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함께 좀 쉬자(마르 6, 31)
-가엾은 마음
지난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복음 선포를 하고 돌아와서 피곤할 것 같으니까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몰려오니까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했습니다. 그 내용에서 핵심적인 것은 ‘가엾은 마음’입니다. 희랍어 ‘스플라 비조마’라는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이는 측은지심으로 번역하지만, 원어가 이야기하는 내용은 속이 요동칠 정도의 격한 감정을 말합니다.
이 표현은 다른 몇 군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의 착한 사마리아인에서 강도에게 폭행당한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만 탈렌트나 빚진 종에게 주인이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돌아온 아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말로는 애간장이 탈 정도였습니다.
가엾은 마음은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 마음을 표현해주는 아주 특이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엾은 마음은 히브리어 르하임은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느님은 어머니가 뱃속 아기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느끼듯이 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사랑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엾은 마음을 현대사회에 적용해 보면 목자 없는 양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지금 우리 사회도 그렇습니다. 현대 사람들이 현대문명의 위기를 즐기고 있지만, 그 안에서 나오는 권태와 좌절감, 소외감 등 이런 모든 것으로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모습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모습입니다.
강도의 불법적 폭력에 의해 쓰러진 인간, 지금도 우크라이나 전쟁, 또 가자지구의 전쟁, 강대국의 횡포로 약자들은 불법적 폭력에 희생당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입니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이 시간에도 죽어갑니다. 일만 탈렌트나 빚지고 있는 종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적 고통으로 하루하루의 삶이 막막한 삶, 둘째 아들의 비유는 아버지 없어도 혼자 자만에 의해서 삶의 좌절과 실패로 인생 막장에 떨어져 있는 사람에 비유됩니다.
그래서 가엾은 마음은 우리 교회적 용어로 표현하면 예수성심입니다. 프랑스의 어떤 연륜이 있으신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프랑스 교회는 더 이상 가톨릭교회의 맏딸이라며 아주 슬픈 표정을 지었습니다. 6세기 이후 로마가 유럽으로 진출하고 나서 로마가 게르만족의 용병들에 의해서 세력이 악화됐을 때 가톨릭 신앙을 잃어버린 분이 샤를마뉴 칼 대제입니다. 칼 대제는 신성 로마 제국을 선포하고 가톨릭교회를 수호했던 나라가 프랑스로 교회 역사에서 수많은 성인 성녀가 나와 이테리와 버금가는 나라입니다. 또한 프랑스외방전교회가 우리나라 교회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해냈기 때문에 가톨릭교회에서는 맏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옛 어른들은 맏딸을 살림 밑천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줄줄이 달린 동생들을 돌보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가톨릭교회가 그런 맏딸의 역할을 했으나 지금은 무너지고 있으며 오히려 불교가 일어서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떤 프랑스 불교 신자가 하는 말이 가톨릭은 몸으로도 느껴지지 않지만, 불교는 호흡으로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가톨릭 측면에서 보면 가엾은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어떤가요? 우리 교회도 프랑스처럼 되어가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2023년 통계 자료에 의하면 전체 인구의 11.3%가 가톨릭신자이며 주일미사 참례는 신자 중 13.5%라고 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가엾은 마음입니다. 오늘의 실태를 성경에 비춰보면 “우리가 피리로 불어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 이는 가톨릭의 위기 속에서 우리의 인간적인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보신다면 너희를 그렇게 사랑했는데 너희들은 오히려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은 미래가 있는가로 이데올로기 현상입니다.
이런 시대적 사조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언제 소멸할 것인가 묻지 말라고 합니다. 오히려 지금 종교의 뿌리에서부터 벗어나 버린 세속화된 이 사회가 얼마나 더 지속될 것인가를 걱정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종교는 절대로 인간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존속한다고 하며, 또 종교를 대체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기에 종교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가엾은 마음은 조건 없이 영원하십니다. 가리지의 비유처럼 인간이 ‘호모 데우스’라고 외치지만 하느님 손바닥 안에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 가엾은 마음이 탕자의 비유처럼 부모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하느님은 바라보고 계실 것입니다. 해서 오늘의 세태에 우리가 어떻게 접근하며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요.
교회는 지금까지 고정관념에 의한 명령과 금지로 ‘하지마라’ 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오히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애간장 타는 가엾은 마음을 보여줘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이고 역할입니다. 복음의 말씀대로 하느님은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똑같이 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고통 속에 함께 아파하시고 반그리스도적인 삶을 살지라도 사랑하시고 구원을 바라시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오늘날 반그리스도적 문화 안에서 해야 할 역할입니다. 그래서 비엔나 대학의 신학자 줄 레너 파울줄은 교회의 사목은 교회의 돌담으로 둘러쳐진 철옹성 안에서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천주교는 당신을 초대합니다.’ 하면서 성당 문은 잠겨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마을과 고을을 다니면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정말 시대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려가고 다가가는 것이 사목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사목은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을 인용하면 육신적 사목과 영신적 사목이 있습니다. 육신적 사목은 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옷, 감옥에서 석방하고 병자를 방문하고 죽은 이를 장례 지내주는 것입니다. 영신적 사목은 죄인의 선도, 하느님을 알리고, 실망한 사람을 격려하고,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불의를 극복하게 하고, 용서의 삶을 살게 해주고,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려서며 다가가서 하느님의 애간장이 타는 사랑의 마음을 전해줄 수 있는 것이 교회 공동체의 역할입니다.
오늘날 종교는 순환을 거부하고 영광만을 찾고 기복 신앙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심판, 천국과 지옥, 양적 팽창, 집단 신심이나 감성을 자극하는 표층 종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신심 내재와 사랑과 겸손, 자아발견 등의 심층 종교로 변화하지 않으면 미래의 종교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애끓는 마음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 살면서 아날로그 방법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시노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헬무트 크랫출 주교가 말하기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 각자를 필요로 하신다고 합니다. 인간은 각자 고유한 달란트를 지니고 창조된 것이며 성령의 은사입니다. 교회의 미래는 하느님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세상을 어떻게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증거의 방법은 사랑의 마음으로 내려가서 다가가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 교회의 문을 두드리며 하느님을 찾는 사람을 일컬어 ‘교회의 보물’이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을 전달하는 방법은 실천이라는 증거를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이론이나 논리가 아니라 실천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2024. 07. 27. 올리베따노 수녀원 유스티노회 피정 김정우 신부 특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