사람이었다 '타는 듯한 녀름볕'이 아니라 '쩔쩔 귾는 아르궅'*에서 먹는 게 냉면이라고 일러준 사람 얼음 띄운 감주 마시며 생각한다 그이들은 아직도 냉면을, 만두를 빚어 먹고 있을까 온가족이 두리반에 둘러앉아 감자농미국수 먹거나 가자미식혜, 숭어국, 어죽, 온반 즐기고 있을까 그러나 내 인식의 동토에선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감주를 마시다 새삼 떠올리는 소월의 거리 춘원의 거리, 백석의 거리에도 사람이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 아무리 철조망 치고 콘크리트 갖다 부어도 서정의 영토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 누가 지워버린 걸까 달고 시원한 단술 맛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데, * 백석의 시, 「국수」에서 빌려옴.
ㅡ《문학청춘》(2017, 가을호)
ㅡ계간 《시와문화》(2024, 가을호), 통일 시 특집 ----------------------------------
* 장옥관 시인 1955년 경북 선산 출생. 계명대 국문과 및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졸업 1987년 《세계의문학》 등단. 시집 『하늘 우물』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등. 동시집 『내 배꼽을 만져보았다』. 2004년 김달진문학상, 2007년 일연문학상, 노작문학상, 김종삼시문학상 등 수상 계명대 문예창작과 교수 정년 퇴임
***************************************************************** 백석의 시는 미각의 확대라는 측면에서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달디 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에 헤매인다'(<흰 바람벽이 있어>)의 '따끈한 감주'는 분명 외로움을 위로할 만한 맛을 지녔을 것이다.
'이 희수무례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그리고 담배내음새 탄수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샅방 쩔쩔 끊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국수>)라는 수수께끼를 따라가며 이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명절날 문틈으로 들어오는 '무이징게국을 끊이는 맛있는 내음새'(<여우난골족>)는 '무국'보다 더 구수하고 맛있을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백석의 시에 나오는 북쪽의 음식들은 남쪽의 음식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그곳만의 독특한 풍미를 드러낸다. 감주는 따끈하게, 국수는 차갑게 먹는 식이다. 남쪽의 시인은 얼음 띄운 감주를 마시며 백석의 따뜻한 감주를 떠올린다. 남쪽의 방식과 사뭇 다르지만 무척 맛있을 것같이 느껴지는 북쪽의 많은 음식들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 음식들을 먹고 살아갈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서정의 영토'는 철조망을 치거나 콘크리트로 막을 수 없다는 믿음은 어느새 지워져 흐릿하다. 분단의 상처는 영토마저 폐색시켜버린 것이다. 뇌리에 새겨진 생생한 미각만이 남아 안따까운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 이혜원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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