빳빳하게 각을 세운 군복을 입고서 심완식은 울어버렸다.
체구는 다부지고 하관이 억센 전형적 무사(武士)였지만 대통령 뒤에 서 있던
건설부 장관 이한림이
"이 자가 바로 당재터널의 심완식"이라고 치켜세우는 데에는 참을 도리가 없었다.
"임자가 심완식이야?" 하며 악수를 청하는 대통령 박정희 앞에서
서른두 살 먹은 육군 대위는 억센 턱을 꽉 다물며 통곡에 가깝게 눈물을 흘렸다.
1970년 7월 7일 대구공설운동장에서 열린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서독 방문 3년 만에 기공식
1964년 12월 6일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가 비행기에 올랐다.
대통령 전용기도 없는 가난한 나라인지라 비행기는
서독 정부가 내준 루프트한자 649호였다.
이륙 전 그가 말했다. "종전(終戰) 후 폐허 위에서 위대한 경제 건설과 번영을 이룩한
독일연방공화국의 부흥상을 샅샅이 시찰할 것이다."
독일 도착 다음 날 박정희는 본에서 쾰른까지 아우토반으로 왕복했다.
왕복 40㎞였다. 주행 시속은 160㎞.
귀국 후 대통령은 직접 도로 그림도 그리고 지프를 타고 암행도 다니며 귀신에 씐 듯
고속도로에 몰입했다.
서독 방문 만 3년 2개월이 지난 1968년 2월 1일
서울 양재동에서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이 열렸다.
기공식을 열하루 남긴 1월 21일 북한의 김신조 부대가 청와대를 향해 쳐들어왔다.
23일에는 푸에블로호가 납치됐다.
박정희는 "싸우면서 건설하자"고 했다. 반대가 심했다.
그 돈이면 공장을 열 개 짓는 게 낫다고도 했다.
야당은 "국토 균형 개발을 위해 동서 간 고속도로를 뚫자"고 했다.
귀신에 씐 박정희는 밀어붙였다.
귀신 이름은 '조국 근대화'라고도 했고 '선진 조국'이라고도 했다.
기공식 두 달 뒤 와우아파트가 무너졌다.
1년 뒤 임시국회에서 야당은 "경부고속도로가 올라간 건물이었더라면 역시 폭삭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비아냥댔다.
박정희는 "천당 가는 고속도로가 있다면 몰라도 서 있는 고속도로가 세상에 어디 있나.
말을 만들어가지고 억지를 쓴다"고 일축했다.
건설 목표는 서로 모순적이었다.
'싸고' '튼튼하고' '빠르게'. 하나를 만족시키면 나머지가 문제였다.
목표끼리 부딪치면 대개 '빠르게'를 우선했다.
"당신은 왜 빼?"
1965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공병대 소속 중위 심완식은 맹호부대 1진으로 월남으로 파병됐다. 1년 반 뒤 귀국해 육군본부 공병감실에 배치된 심완식에게 청와대에 있는 예비역 소장 허필은이 찾아왔다. 1967년 11월이었다. "육사 출신 위관급 중에서 미혼인 사람 열 명쯤 적어 보게."
심완식은 맹호부대 선후배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대위 김인수, 중위 황흥석·이선휘·이정웅…. "당신 이름은 왜 빼느냐"는 말에 심완식은 자기 이름도 적어 넣었다. 명단에 오른 사람들과 건설부에서 온 청년들은 석 달 뒤 고속도로 구간 감독관으로 투입됐다. "감독도 미친놈이고, 업자도 미친놈이고, 노무자도 미친놈인" 도로 공사가 개시됐다. 예산은 일본이 같은 길이의 고속도로를 건설한 비용(1600억원)의 4분의 1, 기술은 태국 고속도로를 만들어본 시공사 현대건설, 장비는 공병대 중장비가 전부였다. 엄동설한 2월이었다.
"또 까불면 세멘 반죽으로…"
수원 구간에 투입된 공병 대위 노부웅은 "앞에 있는 장애물들은 우리의 적(敵)"이라고 선언했다. 적에게는 불도저가 필요 없었다. 대신 다이너마이트로 논둑을 폭파하고 불도저들이 얼음장 들어 올리듯 길을 만들어갔다. 시공사인 현대건설은 전동 롤러 한 대를 수입해 분해한 뒤 역설계(逆設計)로 열두 대를 만들어 경운기 엔진을 붙여서 노면을 다듬었다. 포장이 마르지 않자 심야에 볏짚을 태워 말리기도 했다. 싹이 튼 보리밭을 밀어버리면 "천벌을 받을 놈들, 먹을 걸 갈아엎는다"고 농부들이 들고일어났다.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았다.
감독관이던 중위 황흥석은 아스팔트가 거울처럼 매끈하지 않으면 불도저 앞에 드러눕곤 했다. 죽으라고 일하던 '미친 시공사' 사장 정주영은 대통령에게 "감독관들 때문에 못 해먹겠다"고 불평했다. '미친 근로자'들은 "또 까불면 세멘(시멘트) 반죽으로 묻어버린다"며 황홍석을 물구덩이에 밀어 넣었다. '미친 감독관' 황홍석은 빳빳하게 서서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쳤다. 다들 미치지 않으면 진짜 돌아버릴 것같이 일했다.
그 해 12월 21일, 경수고속도로 31.3㎞가 완공됐다.
같은 날 경인고속도로도 개통됐다.
양재 톨게이트에서 분홍색 한복을 입은 부인 육영수와 대통령 박정희가 샴페인을 도로 위에 산주(散酒)했다. 공군기 2대가 연막을 뿜으며 날아갔다.
통행료 150원 내는 걸 잊어버렸던 대통령 부인 육영수는 며칠 뒤
8500원짜리 작업 잠바 24벌로 통행료를 갚았다.
이듬해 9월 경남 지역에 홍수가 났다. 14일부터 16일까지 양산에는 강우량 627㎜의 폭우가 쏟아졌다. 1
3일 밤 심야 순찰을 하던 언양 공구 감독관 황흥석은
바위틈에서 고양이 눈처럼 빛나는 물체 6개를 목격했다.
사람 눈이었다.
불어난 물에 근로자들이 쉬던 막사가 떠내려간 것이다.
결국 두 명은 찾지 못했다.
그 홍수로 전 구간에 걸쳐 근로자 11명이 실종됐다.
홍수와 교량 붕괴, 터널 붕괴, 과로가 원인이 되어
숨진 사람은 공식적으로 모두 77명이나 됐다
그 가운데 열한 명이 당재터널에서 순직했다.
당재터널 감독관은 심완식이었다.
1969년 여름, 경부고속도로 7개 공구 가운데 6개가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각 구간은 서울과 부산에서 출발해 대전을 향해 속속 공사를 완료하고 있었다.
남은 곳은 두 군데, 왜관 구간 낙동대교와 대전 구간 당재터널밖에 없었다.
낙동대교는 길이가 800m로 전 구간에서 가장 길었다.
범람하는 낙동강에 교각을 떠내려 보내기도 여러 번이었다.
겨울에는 통나무, 각목에 천막 쪼가리, 가마니, 볏짚, 철사, 보일러 굴뚝도 태웠고 오일 버너와 연탄난로까지 동원해 콘크리트를 양생한 끝에 개통식을 두 달 남긴
1970년 5월 30일 완공했다.
그리고 당재터널이 남았다.
길이 500m 남짓한 이 터널만 뚫리면 경부고속도로가 연결되는 것이었다.
미친 사람들의 미친 공사
처음부터 당재터널은 인간을 거부했다.
추풍령 고개를 넘어 금강을 건너야 나오는 당재고개는
측량 때도 소달구지로 장비를 날라야 했다.
긴 터널을 뚫을 장비도 기술도 돈도 없던 때라
당재터널은 산이 아니라 두 산 사이 골짜기에 최단거리로 뚫기로 설계 됐다.
바닥도 옆구리도 천장도 흙이요 잡석이었다.
1968년 9월 1일 첫 삽을 뜬 지 16일 만에 터널이 무너졌다.
입구에서 20m 들어간 곳이었다.
근로자 3명이 흙더미에 깔려 순직했다.
심완식은 전국을 수배해 유족들을 찾았다.
할머니 한 사람이 젊은 사내 시신을 부여잡고 통곡했다.
어머니가 분명했다.
서류를 보지도 않고 심완식은 절차를 밟아 슬픈 여인에게 아들을 보냈다.
낙반 사고는 13차례나 이어졌다. 모두 11명이 사망했다.
상하행선 합쳐서 1.1㎞밖에 되지 않는 짧은 구간이었지만 공사는 해를 넘겼다.
터널 입구에 있던 느티나무를 벤 조재삼 감독관이 사흘 뒤 교통사고를 당했다.
괴담이 돌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공사에 들어간 지 다섯 달이 넘었다. 터널은 절반도 뚫지 못했다. 낙동대교 완공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시공사인 현대건설이 이를 악물었다.
24시간 공사 체제로 돌입했다.
터널 속에는 중기(重機)가 뿜어내는 열기와 소음, 지열, 매연,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기사들은 바지에 소변을 보며 장비를 몰았다.
고속도로 개통 두 달 전 하행선이 관통됐다. 사람들은 먼지 속에서 소주로 축배를 들었다.
현대건설 현장 인원들이 목욕탕에 갔더니 옷을 벗어도 몸뚱이 색이 작업복 색깔이었다.
불어터진 발가락은 달라붙어서 악취가 났다. 상행선이 남았다.
"주판을 엎으시죠"
터널 공사는 발파를 한 뒤 벽을 콘크리트로 타설하고 굳기를 기다린 다음에
또 발파를 하며 전진한다.
콘크리트 양생에 일주일이 걸린다. 예정된 발파 작업은 8차례였고,
정상적으로는 1971년 3월 완공이었다.
하지만 개통 예정일인 7월 7일까지 남은 시간은 8주뿐이었다.
5월 10일 건설부 장관 이한림이 당재에서 브리핑을 받았다.
현대건설 사장 정주영도 같이 있었다.
심완식이 보고했다. "공기 내 완공 가능합니다."
브리핑 후 이한림이 심완식의 어깨를 잡고서 멀찍이 걸어갔다.
"진짜 가능해?" "불가능합니다." "…."
'값싸게'라는 원칙을 무너뜨려야 했다.
현대건설 총책임자 양봉웅과 당재 감독관 심완식, 그리고 현대건설 사장 정주영이 만났다.
"사장님, 주판을 엎으시죠. 명예는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정주영이 바로 대답했다. "그럽시다."
정주영은 돈 대신 명예를 택했다.
정주영은 단양 시멘트 공장 라인 가동을 중단시키고 조강(早强) 시멘트 생산을 지시했다. 조강 시멘트는 가격이 세 배지만 48시간이면 굳는다.
이틀에 한 번 발파 작업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또 운송 시간이 긴 열차 대신 비싼 트럭으로 시멘트를 날랐다.
근로자 수를 두 배로 늘리고 전표 대신에 현금으로 노임을 지불했다.
정주영이 타고 다니던 캐딜락 12호가 새벽같이 현금 뭉치를 싣고 현장으로 달려왔다.
심완식과 현장소장 이기수, 현대건설 전무 김영주는 침대 하나를 쓰며
3교대로 현장을 지켰다.
정부와 시공사와 노무자 대장, 이렇게 '미친놈 셋'이 미친 듯이 굴을 팠다.
1970년 6월 27일 밤 11시, 마침내 상행선 터널 한가운데에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전에서 기다리던 장관, 장관과 내내 서먹서먹하게 지내던
사장 정주영도 어깨를 부여잡고 만세를 불렀다.
열흘 뒤인 1970년 7월 7일 대통령 박정희는 당재터널을 지나 대구공설운동장에서 개통식에 참석하고 다음 날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을 찾았다.
그래서 심완식이 울어버린 것이다.
죽은 근로자들이 떠올랐고,
월남전 때 퀴논에서 피 흘리며 복귀하던 전우들도 떠올랐다고 했다.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일들이 기대가 됐다고 했다.
개통 4년 뒤 심완식은 대림산업으로 이직해 중동 건설 현장을 지휘했다.
당재터널은 명(命)을 다하고 2003년 직선형 고속도로에 자리를 내줬다.
터널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에는
순직자 77명 이름이 새겨져 있다.
명단은 아래와 같다.
고억환 고청모 권동환 김경환 김광선 김다남
김만년 김만수 김병춘 김봉열 김석기 김성복
김성태 김인락 김인상 김정희 김종구 김창현
김치용 노승설 노재근 문영하 문찬균 박기태
박운길 박윤섭 박정길 박창석 박화영 방명병
백진택 서강일 서병묵 서영돈 손익환 신광휴
신병태 신상문 안석희 안승업 안창순 오진환
우연재 윤동병 윤치현 이강용 이성만 이의식
이일생 이풍균 이필예 임순철 임혁 장성
장용석 장원용 전성준 정덕계 정병채 정영모
정원진 정윤상 정해덕 조명찬 조병길 조춘일
조태원 진경준 진용학 차상건 최광호 최용
최용의 최우숙 최종수 허만종 황창성
[모든 이를 대신해 심완식이 말합니다]
아무것도 없이 우리는 해냈습니다.
대한민국이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게 첫 번째 성과라고 할까요.
그거 못 해 하고 생각하면 생전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구간만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다 만들고 보니 우리가 역사를 만들었더군요.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과 거북선을 만드신 이순신 장군이 위대하듯,
경부고속도로를 만든 우리 대한민국은 참 위대한 나라입니다.
개통식 날 훈장을 받을 때,
'당재의 심완식'이라고 이한림 장관이 소개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납디다.
머릿속에서는 거짓말처럼 지난 2년 반이 영화처럼 스쳐 갔고요. 보람, 기쁨, 성취감,
뭐 그런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신(神)이 만든 기적에는 이유를 붙일 까닭이 없지만 인간이 이룩한 기적에 대해서는 이를 정당하게 분석하고 평가할 당연한 의무가 있다고.
경부고속도로가 기적이라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남들이 잠잘 시간에 우리는 자지 않고 밤새워 일한 거지요.
살아계신 분, 순직한 분 모두가 기적을 만들었다.
우리 모두가 자랑스럽고 대한민국이 자랑스럽습니다.
-조선일보 옛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