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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海東繹史) 제7권 / 세기(世紀) 7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강의방에서 발췌
2018.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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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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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隋)나라 고조(高祖) 개황(開皇) 원년 평원왕 23년 12월에 고구려 왕 고탕(高湯)에게 대장군 요동군공
(大將軍遼東郡公)을 제수하고 고려 왕(高麗王)으로 고쳐 봉하였다.
○ 고조가 선양을 받자 고탕이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끊이지 않고 조공을 바쳤다. 신라와 더불어서 매번
서로 침략하여 쳤는데, 개황 초년에는 자주 사신을 보내어 조알하였다. 그러다가 진(陳)나라를 평정한
뒤에는 고탕이 크게 두려워해 군사를 조련하고 군량을 쌓으면서 항거할 계책을 하였다.
《이상 모두 수서(隋書)》
○ 10년 영양왕(嬰陽王) 원년
○ 살펴보건대, 《수서》에는 본디 17년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사에 “개황 10년에 평원왕이 훙하고 영양왕
고원(高元)이 즉위하였다.”고 한 것에 의거하여 보면, 이 조서를 내린 것은 마땅히 10년에 있었으므로,
동사에 따라서 바로잡는다. 황제가 고탕에게 새서(璽書)를 내리기를, “비록 번부(藩附)라고 일컫기는 하지만
성의와 예의가 미진하다.” 하였다. 조서는 예문지에 상세히 보인다. 고탕이 새서를 받고는 황공하여서 장차
표문을 올려 사죄하려 했는데, 마침 병이 나 졸하고, 그의 아들 고원(高元)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에 고조가 사신을 파견하여 고원을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에 제수하고, 요동군공(遼東郡公)을
세습받게 하고, 옷 한 벌을 내려 주었다. 그러자 고원이 표문을 받들어 사은하고, 아울러 상서(祥瑞)를
축하하면서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고조가 고원을 책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수서》
○ 《요사(遼史)》에는, “개황(開皇) 8년에 거란(契丹)의 별부(別部)로 고구려에 붙어 살던 출복(出伏) 등이
백성들을 이끌고 내부(內附)하였다. 이에 앞서 원위(元魏) 말기에 기수(寄首) 팔부(八部)가 고구려와
유유(蠕蠕)의 침입을 받아 겨우 1만여 구를 거느리고 내부하였는데, 이들이 모여 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나라 문선제(文宣帝)가 평주(平州)로부터 세 갈래로 나누어 쳐들어와 남녀 10여 만 구(口)를 포로로
잡아갔다. 계속해서 돌궐(突厥)의 핍박을 받아 고구려로 도망쳐 가 붙어산 자가 1만 호에 불과하였으며,
부락이 흩어져서 다시는 옛날의 팔부(八部)가 되지 못하였다. 개황 말기에 여러 부족들이 서로 공격하기를
그치지 않자, 출복 등이 고구려를 두려워해 내부하였는데, 조서를 내려서 갈해나안(渴奚那顔)의 북쪽에
이들을 머물게 한 것이다.” 하였다.
○ 18년 영양왕 9년 2월에 고구려 왕 고원(高元)이 말갈(靺鞨)의 무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요서(遼西)
지방을 침략하니, 영주총관(營州摠管) 위충(韋沖)이 이를 물리쳤다. 수(隋)나라 임금이 이 말을 듣고는
대노하였다. 을사에 한왕 양(漢王諒)과 왕세적(王世積)을 행군원수(行軍元帥)로 삼고는 수군과 육군 30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고경(高熲)을 한왕(漢王)으로, 장사(長史)
주라후(周羅㬋)를 수군총관(水軍摠管)으로 삼았다.
○ 6월 병인에 수나라 임금이 조서를 내려 고구려 왕 고원의 관작을 삭출(削黜)하였다. 한왕 양의 군사가
임유관(臨渝關)에 이르러 장마를 만나 군량을 운반하지 못하여 군사들이 먹을 것이 떨어진 데다
역질(疫疾)까지 걸렸고, 주라후는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平壞城)으로 쳐들어오다가 역시 바람을
만나 배가 대부분 뒤집혔다.
○ 살펴보건대, 《수서》에는, “행군총관(行軍摠管) 장윤(張奫)의 군사만 살아났다.” 하였다.
○ 9월 기축에 수나라의 군사가 돌아갔는데, 죽은 자가 십중팔구였다. 고구려 왕 고원 역시 두려워서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글을 올려 ‘요동 더러운 땅의 신하 원(元)’이라 칭하니, 수나라 임금이 이에 군사를
파하고 그 전과 같이 대우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고원 역시 해마다 조공을 보내었다. 《수서》
○ 수 양제(隋煬帝)가 즉위하여 전성기를 맞았다. 고창국(高昌國)의 왕과 돌궐(突厥)의 계인가한(啓人可汗)이
모두 친히 대궐에 나와 공물을 바쳤다. 이에 고원을 불러 들어와 조회하게 하니, 고원이 두려워서
번국으로서의 예를 자주 빠뜨렸다. 《상동》
○ 대업(大業) 3년 영양왕 18년 8월에 수나라 황제의 거가(車駕)가 유림(楡林)을 출발하여 돌궐의
가한(可汗) 계민(啓民)의 장막(帳幕)에 행차하였다. 이때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어 먼저 돌궐과 통하였는데,
계민이 감히 이를 숨기지 못하고 사신을 데리고 함께 가서 수나라 임금을 만났다. 배구(裴矩)가 이를
인하여 수나라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 땅으로, 주(周)나라 때에는 기자(箕子)에게 봉하였고, 한(漢)나라 때에는
세 군(郡)으로 나누었으며, 진(晉)나라에서도 역시 요동에서 통할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따로 이역(異域)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제(先帝)께서 이를 미워하여 정벌하려 한 지 오랩니다.
다만 양양(楊諒)이 어리석어서 군사를 출동시켰으나 공이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재위한 때를 당하여 어찌
이를 취하지 않아 문명국을 오랑캐의 나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지금 고구려의 사자가 돌궐에
조회하면서 친히 계민(啓民)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감화된 것을 보고서는 반드시 황제의 위엄이 멀리까지
펴져 나간 것을 두려워하고, 뒤늦게 복종했다가는 먼저 망할까 염려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 틈을 타서
그를 위협하여 입조하게 하면 고구려를 복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양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묻자, 배구가 말하기를,
“직접 고구려의 사신에게 조칙을 내려 고구려로 돌아가서 고구려의 왕에게 ‘즉시 와서 알현을 하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돌궐을 거느리고 가서 즉시 주벌하겠다.’고 전하게 하소서.”
하니, 양제가 그 말을 받아들여 고구려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돌아가서 너희 왕에게 곧바로 와서 알현하게 하라.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내가 계민을 거느리고
너의 나라로 가서 칠 것이다.”
하였다. 《상동》
○ 7년 영양왕 22년 2월 임오에 양제가 조서를 내리기를, “고구려 왕 고원이 번국의 예를 제대로 지키지
않기에 장차 요동 동쪽으로 가 그 죄를 물어 승략(勝畧)을 펴려고 한다. 비록 고구려를 정벌하러 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쪽 지방도 순시하겠다.” 하였다. 《상동》
○ 양제가 조서를 내려서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유주 총관(幽州摠管) 원홍사(元弘嗣)에게 칙명을 내려
동래해구(東萊海口)에 가서 선박 3백 척을 만들게 하였는데, 관리들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주야로 쉬지
않았으므로 죽은 자가 열에 서넛은 되었다. 4월 경오에 거가(車駕)가 탁군(涿郡)의 임삭궁(臨朔宮)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서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징집하였는데,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모두 탁군에
모이게 하고, 또 강남(江南)과 회남(淮南)의 수수(水手) 1만 인과 노수(弩手) 3만 인, 영남(嶺南)의
배찬수(排鑹手) 3만 인을 징발하였다. 5월에 하남(河南), 회남(淮南), 강남(江南)에 명령하여 병거(兵車) 5만
승(乘)을 만들어서 옷과 무기를 모두 싣게 하고 하남(河南)과 하북(河北)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군수 물자를
공급케 하였다. 7월에 강남과 회남의 백성과 배를 징발해서 여양(黎陽)과 낙구(洛口)의 여러 창고에 있는
쌀을 탁군으로 운반하도록 하였는데, 배가 1천여 리나 이어졌다. 그리고 무기와 공격하는 도구 등을 싣고
오가느라 길 위에 있는 자가 항상 수십 만 명이나 되어 길을 꽉 메워 주야로 끊이지 않았으며, 죽은 자가
줄을 지어 온 천하가 요란하였다. 《자치통감》
○ 8년 영양왕 23년 정월 신사에 사방의 병사들이 모두 탁군에 모였다. 양제가 합수 영(合水令)
유질(庾質)을 불러 묻기를,
“고구려의 군사들이 우리 한 군(郡)을 당해 내지 못할 것인데, 이제 짐이 이 많은 군사로 치니,
경은 이길 것으로 생각하는가, 못 이길 것으로 생각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치면 이길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폐하께서 친히 나가서 싸우지 말았으면 합니다.”
하자, 양제가 얼굴빛이 변하면서 말하기를,
“짐이 지금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서 이곳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찌 적을 보기도 전에 먼저 물러갈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싸워서 이기지 못할 경우에는 위엄을 손상할까 염려됩니다. 만약 거가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고 용맹한
장수와 강한 군사에게 명하여 지시를 받은 다음 속히 달려가게 해, 고구려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나가게 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일은 신속히 하여야만 하는 것으로, 때를 놓칠 경우에는 성공치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양제가 기뻐하지 않았다. 우상방서 감사(右尙方署監事) 경순(耿詢)이 봉사(奉事)를 올려 간절히
간하자, 양제가 몹시 노해서 좌우에 명하여 참수하게 하였는데, 하조고(何稠苦)가 구원하여 참수를
면하였다. 임오에 조서를 내렸다. 조서는 예문지에 상세하게 나온다.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ㆍ장잠(長岑)ㆍ명해(溟海)ㆍ개마(蓋馬)ㆍ건안(建安)ㆍ남소(南蘇)ㆍ요동(遼東)ㆍ현도(玄菟)ㆍ부여(扶餘)
ㆍ조선(朝鮮)ㆍ옥저(沃沮)ㆍ낙랑(樂浪) 등 도(道)로 나오고, 양제가 여러 군이 진격할 길을 지시하면서
한나라의 옛 현명(縣名)을 썼는데, 《한지(漢志)》를 보면, 누방ㆍ장잠ㆍ조선현은 낙랑군에 속하였고, 개마는
현도군에 속하여 개마대산(蓋馬大山)과 요동(遼東)이라는 한나라 군의 이름이 있다. 그리고 명해는 바로
한나라 낙랑군의 해명현(海冥縣)이고, 건안, 남소, 부여는 모두 고구려에서 성을 쌓아 지키던 곳이며,
옥저 역시 옛 지명인데, 이때에는 그 지역이 이미 신라의 경계 안으로 속하여 있었다. 우(右) 12군은
점제(黏蟬)ㆍ함자(含資)ㆍ혼미(渾瀰)ㆍ임둔(臨屯)ㆍ후성(侯城)ㆍ제해(提奚)ㆍ답돈(蹋頓)ㆍ숙신(肅愼)ㆍ갈석(碣石)
ㆍ동이(東暆)ㆍ대방(帶方)ㆍ양평(襄平) 등 도로 나왔는데, 《한지》를 보면,
점제ㆍ함자ㆍ혼미ㆍ제해ㆍ동이ㆍ대방 등의 현은 낙랑군에 속하고, 후성ㆍ양평은 요동군에 속하고, 임둔
역시 한나라 무제 때 설치한 군의 이름이며, 답돈은 바로 한나라의 요서(遼西)로 오환 답돈(烏丸蹋頓)이
사는 곳이며, 숙신은 옛날 숙신씨의 나라로 그 지역에 이때에는 말갈(靺鞨)이 살고 있었으며, 갈석은
우공편(禹貢篇)에 나오는 갈석이다. 두우(杜佑)는 이 갈석이 고구려에 있다고 여겨 “갈석산(碣石山)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진(秦)나라 장성(長城)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지금 장성을 살펴보면
동쪽으로 요수(遼水)를 횡단하여 고구려로 들어가는데, 그 터가 아직도 있다.” 하였다.
각군(各軍)이 잇달아서 길을 따라 나와 평양에 총집결하였다. 군사가 모두 1백 13만 3천 8백 명인데
2백 만이라 호하였고, 군량을 운반하는 자는 군사 수의 배가 되었다. 남쪽의 상건수(桑乾水) 가에서
의사(宜社)하였고, 임삭궁(臨朔宮) 남쪽에서 상제(上帝)께 제사 지내었으며, 계성(薊城)의 북쪽에서
마조(馬祖)에게 제사 지내었다. 그런 다음 양제가 친히 절도(節度)를 주었으며, 매 군마다 대장과 아장(亞將)
각 1명을 두고, 기병 40대를 두었는데, 각 대는 1백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10대를 단(團)으로 삼았다. 그리고 보졸 80대를 4단으로 나누고 각 단에 편장(偏將) 1명을 두었다. 갑옷과 장식과 깃발을 각 단마다
서로 다른 색으로 하였고, 수항사자(受降使者) 한 사람이 조서를 받들어 위무하게 하였는데, 이 사람은
대장의 규제를 받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치중(輜重)과 산병(散兵)들 역시 4단으로 만들어 보졸이 감싸고서
나아가게 하였다. 진격하고 멈추며 진영을 치는 데 있어서 모두 차서와 법도가 있었다.
계미에 제1군을 출발시키고 날마다 한 군씩 출발시켰는데, 서로 간에 40리의 간격을 두고 영(營)을
잇달아서 차츰차츰 나아가게 하였다. 40일 만에야 군사들이 모두 출발할 수 있었는데, 앞뒤가 서로 이어져
북을 치고 각(角)을 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으며, 깃발이 9백 60리에 뻗쳐 있었다. 어영(御營) 안은 모두
12위(衛), 3대(臺), 5성(省), 9시(寺)가 있어, 내외, 전후, 좌우의 6군(軍)을 여기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본대(本隊)의 뒤에 출발시켰는데, 이 군사 역시 80리를 뻗쳤는바, 출전하는 군용의 성대함이 근고에 없이
성대하였다.
○ 단문진(段文振)을 좌후위 대장군(左侯衛大將軍)으로 삼아 남소(南蘇)의 길을 따라 진격하게 하였는데,
단문진이 중도에 병이 심하여 표문을 올리기를,
“삼가 보건대, 요동의 자그마한 오랑캐가 엄한 형벌에 복종치 않아 멀리 6군의 군사가 출동하고 황제께서
직접 출동하시게끔 하였습니다. 다만 오랑캐들은 속임수를 잘 쓰는바, 이에 대해 잘 방비하여야만 하니,
그들이 입으로 항복한다고 말하더라도 성급하게 항복을 받아들이지 말아야만 합니다. 지금 장맛비가
내리고 있으니,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제군(諸軍)을 엄하게 절제해서 성화같이 속히 진격하되,
수군과 육군이 함께 진격해서 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을 때 진격한다면, 외로운 평양성쯤은 곧바로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고구려의 근본 뿌리인 평양성이 넘어간다면 그 나머지 성들은 저절로
무너져 곧바로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가을장마를 만날 경우에는 몹시 곤란할 것입니다.
군량은 다 떨어지고 강적인 고구려가 앞에 있고 말갈(靺鞨)이 뒤에 있는데, 머뭇거리면서 결정짓지 못하는
것은 상책이 아닙니다.”
하였다. 3월 신묘에 단문진이 졸하니, 양제가 몹시 애석하게 여겼다.
○ 계사에 양제가 비로소 군사들을 절제하였다. 진격해서 요수(遼水)에 이르러 모든 군사가 다 모여 물가를
따라 진을 쳤다. 고구려 군사들이 요수를 막고 굳게 지키었으므로 수나라 군사들이 요수를 건너지 못하자,
좌둔위대장군(左屯衛大將軍) 맥철장(麥鐵杖)이 선봉장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양제가 공부 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하여 요수 서쪽 언덕에서 부교(浮橋) 세 개를 만들게 하였다. 부교가 다 만들어지자
이를 끌어다가 요수 동쪽 언덕에 걸치게 하였는데, 부교의 길이가 짧아서 언덕에 1장 가량 미치지
못하였다. 고구려 병사들이 크게 이르자 수나라 군사 가운데 용맹한 자들이 앞을 다투어 물로 달려가
접전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높은 곳에 올라가 이들을 공격하니, 수나라 군사가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자가 많았으며, 맥철장이 강 언덕에 뛰어올랐다가 호분 낭장(虎賁郞將) 전사웅(錢士雄), 맹금차(孟金叉)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이에 수나라에서는 군사를 거두고 부교를 끌어들여 다시 서쪽 강안에 모였다.
그러고는 다시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하여 부교를 잇게 하였다. 이틀 뒤에 부교가 완성되자
제군이 서로 잇달아서 계속해 나가 동쪽 언덕에서 크게 싸워 고구려 병사가 대패하였는데, 전사자가 1만
명 정도되었다. 수나라의 제군이 이긴 기세를 타고 진격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는데, 그곳은 바로
한(漢)나라 때 요동군의 치소(治所)였던 양평성(襄平城)이다. 《수서》에 “여러 군사가 성을 포위하였다.
양제가 염비(閻毗)에게 명하여 성 아래로 가서 선유(宣諭)하게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들이 쇠뇌와 화살을
마구 쏘아 대어 염비가 탄 말이 유시에 맞았다. 그런데도 염비는 얼굴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하였다. 거가가 요수를 건넜다. 양제가 형부 상서 위문승(衛文昇), 상서 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에게 명하여 요좌(遼左)의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고, 조세와 부역을 10년간 면제해 주었으며,
군현을 설치하여 서로 통섭(統攝)하게 하였다.
○ 5월에 여러 장수들이 동쪽으로 나아갔다. 양제가 이들에게 친히 경계하기를,
“지금 백성들을 위로하고 고구려 왕의 죄를 묻는 것은 공명(功名)을 얻고자 해서가 아니다. 여러 장수들이
혹 짐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경병(輕兵)으로 엄습해 외로운 군사로 혼자 싸워서 일신의 공명을
드날려 상을 받고자 한다면, 이는 대군이 진격하는 법이 전혀 아닌 것이다. 그대들은 진군(進軍)하되,
세 길로 나누어 가고, 공격하게 되면 반드시 세 길이 서로 알아야 한다. 절대로 경병으로 혼자서 진격하여
군사를 잃는 일이 없게 하라. 그리고 모든 군사가 진군하거나 정지하거나 모두 상부에 알려서 회보를
기다려 행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말라.”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양제가 요동성에 군영을 치고 길을 나누어 군사를 내보내었다. 각군(各軍)이 성 아래에서 군사를
정돈하고 있을 때 고구려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항거하였는데, 싸움이 불리해졌다. 그러자
고구려에서는 성안에 머무르면서 굳게 지켰다. 양제가 여러 군사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고, 또 여러
장수에게 칙령을 내려 이르기를, “고구려가 만일 항복해 오면 즉시 무마하여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니
군사를 풀어 치지 말라.” 하였다. 성(城)이 거의 함락되려 할 때 고구려에서 항복을 청하자,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받은 대로 감히 시기를 틈타 달려 나가지 못하고, 먼저 달려가서 상부에 알렸다. 그런데
회보(回報)가 올 무렵에는 고구려에서 다시 전과 같이 방어 태세를 갖추고서 수시로 나와 항전하였다.
이렇게 반복하기를 두세 번 하였으나 양제는 끝내 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서 군량은 다
떨어지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쳤으며, 군수품은 제대로 도착하지 않았다.
○ 6월 기미에 양제가 요동성의 남쪽에 와서 성지(城池)의 형세를 두루 살펴보고 인하여 여러 장수들을
불러 질책하기를,
“공들은 스스로 관직이 높고 세신(世臣)임을 믿고는 나를 어둡고 나약한 임금으로 대하려 하는가. 서울에
있던 날에 공들은 모두 내가 직접 출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이는 공들의 못남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그랬던 것이다. 내가 지금 이곳에 왔으니, 공들이 하는 짓을 보고 공들을 참수하겠다. 공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온 힘을 다하지 않고 있는데, 내가 공들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서 그러는 것인가?”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 떨면서 실색하였다. 양제가 인하여 성의 서쪽 몇리 지점에 진을 치고서
고구려의 성과 서로 대치하였다. 양제가 한밤중에 육합성(六合城)을 쌓았는데, 하룻밤 사이에 다 쌓음에
바라보면 마치 진짜 성같았다. 고구려 군사들이 아침에 이를 보고는 귀신이 쌓은 것으로 여겼다.
○ 살펴보건대, 《수서》에는, “처음에 하조(何稠)가 행전(行殿)과 육합성을 지어 이때에 이르러
다 만들었는데, 그 성은 주위가 8리 가량 되었고, 성과 여원(女垣)의 합한 높이가 10길 가량 되었다.
위에다가는 갑사(甲士)들을 늘어세우고 의장과 깃발을 세웠으며, 또 서쪽 모퉁이에는 궐(闕)이 있고,
각 면별로 하나의 관(觀)을 세웠다. 관 아래에는 세 개의 문을 열어 두었고, 그 안에다 행전(行殿)을
지었는데, 전 위에는 시신(侍臣)과 삼위장(三衛杖)을 합해 6백 명이 들어갈 수가 있었다.” 하였다.
○ 관덕왕 웅(觀德王雄)이 검교좌익위대장군(檢校左翊衛大將軍)이 되어 요동도(遼東道)로 나아가
노하진(瀘河鎭)에 주둔하였다가 병에 걸려 훙하였다.
○ 토만서(吐萬緖)가 선봉이 되기를 청하니, 양제가 가상히 여겨 좌둔위대장군(左屯衛大將軍)에 제수하였다.
마병과 보병 수만 명을 이끌고 개마도(蓋馬道)로 나아갔다.
○ 번자개(樊子蓋)가 섭좌무위대장군(攝左武衛大將軍)에 징발되어 장잠도(長岑道)로 나아갔다.
○ 사상(史祥)이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에 제수되어 답돈도(蹋頓道)로 나아갔다.
○ 주법상(周法尙)이 주사(舟師)로서 조선도(朝鮮道)로 나아갔다.
○ 육지명(陸知命)이 동이도수항사자(東暆道受降使者)가 되었다.
○ 이경(李景)이 혼미도(渾濔道)로 나아가 고구려의 무려성(武厲城)을 공격하여 격파하니,
원구후(苑邱侯)에 봉작하였다. 《이상 모두 수서》
○ 고구려의 여러 성들이 각각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우익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나왔는데, 배가 수백 리에 뻗쳤다. 바다를 건너 먼저 진군하여 패수(浿水)로
들어갔다. 평양(平壤)과의 거리가 60리 되는 곳에서 고구려군과 만나 진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내호아가
승세를 타고 그 성을 취하려고 하자, 부총관 주법상이 이를 저지하면서, 여러 군사들이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함께 진격하기를 청하였다. 내호아가 그 말을 듣지 않고 정예군 4만 명을 선발하여 곧바로 성
아래로 나아갔다. 고구려 군사들이 나곽(羅郭) 안의 빈 절에 복병을 매복해 놓고 나와서 싸우다가 지는
척하고 도망하자, 내호아가 그들을 추격하여 성안으로 들어가서 군사를 풀어 약탈하게 하면서 대오를 다시
편성하지 않아 모두 흩어졌다. 이때 매복해 있던 고구려의 군사들이 일어나서 공격하였다. 내호아는
대패하여 겨우 목숨만 건졌고 사졸들은 살아 돌아온 자가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 살펴보건대, 《수서》 내호아열전에는, “고원(高元)의 동생 고건무(高建武)가 결사대 5백 명을 모집하여
요격하였다.” 하였다. 고구려 군사들이 배가 있는 곳까지 추격했으나 주법상이 군사를 정비하여 대기하고
있자, 고구려 군사들이 이에 물러났다. 내호아는 군사를 이끌고 해포(海浦)로 돌아와서 주둔하고 있으면서,
감히 다시는 평양성과 가까운 외곽에 머무르면서 제군(諸軍)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못하였다.
○ 살펴보건대, 《북사》 내호아열전에, “내호아가 평양도행군총관 겸 검교동래군태수
(平壤道行軍摠管兼檢校東萊郡太守)가 되어 누선(樓船)을 이끌고 바다로 나아가 패수(浿水)로 들어갔는데,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곳이다. 고구려 왕 고원(高元)이 경내(境內)를 치우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막았는데,
군진(軍陣)이 수십 리에 뻗쳐 있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내호아가 웃으면서 부장인
주법상(周法尙)과 군리(軍吏)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본디 고구려에서 성을 튼튼히 지키고 들판을 깨끗이
비운 채 우리 군사를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지금 그들 스스로가 죽을 곳으로 들어왔으니,
그들을 멸망시키고 아침을 먹겠다.’ 하였다. 고원의 동생 고건(高建)은 효용이 뛰어나 결사대 수백 명을
이끌고 도전해 왔다. 이에 내호아가 무분낭장(武賁郞將) 비청노(費靑奴)와 여섯째 아들인 좌천우(左千牛)
정(整)에게 명하여 달려가서 그의 목을 자르게 하였다. 그러고는 군사를 풀어 도망치는 고구려 군사를
추격해 곧바로 성 아래로 나아갔는데, 포로로 잡고 죽인 자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인하여 고구려의
성곽(城郭)을 깨뜨리고 성 바깥에 주둔하여 제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고구려에서는 성문을 굳게
잠그고는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하였으며, 《통감고이(通鑑考異)》에는, “이제 《수서》와 《혁명기(革命記)》를
따른다.” 하였다. 대개 고건무는 바로 뒤에 영류왕(榮留王)이 되었는바, 이곳에서 ‘달려가서 목을 자르게
하였다.’고 한 것은 심하게 속인 것이다. 《수서》와 《통감》이 옳다.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夫餘道)로 나가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樂浪道)로
나가고,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遼東道)로 나가고, 우익위장군(右翊衛將軍)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沃沮道)로 나가고, 좌둔위장군(左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玄菟道)로
나가고, 우어위장군(右禦衛將軍)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로 나가고, 우무후장군(右武侯將軍)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碣石道)로 나가고, 탁군태수 검교좌무위장군(涿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遂成道)로 나가고, 살펴보건대, 《수서》 최홍승열전에는 평양도로 나갔다고 하였다.
검교우어위호분낭장(檢校右禦衛虎賁郞將) 위문승(衛文昇)은 살펴보건대, 《수서》를 보면 위문승의 이름은
위현(衛玄)이고 문승은 그의 자(字)이다. 증지도(增地道)로 나가서 모두 압록강(鴨淥江)의 서쪽에 집결하였다.
우문술 등의 군사에게는 노하(瀘河)와 회원(懷遠) 두 진(鎭)에서부터 인마(人馬)에게 모두 1백 일치의 양식을
주고, 또 갑옷과 창 등의 무기와 의류, 병기, 천막 등의 군수품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사람마다 3석(石)
이상의 무게여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군중의 사졸들에게 “군량을 버리는 자는 참형에 처할
것이다.” 하고 명령을 내리자, 사졸들이 모두 천막 아래에다 구덩이를 파고 이를 묻어 버렸다. 이에 겨우
중간쯤 갔을 때 이미 군량이 다 떨어지게 되었다. 《자치통감》
○ 우중문(于仲文)의 군사가 오골성(烏骨城)에 주둔하였다. 우중문이 파리한 말과 노새 수천 마리를 뽑아
군대 뒤에다가 놓아두었다. 얼마 뒤에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자, 고구려에서 군사들을 출동시켜
치중(輜重)을 습격하였다. 우중문이 뒤돌아서서 이들을 쳐 크게 격파하였다.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의
장수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자치통감》의 주(注)에, 《혁명기(革命記)》에는 ‘울지문덕(尉支文德)’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수서》와 《북사》에 따른다.” 하였다.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우중문 진영으로 들어왔다.
우중문이 이에 앞서 양제의 밀지를 받았는데, 그 밀지에, “고구려 왕 고원이나 을지문덕이란 자가 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 하였다.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잡으려 할 때 상서 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慰撫使)로 있으면서 이를 굳이 제지하니, 우중문이 그 말을 듣고 문덕을 돌려보냈다. 얼마 뒤에
을지문덕을 돌려보낸 것을 뉘우쳐 사람을 시켜 을지문덕에게 속여 말하기를, “다시 의논할 일이 있으니
다시 오라.” 하였으나, 문덕은 그 말에 따르지 않고 압록수를 건너 고구려로 돌아갔다. 이에 우중문이
기병을 뽑아 압록수를 건너 추격하였는데, 싸울 때마다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을지문덕이 시(詩)를 지어
우중문에게 보내니, 우중문이 답서를 보내 유시하였는데, 을지문덕이 책(柵)을 불태우고 도망쳤다. 이때
우문술(宇文述)이 군량이 떨어져 돌아가려 하였다. 이에 우중문이 정예군을 시켜 문덕을 추격하면 공을
세울 수 있다고 하니, 우문술이 굳게 저지하였다. 그러자 우중문이 노하여 말하기를, “장군이 10만 군을
거느리고서 적은 적군도 격파치 못하고 무슨 면목으로 황제를 보겠는가. 그리고 나 우중문은 이번의
출정이 성공치 못할 것임을 알겠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옛날에 성공한 양장(良將)은 군중의 일에 대한
결정권이 한 사람에게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각 사람마다 딴마음을 가졌으니 어찌 적을 이기겠는가.”
하였는데, 이때 황제가 우중문에게 계획이 있다고 하여 제군(諸軍)으로 하여금 그에게 여쭈어 절도(節度)를
받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게 된 것이다. 우문술 등이 마지못하여 따라 드디어 동쪽으로 행군하여
살수(薩水)에 이르러서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이때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는 우문술의 군사들을 피곤하게 하려고 싸울 때마다 문득 도망쳤다. 우문술이 하루 동안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이기자, 승첩을 믿고 또 여러 사람들의 의논에 몰려, 드디어 동으로 진격하여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쳤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우문술에게 청하기를,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면 고원(高元)을 모시고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조회하겠다.” 하니, 우문술이 군사들이 피곤하여 다시 싸울 수 없고 또한 평양성이 험고하여 쉽사리
함락시킬 수 없음을 알고는, 마침내 을지문덕의 속임수에 빠져 철군하였다. 《수서》
○ 《자치통감》 주에는, “가령 내호아(來護兒)의 군사가 패하여서 먼저 물러나지 않았다면 평양성의 바깥에
진영을 치고서 우문술 등의 제군과 달려와 응원하면서 호응하여서 살수에서의 낭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또 《통감고이》에는 이르기를, “《혁명기(革命記)》에 ‘허공(許公)이 즉시 평양성 첫머리에
이르자, 고구려에서 즉시 항복하는 깃발을 성 위에 꽂고는 5일이 지난 뒤에 고구려의 지도와 호구 문서를
들고 성문을 열고서 명을 기다리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5일이 지나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에 허공이 자주 재촉하였으나, 끝내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그 뒤 또 10일이 지나서 고구려에서
말하기를, 「배와 양식이 모두 패몰되어 수나라 군사들이 모두 돌아갔는데 공은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비로소 항거하는 깃발을 세우고는 굳게 성을 지키면서 군사를 나누어 험고한
요충지를 차지하였다. 이에 허공이 비로소 고구려에게 속은 것을 알고는 즉시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는데,
날마다 방진(方陣)을 치면서 후퇴한 탓에 사면에서 한꺼번에 고구려군의 습격을 받아 살상된 자가 아주
많았으며, 양식마저 다 떨어져서 요수를 건너 살아 돌아간 자가 열에 두셋도 되지 않았다.’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양제는 교만하고 흉포하니, 고구려에서 만약 분명하게 항복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면 우문술
등은 반드시 감히 돌아가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제 《수서》를 따른다.
○ 우문술 등이 방진(方陣)을 치면서 철군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출동하여 사면에서 습격하자, 우문술
등이 싸우면서 철군하였다. 7월 임인에 살수에 이르러 군사들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후군(後軍)을
습격하니,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였다. 이에 여러 군사들이 괴멸되는 것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장사들이 다투어 도망쳐 하루 낮 하루 밤 만에 압록수에 이르니, 4백 50리를 행군한 셈이다.
천수(天水) 사람인 장군 왕인공(王仁恭)이 후군(後軍)이 되어 고구려군을 반격하여 물리쳤다. 내호아는
우문술 등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역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오직 위문승(衛文昇)의 군대 하나만
온전하였다. 처음에 구군(九軍)이 요수(遼水)를 건넜을 때에는 30만 5천 명이었는데, 돌아가서 요동성에
이른 군사는 2천 7백 명이었다. 물자와 기계는 거만(巨萬)을 헤아렸는데, 송두리째 모두 잃어버려
탕진되었다. 이에 양제가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가두었으며, 계묘일에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출정에서 단지 요수 서쪽의 고구려 무려라(武厲邏)를 고구려에서 요수의 서쪽에 순찰군을 두고서 요수를
건너는 자를 감시하였다. 함락시키고, 요동군(遼東郡)과 통정진(通定鎭)을 두었을 뿐이었다. 9월 경인에
거가가 동도(東都)에 이르렀다.
○ 11월 갑신에 우문술ㆍ우중문 등을 모두 직명을 삭제하고 일반 백성으로 만들었으며, 유사룡(劉士龍)을
참수하여 천하에 사죄하였다. 위문승(衛文昇)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삼았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살수(薩水)의 싸움에서 패하였을 때 설세웅(薛世雄)이 돌아오다가 백석산(白石山)에 주둔하였는데, 고구려
군사들이 1백여 리나 포위하여 사방에서 비가 내리듯이 화살을 쏘아 대었다. 이에 설세웅은 파리한
군사들을 모아 방진(方陣)을 만든 다음 날랜 기병 2백 명을 뽑아 앞장서서 치자, 고구려 군사가 조금
물러났다. 이 틈을 타 휘몰아쳐 드디어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고서 돌아왔다. 그러나 많은 군사를
잃어버렸기에 좌죄(坐罪)되어 면직되었다.
○ 양의신(楊義臣)이 군장(軍將)이 되어 숙신(肅愼)의 길로 나아갔다가 압록수에 이르러 을지문덕과 싸울 때
매번 선봉장이 되었는데, 하루에 일곱 차례를 싸워 이겼다. 그러나 그 뒤에 여러 군사들과 함께
패하였으므로 좌죄되어 면직되었다.
○ 유원(游元)이 영좌효위장사(領左驍衛長史)로서 개모도감군(蓋牟道監軍)이 되었는데, 우문술 등
구군(九軍)이 고구려에 패하자, 양제가 유원에게 그 옥사를 심리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수서》
○ 9년 영양왕 24년 정월 정축에 조칙을 내려 천하의 군사를 징발해서 탁군(涿郡)에 모이게 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군(驍果軍)을 만들었으며, 요동의 옛 요새를 수축하고 군량을 저장하게 하였다. 한(漢)나라와
진(晉)나라 이래로 요동성은 모두 양평(襄平)에다가 쌓았는데, 모용씨가 비로소 평곽(平郭)에다가 진을
설치하였다. 앞에서 고구려를 정벌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다고 한 데에서 말한 요동성은 바로 한나라의
양평성을 말한 것이다. 지금 다시 옛 성을 수축하였다고 한 것은 대개 성곽을 옮긴 것이다.
○ 2월 임오에 조칙을 내리기를,
“우문술은 군량을 계속해서 지급받지 못하여 드디어 군대를 패하게 하였는바, 이는 군리(軍吏)가 군량을
제대로 대지 못하여서 그런 것이지, 우문술의 잘못이 아니다.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라.”
하였다. 양제가 시종하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고구려가 작은 오랑캐로서 상국을 모욕하고 있다. 지금 바다를 막고 산을 옮기는 일도 능히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이까짓 오랑캐쯤이겠는가.”
하고는, 다시금 고구려를 정벌하는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그러자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곽영(郭榮)이
간하기를,
“융적(戎狄)이 예(禮)를 잃은 것은 신하의 일이며, 천균(千鈞)의 쇠뇌는 새앙쥐를 잡기 위하여는 쏘지 않는
법입니다. 어찌 만승(萬乘)의 몸으로서 작은 적과 대적하십니까.”
하였으나, 양제가 듣지 않았다.
○ 4월 경오에 거가가 요수(遼水)를 건넜다. 임신에 우문술과 상장군(上將軍) 양의신(楊義臣)을 보내어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우효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가 수군을 거느리고 창해도(滄海道)로 나와 동래(東萊)에 주둔하고는
평양으로 가려고 하였다.
○ 우후위장군(右候衛將軍) 설세웅(薛世雄)이 답돈도(蹋頓道)로 나아가 오골성(烏骨城)에 이르러서
주둔하였다.
○ 이경출(李景出)이 요동도로 나갔다.
○ 어구라(魚俱羅)가 갈석도군장(碣石道軍將)이 되었다.
○ 양언광(梁彦光)이 영무분낭장(領武賁郞將)으로서 노룡도군부(盧龍道軍副)가 되었다.
○ 방언겸(房彦謙)이 어가를 따라서 요동에 이르러 부여도(扶餘道)의 군사를 감독하였다.
○ 좌광록대부 왕인공(王仁恭)이 전군(前軍)이 되어 부여도로 나갔다. 양제가 그에게 이르기를,
“지난번에는 제군이 모두 패하였는데, 공만이 홀로 일군(一軍)으로 적을 격파하였다. 이제 공에게 전군을
맡기니, 나의 기대에 부응하기 바란다.” 하였다. 왕인공이 드디어 진군해서 신성(新城)에 이르렀다.
《자치통감》 주에, “신성은 남소성(南蘇城)의 서쪽에 있다.” 하였다. 고구려의 군사 수만 명이 성을 등지고
진을 쳤다. 왕인공이 정예 기병 1천을 거느리고 이를 격파하니, 고구려 군사가 성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켰는데, 왕인공이 사방으로 포위하였다. 양제가 이를 듣고는 몹시 기뻐하면서 사인(舍人)을 보내어
위로하였다. 《이상 모두 수서》
○ 양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요동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각자 편의에 따라 그때그때 종사하게 하였다.
이에 비루(飛樓)ㆍ당거(撞車)ㆍ운제(雲梯)ㆍ지도(地道)로 사면에서 일제히 진격하여 밤낮을 쉬지 않았다.
고구려 군사들이 이에 임기응변으로 항거하니, 20여 일이 지나도록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며, 수나라
군사와 고구려 군사 가운데 전사한 자가 매우 많았다. 운제의 장대 높이가 15장이나 되었는데,
효과군(驍果軍)으로 있던 오흥(吳興) 사람 심광(沈光)이 그 꼭대기에 올라가 성에 바짝 붙어 고구려 군사와
싸웠다. 짧은 칼로 접전하여 고구려 군사 수십 명을 죽이자, 고구려에서 앞 다투어 그를 쳐 떨어뜨렸다.
미처 땅에 떨어지기 전에 심광이 마침 장대 끝에서 늘어진 줄을 잡고서 다시 올라갔다. 양제가 이를
바라보고는 장하게 여겨 즉시 조산대부(朝散大夫)를 제수하였다.
○ 6월에 요동성을 오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양제가 포대 1백여 만 장을 만들어 보내 흙을
가득 담아 이를 쌓아서 어량(魚梁) 모양으로 대도(大道)를 만들되, 너비가 30보에 높이는 성(城)과 같게
쌓은 다음 전사들로 하여금 그 위에 올라가 공격하게 하였다. 또 팔륜누거(八輪樓車)를 만들어 성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어량 대도를 끼고 성을 굽어보면서 성안으로 활을 쏘려고 하였다. 시기를 정하여 공격하려
할 적에 성안에 있는 고구려 군사들이 모두 위축되었는데, 마침 양현감(楊玄感)이 모반하였다는 소식이
이르니, 양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또 고관들의 자제들이 모두 양현감이 있는 곳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욱더 걱정하였다. 병부 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이 평소 양현감과 서로 친하게 지냈으므로 내심
불안하게 여겨 무진에 고구려로 도망쳤다. 경오일 밤 2경에 양제가 몰래 여러 장수를 불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게 하였다. 군사 자재와 무기, 공격하는 기구는 산더미처럼 쌓아 두었으며, 영루와 장막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아 그것들을 모두 버리고 갔다. 군사들은 두려워 술렁거려 대오를 분별하지 못한
채 여러 갈래로 흩어졌다. 고구려 군은 이를 즉시 알았으나, 감히 성 밖으로 나와서 싸우지 못하고,
성안에서 북을 두드리며 함성을 지르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다음 날 오시(午時)에야 차차 밖으로 나와서
사방으로 정탐군을 내보냈다. 그런데도 오히려 수나라 군사들이 속이는가 의심스러워 이틀이 지난
다음에야 수천 명의 군사를 내어 추격했는데, 수나라 군사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쫓지
못하고, 항상 8, 9십 리의 거리를 두고 추격하였다. 요수에 이르게 되어서야 양제가 이미 강을 다 건너간
것을 알고는 후군(後軍)을 핍박하였다. 이때 후군만 해도 수만 명이나 되었는데, 고구려 군사들이 뒤따라와
습격하여 가장 뒤에 쳐져 있던 노약한 군사 수천 명을 죽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곡사정(斛斯政)이 고구려로 도망치자, 양제가 염비(閻毗)에게 명령하여 기병 2천 명을 거느리고 추격하게
하였으나 붙잡지 못하였다. 곡사정이 고구려의 박애성(拍崖城)에 웅거하여 있자 염비가 2일 동안
공격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염비를 불러들였다. 이에 곡사정이 고구려로 도망쳐 모든 사실을 고하였으므로
고구려에서 모든 정예병을 동원하여 추격해 왔다.
○ 고구려가 후군(後軍)을 치자, 우무위대장군 이경(李景)에게 칙명을 내려 뒤에서 고구려 군사를 막게
하였다. 고구려의 추격하는 군사가 크게 이르자, 이경이 이를 쳐서 격퇴시켰다. 《이상 모두 수서》
○ 10년 영양왕 25년 2월 신미에 조서를 내려 백관들로 하여금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게 하였는데, 며칠이 지나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무자에 조칙을 내려 다시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모든 길을 따라 모두 나오게 하였다. 《수서》에, “신묘에 조칙을 내렸다.”고 하였다.
○ 조서는 예문지에 상세히 나온다.
○ 3월 임자에 양제가 탁군(涿郡)에 행차하였는데, 도중에서 도망치는 사졸이 줄을 이었다.
○ 7월 계축에 거가가 회원진(懷遠鎭)에 주둔하였다. 이때에는 천하가 이미 어지러워져서 징발한 군사들
가운데 대부분이 기일에 맞춰 오지 못하였으며, 고구려 역시 병란에 시달려 피폐하였다. 내호아(來護兒)가
비사성(卑奢城)에 바로 비사성(卑沙城)으로,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바닷길에서 평양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비사성을 거쳐야 한다. 당나라 정관(貞觀) 말에 정명진(程名振) 역시 이 길을 따라 나왔다.
이르자, 고구려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맞아 싸웠다. 내호아가 이를 격파하고, 장차 평양성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고구려 왕 고원(高元)이 두려워서 갑자에 사신을 파견하여 항복을 청하면서 곡사정을 잡아
보내었다. 살펴보건대, 곡사정은 지난해에 고구려로 도망쳐 왔다. 이에 양제가 크게 기뻐하면서 사신을
파견하여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내호아를 소환하게 하였다. 내호아는 군사들을 모아 놓고서 말하기를,
“대군이 두 번이나 출동하여 적을 평정하지 못하였다. 이번에 돌아갈 경우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것인바,
수고만 하고 공이 없음을 나는 몹시 수치스럽게 여긴다. 지금 고구려는 실제로 지쳐 피폐해 있는 상태다.
그러니 이 틈을 타 군사들을 이끌고 공격한다면 며칠 안으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진격하여서
곧바로 평양성을 포위해 고원을 죽이고 승리해 돌아오고자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역시 좋지 않겠는가.”
하면서 조서를 받들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장사(長史) 최군숙(崔君肅)이 굳게 만류하자, 비로소 조서를
받들었다.
○ 8월 기사에 양제가 회원진(懷遠鎭)으로부터 군사를 철수하였다.
○ 10월 기축에 서경(西京 장안(長安)을 말함)으로 돌아왔다. 고구려의 사신과 곡사정을 끌고 가
태묘(太廟)에 고하였다. 이어 고구려 왕 고원을 불러 입조하게 하였으나, 고원은 끝내 오지 않았다. 이에
장수들에게 군장을 엄하게 하도록 신칙하여 다시 거병할 것을 도모하였으나, 끝내 다시 거병하지 못하였다.
《수서》에 “마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마침내 거병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당초 개황(開皇) 말기에
국가가 부강하여 조야(朝野)에서 모두 고구려를 치려는 생각이 있었다. 유현(劉炫)만이 홀로 이를 불가하게
여기면서 무이론(撫夷論)을 지어 이를 풍자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그 말이 비로소 맞아떨어졌다.
11월에 금광문(金光門) 밖에서 곡사정을 죽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호관록(壺關錄)》에는, “이밀(李密)이 조군언(祖君彦)으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해 양제의 죄 열 가지를
열거해 천하에 포고하였는데, 그 일곱 번째에 말하기를, ‘요수(遼水)의 동쪽 조선(朝鮮)의 지역에 대해서
우공(禹貢)은 황복(荒服)으로 삼았고, 주왕(周王)은 버려두고서 신하로 삼지 않았다. 그러고는 기미책을
쓰면서 성교(聲敎)가 미치게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백성을 사랑하고자 한 것이지 영토를 넓히자는 것이
아니었다. 강한 쇠뇌라도 쏘지 않으면 이치상 얇은 비단도 뚫을 수 없는 법이고, 폭풍의 마지막 힘으로는
어찌 가벼운 깃털인들 움직일 수가 있겠는가. 돌밭은 차지해 보았자 쓸모가 없는 법이고 닭갈비는
버려두는 것이 제대로 쓰는 것이다. 그런데 백성이 많고 군사가 강한 것을 믿고는 무력을 함부로
남용하였는바, 이는 오로지 병탄하는 데만 뜻이 있고 장구한 계책은 하지 않은 것이다. 무력은 불과 같은
것이어서 단속하지 않으면 저절로 불타는 법이다. 이에 드디어 억만의 군사들을 몰살시켜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게 하였다. 부차(夫差)가 나라를 잃은 것은 실로 황지(潢池)의 싸움으로 인해서였으며,
부견(苻堅)이 자신을 멸망시킨 것은 참으로 수탕(壽湯)의 싸움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앞에서 울고 있는
매미를 잡으려다가 뒤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는 자를 알지 못하였다. 패전하여 돌아 오는 군사들이 서로
돌아보고 과부를 조문하는 자들이 줄을 이루었으니, 의부(義夫)가 이를 갈며 장사(壯士)가 팔을 걷어붙이는
바이다.’ 하였다.” 하였다.
위(魏)나라부터 수(隋)나라에 이르기까지 네 나라가 바뀌면서 때마침 서로 다투느라 외국을 정벌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개황(開皇) 말기에 이르러서 바야흐로 요동 동쪽을 정벌하였는데, 천시(天時)가 불리하여
군사들이 공을 이루지 못하였다. 수 양제가 황제의 자리를 계승해서는 천하를 포용할 뜻으로 자주
삼한(三韓)의 땅을 짓밟고자 여러 번 중국의 군사를 동원하니, 고구려에서는 망할까 두려워 궁한 쥐가
고양이에게 달려들 듯이 하였다. 이에 싸워도 이기지 못하여 천하가 소란해졌으며, 드디어는 흙더미가
무너지듯이 무너져 내려 자신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병지(兵志)에 이르기를, “덕을 넓히기를
힘쓰는 자는 창성하고 땅을 넓히기를 힘쓰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다. 요동의 지역은 중국의 군현(郡縣)에
들지 않은 지 오래되어서 제국(諸國)의 자격으로 조회하면서 해마다 조공을 빠뜨리지 않았다. 수 양제는
위엄이 진동하자 자만심에 빠져 남들이 자신만 못하다고 여겼다. 이에 문덕(文德)으로 감싸 주지 못하고
갑자기 군사를 동원하여 안으로는 부강한 것을 믿고 밖으로는 영토를 넓혔다. 교만함으로써 원망을 취하고
분노로 인해 군사를 일으켰으니, 이렇게 하고서도 망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로부터 들어 보지 못하였다.
그러니 사이(四夷)에 대한 경계를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북사》
고구려는 본디 미천하여서 논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수나라와 당나라가 흥하고 망한 것은 모두
이 고구려와 관계가 된다. 수 문제가 새로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그 당시에 돌궐(突厥)은 이미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하였다. 양제가 순시하다가 친히 돌궐의 장막(帳幕)에 이르러서 우연히 고구려의 사신이
계민(啓民)의 처소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배구(裴矩)의 한마디 말로 인하여 드디어 이 화를 일으켰다.
배구는 천하의 대세가 이미 합해진 것을 보고는 역시 고구려에서도 조공을 바치게 하여 천하를 얻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천하 대란의 단서가 여기에서 발단될 것은 알지 못하였다.
《도서편(圖書編)》
[주-D001] 기수(寄首) :
거란의 선조인 기수가한(寄首可汗)을 가리킨다. 기수가한은 여덟 아들을 낳았는데, 그 뒤에 점차 번성하여
팔부(八部)로 나뉘어져 송막(松漠)의 사이에 거주하였다.《遼史 卷32 志第2 營衞志中》
[주-D002] 팔부(八部) :
거란의 여덟 부족을 말한다. 부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데, 초기의 여덟 부족은
실만단부(悉萬丹部)ㆍ하대하부(何大何部)ㆍ복불욱부(伏弗郁部)ㆍ우릉부(羽陵部)ㆍ일련부(日連部)ㆍ
필혈부(匹絜部)ㆍ여부(黎部)ㆍ토륙우부(吐六于部)이다.《遼史 卷32 志第2 營衞志中》
[주-D003] 남녀 …… 잡아갔다 :
원문은 ‘晏十餘萬口’이다. 《요사》 권32에 의거해 ‘虜男女十餘萬口’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 말갈(靺鞨) :
주대(周代)에는 숙신(肅愼), 한대(漢代)와 위대(魏代)에는 읍루(揖婁), 남북조 시대에는 물길(勿吉)이라고
불렸으며, 수나라와 당나라 때에 이르러 말갈이라 불리어졌다. 숙신계(肅愼系)의 종족으로 고구려의 북쪽
목단강(牧丹江) 유역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고구려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었다. 말갈 민족은 모두 7종으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속말부(粟末部)와 흑수부(黑水部)가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60~161쪽》
[주-D005] 임유관(臨渝關) :
지금의 산해관(山海關) 서북쪽, 영평(永平) 동남쪽이다.
[주-D006] 동래(東萊) :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내주(萊州)이다.
[주-D007] 고창국(高昌國) :
옛 나라의 이름이다.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지역에 있었던 토번(吐蕃)으로, 당나라 이정(李靖)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주-D008] 가한(可汗) 계민(啓民) :
돌궐(突厥)의 추장 사발략(沙鉢畧)의 아들로 이름은 염간(染干)이다. 동돌궐(東突厥)의 추장으로 있으면서
수 양제에게 청혼하자, 수 양제가 종실의 딸을 시집보내었으며, 도람가한(都藍可汗)의 침입을 받아 밤중에
도망쳐 중국으로 들어와 조회하자, 수 양제가 삭주(朔州)에 주둔하게 하였다가 다시 하남(河南)으로 옮겨
있게 하였다. 도람가한이 죽은 뒤 달두가한(達頭可汗)과 싸워 이겨 돌궐족을 모두 병합하였다. 가한(可汗)은
돌궐ㆍ흉노(凶奴)ㆍ회흘(回紇) 등 종족들의 군주의 칭호로, 왕(王)이라는 뜻이며,
가한(可寒)ㆍ합한(合罕)ㆍ합안(合安) 등으로도 표기한다.
[주-D009] 고죽국(孤竹國) :
현재의 황해도 해주(海州)라는 설이 《삼국유사》 등에 나와 있으나, 이는 고죽국의 왕자라고 하는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은 곳과 동명(同名)인 수양산(首陽山)이 해주에 있기
때문에 부회(附會)된 것이라 함은 일찍이 《성호사설(星湖僿說)》의 백이조(伯夷條)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고죽수양산조(孤竹首陽山條) 등에서 지적된 바가 있다.
천관우(千寬宇)는 이 고죽국을 중국의 요서(遼西) 지방, 곧 난하(灤河)와 대릉하(大凌河) 사이, 특히 그
수부(首府)를 난하 하류의 지금 하북성(河北省) 노룡현(盧龍縣) 지역으로 보고 있다.
《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9쪽》
[주-D010] 배찬수(排鑹手) :
창을 쓰는 군사를 말한다.
[주-D011] 좌(左) 12군(軍)은 …… 총집결하였다 :
이에 대해 이병도는, “누방(鏤方) 이하 각 12도의 지명 가운데는 간혹 당시의 것도 들어 있으나, 대부분은
옛날 한(漢)ㆍ위(魏) 시대의 동방 군현이나 민족(民族)의 칭호를 빌어 잡다하게 나열한 데 불과한
것이거니와, 이들 지명이 반드시 당시 행군(行軍)의 실지적인 목표로 정해진 것은 아니요, 또 각군(各軍)
진행 방향에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각 부대를 표시하기 위해서 나열한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09쪽 주》
[주-D012] 상건수(桑乾水) :
지금의 북경(北京) 남쪽에 있는 영정하(永定河)이다.
[주-D013] 의사(宜社) :
군사가 출정(出征)하기 전에 사(社)에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4] 마조(馬祖) :
천사성(天駟星)의 별칭이다. 천사성은 말에 관한 정사를 관장하는 별로, 출정(出征)하기 전에 이곳에다 제사
지낸다.
[주-D015] 맹금차(孟金叉) :
원문에는 맹차(孟叉)로 되어 있으나, 《수서》 권4 제기(帝紀) 제4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삼국사기》에는 맹차(孟叉)로 되어 있다.
[주-D016] 육합성(六合城) :
육합판성(六合板城)이라고도 하며, 사방 6자 되는 판목(版木)을 여섯 개 이어서 만든
행궁판성(行宮板城)이다.
[주-D017] 노하진(瀘河鎭) :
요서(遼西) 지방에 있던 진으로, 지금의 대릉하(大凌河) 주위의 의주(義州)에 있었다.
[주-D018] 무려성(武厲城) :
이곳의 위치에 대해 이병도는 “상세치 않으나 지금의 봉천성(奉天省) 신민부(新民府)가 봉천과 요양(遼陽)에
통하는 요하(遼河) 서편의 중요한 지점인 것으로 보아 이 부근으로 비정하고 싶다.” 하였다.
《國譯三國史記 315쪽 주》
[주-D019] 평양(平壤) :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여기에 나오는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봉황성(鳳凰城)이라고 하였다. 즉 이때
고구려에서는 수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원수도인 지금의 평양에서 부수도인 평양, 즉 봉황성으로 수도를
옮긴 다음 그곳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전쟁을 지휘하였다고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33쪽ㆍ239쪽》
[주-D020] 압록강(鴨淥江) :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이곳의 압록수는 오늘날의 압록강이 아니라 태자하 하류였다. 태자하 남쪽 기슭에
있는 요동성은 고구려 때의 이름이 오렬홀이었으며, 태자하는 《금사》 지리지와 《만주원류고》에 오륵호
또는 올로홀로 불렸던 강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구려 때에도 오열수로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열수는 압록수와 음이 비슷하다. 그러므로 원래 수나라 측 전쟁 기록에는 오열수를 건너 봉황성으로
갔다고 쓰여 있던 것을 당나라 때 《수서》를 편찬하는 자들이 당시 자신들의 지리 지식에 따라 오열수를
압록수로 고쳐 놓은 것이다.”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38쪽》
[주-D021] 오골성(烏骨城) :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오골성의 위치에 대해 종전에는 봉황성이나 그 부근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었다.
그러나 봉황성은 그 당시에 고구려의 부수도(副首都)였다는 것이 명백한 만큼 그러한 견해들은 맞지 않는
것이다. 오골성은 지금의 요령성 수암현에 있는 수암성이다.”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43쪽》
[주-D022] 살수(薩水) :
오늘날의 청천강(淸川江)이다.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살수는 청천강이 아니라 소자하라고 하면서 “살수는
평양성과 오골성 사이에 있었다. 오골성의 위치는 수암이며, 평양성은 봉황성으로, 그 사이에 있는 강은
소자하이다. 그리고 수나라 군사들이 살수에서 패배해 도망칠 때 하루에 4백 50리를 도망쳐 압록수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소자하 하류에서 태자하 하류까지의 거리가 4백 50리이다. 또 소자하라는 강 이름의
소자(小子)는 살수(薩水)의 살(薩)이 음이 변한 것이며, 지금의 소자하 하류에는 사리채와 같이 ‘살’과
관련되는 지명도 있다.”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44쪽》
[주-D023] 백석산(白石山) :
어느 곳인지 미상이다.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백석산이란 지명은 후세의 역사서나 지리서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금도서집성》 등을 보면 해성(海城)과 수암(秀巖) 사이에는 백산ㆍ활석령ㆍ백사산 등
백석산과 관련되는 산들이 있다. 그 가운데 백석산과 가깝다고 생각되는 산으로는 해성과 수암의 중간
지점에 있는 백사산이다. 청천강과 의주 사이에는 백석산이 없다. 이것은 침략군이 오늘날의 압록강
이남으로 온 일이 없다는 또 하나의 명백한 증거가 된다.”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48쪽》
[주-D024] 비루(飛樓) :
적의 성안을 바라볼 때 쓰이는 높다란 수레를 말한다.
[주-D025] 당거(撞車) :
수레 위에 쇠를 덮어씌운 다음 당목(撞木)을 세우고 횡목(橫木)을 묶어 앞 끝을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 수레로, 성이나 성문을 격파하는 데 쓰이는 도구이다.
[주-D026] 운제(雲梯) :
높은 사닥다리로, 성을 공격하는 도구이다.
[주-D027] 지도(地道) :
성을 침입하기 위해 땅굴을 파는 것을 말한다.
[주-D028] 팔륜누거(八輪樓車) :
밑에 바퀴를 여덟 개 달아 만든 누거(樓車)를 말한다.
[주-D029] 양현감(楊玄感)이 …… 소식 :
양현감은 수 양제의 총애하는 신하로 낙양(洛陽)에 있으면서 군수 물자를 운송하는 일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수나라의 군사가 고구려에게 계속해서 패하는 것을 보고는,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명분을 들고
나와 반란을 일으켰다. 그 뒤 대업(大業) 9년(613) 9월에 패하여 죽었다.
[주-D030] 비사성(卑奢城) :
지금의 대련만(大連灣) 북쪽 해안에 있는 대화상산(大和尙山)이다.
[주-D031] 이밀(李密) :
수나라 말기의 군웅(群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수 양제가 고구려 침략을 위해 출병하였을 때
양현감(楊玄感)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그 후 다시 적양(翟陽) 등과 함께 하남(河南)에서 난을 일으켰다가
장안(長安)의 이연(李淵)에게 투항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6
[출처] 100. 해동역사(海東繹史) 제7권 / 세기(世紀) 7|작성자 집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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