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윤희 魚允姬 (1880 ~ 1961)】 "1919년 개성에서 독립선언서 배포,"
1880년 6월 20일 충청북도 충주군(忠州郡) 소태면(蘇台面) 덕은리(德隱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1894년 결혼을 했으나 남편이 동학군으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사망하였다. 그 후 1909년 경기도 개성(開城)에 정착하면서 개성북부교회에서 정춘수(鄭春洙)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서 개신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6월 미국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 갬블(R. Gamble)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갬블의 추천을 받아서 개성의 미리흠여학교(美理欽女學校)를 다닌 후, 호수돈학교에 입학해서 1915년 3월에 졸업하였다. 이후 개신교 남감리교의 전도사가 되었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이 제시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천도교, 개신교, 불교 등의 종교계와 민족지도자들은 독립선언서 선언 및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로 결의하였다. 민족대표 33인들은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 계획을 개성으로 전달하였다. 개성 북부 예배당의 목사인 강조원(姜助遠)은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았고, 충교(忠橋)예배당에서 유치원 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권애라(權愛羅)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이후 신공량에게도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1919년 2월 26일 신공량(申公良)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 그리고 평소 배일사상과 독립에 대한 염원이 가득하였던 신관빈(申寬彬)에게 독립선언서를 함께 배포하자고 제안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경 신관빈과 함께 개성읍 만월정(滿月町), 북본정(北本町), 동본정(東本町)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개성읍 주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는 이유로 일제 군경에게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옥고를 겪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서 경성감옥에서 3·1만세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만세투쟁을 주도하였다. 1920년 4월 28일 조선총독부의 사면령에 의거해서 풀려났다.
1920년 7월 창립된 개성여자교육회에서 활동을 비롯해서 개성을 중심으로 여권 신장을 위한 운동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제1회 남감리회여선교대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27년 창립한 신간회(新幹會)의 개성지회에서 선전조직부 간사를 역임하였으며, 1929년 6월 근우회(槿友會) 개성지회 창립 및 활동을 주도하였다. 1937년 감리교의 후원 아래 개성에서 유린보육원을 설립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서울시 마포에서 유린보육원을 다시 설립하였다. 1961년 11월 18일 유린보육원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