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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나와 다른 한 존재를 견딘다는 것,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때로 본의 아니게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을 건널 때가 있습니다. 주고받은 상처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세월이 많이 흘러도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아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때 왜 그런 처신을 했을까? 왜 그때 입을 딱 틀어막지 않았을까? 후회하며 자다가도 생각이 떠올라 이불킥을 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아, 되돌릴 수 없으니 더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런 갈등과 상처는 멀리 시드니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사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벌어지지 않습니다. 지극히 가까운 사람들, 예를 들면 배우자나 연인, 형제자매, 절친한 친구, 매일 얼굴 마주하는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예의를 지키고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하루 온종일 가까이 지내는 이웃이라 할지라도, 나와 그 사이에 일정의 완충지대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생활 속 거리 두기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가까이 지내다 보니 서로 다름으로 인한 고통이 당연히 발생합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처럼, 나와 다른 한 존재를 견딘다는 것,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존재로 인한 고통과 십자가는 때로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런 우리의 현실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오늘 우리에게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가르침을 건네고 계십니다. 상호 관계가 극으로 치닫기 전에 예방책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상호 관계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는 데는 일련의 과정이 있습니다. 각각 살아온 환경이나 지니게 된 가치관, 정치적 견해 차이 등등 모든 것이 다른 현실에서 너무나 당연히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따라서 함께 일을 해나가거나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입장 차이가 발생합니다. 그럴때는 적정한 어느 순간 딱 멈추면 좋을 텐데, 그게 또 의지대로 되지 않습니다.
서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언성이 높아집니다. 화를 내고 성을 냅니다. 최악의 상황은 바로 욕설이요 폭력입니다. 상대방을 향해 바보, 멍청이라고 외칩니다. 그럴 때 상대방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멱살을 잡던지 주먹을 날릴 것입니다.
그 순간 둘 사이의 관계는 생명력을 잃습니다. 관계는 끝난 것입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살아생전 불붙는 지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이십 년 삼십 년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으셨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자상하고 인자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분은 당연히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도 절대로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온유와 사랑의 박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비결은 그치지 않는 일상적인 기도였습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미사가 무의미해지는 결정적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의로움’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움은 심판의 기준입니다. 의로움은 자신이 받은 것만큼 내어줄 줄 아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용서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의롭지 못함은 내가 그렇게 받았는데도 이웃을 심판하는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나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 하십니다.
만약 우리 자녀가 서로 형제끼리 싸우고 미워하면서 부모에게 와서 사랑한다고 하면 기쁠까요? 모두가 나의 자녀들이고 나의 자녀를 무시하면 나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미워하며 부모를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성당에 아무리 오래 다녀도 사랑이 증가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구역 판공을 하다 보니 그런 것들로 상처받아서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새삼 놀라게 됩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어서 상대가 성당에 나오지 않게 되었는데 자신만 하느님을 만나러 오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까요? 먼저 예물을 바치기 전에 상처를 준 사람에게 가서 사과해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예배하려 할 때는 그 누군가와 관련된 모든 것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과 집착은 완전히 다릅니다. 미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무엇일까요? 성체성사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봉헌입니다. 봉헌이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이어주는 중앙에 위치합니다. 말씀도 성체도 중요한 부분이지만, 봉헌이 온전하지 않으면 두 부분이 다 의미를 잃습니다. 선악과를 바치지 않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과 생명나무를 무의미하게 만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봉헌해도 내가 봉헌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예전에는 짐승을 바쳤습니다. 짐승을 바칠 때는 흠 없는 것을 바쳐야 했습니다.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을 바쳐야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시는 말씀과 성체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래야 마음이 이어져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봉헌하면 어떨까요? 그들은 집착하는 걸 바쳤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봉헌한 것에 보답을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아야 했습니다. 바로 사람들의 인정입니다. 참다운 봉헌은 집착하는 것이 아닌 사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 여겨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아이가 형제를 소유하게 되지 않고 부모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 보면 동생이 태어난 질투 때문에 동생의 머리카락을 뽑거나 꼬집으며 괴롭히는 경우를 봅니다. 누나는 아기 남동생이 밉습니다. 만약 아기 남동생의 뽑힌 머리카락을 부모에게 내밀며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게 사랑일까요?
먼저 자신이 바친 것이 부모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첫째가 부모처럼 아기에게 젖을 주고 목욕시키는데 도와주라 권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자기가 부모가 된 듯이 동생을 돌봐줍니다. 이때 누나는 동생을 부모의 심정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러면 동생에게 봉사하며 부모를 예배하게 됩니다. 이때 하는 행위는 부모를 기쁘게 합니다.
사랑은 창조자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때 생기고 그 사랑하는 것을 바칠 때 참다운 예배가 되고 성체를 영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생명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야만 온전한 봉헌이 되고 온전한 봉헌이 될 때야만 미사가 참다운 예배가 됩니다. 성당엔 나오지만, 생명을 경시하고 이웃을 미워하는 사람 중에 여러분이 하느님이라면 누구를 구원해주시겠습니까? 답은 뻔합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며 형제를 미워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참다운 예배는 부모의 피땀이 묻어있는 것에 대한 태도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 제물을 봉헌하기 전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하느님의 것으로 먼저 사랑합시다. 가장 완전한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시다.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5,20-26: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라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을 가지라고 하신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살인에 대해 말씀하시며,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22절),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22절) 하신다. 예수께서는 행실에서 율법이 단죄하지 않는 것도 징계하신다. 업신여기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23절).
이 말씀은 예물을 바치고 나서나 예물을 바치기 전이 아니다. 그것은 예물이 제단에 놓인 순간에, 제사가 시작된 바로 그때,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23-24절) 하신다. 예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동안 우리는 형제에게로 달려가야 한다. 이것은 주님께서는 사랑을 가장 훌륭한 예물로 여기신다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예물이 없으면 제물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둘째로는 주님께서는 화해를 참으로 필요한 것으로 만드시어 어떤 핑계도 댈 수 없게 하신다. 화해하기 전에는 그의 제물은 봉헌되지 못한 채 제단에 그대로 놓여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화해하여야 한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우리의 양심이기도 하며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미 죽음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우리의 고발자가 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제단에 나올 때도, 우리가 이웃과 가지는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올바를 수 없다는 말씀이다. 이웃과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죗값을 모두 치르기까지 풀려나지 못한다. 우리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를 통하여 주님과 화해하고 주님 앞에 참된 예물을 드리도록 하여야 한다.
4)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사순시기는
특별히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일깨워주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해이며
존중입니다.
하느님의
참 뜻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화해이며
존중입니다.
정말 중요한
하느님의 뜻은
서로 만나는
화해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그 뜻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화해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자신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자신의
허물을
반성하는
거기에서
화해는
시작됩니다.
성찰의 눈빛은
서로를 위하는
기도가 되고
서로를 살리는
지혜가 됩니다.
참된 지혜는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말씀에
우리가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해를
실천하는
바로 그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곧 나 자신과
화해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화해 없이는
평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서로를 향한
인정이
필요한 것이지
서로를 못 박는
단정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화해의 길은
우리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존중과 기도로
우리 관계의
일방적 모순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앙금을
털어버리고
화해이신
예수님과 함께
화해로 나아가는
존중의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참된 화해는
참된
성찰이며
참된
존중이며
평화입니다.
옳고 그름을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완전한
우리들의
노력이며
실천입니다.
그 노력과 실천이
저마다의
십자가이며
저마다의
성찰입니다.
5)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은 이야기는 ‘결과보다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결과를 가지고 과정을 말합니다. “A 학점을 맞지 못한 것을 보니, 공부 안 했구나.”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해도 A 학점을 맞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산수’를 강조하셨습니다. 지금 ‘산수’를 잘해야 중학교 올라가서 수학을 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시간 시험을 봤고, 그 결과를 보시고는 몽둥이로 때리셨습니다. 특히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번에 다 맞았는데, 이번에 1개 틀렸으면 성적이 떨어졌다고 맞아야 했습니다. 항상 긴장의 연속이었고, 이때 많은 친구가 수학 자체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성적이 잘 나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를 가지고 실패의 삶이라고 단정 지어서도 안 됩니다. 완벽주의는 직관적이고 익숙한 문제 해결에는 탁월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익숙한 문제만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직관적 형태의 문제만 찾아오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결과 중심의 삶은 오히려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아직도 결과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과정 중심의 삶이 이 세상을 사는데 훨씬 더 현명하고 지혜롭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결과보다 과정의 삶이 중요함을 명령하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결과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를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사랑은 마음 깊은 데서부터 실천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계명을 새롭게 해석해 주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에는 험담이나 멸시도 금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래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화해 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리고 형제와 화해하지 못한 사람이 바친 예물을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결과만을 위한 삶보다 과정을 더욱더 깊이 있게 실천해야 한다면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고 화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로 사랑할 수 없고 화해할 수 없다고 하는 순간, 하늘 나라는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스티브 잡스).
6)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용서와 화해!'
오늘 복음(마태5,20ㄴ-26)은 '화해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생명처럼 여기면서 지켜온 '율법을 능가하라.'는 말씀입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라는 '율법을 능가하라.'고 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도' 재판에 넘겨질 것이고, '바보!'라고 하거나,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안에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사람들이 많아 보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5,23)
오늘 독서(에제18,21-28)도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냐?"(18,23)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18,27-28)
지금은 '회개의 때'입니다.
회개의 구체적인 모습인 '서로 용서하고 화해해야 할 시간'입니다. '용서와 화해'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따라 날마다 죽지 않고 사는 길을 선택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7)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에제18,23)
죄에 대한
하느님의 생각은
심판과 저주가 아니라네.
그분께서는
언제나 공평하시고
불의에
진노하시는 분이지만
악인의 죽음도
바라지 않으시고
분노를 품은 이들의
고통도
바라지 않으신다네.
복음 말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마태5,20ㄴ-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