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 올림픽 저리 가라···여의도 ‘권력투쟁 스포츠’
야당 의원들이 1일 국회에서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탄핵소추안 제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올림픽의 열기 덕분인가. 지금 여의도 정치판은 파리 올림픽 현장 못지않게 뜨거운 전장이다. 경쟁의 형태와 목적이 다를 뿐이다. 메달과 기록을 향한 땀과 눈물 대신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권력투쟁 스포츠’(한겨레, 이원재의 사실과 진실)가 펼쳐지고 있다. 어제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은 하루 전에 임명된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탄핵안을 발의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임명된 방통위원장 3인이 모두 야당의 탄핵 대상에 올랐고, 탄핵안 발의 직전에 사임한 두명의 전임자와 달리 이진숙 위원장은 본회의 표결에서 탄핵안이 통과되면 헌법재판소 판결까지 직무정지가 예정돼 있다. 22대 국회 들어 벌써 7번째 탄핵안. 이날 야당은 명품백 사건과 관련, 대통령 부부와 국민권익위원회를 수사 대상으로 지명한 특검법도 발의했다. 10번째(국민의힘 발의 1건 포함). 개원 두달 동안 민생 법안 합의 처리는 한 건도 없이 탄핵 7회, 특검 10회만 거듭한 정치판을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는 증오만 쏟아낸 국회 라고 썼다. 정치가 상대의 굴복을 강요하는 ‘치킨 게임’에 몰두하는 사이, 정작 국민은 ‘여의도발 스트레스’를 피해 올림픽 낭보를 찾아보며 어려운 삶을 달래는 처지다.
탄핵과 특검 뿐인 국회
탄핵이나 특검이나 헌법과 벌률에 근거해서 확립된 제도다. 3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입법부에 보장된 합법적 권한이다. 의회를 구성하는 정당들이 필요에 따라 탄핵이나 특검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문제는 정도와 균형이다. 국회가 민생을 팽개친 채 탄핵과 특검에만 몰두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실제로 22대 국회가 그렇다. 개원 두달 동안 매주 한 건 꼴로 탄핵과 특검법안이 발의하는 동안 여야가 합의처리한 민생 법안은 한 건도 없다. 어제까지 본회의를 통과한 법안 5건은 모두 여당이 반대하는 쟁점법안이지만, 거대 야당이 일방 처리했다. 거야의 독주에 거부권으로 맞서고 있는 대통령실은 어제 야당의 이진숙 탄핵안 발의를 “입법쿠데타 수준” 이라고 비난했으나, 강대강 대치 이외의 해법을 찾지 못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22대 국회를 처음 경험하는 최악의 국회로 규정한 한국일보의 이틀전 기사는 여의도 정치판의 실상을 통계까지 보태 생생하게 전달한다. 첫째, 입법부의 법 무시. 국회법에 따라 국회 상임위원회는 매달 3회 이상 법률심사 소위원회를 개최해야 하지만, 7월 한달간 소위를 3번 이상 연 곳은 환경노동위가 유일했다. 둘째,생산성 제로(0). 22대 국회 개원 이후 여야 의원들이 법률안 2,370건을 쏟아냈지만 본회의 문턱을 넘은 법안은 0.21%(5건)에 불과하다. 그나마 야당 단독처리 법안이어서 대통령 거부권 행사→ 재의결→폐기여부 결정의 수순이 기다리고 있다. 셋째, 남 탓. 개원 이후 여야 정치인들의 기자회견은 418건, 하루 평균 6.7회다. 여야가 민생 법안에 머리를 맞대기보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상대를 공격하는 여론전에만 치중한 셈이다. 이러니 ‘최악의 국회’ 소리를 들을 수 밖에.
통신은 팽개쳐도 되나
이르면 오늘 중으로 야당이 이진숙 위원장 탄핵안을 처리하면 방통위는 상임위원 1인만 남게돼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는 식물 조직이 된다. 헌재 결정이 나기까지 6개월 가량 제구실을 못한다. 이래도 되나. 위원장 탄핵이 MBC 경영진 교체를 둘러싼 방송 장악 시비 때문이라는 것은 이제 모두가 안다. 그럼 방통위가 방송과 함께 담당하는 또 다른 축, 통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시대는 지상파 방송보다 모바일 통신기기로 옮겨간지 오래다. 통신 정책이 민생의 중요한 척도가 된지 오래다. 그런데 아직도 지상파 주도권에 집착하며 통신을 팽개치는 정치권을 향해 의원님들, 인터넷·통신은 안보이나요라고 외치는 인터넷 매체의 관점이 눈길을 끈다.
식물 방통위가 보여주는 민주주의 수준
방통위가 다른 정부부처와 달리 여야 추천으로 구성된 방통위원들의 합의제로 운영되는 합의제 정부 기구라는 점에서 위원회 구성조차 실패한 실상을 숙성되지 못한 정치문화에서 찾는 황근 교수의 칼럼도 읽어볼만 하다. 황 교수는 차제에 통신 정책을 방통위에서 떼어낼 것도 주문하고 있다. 2017년 탄핵 이후 한국 정치는 “과학적 현실진단과 유리된채 팬덤 정체성에 기댄 권력투쟁 스포츠가 됐다”는 이원재 교수의 한겨레 칼럼도 일독을 권한다. 이 교수는 낙오자, 소외계층과 진보진영의 ‘헤어질 결심’에 주목하고 있다. 지금 국민들은 여야 정치권 모두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지 않을까.
손병수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손병수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후 28년간 주로 경제 담당 기자로 일했다. 경제부장과 산업부장, 논설위원을 거쳤으며, 미디어 경영에도 참여해서 포브스코리아와 뉴욕 중앙일보의 대표이사 발행인을 역임했다.
충북 영동 출생으로,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중앙일보 퇴직 이후 건축자재 생산기업과 저비용항공사 등에서 밥벌이를 하며 산업 현장도 경험했다. 아직도 신문은 현장과 세상의 얼굴이요 희망이라고 굳게 믿으며, 전철을 타면 이내 종이 신문을 펼쳐 든다. 이제 신문의 관찰자, 감시자로서 비판을 넘어서는 대안, 절망 대신 희망을 모색하는 기사와 칼럼들을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려 한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newsletter/todaypick/14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