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송 알베르토 신부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필리피 1,1-11 루카 14,1-6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루카 14,4). 이 한 문장이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완고함을 너무나
잘 드러내 보여 주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14,3) 하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이렇게 반응하였습니다.
그들도 무엇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맞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꼬투리 잡을 것이 없나 살피는 데에 더 신경을 썼던 그들은
정작 율법의 중요한 계명인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더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보면 어떠한 생각이 드나요?
나는 저렇지는 않다며 안심하나요? 아니면 내 삶의 어떤 모습이 그들과 비슷한지 살피게 되나요?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러 오신 분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병이 위급하지 않아 안식일이 지난 뒤 치료해도 되는 상황이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그것을
모르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픈 이의 어려움을 먼저 보셨습니다.
눈길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하느님을 따를지 아니면 내가 옳다며 고집만 피울지가 정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을 더 잘 따르려고 기도하며 자신을 되돌아보지요.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성도들에게 이야기하였듯, 우리의 기도 안에 지식과 온갖 이해로
풍부해진 사랑이 담기면 좋겠습니다(필리 1,9 참조).
그리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별하는 가운데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기를(1,10-11 참조) 희망해 봅니다.
/ 청주교구 김영송 알베르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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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호 루카 신부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필리피 1,1-11 루카 14,1-6
문제의 본질은 보지 못하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만 매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혼인을 준비하면서 예식장은 어떠해야 하고, 혼수는 얼마만큼 해야 하고,
답례품은 무엇을 해야 하고, 혼인식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잘 진행되어야만 한다는 강박 관념으로
혼인하기 전부터 신랑과 신부가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혼인식의 본질은 서로의 사랑을 진심으로 확인하는 데에 있지, 예식을 ‘성공적인 이벤트’로
잘 치르는 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레지오 마리애 단장이 신입 단원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라고 이야기하였을 때,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이 사람이 내가 이제 갓 입단하였다고
무시하는 것이 틀림없어.’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도 문제를 본질적으로 풀려고 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도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수종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날이 치료 행위가
금지된 안식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안식일 법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거룩한 날이니, 이날만큼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안식일의 본질을 보셨고,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자꾸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 문제를 엉뚱하게 풀어 나가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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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영 미카엘 신부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필리피 1,1-11 루카 14,1-6
지금 운전하고 계신 분들 있으시죠? 도로에 나가면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입니까?
갑자기 끼어드는 차량입니까? 아니면 성가신 오토바이입니까? 아니면 대책 없는 자전거입니까?
그러나 이런 것 외에 정작 무서워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통 단속입니다.
어느샌가 나타나는 교통 경찰과 언제 찍혔는지도 모르는 채 받게 되는 범칙금 납부 고지서입니다.
그래서 교통신호는 안 살피고, 경찰과 카메라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규정 속도 지키고, 신호 위반 안 하면 단속에 걸릴 일도 없다는 것은 알지만,
세상에 규정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항상 지키기에는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내리막길 자칫하면 규정 속도 넘기게 됩니다. 그렇다고 속도를 줄이면 뒤차와 접촉사고 납니다.
알면서도 달리고 있는데 앞에 교묘히 설치된 이동식 카메라가 보입니다.
그 순간 앗차 함정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고속도로 휴게소 출구에 설치된 카메라도 있습니다.
규정 속도로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인데도 단속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 사고가 예방되는지 정말 사고 다발 지역에서의 예방 차원의 단속인지,
실적 올리기인지 모호할 때가 있습니다.
심하면 카메라가 예방이 아니라 사고 유발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다지 카메라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호받는다는 생각보다 감시당한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자연히 거부감을 가지게 하고, 교통 안전보다 성가시다는 생각을 들게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안식일법’ 규정을 들먹이는 바리사이들에게
너희들 너무 한다고 항변하십니다.
이 모습은 거의 교통 경찰에게 항변하는 운전자와 같습니다.
일단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안식일 위반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규정속도 준수가 운전의 기본 중의 기본인 것처럼,
안식일은 쉬는 날이므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은 말이 필요 없는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다만 정속 유지가 사고 예방에는 도움이 되지만, 눈 앞의 사고를 보면서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고지식하게 규정을 따지는 운전자는 몇이나 되겠습니까?
안식일에 노동하지 말라는 규정으로 피할 수 있는 사고를 그냥 지켜 보고 있어야 한다는,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손길까지 거두어야 한다는 것은 억지가 아닐까요?
안식일의 치유, 규정대로 하면 위반이 맞습니다.
그러나 왠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형평성 없는 법적용이 법과 규정의 취지를 흐리게 하듯,
자비 없는 계명은 하느님의 뜻을 멀어지게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가는 하느님의 마음에서 예수님은 화가 나신 것입니다.
안식일이 하느님을 위한 감사의 날이라면, 그래서 쉬는 날이라면,
이 거룩한 날, 왜 남의 꽁무니나 쫓으며 흠집이나 잡냐고 항의하신 것입니다.
만약 우리도 내가 그 사람보다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 사람 흠집이나 잡으려 한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질타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는 열심과 봉사는,
다른 사람을 못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특히 그렇게 못하는 이들에 대한 비난이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는 타인을 향한 감시 카메라가 되어선 안됩니다.
부디 배려하는 마음으로 함께 갈 수 있도록 하십시오. 아멘.
/ 부산교구 서진영 미카엘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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