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데스몬드 투투 명예 대주교 善終(선종)
※ 남아공 인권운동의 지도자 투투 대주교 26일 90세의일기로 善終(선종)하였다.투투대주교는 반 아파르 헤이트 투쟁으로
198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남아공 인권운동의 代父(대부)로 전세계인은 애도의뜻을 표하였다
데스몬드 투투는 폭력에 항거하고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 공로로 198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1975년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요하네스버그 세인트메리 대성당의 주교가 되었고, 이후 케이프타운의 대주교로 활동했다. 흑인정부가 들어선 이후 흑인과 백인, 그리고 모든 남아공 인종집단의 평화적 공존을 위해 ‘무지개 국가(Rainbow Nation)’를 주창하며 화해와 공존을 역설했다.
그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RC)’의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남아공의 불행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 억눌리고 차별받는 사람들 편에 서서 고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평화의 상징이자 세계적인 원로의 한 사람으로서 존경받고 있다.
어머니에게 인사하는 백인 신부를 보고 충격을 받다
데스몬드 투투는 1931년 10월 7일 현재의 노스웨스트 주인 트란스발의 클레르크스도르프에서 젝커라이어 질로 투투(Zacheriah Zililo Tutu)와 알레타 투투(Aletta Tutu)의 네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세 명의 형제는 모두 여자였으며 그가 유일한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클레르크스도르프 선교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교사였고 어머니는 가정부로 일을 했다.
그가 8세 때 그의 아버지는 펜터스도르프에 있는 학교에서 근무를 했다. 그 학교는 아프리카인, 인도인, 컬러드(Coloured)2) 등 여러 인종집단이 모여 있었는데 데스몬드 투투는 이때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여러 친구들과 폭넓은 교류를 했다. 투투는 이 때 감리교 세례를 받았으나 1943년에 모든 가족이 성공회 신자가 되었다.
‘컬러드(Coloured)’란 남아공의 혼혈 인종이며, 이주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이다. 이후 백인과 말레이시아인 등 다양한 인종 간의 결혼으로도 생겨났다.
투투의 가족은 그가 12살 되던 해 트란스발에서 요하네스버그로 이사했다. 이 당시 그는 결핵을 앓아 거의 1년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영국 교구에서 파견 나온 백인 신부 트레버 허들스톤(Trevor Huddleston)을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하루는 그가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 신부 옷을 입은 백인이 지나가다 자신의 어머니에게 모자를 벗어 인사하는 것을 보고 믿을 수 없었노라고 훗날 고백했다. 백인이 흑인 여성 노동자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신부는 데스몬드 투투에게 책을 읽어주었으며 둘은 더욱 친한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후에 투투는 멘스빌에 있는 신부의 교구 교회에서 시중을 드는 복사(服事)가 된다. 비록 병으로 인해 학교 성적이 좋지는 않았지만 교장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대학입학자격시험을 볼 수 있는 학급에 넣어 주었다. 이후 그는 공부에만 전념했고 1950년대 말 시험에 합격했다.
투투는 의과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장학금을 받을 수 없었다. 자신의 가정 형편으로는 자비로 의사 교육을 받을 수 없었기에 결국 그는 아버지와 같은 교사의 길을 가게 되었다.
요하네스버그 근처의 흑인 거주지역인 소웨토 <출처: (cc) Medpro at Wikimedia.org>
가난으로 의대를 포기하고 성직자의 길을 가다
그는 1951년 프리토리아 외곽에 있는 반투노말 대학에서 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1954년에 교사 자격증을 획득하고 요하네스버그의 반투 고등학교와 모개을 시에 있는 문시빌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1955년에는 남아프리카 대학3)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때 그를 도왔던 사람 중 한 명이 후에 범아프리카회의 의장을 지낸 로버트 소부퀘(Robert Mangaliso Sobukwe)4)였다. 그러나 투투는 인종차별적인 반투 교육법(Bantu Education Act)을 실시하려는 남아공 백인 정부의 새로운 교육정책에 반대하여 사직을 하게 된다.
문시빌에 있는 동안 고심 끝에 성직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그는 1955년 크루거스도르프에서 부제의 보조가 된다. 1958년에는 세인트 피터스 신학대학에 입학하고 이곳에서 매우 훌륭한 학생이란 평판을 얻게 된다. 1960년 12월 이 대학에서 부제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베노니 지역의 세인트 올번스 교회에서 사제로 첫발을 내디뎠다.
포트하레 대학 캠퍼스 <출처: (cc) Lysippos at Wikimedia.org>
투투는 1962년 9월에 신학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런던으로 갔다. 그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의 장학금을 받아 영국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런던의 유학생활은 억압적인 아파르트헤이트에서 해방된 투투와 그의 가족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는 영국 런던의 킹스칼리지(King's College London)에서 1966년까지 신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는다.
데스몬드 투투는 남아공의 신학교육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영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남아공에 돌아온 그는 이스턴 케이프 주의 앨리스에 있는 연방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67년에는 포트하레 대학교(University of Fort Hare)의 신부로 임명되었다. 앨리스에 있는 동안 박사학위 공부를 시작했으나 마치지는 못했다. 또한 1970년에서 1972년까지 보츠와나, 레소토, 스와질란드 대학교에서 초빙을 받아 강의를 했다.
1972년 투투는 세계교회협의회 신학교육기금의 부이사장이 되어 다시 영국으로 갔다. 신학교육기금은 개발도상국의 신학교육 발전을 위해 1960년 런던에서 만들어진 조직이다. 그는 3년 뒤인 1975년 남아공으로 돌아와 요하네스버그 최초의 흑인 성공회 참사회5) 의장이자 세인트메리 대성당의 주교가 되었다.
동료 교사와 결혼하여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되다
1955년 7월 2일 투투는 대학 때 알게 된 교사 노말리조 레아 션사네(Nomalizo Leah Shenxane)와 결혼했다. 레아는 데스몬드 투투의 아버지가 가르쳤던 제자들 중에 가장 총명한 학생이었다.
원래 그녀의 꿈은 간호사였지만 모교인 문시빌 고등학교의 교장이자 장차 시아버지가 될 젝커라이어 투투의 권유로 교사의 길을 걷게 된다. 레아는 요하네스버그의 세인트 토마스 대학을 졸업한 뒤 자신이 다녔던 고등학교로 돌아와 교사가 되었다.
투투 부부는 슬하에 모두 4명의 자녀, 트레버 탐상카(Trevor Thamsanqa), 테레사 탄데카(Theresa Thandeka), 나오미 논톰비(Naomi Nontombi), 그리고 음포 안드레아(Mpho Andrea)를 두었다. 넷째 아이는 그가 영국에서 유학하던 1963년에 태어났다.
1975년에 그는 소웨토(Soweto)의 투투 하우스(Tutu House)로 이사했다. 그가 이사한 빌라카지 가(Vilakazi Street)는 넬슨 만델라의 집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진 지역이었다. 이 거리는 두 명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한 기념비적인 거리로도 유명하다.
1975년 이후 데스몬드 투투가 살았던 투투 하우스(Tutu House) <출처: (cc) Kieran Lamb at Wikimedia.org>
투투의 아들인 트레버는 1989년 남아프리카 항공 비행기에 폭발물이 실렸다는 허위 신고를 한 혐의로 이스트 런던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1991년 시민항공법 위반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았다. 폭발물 위협으로 요하네스버그에 있던 비행기는 3시간 넘게 묶여 있었고 남아프리카 항공은 약 28,000랜드의 손실을 입었다.
보석금으로 15,000랜드를 선고받은 트레버 투투는 항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93년에 죄의 대가를 치르는 대신 경찰의 추적을 피해 달아난 그는 결국 1997년 8월 요하네스버그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RC)에 사면을 요청해 1997년 결국 사면을 받았는데 TRC 의장인 아버지의 배경 때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나오미 투투는 미국 코네티컷 주의 하트포드(Hartford)에 본부를 둔 ‘남부 아프리카의 발전과 구호를 위한 투투 재단(Tutu Foundation for Development and Relief in Southern Africa)’을 설립했다. 그녀는 미국 켄터키 대학교의 패터슨 외교·국제통상대학에서 공부했다. 이후 아버지를 따라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
또 다른 딸인 음포 투투는 2004년 미국에서 성공회 신부가 되었다. 그녀는 기도와 순례를 위한 투투 연구소(Tutu Institute for Prayer and Pilgrimage)의 창립자이자 소장이다. 또한 세계에이즈동맹(Global AIDS Alliance)의 의장을 맡고 있다.
1997년 투투는 전립선암 선고를 받았고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치료를 마쳤다. 그 뒤로 2007년 설립된 남아공 전립선암 재단의 후원자가 되었다.
투투 주교와 그의 딸 음포 안드레아 <출처: (cc) Apdency at Wikimedia.org>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을 위해 활약하다
투투는 소웨토(Soweto) 민주화운동이 일어날 당시 주교 총대리(Vicar General)로 있었는데 경찰의 발포로 학생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현장으로 달려가 그들을 대변했다. 그는 민주화운동 이후 소웨토에서 조직된 부모들의 단체(Soweto Parents Crisis Committee)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웨토 항쟁은 경찰의 무력 진압으로 사망자가 생기면서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었다. <출처: (cc) Robert Cutts at Flickr.com>
1976년 소웨토 민주화운동 이후 그는 남아공에 대한 경제적 보이콧을 국제사회에 촉구했다. 미국 레이건 정부는 제재조치에 반대하며 적극적 개입정책(constructive engagement policy)을 추진했는데 이에 대해 그는 강력히 비판했다. 투투는 외국의 투자 철회로 경제상황이 악화되고 흑인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더라도 ‘목적이 있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케이프타운에서 약 30,000명이 참여한 평화행진을 조직했다.
소웨토 민주화운동 이후 그는 레소토 주교직을 제안받았다. 많은 고민을 했지만 가족과 동료의 적극적인 지지로 1976년 7월 11일 주교가 되었으며 1978년까지 봉직했다. 1978년에는 최초로 남아프리카 교회협의회(South African Council of Churches, SACC)의 흑인 사무총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투투는 남아공을 벗어나 전 세계로 활동범위를 넓히게 되었다. 정의와 화해,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은 SACC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발판 삼아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다.
이후 투투의 지도력을 바탕으로 SACC는 남아공에서 영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조직으로 떠올랐다. 투투와 SACC는 백인 사회와 정부에 도전했고 아파르트헤이트의 희생자를 지원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백인 정부의 제지에 맞서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그의 행동은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고 백인 정부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남아공 백인 정부는 수년 동안 그가 해외로 여행할 수 없도록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다.
1982년 9월에야 그는 ‘여행증명’ 서류를 발급받아 아내와 함께 미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방문 당시 그는 미국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넬슨 만델라와 올리버 탐보(Oliver Tambo)를 소개했다.
미국 백악관에서 레이건 전 대통령의 영접을 받는 데스몬드 투투
1983년에는 비인종적, 반아파르트헤이트 조직인 통일민주전선(United Democratic Front, UDF)7)이 결성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후에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의 활동 뒤에는 아내 레아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 그녀는 남아공 국내 노동자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했으며, 남아공 국내노동자연합(South African Domestic Workers Association)을 결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투투는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저술활동과 강연을 통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부당함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투투의 반대는 너무나 단호해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곧잘 나치즘에 비교해 설명하곤 했다.
이러한 활동을 막기 위해 백인 정부는 그의 여권을 두 차례나 말소했다. 그리고 항의 행진을 주도한 이후 1980년에 잠시 수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투투의 비폭력 노선과 고조되는 국제사회의 여론으로 남아공 백인 정부는 그를 강력하게 제지할 수는 없었다. 투투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ANC)의 폭력적인 반아파르트헤이트 전술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며, 공산주의와 테러리즘을 거침없이 비판하기도 했다.
‘무지개 국가’로 인종 간 화합을 주장하다
1990년 투투는 웨스턴케이프 대학교의 부총장이었던 자커스 게르웨(Jakes Gerwel) 교수와 함께 데스몬드 투투 교육재단(Desmond Tutu Educational Trust)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교육발전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교육에 필요한 건물을 지원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보츠와나 대학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
1994년 투투는 국가와 국민을 통합하려는 뜻에서 ‘무지개 국가(Rainbow Nation)’를 제안했다. 무지개 국가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아공의 과거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무지개 국가는 다양성 속의 통일을 뜻하며, 인종적 차이와 문화적 폐쇄성에 기초한 남아공의 과거를 떨쳐낼 필요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투투는 인종 간 분쟁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중재자로 활동했다. 그는 1993년 4월 19일 남아프리카 공산당(South African Communist Pary, SACP)의 지도자인 크리스 하니(Chris Hani)8)의 장례식에 참석해, 평화롭게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투투는 이날 모여든 120,000명의 군중 앞에서 “우리 모두 자유로워질 것이다(We will be free)!”, “흑인과 백인이 함께(Black and White together)!”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인종 간의 화합을 호소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의장이 되다
남아공은 국민당이 집권한 1948년부터 시행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1991년에 결국 폐지했다. 특히 1990년 넬슨 만델라가 석방되면서 백인 정부와 협상이 이루어져 보복이 아닌 화해에 의한 공존이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1993년에 임시 헌법인 ‘국가통합과 화해증진법’이 제정되었다.
1994년에는 남아공 최초의 ‘다인종 선거’가 실시되었고, 선거 결과 만델라가 대통령에 선출됨으로써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만델라 정부수립 이후 국가통합을 위한 가장 우선적인 해결 과제가 ‘인종간 화합’이었다. 이를 위해 1995년 ‘국가통합과 화해 증진법’ 34조에 의거해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TRC)가 설치되었고 투투가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TRC의 임무는 샤프빌(Sharpeville) 대학살이 일어난 1960년 3월 1일부터 1994년 5월 10일까지의 중대한 인권 침해를 조사하고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는 가해자의 책임을 면제하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제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TRC는 과거사를 규명함으로써 이 나라가 진실을 인정하고, 다민족 공존의 민주적인 미래를 열어 나가기를 기대했다. TRC의 우선적 목적은 그동안 자행된 살인과 총체적 인권 유린의 사실을 공개함으로써 화해를 촉진시키는 것이었다. TRC의 궁극적인 목표는 남아공에서 1960년대 이후에 자행된 총체적 인권유린의 본질과 이유, 상황에 대한 가급적 완벽한 진실의 규명이었다.
전 세계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보여주는 세계지도. 남아공의 TRC 활동은 다른 지역의 귀감이 되었다. <출처: (cc) Warko at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TRC는 국가적 화해와 협력을 달성하고자 했다. 다른 국가들과 달리 남아공의 TRC는 단지 가해자들에 대한 사면을 허가하는 것에만 중점을 두지 않고 피해자들의 진술에 귀를 기울이고,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과 사회 복귀를 도모하고, 나아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노력했다.
또한 TRC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에 발생한 숨겨진 역사적 사실을 밝힘으로써 깊이 양분된 국가가 과거를 향해 발언할 수 있는 새롭고 더 나은 방법을 실증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과정은 복수와 용서, 승자의 정의와 역사의 망각 사이의 행로를 나아가는
용서와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하다
TRC는 인종차별과 억압으로 인해 심각한 분열을 겪고 있는 국민들에게 용서와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럼으로써 인권유린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인권문화를 개척하는 데 기여했다. TRC의 치유는 인권유린 피해자들의 개인적, 정신적 충격에 대한 치유, 가해자의 죄과에 대한 치유, 나아가 국가의 도덕적, 역사적인 차원의 치유였다.
TRC가 본래의 목적인 개인적, 국가적 화해를 효과적으로 성취하기 위해서는 관련자들뿐 아니라 대다수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편견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일반적으로 TRC의 위원들은 남아공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인식되었고, 각종 사안을 공명정대하게 다루려고 노력했다. 그런 의미에서 남아공의 양심과 도덕이란 상징적 의미를 갖는 데스몬드 투투가 위원장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케이프타운에 있는 남아공 출신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동상. 왼쪽부터 앨버트 루툴리, 데스몬드 투투, 데 클레르크, 넬슨 만델라. <출처: (cc) flowcomm at Flickr.com>
투투는 TRC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것은 가해자들에게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를 삭감해 준 것이 아니다. 대중 앞에 나와야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큰 대가이다. 피해자들은 공식 토론회에 나와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그것은 우리가 절대로 계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어떤 것이다. 가장 어려운 일은 과거를 기억하고 또 잊는 방법이다. 집단적인 기억상실을 통해 힘들었던 과거를 무조건 잊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 잊는 것이 중요하다.”
거의 3년에 달하는 조사 끝에, TRC는 1998년 10월 29일 만델라 대통령에게 최종 보고서를 전달했다. TRC는 집단 사이의 적대감보다 화해가 국가 건설에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국가에 대해 모든 국민이 공통의 정체성을 갖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분쟁 이후의 과정을 밟은 많은 나라에서 남아공의 TRC는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
투투는 수백만 남아공인에게 자행된 잔학행위에 대한 사과를 너무 쉽게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투투의 노력이 남아공의 상처를 치유하고 일치된 국민의식을 심어 주었다는 데 대해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다.
남아공의 도덕과 양심으로 활동하다
투투는 ‘남아공의 도덕과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전 대통령 만델라는 그를 두고 “날카로울 때도 있지만 대체로 부드럽고,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며 유머가 거의 없는 사람이다. 데스몬드 투투의 목소리는 언제나 조용하면서도 또렷하게 다가온다.”고 평했다.
만델라가 은퇴한 이후 투투는 새로운 남아공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ANC)10)가 주도하는 정부의 부정부패와 비효율성에 대해서도 날선 비판을 했다. 가난에 대한 정부의 대처가 미흡함을 지적했으며 남아공에서 발생한 흑인주거지역의 제노포비아11) 관련 폭력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
남아공이 흑인정부로 바뀐 지 10년이 지나면서 투투는 매년 열리는 넬슨 만델라 재단 강연에 초대되었다. 2004년 11월 23일 그는 “너희를 떼어낸 바위를 우러러보고 너희를 파낸 동굴을 쳐다보아라(Look to the rock from which you were cut and to the quarry from which you were hewn)”12)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투투는 ANC와 정부를 맹렬히 비난했으며 투투와 반대 입장에 있는 타보 음베키13)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투투는 소위 ‘비판할 권리(the right to criticise)’를 주장했다. 논쟁 이후 남아공 학생회의(Congress of South African Students) 의장은 투투가 ‘헐거운 대포’이며 ‘중상모략을 하는 사람(scandalous man)’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2009년 세계경제포럼에서 <출처: (cc) World Economic Forum at
2013년 5월 10일에 투투는 더 이상 ANC에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ANC가 불평등, 폭력, 부정부패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ANC는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에 대해 아주 좋은 교훈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러나 자유를 위해 싸운 ANC가 정치정당으로 쉽사리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을 현재 보여주고 있다.”며 쓴소리를 했다.
국내외의 정치 문제에도 비판을 가하다
투투는 남아공의 정치 엘리트들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된 이후 10년이 지났지만 가난을 경감시키지 못했다며, 흑인들의 경제력을 향상시키려는 흑인우대 정책(Black Empowerment)은 흑인 다수가 아닌 오직 소수의 엘리트 흑인에게만 이익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투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한 달에 16불의 보조금을 주는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며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기본소득 프로젝트(Basic Income Grant: BIG)를 지지했다. 16불의 보조금으로는 기본소득을 보장할 수 없다면서 최소한 2000랜드(약 240불)는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투투는 1994년 출범한 남아공 정부가 재선 이후 부정부패로 만연해 있다고 지적하면서 ANC와 정부가 부정부패 척결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2006년 8월에 그는 공식적으로 성범죄와 부정부패로 고발된 제이콥 주마(현 대통령)에게 ANC의 의장선거에 나가지 말 것을 종용했다. 만약 주마가 범죄로 기소된 이후에 지도자가 된다면 정상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라고 공식적인 강연에서 주장했다.
2004년 캐나다에서 달라이 라마와 함께
투투는 남아공뿐 아니라 외국의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언급을 했다. 특히 그는 남아공 정부가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달라이 라마에게 비자 발급을 연기한 사실을 들며, 많은 사람들이 투쟁하여 획득한 민주주의 정신이 약화되었음을 지적했다. 그는 또한 짐바브웨의 평화를 호소했고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과 그의 정부를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팔레스타인과 동티모르, 관타나모 수용소와 미얀마의 인권남용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지 여사의 석방을 촉구했다. 데스몬드 투투는 세계적인 지도자이자 원로로 화해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도전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퇴임 후 세계적인 활동가로 일하다
그는 1996년 케이프타운의 대주교 자리를 사임하고 TRC 업무에 집중했다. 그는 이후 명예 대주교에 위촉되었는데, 이는 성공회 역사상 매우 이례적인 일로 큰 영예라 할 수 있다. 넬슨 만델라는 1996년 투투의 은퇴를 기념하여 “우리나라에 헤아릴 수 없는 기여를 한 분”이란 말로 그를 칭송했다.
퇴임 이후에 투투는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 분야의 세계적인 활동가로 일했다. 그는 TRC의 후신인 정의와 화해 연구소(Institute for Justice and Reconciliation)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매년 남아공 화해상(South African Reconciliation Award)을 발표하고 있다.
2010년 뉴욕의 세인트 제임스 성당에서 아이들에게 강론을 하고 있는 투투 주교 <출처: (cc) St. James Church at Wikimedia.org>
2006년 투투는 플랜 인터내셔널(Plan International)14)이 조직한 전 세계 어린이 인권운동에도 참여해, 모든 어린이를 출생과 함께 등록시킬 것을 촉구했다. 등록되지 않은 어린이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재난과 밀거래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투투는 교육발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아프리카의 교육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NGO 단체인 링크커뮤니티개발(Link Community Development)을 후원하고 있다. 또한 노벨평화상 수상자와 함께하는 평화 학교(PeaceJam Foundation)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투투는 79세 되던 2010년 10월에 모든 공식 활동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많은 시간을 공항과 호텔에서 보냈다며 앞으로는 가족과 함께 집에서 독서와 저술활동, 기도와 묵상으로 시간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투투는 모든 공식 활동을 중지했다. 2011년 2월부터는 1주일에 한 번만 사무실에 출근했다. 2011년 5월 23일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슈르즈버리에서 그는 남아공 외부에서의 마지막 공식 연설을 했다.
세계적인 원로로서의 소임을 다하다
2007년 7월 18일 넬슨 만델라가 요하네스버그에서 지미 카터, 코피 아난, 메리 로빈슨 등과 함께 세계원로회의를 출범시켰다. 데스몬드 투투는 원로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높은 도덕성과 용기를 갖춘 전 세계의 원로들이 세계적인 이슈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델라가 주도한 세계원로회의. 하단 왼쪽에서 두 번째가 투투 주교. <출처: (cc) Montage at Wikimedia.org>
이에 따라 원로회의는 분쟁지역에서 평화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며 인간의 고통을 대변하고 있다. 투투는 아파르트헤이트의 폐지 이후 억압받는 사람들의 인권 보호에 앞장섰다. 그는 에이즈, 결핵, 성차별, 동성애 등에도 관심을 쏟았다.
1993년 투투는 케이프타운 올림픽 유치위원회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1994년에는 군사 및 핵협력에 대한 세계운동(World Campaign Against Military and Nuclear Collaboration), 비콘 밀레니엄(Beacon Millennium), 그리고 아일랜드 행동(Action from Ireland)을 후원했다. 또한 아메리칸 하모니 어린이재단(American Harmony Child Foundation)과 남아공의 호스피스 완화치료연합(Hospice Palliative Care Association)의 후원자가 되었다.
투투 주교는 1984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달라이라마는 1989년에 수상했는데,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은 2012년에 달라이 라마가 먼저 수상하고 투투 주교는 이듬해인 2013년에 수상했다. 2015년 영국의 권위 있는 명상 전문 잡지 왓킨스(Watkins)가 발표한 ‘가장 영향력 있는 영적 인물 100인’에 달라이 라마가 1위로 선정되었고 투투 주교도 5위에 올랐다.
그 외에도 너무 많은 상을 받아 일일이 거론하기 어렵지만 주목할 만한 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986년 슈바이처 상(Albert Schweitzer Prize for Humanitarianism), 1987년 지상의 평화상(Pacem in Terris Award), 1999년 시드니 평화상(Sydney Peace Prize), 2007년 간디 평화상(Gandhi Peace Prize), 2009년 미국의 대통령 자유메달(Presidential Medal of Freedom) 등이다.
데스몬드 투투의 명언
첫댓글 아파르 헤이트란 인종차별정책으로 아프리카국가들이 유럽의 식민지가되어 정치경제모든분야에서
차별대우를 받았던 정책이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신생독립 이프리카 여러나라는 독립을 쟁취하여 반 아파르헤이트 투쟁을 벌려 자주권을 회복하였다.
특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흑백차별이 가장심한곳으로 만델라와 투투대주교가 반 아파르헤이트운동을 전개하여
백인정부를 물런나게하고 흑인정부를 수립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횜명칭도 한국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실시된 과거사문제해결방식을 도입하였다.
1960년 샤프빌 대학살 당시 흑인들이 사망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 SNS에서 논란이 일어났다.
3월 21일 인권기념일을 맞아 그는 트위터에 “69명이 목숨을 잃었고 큰 부상을 입었다
한국은 남아공화국이과거사해결을 본보기로삼기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