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아래는 Dr. Yvette Alt Miller의 글을 요약한 것이다.(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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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을 최초의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는 유대인이다. 그의 아버지는 뉴욕에서 기성복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으며, 어머니는 필라델피아의 유서 깊은 유대인 가문 출신으로 예술가였다. 그녀는 반 고흐와 피카소 같은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하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1925년에 하버드 대학 화학과에 입학했는데 3년 만에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영국 케임브리지를 거쳐 독일 Gottingen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국으로 돌아와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에서 물리학을 가르쳤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어학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는데 고교 시절에 헬라어를 배워 플라톤의 저서를 원서로 읽었으며, 불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산스크리트어까지 배워 힌두교 경전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8개국어 능통).
특히 반유대주의가 그를 어렸을 때부터 괴롭혔는데 대학교수가 된 후에도 그리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친구가 거의 없었다.
미국은 나치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한다는 정보를 접한 이후 1943년에 극비로 오펜하이머를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2년 후 1945년 7월 16일 연구팀은 뉴멕시코 남부의 한 장소에서 첫 핵폭탄을 실험했다.
핵폭탄은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냈으며, 그 충격파는 160km 떨어진 곳까지 퍼져나갔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버섯구름이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을 보며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보다 더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에 적극 반대했다. 이로 인해 그는 1949년 하원 반미활동 위원회에 회부되기도 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를 이끌었으며, 다시는 군사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자유로운 예술가의 기질을 가진 어머니의 영향으로 골수 유대인이 되는 것을 거부했지만 그래도 유대인의 신앙과 문화는 어느 정도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