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84]핍박받고 아픈 노동자들의 공짜쉼터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이라는 민간조직을 아시는지요? 아프거나 핍박받는 노동자들을 위한 쉼터가 그것인데, 저도 솔직히 어제 처음 알았습니다. 남원 산동면 '귀정사'라는 절에 템플스테이 방 몇 개가 있습니다. 만행산 자락의 귀정사는 백제 때부터 있던 1500년이 된 사찰로(신라-백제가 큰 전투를 치렀다죠), 15세기에는 대찰大刹이었답니다. 임란, 한국전쟁때 소실이 된 상처투성이의 절입니다. 그곳에서 나름 조건이 맞으면 최소 두 달은 쉬면서 힐링할 수가 있다는군요. 여성노동자로서 최초의 용접공, ‘소금꽃’ 별명의 김진숙이라는 노동자 이름 석 자를 들어보셨겠지요? 부산 한진중공업에서 해고된 후 309일 동안 ‘고공 크레인 농성’의 주인공. 그를 도우려 매주 서울에서 부산까지 위로해주려 다닌 ‘희망버스’도 들어보셨지요? 가수 정태춘은 그를 위해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라는 노래를 아내이자 가수 박은옥에게 부르게 했다지요. 암투병 등으로 지친 그가 귀정사 쉼터에서 심신을 추스렸다더군요. 반대편에서 보면 김진숙처럼 '독종毒種'은 처음이라고 했겠지요. 흐흐. 지극히 연약한 여성일 뿐인데 말이죠.
세상을 살다 보니, 여기저기 기적같은 일들을 제법 보게 되지만, 이 ‘인드라망 쉼터’가 10년 동안 ‘무사히’ 운영을 한 끝에 올해 10주년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이것도 가히 기적입니다. 어떻게 운영이 될 수 있었을까요? 무명, 유명의 후원자들과 많은 자원봉사자들 덕분이었겠지요. ‘깨어있는 시민들의 힘’은 이렇게 무섭습니다. 하여, 어제는 개원 10주년기념 후원의 날로, 정태춘-박은옥 후원콘서트가 있었습니다. 이런 정보를 알려준 서울의 친구가 고마웠습니다. 저도 여러 지인들에게 당연히 알려드렸지요. 알음알음, 이 깊은 산골의 작은 절을 찾는 사람들이, 좀 뻥을 치면 ‘인산인해’였습니다. 700명은 족히 될 듯합니다. 번써 10년도 더 된 듯한데, 충북 채운산 중턱의 당산나무 아래에서 매년 시월 첫째 토요일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 단군제를 지냈는데, 전국에서 종교(스님, 수녀, 신부, 목사, 청학동 등) 불문하고 400여명이 운집해 날을 새웠습니다. 그야말로 음주가무 난장판이었으나, 뜻과 의식은 몹시 경건했습니다.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가산사 주지였던 지승 스님(상고사 연구가)이 홀로 30여년째 지내온 단군제였습니다. 스님이 아픈 이후, 뜻깊은 연례행사는 중단되고 말았지만요. 그날 이후 어제 깊은 산속 그런 인파는 처음이었습니다.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이 행사를 준비하느라 애쓴 관계자 여러분(귀정사 중묵처사, 송경동, 장병관, 이수경 등등등등)의 노고를 이 졸문을 통해서도 고맙다는 말씀을 진심으로 전합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며 ‘나’를 괴롭히지는 말자…우리는 강철이 아니니까 - 경향신문 (khan.co.kr)
연잎밥과 김밥을 400인분 준비한 지역농민단체(남원농민회-장수 민주모임 등)에도 경의를 표합니다. 400인분은 택도 없어 긴급 수송사태가 벌어졌지요. CMS를 신청하니, 정태춘시집 『슬픈 런치』와 송경동시집 『꿈꾸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그리고 박남준시집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 중 한 권을 주더군요. 그분들의 시집을 보니 무척 반가웠습니다. 시집이야 차차 읽어볼 생각이지만, 어찌 후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깊은 산 속에 700여명이라니요? 이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무엇일까요? 노동해방, 폭력해방, 차별해방이 아닐까요? 서울에서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신 부부가수님께도 고개 숙입니다. 역시 정태춘-박은옥이지요. 그들의 노래 한 곡만 들어도 행복할진대, 1시간 20여분동안 무려 7곡을 들었으니까요. 「시인의 마을」, 「회상」, 「촛불」, 「북한강에서」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92년 장마, 종로에서」 간첩 리철진관련 노래 등이 그것입니다. 정말 숫제 감동이었다니까요? 제발 저에게 ‘순진한 놈’ ‘호사가’라고 쉽게 말하지 마세요. 감동할 것은 감동해야 하고, 감격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기적은 기적이라고 칭찬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갈수록 드라이DRY해지고 감정이 메말라갑니다. 그 말은 ‘속물’이라는 말도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오랜 친구와 귀정사를 찾았습니다. 이 조직에 대해 알고 경탄했습니다. 누구라도 일조一助를 할 수 있으면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은 어쩌면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힘들고 어려운 싸움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듯합니다. 이 '몹쓸 놈'의 정치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386이네 586이네 운동권출신 정치가들이 어쩌면 정치를 더욱 형편없고 경멸스럽게 만든 주역들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하지만, 여기 이 노동자들은 돈도 없고 빽도 없이 오직 몸뚱이 하나로 싸워나가는 사람들이 아니겠는지요? 싸우다 지치면 ‘변절’이 아닌 ‘충전’이 필요하겠지요? 이곳이 10년 동안 그들의 충전소였던 것입니다. 이 충전소의 ‘존속’을 위하여 우리 시대 최고의 음유시인 민중가수 부부가 달려왔습니다. 어쩌면 어제 온 절반의 사람들은 그분들의 노래를 들으며 자신들 스스로 위안과 위로를 받고 싶어 왔을 것입니다.
1978년 <시인의 마을>을 작사작곡해 노래함으로써 당시 노래판을 뒤흔들었던 정태춘, 그는 올해 70입니다. 데뷔한 지 48년, 내일모레이면 반세기가 되지만, 그가 원하고 희구한 세상은 아직도 오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멘트 “우리는 지지 않았습니다”가 뇌리에 남습니다. 그렇지요. 지면 안되는 일이고, 진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지요. 조직이름 ‘인드라망indra網’은 ‘서로를 비추는 무수한 구슬들이 엮인 관계의 그물망’을 뜻한다더군요. 어제 그 자리가 그랬습니다. 옆에 있는 누구나를 바라보아도 ‘왜 그렇게 모두 선하게 생겼을까?’싶습니다. 모두 손해만 보고 사는 사람들 같았으니, 저도 저절로 마음이 착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무엇이든 주고 싶고, 돕고 싶고, 손 잡아주고 싶은 마음,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 그런 느낌을 받아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래서 자리는 조금 불편해도 좋았습니다. 제 말만 듣고 광주에서 세 분의 여성도 달려왔습니다.
밤 9시 30분, 아쉬운 자리가 끝이 났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두컴컴하고 좁은 산길 2.5km를 군말없이 걸어 내려왔습니다
. 셔틀버스 운영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지요. 이것 역시 오래 기억에 남을 ‘추억의 밤’이 아니겠습니까? 휴대폰의 손전등을 켜지 않아도 걷는데 크게 지장은 없었습니다. 앞에, 옆에, 뒤에 ‘선한 사람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지요. 가수 정태춘님이 섭외과정에서 ‘쉼터’의 실체를 파악하고 ‘김어준 뉴스공장’과 ‘박은옥 동반출연’을 조건으로 밝혔다고 합니다. 이럴 때 쓰는 단어가 “역쉬-”입니다. 18년 전의 인연으로, 콘서트 전에 정태춘님과 몇 마디 인사말을 나눌 수 있은 것도 좋았습니다. 서울에서 백기완선생님의 영원한 작은 여성동지도 내려와 반갑게 만났습니다. 지리산 악양마을에 사는 '모태솔로' 박시인이 자기집에서 한 잔하자고 하더군요. 송경동 시인과 수인사도 나눴습니다. 어느 지인이 보내준 송시인의 시 <연루와 주동>을 전재합니다.
<그간 많은 사건에 연루되었다/더 연루될 곳을 찾아 바삐 쫒차다녔다//연루되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차/주동이 돼보려고 기를 쓰기도 했다//그런 나는 아직도 반성하지 않고/어디엔가 더 깊이깊이 연루되고 싶다/더 옅게 엷게 연루되고 싶다//아름다운 당신 마음 자락에도/한번쯤은 안간힘으로 매달려 연루되어보고 싶고/이젠 선선한 바람이나 해 질 녘 노을에도/가만히 연루되어 보고 싶다//거기 어디에 주동이 따로 있고/중심과 주변이 따로 있겠는가>
그렇습니다. ‘거기 어디에 주동이 따로 있고/중심과 주변이 따로 있겠’습니까? 아름다운 밤이었습니다. 아름답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우리말입니다. 오죽하면 전사戰士였던 김남주 시인은 아들 이름을 ‘금토일金土日’이라고 짓고, 시인 박기평은 자기의 이름을 ‘박노해(박해받는 노동자 해방)’라고 지었겠습니까? 숱한 노동자집회에서 부르던 단골가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마라/자본가는 먹지도 마라> 가 귀를 울립니다. 일찍이 옛 스님들도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부식一日不食”이라고 말했습니다. 조금 천천히 가거나 걸어도 괜찮습니다. 너무 힘들면 쉬었다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곳은 그런 휴식터이더군요. 개원 20주년 기념날에도 이 사람들을 모두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후기: 10년간 공양깐에서 이들의 먹거리를 책임져주신 '할머니 쉐프'의 영상을 잠깐 보았습니다. 잘 걷지도 못하시면서도 자식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임을 진 고마운 할머니 쉐프는 쉼터를 다녀간 자식같은 사람들에게서 '공로상'을 받으며 울먹이더군요. 한 편의 준수한 미담美談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