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만 해도 완도에 미역양식이란 개념이 없었고 그냥 동네바닷가에 생미역을 뜯어다 팔던것이 고작이였습니다 1970년대 완도수고 이성일 교사의
미역양식 새로운 김양식법은 획기적인 개발로 지역사회를 일약 미역 김의
고장으로 명성을 얻게하기도 했습니다 완도수고는 완도지역사회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숨은공로가 많습니다 완도미역양식 개발 전복양식 개발자
숨은 공로자들을 그냥 묻혀있고 테레비에 뜨는 최경주나 차유람이
아니라 완도지역사회에 경제적 자립을 가져오게한 인물들을 추앙하는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개펄에 「기르는 어업」을 정착
전남 완도 수산고등학교 교사 이 성 일
학교와 지역사회 실태
완도 수산고등학교는 20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완도군 완도읍에 위치한 28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학교이다. 그러나 얼마 전만 하여도 300여명의 학생이 빈약한 시설 속에서 공부하고 있었으며, 거의가 어민들의 자제이면서도 수산 기술의 습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어떻게 하면 이 어촌을 벗어날 수 있을까하는 궁리만 하면서 졸업만을 기다리는 실정이었다. 또한 지역사회 주민 역시 대부분이 낡은 고깃배 몇 척에 매달려 근해어업에 종사하거나, 개펄에 나아가 조개와 해초 등을 채취하여 근근이 생계를 이어 나가고 있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물 고등학교를 수산고등학교로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와 모교에 부임한 이성일 교사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는 가난한 고향 갯마을을 보다 잘 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서는 개펄에서 살 길을 찾아야 된다는 확신아래 자신의 전공분야를 살려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수산업」으로 전환시켜야 하겠다고 다짐하고, 우선 수산교육의 내실부터 다지기로 했다.
이 교사는 늘 학교에 붙어살다시피 하면서 수산 기술 지도에 필요한 300여종의 어류표본과 어망 모형 등을 정비 보완하였고 교장 선생님에게 건의하여 양어장을 새로 마련하고 어류의 산란 부화와 생식과정 등 증식을 위한 실험 실습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또한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학생들에게 지난날이 교사가 고학하며 학업을 이어갔던 과거를 생각하고 그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학습 의욕을 북돋우어 주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이 교사의 열성적인 노력은 오히려 동료 교사들로부터 따돌림과 냉소를 받게 되어 고민도 하였으나, 교장 선생님만은 그의 열의를 이해하고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도 교육위원회에서도 학교의 실정을 알고 학교의 오랜 숙원이었던 실습선과 수산가공과에 통조림 제조 시설을 마련해 주어 학교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되자 그제야 동료 교사들도 자세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병고에 시달리는 아내를 돌보아야 하는 가정환경 속에서도 학교 교육에 온갖 정성을 다하는 이 교사의 끈질김에 감동한 교직원들이 이 교사를 도와주게 되어 이 교사를 구심점으로 단합된 노력을 쏟아 부실했던 이 학교가 3년 후인 1971년에는 전국 최우수 수산고등학교로 문교부장관 표창을 받게 되었으며, 그 후 더욱 학교 교육의 내실을 기하여 1977년부터는 연 2회에 걸쳐 전국 수산 경진대회에서 종합 1위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이처럼 학교의 면모가 일신되자 지금까지 「물 고등학교」라고 비웃음을 받던 이 학교에 개교이래. 가장 많은 지원자가 몰려들어 마침내 학급을 증설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미역 인공 양식법 개발 성공
이렇듯 수산교육의 내실을 알차게 다져 온 이 교사는 해조류 양식 법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당시만 해도 주민들의 대부분이 갯바위에 자생하는 미역을 따다가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었고, 어릴 때부터 가난을 뼈저리게 체험한 이 교사로서는 미역의 인공양식법의 개발은 당면한 연구과제였다.
우선 학교 배양실에서 미역포자를 길러 학교 앞 바다에서 양식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병고에 시달리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돌볼 겨를도 없이 시험 양식장으로 나갈 때는 몹시 마음이 아팠지만, 일단 바다에 나가면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미역에만 매달려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일에 몰두하였다. 이 같은 무서운 집념과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미역 인공양식의 오랜 꿈이 실현되었다. 이에 힘입어 이 교사는 내 고장도 이제는 잘 살수 있다는 생각으로 어촌계를 찾아가 미역을 길러 우리도 잘 살아보자고 역설하였으나 이 교사의 이야기를 들은 주민들이 바위에도 잘 자라지 않는 미역이 어떻게 새끼줄에서 자라겠느냐고 하면서 도무지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고 “어서 학교로 돌아가 학생들이나 잘 가르치라”고 하면서 타고 갔던 배를 떠밀어 버리면서 상대도 하려 하지 않았다.
무지한 주민들에게는 백 번의 설명보다 인공양식의 성과를 직접 보여 주어야 하겠다고 판단한 이 교사는 미역포자 줄을 설치하고 인공양식을 하려 했으나 일부 주민들은 그 줄마저 끊어버렸다. 그러나 3개월 후 잘라 버린 새끼줄에 놀랍게도 미역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어 자신도 모르게 함성을 지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 교사가 미역을 건져 주민들에게 달려가 이래도 못 믿겠느냐고 말하자 지금까지 미친 사람이라고 상대도 하지 않던 주민들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미역 선생님」하면서 잔치를 베풀기까지 하였다. 그 후 미역 선생님을 모셔 가려는 주민들의 극성 때문에 이 교사는 휴일은 말할 것도 없고, 몸이 고달파 집에서 쉬려해도 쉴 수조차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 같은 이 교사의 희생적인 지도로 1969년에 무려 200배가 넘는 6 5천 톤으로 26억 원의 소득을 올리는 동시 그 중 염장 가공된 1만3천 톤을 수출하여 41억 원의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전천후 김 양식법 개발
미역양식에서 자신을 얻은 이 교사는 이제 이 고장 소득원의 대종을 이루는 김의 양식 법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김 하면 완도를 연상할 만큼, 이곳의 김 생산량은 전국의 약 43%에 달하며, 주민의 반 이상이 김 양식에 종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김 생산 방법은 바다에 김발을 띄워 놓고 포자가 발에 붙기만을 기다리는 구태의연한 것이어서 김 포자를 배양해서 직접 붙여주는 방법을 개발해야 된다고 생각한 이 교사는 1975년 우선 학교에 배양실을 마련하고 부족한 실험비용은 박봉을 털어 충당하면서 6개월 동안을 실험실에 파묻혀 연구한 결과 김 포자 배양에는 일단 성공을 했으나 그 동안의 집안 살림은 더욱 어려워졌고, 본인마저 겹친 과로로 병석에 눕게 되자, 가족은 물론 동료교사와 주민들까지도 그만 좀 쉬라고 권했다. 그러나 지친 몸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포자가 배양된 조개껍질을 김발에 달아 주는 일을 계속했으나 그 때마다 대부분의 포자가 바닷물에 씻겨 버려 주민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교사는 살을 에는 듯 한 바닷바람을 해치며 김발을 보살피다 배가 뒤집혀 위험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으나 이에 좌절하지 않고 연구를 거듭하여 포자가 바닷물에 유실되지 않도록 물을 만들어 김발을 올려놓은 다음 이것을 비닐 자루 속에 넣어서 바다에 띄워 본 결과 포자 유실을 막고 잡태도 끼지 않은 완전 채묘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처럼 천신만고 끝에 완전 채묘된 김발을 들고 바다에 나간 그는 김발을 치는데 필요한 말목이 문제가 되어 다시 큰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부유식 건홍 법의 개발
종래 양식 방법은 썰물 때가 되면 김발이 물 밖에 노출되어 이상 난동 시에는 병해를 입게 되므로 그 해의 김 농사를 그르치게 될 뿐 아니라, 말목을 구하기 위해 머나먼 산골까지 선금을 가지고 달려가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이를 쓰지 않고 김발을 바다에 띄우는 방법을 생각한 끝에 마침내 말목대신 부자를 이용해서 바다에 김발을 띄우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 부유식 건홍 법은
첫째, 항상 물 위에 떠있으므로 기상 조건의 영향을 받지 않아 전천후 양식이 가능하며,
둘째 수심에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양식 범위를 깊은 바다에까지 확대할 수 있으며,
셋째 말목을 쓰지 않으므로 양식 범위를 깊은 바다에까지 확대할 수 있으며,
넷째 말목을 쓰지 않으므로 산림보호는 물론 많은 경비와 노력을 절감할 수 있어 김 양식에 일대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라고 확신한 그는 이 방법을 주민들에게 지도해서 1976년에 처음 시도해 보았으나 예상외로 그 해 김 농사는 큰 흉작을 면치 못했다. 이에 분개한 일부 주민들은 이 교사를 무조건 믿고 따른 것이 큰 잘못이었다며 허황한 방법을 무책임하게 권장했으니 마땅히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대들기까지 했다.
신품종 도입으로 김양식 개발성공
이 교사는 억울하고 분했지만 묵묵히 연구를 계속하여 실패 원인이 품종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우량 품종 개발을 위해 고심하던 끝에 부산 수산대학에서 연구해 낸 새 품종인 대엽김을 분양받아 완도 해역에 맞도록 배양시험을 한 결과 재래종에 비해 성장이 빠르고 이상난동에도 잘 견뎌내는 우량종임을 확인한 후 몇몇 뜻있는 주민들을 설득해서 다시 분양하여 양식을 해 보았더니, 때마침 이상난동으로 인해 재래종은 거의 실패하였으나 이 새 품종만은 다수확을 거두게 되자 다른 주민들도 이 방법을 다투어 받아들이게 되어 1973년에 498만 속이었던 김 생산량이 1976년에는 843만 속으로 증산되었고 올해는 990만 속으로 늘어날 것이 예상되어 완도 관내에 보급된 2,450책 김발 설치에 필요한 말목 대금 9,500만원과 노동력을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군민의 스승이 된 이 교사
그 후 이 교사는 자신이 개발한 해조류 양식 법을 매년 여름방학 중에 개설하는 상설 새마을학교에서 지도했고 어촌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지난 10년간에 걸쳐 720회 57,000여명에게 그의 피땀 어린 새 양식 법을 지도해서 김의 생산 방법의 혁신을 이룩함으로써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 교사의 업적이 보도를 통해 알려지자 격려와 문의 시선이 쇄도하였고 드디어 15만 완도 군민은 이 교사에게 “군민의 상”을 주어 “군민의 스승이요, 개펄의 횃불”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학교를 찾는 어민들의 수도 날로 증가하여 이제 완도 수산고등학교는 명실 공히 지역 개발의 선도적 역할을 다하여 주민들의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
다도해를 소득의 보고로 개척
앞으로 수출 전망이 밝은 식용 및 약용 해조류인 톳을 2년여에 걸쳐 시험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평당 2,5kg에서 3kg으로 증산할 수 있는 방법을 널리 지도 보급하여 미역, 김과 함께 이 지역의 삼대 소득원으로 발전시켜 호당 소득 189만원에서 올해는 220만원으로 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박대통령의 특별지원금으로 수산물 배양실을 건립하여 새로운 양식기술의 개발과 학생들은 물론 이곳 어민들의 「기르는 수산업」 의 산 교육장이 되도록 하여, 완도 수산고등학교가 다도해의 보고를 개척하는 선진지가 되어 수산 기술인의 양성에 전력을 다하여 바다와 더불어 생활하는 자영 수산인을 길러 삼면의 바다와 5대양을 개척할 수 있는 어민 상을 정립하는데 오늘도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첫댓글 모교의 스승님의 글이 올라왔네요..개인적으로도 친구의 삼촌이라...
잡는 어법에서 기르는 어법으로 ...참으로 훌륭하신 스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