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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民族正氣를 바로 세우자/지상낙원
어원을 검색하다가 정치 토론방에서 스크랩했습니다.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 독서의 계절이라고도 합니다. 분량은 좀 길지만 때마침 날씨가 서늘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때 좌파 정권에서 근혜님을 겨냥하여 명예를 실추(失墜)시키거나 매도(罵倒)하려 했던 적이 있었지요. 평소에도 진실을 왜곡하는 악질 모리배들의 행태란 항상 벌떼처럼 날아들고, 雨後竹筍 격으로 쏟아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국가 정의를 위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김대중 보다는 박정희대통령님이 천배+백배 더 낫다. 조회 66 . 10 , 09 . 06 , 16 : 23
김대중 대통령의 창씨개명 명이 도요다다이쥬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난 후에 박정희 대통령의 창씨개명 문제가 쏙 들어갔다...
金九선생과 비밀요원 朴正熙
◈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 하려던 박정희대통령은 김정균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습니다. 김정균은 상해임정에서 비밀첩보원을 하던 김구 선생님의 수족과도 같은 분이 였습니다. 남의사 소속의 왕정국, 산서성 총사령관 염석산과 더불어 독립 운동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김정균의 일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김구선생은 1939년 3월 어느날 청년 박정희를 만났다. 그 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때 처음 박정희 청년을 김구 선생에게 소개해준 사람이 김정균의 친한 친구인 신영학 이라는 친구다. 신영학을 통해 소개받은 김정균은 박정희 청년의 뚜렷한 역사 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는 김구 선생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 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럽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박정희가 나간후에 김정균이한테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 청년은 1시간 부동자세로 서 있었지만 자세하나 흐트러 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그 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다. 거기에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께 말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아마 1945년에 광복이 못되고 했더라면 박정희는 김구 선생을 도와 일을 했을 것이다 라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이 박정희를 만주 군관 학교를 보낼려고 하였으나 박정희 청년이 적을 알아야 한다며 굳이 일본군 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박정희가 일본군 사관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본군의 무기정보 일본군의 전술 공부등 많은 정보를 김정균이에게 알려 주었다. 박정희 소좌가 일본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선양으로 떠날 때도 김정균이한테 알려 주었다. 김구 선생은 박정희 소좌가 선양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김정균이와 박정희 소좌는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일본군의 동태 작전능력 병력이동 계획 일본군의 동태를 알려 주었다고 김정균이는 기록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 할 근거로서는 백범일지에서 나와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의 『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 하였습니다. 한국 광복군 창설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은 항전을 개시 하였다. 이에 재류 한인의 민심도 매우 불안하게 되어서 5당통일로 되었던 민족 혁명당이 쭉쭉이 분열되고 조선 혁명당이 새로 생기고, 미주 대한독립단이 쇠퇴하고 근본 의열단 분자만이 민족 혁명당의 이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열된 원인은 의열단 분자가 민족 운동의 가면을 쓰고, 속으로 공산주의를 실행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민족 혁명당이 분열되는 반면에 민족주의자 결합이 생기니 곧 한국 국민당 조선 혁명당 한국 독립당및 미주와 해외에 있는 모든 애국 단체들이 연결하여 임시 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다. - 이하 중략 -
이에 임시 정부에서는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있는 힘을 다해 중경 가능빈관에 중국인 서양인 중요 인사를 초청해서 한국 광복군 설립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우선 30여명 간부를 서안으로 보내어 미리 가있던 조성환등과 합하여 한국 광복군 사령부를 서안에 두고 제1 지대를 산서 방면으로 보내고 고운기(가명) 제2 지대장을 수원 방면으로 보내고 김학규 3지대장을 산동으로 보내고 나월환등의 한국 청년 전지 공작대를 광복군으로 개편하여 5지대를 삼았다. 그리고 강서성 상요에 황해도 해주 사람으로서 죽안군 제3전구사령부 정치부에 일보고 있던 김 문호를 한국 광복군 정모처 제 3분처 주임을 삼고 그 밑에 신정숙을 회계조장 이지일을 정보조장 한도명을 훈련 조장으로 각각 임명하여 상요로 파견하였다. 독립당과 광복군 상해 임정의 일체 비용은 미주, 멕시코,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이 보내는 돈으로 썼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이 대표하는 부녀위로 총회에서 10만원의 기부가 있었다. 『 1944 년』이 모양으로 광복군이 창설되었으나 인원도 많이 못하여 얼마동안을 유명무실하게 지내다가 문득 한 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50여명 청년이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 정청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이 학병으로 일본군대에 편입되어 중국 전선에 출전하였다가 탈주하여 안휘성 부양의 광복군 제 3 지대를 찾어온 것을 지대장 김 학규 장군이 보낸 것이었다. - 중략 - 이것이 인연으로 우리 광복군이 연합국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미국의 OSS 를 주관하는 서젠트 박사는 광복군 제 1 지대장과 합작하여 서안에서 윔츠 중위는 제 3 지대장 김 학규와 합작하여 부양에서 우리 광복군에서 비밀 훈련을 실시 하였다... - 이하 중략 -
이상에서 보듯이 일본군대에서 탈출하여 온 때는 바로 1944년도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김정균의 일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기청(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왈,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왔는데, 큰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 동아일보에 공개된 독립운동가 조경한 선생<임정 당시 가명 안훈 (安勳)>의 상해 임시정부 국무위원 증빙 문건 등은 상해임시정부가 우리나라 민주헌정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최후의 생존자였던 조경한선생이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임시의정원 의원, 광복군 주계장(정훈장교)등 임시정부핵심요인으로 활동한 독립 운동가로서의 구체적인 지위와 활동상을 확인해주는 증거입니다. 광복회 자료에 따르면 이때 탈출한 학병과 일본군 조선인들 중에서 탈출 학병 12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명을 광복군 제1 지대 3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3 지대에도 50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제8 여단에 근무하고 있던 시기와 매우 일치합니다)
본토(대한제국) 에서는 마침 1944년 조선인 학도의용군 지원제도와 징병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수많은 조선인 청년 4385명이 남양과 중국 전선에 배치 되었고 그 중 일부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 박정희 대통령이 1944년 4월에 소위로 임관되었던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을 중시하여야 함) 그 동안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 시절에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 아니다라는 주장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었으나, 이것은 만주군 복무 시절은 불과 17개월 정도에 불과한 점에서 보면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현 광복회장 김우전씨가 바로 44 년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투쟁한 사람이며 45년도에 일본군내 조선인 병사에 고함이란 전단 역시 스스로 일본군 내의 사정을 그 만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광복軍 투쟁 전단 첫 공개 "일본군내 韓人은 때를 기다려라"그 전단은 “아직 전 민족적으로 총궐기할 때는 아니다. 때를 기다려라. 제군들은 일군 내에서 작전을 방해하고 손상시키는 게 임무다. 자신이나 동포에게 위험이 없는 범위에서 활동하라.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하라”고 적고 있습니다. "일본군 내 조선인 병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이 전단은 김우전(金祐銓·82) 광복회장이 광복군 연락장교 자격으로 중국 남부 쿤밍(昆明) 주둔 미국의 전략첩보국(OSS)에 파견근무할 때인 1945년 4월 28일 작성한 것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돼 있던 이 전단을 지난 3월 확보했으나 작성자를 알 수 없어 광복회에 조회를 의뢰, 김 회장이 직접 선전문을 쓴 사실이 뒤늦게 확인된 것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권을 거치면서도 그 누구 하나도 광복군과 백범 김구 선생님을 비롯한 독립 유공자들을 보살피지 아니 하였습니다. 오직 박정희 대통령께서.. 5.16 혁명을 성공시킨 후 1962년 김구 선생? 纛? 비롯하여 광복군과 독립군들에게 건국 공로 훈포장을 수여하시었습니다. 이것이 제일 먼저 박 정희 대통령이 시행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백강 조경한 선생외에 상해임정 요인들과 그때 당시 광복군 대부분은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서 5.16 혁명 직후에 건국공로 훈장이 수여되고 광복회가 출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남아있는 항일 기념비와 탑 그리고 동상들은 대부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기록물 역시 그나마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은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철학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스스로 백강 조경한(안훈) 선생을 찾어가서 다까끼 마사오라고 밝힌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요? 만약 박 정희 대통령이 부끄러운 짓을 하였다면 당당히 임정요인들을 찾어가서 다까키 마사오라고 밝히며 큰 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만큼 광복군과 상해 임정을 계승하고 광복군 정신을 살리겠다는 뜻을 전함이 아니였겠습니까? 백범 김구 선생이 주동한 동학농민의 난 역시도 박정희 대통령께서 처음으로 혁명이었다고 정의하시었습니다.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 민족과 자주를 부르짖는 저들이 지끔까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일본군 위안부들이 울고 있습니다. 탈북동포들이 통곡하고있습니다. 우리민족은 독립투사들을 포함하여 일제시대, 해방시대, 6.25전쟁, 유신시절, 민주화 시절을 거쳐 지금까지도 을 지키기 위해 세력과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金九선생과 비밀요원 朴正熙
박정희 동기생들의 증언
◈ 박정희 " 우리는 독립해야 한다"라고 말해....◈
박정희의 동기생 이재기는 이렇게 회고했다. “동기생으로 친하게 지냈다. 나이가 너 댓살 아래인 1기생들로부터 구타 등의 수모를 받으면서도 과묵한 인내심으로 소화하는 것을 보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한국인 중에 홍사익이라는 중장이 있었다. 그는 일본 육사 26기를 졸업하였고, 2차 대전 후 전범자로 처형되었다. 그가 만주 군관학교를 찾아와 조선인들만 모아놓고 훈화를 한 적이 있었다. ‘민족적 차별대우의 비통함을 극복하여 조선민족의 우수함을 과시해야 한다’. 이에 대해 과묵하기만 했던 박정희가 감동적인 열변으로 답사를 하여 모두가 놀란 적이 있다” 1기생 중에 이기건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인민군 소좌로 있다가 6.25 때 국군으로 전향하여 사단장을 마치고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만주에서 그를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왜 여기 왔느냐고 물으니까, 왜놈 보기 싫어 왔다고 말하더라. 나는 그 때 왜놈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이북에서는 일본놈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정일권은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당시 만주군 상위(대위)로 있었다. 박정희 생도는 일요일이면 내 관사로 찾아와 놀다가 갔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공감대가 형성됐다. 담배와 술을 매우 좋아 해서 나는 배급표로 정종으로 바꾸어 대작하곤 했다. 그는 일본놈들 머지않아 망할 것이다. 우리는 곧 독립할 것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박기병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만군 준위였고, 와세다 대학,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육군소장으로 예편했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정일권 상위는 만군 헌병사령부에 근무하였는데 자주 박정희 생도를 불러내 저녁을 사주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박정희는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하면서 독립군의 노래를 불렀다. 모두는 어안이 벙벙했다.”
1940년부터 창씨개명작업이 시작됐다. 성을 일본성으로 바꾸지 않으면 배급도 주지 않고 학교에도 입학할 수 없었다. 박정희는 1941년 창씨 개명되어 ‘오카모도 미누루’ 혹은 ‘다가키 마사오’로 불리게 됐다. 그는 검도, 유도, 승마, 교련은 물론 모든 과목에서 출중했고, 1942년 3월에 420명 중 1등으로 졸업, 만주국 황제의 금시계를 상으로 받았고, 아울러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로 입학할 수 있는 특전을 가지게 되었다. 박정희는 졸업생을 대표하여 재학생 송사에 대한 답사를 했다. 그 모습이 뉴스영화로 쵤영되어 많은 한국인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박정희의 이 모습을 보고 고무되어 만주군관학교에 들어 간 생도 중에는 강문봉이 있다. 그 역시 만주 군관학교-일본군육사를 거쳐 군사령관을 마치고 3성 장군으로 예편했다. 동기생 김종길은 이렇게 회상했다. “박정희 생애 중 가장 흥겨웠던 때가 일본육사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는 방학 때가 되면 일본 전국을 돌아다녔다. 술을 잔뜩 마시고 귀교시간을 어겨 외출금지 처분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의 작은 누나 박재희가 동경에 살면서 박정희의 뒷바라지를 잘 해 주었다. 동기생 이섭준의 누이동생이 일본에서 자취를 하며 여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식량시정이 어려웠다. 박정희는 도시락에 밥을 꾹꾹 눌러 싸다가 여동생 에게 주기도 했다. ”동기생 이섭준은 이렇게 회상했다. “그 때 나는 일본인이 다 되어 있었는데 박정희는 달랐다. 한문선생님은 박정희의 글 속에 무엇이 있기는 한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은 군사학이다. 우리는 독립을 해야 한다'. 독립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남의 간섭 안 받고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유시간이면 운동장을 혼자 걸으면서 골똘히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동기생 이한림 장관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놈을 배워야 왜놈을 이긴다고 하더라" 1944년, 박정희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소-만 국경지대인 지지하르에 위치한 관동군 635부대로 배치됐다가 이어서 만주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됐다. 만주에 산재한 공비 즉 모택동의 팔로군을 토벌하는 작전에 투입된 것이다.
◈ 추신: 독립을 꿈구며 ...... 독립하기 위해 적을 알아야 백전백승이므로 거짓으로 혈서를 쓰고 충성을 맹세하고 열심히 일본 국사학을 배운 박정희... 민주에서 조선인 군인를 비밀리에 모아 독립운동을 하였던 박정희!!! 좌빨들이 이런 박정희를 친일파로 매장 하려한다.....
과연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없었던 사람들의 시대를 지금의 잣대로 평가하고 심판할 수 있을까요? 많은 국민으로부터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임시절 좌파를 제외한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고 본보기로 삼아 기리며 추모했다는 것은 두말 할 수없는 사실입니다
민생을 팽개친 노정권의 과거사 타령에 반감을 가진 많은 국민들은 일제하 중국이나 만주로 탈출하여 항일독립투쟁을 하지 않았다면 군인뿐만 아니라 언론도 친일이고, 공무원도 친일이고, 법조인도 친일, 사업가나 예술가도 친일이란 식이 아니냐?
일제가 점령한 이 땅에서 살아야 했던 그 시대 사람들은 친일이란 소릴 안 들으려면 뭘 할 수 있을까? 머슴 아니면, 농사나 지어야 했겠느냐? 친일이냐를 따지자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들의 재물 영달을, 출세를 목적으로 그 시대 일제의 힘을 등에 업고 능동적으로 같은 민족을 수탈하고 핍박 탄압하는데 앞장섰느냐, 아니냐?를 따져야한다는 것이 아니겠음 입니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은 저만치 가고 가을 바람 따라서 완연한 초가을 날씨에 마음은 사뭇 상쾌합니다. 옛부터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고유명절인 한가위를 앞두고 문득 고향 하늘이 그리워지기도 하겠지요. 결실의 계절에 모든 소망이 성취되고 하시는 일마다 보람이 차곡차곡 쌓여만 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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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故박정희 대통령을 바로 알기에 우리는 뭉친겁니다`~2012년을 위하여~~
좋은자료 감사 합니다.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