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른들은 왜 상투를 하였을까? - 가운데(中)의 어원
'윤집궐중(允執厥中)'은 한자문화권에서 정치사상의 처음과 끝이다. 유교의 공자가 이상으로 그리는 요순시대의 핵심사상일 뿐만 아니라 공자 또한 그 뜻을 받들며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근본이 잘못 해석되면서 왜곡의 빌미가 제공되었고, 그 결과 엄청난 왜곡이 실제적으로 일어났다. 공자가 성인으로 추앙되는 만큼 그 차이도 커진 것이다. 오늘날 현실이 그 방증이다. 궐(厥)과 중(中) 나아가 궐중(厥中)이 그것이다.
윤집궐중(允執厥中)의 출처는 <서경(書經)> 우서(虞書), 대우모편(大禹謨篇)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이고, <논어(論語)>의 마지막 20편 '요왈(堯曰)'에 '윤집기중(允執其中)'으로 인용되어 있다. 대체로 '사람들의 마음은 위험해져 가고 도(道)를 향한 마음은 점차 희미해지니 마음 자세를 맑고 한결같이 하여 진실로 그 중심을 잡으라'로 해석하고, 덧붙여 그 중(中)은 중용(中庸)의 도(道)로 설명한다. 나아가 과불급의 어긋남이 없는 중립(中立)적 의미로 굳어져 쓰이고 있다.
가운데/중(中)은 상형자로서, 갑골문 · 소전에서는 'ㅁ' 또는 'ㅇ'에 'ㅣ'과 깃발이 관통된 자형 등으로 썼는데, 깃발을 그린 것이고, 고대에는 큰 일이 있을 때 넓은 곳에 깃발을 세우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모여들어 자연히 깃발을 세운 곳이 중앙이 된 데서 '가운데'라는 뜻이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ㅣ'로 나타낸 것은 설명이 옹색해 질 수밖에 없다. 갑골문의 'ㅣ'은 '十'이다. 곧 열매나 씨앗의 상징이고, 나아가 천명(天命)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여 글말 '중'은 '자사(자위/핵심) 얼' 또는 '자아/자라 오르다'의 준말이고, '씨의 둘레[ㅁ/ㅇ] 그 핵심의 천명[ㅣ]이 자라 오르는[중]' 얼개로서, '천명(天命) 그 성(姓)이 우러나오는 곳'을 뜻한다. 점차 그 상징성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의 보편적인 '중앙'을 가리키는 의미로 확대되어 쓰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적으로 깃발은 '기운이 솟구쳐[깃] 나부끼다(펄럭이다)[발]'의 준말로, 그 현상 또한 상징하기 때문에 깃발이 관통된 중(中)은 기운(성) 그 천명(天命)이 솟구쳐 오르는 곳을 뜻한다. 보다 시각적인 뜻을 강조하여 나타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한말 '가운데'는 '(마음 등이) 가르고[가] 우러나오는[운] 데(곳)[데]'의 준말임을 알 수 있다.
용(庸)은 경(庚)과 용(用)의 형성자로서, 경(庚)은 그네(벼훑이) 또는 바디집(바디틀)을 나타내고, 글말 '용'은 '이어(잇달아) 올리다' 또는 '약이 오르다'의 준말로 보면, '그네 또는 바디집에[경(庚)] 쓰이어[用] 이어 올려지는/약이 오르는[용]' 또는 '그네/바디집에 이어 올리며/약이 오르며 쓰이는' 얼개이다. 그러면 '베가 짜이거나 벼 알곡이 추려지는' 현상을 나타낸 뜻이다. 즉, 서로 상대적인 쓰임에 따라 베가 짜지며 자라나는 확장의 뜻과 벼가 영그는(씨앗을 추리는) 수축의 뜻을 서로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여 '떳떳할, 쓸, 범상할' 등의 뜻이 유추되고, '용용 죽겠지'로 놀림을 당하듯, 그 글말 '용'에 따라 '어리석을' 뜻이 가차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는 그네나 바디집에 쓸리듯 바디쳐지듯 이용당하는 의미로 유추되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중용(中庸)'은 천명(天命)으로 받은 성(姓)이 우러나오는 데[중(中)]를 통해, 달리 그 천명으로 베를 짜듯 키워나가는[용(庸)] 것이고, 그 천명의 씨앗을 맺혀가는/영글려 가는[용(庸)] 것이며, '솔성(率性)'과 '수도(修道)'로 이어지는 뜻이다. 그러면 '궐중(厥中)'은 중용의 도 그 핵심을[중(中)] 파고들어 가는[궐(厥)] 뜻이고, 나아가 그 핵심으로 수렴해 가는/포커스를 맞춰가는 뜻이다. 하여 '윤집궐중(允執厥中)'은 '진실로[윤(允)] 중용의 도 그 핵심에 포커스를 맞춰[궐중(厥中)] 잡는 것[집(執)]이다.' 지금까지 이해되는 의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무엇이 문제인가? 앞부분의 해석에 따라 시각이 달라지면, 천양지차로 달라진다는 것이다.
'인심유위(人心惟危) 도심유미(道心惟微)'의 일반적 해석은 '유(惟)'을 '오직'의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하다, 도모하다'의 뜻도 있음을 간과한 해석일 뿐이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게 생각하고, 도(道)의 마음은 미미하게 생각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위(危)는 회의자로, 위(厃)는 사람이 언덕에 있는 모양이고, 절(㔾)은 사람이 꿇어앉은 모습이므로 높은 곳에 있어서 무서워한다는 뜻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이는 소전의 자형이고, 갑골문은 알 수 없는 전혀 다른 자형이다. 같은 시각으로 보면, 줄타기하는 사람이 줄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어쨌거나 글말 '위'로 보면, '우(위)에 이르다/이다(놓이다)'는 의미로 유추되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하여 '위태할, 두려워할' 뜻과 더불어 '높을' 뜻도 유추되어 쓰이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위에 서서 생각하기 때문에 위태롭다는 뜻이다. 중(中)의 관점에서 보면, 핵심을 벗어나 위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중심을 잃고 마음이 흐트러지게 되어 위태롭다는 뜻이다. 나아가 핵심인 마음을 무시하고 그 위 바깥이고 껍질인 달콤한 물질만을 생각하여 위태롭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면에 도(道)의 마음은 마음 중에서도 그 핵심인 천명(天命)을 파고들기 때문에 미미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구심점이 미세할수록 초점이 맞춰지며 뚜렷해지는 것이 도심(道心)이고, 구심점이 위를 향해 흩어질수록 흐릿해 지는 것이 인심(人心)임을 서로 대비 시켜 나타낸 것이다. 오늘날 물질만능주의가 그 방증이지 않은가? 따라서 이어지는 '유정유일 윤집궐중( 惟精惟一 允執厥中)은 '오직 정밀하게 생각하고 오직 하나의 초점을 생각하여, 진실로 사람의 마음을 오직 도심으로 이끌어 그 천명으로 포커스를 맞춰 잡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