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설거지를 했다가 울딸한테 혼났습니다.
젓가락 두 짝이 제대로 안 닦였습니다.
장모님께서 직접 뜯어서 해 주신 쑥 절편을 젓가락으로 찍어 먹은 건데, 젓가락에 묻은 게 굳다 보니 잘 안 떨어졌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대충대충할 거면 아빠는 설거지 하지 말라고요.
집에서 제 밥벌이인데다 이 정도 구박에 그만둘 제가 아니지요.
조금 더 신경쓰고 있습니다.
거기다 손 건강을 위해 고무장갑을 꼈더니 감각이 무뎌진 것 같은데, 세제를 적게 쓰거나 안 쓰는 것들은 맨손으로 해야겠어요.
설거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방 청소를 주말에는 편히 쉬자는 생각으로 금요일로 옮겼는데, 지난 주에는 토요일에 울각시가 검사를 했습니다.
원래 청소하는 사람이 아무리 한다고 해도 지적하겠다고 달려들면 방법이 없는 거잖아요.
''여기는 했어요? 아니요. 저기는요? 아니요.''
결국 청소는 청소 대로 하고 혼은 혼 대로 나고... 혹...
그래도 울딸이랑 울각시랑 이쁜 걸 어떡하겠어요.
더 잘해서 칭찬 받아야지요. ~^.^~
'보릿대...'의 아침단상 375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 보라♥
1941년 어느 날, 신경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에게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옵니다.
"빅터 프랭클씨 이민 비자가 발급되었습니다. 찾으러 오세요."
때는 많은 유대인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던 시기였기에 유대인이었던 그에게는 생명을 보장하는 전화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비자는 자신과 아내에게만 허락되었기 때문에 결국 노부모를 남기고 떠나야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숙고 끝에 그는 미국행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얼마 후 그와 아내, 부모님은 수용소에 끌려가고 맙니다.
머리는 빡빡 깎이고 죄수복에, 목숨을 연명할 정도의 음식만 먹으며 매일 극심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점점 몸이 망가져 서 있는 것도 신기할 정도였지만 어딘가 살아 있을 아내와 부모님만 생각하면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났습니다.
오직 가족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는 결국 살아남아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와 다른 가족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묻는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잃지 않으며 어떤 고통과 시련도 견뎌 낼 수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 내용처럼, 희망을 찾아볼 수 없었던 그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던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의미는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