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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Ⅱ
- ▣마르크 샤갈과 스테인드글라스▣모네와 색채 혼합▣파울 클레와 자기조립▣안견- 수묵화와 스며들기▣커피 얼룩과 잉크젯 인쇄▣백남준과 브라운관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Ⅰ https://blog.naver.com/ohyh45/222432983359
① 허블 우주망원경과 웨스터룬드 2 성단. ② 클림트와 황금. ③빈센트 반 고흐의 연백 물감.
④ 잭슨 폴록의 혼돈 속에 패턴. ⑤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갈라짐. ⑥ 피트 몬드리안의 직선.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Ⅱ https://blog.naver.com/ohyh45/222434226736
⑦ 샤갈과 스테인드글라스. ⑧ 모네와 색채 혼합. ⑨ 파울 클레와 자기조립.
⑩ 안견의 수묵화와 스며들기. ⑪ 커피 얼룩과 잉크젯 인쇄. ⑫ 백남준과 브라운관
7.마르크 샤갈의 『미국의 창 America Windows』 (1977년)
- 샤갈과 스테인드글라스, 고통 안긴 세상, 푸른빛으로 껴안다
샤갈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사랑과 화해를 끊임없이 시각화하며 순탄치 않았던 긴 생애와 화해했고, 거친 세상을 포용했다. 그는 작품에서 인간 내면에 깊이 자리한 영원한 안식처인 고향, 사랑, 꿈을 이야기했다. 1985년 프랑스 니스에서 98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 그는 야수파의 앙리 마티스와 더불어 20세기 가장 뛰어난 ‘색채 마술사’로 꼽혔다.
마르크 샤갈의 <미국의 창>(America Windows, 1977년) 전체 모습.
이 작품을 구성하는 3개의 창은 각각 2개의 패널로 나뉘어 있다. 시카고 미술관(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소장. ?2018 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ADAGP, Paris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프라우뮌스터 성당에서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본 적이 있다. 다섯 가지 색으로 성서 속 다섯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었다. 예수와 야곱, 모세 등 성서 속 인물들이 찬란한 색채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색유리가 만드는 빛의 향연에 난 잠시 세상의 복잡함과 고단함을 잊고 흠뻑 빠져들었다.
투명한 유리에 색을 입힌 스테인드글라스는 그 아름답고 밝은 색채로 유럽에선 11세기 중세 시대부터 성당과 교회의 창문 장식으로 널리 사용됐다. 변색이 적어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이 잘된 곳이 많다. 특히, 푸른색을 천상의 빛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 중요한 비중으로 사용했다. 유리 세공 기술이 발전하면서 푸른빛은 점차 밝고 화려해졌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도안에 맞추어 색유리판을 자르고 조각을 무늬에 맞게 이은 다음 납으로 붙여 완성한다. 철, 구리, 코발트 등 금속 산화물은 유리에 넣으면 빛의 흡수를 조절하는 착색제가 된다. 푸른빛 유리가 푸르게 빛나는 건 햇빛에서 다른 모든 파장의 빛을 흡수하면서 푸른빛만 통과시키기 때문이다.
최근엔 나노입자를 넣어서 색유리를 만들기도 한다. 금이나 은 나노입자를 유리에 조금 섞으면 나노입자가 특정 파장의 빛을 흡수하여 색유리가 된다. 미세구조에서 색을 얻기도 한다. 남아메리카에 서식하는 몰포 나비의 날개는 금속처럼 밝은 푸른빛을 띤다. 몰포 나비 날개엔 푸른빛의 색소가 없는 대신 여러 층이 규칙적인 간격으로 배열된 미세구조가 있다. 한 층에서 반사된 푸른빛이 다른 층에서 반사된 푸른빛과 간섭을 일으켜 밝게 보이는 원리다. 다른 파장의 빛은 상쇄된다. 이 원리를 이용해 색유리에 나노입자를 규칙적으로 배열해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색유리의 색채는 물질과 빛의 상호작용 결과다.[1]
환대하지 않은 세상을 품다
샤갈은 1887년 러시아 제국 비테프스크 지방의 한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0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지만, 파리의 주류 미술계는 현대 미술사의 정통파에 속했던 마티스나 피카소와 달리 러시아 시골 출신 유대인 예술가를 잘 받아주지 않았다.
특정 유파에 속하지 않았던 그는 고향에 대한 향수를 그림으로 달래며 유년시절의 추억과 가족의 애틋함을 작품에 투영했다. 1915년 첫사랑인 벨라와 결혼한 후 그의 예술혼은 절정에 이르러 1920년대 가장 많은 회화 작품을 남겼다.[2]
그 또한 많은 예술가처럼 20세기 격변의 역사를 비껴갈 수 없었다. 1940년 6월 파리가 나치에게 함락당하자 프랑스 미술가들의 망명이 줄을 이었고, 유대인이었던 샤갈 부부도 1941년 뉴욕으로 이주한다.[3, 4]
탈출의 기쁨도 잠시, 1944년 아내 벨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그의 인생에서 겪은 가장 큰 절망이었다. 벨라의 죽음으로 그는 더는 혁신적인 회화 작품을 그려내지 못한다.
1952년 재혼으로 겨우 안정을 되찾은 이후 그는 회화가 아닌 스테인드글라스와 공공 미술에 힘쓴다. 꿈을 꾸듯 환상적인 색채로 사랑과 기쁨을 표현한 초기 회화 작품 스타일은 후기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에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1970년에 만들어진 프라우뮌스터 성당의 작품 역시 이 무렵 작품이다.
그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사랑과 화해를 끊임없이 시각화하며 순탄치 않았던 긴 생애와 화해했고, 거친 세상을 포용했다. 그는 작품에서 인간 내면에 깊이 자리한 영원한 안식처인 고향, 사랑, 꿈을 이야기했다.
1985년 프랑스 니스에서 98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 그는 야수파의 앙리 마티스와 더불어 20세기 가장 뛰어난 ‘색채 마술사’로 꼽혔다.
샤갈의 <미국의 창> 중에서 음악과 미술을 형상화한 왼쪽 창문. 시카고 미술관 소장.
?2018 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ADAGP, Paris
왜 샤갈의 인물들은 둥둥 떠다닐까
이번 글에서 독자들과 함께 자세히 보고 싶은 작품은 1977년 완성된 <미국의 창>(America Windows)으로, 미국 시카고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샤갈은 이 작품을 미국 독립 20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제작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피난처를 제공해준 미국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았다.
이 작품은 그의 화려한 색채와 동화적 상징이 돋보이는 회화적 특징이 잘 반영된 대표적인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으로, 밝은 빨강, 오렌지, 노랑, 녹색의 화려한 색채를 띤 인물과 사물이 푸른빛의 밝은 바탕과 어우러진다. 마치 사람과 사물이 깊고 푸른 하늘에 떠 있는 별자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밝고 따뜻한 푸른빛은 생기 넘치는 상징들을 감싸며 세상과 화해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두 개의 패널로 나뉘어 있는 세 개의 창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여섯 개의 패널에는 시카고의 스카이라인 위로 음악, 미술, 문학, 건축, 춤, 극장이 차례로 형상화되어 있으며 미국 독립 정신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그림 1). ‘음악’과 ‘미술’을 형상화한 왼쪽 창문(그림 2)을 좀 더 살펴보자.
음악을 상징하는 첫 번째 패널 가운데 바이올린을 켜는 악사가 있고, 오른쪽 위엔 나팔을 부는 사람이 있다. 왼쪽 상단에는 악보가 보인다. 두 번째 패널은 ‘미술’을 상징한다. 위에는 붓, 캔버스, 팔레트가 보이며, 아래엔 병, 음식 그릇, 정물의 일부가 되는 사물이 묘사되어 있다. 그는 화려한 색유리로 디자인된 창문을 통해 인류의 창의적 에너지를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5]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물은 중력을 무시한다. 인물과 사물이 건물 위와 하늘에 떠 있는 채로 그리는 스타일은 그의 작품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고향 러시아에 대한 향수 때문인데,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 추억 어린 고향으로 가고픈 소망이 투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그의 작품에 염소, 말, 연인, 태양, 새, 꽃의 모티프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 또한 고향 러시아의 민속과 종교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술, 예술의 완성을 돕다
샤갈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활용한 후기작품에서 자신만의 회화 기법을 유리 위에 재현하기 위해 유리 가공 기술자와 끊임없이 소통했다. 그는 <미국의 창>을 제작할 때 스테인드글라스 특유의 색감을 살리기 위해 유리 가공 기술자의 도움을 받아 전통적인 유리 제조법을 되살렸다.
투명한 유리는 규소가 주성분이다. 규소는 상온에서 결정 구조를 이루지 않는 비정질 재료로서 빛을 흡수하지 않고 대부분 투과시킨다. 그는 독특한 그만의 색채를 살리기 위해 투명한 유리 위에 색유리를 얇게 입힌 ‘플래시드 글라스’
(flashed glass, 입힌 유리)를 사용했다.
입힌 유리는 투명한 유리 위에 색상을 가진 얇은 색유리가 겹쳐 반투명하다. 전체를 색유리로 만드는 것보다 투명 유리 위에 얇은 색유리를 입히면 비용이 저렴하고 다루기가 쉽다. 입힌 유리는 에칭 작업으로 표면에 있는 색유리 부분을 제거하여 다양한 색조와 색상을 표현할 수 있다.[5]
작업 과정을 살펴보자. 시카고 미술관이 제작한 동영상[6]을 보면, 그가 어떤 방식으로 작업했는지 전문가들이 그의 작품을 조사해 밝힌 대목이 있다. 먼저 수채화 물감과 구아슈(수용성의 아라비아고무를 섞은 불투명한 수채물감)를 사용해 밑그림을 만든다.
그다음 밑그림대로 유리 위에 스케치한 후 유리를 개별 조각으로 절단한다. 그는 여기서 전통적인 유리 제조법을 사용하는데, 투명 유리에 색상을 결정하는 금속 산화물을 입힌 색유리를 산으로 세척하여 색조와 색상의 그러데이션(gradation·농담)을 조절한다.
이렇게 완성한 다채로운 색유리 조각을 원래의 밑그림대로 이어 붙인다. 마지막으로 조립된 유리 위에 직접 페인트를 칠하고 손톱과 붓으로 자국을 남기는 독특하고 최종적인 터치를 추가해 작품을 완성한다.
샤갈은 오랜 생애에 걸쳐 사랑과 화해를 끊임없이 추구한 예술가였다. 가난하지만 선한 아버지 영향 아래 예술가의 꿈을 키웠고,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의 소중함을 지켜내며 모진 세월을 견뎠다. 중력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연인처럼 자유롭게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완성했다.
그의 작품은 보면 볼수록 삶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발견하게 된다. 긴 세월, 고단한 삶을 이겨내고 마침내 세상을 품었던 샤갈의 빛은 따뜻하고 아름답다.
[참고 자료] [1] 석현정 외, <빛의 공학>(사이언스북스) [2] 이진숙, <위대한 미술책>(민음사) [3] 할 포스터 외, <1900년 이후의 미[참고 자료] [4] J.-B. Michel, et al. Science 331, 176-182 (2011) [5] http://www.artic.edu/aic/collections/citi/resources/Rsrc_002585.pdf [6] https://www.youtube.com/watch?v=Bz2mioCp-M0 |
[출처] :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 7.마르크 샤갈의 『미국의 창 America Windows』 (1977년) - 샤갈과 스테인드글라스, 고통 안긴 세상, 푸른빛으로 껴안다 / 한겨레신문, 2018. 6. 14.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49135.html#csidx99617ac98c11aa1983e87356f08c512
8.모네의 『인상, 해돋이』 - 모네와 색채 혼합 ,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마라
인상주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그림에서 몇 걸음 물러나야 한다. 그림에서 멀어질수록 혼란스러워 보이던 색점들이 제자리를 찾아 생기를 띠며 기적과 같이 아름다운 이미지로 변하기 때문이다. 색채 혼합의 기적을 성취하고 화가가 경험한 시각적 환희를 관객에게 전달해주는 작업이 인상주의자들의 목표였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Impression, soleil levant). 1872년 작.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 소장
19세기 유럽은 과학 혁신의 중심이었다. 과학자들은 빛의 본질을 탐구하여 현대 물리학의 근간을 마련했다. 예술가들은 빛의 순간을 포착하여 자연의 본질을 화폭에 옮긴 인상주의를 태동시켰다.
1865년 맥스웰은 패러데이 실험과 아이디어를 엄밀한 수학 방정식으로 통합하여 전자기 원리를 완성한다. 그는 빛의 본질과 인식 과정을 동시에 연구했다.
젊은 시절 색채 인식 작용을 보여주는 색팽이를 고안해, 여러 색이 배열된 색팽이를 빠르게 돌리면 우리 눈이 색을 혼합해 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색채 과학은 19세기 후반 인상주의 태동과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예술가들은 팔레트에 직접 물감을 섞지 않고 캔버스 위에 색을 병치하여 색상을 재현했다. 캔버스 위에 공간적으로 평균화된 색은 시간적으로 평균화된 색팽이 색보다 선명하고 다양한 색감을 표현할 수 있다. 색채 혼합은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기본 표현 기법으로 자리 잡았다.[1]
물감이나 빛을 섞을 때 작용하는 색채 혼합 원리는 두 가지가 있다.
물감은 섞일수록 검정이 되는 ‘감산 혼합’을 하고 빛은 섞일수록 백색광이 되는 ‘가산 혼합’을 한다. 물감과 빛의 색채 혼합 원리를 처음 알아낸 과학자는 독일 생리학자며 물리학자인 헤르만 폰 헬름홀츠였다.
색채 이론을 더욱 발전시킨 미국 물리학자 오그던 루드는 1879년 색채 혼합을 비롯한 당시 최신 광학 연구를 정리하여 예술가와 기술자를 위한 책을 출판했다.
그의 책은 1881년 프랑스어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에 전해졌으며 점묘화로 유명한 신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피에르 쇠라와 인상주의를 개척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에게 결정적 기여를 했다.[2]
인상주의 아침이 밝아오다
19세기 미술사는 혁신의 시대였다. <서양미술사>를 집필한 곰브리치는 ‘19세기 미술사는 용기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 탐구하여 기존의 인습을 비판적으로 대담하게 검토하고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창조해낸 외로운 미술가들의 역사’라고 했다.[3]
유럽 미술의 중심지가 15세기 피렌체에서 17세기 로마를 거쳐 19세기 파리로 이동하면서, 몽마르트르 카페에는 미술의 본질에 대해 토론하는 수많은 미술가들이 몰려들었다.
19세기 미술 흐름을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전환하도록 기여한 선구자는 에두아르 마네였다. 보수적인 미술가들의 격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풍경의 혼란 속에 드러난 알아보기 힘든 형태들을 어렴풋이 암시하는 정도로 빛과 속도, 운동감의 인상을 탁월하게 엮어냈다. 그의 그림은 혁신에 목마른 젊은 화가들의 눈을 뜨게 했다.[3]
인상주의를 개척한 젊은 화가들 중 단연 두드러진 화가는 모네였다. 그는 프랑스 르아브르 출신의 가난하지만 고집 센 젊은이였다. 그는 동료들을 설득해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와 소재가 있는 자연 앞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도록 앞장섰다. 야외에서 작업하기 좋은 작은 배를 한 척 마련해 강가 풍경을 탐색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3]
1874년 무렵, 마네는 작은 배에서 작업하고 있는 젊은 모네를 찾아와 모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우정을 표현했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회화는 반드시 ‘바로 그 현장’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모네는 미술계의 오랜 관습에 변화를 촉구했다.
그와 뜻을 같이한 동료들이 1874년 한 사진작가 스튜디오에 모여 전시회를 가졌다. 모네는 여기서 <인상, 해돋이> 작품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 그림을 본 한 비평가는 전시회에 참가한 모네와 동료들을 ‘인상주의자들’이라 조롱했다. 이것이 ‘인상주의’ 미술의 시작이었다.[3]
인상주의 탄생을 알린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좀 더 살펴보자. 모네는 이 작품에서 아침 안개가 깔린 프랑스 북부의 르아브르 항구 풍경을 그렸다. 텍사스 주립대 물리학자 도날드 올슨은 그림을 주의깊게 연구해 그림에 포착된 시간을 ‘1872년 11월13일 아침 7시35분’이라 특정하기도 했다.[4]
해가 뜨는 아주 짧은 순간에 대상의 특별한 인상을 놓치지 않으려 화면 전체의 효과를 강조하고 세부 묘사는 덜 신경 쓰며 빠른 붓질로 캔버스를 칠했다. 거친 붓질로 완성한 그의 그림은 당시 사실주의에 익숙한 비평가들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모네는 이렇듯 빛과 구름이 보여주는 마술적인 빛의 효과에 이끌렸다. 다채롭게 변하는 빛에 따라 언제나 다양하게 변하는 자연의 본질을 표현하려면 색채 혼합을 활용한 인상주의 기법이 적합했다.
빛의 탐구, 인상주의 발전을 이끌다
모네가 인상주의 기법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과학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880년대 그는 과학자들의 색채 분석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빛의 변화에 따른 대상의 변화를 탐구하고 싶어 연작을 시도한다.
그는 1883년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 지베르니에 정착하며 근처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농가를 구해 자신만의 특별한 작업 공간을 만들었다. 정원 건너편 늪지대를 사들여 엘트강 지류 물줄기를 돌려 작은 연못을 만들고 일본식 다리도 만들었다.
작업 공간을 확보한 이후인 1890년대 초반, 연작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도한다. 그에게 연작은 빛의 변화에 대한 과학 탐구 같았다. 이 무렵, 유명한 <건초더미> 연작을 제작하며 색채 혼합 이론을 캔버스 위에 직접 실현했다.
그가 그린 30점 이상의 <건초더미> 연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1890년 겨울 지베르니에 있는 자신의 집 앞에 내린 석양 속에서 빛에 따라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건초더미를 그려 이듬해 완성한 그림이다.
이 작품은 2016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8145만달러(현재 환율로 911억원)에 낙찰되었다.[5] 연작을 통해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동일 사물에서 다채롭게 연주되는 색채 혼합의 교향곡을 체계적으로 탐구했다.
인상주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그림에서 몇 걸음 물러나야 한다. 그림에서 멀어질수록 혼란스러워 보이던 색점들이 제자리를 찾아 생기를 띠며 기적과 같이 아름다운 이미지로 변하기 때문이다.
당시 비평가들은 인상주의 그림을 감상하는 법을 몰랐다. 색채 혼합의 기적을 성취하고 화가가 경험한 시각적 환희를 관객에게 전달해주는 작업이 인상주의자들의 목표였다.[3]
모네의 <건초더미>(Meule) 1891년. 개인 소장
이렇게 감상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눈이 색채를 인식하는 원리 때문이다. 눈은 자연에서 대상이 갖는 고유한 색을 뒤섞어 훨씬 더 밝은 색조의 혼합으로 인식한다. 두 색이 배색되어 있을 때 두 색을 구분하지 않고 제3의 색으로 인지하는 현상을 ‘색채 동화’(color assimilation)라 한다.
예를 들어, 가까이에 있는 초록색과 노란색을 멀리서 보면 연두색으로 보이는 게 이 때문이다. 인접한 색이 서로 영향을 주어 전체 면적에서 각 색이 차지하는 비율에 따라 ‘병치 혼색’(juxtapositional mixture)이 일어난다. 컬러 사진은 세 가지 염료를 섞어 색상을 재현하고 텔레비전은 빛의 삼원색을 혼합하여 컬러 영상을 만든다.
사진과 텔레비전 화면을 확대해 보면 엄청나게 많은 세 가지 색점(픽셀)으로 이뤄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삼원색을 적절히 혼합하여 컬러를 재현하는 원리가 바로 병치 혼색에 의한 색채 동화다. 인상주의 회화에서 경험하는 색채 동화는 오늘날 첨단 디스플레이 소자에도 활용된다.[6]
인상주의 작품은 색채 혼합의 과학적 원리와 잘 맞는다.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투쟁은 힘겨웠지만 승리는 시간 문제였다. 모네는 승리의 결실을 만끽하며 전 유럽에서 유명세를 타고 존경을 받을 만큼 충분히 오래 살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주요 미술관에 전시되고 부자들이 탐내는 소장품이 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비평가들을 이긴 인상주의의 승리는 혁신의 예로 자주 회자된다.
모네는 끊임없는 자연 탐구와 실험적 연작을 통해 인상주의 작품의 아름다움을 입증했다. 1912년 백내장 진단을 받고 시력이 악화되는 상황에도 그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1923년 수술을 받고 자신감을 잠시 되찾은 동안 1925년 파리 뒬르리 공원에 있는 오랑주리 미술관의 거대한 수련 연작을 제작했으며 192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7]
그에게서 시작한 인상주의는 음악과 문학으로 이어졌고 고갱과 세잔에게 계승되어 후기 인상주의를 열며 현대 미술의 초석이 되었다. 예술과 과학의 만남은 새로운 혁신으로 안내한다.[8] 모네의 평생에 걸친 끈질긴 자연 탐구와 그림에 대한 열정은 예술가와 과학자 모두에게 훌륭한 귀감이다.
[참고 자료] [1] 프랭크 윌첵, <뷰티플 퀘스천>(흐름출판) [2] M. Kemp, Nature 453, 37 (2008) [3] E. 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예경) [4] https://nyti.ms/1thF06h [5] http://fw.to/I4eZgCF [6] 석현정 외, <빛의 공학>(사이언스북스) [7] J. G. Ravin, JAMA 254, 394-399 (1985) [8]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과학자의 생각법>(을유문화사) |
[출처] :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8.모네의 『인상, 해돋이』 - 모네와 색채 혼합 ,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마라 / 한겨레신문, 2018. 7. 12.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53105.html#csidx73e86ecbdeafa4d8c217bea74c9e573
9. 파울 클레 『호프만 이야기』
-파울 클레와 자기조립, 클레, 그림은 스스로 일어난다
클레는 그림을 그릴 때 처음엔 어떤 결과를 의도하지 않고 자유롭게 여러 형태를 서로 조합하며 새로운 형상이 저절로 발현되도록 기다렸다. 의미 있는 형상이 될 것 같으면 색채를 더해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그는 이렇게 작업하는 과정이 자연에 더 충실하다 믿었다. 처음에는 모호했던 형태가 작가의 개입으로 점차 의미 있는 형상으로 재조립되어 현실적 또는 환상적 주제로 재탄생했다.
파울 클레 <호프만 이야기>(Tale ? la Hoffmann). 1921년작.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2018 Artists Rights Society(ARS), New York
활기찬 뉴욕에 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동하는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 같다. 뉴욕 방문 동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뉴욕 현대미술관을 들렀다. 지난 1월 스위스 베른을 방문했을 때 스위스가 사랑하는 화가이자 음악가인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의 작품을 본 후로 그의 작품을 더 보고 싶었다. 그의 작품에서 생동감이 넘치는 이유를 찾고 싶었다.
클레는 1879년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나 음악가 부모 덕분에 일찍이 바이올린 연주를 배웠다. 음악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지만 19살 때 독일 뮌헨 미술학교에서 상징주의 대가인 프란츠 폰 슈투크를 만나 미술로 전향했다. 1912년 33살에 파리에서 접한 입체파 실험에 큰 감명을 받아 다양한 형태 실험에 몰두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의 영향으로 색채에도 눈을 떴다. 1921년부터 1931년까지 평생 친구였던 러시아 화가 칸딘스키와 함께 독일 바우하우스에서 교육과 작품 활동에 주력했다. 1931년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학교 교수가 되지만 예술의 자유를 억압했던 나치의 박해를 피해 1933년 스위스 베른으로 돌아온다.
1940년 61살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스위스에 머물며 일생 동안 9천 점이 넘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표현주의, 입체파, 초현실주의에 널리 걸쳐 있다.[1]
어린아이 같은 상상력과 음악의 조화
그의 작품 세계의 근원을 작품 몇 개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두 작품을 정해 조금이나마 살펴보려 한다. 첫번째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된 것으로 1921년 제작한 <호프만 이야기>(Tale ? la Hoffmann)이다. 전쟁에서 돌아온 후 채색으로 자신을 표현하려 애썼던 시절이다.
전쟁 전 그의 초기 작품은 무채색이 대부분인데, 그는 전쟁을 겪은 후 채색을 활용해 생명력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판지 위에 금속 호일로 테두리를 두르고 종이 위에 수채물감, 흑연, 인쇄용 잉크를 사용하여 제작했다.
이 그림은 독일 낭만주의 작가 에른스트 테오도어 아마데우스(E. T. A.) 호프만의 대표작 <황금단지>(The Golden Pot, 1814년작)의 줄거리를 모티브로 삼았다.
현실의 경계를 넘어 장르적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 <황금단지>는 낭만주의 중편 예술 동화에 속한다. 클레는 호프만을 좋아해 그에겐 ‘고스트 호프만'(호프만의 유령)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다.
그림 속 이야기는 독일 드레스덴을 배경으로 한다. 순진하고 가난한 대학생 안젤무스가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마술 세계로 빠져든다. 그는 마술 세계에 있는 백합 꽃향기 그윽한 나무 그늘에서 작은 뱀 세르펜티나의 매력에 사로잡힌다. 현실의 역경을 극복한 후 세르펜티나와 결혼하여 이상의 세계인 아틀란티스로 떠난다.
세르펜티나가 아틀란티스로 가져온 황금단지는 우주의 신비를 간직한 보물이었다. 클레는 그림 속 형상으로 이런 동화 이야기를 집약해 표현했다.
그림 왼편에 안젤무스가 처음으로 운명의 소리를 듣는 나무를 배치했고, 오른편에 주인공이 잠시 갇혀있던 유리병을 그렸다. 중앙엔 백합과 황금단지를 나타냈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스러운 상상력과 음악의 리듬을 타는 듯한 색채는 클레의 전체 작품을 관통하는 특징이다.[2]
파울 클레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전시>(Bauhaus Exhibition Weimar 1923).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2018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VG Bild-Kunst, Bonn
두번째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소장한 그림으로 클레가 1923년 바우하우스 전시회를 대중에게 소개하기 위해 만든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전시>(Bauhaus Exhibition Weimar 1923) 그림 엽서다.[3]
그는 동료인 칸딘스키와 함께했던 바우하우스의 삶을 즐겼다. 같은 스승에게 배운 칸딘스키와 사이가 좋아 추상화와 색채 탐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예술을 교육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여유도 있었다.
그가 전통적인 형태와 색상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바우하우스 시절 동안, 학교는 그의 예술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바우하우스는 디자인과 건축 분야에서 독일의 대표적인 전위적 예술 학교였다.
우수한 학생들과 학자들이 바우하우스를 찾았다. 색채 구성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추구하자는 생각이 당시 바우하우스에서 울려 퍼졌다. 사실 처음에 클레는 색을 사용하는 것에 약간의 두려움과 거부감이 있었다.[4]
그러던 그가 바우하우스의 분위기에 힘입어 그린 이 시기 그림들은 활기찬 유머를 발산하며 긍정적인 상징으로 가득하다. 1923년 바우하우스 최초의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교사와 학생이 직접 홍보용 엽서를 제작했는데 클레는 석판 인쇄로 제작한 엽서에서 기발한 생물들이 리듬감 있는 퍼레이드를 펼치는 형상을 재치 있게 표현했다.
클레는 일생 동안 예술적 자기 인식의 긴 과정을 거쳤다. 미술 재료를 다양하게 활용해 회화적 실험을 평생 수행하며 자기만의 예술을 천천히 강화시켰다. 그의 실험 정신은 9000점이 넘는 작품 속에 살아 있다.
그는 기존의 틀을 벗어나려 애썼다. 신문지, 판지, 천, 붕대 등을 캔버스 대신 썼으며 유채, 수채, 파스텔 등 다양한 미술 재료를 자유롭게 활용해 작업하길 좋아했다. 그가 활용한 재료는 일상에서 비교적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클레는 어떻게 작품 속에 생동감을 불어 넣었을까?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처음엔 어떤 결과를 의도하지 않고 자유롭게 여러 형태를 서로 조합하며 새로운 형상이 저절로 발현되도록 기다렸다. 의미 있는 형상이 될 것 같으면 색채를 더해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그는 이렇게 작업하는 과정이 자연에 더 충실하다 믿었다.
낙서처럼 시작한 그림이 자연적으로 나름대로의 법칙을 따라 성장하여 생동하는 형상이 되었다. 처음에는 모호했던 형태가 작가의 개입으로 점차 의미 있는 형상으로 재조립되어 현실적 또는 환상적 주제로 재탄생했다. 그는 예술 사조나 재료의 경계에 머물지 않고 이렇게 다양한 실험을 즐겼다. 그의 예술 실험은 다작의 원천이었다.
생동감의 근원, 자기조립
클레의 예술 실험은 분자를 조립하여 유용한 물질을 합성하는 과학 실험의 접근 방법과 비슷하다. 생체 분자를 적절히 조합해 생명의 근원을 밝히고 새로운 인공 생명체를 만들겠다는 현대 과학의 ‘합성생물학’이 연상된다.
최근 개발된 유전자 가위 기술이 생물학과 의학의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 기대하지만 과학은 아직 분자를 조립해 생명을 합성하지 못한다. 클레는 예술 작품에서 형태와 색상을 조립해 대상을 살아 있게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
과학에서 물질을 합성할 때 ‘자기조립’(Self-assembly)이라는 원리를 활용한다. 사물을 구성하는 분자는 저절로 특정한 나노 구조를 형성한다. 실제 자연에서 생명체가 만들어지는 방식도 자기조립 과정이다. 클레의 작품에서도 처음의 무의미한 형태와 색채가 점차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생명력을 가진 대상으로 되살아난다.
클레는 현실의 장벽을 넘어 아이와 같은 천진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길 좋아했다. 그는 형태의 자발적 조립과 채색의 생동감을 중시했다. 그에게 색은 생명을 의미한다. 색은 어둠과 싸우는 활기찬 에너지다. 분자가 스스로 조립해 생명체를 형성하듯 선과 색이 어우러져 생명력을 가진 생명체로 재조립된다. 클레 작품에서 생동감이 가득한 이유는 스스로 조립하는 생명 형성의 원리가 그의 그림에서 작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참고 자료] [1] E. 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예경) [2]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483143 [3] 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67177 [4] P. Ball, Nature 425, 904 (2003) |
[출처] :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 9. 파울 클레 『호프만 이야기』 -파울 클레와 자기조립, 클레, 그림은 스스로 일어난다 / 한겨레신문, 2018. 8. 9.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57012.html#csidx094c4cbfa4f5c059ef9be579f38a4d2
10.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1447년)
- 수묵화와 스며들기, 우리는 아직 스며듦을 모른다
종이와 실크에 먹물이 마르고 스며드는 물리적 현상은 현대 과학에서 다공성 소재를 개발하는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다공성 소재는 기공이 많아 유체 이동이 수월하고 재질에 따라 가볍고 단단하여 필터, 센서, 전기화학, 생체소재, 전자소재 등 첨단 소재로 각광받고 있다.
오랜 세월 섬세하고 아름다운 먹물의 스며듦을 간직한 수묵화의 과학이 다공성 소재에 세밀하고 안정적으로 인쇄하는 기술을 찾고자 하는 현대인에게 실마리를 줄 수 있다.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1447년). 일본 덴리대학교 도서관 소장
예술은 물질을 통해 실현된다. 물질은 작가의 예술을 현실로 가져와 현실의 세계에서 관객과 만나게 하는 매개체다. 물질을 통해 예술이 실현될 때, 우리는 비로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물질은 예술을 이해하는 좋은 출발점이다. 동양의 회화 예술은 매우 역사가 깊고 다양하다. 그중 물질의 역할이 중요한 수묵화(水墨?) 예술을 살펴보고자 한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수묵화는 종이나 실크 위에 인쇄된 탄소 기반의 잉크 예술이다. 수묵화는 물과 먹으로 그린다. 수묵화의 ‘묵'(墨)은 우리말로 ‘먹’이다. 먹의 성분은 흑연이다. 천연 광물인 석묵을 물에 녹여 옻칠을 섞은 것이 먹의 시초이다. 현재는 탄소 분말에 아교액을 섞어 단단한 먹을 만든다. 먹물은 천연 잉크라 할 수 있다.
벼루에 정성 들여 곱게 갈린 검은 먹물은 붓에 담겨 종이 위로 옮겨진다. 작가의 섬세한 필치에 의해 먹물은 종이 위에 형태를 갖추고 스며들고 마르며 작품이 된다. 수묵화는 물과 먹이 만드는 먹물의 물성, 전달자로서 붓의 물성, 종착점으로서 종이의 물성이 만드는 종합 예술이다.
먹물이 종이 위에서 마르고 스며드는 현상은 오롯이 물리적 작용이다. 이 상황을 좀 더 단순하게 고찰해보자. 물방울이 종이 위에 떨어지면 종이의 수많은 기공 안으로 스며들면서 서서히 마른다. 이때 먹물이 종이에 스며드는 작용이 매우 중요하다. 물이 빨리 마르면 스며드는 양이 적고, 늦게 마르면 너무 넓게 스며든다.
얼핏 보면 마르는 작용과 스며드는 작용이 경쟁하는 것 같지만 사실 두 작용의 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스며드는 과정이 마르는 속도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 관계는 전적으로 종이와 먹물의 물성에 달려 있다.
작가는 물성에 따른 현상과 결과를 매우 정교하게 제어한다. 수묵화는 먹물의 스며드는 정도에 따라 진하거나 연하게 표현된다. 먹물의 마르고 스며드는 물리적 작용만으로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다.
동양의 종이와 먹 기술은 역사가 깊다. 종이는 105년 중국 후한 시대 사람 채륜(蔡倫)이 나무껍질, 마, 창포, 어망 등 식물 섬유를 원료로 최초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후 그 이전 시대 사료들이 발견되면서 채륜이 기존의 종이 제작 기술을 개량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6세기경 당과 활발하게 교류했던 신라 시대에 먹, 붓, 종이 기술이 전해졌고, 610년 담징이 일본에 전했다고 한다. 종이는 곰팡이나 물에 닿으면 소실될 우려가 있다. 아주 오래된 수묵화 작품은 대체로 실크에 그려진 것들이다. 실크는 누에의 고치로부터 얻은 천연 단백질 섬유로서 종이보다 훨씬 안정적인 재료이다.
실크의 치밀하고 부드러운 섬유 조직은 종이의 조직보다 오래간다. 기공이 많은 실크에서는 먹물의 스며듦이 종이보다 빨라 섬세한 붓 작업이 필요하다.
서양미술사를 집대성한 20세기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동양의 수묵화에 깊은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저서에서 수묵으로 그린 12~13세기 중국의 산수화를 두고, “실크 두루마리에 그린 그림은 아름다운 상자 속에 보관되었다가 조용한 시간에 꺼내어 마치 시집을 들고 아름다운 시를 음미하듯 펼쳐서 감상하거나 음미하는” 위대한 걸작이라 했다.[1]
빨라도, 늦어도 안 된다
수묵화의 대표 작품으로 살펴볼 작품은 조선 초기 안견(安堅, 생몰년 미상)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1447년)다. <몽유도원도>는 안견 자신만이 아니라 조선 전기 예술 전체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조선 전기 작품이 매우 드문데, 이 그림은 거의 완벽한 상태로 보존됐다.
1447년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초여름 밤 꿈속에서 도원(桃源)의 풍경을 보고 감탄하여 안견에게 전했고, 안견은 들은 내용을 사흘 만에 그림으로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림 속 도원은 이상적인 정치를 꿈꾸던 안평대군의 비전을 담은 가상의 공간이다.
안견의 그림은 중국 최고의 수묵 산수화가로 알려진 북송 사람 곽희(郭熙)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다. 북송 시기는 채색 없이 먹물만으로 절제된 표현을 선호했던 수묵 산수화가 전성을 이룬 시대였다.
안견은 조선 세종과 문종 전후에 주로 활약했던 화가로 안평대군을 가까이 섬기며 그가 소장한 고화들을 섭렵하면서 자신의 화풍을 완성했다. 그의 화풍을 북송의 곽희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나름의 독특한 양식을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대상이 흩어진 듯 조화를 이루고 확대 지향적인 공간 개념과 변화가 큰 필법 등이 그의 그림의 특징이다.[2]
그림을 살펴보자. 일반적인 두루마리 그림과 달리 현실의 세계가 왼쪽에서 시작하여 꿈속의 도원이 오른쪽에 그려져 있다. 그림 중간 부분은 현실과 꿈속이 이어지며 동굴을 빠져나와 계곡으로 이르는 공간을 나타낸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폭포를 지나 절벽 위 복사꽃이 만발한 도원에 닿아 있으며, 오른쪽 맨 위에 아담하고 평화로운 초막 같은 건물이 보인다.
현실과 꿈속을 구별하기 위해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다시점(多視點) 화법이 쓰였다. 현실 세계의 왼쪽 풍경은 앞에서 바라보지만 오른쪽 꿈속의 도원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俯瞰法)이 사용되어 꿈의 몽환적 느낌을 강조했다.
한 두루마리에 여러 시점과 다양한 대상을 그리면서도 수묵으로 아주 섬세하게 풍경을 묘사했다. 현실과 꿈의 세계가 하나의 이야기로 조화를 이루며 마치 판타지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 안평대군은 이상적 세계로서의 도원을 꿈꿨고 안견은 그의 이상을 담백하면서도 웅대한 수묵화로 표현했다.
채색 없이 수묵의 묵직한 느낌으로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걸작이지만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현재 일본 덴리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중요한 과학 연구 주제, 스며듦
수묵화의 가장 중요한 형식 요소는 선이다. 붓으로 다양한 굵기와 명암의 획을 표현할 수 있으며 이것으로 수많은 다양한 표현을 창조한다. 먹물의 스며듦은 붓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선의 특성을 결정한다. <몽유도원도>에는 수묵화에서 스며듦에 의한 선의 효과가 매우 잘 나타나 있다.
먹의 스며듦을 섬세하게 제어하여 바위와 복사꽃 등 사물의 윤곽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실크에는 먹물이 빠르게 스며들기 때문에 붓을 가볍고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또한 먹물의 스며드는 정도에 단계적 차이를 두어 가파른 절벽의 명암을 적절히 조절하여 입체감과 원근감을 나타냈다.
당시 동양의 화가들은 자연을 직접 관찰하며 사생하기보다는 대가의 작품을 먼저 보고 탐구하며 나름의 명상과 정신 집중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렇게 기법을 완전히 터득한 후에야 자연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깊이 마음에 새겨 집으로 돌아와 마치 시인이 산책하다가 머리에 떠오른 여러 이미지를 짜맞추어 시를 쓰듯 떠오른 이미지를 결합해 그림을 완성했다.
실크 두루마리 위에 그림과 시가 자주 어우러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는 예술적 영감이 생생히 살아 있을 때 머리에 떠오른 이미지를 붓과 먹으로 단숨에 그려냈다.[1]
한 편의 아름다운 수묵화가 완성되려면 작가의 신속하고 능란한 필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수묵화 기법이 작품 완성에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가능하다. 먹물이 실크에 마르고 스며드는 시간은 비교적 짧다. 짧은 순간에 떠오르는 모든 이미지를 한꺼번에 신속히 그려 넣어야 한다.
일단 다 그린 그림에 덧칠하면 획의 느낌이 확 달라진다. 페인트를 칠할 때 한꺼번에 칠하는 것이 좋은 이유와 같다. 안견이 <몽유도원도> 같은 대작을 사흘 만에 그린 것도 빠르게 스며드는 잉크의 과학적 원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종이와 실크에 먹물이 마르고 스며드는 물리적 현상은 현대 과학에서 다공성 소재를 개발하는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다. 다공성 소재는 기공이 많아 유체 이동이 수월하고 재질에 따라 가볍고 단단하여 필터, 센서, 전기화학, 생체소재, 전자소재 등 첨단 소재로 각광받고 있다. 나노잉크를 탑재한 잉크젯 프린터로 다공성 소재에 기능성 물질을 인쇄하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그런데 소량의 잉크 방울을 다공성 소재에 인쇄할 때 잉크가 마르고 스며드는 현상이 매우 빠르게 일어나 정밀하게 조절하는 것이 어렵다. 오랜 세월 섬세하고 아름다운 먹물의 스며듦을 간직한 수묵화의 과학이 다공성 소재에 세밀하고 안정적으로 인쇄하는 기술을 찾고자 하는 현대인에게 실마리를 줄 수 있다.[3]-[6]
안견은 먹물이 실크에 스며드는 물리적 현상을 섬세하게 조절하여 수묵으로 꿈과 이상의 세계를 실크에 담아냈으며 수백 년이 넘도록 그 섬세함이 살아 있는 위대한 걸작을 남겼다. 현대 과학이 수묵화의 오랜 지혜를 배울 수 있다면 좋겠다.
[출처] :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 10.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1447년) - 수묵화와 스며들기, 우리는 아직 스며듦을 모른다 / 한겨레신문, 2018. 9. 6.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61062.html#csidxf5d53b14b49a25897f362be8456a875
11.커피 얼룩과 잉크젯 인쇄 - 커피 얼룩에 첨단 기술의 난제가 숨어 있다
최근 제품의 규모가 큰 디스플레이 소자는 제작 비용을 낮추기 위해 진공이 필요 없는 잉크젯 인쇄법으로 제작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잉크 방울이 마르면서 고르지 못한 얼룩이 생긴다는 점이다.
바로 커피 얼룩 현상이다. 잉크젯에서 커피 얼룩 효과를 제거해야 한다는 필요가 지난해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 유연인쇄전자 학회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었다. 과학자들은 그 해답을 찾는 중이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 학림다방의 커피.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과학자에게 커피는 비밀로 가득한 경이로운 물질이다. 커피는 그 자체로 예술이지만 매우 중요한 과학 원리가 숨어 있다. 커피 입자와 뜨거운 물이 마주할 때 발생하는 다양한 화학 반응과 물리 현상은 커피의 맛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독특한 커피 얼룩을 남긴다. 오늘은 첨단 잉크젯 인쇄 기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커피 얼룩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 커피 얼룩은 왜 반지 모양일까
뜨거웠던 지난 여름 한 강연에서 커피 얼룩을 주제로 예술과 과학의 관계를 설명한 적이 있다. 호기심 가득한 청중에게 간단한 과학 실험을 해볼 거라 예고를 하고 과학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간단한 실험 도구를 준비했다. 우선 청중 각자에게 스케치북 종이와 현미경에 사용되는 작은 유리판을 나눠줬다.
그 뒤에 방금 사온 따끈한 블랙 커피를 한 방울씩 스케치북과 유리판 위에 살포시 떨어뜨렸다. 커피가 마르는 동안, 아무 것도 넣지 않은 커피 용액 안에 천 가지가 넘는 화학 물질이 뜨거운 물과 반응하여 복잡한 화학 반응과 물리 현상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강연이 끝나갈 무렵 유리와 종이 위에 떨어뜨린 커피 방울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살펴봤다.
놀랍게도 작은 커피 방울은 대개 동그란 모양으로 말랐지만, 큰 방울은 저마다 독특한 얼룩을 새겨 놓았다. 다들 신기하다는 표정이다. 실험에 참여한 청중의 표정은 마치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아이의 표정과 비슷했다.
그림 1. 유리 위에 새겨진 동그란 반지 모양의 커피 얼룩. 원병묵 제공
그림 1이 실제 그 실험에서 진한 커피와 연한 커피를 각각 한 방울씩 유리판 위에 떨어뜨려 얻은 커피 얼룩이다. 진한 커피는 커피 함량이 약 1%고 연한 커피는 0.1%다. 물을 섞지 않은 에스프레소의 커피 농도가 약 5%다. 실제로 이번 시연에 사용한 진한 커피는 평소 우리가 즐겨 마시는 커피다.
커피 방울이 다 마르면 그림과 같이 커피 얼룩이 가장자리에 동그랗게 남는다. 동그란 반지 모양을 닮아서 ‘커피 반지’라 부르기도 한다. 커피 얼룩이 반지 모양이 되려면 커피 방울이 놓인 표면이 평평하고 커피 방울 크기가 일정 크기보다 작아야 한다.
물방울은 표면을 동그랗게 만들려는 표면장력과 납작하게 만들려는 중력이 경쟁하는데 크기가 작을수록 표면장력 효과가 강하고 클수록 중력 효과가 크다. 그래서 약 2.7㎜보다 작은 물방울은 항상 동그란 모양을 가진다.
커피 얼룩 현상은 아주 보편적인 현상으로, 커피가 아닌 먹이나 물감을 사용해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과학자의 관점에서 미술 작품은 물감으로 그린 커피 얼룩 현상의 결과라 할 수 있다.
1997년 시카고대학 물리학과 연구팀은 커피 얼룩 현상의 원리를 처음으로 설명했다. 당시 박사과정생이었던 로버트 디건(Robert Deegan, 현 미시건대학 교수)은 지도교수인 시드니 네이걸(Sydney Nagel)과 함께 획기적인 설명을 제안했다. 공중에 떠 있는 동그란 물방울은 마르면서 액체의 물분자가 공기 속으로 균일하게 빠져 나간다.
이때 액체는 기체로 확산하면서 증발한다. 전자기학을 연구했던 물리학자 맥스웰은 기체 확산에 의한 물방울의 증발 원리도 알아냈다. 커피 얼룩도 맥스웰 원리를 따른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커피 방울의 모양이다. 물방울은 공중에 떠 있으면 구형인데 평평한 표면 위에 놓이면 가운데가 볼록한 모자 형태가 된다.
흥미롭게도 볼록한 중앙보다 납작한 가장자리가 단위 부피당 표면적이 넓다. 그래서 물분자가 가장자리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워 가장자리의 증발 속도가 중앙보다 빠르다. 이렇게 되면 커피 방울 안에서는 중앙에서 가장자리를 향한 흐름이 발생한다. 이 흐름을 따라 커피 입자가 가장자리로 이동하여 쌓이고 결국 반지 모양처럼 가장자리에 진한 커피 얼룩이 남는다.
# 디스플레이에서 커피 얼룩 효과를 제거하라
커피 얼룩은 그저 재미있는 현상에 머물지 않는다. 커피 얼룩 효과를 처음 보고한 1997년 과학저널 <네이처> 논문은 지금까지 구글 스콜라 기준 4527회나 인용되었다.[1] 올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연구 업적의 대표 논문이 4500여 회 인용된 것을 보면 커피 얼룩 논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논문이 규명한 현상엔 중요한 현대 과학의 난제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전자소자는 진공에서 원자를 쌓는 증착 기술로 제작한다. 제품의 규모가 큰 디스플레이 소자는 제작 비용을 낮추기 위해 진공이 필요 없는 잉크젯 인쇄법으로 제작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잉크 방울이 마르면서 고르지 못한 얼룩이 생긴다는 점이다. 바로 커피 얼룩 현상이다.[2]
잉크 얼룩이 생기면 소자는 제 기능을 못한다. 아무리 잉크 성능이 좋아도 소자로 만들 수 없다. 자연 현상을 거스를 수 없으니 당연히 기술적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잉크젯에서 커피 얼룩 효과를 제거해야 한다는 필요가 지난해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 유연인쇄전자 학회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었다. 과학자들은 그 해답을 찾는 중이다. 모든 문제에 대해 과학이 늘 만족할 만한 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림 2. 위의 동그란 사진은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인스턴트 커피의 입자 모양이다. 원두와 제조 방법에 따라 다양한 모양이 존재한다. 아래의 표는 레이저 산란법으로 관찰한 세 종류 인스턴트 커피의 입자 크기 분포를 나타낸 것이다.
인스턴트 커피 안에 10~100마이크로미터와 0.1마이크로미터(100 나노미터) 크기의 입자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병묵 제공
과학자인 나는 우선 커피 입자의 본질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먼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인스턴트 커피를 구입했다. 전자현미경과 레이저 산란법을 이용하여 커피 입자의 모양과 크기 분포를 각각 살펴봤다. 커피 입자 분석은 우리 연구실 김진영 학생의 도움을 받았다.
그림 2에서 보듯 커피 입자는 대부분 마이크로미터에서 나노미터 크기의 아주 미세한 입자다. 볶은 원두는 분쇄·추출·혼합·건조 공정에 따라 다양한 모양과 크기를 갖는다. 커피 입자는 뜨거운 물에 잘 녹는다. 완벽하게 녹지 않지만 대부분 물에 잘 녹거나 아주 미세한 나노입자는 물과 함께 여과지를 잘 통과한다. 커피 입자의 복잡성을 볼 때 커피 용액의 물성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최근 내가 진행한 한 연구에서 진한 커피 방울이 마를 때 순수한 물방울과 어떻게 다른지 분석했다. 가장 흥미로운 결과는 순수한 물에 비해 커피가 들어간 용액의 증발 속도가 현저히 느리다는 사실이다. 증발 과정에서 물에 남아 있는 커피의 양에 따라 증발 속도와 증착 균일도가 달라진다.[3]
이 결과는 미술 작품에서 물감의 농도에 따라 마르는 속도와 채색의 균일도가 달라지는 것과 유사하다. 회화 작품에서 커피 얼룩과 비슷한 물감의 흔적을 종종 찾을 수 있는데 농도가 짙은 그림일수록 채색이 균일한 결과를 볼 수 있다. 채색이 균일한 그림을 그리려면 농도가 짙은 것이 유리하다.
진한 커피 연구로부터 얻은 과학 지식으로 먹과 물감으로 그린 동서양의 미술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아이디어 전개 과정을 다 기록하기는 어렵지만 예술에 대한 탐구가 과학의 돌파구를 발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최근 섬유에 떨어진 커피 방울이 만드는 얼룩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커피가 옷에 묻으면 되도록 빨리 없애야
한다. 따뜻한 물과 탄산수가 도움이 된다. 식초를 한 두 방울 넣어도 좋다.
푹 담가 두었다가 헹구면 좀 더 깨끗하게 얼룩을 없앨 수 있다. 비단에 새겨진 수묵화가 오랜 세월을 견디는 것처럼 일정 시간이 지나면 커피 얼룩은 꽤 단단히 섬유에 고정된다. 수묵화의 비밀이 새로운 첨단 의류 기술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한다. 예술과 과학은 서로 맞닿아 있다.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참고 자료] [1] R. D. Deegan, et al. Nature 389, 827-829 (1997). [2] B. M. Weon and J. H. Je, Phys. Rev. E 82, 015305 (2010). [3] J. Y. Kim and B. M. Weon, Appl. Phys. Lett. (출판 예정) |
[출처] :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 11.커피 얼룩과 잉크젯 인쇄 - 커피 얼룩에 첨단 기술의 난제가 숨어 있다 / 한겨레신문, 2018. 10. 12.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865545.html#csidxfb6d02701419794885070518883d30b
12.백남준의 『다다익선 The more the better』(1988년)
- 백남준과 브라운관 ,백남준은 왜 텔레비전으로 작업했을까
젊은 백남준에게 브라운관은 상업화된 문화의 상징이며 비인간화된 기술을 풍자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매체였다. 다만 예술가로서 과학과 기술을 섭렵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젊은 그는 물리학과 전자공학에 그의 재능을 기꺼이 할애하기로 결심하고 비디오 전문가 슈야 아베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나 기술자와 협업하며 자신의 예술적 지평을 확장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 그는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나 도쿄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현대 음악을 전공했고 1958년 현대 음악가 존 케이지의 공연을 접하며 실험적 예술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1961년부터 조지 머추너스와 조지프 보이스와 함께 ‘플렉서스’ 운동을 주도했다. 라틴어로 ‘흐름’을 뜻하는 플렉서스는 예술의 사유화와 상업화에 반대하여 작품과 작가의 삶을 공유하는 예술 운동으로 “목적이 없는 자유와 실험을 위한 실험”을 추구했다.
백남준은 1960년대 초반 독일 가정에 보급된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작품의 매체로 착안하여 음악과 비디오를 결합한 새로운 미디어 아트를 개척했다. 1964년 뉴욕으로 이주 후 2006년 사망할 때까지 그는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1,2]
미디어 아트, 예술의 본질을 묻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면 로비를 지나 전시관으로 안내하는 램프코어 공간에서 거대한 브라운관 탑을 볼 수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념해 1003개의 모니터를 5층 높이로 쌓아 설치한 거대한 작품 <다다익선>이다.
실제 설계와 설치는 건축가와 공학자의 도움을 받았다. 현대 미디어 아트를 대표하는 <다다익선>은 2003년 브라운관을 전면 교체하는 대대적인 보수에도 불구하고 브라운관 노후와 안전 문제로 현재 가동이 중단되었다.
브라운관 수명 문제는 브라운관 산업의 역사와 직결된다. 나는 한 전자회사에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브라운관 성능과 수명을 결정하는 핵심 부품인 산화물 음극 개발에 참여했었다. 독일 물리학자 아르투어 베넬트가 1904년 개발한 산화물 음극은 대표적인 전자빔 발생 장치로서 대부분 브라운관에 탑재되어 있다.[3]
전자빔이 화면에 도달하면 화면에 도포된 형광 물질과 반응하여 색채를 재현한다. 전자빔이 화면까지 도달하는 궤적은 전자석으로 정교하게 조정한다. 이것이 브라운관의 기본 원리다. 브라운관이 볼록한 이유는 전자석이 전자빔을 휠 충분한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브라운관 성능과 수명은 산화물 음극과 브라운관 진공도가 결정한다. 전자는 공기 분자와 부딪혀 산란이 쉽게 일어나기 때문에, 브라운관은 높은 진공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브라운관의 가격과 성능 경쟁력을 동시에 높이려면 값싼 재료로 더 높은 성능을 얻어야 했는데 이는 수명에 불리했다. 난 성능을 극대화한 산화물 음극을 개발하면서 브라운관 수명을 예측하는 수학 모델도 함께 개발했다.[4]
나는 브라운관 기술 개발의 마지막 세대였다. 액정 소자나 유기 발광 소자 등 고성능 미디어 소자가 등장하면서 브라운관 산업은 퇴보를 거듭해 기술 개발과 생산이 중단되고 결국 시장에서 점차 사라졌다. 초기 미디어 아트 작품에 사용하는 브라운관 모니터도 대부분 단종될 수밖에 없었다.
백남준의 <다다익선>(The more the better). 1988년 작.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그의 대표작 <다다익선>은 예술 작품의 탄생과 죽음에 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브라운관은 소모성 매체로서 10년에서 15년 정도의 수명을 다하면 기능을 멈춘다. 미디어 아트의 숙명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미술계에선 이미 단종된 브라운관을 계속 사들여 보수하거나, 다른 현대적 미디어 매체로 교체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미디어 아트는 원래부터 수명이 고정된 전자 매체를 탑재한 작품이기에 액정 소자 등 다른 모니터로 바꾸는 것이 작품의 정체성을 훼손한다는 미술계의 반론도 나오고 있다. 미디어 아트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미술계에서도 고민하는 문제다.
본질적으로 작품 설치와 해체는 미디어 아트가 풀어야 할 필연의 질문이다. 지난달 익명의 예술가로 활동하는 뱅크시는 자신의 작품이 경매에서 낙찰된 직후 미리 설치한 분쇄 장치를 원격으로 작동시켜 자신의 작품을 훼손하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감행했다. 예술의 상업화에 맞선 그의 의도적인 훼손은 우리에게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는다.
백남준의 <삼원소>(Three elements). 2000년 작. 백남준 아트센터 소장
백남준, 예술과 과학을 이어준 모험가
백남준에 대한 과학계의 평가는 어떨까. 과학 저널 <네이처>는 그의 작품에 대해 2000년과 2005년 두 편의 사설을 실었다.[1, 2] 둘 다 예술 역사가 마틴 켐프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교수가 기고했으며 2000년 구겐하임 미술관에 설치됐던 (현재는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소장한) <삼원소>에 관한 작품 해설과 평가다. 백남준이 레이저 전문가인 노먼 밸러드와 협업한 미디어 작품 <삼원소>는 물, 불, 흙을 상징하는 삼각형, 원형, 사각형의 세 기하학적 형상으로 구성돼 있다. 레이저, 거울, 프리즘, 모터, 연기를 활용해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현대 물리학 기술을 활용하여 고대 원형을 우주의 무한 공간으로 확장한 작품이다. 새천년을 맞는 인류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다.
켐프는 이 작품에서 백남준 예술의 핵심을 “예술과 과학의 접목으로 완성한 종합 예술”이라고 봤다. 특히 백남준은 브라운관을 자신의 캔버스로 사용해 기존 예술의 한계를 과감히 뛰어넘었다고 평가했다. 그로 인해 백남준의 예술은 캔버스의 공간적 한계를 벗어나 “레오나르도처럼 정확하게, 피카소처럼 자유롭게, 르누아르처럼 다채롭게, 몬드리안처럼 심오하게, 잭슨 폴록처럼 격렬하게, 재스퍼 존스처럼 서정적으로” 대상을 표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젊은 백남준에게 브라운관은 상업화된 문화의 상징이며 비인간화된 기술을 풍자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매체였다. 다만 예술가로서 과학과 기술을 섭렵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젊은 그는 물리학과 전자공학에 그의 재능을 기꺼이 할애하기로 결심하고 비디오 전문가 슈야 아베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나 기술자와 협업하며 자신의 예술적 지평을 확장했다. 그는 브라운관 기술에도 능숙해져 자석을 사용하여 화면의 구성을 오실로스코프 파동과 유사한 특이한 기하학 모양으로 바꾸기도 할 정도였다. 그는 예술과 과학의 협업을 완성한 진정한 모험가였다.
켐프는 “예술과 과학은 자연에 대한 직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자연에 대한 깊은 탐구는 예술과 과학 모두에게 유익하다. 과학에 대한 심오한 상상력을 가진 예술가와 진실하고 아름다운 것을 찾는 데 창조적 본능을 사용하는 과학자는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백남준의 <삼원소>에서 이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 작품은 단순한 형상 내부에서 레이저의 끝없는 리바운드를 통해 무한의 우주 영역에 도달한다. 우주에서의 빛에 대한 그의 시각화는 물리학자와 천문학자에게 매우 친숙한 주제이다. 예술가와 과학자가 직관적으로 발견하는 자연 속의 흐름과 패턴은 수없이 많다. 난기류나 자기조직화 형상, 물방울의 복잡한 움직임 등 자연과 물질에 내재한 수학적 본질과 아름다움은 예술과 과학을 하나로 이어준다. 자연에 대한 깊은 탐구는 예술과 과학 사이의 대화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동안 연재에서 예술과 과학의 관계를 잇는 일은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았다. 둘 사이에서 너무 조심스럽기도, 때론 너무 과감하기도 했다. 과학자로서 예술을 해석하는 작업은 용기가 필요한 모험이었다. 연재를 마치며 과학과 예술이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서로에게 다가가면 좋겠다는 바람이 남는다. 예술과 과학 둘 사이에 작은 파동을 일으켜 반응을 촉진할 수 있다면 이 모험이 절대 헛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끝>
[참고 자료] [1] M. Kemp, Nature 404, 546 (2000) [2] M. Kemp, Nature 434, 308-309 (2005) [3] G. Gaertner and D. den Engelsen, Applied Surface Science 251, 24-30 (2005) [4] B. M. Weon and J. H. Je, Applied Surface Science 251, 59-63 (2005) |
[출처] : 원병묵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 12.백남준의 『다다익선 The more the better』(1988년) - 백남준과 브라운관 ,백남준은 왜 텔레비전으로 작업했을까 / 한겨레신문, 2018. 11. 9.
[출처] 『원병묵의 물질로 읽는 예술』 Ⅱ - ▣마르크 샤갈과 스테인드글라스▣모네와 색채 혼합▣파울 클레와 자기조립▣안견- 수묵화와 스며들기▣커피 얼룩과 잉크젯 인쇄▣백남준과 브라운관|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