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923. 묵상글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 좋은 땅이란?. 등 )
----------------------------------------------------
23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좋은 땅이란?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과 관련한 비유를 묵상하면서 이런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인가?
이에 대해 저는 좋은 땅이 되어가고 있다는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주 옛날의 저는 그리 좋은 땅이 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사제가 되고 또 인터넷에 매일 강론을 올리기 시작한 뒤부터는
제 마음이 길바닥과 같아서 강론하기 위해 주님 말씀을 묵상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열매가 제 강론을 들은 분들에게는 맺어졌는지 모르지만
제 안에서는 그리 많은 열매를 맺지 못했던 것만 같습니다.
이는 마치 옛날 엄마가 이유식을 아기에게 먹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요즘은 이유식이 잘 나와서 그것을 아기에게 먹이지만
옛날에는 엄마가 거친 음식을 곱게 씹어서 아기에게 주고 자기는 먹지 못했잖아요.
그런데 몇십 년을 그래도 말씀과 함께 살아오다 보니
말씀이 점점 제 입에서 더 맛있어지고 여러분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차츰차츰 저를 위한 말씀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제가 인터넷에 강론을 올린 지 15년이 넘다 보니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말씀이나 새롭게 깨닫게 되는 말씀은 그리 많지 않지만
밥을 오래 씹으면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있게 되듯 말씀도 그리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저는 좋은 땅이라기보다는 좋은 땅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이참에 좋은 땅이란 어떤 것인지 오늘 루카 복음에 비추어 성찰하렵니다.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이 말씀을 그저 듣는 것으로 얘기하는 것에 비해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듣는 것을 좋은 땅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듣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여기서 착한 마음으로 듣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순종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지요.
어른의 말을 어린이가 잘 들을 때 착하다고 하듯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마음 없이 잘 듣는 것이 착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공자가 나이 60을 이순耳順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마음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바른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바른 마음의 반대가 혹 삐딱한 마음 아닐까요?
마음이 비뚤어져 있기에 그 뜻을 말씀하신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식으로 또는 자기 입맛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른 마음으로 듣는 것은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간직하는 땅이 좋은 땅입니다.
모래밭처럼 물이 빨리 빠져나가지 않고 물기를 오래 간직하는 땅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말씀을 한 번 들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하루 내내 묵상하는 것으로 이는 소나 초식동물들이
시간이 날 때마다 위에 있는 풀을 되새김질하는 것과 같습니다.
많이 되새김질할수록 풀에 있는 모든 영양분을 다 흡수하듯
오래 간직할수록 하느님 말씀의 모든 가르침을 다 깨닫겠지요.
다음으로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땅이 좋은 땅입니다.
말씀을 듣고 간직할 뿐 아니라 인내한다는 것입니다.
달콤하면 오래 간직하고 인내할 필요가 없을 텐데
인내해야 한다고 하니 그 말씀이 달콤하지 않다는,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괴롭다는 말이겠습니다.
즉시 떠오르는 것이 한여름이나 요즘 뙤약볕의 벼입니다.
벼가 뙤약볕의 고통을 마다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겠지요.
하느님 사랑의 말씀도 뙤약볕 같습니다.
하느님 사랑이 본래 뜨겁고 괴롭습니다.
그 사랑을 견뎌야 내 안에서 사랑이 열매 맺고,
그 사랑이 이웃에게서도 열매 맺습니다.
내일은 제가 강론을 올릴 수 없겠습니다.
그래서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
23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루카 8,5)
오늘 우리가 들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그 해설까지도 직접 해주셨습니다. 이 비유의 의미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씨”와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시며, 나아가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씨 뿌리는 사람은 그 길바닥이나 바위나 가시덤불이나 좋은 땅이거나 땅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어느 곳에나 씨앗을 뿌립니다. 이와 같이 말씀의 씨앗도 그 영혼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어느 누구에게나 뿌려집니다. 마치 “아버지께서는 악한 이에게나 선한 이에게나 똑같이 햇살을 비추시고 옳은 이에게나 옳지 못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듯이”(마태 5,45)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같은 씨앗’이 뿌려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이요, 그 씨앗은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요, 그리고 그것은 선사된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동시에 우리에게 씨앗을 틔워 결실을 맺어야 할 소명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는 말씀을 실현해야 할 소명, 곧 사랑을 실현해야 할 과업을 짊어진 존재들임을 말해줍니다.
<둘째>는 “땅” 혹은 “밭”에 대한 것입니다. 좋은 씨가 좋은 열매를 맺듯, 열매는 씨앗에 따라 수확량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어느 밭에나 동일한 ‘같은 씨’가 뿌려졌습니다. 그러니 수확량은 ‘씨앗’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땅의 차이에서 오게 됩니다.
이는 씨앗이 싹을 잘 틔우도록 ‘땅을 일구는 일’과 잎이 잘 자라고 꽃이 잘 피어나고 열매가 잘 맺도록 ‘나무 자체를 잘 돌보는 일’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귀 기울임과 응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죽어야 맺는 과정이요, 자신이 죽어서 타인을 먹여 살리는 열매가 되는 과정입니다.
<셋째>는 “결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실은 자신을 떠나 타인을 위할 때만 타인 속으로 들어가 썩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곧 자신을 내어주어야 그 열매를 맺는 이 과정은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더불어 바로 이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신 구원의 협조자요 도우미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서로의 구원에 공동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동반자요, 동행자들 입니다. 결국, 말씀의 씨앗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 가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공간이 됩니다. 말씀이 열매 맺어가는 자리요 거처가 됩니다. 따라서 내 형제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내 가정, 내 공동체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할 인인지요!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루카 8,5)
주님!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뿌리신 말씀의 씨앗을 일구게 하소서.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게 하소서.
형제들 가운데 당신 사랑 번져가고, 세상이 거룩해지게 하소서. 아멘.
----------------------------------------------------
23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땅을 갈아엎어라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땅은 다 좋은 땅입니다. 모래땅에서는 땅콩이 잘 자라고 진흙땅에선 미나리가 자라고 습한 땅에서는 버섯이 잘 자랍니다. 기름진 땅에는 콩이나 고추가 잘 자랍니다. 각기 주어진 땅에서 알맞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도 관리하지 않을 때 못 쓰는 땅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밭을 갈아엎고 거름을 주는 수고와 땀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내 마음의 밭은 선합니다. 좋은 밭입니다. 이 좋은 땅이 어느새 길바닥으로, 바위로, 가시덤불로, 방치되지는 않는지 살펴야 하고 그 땅을 결코, 몹쓸 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땅은 다 좋은 땅이 분명한데 관리를 하지 못해 폐허가 된다면 그 책임은 관리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씨의 운명은 그 씨가 떨어진 땅에 의해 좌우됩니다. 혹시라도 씨앗이 싹트지 못하고, 자라지 못할 땅이라면 지금 갈아엎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피조물 중의 으뜸이요,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습니다.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큰 은총을 주더라도 받는 사람이 잘 관리하지 않으면 곧 잃어버리게 됩니다. 많은 경우 자기가 잃어버리고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 갔다고 생각합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진주가 주어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루카 8,15)을 두고 하는 말이니만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함으로써 우리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길바닥이라는, 바위라는, 가시덤불이라는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워 말고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한 발 내딛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 하느님의 숨을 받은 우리는 모두가 좋은 밭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분께서 책임져 주시는데 왜, 주저하고 좋은 밭을 묵혀 두려고 하십니까?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3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사제가 된 후에 몇 가지를 배웠습니다. 스키, 스킨 스쿠버, 피아노입니다. 모두 정식으로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깨 너머로 배우고, 혼자서 배우고, 시간나면 배우고 그랬습니다. 그래서인지 시간은 오래 되었지만 모두가 발전이 없었습니다. 스키는 91년에 배웠으니 32년이 되었습니다. 스킨 스쿠버는 95년에 배웠으니 28년이 되었습니다. 피아노도 2009년에 배웠으니 14년이 되었습니다. 스키는 아직도 겨우 내려오는 수준입니다. 스킨 스쿠버는 기록이 중요한데 기록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피아노는 겨우 건반을 만지는 수준입니다. 제가 이렇게 시작은 했지만 결실을 제대로 맺지 못하는 것은 기초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의욕은 있지만 제대로 연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창 중에는 시작하면 끝을 보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스키를 배우면 강사 자격증을 딸 때까지 배웁니다. 기타를 배울 때도 노래만 들으면 반주할 수 있을 만큼 배웁니다. 스킨 스쿠버도 강사 자격증을 받았습니다. 저와 같이 시작했지만 동창 신부님이 다른 것은 기초부터 배우는 것이고, 아낌없이 비용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았지만 몇 번 주일미사에 참례하다가 그만 포기합니다. 세상에 좋은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의지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결혼하기 위해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수영을 하려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듯이, 세례를 받아 신앙생활을 하려면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련과 고난이 다가오면 포기합니다. 본당 신부님의 사목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포기하기도 합니다. 단체에서 친하게 지내던 이웃과 의견 충돌이 생긴 뒤로 포기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했는데 시련과 고난이 사라지지 않아서 포기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결실을 맺기도 합니다. 사람을 믿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믿습니다. 본당의 피정과 교육은 빠짐없이 참석합니다. 어떤 단체든지 가입하면 단체를 발전시킵니다. 교리신학원에 등록해서 교리교사 자격증도 얻습니다. 같은 날 세례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생활의 모습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결실을 맺는 방법을 이야기 합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는 사람,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마저 대주는 사람,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내 주는 사람, 조롱하고 멸시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들이 좋은 결실을 맺는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미친 짓일 수 있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가는 부활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고 합니다. 공동체에는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봉사의 씨를, 어떤 분은 나눔의 씨를, 어떤 분은 희생의 씨를, 어떤 분은 사랑의 씨를 뿌렸습니다. 공동체에는 그 씨들을 키우고 관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목회, 구역장, 반장, 레지오 단원, 각 단체의 봉사자들입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랑의 정원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거름을 줄 때, 우리가 나눔의 물을 줄 때, 공동체는 풍성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시련의 바람이 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비가 내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갈등과 아픔의 시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가장 큰 계명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
23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오상의 비오 신부님 기념일입니다. 벌서 20년 가까이 되어가는 성지순례입니다.
이탈리아를 성지순례 하던 중 비오 신부님이 계셨던 곳을 방문했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신부님께서 지내셨던 방과 써셨던 물건들, 혈흔이 묻어있는 옷가지들….
신부님께서는 주님의 오상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숨기고 사셨습니다. 그 고통을 인내하며 교회에 대한 순명으로 평생을 사셨습니다.
이러한 신부님의 모습은 꼭 씨앗을 품은 밭과 같습니다. 씨앗이 싹을 틔울 때까지 품고 있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신부님의 인내는 밭이 되고 매일 흘리신 피는 씨앗의 양분이 되었으며 교회에 대한 순명은 햇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전 세계가 아는 주님의 꽃이 되셨습니다. 그러한 꽃을 피우셨습니다. 주님 자체를 드러내는 꽃, 말입니다.
분명 우리에게도 주님의 씨앗을 전해졌습니다. 각자가 다 다른 씨앗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그 씨앗이 잘 자라나기를 희망합니다.
비오 신부님처럼 인내와 순명으로 말입니다.
우리도 주님 나라의 꽃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꽃은 자기에게 물 준 사람을 잊지 않습니다.
참 멋진 문장입니다.
라디오를 듣다가 흘러나온 문장인데
이 문장이 마음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무료한 삶에 희망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의미 없이 죽어가는 모든 것에
생명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내게 물을 준 누군가를 기억하게 돕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무엇에게 물을 주고 있는가?
돌아보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제 마음을 돌아다녔습니다.
꽃은 자기에게 물 준 사람을 잊지 않습니다.
꽃은 자기에게 물 준 사람을 잊지 않습니다.
꽃은 자기에게 물 준 사람을 잊지 않습니다.
----------------------------------------------------
23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뒤로 미루는 것을 습관처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이렇게 미루는 것은 게을러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일상 삶을 보면 그리 게을러 보이지 않습니다. 계속 무엇인가를 하는 것 같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미루고만 있을 뿐입니다.
기도의 일상화가 잘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일미사에 참석한 뒤에 열심히 기도하며 신앙인답게 사시겠다고 다짐하십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하는데, 기도만큼 잘되지 않게 되고 계속해서 뒤로 미루십니다. 그 이유를 묻자, “제가 게을러서요.”라고 답하십니다.
정말로 게을러서 그런 것일까요? 우리 뇌는 장기적인 성취와 성장보다는 단기적인 기분 회복과 감정조절을 우선시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편하고 쉬운 것, 순간의 만족을 주는 것에 먼저 집중하고, 평상시에 잘 하지 않았던 익숙하지 않은 것은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게을러서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이유는 게을러서가 아니라, 아직 신앙생활이 자기 몸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운동도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너무나도 힘듭니다. 몸의 이곳저곳이 아파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익숙하게 되면 단기적인 기분 회복과 감정조절이 이 운동에서 나옵니다. 이제는 운동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들게 됩니다.
기도와 묵상 등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조금만 더 익숙한 시간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나한테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내가 게을러서 그렇다는 것은 모두 그만큼 주님께 맞춰서 살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주님께 익숙해지는 삶을 살아야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참 행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좋은 땅이 되어 좋은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아마 농사를 짓는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좋은 땅을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식물을 잘 키워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유기물도 풍부하고 미생물도 풍부한 땅을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그냥 길에다가 씨를 뿌리지 않고, 바위에다가 씨를 뿌리지 않으며 또 가시덤불과 같은 잡초가 무성한 곳에도 씨를 뿌리지 않습니다.
좋은 땅으로 표현되는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계속해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묵상 등의 신앙생활이 우리의 삶 자체가 되어 익숙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런 노력으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오늘의 명언: 할 수 있다고 믿든, 할 수 없다고 믿든, 믿는대로 될 것이다(헨리 포드).
---------------------
----------------------------------------------------
23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절망은 없다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
오늘은 오상의 비오라 불리는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입니다. 이탈리아의 카푸친 작은형제회 수도사제로 평생 병고중에도 만81세까지 장수한 성인입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1997년 비오 신부를 가경자로 선언했고, 1999년에는 복자로, 이어 2002년 6월16일에 성인으로 시성됩니다. 마지막 감동적인 임종 장면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1968년 9월23일 이른 아침에 비오 신부는 마지막 고해성사를 보고 서약갱신을 하였다. 비록 더는 기도문을 암송할 기력이 없었지만,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묵주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비오 신부는 “예수, 마리아”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말하였다. 새벽 2시30분경 비오 신부는 “나는 두분의 어머니를 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가 말한 두 어머니란 그의 생모와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새벽 2시 30분 비오 신부는 침상에 누운채 “성모님!”하고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선종하였다.’
마지막 임종어가 “성모님!” 이었으니 말그대로 기도의 사람, 성 비오 사제였으며 이 임종어 안에 성인의 전 생애가 압축되어 있음을 봅니다. 오상의 비오 대신 고통의 비오 성인으로 불려도 좋을 만큼 성인의 어록에도 유난히 눈에 띄는 말마디가 고통입니다. 성인에게는 고통이 일상이었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과 역경은 그대를 십자가 밑에 있게 하고 천국의 문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거기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그대를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지만 고통을 슬기롭게 당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고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천사가 우리에게 부러워하는 것은 딱 한가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고통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고통만이 한 영혼에게 이렇게 말할 자격을 줍니다. ‘나의 하느님, 보십시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느님이 주시는 모든 아픔과 불편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완전하고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을 사랑할수록 그대는 희생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준비해야 합니다.”
“위대한 영혼들에게 아픔은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흡사 고통 예찬처럼 들립니다. 그대로 평생 파스카의 삶에 충실했던 고통의 성인 비오 사제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보물이 바로 무수한 성인들입니다. 기억하고 기념할뿐 아니라 우리 각자 고유의 성인이 되라 불림 받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참으로 우리 ‘성화聖化의 여정’중에 끊임없는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우리 삶의 좌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여정에 희망과 용기, 힘을 주는 성인들입니다.
삶은 ‘노화老化의 여정’이 아니라 ‘성화聖化의 여정’이요, 저물어가는 여정이 아니라 여물어가는 여정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한결같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진인사대천명의 삶으로 요약되는 진선미眞善美, 신망애信望愛의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설명이 이런 성화의 여정에 참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복음 중간에 주님은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고 외치시며 참으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깊이 경청할 것을 촉구합니다. 복음을 묵상하며 문득 떠오른 두 말마디입니다.
“절망은 없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말이 절망입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즐겨 썼던 말마디입니다. 또 하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보면 떠오르는 것이 프랑스의 작가 장 지오노가 지은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작은 소설입니다.
씨뿌리는 사람, 나무를 심은 사람, 한결같이, 끊임없이 자기 삶에 충실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상황이나 환경에 일희일비, 경거망동하지 않고 한결같이 제 삶의 자리에 죽기까지 충실한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성인입니다. 주변을 잘 살펴보면 이런 평범한 일상의 성인들은 곳곳에서 빛처럼 세상을 밝히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씨뿌리는 사람,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결코 주변 상황에 좌절하거나 절망함이 없이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순탄대로 마냥 좋은 땅만의 삶일 수는 없고, 때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같은 상황이나 환경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은 지속적 고통의 삶, 간헐적 기쁨의 삶, 바로 이것이 현실입니다. 노년을 보면 거의 병마와의 싸움, 말그대로 고해인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살아내는 것이 씨뿌리는 사람의 삶입니다. 바로 예수님, 성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매사 하느님 중심의 삶에 최선을 다할 때 주님과의 관계는 날로 깊어질 것이요 어디선가 좋은 땅에서는 무럭무럭 신망애 삶의 열매들이 익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가을은 기도의 계절이자 수확의 계절입니다. 배밭 둥글둥글 환하게 익어가는 배열매들처럼 우리 신망애의 열매도 잘 익어가고 있는 지요?
진인사대천명,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매순간 깨어 오늘 지금 여기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바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주는 가르침입니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노력 부족을 탓하듯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이도 하느님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노력 부족을 탓합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해설이 이런 진리를 입증합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앗이 문제가 아니라 씨가 뿌려지는 토양이, 바로 내 마음 밭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의 씨앗이 좋아도 내 마음 밭이 길바닥 같거나, 바위와 같거나, 가시덤불 같으면 도저히 좋은 수확을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바라는 바 다음과 같은 결과일 것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이래서 좋은 땅의 마음밭은 만들기 위한 부단한 영성훈련을 통한 습관화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말씀을 맛들이고 체화시키는 렉시오디비나 성독의 영적훈련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바치는 공동전례기도 은총은 물론 한결같은 수행 덕목들의 훈련과 습관화가 우리 마음 밭을 옥토의 좋은 땅으로 바꿉니다.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같은 박토도 좋은 땅으로 바뀝니다.
영구불변의 좋은 땅도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방치하면 곧 잡초밭이 될 것입니다. 정말 요즘 사람들은 마음 관리를 너무 소홀히 합니다. 보이는 몸 건강 관리, 얼굴 관리, 몸매 관리, 피부관리 등 외적 관리에 몰두할 뿐 보이지 않는 마음 관리에는 너무 소홀하니 생화가 아니라 향기없는 조화같습니다. 얼굴은 천사인데 마음은 괴물인 경우도 꽤 많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씨뿌리는 삶에 충실할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좋은 땅 마련에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것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씨뿌리는 신망애信望愛의 삶에, 성화聖化의 여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은총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이뤄주십니다.
“제때에 그 일을 이루실 분은, 복되시며 한 분 뿐이신 통치자, 임금들의 임금이시며 주님들의 주님이신 분,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예와 영원한 권능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1티모6,14-16). 아멘.
----------------------------------------------------
230923.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은 홀로 자라시지 않는다네>
하느님의 말씀은
홀로 자라시지
않는다네
악마의 헛된 속삭임을
힘껏 물리치는
나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은
더디더라도 쉼 없이
자라신다네
하느님의 말씀은
홀로 자라시지
않는다네
믿음을 앗으려는 시련에도
깊이 뿌리내리는
나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은
더디더라도 쉼 없이
자라신다네
하느님의 말씀은
홀로 자라시지
않는다네
홀로 살려는 온갖 탐욕을
한껏 떨쳐내는
나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은
더디더라도 쉼 없이
자라신다네
하느님의 말씀은
홀로 자라시지
않는다네
바르고 착한 마음에
말씀 고이 간직한
나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은
마침내 반드시
열매 맺으신다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