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89
5월13일[부활 제5주간 토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2Ca_NZppIh0
(강석진 요셉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세상이 예수님과 교회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이유!>
언젠가 이건 정말 아니다 싶어 한 가지 시류에 대해 공개적으로 강하게 반대 주장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벌떼처럼 악의 무리들이 일어나 반격을 하더군요.
그들의 논리나 가치관은 너무나 자명했습니다. 철저한 집단 이기주의를 기반으로 한 물질만능주의였습니다. 자신들이 오랜 세월 쌓아올린 기득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고 길길이 뛰며 공격했습니다.
요한 복음 사가는 세상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된 평가를 내립니다. 먼저 긍정적인 세계관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복음 3장 16절)
다음은 부정적인 세계관입니다.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이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요한 복음 12장 31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 복음 15장 18절)
여기서 지칭하는 세상은 예수님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적대시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정신과는 달리 사탄의 지배하에 꿈틀거리는 인간의 집단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초세기부터 엄청난 조롱과 박해, 의심과 몰이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회로부터의 대대적인 배척과 증오는 초대 교회 공동체가 매일 일상적으로 겪어야 할 현실이었습니다.
AD 64년 네로 황제에 의한 대대적인 박해를 필두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과 시련에 시달렸습니다. AD 90년 경 유다교 지도층 인사들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파문((破門)과 출교(黜敎) 처분을 내렸습니다.
유다교 광신자들은 출교 처분에 만족하지 않고, 대대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살상하였는데, 놀랍게도 자신들의 살상행위를 하느님께 바치는 유혈 제사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박해자들의 무지와 악행,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실체를 명확히 파악했었더라면, 그토록 역사에 길이 남을 역대급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한 운명을 지닌 운명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았으니, 우리 역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을 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깊이 동참하는 것이니, 더할 나위없는 기쁨과 영예로 여겨야겠습니다.
세상이 예수님과 교회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비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은 요구성이 훨씬 많고 불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날선 지적과 충고가 가슴에 찔리고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미움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 안에서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세상이라는 것,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참으로 영악하고 사악합니다. 정말이지 고단수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비둘기처럼 단순할 필요도 있지만,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 앞에 매일 펼쳐지는 이 세상, 사랑이신 하느님 손길과 흔적이 담겨있는 이 세상이기에, 때로 이해할 수 없고, 때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큰 사랑의 마음으로 성장시켜나가고 완성시켜 나가야 할 대상입니다.
동시에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세상, 바로 옆의 이웃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만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극단적 자기 중심주의와 천박한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이 세상은, 다같이 합심해서 극복하고 투쟁하고 이겨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 교회는 때로 세상과 보조를 맞추어 토착화시키고 현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동시에 악한 세상과는 대척점에 선 공동체 건설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2) 교회! 세상의 박해와 미움,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는 양떼들의 모임!>
교회 공동체에 대한 멋진 정의를 보고 크게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의 박해와 미움, 하느님의 위로와 격려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는 양떼들의 모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 여정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우리 한 가운데 굳게 현존하심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동시에 세상과 적대자들로부터 받게 되는 멸시와 수모 역시 기정 사실입니다. 고통과 시련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이지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요한 복음 15장 18~20절)
결국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지상 여정을 나아가는 동안 겪게 될 다양한 고통과 시련 앞에서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박해와 미움 앞에서 너무 분노하거나 집착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보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발끝만 바라보지 말고 멀리 피안의 언덕을 바라보며 큰 호흡을 지녀야겠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고통과 시련을 겪으신 예수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구태와 오랜 악습에 도전하는 선구자들은 어쩔 수 없이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본질이나 핵심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유다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얼마나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지? 낱낱이 고발하셨습니다. 그결과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변혁시키는 사랑의 중심이 되신 반면 유다인들은 현실에 안주하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미움과 박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세상의 박해와 미움 역시 당연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 교회가 지닌 결핍과 과오, 수치스런 오점으로 인해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을 가능성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하느님께 충실하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게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에 직접 참여하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변 강대국의 위협으로 인해 큰 위기에 처한 유다왕 여호사팟은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은 후 열렬한 기도를 하느님께 올립니다.
“하느님, 저희를 치러 온 저 큰 무리를 대적할 힘이 저희에게는 없습니다. 저희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신만 바라볼 뿐입니다.”(2역대기 20장 12절) 그러자 예언자 야하지엘이 일어나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 큰 무리 앞에서 두려워하지도 당황하지도 마라. 이 전쟁은 너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다. 이 전쟁에서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 제 자리를 지키고 서서, 주님이 너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을 보기만 하여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두려워하지도 당황하지도 마라. 내일 그들에게 맞서러 나가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2역대기 20장 15~17절)
오늘 교회에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가 한 가지 있군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투쟁을 하느님의 투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생각하지 않고 나혼자 힘으로 해보겠다고 기를 쓸때, 그 투쟁은 백전백패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께 고정시킬때,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의식할 때, 교만이나 자만심에 빠지지 않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도움을 청할 때, 그 투쟁은 나의 투쟁이 아니라 하느님의 투쟁이며 백전백승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세상을 거스르는 사람들>
‘데모 저지에 임하는 경찰의 방침’
1, 절대 희생자가 발생 않도록(경찰의 희생자 있더라도); 일반 시민 피해 없도록
2, 주동자 외는 연행치 말 것(교내서 연행금지)
3, 경찰봉 사용 유의(반말, 욕설엄금)
4, 주동자 연행 시 지휘보고(식사 등 유의)
광주 항쟁 시 전남 도경국장 안병하 국장 지휘서신 내용이라고 합니다. 요즘과 비교해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약자를 위한 지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세를 따르지 않았던 이런 지시를 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셨을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신군부에 협조하여 상당수 인사들이 5-6공을 거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고 그들은 지금도 광주의 진실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혼자의 힘으로 나라의 힘을 거스르는 결단을 한 안병하 국장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큰 감동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광주민주화운동의 대치선을 ‘경찰-계엄군’ 대 ‘광주시민’에서, ‘계엄군’ 대 ‘경찰-광주시민’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래서 경찰간부들이 광주시민의 편을 든다고 계엄군에게 심하게 구타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반면 당시 광주시민들은 경찰서가 파괴되지 않도록 항쟁기간 동안 철저하게 보초까지 섰다고 합니다.
80년 5월 24일 경찰지휘본부를 설치했던 안 국장이 임무수행을 위해 직접 도경에 들어가 보니 경찰국장실의 명패, 모자, 정복, 서류 등은 물론 관사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안 국장은 당시 육사 8기생으로 김종필 민자당대표위원, 윤흥정 5,18 호남지역 계엄사령관 등과 육사 동기였습니다. 전남도경국장은 탄탄한 그의 인생에 한 번 거쳐 가는 평범한 근무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80년 5월 19일 계엄사가 경찰병력을 무장하도록 지시했지만 안 전 국장은 “광주시민이 모인 곳을 향해 총을 쏠 수 없다. 경찰이 무장하는 경우 시위가 악화될 우려가 있으며 4·19때를 보아도 경찰을 무장시킬 수 없다. 무장 지시를 따르지 않겠다.”며 항명하였던 것입니다.
“더 이상 경찰이 역사의 죄인이 돼서는 안 된다. 내 한 몸 희생해서 무고한 광주시민의 생명을 해치지 않고 나아가 경찰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겠다.”
결국 안 국장은 신군부의 강경 진압 명령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5월 26일 직위해제 당했고 보안사 동빙고 분실로 끌려가 10여일의 온갖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그 고문 후유증으로 1988년 10월 10일 광주의 한을 품은 채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출처; ‘위민정신의 표상’ 고 안병하 경무관을 추모하며, 오마이 뉴스, 2007,10,12 외]
“지시를 거부하겠다.” 세상은 이런 사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자신들이 흐르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이들을 두려워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하는 지시는 무엇일까요? 경쟁하여 이겨야 하고, 좋은 대학과 직장에 취직해야 하며, 넓은 아파트에 살고 높은 권력을 위해 노력하는 등 정신없이 사는 것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뒤돌아볼 시간을 가지라는 것은 곧 세상이 자신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이 당신을 미워하였듯이 당신의 제자들 또한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박해했던 그 세상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을까요? 세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여전히 자신을 거스르는 이들을 미워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가만히 있기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은 그 반대입니다. 움직이고 새로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힘을 따르다보면 이렇듯 세상에게 박해를 당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잘 적응하고 있다면 한번쯤은 자신을 뒤돌아 볼 일입니다. 세상의 끝에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칼을 주러 오셨습니다.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반드시 저항세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 저항에서 오는 고통을 받기 싫어서 그냥 주저앉아서 그 물살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살아서 물살을 거슬러야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숨이 남아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열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열정만 있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열정을 보시고 올바로 잡아주셨습니다.
물이 흐르는 곳의 끝은 항상 되돌아 올 수 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기다린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폭포를 지나면 바다로 나아가 미아가 되어버려 더 이상 땅으로 되돌아 올 수 없음도 생각합시다. 이 세상이 종국에 가게 될 곳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됩시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평화신문 창립 35주년 기념으로 ‘요르단,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시작한 성지순례였습니다. 미주 전 지역과 한국에서도 순례자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순례를 시작하는 요르단의 암만까지 모이는데도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습니다. 뉴욕에서 이스탄불, 이스탄불에서 암만까지 가는데 이틀이 걸렸습니다. 화요일 저녁에 출발한 저는 목요일 오전에야 암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의 노선이 취소되어서 다른 비행기로 바뀌면서 공항에서 10시간가량 머물러야 했습니다. 비행기의 게이트가 변경되면서 바뀐 게이트를 찾아 이동하는 번거로움도 있었습니다. 늦은 밤 비행기를 타면서 비행기의 등급을 보았습니다. 1등급과 비즈니스 석은 일찍 탑승하였습니다. 물론 좌석도 편하고 좋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겸손하게 경제적인 좌석에 탑승하였습니다. 통로도 좁고, 좌석도 불편했지만 모두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설렘을 듬뿍 안고 순례를 시작하였습니다.
첫날 순례의 시작은 ‘광야’였습니다. 4년 전에 만났던 가이드는 여전히 활기차게 순례자를 맞아 주었습니다. 수도꼭지를 틀면 시원한 물이 나오듯이 형제님은 4년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어김없이 해주었습니다. 아라비아 로렌스의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해주었습니다. 중동의 슬픈 역사도 가슴이 찡하게 해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쉽게 광야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였고, 미리 정찰대를 보냈습니다. 정찰대는 가나안 땅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마치 메뚜기 떼와 같았다고 보고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두려움 때문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났던 모세 역시 눈앞에서 약속의 땅을 보면서도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아쉬움이 큰 여정이었지만 모세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일의 결과도 중요하겠지만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광야는 하느님의 뜻을 시험하려는 유혹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순례의 첫날 ‘광야’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무척 감사했습니다. 인솔자는 ‘광야에서 미사를 드리면 먼지가 많을 것’이라고 걱정하였습니다. 한 형제님의 말이 우리의 걱정을 웃음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먼지가 없다면 광야가 아니죠.’ 그랬습니다. 광야에서는 먼지가 바람에 날리는 것이 당연하였습니다. 우리는 바위 언덕이 있는 곳을 병풍 삼아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언덕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순례자를 보니 마치 산상수훈의 모습 같았습니다. 마치 오병이어의 현장 같았습니다. 먼지와 바람이 하느님의 찬양하는 우리의 마음과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수신기의 도움으로 바람이 불었지만 미사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고 사람의 일만 먼저 생각한다면 우리의 마음도 먼지가 불어오는 광야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한 도시에 살고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과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곳도 역시 광야입니다. 먼지가 불어오는 광야에 있어도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그곳은 약속의 땅입니다.
순례자들에게 광야의 두 가지 의미를 말하였습니다. 하나는 정화의 시간, 준비의 시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면서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도 40일 동안 광야에 머물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을 수 있는 정화의 시간, 준비의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유혹의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3가지 유혹을 받으셨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겨내셨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나뭇잎의 숙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지에 붙어 있는 나뭇잎은 바람이 불어 흔들릴지언정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비록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유혹의 바람이 불지라도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굳게 의지한다면 우리는 유혹을 디딤돌로 삼아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유혹이 없었던 분들이 아닙니다. 그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낸 분들입니다. 우리들 또한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천국을 향한 준비를 열심히 하면 좋겠습니다. 다가오는 유혹을 주님의 말씀으로 이겨내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18-21: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18절)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시려고 고난을 겪으셨다. 우리가 세상의 미움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고 하지만, 주님께서 먼저 세상의 미움을 견디셨다. 우리가 세상의 비난을 받고 귀양을 가고 고문을 받지만, 주님께서는 이보다 더한 일을 겪으셨다. 저주받은 세상은 하느님과 화해한 세상, 교회를 박해한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19절) 주님의 제자들, 하느님의 자녀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다. 우리도 현세에 살지만, 그것은 우리를 붙들어 놓을 수 없다. 세상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다. 같은 행동으로 하느님과 세상을 똑같이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리에 복종하는 사람은 진리의 원수들과 싸워야 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20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온갖 종류의 박해를 당하리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사악한 자들이 방자한 말로 그분을 공격했고, 온갖 말로 당신을 모욕하였지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그분이 받으신 모욕과 굴욕적인 상황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을 닮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그분께 싸움을 걸더니,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시니까 제자들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이미 제자들에 앞서 당신이 먼저 박해를 받으셨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20절)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쥐고 계시는 그분이 당신을 박해하는 자들이 각자 자신의 행실을 선택하도록 허락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박해를 받으셨다. 우리도 그분과 같은 길을 걸으려 한다면 박해를 당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이다. 이것 모두가 역시 우리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행하고 열매를 맺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21절) 그 모든 일은 세상이 당신의 이름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하고 우리의 말을 업신여기는 것을 말한다. 즉, 세상은 주님 대신 우리를 미워하며, 주님 대신 우리를 박해하고, 세상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그것이 당신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에 속한 자들과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완전히 다르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어떠한 삶으로 주님을 닮아야 할지를 생각하며 노력하여야 하겠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15-21)
여기서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고아’라는 말은, 부모가 없는 자녀들, 스승이 없는 제자들, 목자가 없는 양들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뒤부터 부활하셔서 제자들(신자들)에게 나타나시기 전까지 제자들(신자들)은 실제로 고아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들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었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짧았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그런 막막한 처지에서 금방 벗어났습니다.
이 말씀은, 뒤의 16장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이 말씀들에서 ‘근심’이라는 말은 ‘슬픔’으로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인들의 ‘큰 슬픔’을 ‘큰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두려움을 행복으로 바꿔 주신 일입니다.
<박해자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눈엣가시 같은 예수님을 제거했다고 좋아했겠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에는 두려워했을 것입니다.(사도 2,43)
예수님께서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20)라는 말씀을 하신 일이 있는데, 온 세상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되는 은총이 주어졌는데도 그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기쁨을 거부하고 절망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고, 그 일 자체가 곧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같은 일입니다. 반대로, 그 ‘큰 기쁨’에 동참해서 함께 기뻐하는 것은 구원에 동참하는 일이 됩니다.>
누구나 살다보면 몹시 외로워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우주 한가운데에서 혼자만 있는 것 같은 심정이 될 때, 그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외면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지켜 주신다.”라는 믿음이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밀어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 손길이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사랑’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외롭게 할 때가 많지만, 반대로 사람이 사람을 그 외로움에서 건져 줍니다.>
또 반대로, 누군가가 몹시 외로운 처지에 있음을 본다면, 그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기꺼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하고,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직접 그를 도와주실 때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 주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바치는 기도와 내가 실천하는 사랑이 곧 그 외로운 사람을 지켜 주는 주님의 보호와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고아 같은 처지를 혼자서는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는데, 함께 사는 방법이 바로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여기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는, “사랑한다고 말만 하지 말고”입니다.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는 말은, “진짜 사랑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이다.”라는 뜻입니다.
<‘보호자’라는 말의 그리스어 원문 단어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사랑과 계명의 관계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든지 사랑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고 실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일인데, 우리는 그 사랑을 우리의 ‘삶의 실천’으로 증명하고 증언해야 합니다. 사랑 실천 없는 복음 선포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 13,1)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요한 복음서에서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계’나 구원의 대상인 ‘인류’를 뜻하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이지만, 오늘 복음에서 ‘세상’은 하느님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특정합니다.
세상과 교회의 대립은 지난날 더 두드러졌습니다. 잘못된 행태를 고수하며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들은, 복음의 진리와 질서를 따르려는 그리스도인을 박해와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나처럼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 때문에 겪는 시련과 박해는 내가 온전히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신앙과 세상 사이에 가치관의 충돌은 오늘도 계속되지만, 우리는 세상의 잘못된 관행을 따를 수 없거나 신앙 때문에 불편함을 겪을 때조차 쉽게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스승이신 주님께서 가신 길을 나도 따라 걷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순교’라는 낱말(그리스 말 ‘마르티리온’)의 본뜻대로 ‘증거, 증언’하는 사도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개종한 형제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으려고 줄곧 싸웠지만, 제자요 동료인 티모테오에게는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은 할례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다계 형제들이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제1독서 참조)
생각과 기준이 다르다고 하여 세상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었던 바오로 사도를 떠올립니다. 우리도 세상과 연대하며 이웃과 동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
[부산교구 이세형 유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인간은 하느님 사랑의 숨결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인간은 사랑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이 사랑의 관계를 끊임없이 파괴시키려 합니다.
우리의 현실이 매우 고통스러울 때, 현실을 저주하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갖게 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이렇게 유혹합니다. “그래 포기해. 포기하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어.”
우리는 물질적으로 더욱 풍부해졌고 살기 좋아졌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더욱 소외되고 외로워하며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 지지 않고 이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오체불만족’의 저자인 오토다케 히로타다라는 일본 청년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양팔과 양다리가 없다시피 해 거의 몸뚱이뿐이었습니다. 저주받은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운명과 맞섰고 그 운명을 굴복시켰습니다.
그는 자기 삶의 조건을 불평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고 또 지금 삶이 편하다고 안주하지도 않았습니다. 운명에 맞선 그의 도전과 모험과 눈물겨운 성취 뒤에는 어머니와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외모를 부끄럽게 여기기보다 ‘오직 하나뿐인 존재’라는 자존감을 아들에게 깊이 심어주었습니다.
“장애를 방패삼아 도망치는 아이로는 절대 키우지 말자.” 어머니의 확고한 삶의 자세에서 오토다케는 스스로 놀림과 편견의 벽을 깰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됩니다.
또 한 사람 담임선생님, 그는 아주 매정하게 오토다케를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대했습니다. 운동도 청소도 남들과 똑같이 시켰고 교실 안에서는 전동 휠체어에서 내려 엉덩이로 기어 다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한 것이 오늘의 오토다케를 있게 했습니다.
결국 오토다케는 어머니로부터 깊은 자존감과 어떤 난관도 헤쳐나갈 수 있는 강인함을 배웠다면, 선생님으로부터 이 험한 세상을 스스로의 힘으로 당당하게 헤치며 살아가도록 근성과 끈기를 배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자기 삶을 부둥켜안고 살아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뽑으셨고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문제는 살아가는 사람은 ‘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실한 신앙인이 되려면 단순히 예수님께 복을 비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방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승리를 쟁취하신 것처럼 우리들 또한 우리의 운명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지는 하루의 은총의 시간들을 헛되이 허비하지 말아야 하며 만나게 되는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아멘.
=====================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 환호송을 통하여 바오로 사도는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 온 세상에 주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은 주님께 선택된 사람들로서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신 것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도 당신처럼 적대자들로부터 박해와 고통을 받을 수 있음을 암시하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 적대자들에게 받으신 고통과 어려움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고, 세상의 고통과 죄를 대신 짊어지셨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자신들을 뽑으신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그분과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수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은 자신의 삶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녹록하지 않은 세상의 많은 어려움 속에 살면서 그분을 따르는 힘은 ‘주님과 하나 됨’입니다. 그래서 오늘 영성체송을 통하여 전해 주시는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위하여 삼위일체 하느님과 하나가 되시어 그분 안에서 믿음이 충만하고, 희망을 넘어 희망하며,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위하여 비오니, 이들이 우리 안에 하나가 되게 하시고, 아버지가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
[부산교구 김두유 세례자 요한 신부님]
어느 덧 부활 제5주간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기쁜 생활 하시길 기도합니다.
여러분들께 먼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신앙생활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본당에서 신자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들어보면 신앙생활이 ‘쉽다.’ 또는 ‘행복하다.’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하시는 분은 드뭅니다.
제가 ‘확신에 찬 대답’이라고 미리 못 박아 놨습니다. ‘확신에 찬 대답’을 하시는 분에게는 오늘 복음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세상의 물정에 쉽게 물들어서 예수님과 자꾸 멀어지는 생활이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만 세상 안에 살면서,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내가 사는 것’이 나의 실생활이라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신앙생활이라고 해야 합니까?
많은 사람들은 지금 ‘삶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자주 잊어버리고 삽니다. 성당에 있을 때만, 주일에만 신앙인으로 자처하고, 나의 실생활에서는 신앙하고는 관계없는 사람으로 치부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나의 실생활’과 ‘나의 신앙생활’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실생활을 사는 것도 ‘나’요,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나’이기에 실생활과 신앙 생활을 동일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내’가 온전한 삶 자리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쪽으로도 포함과 불포함의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실생활과 신앙생활을 동일시 않는 삶을 살아간다면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 바리사이적인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들은 ‘거룩함, 즉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면서도 ‘지금 여기에 이루어져야 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거룩함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우리 역시 속해 있는 삶의 자리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너희가 세상에 속하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은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참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게 하는 요소들이 이 세상에 난무하고 있습니다. 남을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하지 못하고,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논리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논리와 예수님의 논리는 정반대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한 몸을 이룬 존재입니다.
내가 신앙인이면서 신앙인답게 처신하지 못한다면 예수님과 하나된 것이 아주 부끄럽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이 자기 사람으로 사랑하게 만드는 세상으로부터 노예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끄럽게 여기고 행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직도 세상의 권력과 명예와 돈에 사로잡힌,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는다 해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라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뽑힌 사람답게, 세상이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외면한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직 어둠이, 세상이, 빛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며 보장해주시기 때문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꿈은 크게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거나 선에 대치되는 꿈과 희망은 결코 현실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룰 수 있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바라는 것에 걸맞은 노력과 정성이 함께한다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원대한 꿈을 지니되 선 안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크게 이루었다고 해도 선한 방법을 쓰지 않았다면 결코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 일이지만 모 그룹 재벌회장이 술집에서 폭행당한 아들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조직 폭력배를 동원 보복을 하였다는 얘기가 떠들썩하였습니다. 결국 그 아버지는 구속되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고귀한 마음은 나무랄 수 없지만 선에 대치되는 방법을 선택하였기에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빌미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선생님을 폭행한 학부모도 있습니다. 폭행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녀 교육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자녀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을 것입니다. 오늘의 세상에는 ‘선생과 학생만 있고, 스승과 제자는 없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학생의 인권은 소중하고 선생님의 인권은 없나요?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세상의 방법을 좋아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내세우며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줄을 세우며 그것을 즐깁니다. 옳고 그렇지 않고는 상관없이, 자기 입맛에 따라 좋고 싫은 것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그것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미움을 당하게 됩니다. 너만 고고하냐? 는 비아냥을 듣기도 합니다. 신앙으로 인해 사랑이 아니라 미움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 혼란을 불러오지만, 세상은 자신을 합리화시킵니다.
그러나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곧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증거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움을 당하는 것은 악에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실 사악한 세상의 미움을 받지 않고 그들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조직 폭력배와 공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누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구애 없이 선을 선택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서 뽑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삶이 우리 믿는 이의 삶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생겨난 고귀한 존재입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면 더 큰 사랑으로 되갚아주길 다짐하며……사랑에 사랑을 더합시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학창 시절, 우연히 친구 집에 갔다가 시험을 앞두고 책상 정리와 서랍 정리를 하는 친구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해야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렇다면 이 친구는 공부를 잘했을까요? 못했을까요? 그렇게 잘하지는 못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보면, 이 친구와 조금 다릅니다. 시험 전에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험이 끝난 뒤에 정리합니다. 지금은 책상 정리할 때가 아니라 공부할 때라는 것이지요.
준비만 열심히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타겠다고 결심하고서는 자전거 장비를 열심히 마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 며칠 타다가 나중에는 자전거에 먼지가 가득 쌓인 채 구석에 세워만 있더군요. 준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실천하는 것이 늘 먼저였습니다. 신앙인 중에서도 이런 분을 종종 봅니다. 오랫동안 냉담하시는 분에게 “이제 성당 나오셔야죠.”라고 말씀드리면 이렇게 답하십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나갈 준비가 되면 그때 열심히 나가겠습니다.”
과연 어떤 준비일까요? 주님 앞에 나가는 것은 준비 동작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가기 위해 성경책과 기도 책을 사고 각종 성물을 마련해야 할까요? 조금씩 기도하는 연습이 필요한 것일까요? 모두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곧장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것저것 준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그 뜻을 따르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뜻을 먼저 살피는 데 익숙합니다. 남들의 시선을 생각하고, 남들의 판단에 흔들릴 때도 너무 많습니다. 주님의 뜻을 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뜻보다 당신의 뜻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하시지요. 그렇다면 세상의 사랑을 받을 것인지, 주님의 사랑을 받을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세상의 시선이 모두 사라졌을 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이 박해하고 배척한 예수님께만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을 부정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순간적인 만족과 나의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한 모습을 취하면서, 나중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늘 지금 당장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선과 악 사이에서>
요한 15,18-21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과 악 사이에서>
선이
사랑했던
나의 님 따라
선에게
사랑받기를
악이
미워했던
나의 님 따라
악에게
미움받기를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뽑으시는 주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너희를 뽑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뽑으신 것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제는 친구로 뽑아 세우셨고 오늘은 세상에서 뽑으신 겁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제 생각에 세상에서 뽑았다는 것은 꽃으로 치면 어느 꽃밭에 있던 꽃을 뽑아 다른 꽃밭에 심는 것처럼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고 다른 세계에 속하게 되었다는 거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됩니까?
이것을 잘 설명하는 것이 불교의 연꽃 비유입니다. 불교에서 연꽃은 깨달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깨달은 자를 부처라고 하니 부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연꽃, 다시 말해서 부처는 산속의 깨끗한 계곡물에 피지 않고 시중의 흙탕물 가운데 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흙탕물에 피되 그 물에 잠기지 않는 것이고, 오히려 그 아름다움과 향기를 그 가운데서 풍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가운데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의 회개가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세상의 즐거움과 만족에 빠져 살았습니다. 이런 프란치스코를 주님께서 세상에서 뽑아내셨습니다. 전쟁에서 포로가 되게 하셨고 젊은 나이에 중병을 앓게 하셨으며, 다시 출세를 위해 전쟁터에 나갈 때는 환시 중에 나타나시어 아시시로 돌아오게 하시고 거기서 회개생활을 시작하게 하셨지요.
출세出世하려던, 다시 말해서 세상으로 나가려던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개입을 느끼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세상을 등지고 자신의 회개생활에만 전념하는 은수자가 되지만 하느님은 이런 프란치스코를 다시 세상 가운데로 불러내십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세상으로 다시 나갈 이유도 필요도 없지만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서 세상에로 다시 나가고 복음을 들고 세상에로 나가고 살아있는 복음이 되어 나아갑니다.
세상에 살지만 이제 더 이상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고, 더 이상 이 세상의 즐거움이나 만족이 행복이 되지 못하고 복음이 유일한 만족이요 행복이 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이 자기의 모든 것이고 전부라고 하였습니다. 겉으로는 세상 가운데 있지만 속은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어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이 세상의 순례자와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요즘 계속 나오는 사도행전의 바오로, 바르나바, 디모테오도 복음을 위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세상 두루 다닙니다.
아직도 욕망과 만족을 쫓아 세상을 헤매고 다니는 우리라면 주님께서 우리도 이 세상에서 뽑아 당신의 친구로 삼으시고, 당신의 사도로 삼아주시길 오늘 기도해야겠습니다.
내일은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 복음의 전사>
- 무지(無知;ignorance)의 세상 안에서 주님의 제자들 -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시편100,1-2)
어제 많이 잊고 지내던 ‘설렘’이란 말을 참으로 오랜만에 사용하고 참 기뻤습니다. 이젠 정말 어떤 환경에도 불구하고 ‘설렘의 수도자’로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을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 설레는 수도자로 말입니다.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하느님만을 찾는 순수와 열정의 사람들인 구도자들이라면 이런 설렘의 사람이 되고 싶어할 것입니다. 참 좋은 자매와의 주고 받은 내용들입니다.
-“신부님께서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시고, 첫사랑의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하신다니 언제나 청년이신가봐요!”
“설렘의 수도자가 되려고 노력하지요.”
“이미 그러하신걸요!”
“설레다. ‘들떠서 두근거리다’ 뜻이네요.”
“설렘은 언제나 심장을 뛰게하고 새로운 기대를 하지요!”
“그래요. 5월 성모성월은 ‘설렘의 달’, 누구를 만나든 설레는 마음이기를 소망합니다.”
어제의 아름다웠던 순간도 잊지 못합니다. 피정중인 차분한 음성의 신심 깊어보이는 노수녀님이 면담고백성사를 청했습니다. 목소리가 고와 보속으로 제가 참 좋아하는 성가 244장 전부를 부르도록 부탁했고 저는 감상했습니다.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 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오월 화창한 봄날 녹음 상쾌한데, 성모뵈옵는 기쁨 더욱 벅차오네”(2절)
들을 때 마다 마음 설레게 하는 곡에 가사의 내용들입니다. “이런 고백성사는 처음이네요!” 수녀님은 조용하고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떠났고 감미로웠던 분위기가 지금도 긴 향기의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보속은 벌에 목적이 있는게 아니라 치유에 있음을 깨달으니 고백성사는 새삼 주님 사랑의 성사, 치유의 성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참 역설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느님이 창조한 아름다운 사랑하는 세상인데 무지의 죄로,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이기도 합니다. 말씀과 사랑이 사람의 본질이라 하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무지한 욕망의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인데 세상은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영적전쟁 치열한 최전방입니다. 참으로 착하게 살았는데 원인 불명의 희귀병들이나 뜻밖의 병들로 고통을 겪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원망은 커녕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기쁘고 감사하게 살아가는 환우들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바로 그 무지의 현실이 오늘 복음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도대체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랑의 공동체 제자들을 미워하는 세상이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또한 역사적 사실이고 지금도 일어나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 말씀이 힘과 용기를 줍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뿐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너를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를 미워하는 것이다.”
새삼 주님을 믿는 이들의 신원은 파스카 예수님과 운명공동체의 신원임을 깨닫습니다. 어둠이요, 거짓이요, 죽음이요 악의 세상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무지의 세상에,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선을 추구하는 주님의 제자들은 몹시 불편한 존재들일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속화(俗化)되거나 동화(同化)되기는 커녕 세상을 정화(淨化)하고 성화(聖化)하는,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들에 대한 무지한 세상의 박해는 자연스런 현실이 됩니다.
“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그러나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어지는 다음 말씀이 이 모든 궁극의 원인은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의 악에 기인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마음의 병인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ignorance)야 말로 모든 죄와 악과 병의 근원이 됩니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유일한 답은 하느님뿐이요, 이런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파스카의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주님 말씀의 빛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전사들은 무지의 세상과의 영적전쟁은 필연입니다.
“어떻게 영적승리의 삶을?”
더욱 가열차게 파스카 주님과의 일치로 완전무장하여 주님의 전사, 즉 복음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로 백절불굴의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래서 앞서 ‘주님 사랑 안에 머물라’는,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주신 주님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빛나고 고맙습니다.
참으로 성령의 인도따라 순리대로,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지 말고, 또 태풍은 미풍으로 바꾸는 지혜롭고 겸손한 주님 평화의 전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제1독서의 바오로 일행입니다. 그렇게 사이좋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뜻하지 않은 심한 다툼으로 서로 결별한 후, 바오로 일행은 제2차 선교 여정에 오릅니다.
성인들에게도 이런 인간적인 부족한 면모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또 위로와 힘이 됩니다. 완전하여 성인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열렬하고 한결같은 사랑이 있어 성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자들은 좌절하지 않고 복음 선포에 전념하니 이 또한 장한 일입니다.
성령께서 아시아에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막자 진로를 바꾸고, 또 예수님의 영께서 허락하지 않자 또 진로를 바꾸게 되고, 어느 날 밤 환시를 통해 계시 받은 바오로가 그에 따르니, 그대로 성령의 인도따른 삶이요 마침내 아시아가 아닌 유럽이 복음 선포의 선교지가 됩니다. 참으로 갈수록 가열(加熱)차지는 백절불굴의 복음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 바오로 일행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전사, 복음 선포의 전사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참으로 좋으시고,
그분 자애는 영원하시며,
그분의 진실은 대대에 이른
다.”(시편100,5)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15,18)
오늘 복음(요한15,18-21)은 '세상 안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찾아왔을 때, 나를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말씀,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이겨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사건 뒤에 있는 부활'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그 믿음 만큼 다시 부활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말처럼 결코 쉽지가 않네요. 머리로 믿는 것과 삶으로 믿는 것이 참으로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요즘 더 많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배둔성전 봉헌식이 있는 참으로 뜻깊은 날'입니다. 여러가지로 힘이 듭니다. 참석이 가능하신 분들은 꼭 오셔서 저와 배둔공동체에 힘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오후 2시에 봉헌미사가 거행됩니다.
하느님의 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게 될 때 고통은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형제자매들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 하느님이시기에 내 것으로만 소유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많은 형제자매들의 마음을 이곳 배둔공소로 향하게 하시어, 배둔의 새 역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지금 마산교구는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주관으로 '공소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진주지구 공소를 순례했고, 올 해에는 지난 4월 10일부터 거제, 마산, 창원 지역에 있는 공소를 순례합니다. 벌써 배둔공소에도 많은 신자들이 다녀갔습니다.
이 순례를 통해 너와 세상의 모든 미움을 이겨내고 다시 부활하는 새 역사를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오늘부터 다시 부활하겠습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tn2YHU9Ea9w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요한 15, 19)
주님의 선택으로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선택의 주체는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도
선택이라는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주님의
선택으로
수많은
복음의 길이
사랑으로
전개됩니다.
우리를 주님께서
택하심으로
멋대로 살아온
우리의 삶이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주님의 선택을
막을 수 없습니다.
선택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선택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
가능성의
믿음입니다.
선택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
충실함입니다.
선택은 약속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
마침표가 없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선택은
목적지가
우리를 선택하신
주님임을
가르쳐줍니다.
선택이 모여
공동체가 됩니다.
주님께 속한
우리들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에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믿고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선택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은총임을
믿습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