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사실적인 학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 그러한 점에서 학문적 가치와 권위를 인정받지만, 역사적 사실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그것은 역사라는 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을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다. 역사는 일어난 사실로서의 역사와 그 사실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역사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어난 사실로서의 역사는 그것이 일어난 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사실의 흔적만 남는다.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또는 사실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남긴 '증언'을 가지고 그 사실을 재구성하는데, 역사가가 다루는 '증언' 역시 증인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또한 역사가 역시 주관적으로 증언을 청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또 근본적으로는 증언의 양이 턱없이 적기 때문에, 사실을 정확히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역사가는 사실에 접근하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노력'이다. 세기말적 현상으로 유행했던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하면,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허구(픽션)'과 다르지 않다. 역사가 허구라는 인식은 본질적으로는 옳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발견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역사가들은 사실에 근접하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이에 반해, 포스트모더니즘의 '허구론'은 역사가들을 허망하게 만들고 허무주의로 내몰지 않았나 싶다. 포스트모더니즘에 경도된 역사가들은 '사실'은 없다고 속단하고, 사실을 인식하려는 힘든 노력을 아예 포기하고, 역사와 문학의 경계에서, 역사와 예술의 경계에서 '탈경계'의 구호를 외치며 사실주의적인 역사에서 벗어나려는 작업에만 몰두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역사를 방기(放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가들마저 사실을 포기한다면 누가 사실을 말해줄 것인가? 허구와 픽션만이 있고 사실과 진실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소문과 괴담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사실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히 있다. '사실'을 밝히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역사가는 그 노력을 해야 한다. 구도자의 자세로 사실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포스트모던 시대가 역사가에게 부여한 의무가 아닐까 싶다...
김응종 著,『서양사 개념어 사전』의 '들어가는 글' 부분에 있던 내용을 그대로 옮겨봤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00% 공감했습니다만, 다른 분들도 공감할 만한 글일지 어떤지는 모르겠군요.
첫댓글 좀 더,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듯 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노력이랄까요..
^^ 저도 포스트모더니즘을 전적으로 옹호하지는 않습니다만, 역사의 시각엔 확실히 이러한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드러난 방향이 필요하다고 봐요... 역사의 진실 접근 과정에서는...
역사가들마저 사실을 포기한다면 누가 사실을 말해줄 것인가? - 이 말에 참 많은 공감이 갑니다. 위선과 불의가 판치는 시대에 학문하는 사람들마저 비관으로 빠져 진실과 정의를 외면한다면 이 세상은 더이상 희망이 없을 겁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은 근대 이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깨지면서 나타난 사조였죠. 과학 분야에서도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로 인해 비슷한 논쟁이 촉발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패러다임의 변화(예컨대 창조론->진화론)를 통해 과학이 발전하고, 보다 진실에 가까워진다는 것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과학 현상을 관찰하는 과학자의 시각 자체가 주관적이고 철학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과학과 역사학이 가능한 틀 내에서만 추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소설과 분명히 다르지만, 적어도 역사학의 경우 주관적 학문(담론)이기 때문에 객관성의 문제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죠.
저는 중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송건호 선생의 글이 기억에 남는데, 신문의 가치는 객관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높은 주관성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문이 현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 이야기를 역사에 적용시켜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주관성을 '상대적 객관성'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