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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한국에서 알아주는 구약학 교수가 내 다니던 교회에서 목사로서 설교한 내용에 대하여 비판했던 것이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교수라고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신학 자체가 수천년에 일어난 각종 믿음의 사건에서 생긴 일들을 집대성한 것이라서 전부를 꾀뚤어 말한다는 거는 거의 불가능이다.
얼마전에 뉴저지의 community college에서 역시 구약학 교수를 하시는 분이 가끔 설교도 했고 또한 성경공부를 지도하길래 몇번 참가하다가 도중하차 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욥記를 중세시대에 stained glass에 그려진 그림을 놓고 그것을 분석해서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학자로서는 그러할 명목이 서겠지만, Jobs가 세상축복에서 실추하여 온갓 불행을 격는 과정에서도 여호와께 향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같은 일반신도에게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설명해주는 것이 마땅한 접근이라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이 시대를 사는 필부필부가 무었 때문에 신앙에 매달려야 하는 궁극적 의미를 학자로서 분명히 말해주었어야 했다.
현대의 우리들에게 해답을 주지 못하고 오직 성경의 字句(자구)에만 매달려 현재에 당면한 삶의 문제와 고통을 해결해주지 못하는 이들, 학자연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 목사들을 양성하는 데에서 무슨 영향력을 발휘하겠으며, 나아가서 길잃고 헤매는 양떼들을 어떻게 푸른 초장으로 인도할 것인가? 나는 이런 분들을 경멸한다. 다음의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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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무개 교수님;
어제는 목사님으로서 창세기 12장 10-20절에 걸쳐서 설교해 주신 '아부라함'의 믿음에 관한 내용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서 질문하고 제 의견을 첨가하고자 합니다.
"기근을 피하여 애급으로 이동하는 중에 '자기 부인을 누이라고 불러서 '파라오'와 동침하게 한 자신이 얼마나 파렴치했는가를 뉘우치고 심히 통곡하지 않았겠나?' 우리들은 본의 아니게 이런 잘못을 저지르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부족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축복하신다." 는 내용으로 설교하셨읍니다. 당일에 여러 신도들이 좋은 말씀이었다고 감격해 하며 목사님께 감사하는 장면을 옆에서 목격할 수 있었읍니다.
나는 이런 일화를 인용할 때에는 당시의 정신문화나 사회적 관념을 당대의 사정으로 국한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성경에 써있는 그대로를 현대인의 감각으로 해석하자면 하나님의 참된 축복을 바로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냐?
창세기 19장 30절에서 38절에는 사담과 고모라를 멸하던 차에 동굴로 피했던 '롯'이 두 딸과 관계하여 '모압'족속과 '암몬'족속의 조상이 되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고대 '메소포타니아'에의 앗시리아와 바빌론 문화에서는, 그 나라에 사는 아녀자는 누구나 자기들 평생에 꼭 한번 그들이 믿는 종교의 신전(Aprocidiacs) 앞에 가서 자기의 몸을 행인에게 팔아야 했읍니다. 그 수입을 神앞에 바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관습이 있었읍니다. 고대역사가로 '헤로도터스'(484 BC–425 BC)가 기원 전에 이곳을 여행하면서 이런 광경을 호기심 있게 관찰한 기록을 아래에 인용합니다. (참고 1)
구약성경에 '데비드'의 족보에서 '오난'(Onan)의 과부 '타마'(Tamar)가 일생에 한번 성스러운 그런 의무를 시행하려고 거기에 나타나서 몸을 팔고자 앉아 있는 것이 시아버지(Judah)의 눈에 띠었읍니다. 돈 몇푼을 며누리의 치마폭에 던져주고 관계했었다는 얘기가 창세기 38장 14절에서 18절에 적혀있읍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3장 33절에서 언급하는 '베레스'(Pherez)는 거기서 태어난 쌍둥이 중에 동생으로서 '데비드의 조상임을 창세기 39장 29절에서 밝히고 있고, 그의 후손으로 예수가 태어난 얘기가 마태복음에 쓰여있읍니다. 또한 마리아 자신이 처녀잉태를 했을뿐 아니라, 그의 할머니 조차 몸을 팔던 여자였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성경에 써져 있읍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들인가? 현대적 감각으로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가치관을 聖(성)스럽게 펴놓고 있는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소화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읍니다.
이 문제를 설명하려면, 중근동의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입니다. 이들의 불미한 행사를 오늘의 가치관으로 유추해석하자 하면 많은 물의가 있을 수 있읍니다. 우리가 이 점을 감안해야 함에도, '알레고리'적으로 성경을 부연해서 해석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러다 보면 진정한 의미를 현대인들에게 바르게 전달하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다음의 얘기를 찾아봅시다.
창세기 20장 1절에서 18절까지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아비멜렉'에게 말하여 그로 하여금 또다시 '사라'를 취하게 했다가, 하나님이 그에게 현몽하여 범죄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습니까?
하목사님이 '아부라함'이 '파라오'와에 있었던 일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셨는데, 내가 의아해 하는 바는 "어째서 이번에 또다시, 계속해서 '아부라함'이 같은 죄를 저질러서 재물을 축적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겁니다.
이방인의 땅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미모의 부인을 팔고 있는 것이 요즘의 도덕적 감각에서 용납될 수가 있는가요? 다시 말해서 기원전 2000여년 경의 도덕관을 현재의 양심의 잣재로 사용할 수가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현재의 범죄와 하나님의 용서는 현대적 Contex 에서 해석하고 우리의 구원문제에 접근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거지요. 이런 의미에서 창세기 12장 10-20절의 인용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고대역사의 기술가로 유명한 희랍의 '헤로디터스'(Heroditus)란 분이 "종교의 이름으로 성행위"가 '바빌론'땅에서 성행했었다는 해괴한 얘기를 기록하고 있읍니다.
"The foulest Babylonian custom is that which compels every woman of the land to sit in the temple of Aphrodite and have intercourse with some stranger once in her life. Many women who are rich and proud and disdain to mingle with the rest, drive to the temple in covered carriages drawn by teams, and stand there with a great retinue of attendants.
'바비론'의 가장 추잡한 관습으로 그 땅의 모든 여자들은 "아프로다이트'란 성전에 앉아서 일생의 한번 모르는 남자와 성교를 하게 하는 것이다. 돈 많고 지체높은 여자들은 남어지 여자들과 섞이는 것이 싫어서 일꾼들이 끄는 휘장이 덮힌 가마에 타고 성전에 이르는데, 그 시중드는 무리들의 호위가 대단하다.
But most sit down in the sacred plot of Aphrodite, with crowns of cord on their heads; there is a great multitude of women coming and going; passages marked by line run every way through the crowd, by which the men pass and make their choice.
대부분이 머리에 너슬과 구술이 달린 모자를 쓰고 앉았는데, 그 오고 가는 여인네들의 수가 대단히 많다. 그 군중들 사이로 남자들이 지나 다니면서 마땅한 여자들을 고르도록 여기저기 새끼줄을 쳐놓고 다니는 길을 표시했다.
Once a woman has taken her place there, she does not go away to her home before some stranger has cast money into her lap, and had intercourse with her outside the temple; but while he casts the money, he must say, “I invite you in the name of Mylitta” (that is the Assyrian name for Aphrodite).
한 부인이 자리를 정하면, 어떤 남자가 그녀의 무릎 위에 돈을 던지고 그 신전의 바깥에서 성관계를 끝내기 까지는 집에 가지 않는다. 남자는 돈을 던지면서 반드시 "나는 '마이맅타' 즉 '앗시리아'말로 '아프로다잍트'의 이름으로 당신을 초대한다."는 말을 해야 한다.
It does not matter what sum the money is; the woman will never refuse, for that would be a sin, the money being by this act made sacred. So she follows the first man who casts it and rejects no one. After their intercourse, having discharged her sacred duty to the goddess, she goes away to her home; and thereafter there is no bribe however great that will get her.
얼마의 돈이 상관되지 않는다. 그 돈은 신성한 것으로 그 多寡(다과)로 문제삼는 것은 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여자는 절대로 거절해서는 않된다. 그럼으로 해서 그녀는 돈을 던진 첫 남자를 따라나선다. 그래서 아무도 밀어내지 않는다. 그 성관계 후에 그녀는 여신에게 신성한 의무를 때웠음으로 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그 후에는 어떤 많은 댓가로도 그녀와 절대로 상관할 수가 없다.
So then the women that are fair and tall are soon free to depart, but the uncomely have long to wait because they cannot fulfill the law; for some of them remain for three years, or four. There is a custom like this in some parts of Cyprus."
따라서 키가 크고 잘 생긴 여자들은 빨리 그 일을 치루게 되고, 못 생긴 여자는 오래도록 기다려야 한다. 어떤 여자는 3년이나 혹은 4년을 보내면서도 법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된다. 이런 관습은 현재 '싸이프러스'의 어느 곳에도 존재한다. > Wikipedia에서 Temple Prostitutes란 부분을 참고-
'아부라함'이 Summeria (이락의 남부) 문명시대에 Ur (우르)라는 곳에서 '가나안'으로 이동했었다고 기록하고 있읍니다. 따라서 당시에는 바비론의 前身(전신)인 고대문명이 성황하던 시절이라서 이들의 이런 전통적 性(성)관계를 아주 당연시 하던 시절이었다고 볼 수 있읍니다.
내가 "The Story of Civilization"란 일련의 책들을 읽은 중에, 'Oriental Heritage'란 단행본(약 1049 페지)에서 '수메리아', 바비론, 에집트, 앗시리아 그리고 '쥬데아'에서 같은 性的 관행'이 시행되고 있다는 서술들을 읽었던 기억을 오늘 다시 찾아보고 위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고 있읍니다. 1980년대 까지도 '싸이푸러스'에서는 처녀들이 시집갈 돈을 마련코자 몸을 팔았었다고 합디다. 그 후에 법으로 금했으나, 수천년의 전통이 그리 쉽게 없어지겠읍니까?
나는 세상의 진리란 것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늘 주장하고 있읍니다. 당시에 옳았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틀리는 이런 모순을 우리는 분명히 하고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중세시절에 지나친 '알레고리性'의 해석으로 성경말씀이 얼마나 목회자와 교회라는 조직을 위하여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기피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거지요.
따라서 문자 그대로 읽고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는 이러한 문제가 있음으로 해서, 교역자들은 좀더 과거의 사건과 현실의 의미를 구별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바로 투시하고 현재의 신앙문제를 현실적으로 봐야 할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2장의 예화는 적절치가 않았다고 하겠읍니다.
1888년에 Adolf Juelicher란 신학자가 ‘Die Gleichnisdreden Jesu’란 제목의 책을 세상에 내어놓은 후로, 기원후 3세기 이래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200 여개의"비유 說話"(설화: Parables)를 Allegory性 (상상에 맡긴 임의해석)으로 확대부연하는 전통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이런 혁신적인 접근으로 해서 오늘날에는 Sitz im Leben (독일말로 '삶의 현장')의 원칙에 입각하여 현 실정에 맞게 재 해석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답디다.
시대는 변하고 사람의 생각도 변합니다. 오직 한 진리만이 옳다고 우긴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 서서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하고, 그리고 현실적인 감각으로 복음을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복주의 신앙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던져주는 비극이 바로 巫俗化(무속화)한 전래의 정신문화에서 비롯됐다는 점도 함께 고찰되어야 한다고 저는 봅니다.
참고:
1. 아무개 교수란 분은 한국에서 꽤 이름이 나 있는 구약학 교수이다. 장로회 신학교인지, 한국신학교인지 하는 그런 신학대학에 재직하셨던 분이었다. 그 분은 목사의 자격도 갖추고 있어서, 윗 내용을 놓고 이곳에서 설교했었던 적이 있었다. (2009년 11월 2일)
2. '알레고리'란 말은 설교자나 신학자가 현실을 도외시한 가상적인 비유로 성경구절을 멋대로 해석하는 행위를 말한다. 한국의 新敎(신교)에서 목사들의 榮光(영광)과 교회부흥을 목표로 자행되는 엉털이 설교들에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할 때가 왔다.
3. '사라'는 '아부라함'의 이복 여동생도 되었다.
4. 직업적으로 몸을 파는 여성(賣春婦)과 聖役(성역:거룩한 의무)을 한번 때우는 여성을 구별하여 '히부리'단어로 다르게 정의하고 있다.
5. "The Story of Civilization"이란 11권의 全券(전권)이 내게 있다. 그 저자인 William James Durant (November 5, 1885 – November 7, 1981)과 그의 부인인 Ariel은 a prolific American writer, historian, and philosopher이었다. 이 책들로 이 부부가 세상에 잘 알려져 있다. He is best known for The Story of Civilization, 11 volumes written in collaboration with his wife Ariel and published between 1935 and 1975. He was earlier noted for The Story of Philosophy, written in 1926, which one observer described as "a groundbreaking work that helped to popularize philosophy."
철학을 대중화한 노고를 치하받았고, 후에 '퓨라쳐'賞(1968)과 “대통령의 자유메달”(1977)을 받았다. Will and Ariel Durant were awarded the Pulitzer Prize for General Non-Fiction in 1968 and the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 in 1977. -Wikipedia에서 인용함-
6. Adolf Julicher (1857–1938) was a German scholar and biblical exegete. Specifically, he was the Professor of Church History and New Testament Exegesis, at the University of Marburg.
7. Julicher also helped to change the understanding of the parables of Jesus among scholars, emphasizing that there was usually a single point of comparison between the story and what it represented.[7] He made a distinction between parable and allegory, claiming that a true allegory was a literary type of which Jesus was not aware and did not use.
8. An Introduction to the Parables of Jesus (by Robert H. Stein)과 "Rediscovering the Parables" (by Joachim Jeremias)란 책들을 참고하시라.
9. After God killed Er, Judah tells Onan to "go in unto thy brother's wife." But "Onan knew that the seed should not be his; and ... when he went in unto his brother's wife ... he spilled it on the ground.... And the thing which he did displeased the Lord; wherefore he slew him also." This lovely Bible story is seldom read in Sunday School, but it is the basis of many Christian doctrines, including the condemnation of both masturbation and birth control. 38:8-10
Tamar (the widow of Er and Onan, who were killed by God) dresses up as a prostitute and Judah (her father-in-law) propositions her, saying: "Let me come in unto thee .... And he ... came in unto her, and she conceived by him." From this incestuous union, twins (38:27-28) were born (both were boys of course). One of these was Pharez -- an ancestor of Jesus (Lk.3:33). 38:13-18 -구약의 창세기와 Wikipedia에서 인용-
禪涅槃
2017-03-24 08: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