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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지애] 06
#1. 호텔 컨벤션 홀 (밤)
간단한 뷔페 음식이 놓인 원탁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손님들이 북적거린다.
홀 중앙에 있는 무대에서는 우주복을 입은 도우미 몇 명이 휴대전화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춤을 추고 있다.
개인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했던 인철, 뜻밖에 큰 행사가 벌어지고 있자 당혹스럽다.
음악도 없이 흔들어대는 도우미들과 잘 차려 입은 남녀들, 화려한 분위기.
인철, 집에서 입고 있던 옷 그대로 (하지만 언뜻 보기엔 패셔너블하게) 뛰쳐나온 자신의 입성이 신경쓰여
약간 주눅이 들어 안을 둘러보는데 은비가 인철을 발견하고 다가온다.
은비 : 강인철씨!
인철 : (돌아본다) 어, 은비씨!
은비 : 몇 호에 사시는지 알았으면 진작 초대장을 보내드리는 건데. 죄송해요, 갑자기 연락드려서.
인철 : (당황한다) 아, 뭐, 괜찮습니다. 근데 먹을 게 참 많네요. 저한테 의논할 일이라는 게...
은비 : 뭐 좀 드시면서 얘기하죠. 이쪽으로 오세요.
인철, 은비를 따라가 접시를 집어 들며 혹시 타쓰지가 있지나 않은지 주변을 둘러본다.
#2. 에스컬레이터 (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오던 타쓰지, 방금 무심코 지나쳤던 여인이 왠지 마음에 걸려 괜히 다시 올려다본다.
#3. 다시 컨벤션홀 (밤)
인철, 은비를 따라 원탁을 돌며 음식을 담고 있다.
인철의 접시에는 산더미처럼 음식이 쌓여있고 은비의 접시에는 초밥 두 알, 야채 조금이 담겨 있다.
인철 : (음식을 푸다가 깜짝 놀란다) 예? 패션 자문이요?
은비 : 제가 추천했어요.
인철 : (당황스럽다) 허!
이때 눈여겨보던 이대리가 반갑게 다가온다.
이대리 : 어머! 어머! 그 때 그 나이트? 어머, 안녕하세요?
인철 : 아, 예.
이대리 : (은비에게) 고은비씨가 추천한 분이 이 분?
은비 : (으쓱으쓱) 네.
이대리 : 오우, 정말 너무 반가워요.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어머, 세상에. 정말 너무 패셔너블하시다.
디자이너셨구나. 어쩐지 눈에 확 꽂히더라니.
인철 : 아, 예. 감사합니다.
은비 : 우리 앉아서 얘기하죠.
이대리 : 어머, 저기 자리 있네. 우리 저기 앉죠.
인철 : 아, 예.
인철, 이대리가 가리키는 쪽을 보는데 타쓰지가 앉아 있자 잽싸게 주위를 둘러보며 빈자리를 찾는다.
이대리 : (인철을 잡아끌며) 실장님! 친구분 오셨어요.
타쓰지, 다른 사람과 얘기하고 있다가 슥 고개를 돌려 인철을 보고 다시 싸늘하게 고개를 돌려 버린다.
마주칠까봐 불안해하던 인철, 타쓰지의 그런 태도에 갑자기 오기가 생겨
타쓰지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접시를 탁 내려놓는다.
이대리 : (타쓰지와의 사이에 자리 하나를 비워놓고 의자를 빼준다) 이리 앉으세요.
인철 : 아, 고맙습니다.
인철, 자리에 앉고 이대리가 타쓰지와 인철의 사이에 앉으려고 엉덩이를 들이미는 순간
은비, 이대리의 엉덩이를 툭 밀어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가 앉아 버린다.
이대리, 고꾸라질 뻔하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서서 은비를 노려보지만
은비가 모르는 척하자 할 수 없이 다른 빈 자리에 앉는다.
인철 : (은비 앞이라 괜히 큰 소리로 친구인 척 타쓰지에게) 야! 잘 먹을게.
타쓰지 : (할 수 없이 본다) 어, 그래. 많이 먹어.
인철 : (은비에게) 잘 먹을게요.
은비 : 네. 많이 드세요.
인철, 막 먹기 시작한다.
은비, 타쓰지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계속 슬쩍슬쩍 살핀다.
이대리 : 근데 뭐라고 불러야 되요? 디자이너 강?
인철 : (목에 콱 걸린다) 뭐, 좋으실대로...
이대리 : 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
인철, 멈칫 동작을 멈춘다.
테이블에 있던 일동, 인철을 주시한다.
인철 : (잠시 뜸을 들이다가 샤프하게) 요새도 그런 거 물어보는 사람 있습니까? 저는 학벌 따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직원들도 능력 위주로 채용합니다.
인철, 타쓰지를 다시 슬쩍 돌아본다.
타쓰지, 모른 척하며 계속 묵묵히 먹는다.
이대리 : (민망해서) 맞아요. 그래야 돼요. 빨리 그런 사회가 되야 할텐데...
이대리, 인철에게 점점 빨려 들어간다.
은비 : 오늘 전체적인 분위기를 좀 보시구요, 조언 좀 해주세요.
인철 : (입에 가득 물고) 네. 그러죠.
은비 : 실장님이나 윗분들의 재가가 있어야겠지만 가능하면 앞으로도 계속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관계로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인철 : ...뭐, 저도..
은비 : 저희가 패션쇼하고 연계해서 제품 발표회를 계획하고 있거든요?
인철 : 패션쇼요?
은비 : 근데 저희 입장에서는 디자이너 지명도가 너무 높아도 제품이 가려질 위험이 있잖아요?
인철 : (계속 먹으며) 그렇죠.
은비 : 그런 문제까지 전체적으로 조언을 좀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대리 : 근데 아직 미혼이시죠?
인철 : 예? 아, 예.
이대리 : 이번 일, 어떻게 해서든지 잘 좀 엮어보자구요. 실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인철, 타쓰지를 슬쩍 돌아보는데
타쓰지, 같이 얘기하던 사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다.
타쓰지 : 그럼, 얘기들 나누세요. (가다가 인철의 어깨를 탁 짚으며 매너있게) 와줘서 고맙다.
(인철이 반응할 새도 없이 가버린다)
인철, 타쓰지의 신사다운 태도에 더욱 기분이 나빠지고 일동, 멀멀해진다.
은비 : (눈치를 보다가) 시장하셨나봐요.
인철 : 아, 예. 점심에 시간이 없어서 김밥 한 줄로 때웠거든요.
은비 : 그렇게 바쁘세요?
인철 : 예, 좀. (문득 공주가 생각난다) 잠깐 실례할게요.
은비 : 예. 그러세요.
인철, 일어나 뷔페음식 쪽으로 가면
이대리, 얼른 은비 옆으로 와 인철을 보며 속삭인다.
이대리 : 둘이 어떤 사이야? 친구 맞아? 왜 저렇게 멀멀해?
은비 : 글쎄요...
은비와 이대리, 접시에 음식을 퍼 담고 있는 인철과
저만치서 고위간부들과 얘기하고 있는 타쓰지를 번갈아 본다.
#4. 컨벤션 홀 문 앞 (밤)
인철, 음식이 담긴 접시와 젓가락을 들고 밖으로 나오다가 마침 밖으로 나가던 타쓰지와 입구에서 마주친다.
타쓰지, 인철을 아래위로 본다.
인철 : (창피해서 괜히 시비조로) 뭘 봐?
타쓰지 : 어디 가냐?
인철 : 니가 무슨 상관이야?
타쓰지 : 개인적으로 너한테 아무런 감정 없어.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
인철 : 어떤 식?
타쓰지 : 그만 두자. 잘해봐라. (화장실 쪽으로 돌아서는데)
인철 : 뭘 잘해봐? 내가 여기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너까지 있는 줄 알았으면 절대로 안 왔어, 자식아!
타쓰지, 뭔가 더 말을 할 듯하다가 그냥 돌아서서 간다.
인철, 기회는 이때다 싶어 얼른 로비 쪽으로 샤샤샥 가는데
타쓰지, 가다말고 멈춰 서서 인철을 돌아본다.
#5. 로비 (밤)
공주,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 쳐다보는 것 같아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인철이 오기를 기다린다.
리셉션 쪽에서 지배인 한 명이 그런 공주를 눈여겨 보고 있다.
인철, 주위를 둘러보며 잽싸게 공주 앞에 와서 선다.
공주, 반가운 마음에 일어나는데 인철, 공주를 다시 앉히고 접시를 공주의 무릎에 올려놓는다.
인철 : (바쁘게 젓가락을 뜯어주며) 야, 배고프지? 이거 먹고 조금만 더 기다려.
인철, 다시 주변을 둘러보고 잽싸게 돌아선다.
공주, 음식과 가는 인철을 번갈아 보는데 인철,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사라진다.
공주, 접시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먹기 시작한다.
인철의 뒤를 밟아 구석에 몸을 숨기고 공주를 보는 타쓰지. 볼수록 미인도의 여인과 닮았다.
공주, 인철이 다시 돌아오리라는 확신과 맛있는 음식 때문에 행복한 얼굴로 음식을 먹는데
지배인이 앞에 와 선다.
지배인 : 투숙객이십니까?
공주 : (놀라지만 날카롭게 올려다보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본다) 무슨 일이냐?
지배인 : (당황한다) 이거 어디서 갖고 오셨습니까?
공주 : 개의치 말아라. (다시 먹는다)
지배인 : (낮고 무섭게) 너, 망신당하고 쫓겨날래? 아니면 그냥 나갈래?
공주, 지배인을 노려보면 지배인, 공주의 손에서 접시를 빼앗으며 직원들을 손짓해 부른다.
직원들, 달려와 공주의 양팔을 잡아 일으켜 세운다.
공주 : 이 손 놓지 못하겠느냐?
지배인 : 데리고 나가.
공주, 직원들을 가볍게 옆으로 날려버린다.
지배인, 흠칫 놀란다.
사람들, 웅성웅성 모여들고 닌자들도 놀란 눈으로 공주를 본다.
공주 : 난 이 자리에서 한 반짝도 움직일 수 없으니 물러들 가거라.
지배인 : 아니, 이 여자가 미쳤나! 야, 뭐해? 끌어내!
직원들, 다시 공주를 잡으려고 하는데 타쓰지가 다가온다.
타쓰지 : 무슨 일입니까?
공주, 타쓰지를 보는 순간 기절할 듯 놀라며 뒤로 물러나다가 의자에 걸려 털썩 주저앉으며 올려다본다.
타쓰지, 자신을 보고 놀라는 공주를 이상하게 보는데
공주, 시야에서 주변의 사물들이 희미해지며 이명 때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공주의 눈에 지배인에게 뭔가 설명하는 타쓰지의 입술과 자신을 슥 돌아보고 직원들과 함께 돌아가는 지배인의 얼굴,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타쓰지의 얼굴만 남았다가 마침내 모든 것이 사라진다.
#6. 타쓰지 방 (밤)
집사, 급하게 문을 벌컥 열어주면
타쓰지, 공주를 안고 들어와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다.
타쓰지와 집사, 한동안 말없이 공주를 내려다본다.
집사 : ... 누굽니까?
타쓰지 : ... 모르겠어.
집사, 공주 얼굴을 자세히 보다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미인도를 돌아본다.
집사 : ... 어떻게 이런 일이...
타쓰지 : (공주만 뚫어져라 보며) 닮았지?
#7. 컨벤션 홀 (밤)
인철과 은비, 이대리, 아직까지 이어폰을 꽂고 흔들어대고 있는 도우미들 앞에서 인사를 하고 있다.
인철 : 오늘 별 도움이 못 돼드린 거 같아서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은 좀 바빠서.
은비 : 아니에요. 와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드려요.
이대리 : 정말 같이 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인철 : 저도 그렇습니다. 그럼, 다음에...
은비 : 예, 그럼, 살펴가세요.
인철 : (가볍게 목례하고 돌아서다가 도우미들을 보며) 조기다 빤짝이를 좀 달면... 그럼, 가 보겠습니다.
인철, 나간다.
은비 : 안녕히 가세요.
이대리 : 안녕히 가세요. (눈을 빛내며) 빤짝이?
은비, 나가는 인철의 뒷모습을 보다가 홀 안을 둘러본다.
은비 : (이대리에게) 근데 실장님 어디 가셨어요?
#8. 로비 (밤)
인철, 공주가 앉아 있던 쪽으로 오는데 공주가 안 보이자 갑자기 불안해져 주변을 둘러본다. 없다.
인철, 불안한 얼굴로 공주가 앉아 있던 의자에 잠시 앉았다가 안되겠는지 벌떡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뛰어간다.
#9. 여자 화장실 앞 (밤)
인철, 화장실 앞에 서서 여자들이 나올 때마다 기웃거린다.
여자들, 인철을 이상한 눈으로 보고 간다.
인철 : 아, 씨, 어디 간 거야?
인철, 다시 호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공주를 찾는다.
#10. 다시 로비 (밤)
인철,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두리번거리는데 아까 그 지배인이 다가온다.
지배인 : 혹시 아까 그 여자분 찾으십니까?
#11. 타쓰지네 복도 (밤)
인철, 초인종을 누른다.
잠시후 문이 열리고 의사가 나와 집사와 인사를 하고 돌아간다.
집사 : (인철에게) 어서 오십시오.
인철, 집사를 보자 흠칫 놀라 본능적으로 옆구리에 팔을 딱 붙이고 집사를 피해 들어온다.
집사 :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12. 타쓰지 방 (밤)
타쓰지,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마치 감상하듯 기절한 공주를 보고 있다.
노크소리. 문이 열리고 집사가 들어온다.
집사 : 오셨습니다.
집사의 뒤로 방안을 보려고 애쓰는 인철의 모습이 보인다.
#13. 거실 (밤)
타쓰지, 방에서 나오면 집사, 자기 방으로 돌아간다.
인철 : (집사가 사라지길 기다려) 어떻게 된 거야? 너, 무슨 짓 한 거야?
타쓰지 : 호텔 매니저한테 다 들었을 텐데 억지 부리지마.
인철 : 억지가 아니라, 쟤처럼 밥 잘 먹고 튼튼한 애가 기절을 했다는 게 이해가 안가서 그래.
너 쟤 맷집이 얼마나 좋은지 알아?
타쓰지 : 너랑 어떤 사이냐?
인철 : 니가 무슨 상관이야?
타쓰지 : 애인이냐?
인철 : 내 일에 상관하지 말라 그랬지?
타쓰지 : 의사 말로는 안정이 좀 필요하다는데 ... 어떡할래?
인철 : 어떡하긴 뭘 어떡해? 데려가야지. 얘, 어딨어?
타쓰지 : 지금 자니까 이따가 정신이 들면 내가 데려다 주든가. 저 아가씨 집이 어디야?
인철 : 아니, 그럴 거 없어. 기다렸다 깨나면 같이 가지, 뭐.
타쓰지 : 그럴래? 그래, 그럼. 앉아라.
타쓰지, 소파에 앉아 인철의 존재를 무시하듯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한다.
인철, 기분 나쁜 얼굴로 타쓰지를 잠시 보다가 할 수 없이 앉는다.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긴 침묵.
인철, 공주 있는 방 쪽을 슥 돌아보고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한다.
인철 : 박사님? 저, 인철인데요....(타쓰지의 눈치를 보고) 그 자식들 갔어요?... 예? 화투를 빌려가요?
이 짜식들이 아주 자리를 잡았네, 잡았어. 이 찐드기 같은 놈들!
인철, 타쓰지를 다시 돌아보지만 타쓰지, 관심 없다는 듯 책만 보고 있다.
인철 : ... 아, 아니에요, 별 일 아니에요. ... 예. 너무 걱정 마세요. ... 예.
인철, 전화를 끊고 잠시 갈등한다.
인철 : (잔머리를 미친 듯이 굴리다가 괜히 생각났다는 듯) 야!
타쓰지 : (돌아본다)
인철 : 넌, 안 내려가 봐도 되냐?
타쓰지 : 응.
인철 : ...
타쓰지 : (다시 책을 본다)
인철 : 근데 의사가 안정을 취해야 된다 그랬다구?
타쓰지 : ...
인철 : 의사가 그렇게까지 얘기했으면 그렇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타쓰지 : ... (계속 책만 본다)
인철 : (기분 나쁘지만 꾹 참으며) 고기를 안 먹여서 그런가?
타쓰지 : ...
인철 : (괜히 방안을 둘러보며) 여기 있으면 안정은 되겠다, 그지? ... 조용하고 ...
타쓰지 : ... (책에 시선을 둔 채) 너, 좋을대로 해. 난 상관 없으니까.
인철 : 왜 상관이 없어? 너한테 피해를 주는 건데.
타쓰지 : 아니야, 난 괜찮아.
인철 : (방을 다시 둘러보며) 그러면 하루만 여기서 안정을 좀 취하게 해볼까?
타쓰지 : (인철을 빤히 본다) ...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거야?
인철 :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구. (갑자기 티꺼워진다) 아냐, 됐다.
타쓰지 : 그렇게 해.
인철 : 응?
타쓰지 : 여기서 좀 쉬게 하라구.
인철 : 정말 그래도 되겠어?
타쓰지 : 응.
인철 : 어, 그래? 이거 미안해서 어떡하지?
타쓰지 : 미안해 할 거 없어.
인철 : (마음 변할까봐 벌떡 일어난다) 그럼. 부탁한다. 내가 전화할게.
인철, 급하게 나가다가 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다시 돌아본다.
인철 : 어, 근데 말이야, (미쳤다는 얘길 할까 말까 하다가) 어... 아니야.
(괜히 실실 웃으며 타쓰지의 팔을 툭 친다) 짜식, 고맙다. 갈게.
인철, 후다닥 나가버린다.
타쓰지, 인철이 사라지자 방 쪽을 돌아본다.
#14. 호텔 복도 (밤)
인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홀가분한 얼굴로 방문을 돌아본다. 날아갈 것 같다.
인철 : 짜식! 욕 좀 봐라.
인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휘파람을 불며 올라탄다.
인철이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바로 옆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면
은비 컴팩트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뚜껑을 탁 닫으며 내린다.
은비, 타쓰지 방 앞에 서서 섹시한 포즈를 잡아보려 애쓰며 초인종을 누른다.
잠시 후 문이 벌컥 열린다.
은비 : 어머, 실장님. 여기 계셨네요? 행사도 안 끝났는데 갑자기 안보이셔서 그냥 한 번 올라와 봤어요. 어디 편찮으세요?
타쓰지 : ...
은비 : (요염하게) 들어가도 될까요?
타쓰지 : 피곤하니까 그만 돌아가 줄래요?
은비 : 네?
타쓰지 : 사무실에서 봅시다.
타쓰지, 은비의 코앞에서 문을 닫아 버린다.
은비, 부글부글 끓는다.
#15. 아파트 앞 (밤)
인철, 나무 밑에 숨어 자기 집을 올려다보고 있다. 불이 켜 있다. 낭패다.
인철 : 저 거머리 같은 자식들, 아직도 안 갔네.
인철, 잠시 고민하다가 아파트로 들어간다.
#16. 아파트 복도 (밤)
인철, 살금살금 걸어와 문 앞에 서서 귀를 바짝 대 본다. 안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 : 아싸, 쌌다.
소리 : (안타깝게) 아흐.
소리 : 고!
인철, 심호흡을 크게 하고 문을 벌컥 연다.
#17. 인철이네 집 (밤)
준하, 종성, 쭈구리, 맥주를 마셔가며 고스톱을 치고 있다.
바닥에 땅콩 껍질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고 빈 반찬통, 젓가락, 접시, 오징어, 쥐포, 번데기 통조림 같은
안주의 흔적들과 맥주병이 즐비하다.
문이 벌컥 열리고 인철이 들어오다가 세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는 척 한다.
준하, 종성, 쭈구리, 날카롭게 돌아본다. 하지만 모두 조금 취해 있다.
인철 : 아니, 부장님, 여기 웬 일이세요? (문을 돌아보며)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화투판을 보며 괜히 옆에 끼어 앉는다)
어우, 누가 싸셨네. 그나저나 이 누추한 데까지 웬일이세요? 도대체 언제 오신 거예요?
(쌓여있는 맥주병을 보고) 어우, 일찍 오셨나 보네. 전화래도 하시지.
준하, 말없이 인철을 노려보다가 종성에게 턱짓을 하면
종성, 얼른 일어나 문 밖으로 내다보고 문을 막아선다.
준하, 갑자기 인철의 멱살을 콱 들어쥔다.
인철 : 캑!!
준하 : 너,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인철 : 누가 패션 자문 좀 해 달라 그래서요.
준하 : 패션자문? (비웃으며) 니가 빼돌렸지?
인철 : 네?
준하 : 어따 빼돌렸어?
인철 :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빼돌리다뇨?
준하 : 공주 말이야! 공주!!
인철 : 공주요? 공주를 제가 왜 빼돌려요?
준하 : 그 날 정전 됐을 때 너하고 같이 없어졌잖아!!!
인철 : 아니, 그래서 절 의심하시는 거예요? 와 이거 미치겠네. 생각을 해보세요. 제가 정신 나간 애를 데려다가 뭐하겠어요?
집안일을 시키겠어요, 아니면 빤짝이를 붙이라 그러겠어요?
준하, 멱살을 쥔 손에 힘이 빠지며 종성과 쭈구리를 돌아본다.
종성과 쭈구리, 인철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준하 : 정말 아니야?
인철 : (준하의 손을 탁 치우며) 아니에요! 말이 되는 소릴 하셔야지. 난 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사람이에요.
부장님도 걔가 어떤 앤지 아시잖아요.
준하 : (무섭게 보다가) 거짓말이면 너 죽는다.
인철 : 제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어요? 누구 덕분에 이 바닥에서 먹고 사는데요?
준하 : ... 정말이지?
인철 : 그렇다니까요!!!
준하와 부하들, 서로 돌아본다.
시간경과
인철, 혼자 투덜거리며 맥주병과 깡그리 빈 반찬통들을 치우고 있다.
인철 : 어으, 양아치 같은 놈들. 다 쳐먹었어, 다 쳐먹었어.
인철, 반찬통을 싱크대에 확 집어넣고 청소기를 집어 든다.
인철 : (청소기를 꺼내며) 더러운 놈들. 먹어도 더럽게 쳐먹었네.
인철, 막 청소를 하다가 문득 공주에게 청소리 쓰는 법을 가르쳐주던 생각이 떠오른다.
왠지 허전하다. 내가 또 왜 이러지?
인철, 공주 생각을 잊으려는 듯 요란하게 청소기를 밀다가 안 되겠는지 청소기를 끈다.
#18. 호텔 - 타쓰지 방 (밤)
공주, 절벽 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유석의 얼굴이 확 밀려오면서 눈을 뜬다.
공주 : 허억!
공주, 조심스럽게 일어나 방을 둘러본다. 여기가 어디지?
스탠드 불빛 하나만 어둡게 켜 있다.
공주,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가다가 어둠 속에서 미인도를 발견하고 다가간다.
공주, 헉! 숨이 멎는다.
공주 :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이..
#19. 호텔 - 거실 (밤)
타쓰지, 책을 보고 있다가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일어나 방으로 간다.
#20. 타쓰지 방 (밤)
타쓰지, 문을 열면 공주, 벽에서 떼어 낸 그림을 막 말고 있다가 올려다보고 깜짝 놀란다.
타쓰지 : (순간적으로 기분이 확 상한다) 무슨 짓이야?
타쓰지, 미인도를 공주의 손에서 뺏으려는데
공주, 타쓰지의 뻗어오는 손을 탁탁탁 쳐내더니 가슴을 장으로 세게 밀어버린다.
타쓰지, 뒤로 밀려나 벽에 부닥친다.
공주 : (타쓰지의 앞에 서서 무섭게 노려보며) 네 놈은 누구냐?
타쓰지 : ...
공주 : 네 놈은 누군데 김유석의 얼굴을 하고 내 그림을 갖고 있느냐?
타쓰지 : (기가 막혀 본다) ...
이때 집사가 달려들어온다.
집사 : 무슨 일입니까?
공주 : (집사를 날카롭게 돌아본다) 네 놈은 또 누구냐?
집사 : (어처구니가 없다)
공주 : 이 그림은 내가 주인이니, 내가 가져가겠다.
공주, 그림을 들고 가로막고 서 있는 집사를 거칠게 밀어내며 나가려는데
집사, 공주의 팔을 탁 잡는다.
집사 : 그림은 놓고 가야지.
공주 : 도적놈 주제에 감히 내 앞길을 가로막다니! 썩 물러나지 못하겠느냐?
집사 : 남의 그림을 들고 나가는 주제에 도둑놈이라니?
공주 : 남의 그림? 보고도 모르겠느냐? 이 초상화가 누구를 그린 것인지?
집사 : ...
타쓰지 : (픽 웃으며) 그럼, 그게 너란 말이야? 니가 누군데?
공주 : 난 남부여의 공주 부여주다.
타쓰지 : (미친년이네? 다시 피식 웃는다)
공주 : (속상한 얼굴로 타쓰지를 보며) 네 놈이 김유석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이 그림을 갖고 있는 걸 보면
네 놈이 김유석, 그 놈의 후손임이 분명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네 놈을 죽여 내 원수를 갚고 싶다만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 내 손에 죽고 싶지 않거든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라. (집사에게) 비켜라!
집사 : 아가씨, 다치기 전에 그 그림 내려놓고 조용히 나가.
공주 : 말로는 안 되겠구나!
공주, 순간적으로 집사에게 일격을 가하지만
집사, 본능적으로 공주의 공격을 피하며 공주의 손에서 미인도를 낚아챈다.
공주, 순간 집사의 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 다른 곳을 공격하는 척하며
집사의 손에서 다시 그림을 빼앗아들고 집사에게 일격을 날린 다음 밖으로 뛰쳐나간다.
타쓰지, 어이가 없는 얼굴로 그 자리에 굳은 채 공주를 지켜보다가 공주를 따라 밖으로 뛰어나간다.
집사 :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며) 도련님, 조심하십시오.
(서둘러 전화를 든다, 일어로) 모시모시! 모시모시! 지배인! 지배인 바꿔!
#21. 복도 (밤)
공주, 엘리베이터 문을 두들겨도 보고 양 쪽으로 벌려도 보지만 문이 안 열리자 두리번거리는데
따라 나오던 타쓰지가 소리친다.
타쓰지 : (일어로 다급하게) 아가씨! 잠깐만!
공주, 타쓰지를 돌아보다가 종업원이 비상구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그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22. 비상계단 (밤)
공주, 뒤를 돌아보며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간다.
타쓰지, 공주를 따라 뛰어 내려가다가 돌아보는 공주와 눈이 마주친다.
#23. 로비 엘리베이터 (밤)
인철, 엘리베이터에서 다시 나와 지나가던 종업원을 잡는다.
인철 : 아저씨, 이거 십칠층 안가요?
종업원 : 십칠층은 전용키가 있어야 됩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인철 : 아, 증말. 전화 한 번 넣어주실래요?
#24. 에스컬레이터의 꼭대기층
공주, 비상구에서 뛰쳐나와 에스컬레이터 앞에 다다른다.
공주, 계단이 움직이고 있자 놀라 그 자리에 선다.
타쓰지, 비상구 문을 열고 나온다.
공주, 흠칫 놀라 난간 쪽으로 뒷걸음질친다.
공주, 허리가 난간에 걸리자 뒤를 돌아본다. 까마득한 절벽이다.
공주, 다시 고개를 돌리다가 호텔 종업원을 따라 어디론가 가고 있는 인철을 본다.
공주 : (자기도 모르게) 아리!!
#25. 로비 맨 아래층
인철 : 아리?
인철, 무심코 듣다가 문득 놀라 홱 올려다본다. 공주가 떨어질 듯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다.
인철 : 야! 너, 거기서 뭐해?
인철, 당황하여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뛴다.
집사의 연락을 받은 호텔종업원들도 공주의 주변으로 모여든다.
#26. 다시 로비 맨 위층
공주, 인철이가 자기에게 뛰어오는 것을 보고 안심하고 돌아서는 순간
어느새 다가온 타쓰지가 공주의 손에서 그림을 탁 빼앗는다.
타쓰지 : 이러면 곤란하지.
공주 : 네 놈이 정녕 죽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공주, 타쓰지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타쓰지 :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장난처럼 실실 웃으며) 난, 아가씨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데?
공주 :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그림을 내놓아라.
타쓰지 :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이건 아가씨 게 아냐.
공주 : 내꺼가 아니면 누구꺼란 말이냐? 이 신라의 도둑놈아!
타쓰지 : 신라? (픽 웃고 돌아서는데)
공주 : 이야!
공주, 타쓰지에게 옆차기를 날린다.
타쓰지, 슬쩍 옆으로 피하면 공주, 타쓰지를 지나 바닥에 털썩 떨어진다.
공주 : (바닥에 옆으로 누운 채) 으으으...
타쓰지, 놀란 얼굴로 공주를 들여다보는데
막 에스컬레이터를 뛰어올라온 인철이 쓰러진 공주를 보고 깜짝 놀란다.
인철 : 뭐야? 무슨 일이야? 얘, 왜이래? 이 자식이, 증말!
인철, 다짜고짜 타쓰지의 턱을 날려 버린다.
타쓰지, 미인도를 꼭 쥔 채 나가떨어진다.
인철 : (타쓰지의 멱살을 잡아 일으키며) 너, 이 자식! 뭐? 안정이 필요해? 야, 이 자식아! 이게 안정이야?
인철, 타쓰지를 확 던지듯 놓고 공주를 일으킨다.
인철 : 야! 야! 괜찮냐?
공주 : (뺨을 갈기며) 어디 갔다 이제야 오는 거냐?
인철, 눈만 껌뻑껌뻑하고 타쓰지도 당황한다.
어느새 집사와 경호원, 호텔직원들, 등등이 인철과 공주의 주변에 둘러선다.
타쓰지, 미인도를 꼭 쥐고 공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입가의 피를 닦으며 일어나는데
공주, 타쓰지에게서 그림을 빼앗으려 몸을 날린다.
경호원들 얼른 공주를 잡는다.
공주 : 놔라! 이거 놔! 어서 내놓지 못해? 이 도둑놈들아!!!
타쓰지 : (인철에게) 다음에 보자.
인철 : 볼 일 없어.
공주 : 이거 놓지 못해!! 저 그림은 내꺼란 말이다! 왜 내 말을 못 믿는 거냐?
타쓰지와 집사, 돌아서 간다.
인철, 이상한 얼굴로 타쓰지와 공주를 본다.
로비 아래층, 소파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닌자들.
#27. 엘리베이터 안 (밤)
타쓰지와 집사, 나란히 서 있다.
집사 : 내일 당장 미인도를 일본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타쓰지 : (일어로) 그러기 전에 저 여자에 대해서 알아봐.
문이 열리고 타쓰지, 내린다.
#28. 인철이네 집 앞 (밤)
닌자들의 차가 어두운 구석자리에 서있다.
한갈, 쌍안경으로 인철의 집을 보고 있다가 옆의 우슈에게 쌍안경을 넘긴다.
우슈, 쌍안경을 눈에 대보지만 아무것도 안 보인다.
우슈, 얼른 쓰고 있던 선그라스를 벗고 다시 쌍안경을 눈에 댄다.
#29. 인철이네 집 (밤)
인철 : (치우다 만 집을 마저 치우며 투덜거린다) 아으, 내가 가보길 잘했지. 이건 한 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딱 눈치 봐서 행동해야 될 거 아냐. 걸핏하면 주먹이나 휘두르고. 어떻게 된 애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힘만 쎄냐?
너 화전민 출신이 아니라 어디 계룡산 같은 데서 도 닦다 내려왔지?
공주 : 그 자와 어떻게 아는 사이냐?
인철 :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그걸 니가 알아서 뭐하게?
공주 : ... 그 자가 누구인지 알기나 하느냐? ... 그 자는 널 죽인 자다. 아니, 아리를 죽인 자다.
인철 : 환장하겠네. 너, 자꾸 헛소리 할래?
공주 : (눈물이 핑 돈다) 왜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는 거냐? 그 자가 들고 있던 그림이 바로 내 초상환데.
인철 : 무슨 그림?
공주 : 그 자의 방에 내 그림이 걸려 있다. 네가 가서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니냐?
인철 : 뭘 알아봐?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공주 : 제발 내 말을 믿어다오. (안타깝다) 나는 남부여의 공주, 부여주란 말이다. 왜 내 말을 못 믿는 거냐? 난 공주란 말이다!!!
인철 : 으으으으...
인철, 한숨을 팍 내쉬더니 청소기를 공주에게 건넨다.
인철 : 헛소리하지 말고 청소나 해. 어떻게 하는지 안 까먹었지?
인철, 다시 바닥에 널린 것들을 치운다.
공주, 슬픈 눈으로 인철을 바라본다.
#30. 인철이 방 (밤)
인철, 공주의 절규와 타쓰지에게 달려들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공주 : 제발 내 말을 믿어다오. 나는 남부여의 공주, 부여주란 말이다. 왜 내 말을 못 믿는 거냐? 난 공주란 말이다!!!
공주의 흐느낌이 희미하게 들린다.
인철, 뒤척이다가 슥 일어나 공주의 방으로 가본다.
#31. 인철이네 집 - 공주방 앞 (밤)
인철, 열린 문 틈으로 들여다보면 공주, 문쪽으로 등을 돌리고 누워 분한 눈물을 꾹꾹 눌러가며 울고 있다.
인철, 문을 슬며시 닫고 돌아선다.
#32. 공주방 (밤)
등을 돌리고 누워 있는 공주의 모습 위로 독백이 흐른다.
공주 : 그 자가 왜 내 앞에 나타났을까? 그 그림은 어떻게 지금까지 전해올 수 있었을까?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왜 아리와 유석이 내 눈 앞에 나타난 것일까?
#33. 타쓰지 사무실 (밤)
유리벽 밖 마케팅 사무실의 직원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타쓰지, 창 밖으로 펼쳐진 야경을 내다보며 공주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공주 : 남의 그림? 보고도 모르겠느냐? 이 초상화가 누구를 그린 것인지? 난 남부여의 공주 부여주다.
지금 당장이라도 네 놈을 죽여 내 원수를 갚고 싶다만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느냐...
내 손에 죽고 싶지 않거든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라.
타쓰지, 의자를 돌려 사무실 안의 은비를 쳐다본다.
은비, 포스터를 놓고 직원들과 회의를 하고 있다.
타쓰지, 인터폰을 누른다.
유리벽 밖의 은비, 자기 자리로 돌아와 전화를 받는다.
타쓰지 : 잠깐 들어와요. (끊는다)
은비, 유리벽 안을 돌아보며 전화를 끊고 타쓰지의 사무실로 들어온다.
은비 : (조금 쌀쌀맞게) 무슨 일이시죠?
타쓰지 : 한국 역사에 대해서 좀 알아요?
은비 : (뜬금없는 질문에) 네?
타쓰지 : 남부여라는 나라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어요?
은비 : 네.
타쓰지 : 나는 처음 듣는데?
은비 :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 쓰던 국호예요.
타쓰지 : (놀란다) 백제?
은비 : 흔히들 그냥 백제라고 하죠. 왕조가 바뀐 것도 아니고 국호만 바꿨으니까요.
타쓰지 : (은비의 똑똑함에 놀란다) 오!
은비 : (잘난 척) 제가 역사에 관심이 많거든요. 근데 남부여는 왜요?
타쓰지 : 아니에요.
은비 : (끝까지 쌀쌀맞게) 그거 물어보시려고 부르신 거예요?
타쓰지 : (씩 웃으며) 그날 기분 나빴어요?
은비 : 네? 제가 왜요?
타쓰지 : 기분 나빴으면 사과할게요.
은비 : 기분 안 나빴다는데 왜 그러세요?
타쓰지 : 언제 저녁 같이 합시다.
은비 : 네?
타쓰지 : 사과하는 의미로 내가 살게요. 장소 한 번 정해봐요.
은비 : (화가 싹 풀린다) 음... 그럼... 아예 저희 집에서 식사하시는 건 어떠세요?
타쓰지 : 그럼 더 좋죠.
은비 : 그럼... 제가 날을 잡아도 될까요?
타쓰지 : 물론이죠.
은비 : 알겠습니다.
은비, 인사하고 나가며 입이 찢어진다.
#34. 은비네 집 - 주방 (밤)
순자, 땀을 뻘뻘 흘려가며 잔치집처럼 음식을 해대고 있다.
순자 : 내가 미쳐. 명절도 아닌데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차린대? 이 여편네, 나와서 좀 도와주든지, 요리 아줌마를 부르든지,
나 혼자서 어떻게 하라는 거야?
#35. 은비네 안방 (밤)
채여사, 화장을 하고 꽃단장을 하느라 너무 바쁘다.
채여사의 옷이란 옷은 다 꺼내져 있다.
봉수 : 여보, 난 뭐 입어?
채 : 그거, 대충 그냥 입어.
봉수 : 아니, 뭐?
채 : (거울만 들여다보며) 아니, 그거 있잖아, 그거, 그거.
봉수 : 아니, 그거가 뭐야?
채 : 아으 증말, 짜증나. 바빠 죽겠는데. 그거, 제일 비싼 거 그거 있잖아. 유명한 상표 있잖아, 그거!
봉수, 서랍을 뒤지긴 하지만 마누라가 뭘 얘기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봉수 : 뭐 말하는 거야, 뭐어?
문이 벌컥 열리고 순자가 들어온다.
순자 : 사모님! 좀 나와서 도와주세요. 나 혼자 도저히 못하겠어요.
순자, 다시 확 나간다.
채 : 아으, 내가 못살아, 못살아. 어떻게 나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이 집구석에는.
(아줌마에게) 아니, 뭐, 뭐? 뭘 도와달라는 거야?
채여사, 순자를 따라 나간다.
시간경과
채여사, 봉수, 현관에 우아한 차림으로 서 있다.
채여사, 문을 열어주면 은비와 타쓰지가 들어온다.
채여사 : (교양)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은비 엄마예요.
봉수 : 어서 오세요.
타쓰지 : 초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타쓰지, 포장이 예쁘게 된 와인을 내민다.
채여사 : 어머나, 뭘 이런 걸 다... 이쪽으로.
채여사, 타쓰지를 식탁으로 안내한다.
채여사 : (타쓰지가 사온 와인을 순자에게 건넨다) 아줌마. 이거.
타쓰지와 은비네 식구들, 식탁에 앉는다.
식탁 위엔 온갖 음식들과 와인이 세팅되어 있다.
순자, 식탁 옆에 서서 타쓰지를 관심 있게 본다.
채여사 :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이게 소박한 한국 가정의 식탁이랍니다.
순자 : (채여사를 째려본다)
봉수 : 자, 먹읍시다.
타쓰지 : 잘 먹겠습니다.
이상한 침묵 속에 밥을 먹는다.
채여사, 순자가 쳐다보고 있자 저리 가 있으라고 눈짓을 한다.
응접실 쪽으로 가는 순자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채여사 : 우리 은비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은비 : (타쓰지를 보며 씩 웃는다)
채여사 : 우리 은비가 어릴 때부터 아주 똑똑했거든요. 외동딸이라 정말 귀하게 키웠답니다.
봉수 : (무심코 한마디 한다는 것이 그만) 그래서 싸가지가 좀 없지요.
은비와 채여사, 동시에 봉수를 째려본다.
봉수 : (식은땀을 흘리며) 어, 농담이야. (억지로 웃는다) 허, 허, 허.
채 : 우리 이이는 실없는 농담도 잘한답니다.
은비와 채여사, 괜히 같이 웃는다.
채 : 어쨌거나 우리 은비,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타쓰지 : 별 말씀을요, 제가 부탁드려야죠.
채 : (너무 마음에 든다) 앞으로 한국을 알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내 집이다 생각하시고 편안하게 저희 집을 방문해 주세요.
봉수 : 은비야, 우리 식당에도 한 번 모시고 와라.
채 : (식당이라는 말이 너무 싫다)
봉수 : 우리 식당은 최고급 한우 갈비만 엄선해서 쓰기 때문에 육질이 부드럽고 입에서 살살 녹습니다.
타쓰지 : (은비를 슬쩍 보고) 아, 예. 꼭 한번 들르겠습니다.
은비와 채여사, 식은땀이 난다.
채 : 근데 어쩜 그렇게 한국말을 잘 하세요?
타쓰지 : 어릴 때 한국에서 살았습니다.
은비 :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타쓰지가 놀랍다)
채 : 어머, 그러세요?
봉수 : 강북에서 사셨어요, 강남에서 사셨어요?
타쓰지 : 이 근첩니다.
봉수 : 아...많이 변했죠?
타쓰지 : 예.
채 : 근데 어떻게 한국에서 사셨어요?
타쓰지 : 어머니가 한국분입니다.
채여사 : 아, 예...
채여사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은비를 돌아본다.
타쓰지, 묵묵히 밥만 먹는다.
이때 봉수의 핸드폰벨이 침묵을 깬다.
봉수 : 아, 실례하겠습니다. (받는다) 여보세요.
봉수, 갑자기 전화를 끊고 배터리를 분리해 주머니에 넣는다.
채여사 : (본능적으로 이상한 낌새를 채지만 우아하게) 누구예요?
봉수 : 어, 아니야.
봉수, 막 먹기 시작하고 채여사, 역시 우아하게 먹기 시작한다.
#36. 은비네 집 앞 (밤)
차가 서 있고 기사, 기다리고 있다.
타쓰지 : 오늘 저녁 잘 먹었어요.
은비 : 저기... 오늘 저희 식구 때문에 기분 나쁘셨다면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타쓰지 : 어머니가 물어보신 거 때문에 그래요?
은비 : ...
타쓰지 :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은비 : ...
타쓰지 : 화목해 보이더군요. 은비씨가 부럽네요. 좋은 부모님과 함께 지낼 수 있어서. 갈게요.
은비 : 예, 안녕히 가세요.
타쓰지, 뒷자리에 타고 떠난다.
은비, 타쓰지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37. 타쓰지의 차 안 (밤)
타쓰지, 뒷자리에 깊숙이 몸을 묻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고개를 뒤로 젖힌다. 전화벨.
타쓰지 : (누워서 건방지게 눈을 감고 받다가 점점 몸을 일으킨다. 이하 전부 일어로) 네. ... 아, 그래요? ....(한참 듣기만 한다)
.. ... 지문 조회를 해도 안 나와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 그럼, 강인철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란 말이죠?
... 김춘추? ... 음.... 수고했어요.
타쓰지, 전화를 끊고 날카롭게 창 밖을 돌아본다.
#38. 강남 컨설팅
춘추, 회전의자를 창 쪽으로 돌려 앉아 하염없이 창 밖만 보고 있다. 책상에 죽그릇이 놓여 있다.
준하 : 회장님. 회장님께서 평소 즐겨 드시던 죽집에서 만들어온 전복죽입니다..
춘추 : ...
준하 : 회장님. 죽이라도 드시고 기운을 차리셔야 땅꼬마 손에서 우리 공주를 찾아올 거 아닙니까?
춘추, 그제야 기운 없이 회전의자를 돌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숟가락을 들다가 눈물이 콱 쏟아지려 하자
다시 툭 떨어뜨리듯이 내려놓고 손으로 눈을 가린다.
춘추, 손으로 눈을 지그시 누른 채 회전의자를 다시 돌린다.
준하 : 회장님. 제가 반드시 공주를 찾아내서 회장님의 그 마음의 병을 깨끗이 씻어드리겠습니다.
춘추 : (기운 없이) ... 나가 있어.
준하, 눈치를 보며 나가면 창 밖을 바라보는 춘추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39. 인철이네 집 욕실 (밤)
인철, 변기에 앉아 고등학교 국사책을 보고 있다.
인철 : 남부여라는 나라가 있긴 있었네? (책을 뒤집어 보며) 나도 학교 다닐 때 분명히 배웠을 텐데... 왜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지?
공주 : (소리) 아직도 멀었느냐?
인철 : 좀 기다려.
공주 : (소리) 못 참겠다.
인철 : 아, 증말.
인철, 책을 내려놓고 휴지를 푼다. 마지막이다.
#40. 인철이네 거실 (밤)
인철과 공주, 휴대용 가스렌지에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다.
인철 : 야, 좀 팍팍 먹어라. 그렇게 먹으니까 아무데서나 픽픽 쓰러지지.
인철, 삼겹살을 상추에 크게 싸서 입에 넣으려다가 공주에게 준다.
인철 : 야, 먹어.
공주, 문득 아리가 개구리를 내밀던 순간이 떠올라 눈물이 핑 돈다.
인철 : 왜, 또?
공주 : 아니다.
인철 : (입 벌리며) 아 해!
공주, 쑥스럽게 입을 크게 벌리고 받아 먹는데
인철, 갑자기 자기가 쑥스러워져 고개를 박고 밥을 먹는다.
인철 : (자기도 막 먹다가 슬쩍) 야, 근데 너, 남부여에서 왔다 그랬지?
공주 : (눈이 반짝 뜨인다)
인철 : 아니, 내가 니 말을 믿는다는 게 아니라 책에 보니까 남부여라는 나라가 있긴 있더라.
공주 : 그래? 어느 책이냐? 그 책을 보여줄 수 있느냐?
인철 : 니가 보면 아냐?
공주 : 그래도 좀 보여다오.
인철 : 됐어. 밥이나 먹어.
공주 : 보여다오.
인철 : 아, 밥 먹는데 귀찮게!
인철, 주변을 둘러보며 찾다가 문득 생각이 나 욕실로 들어간다.
#41. 욕실 (밤)
국사책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다. 망연자실하는 인철.
인철 : 야!!!
#42. 다시 거실
인철, 책을 들고 욕실에서 뛰쳐나온다.
인철 : 이거 니가 이랬어?
공주 : 그게 어쨌다는 거냐?
인철 : 휴지가 떨어졌으면 휴지를 달라 그래야지!!! 이거 숙희 교과선데 이거 어떡할 거야? 걔 고3이란 말이야!!
공주 : 휴지는 배워 알겠다만 교과서는 뭐고, 고삼은 또 뭐냐?
인철 : 야! 화전민! 계룡산! 너, 학교도 안 다녔어?
공주 : 학교라니?
인철 : 아, 이거 어떡해? 나 숙희한테 죽었네. 아으, 증말.
인철, 책을 옆에 탁 내려놓고 밥을 먹는데
공주, 인철이 내려놓은 찢어진 국사책을 다시 든다.
공주 : 그럼, 이게 책이란 말이냐?
인철 : 보면 모르냐? 그래도 겉장은 질겨서 안 뜯었네? (책을 들어올리며) 야! 여기 뭐라고 써있어?
공주 : ... 이게 어느 나라 글자냐?
인철, 기가 막혀서 말을 못하고 빤히 본다.
인철 : (조심스럽게) 너, 한글도 모르냐?
공주 : 한글이 뭐냐?
인철, 아무 페이지나 펴 공주 앞에 펼친다.
인철 : 이게 한글이잖아.
공주 : ... (들여다보며) 글자가 있긴 있구나. 자격루, 혼천의.
인철, 공주의 손에서 책을 탁 빼앗아 공주가 보던 페이지를 본다.
한글 옆 괄호 안에 방금 공주가 읽은 한자가 써있다.
인철 : ... (공주를 보며 심각하게) 너, 청학동에서 왔지?
#43. 엄박사네 집 (밤)
엄박사, 공주의 사주 여덟 글자를 한자로 적어 놓고 책도 잔뜩 쌓아 놓고
글자 사이사이에 한문으로 뭔가를 깨알같이 기록해가며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다.
엄 : 음... 이상해... 이상해... 아무리 봐도 이상해... 이건 정말 이상해. 내가 이런 걸 본 적이 없는데...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순자를 흔들어 깨운다) 여보, 여보, 여보
순자 : (코를 골다말고 갑자기 멈추며 놀란다) 크릉! 왜? 나, 코 골았어?
엄 : 인철이가 데려온 아가씨 말이야.
순자 : (갑자기 짜증이 난다) 그 아가씨가 왜?
엄 : 아무리 봐도 이상해서 그래.
순자 : 그래, 이상해. 그 아가씨 이상한 거 이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 있어?
엄 : 그 얘기가 아니라 내가 사주를 풀어보니까 말이야. 이게 보통 사주가 아냐.
순자, 갑자기 벌떡 일어나 베개로 엄박사의 머리를 내리친다.
순자 : 이거 봐요, 엄박사님! 잠 좀 잡시다. 나 오늘 정말 피곤한 사람이야. 손님 하나 오는데 내가 정말이지 환갑잔치 치뤘어!!!
순자, 다시 뒤로 벌렁 눕더니 코를 골기 시작한다.
엄, 순자가 눕자 다시 글자를 동그라미로 연결해가며 퍼즐 풀듯이 사주를 푼다.
#44. 헬스장
은비, 런닝머신 위에서 달리고 있다. 타쓰지의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타쓰지 : 어머니가 한국분입니다.
은비, 궁금해 미치겠다.
은비, 기계를 끄고 내려와 전화를 한다.
은비 : 강인철씨? 저, 고은비예요. ... 휴일인데 뭐하세요? ... 잘 됐네요. 저, 여기 헬스장인데, 내려와서 운동 같이 하실래요?
#45. 아파트 복도
찢어진 국사책을 옆구리에 낀 인철, 여전히 반짝이 원피스에 반짝이 자켓을 입은 공주와 함께 엄박사 집 앞에 서 있다.
숙희, 집에서 나온다.
숙희 : 왜?
인철 : (급하게) 엄마 계셔?
숙희 : 아니. 일 나갔지.
인철 : 박사님은?
숙희 : 출장 감정 갔어.
인철 : (한대 쥐어 박으며) 어른한테 갔어가 뭐냐?
숙희 : 왜 때려?
인철 : 야, 그럼 (주머니에서 오천원을 꺼내 주며) 니가 오늘 얘 좀 책임져라.
숙희 : 무슨 얘기야?
인철 : 혹시 이상한 놈들이 와서 이 주변에 얼쩡거리면 절대로 못 나가게 해. 알았지?
숙희 : 나 공부해야 된단 말이야.
인철 : 잘됐네.
숙희 : 싫어!!
인철 : 알았어, 알았어. (주머니에서 오천원을 더 꺼낸다. 손에 쥐어주며) 때 맞춰서 밥만 주면 돼.
(공주에게) 말썽부리지 말고 잘 있어야 돼. 알았지? (후닥닥 가며 숙희에게) 부탁한다.
숙희 : 오빠! 오빠!
인철 : (다시 돌아오며) 아, 참 이거, 잘 봤다. (국사책을 주고 홱 사라진다)
숙희 : (책을 보며 경악한다) 오빠! 오빠!!!
숙희, 인철을 바라보고 있는 공주를 째려본다.
#46. 은비네 아파트 로비
인철, 마치 호텔처럼 고급스럽게 꾸며진 아파트 로비에 들어서며 괜히 주눅이 들어 두리번거리며 소파에 앉는다.
높은 천장, 대리석이 깔린 바닥, 안내데스크의 아가씨, 제복을 입은 수위까지 모든 게 낯설다.
이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순자가 내리다가 인철을 보고 다가온다.
순자 : (인철의 어깨를 툭 치며) 여긴 웬일이야?
인철 : 어? 아줌마. 누구 좀 만나려구요. 퇴근하세요?
순자 : 누구?
인철 : 있어요.
이때 다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은비가 내린다.
은비 : 인철씨!
인철 : 아, 은비씨! (순자에게 잽싸게) 그럼, 가보세요.
순자 : (돌아보고 은비가 다가오자 의아한 얼굴로) 둘이 아는 사이야?
인철 : 예?
은비 : 아줌마, 지금 가세요?
인철 : (당황한다)
순자 : 어, 그래. (별일이네 하는 얼굴로 둘을 번갈아보며) 근데 둘이 어떻게 아는 사이야?
은비 : 예?
순자 : 옆집 총각하고 어떻게 알아?
은비 : 옆집 총각이요? (반갑게) 우리 옆집 사세요?
인철 : (천장을 본다)
순자 : 아니, 우리 옆집. 임대 아파트!
은비 : 네?
순자 :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그럼, 나 갈게. (가버린다)
인철, 가만히 딴 데 보고 서 있고 은비도 다른 데를 보고 픽픽 웃으며 서 있다가.
은비 : (혼잣말로) 어쩐지 헬스장으로 오라 그럴 때 못 알아듣더라니. 하. 차. 재수가 없을라니까, 정말.
(엘리베이터 쪽으로 돌아서는데)
인철 : 야!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은비 : (멈추고 홱 돌아서며) 뭐? 야? (보다가) 어디서 별 거지같은 게 정말.
은비, 상대하기조차 싫다는 얼굴로 다시 돌아서 가버린다.
인철 : 뭐, 저런 게 다 있어? 허, 차, 허.
인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괜히 헛웃음을 웃어보지만 눈에는 눈물이 핑 돈다.
인철, 너무 비참하고 창피해 그 자리를 뜨지도 못한다.
#47. 포장마차 (밤)
인철, 술이 떡이 돼 있고 혁이는 옆에서 위로를 해주고 있다.
혁 : 야, 정말 지지리 여자복도 없다. 이번엔 뭐, 제대루라매? 뭐하는 집 딸이야?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나고,
집에 돈이 많으면 얼마나 많아? 어떻게 골라도 그딴 기집애를 고르냐?
인철 : 내가 고른 게 아니라 걔가 먼저 접근해 온 거라니까.
혁 : 아니, 지가 먼저 접근을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든가. 왜 시작도 하기 전에 상처를 줘?
하여튼 요새 기집애들은 사람보다 돈이 먼저라니까? 야, 강인철. 너, 괜찮은 놈이야. 그렇게 낙담하지마.
니가 내세울 집안 없고, 학력 좀 딸리고, 돈 없고, 성질 좀 더러운 거만 빼면 허우대 멀쩡하지, 직업 있지, 니가 뭐가 부족해?
난 너 괜찮다고 본다. 그럼 된 거 아니냐?
인철, 혁을 노려보다가 술을 병째 마신다.
혁 : 얌마, 천천히 마셔. 아줌마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이때 포장을 들추고 준하와 부하들이 들어와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혁 : 야, 근데 공주는 어디다 맡겼냐?
준하, 공주라는 말에 날카롭게 돌아본다.
혁 : 그나저나 그 놈들 바보 아니냐? 거기까지 냄새 맡고 와 놓고 그냥 가냐? 땅꼬마가 누군지 몰라도 안됐어. 그지?
준하와 부하들, 얼굴이 일그러진다.
#48. 지하창고 (밤)
술 박스가 쌓여있는 으슥한 지하창고.
인철과 혁, 피떡이 되어 바닥에 엎어져 있고 춘추와 부하들이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다.
춘추 : ... 너, 나하고 장난하냐?
인철 : ...
춘추 : 너! 내가 우스워 보이디?
인철 : ...
춘추 : 새파란 자식들이 어른을 갖고 놀아?
인철 : ...
춘추 : 일으켜.
부하들, 인철과 혁을 일으켜 세운다.
춘추 : 앞장서.
인철 : 쟤는 아무 상관없으니까 보내주세요.
춘추, 갑자기 무섭게 인철을 갈긴다.
춘추 : 앞장서!
인철과 혁, 부하들에게 확 끌려 나간다.
#49. 인철이네 집 앞 (밤)
타쓰지의 차가 선다.
타쓰지, 차에서 내려 인철이네 집을 올려다보는데
춘추네 차 두어대가 요란하게 서더니 인철과 혁이를 끌어내린다.
인철, 차에서 내리다가 자기를 보고 있는 타쓰지와 눈이 마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