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그곳에 있지 말았어야 했다!
딩 동 댕 댕! 총 기상 15분전! 총 기상 15분전! 6시 15분전이 되면 어김없이 기숙사를 쩌렁쩌렁 울려대는 저 스피커 소리! 억지로 실눈을 뜨고 좌우를 둘러본다. 한 줄로 늘어져 있는 시커먼 머리만이 연달아 보인다. 똑 같은 침구 속에, 똑 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일렬로 누워서, 잠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는 그 시간이 잠시 후면 세상이 두 쪽이 나도 무조건 일어나야만 하고, 또 다시 공포의 하루가 막 시작되는 그 시간이 너무도 싫었었다.
아! 난 그곳에 있지 말았어야 했다.
총 기상!! 총 기상!! 금일 점호는 선착순 점호집합이 되겠습니다. 또 다시 울리는 찢어들듯 한 최후통촉의 방송에, 오늘은, 아침부터 저 괴상한 푸닥거리가 추가되었다. 순간적으로 기숙사는 벌집을 쑤셔 놓았다. 웃옷을 겨우 걸치고 단추를 채우며 뛰는 놈, 신발은 하나만 신고 하나는 들고 뛰는 놈, 흘러내리는 바지를 두 손으로 잡고 뛰는 놈, 침구도 개지 않고 이미 나가 버린 놈, 모자를 깜박 놓고 나갔다가 다시 찾으려 들어오는 놈........ 변 사또와 그 일행들이 ‘암행어사 출도야!’에 갑자기 놀라 혼비백산 도망가는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는, 이 웃지 못 할 풍경이 너무도 싫었었다. 아! 난 그 곳에 있지 말았어야 했다.
일조점호, 일석점호, 정식점호, 관등성명, 연병장, 중대, 대대, 연대, 참모, 학과 출장, 인솔, 보고자, 구령조정 3회, 인원보고, 반동준비, 군가, 군기, 임석상관에 대한 경례.......... 군대에서나 쓰는 군사문화 용어들을 어린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사용해야하고, 꼬마들 데리고 병정놀이 가르치는 놀이터와 같이, 소년병 훈련소 같았던 그 시절이 난 정말 싫었었다. 그곳은 학문을 탐구하고 창의력을 개발하고 지식을 습득해야하는 학교로서의 성격보다, 군인 훈련소의 성격에 가까운 곳이었다. 나는 군인으로 철저히 길들여지고 있는 그 시절 나의 인생이 싫었었다.
아! 난 그 곳에 있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 아버지가 제 날짜에 출생신고만 했어도, 아니 한 두 달만이라도 일찍 태어났어도, 친구나 동기가 될 수도 있는 별 차이 없는 1년, 2년 차이 선배! 단체 생활에 어느 정도 규율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런 선배들한테 쇠파이프로 두들겨 맞아야 했고, 주먹으로 가슴을 맞기도 했고, 관물 대에 다리 걸고 원산폭격을 당해야 했고, 한 밤중에 팬츠바람으로 집합 당해서 얻어 터져야 했다. 그곳에서의 선배는 분명 하늘이요, 염라대왕의 동기동창인 것이 사실이었다. 아직 인격적이나 법적으로도, 선배들이나 우리들이나, 똑 같이 덜 성숙 된 청소년이었는데 누가 누구를 가르치고, 교육하고, 때리고, 죽도록 괴롭히고, 한쪽은 당하기만 한다는 것이, 지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뭔가가 잘못 되도 한참 잘못 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참모나 어떤 감투도 없는 모 선배는, 수시로 후배들을 감시하면서, 잘못을 지적하고 나서, 따로 불러내어 때리고 기합 주던 일도 있었었다. 시어머니에게 당하고 또 당했던 며느리가, 다시 자기 밑으로 며느리가 들어오면 십중팔구는 당했던 만큼 그대로 며느리를 물려준다는 말이 그들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 선배는 공부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오로지 후배들의 행동만 관찰하고 돌아다니는데 후배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항상, 눈에 거슬리고 맘에 들지 않고 가시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런 제국주의 문화, 군사문화, 단체생활 문화에 이미 철저히 세뇌 화 되어버린, 어떻게 보면 측은하고 불쌍한 선배도 많았었다.
이처럼, 1학년은 선배 800여명의 눈으로부터, 2학년은 선배 400여명의 눈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어려웠었다. 편안히 쉬고 잠을 자는 기숙사에서부터 개인의 사생활이 철저히 배제되고 통제되는, 완벽히 감시당하는 감옥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나는, ‘눈치 보며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다. 남 보다 빠른 눈치로, 그에 따른 동물적인 감각의 반사적 행동이 철저히 반복 학습되어서 자연스럽게 체질화, 습관화가 이루어진 것이 분명했다. 눈치가 빠르지 못했던 일부 친구는, 얼른 알아채지 못해 발생하는 엉뚱한 행동, 느린 행동, 잦은 실수로 인하여 단체를 욕먹게 하고, 혼나게 하고, 손해를 줘서, 그야말로 동료 간에 고문관 취급을 당하는 녀석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남들보다, 빠른 터득이, 이 나이 먹도록 여태껏 살아오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었다고, 진정 고마워해야 하는 일인가? 하여튼, 나는 그런 학교생활 문화, 눈치 보아야하는 문화, 이상한 선후배 문화가 싫었었다.
난 그 곳에 있지 말았어야 했다.
단체생활에 있어서, 군사문화 생활에 있어서, ‘제복’은 그야말로 필수인 것을 시인한다. 획일적인 복장이어야 통제가 쉽고, 당연히 통제 당하기도 쉬워진다. 만약, 일반인처럼 병역을 위한 신체검사를 받는다면 공익근무나 해야 하는 나의 신체. 평균보다 작은 키에 땅땅한 체질! 제복이나 유니폼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멀다. 절대 제복과는 어울리지 않는 나의 신체적 조건이, 그 시절 나를 괴롭게 했었다. 몸에 맞도록 고쳐 입고, 다려 입고, 세탁하고, 무슨 거창한 자부심이라도 느끼는 양, 폼 잡고 다니던 친구들과는 나는 반대였다. 통제 밖에서는 곧바로 벗어 버렸다. 오죽하면 군 생활 5년 내내, 휴가나 일이 있어 부모님이나 형제들을 만나 볼 때면 군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거의 보여드리지 않으니까, 너 진짜 군인 맞나 라는 질문을 받곤 했었다. 학교 정복인 교복에, 솔직히 긍지와 자부심은 손톱만큼도 없었으며, 하사관 계급장 달린 군복이 뭐 대단한 벼슬의 유니폼도 아니고, 어울리지도 않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의 제복 생활이 너무도 싫었었다.
난 그 곳에 있지 말았어야 했다.
그 곳에 있기 전, 중학교 시절까지, 읍내도 아니요 도시도 아닌, 전형적인 농촌 면단위 마을의 학교를 다녔던 터라, 참고서도 제대로 없었고, 학원이나 과외는 애당초 상상도 모른 채 공부하던 시절, 오로지 선생님의 가르침이 전부였고, 교과서와 노트에 받아 적은 내용이 공부의 전부였다. 어리석게도, 당연히 그 곳에 가면, 또 그렇게 공부하면 되는 줄 알았다. 명색이 유명한 학교이기 때문에, 시설이 동양 최고라는 학교이기 때문에, 교육 환경이 우수하니 저절로 공부가 되어, 그 곳에만 가면 자동적으로 엄청난 지식을 습득할 수 있고, 고급 학문과 기술을 손쉽게 배울 것이라 믿었었다. 그 기대는 이내 깨지고 말았다. 한심했던 일부 과목의 수업시간의 이야기다. 이건 사실이다. 달랑 문제 하나 칠판에 풀어주고, 학생들로 하여금 교대로 칠판으로 나와 문제를 풀게 하고, 그 교사는 뒷짐 지고 바닥만 쳐다보고 통로만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한 시간의 수업은 종료된다. 50여분 수업에 겨우 5분만 떠들고, 나머지는 교실에서 하루 종일 걷기만 하는 위대한 스승이셨다. 저런 선생이 어떻게 교육자이며, 봉급을 타 먹고 사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문과 과목은 이처럼 수박 겉핥기식의 교육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실업계 학교이기 때문에 전공과목 수업시간이 절반이나 차지하니, 짧은 시간에 진도를 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무성의한 교사가 한 둘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또, 어떤 선생은, 그 특유의 진하고 튀는 경상도 억양과 여자 같은 높은 톤의 어투에 적응이 쉽지 않아, 말씀의 내용에는 집중되지 않고, 억양에만 신경이 쓰이다 보니 나중에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도저히 가물가물 거리기만 했었다. 전라도에서 자란 나로서는, 또 다른 애환이기도 했었다. 그런 학교 수업 분위기가 싫었었다.
난 그 곳에 있지 말았어야 했다.
고등학교 다니는 학생의 신분이라면, 우리와 다른 일반 고등학생들 대부분은 부모님의 철저한 보호와 뒷바라지 속에서, 본인은 오로지 좋은 대학으로의 진학을 위해 24시간 면학에만 매진하는 시기이다. 그들은 개인의 공부 습관에 따라, 아무도 없는 조용한 개인 방에서 집중하여 공부를 하든지 독서실 등에서 선의의 경쟁 모습을 몸소 체험하면서 분발하여 열심히 공부를 할 것이다. 거기에다 부족한 부분은, 학원에 다니기도 하고 개인과외로 보충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곳에서는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대학 진학을 위해 당장 시험 준비해야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5년이라는 불확실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되기도 했지만, 그 분위기와 환경은, 나의 스타일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로봇처럼 제 시간에 모두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하여, 대 운동장에 모여 점호를 받아야 하고, 운동장 구보해야 하고, 아침부터 기합도 받아야 하고, 기숙사 청소를 해야 하고, 관물 대 정리며, 침구를 각 잡아야하고, 밥 먹으러 집합해야 하고, 줄서서 기다려 밥 먹고, 또다시 집합하여 학과 출장해야 하고........하루에도 수십 번 집합, 집합, 집합......... 수업 끝나면, 넓은 학교 청소해야 되고, T자들고 옥상 올라가 총검술을 연습 하든지 학군단 무기고에 개인화기 받아서 합격 할 때까지 광내고 기름칠해서 반납하고........ 밀린 빨래하여 옥상에 널어야 하고, 또 집합해서 밥 먹으러 가서 줄서서 밥 먹고........ 매일 저녁이면 그 무시무시했던 일석 점호! 먼지 하나 없도록 호실과 화장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또 관물 대, 서랍, 침구 정리해야하고, 구두와 군화 번질거리게 닦고 , 부동자세로 침상 끝선에 열 맞춰 잔뜩 긴장한 채 서서, 인조인간 로봇이 공장에서 품질 검사를 받듯, 일일이 검사받고, 철저히 수색 당하고, 그래서 결과에 따라 잘못된 것이 있으면, 쇠 파이프로 얻어 터져야 되고......... 잠자는 시간에도, 불침번이나 동초 근무를 나가야 되고, 잘못하면 밤중에 또 얻어 맞아야 하는 것이, 이 훌륭한 학교의, 이 위대한 군사 훈련소의 하루생활이었다. 개인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된 시간은, 저녁 점호 전에 주어지는 3시간도 안 되는 자습시간뿐이었다. 그것도 공부하는 장소가 개인별로 간섭받지 않는 독립된 공간이 아니고, 침상 가운데에 양쪽으로 열린 책상에서 줄 맞춰 앉아 공부를 해야만 했다. 도저히, 모든 것을 잊고, 보지도 않고, 공부에만 집중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런 군대 같은 단체 생활을 똑 같이 하면서도 그 와중에 공부를 제법 잘 했던 일부 친구들을 보면, 이건 분명히 머리가 천재이거나, 이런 생활이 체질에 딱 들어맞아 틈틈이 공부할 여유를 찾을 줄 아는, 그 곳에 있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존경스럽게도 대단한 동기도 있었다. 솔직히 부러웠었고, 나의 무능함을 느끼게 했었다. 하여튼, 나는 아니었다. 결코 머리가 천재도 아니요, 성격과 체질에 맞지도 않았다. 점점 다가오는 점호시간에 대한 두려움, 수많은 선배들 시선으로 감시당하는 일상생활, 곤하게 자다가 근무를 서야 했던 불침번 또는 동초근무와, 툭하면 행해지는 기합 등으로 육체적 피곤함까지 더 해져, 능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공부에 집중 할 수가 없었다. 결국은 자꾸 뒤처지는 공부에 대한 강박감, 자꾸 부정하고 싶은 지옥 같던 현실에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더해지고,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이어지는 자포자기, 아! 그 생활이 너무도 싫었었다.
난 그 곳에 있지 말았어야 했다.
일반인은 전혀 모르는, 들어보지도 못한 해괴한 ‘RNTC 후보생!’ 아직 성인도 아닌 어린 고등학생에게 군복을 입히고, 군화를 신기고, 6.25 전쟁에서나 사용했던 무식한 M-1 소총 들게 하고, 매주 2시간 씩 군사훈련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 해마다 여름방학이 돌아오면 안동 36사단 신병교육대에서, 그 엄청난 무더위에서, 그 열악한 훈련소 환경에서, 2주간 군사훈련을 받게 했던 그 시절! 내 키만큼 한 무거운 소총 들고, 철모까지 뒤집어쓰고, 땀에 저린 군복에 군화까지 신고, 탄띠에 물 가득 넣은 수통과 야삽과 판초우의를 걸치고, 제식훈련, 포복, 총검술, 피가 나고 알이 배고 이가 갈린다는 피알아이, 사격훈련, 독도법, 화생방 훈련, 독도법, 분대전투, 행군, 야간 진지 공격 방어훈련, 유격훈련 등 등 등........ 다른 친구들 보다 신체적으로 불리하여, 더 많은 고생을 한 것이 분명하다. 특히 유격 훈련! 훈련 용 장애물 세트가 어른 키에 맞춰져 있어,지금은 크지만 그당시 키가 작은 나로서는 제대로 장애물 통과가 쉽지 않았다. 덕분에 한 쪽에서 피티 훈련으로 대신하곤 했다. 남들은 무사히 통과해서 쉬고 있을 때 말이다. 사격자세 훈련 중에 ‘앉아 쏴’ 자세가 있는데, 나는 이 자세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앉아서 다리를 세우고 무릎을 벌려 소총을 들고 있는 두 손의 팔꿈치를 무릎위에 올려 거총자세를 유지해야 되는데, 난 그 자세를 할 때마다 허리와 등이 구부러지지 않아서 자꾸 뒤로 벌러덩 넘어지려 했었다. 체격이 통통하여 유연성이 없는 나의 특징 때문이다. 키가 작아 손해 보는 점, 또 하나! 키기 작으면 다리도 짧은 법, ‘선착순!’ 하면 매번 도맡아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당연히 그에 상응하게, 별도로 열외 되어 쪽팔리는 괴로움을 감수해야 했다. 친구 간에, 동기들 간에 선착순이라는 방법 통하여, 경쟁을 유발시키고, 군기를 잡는 통제의 수단으로 악용되었는데, 나는 무조건 손해 보는 쪽이었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나의 신체적 특징을 두고, 조상까지 원망해야만 했다. 지옥 같았고, 생각하기 싫은 군사훈련! 10분간 휴식! 교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물주전자로 서로 먼저 먹으려고 뛰어가고, 겨우 한 모금 먹자마자 철모를 쓴 채 풀밭에 대자로 누워 버린다. 하늘에는 8월의 뭉게구름이 두둥실 지나가는데, 어릴 적, 늘 바라보던 고향 하늘의 구름과 다르지 않았다. 아! 나는 왜 이 곳에 있는가? 나하고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왜 나와 같이 있지 않는가?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외톨이가 되어, 상상도 못했던 괴이한 세상으로 빠져 버렸나? 나의 이런 생활을 그 들은 조금이라도 알고나 있을까? 왈칵 흐르는 눈물이 땀과 섞여서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 때의 그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훈련을 모두 마치고, 나머지 방학기간을 보내기 위해 고향의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머릿속에는 검정 딱지가 굳어져 떨어져 나오고, 두 주먹 정권에는 굳은살이 배여, 새카맣게 그을려 돌아 온 나를 물끄러미 보신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나, 평소 목석처럼 잔정도 없고 말씀도 없으셨던 우리 아버지가, 너 학교생활이 힘들면 돌아가지 말고 재수해서 일반 고등학교로 다시 가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다섯째아들인 내가 얼마나 불쌍히 보였을까? 그 순간 나는 심한 충격적 말씀에 고통스런 갈등을 했었다. 그러나 귀교 날짜가 되자, 나는 다시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고야 말았다. 아! 나는 그 곳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곳에 있지 말았어야 했다.
또 하나 싫었던 점! 아니 지금도 가끔씩 잊을 만하면 다시 느끼는 짜증나는 점. 그 시절 우리 호실에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한 명 있었다. 사월 초파일 석가탄신일에, 불교 학생회의 친한 동기로부터 연꽃모양으로 만든 연등을 받아든 나는, 그 모양이나 색깔이 퍽이나 아름다워, 촛불을 켜고 호실로 가져와 한 쪽에 매달아 놓았다. 참고로 나는 아무 종교도 믿지 않는 무신론자이다. 그 순간 기독교를 믿는 그 친구가 난리를 치는 상황이 발생됐다. 어떻게 기독교인이 존재하고 있는 호실에, 연등을 설치할 수 있냐며, 떼어내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 뒤 발생했던 푸닥거리의 이야기는 솔직히 더 이상 표현하기 싫다.
중학교 때, 훨훨 날았다는 친구들, 내가 봐도 모두들 똑똑하고 우수했다. 아니 그 우수함이 월등하여 이런 곳에 있기에는 정말 아까운 친구도 많았었다. 미련하고 모자라는 놈은 한 명도 없고, 한 결 같이 모두들 똑똑하다보니, 우수한 집단만이 가질 수 있는 문제점이 적잖이 있었다. 개인 개인 모두가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고, 목소리가 크고, 이기심이 강했으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이 이야기를 꺼내는 나도 그런 무리 중 한 명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별것도 아닌 논리나, 종교이야기나, 사상이야기가 나오면, 서로 자기 생각과 판단과 논리가 정답이고, 상대방의 논리나 생각은 무조건 잘못된 것으로 매도해 버린다. 결국은 싸우기 일보직전의 험악한 상황으로 발전되기도 했다. 자꾸만 흑백논리로 판단하려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면서 말 같지 않은 논리로 자기합리화를 강변하던 친구도, 내 눈에는 많이 보였었다.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나고, 제일 똑똑하며, 본인을 제외한 나머지 인간들은 쓰레기 같이 취급해 버리는, 소위 자만에 도취된 이상주의자들도, 극소수이지만 있었다. 물론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는 싫어하는 사이도 있지만, 서로 의리 있고 좋아하는 사이로 지내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3명, 4명, 그 이상의 친구들만 만나면, 소위 집단이 이루어지면, 마치 모래알처럼, 뭉쳐지지 않고 융화되기가 어려웠다. 집단이나 단체라는 것이, 이윤을 추구하는 회사의 조직도 마찬가지이지만, 다양한 부류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져야, 각자 개인의 능력과 수준에 따라 자기역할이 주어지고 행하여져서 조직력이 살아난다는 것쯤은 모두가 공감 할 것이다. 그런 편협한 생각과, 외골수 성격,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끝까지 들어주지 않으려하고, 이해하여 주지 않으려는 그런 오만함을, 지금까지 중년이 지나가는 나이임에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짜증스런 것이다.
이랬던 친구들은, 지금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인이 되거나, 엄청난 부를 축척하거나, 훌륭한 명예를 얻거나, 아니면 깨달음을 완성한 도인이라도 되었어야 되는 거 아는가? 당연히, 분명히, 우리 출신 모두, 우리 친구들 모두가 전부 그렇다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다른 집단, 모임에 비하여 더 심하다는 것이다. 나의 이런 주관적 주장과 느낌이, 나 또한, 치우쳐진, 삐틀어진, 열등의식에서 나왔다고 반박하면 애써 항변하지 않으련다. 그것도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조상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듯이, 나는 그 곳에 있었기에, 그 출신임을, 그 뿌리를, 되돌릴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 출신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한 양, 자랑삼아 떠들고 다니지도 않았지만, 그 명예와 명성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고 살아오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 때 그 시절! 우리들만이 겪었고, 우리들만 알고 있는 우리식의 생활과 환경과, 우리들만이 처한 입장이 나에게는 서러움과 애환이었다는 것이요, 지나고 보니 그것도 나의 인생에 소중한 추억으로, 지울 수 없이 뿌리 깊게 남아 있어 솔직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들춰 본 것뿐이다.
이따금씩 꿈을 꾼다. 오늘도 꿈을 꾸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쇠파이프 내리 꽂는 소리, 깡! 깡! 그리고 들리는 집합명령!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호실의 관물 대를 아무리 뒤져도 실습 복이 보이지 않는다. 다급해진 마음에 긴장하여 땀까지 흘러내리고, 에라 모르겠다하고 실습 복 대신에 먼저 보이는 군복을 입고 튀어 나간다. 한참이나 뛰어 나갔는데, 우리부대 고참 선임하사가 보이고, 총을 하나씩 나누어준다. 옆에는 학교 친구들인데, 배경은 내가 근무했던 부대다. 유격훈련을 받으러 저 뒷산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가는 길이 장난이 아니다. 90도에 가까운 절벽을 기어오르는데, 올라가면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져 내려오고, 겨우 어딘가를 올라갔는데, 주위에 갑자기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동료들을 찾으러 깊은 산속 여기저기를 헤매는데, 물에 빠지고, 걸려 넘어지고, 뛰어다녔다. 그러나 도저히 내려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 한참이나 땀이 나도록 돌아다니는데, 어디선가 병사 하나가 선배님! 선배님! 부른다. 어느새 예비군 동원훈련장으로 배경이 바뀌었다. 사병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이 자식! 인솔을 잘 해야지 이 녀석아! 연병장에는 예비군들이 총검술을 하고 있다. 찔러! 찔러! 길게 찔러! 순간 다시 산속으로 튀어버리고, 그 사병은 나를 잡으러 쫓아오고, 나는 죽어라 뛰었다. 아! 꿈이구나! 느끼는 순간 잠에서 깼다. 이른 아침, 이렇게 잠에서 깨어 씁쓸히 혼자 웃으면서 일어나 버렸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를 시작한다.
200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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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메메 숨차~~ 이것 다 일고나니까 숨차고 눈아퍼~~ 그래서 울 친구가 적응을 못해서 고생했구나 흐미 말만들어도 징하네
누나도 그 학교에 진학한 친구가 있었남유? ㅠㅠㅠ
해남사랑님은 중학교때 공부를 엄청 잘했나봅니다. 우리시절 중학교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지었다는 금오공고,포철공고 등 공부 잘한친구들이 공업고등학교로 많이 갔었는데, 적응못하고 포기한 친구들도 있었죠. 글을 보니 학교생활이 아니라 징하게 군기쎈 군내무반 생활을 하셨군요... 군고구마와 동창이라면 해남사랑님은 내 중학교 동창친구 "민호 (금융결재원 근무)"와 금오공고 동창이겠네요...
민호 소식이 궁금했는데... 김민호는 학교내 해남 향우회에서 만나 친하게 지냈었는데~~~! 혹 연락되면 내 핸폰이라도 알려주구려 ( 010-2825-0515)
정말 징하네 ~~ 그랬어요 그땐 공부 잘해야 금오고
말 그대로 고등학생을 군인 양성소로... 징했지요~! 이제는 ㅎㅎㅎ
난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요? 정말 그곳이 고등학교 맞아요? 죄다 군사용어에다...요즘 학생들에게는 정말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얘기가 되어버렸네요.
그땐 그랬지요!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당시 해남집이 너무 가난한탓에 학비며 옷이며 귀향비까지 주는 학교라 억지로 다닌 기억이~~~ㅠㅠ
그래요 왠지 가슴이 찡합니다..그대가진정 인생승리자입니다
그렇게 봐주시니, 앞으로 더욱더 열심히 살아가렵니다~!
한참을 읽어 내려오면서 혹 리북 소년병 훈련소 아닌가?..했습니다.. 에궁.. 인표씨 아버지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그땐 가난이 병이었지않나 싶네요~!
눈물이 납니다 . 울 2년 선배 공부 잘한 선배 거그 학교 갖다고 동네 잔치 했는데....... 얼마나 진로지도가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래도 그당시는 우리 해남서는 그 학교 간것이 자랑 이었는데.....
어야 장수리에서 울 동창이 금오고등학교 갔다고야 혹시 달산아니구?? 장수리 누구였제
우리 황산중학교에서도 동시에 두명이나 합격했다고, 돼지잡아 잔치했던 기억이...
나 공수개라고 쓴적 없는데 조카며느리...ㅎㅎㅎ
니가 공수개아니면 어딘디 그랴 공수개는 그리 영리한 칭구가 없었든것 같은디 ㅋㅋㅋㅋㅋㅋ
음... 이글을 읽노라니 여자임을 감사히 여겨 집니다.. 금오고 출신자들을 비롯한 군복무를 마친 모든 님들께 경의를...
마져 마져~! 우리 나라는 여자로 태어남이 천국이랑께~~~ㅎㅎㅎ 그 이후 5년간의 군생활은 공군하사관으로 입대한덕분에 야간대학 진학의 행운도 얻었었지...
그 좋았던 인재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깝습니다...시대의 아픔이라고 해야될지~
시대의 아픔이 맞지요~!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그 인재들을 국방과학연구소라도 보내게 했을건데~~~
우리들 고등학교에 다니때에도 교련복을 입고 목총을 들고서 총검술을 했지요...ㅎㅎ 목총을 들고 연병장을 사열도 했구요...지금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지만 그당시에는 참 고단 했지요...더구나 금오공고는 군사정권에서 만들어낸 역사의 산물이 아니겠습니까...저가 구미에 온지도 20여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초창기에 금오공고 학생들은 외출을 할때도 혼자서 다니지안고 여러명이 모티서 절대있는 걸음걸이로 다니곤 하였지요...지금은 일반 공업고등학교와 별반 다르지않답니다...후배들에게 옛날 얘기를 하면 어리둥절 할걸료...^^
정성스런 댓글에 감사를 드리며~~~!
해남사랑님 자랑스럽습니다 그아픔을 견듸고 이겨내셨기에 오늘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수있잖아요 순천쪽에제가알고계신사장님이 금오공고출신이라고 모임있을때면 자랑하시더라구요 이름은 김유원씨 현재나이는 51세입니다 그때의삶을 토대로 오늘 더멋진삶이되셨으면합니다
그리하도록 최선을 다 할까 합니다~!
친구야! "난 그곳에 있지말았어야 했다" 2탄은 내가 써야 겠다....잊혀져 간 고교시절.. 난 달맞이 고개 너머로 둥근 얼굴 내 밀던 달을 바라보며 흘렸던 눈물이 지금도 해운대에 남아 있을 것... 친구야! 이젠 그아픔의 긴 터널에서 깨어 나시구려... 그 땐 그랬지... 라는 생각으로...그래도 자네는 선배들 한테만 얻어 맞지 않았는가??? 어쩔 수 없이 한해 늦게 시작한 고교 시절 때문에 난 친구 들한테도 엄청 두들겨 맞았었네....
ㅎㅎㅎ 그 2탄이 궁금허이~~~
얼마나 쓰느라고 고생하셨을까..잉.....짠하네요......읽기도 징한께 나중에 술 한잔 할때 다시 말로 해주씨오....ㅋㅋㅋ
언제나 술한잔 할께랄???
황금같은 젊은 시절의 단상이로군요. 수고 참 많았어요.가끔 안 가길 잘했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내가 갔으면 1회일텐데......대신 몇 년 후 제 4촌동생을 보냈습니다...
그랬죠 안가시길 잘했습니다~! 4촌동생은 졸업후 잘 풀리고 있겠죠?
그래었구나 칭구 ! 걍 공부 잘해야 들어 갈 수 있는 데라고 그 당시 다덜 부러워 했는딩 ...
헐~! 무지하게 오랜만이네 그랴... 공부한 소득은 어떠한가? 이제는 모두 지나간 옛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