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본문: 시 74편
◎ 제목 : 금쪽이는 부모문제라도 있지.
◆ 기도
성전이 무너진 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을 심판하신 결과였습니다. 무너진 성전에 가슴아플 줄 몰랐던 것일까요? 여전히 성전만 바라보는 통곡이 다윗과 사뭇 다르네요. 무너진 성소를 두고 애통하는 그들의 마음, 사실 알고 싶지 않습니다. 무너진 이유는 모르고 우는 모습이 과거의 저를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 본문살핌
시인은 성전과 모든 회당이 파괴되고 부서진 현실을 토로하며 전능의 하나님께서 이를 언제까지 묵과하실지 호소하고 있다. 원수가 당신의 이름을 욕보이고 비방했다며 가난한 백성의 목숨을 잊지 말아달라고 기도한다. 주의 원통함을 푸시며 주를 향한 비방을 기억해 분연히 일어나 주십사 간청한다.
◆ 묵상
이 시가 언제 쓰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구약성경이 편찬된 시기로 미루어 볼 때 바벨론 포로기에 즈음해서 작성되었으리라 생각해 볼 순 있겠다. 그 전엔 성전까지 쳐들어와 기물을 부수고 온 회당을 불사를만한 기록을 찾기 힘들다. 시인은 이 상황이 쉽게 끝나지 않음을 토로한다.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74:9) 철저한 심판의 상황 아래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심판에 대한 반응이 '징징거림'이다. 빨리 다시 원상태로 돌려달라는 울부짖음만 있고 회개는 단 한줄이 없다. 언약을 배반한 교활한 백성으로서의 참회는 없고 스스로를 학대받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74:20)라고 보는 시각 뿐이다. 역한 기운이 올라와 묵상을 접고 싶을 정도다. 그래도 이 시가 주는 유익이 있기는 하다. 심판을 받았으되 그 의미와 까닭을 모르는 진짜 우매한 백성의 민낯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텍스트기 때문이다.
심판 받을 짓을 했는데 그것도 못 깨칠 정도이니, 대체 얼마나 하나님과 실제적으로 멀게 살아온 백성들이냐. 예레미야의 처참한 대언에는 불응, 부정, 격노하고 거짓 선지자들의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메시지만 골라 듣다가 심판을 맛보고도 여전히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모양새가 아주 가관이다. 심판을 맛봤으면, 예레미야가 옳았음을 체험으로 깨달았으면, 하나님께 돌아가 회개했어야지. 성전 불타고 회당 불 타고 다 무너졌는데 하나님 어디가서 안 돌아오세요. 힘들어요. 무서워요. 징징대는 기도처럼 읽히는 본문이다. 하긴, 그런 금쪽이 같은 방법으로 시내산에서부터 바벨론 포로기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상황을 모면해 왔으니, 그 방법을 또 사용한 것일뿐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런데 이번엔 상황이 다르지? 선자자도 없고 표적도 없고 도통 아무것도 안 보이지? 하나님은 빛과 생명이시니, 하나님이 떠나신 곳은 이미 죽음이요 어둠이요 무덤이다. 그 심판의 자리, 형벌의 자리에서 회개하고 심판의 말씀이 합당했음을 받아들이면 새롭게 은혜가 임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나, 하던대로 하고 싶지. 하나님 움직여서 뜻대로 하던 금쪽이 짓 포기하기 싫지. 그런데 하나님도 이번엔 대강 안하신다. 이렇게 안하면 방법이 없는 백성들을 위해 내리신 각고의 결정이자 미루고 미루셨던 공의의 집행이기 때문이다.
실컷 울었으면 정신차리고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좋겠다. 상황의 타개 대신, 떠나간 하나님을 다시 찾는 열망으로 부르짖는 것이 좋다. 마치 다윗이 늘 그러했듯이.
◆ 기도
금쪽이는 부모문제라도 있지. 하나님 자녀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두고도 도통 육신의 기질과 습을 벗어나질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 새롭고 거듭난 영혼이 구습과 죄의 세력을 벗어나 살도록 힘껏 도와주세요. 나아지고는 있습니다만 가끔 조바심과 자괴감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은 아직도 마음에서 타오릅니다. 이 불을 던지신 아버지, 끝까지 보전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