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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15일(월)
* 시작 기도
주님...
주일 이후 새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안개와 같고 꿈과 같은 세상에 치심하지 않고 주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 수 있도록 나를 주의 강한 손으로 장악하여 주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사 내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향기를 풍기는 주님과 연합된 자로 살게 하소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자기 인식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신 인식이 바르게 세워져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나는 피조물의 자리에 납작 엎드려 하나님과의 의의 관계가 성립되기 원합니다.
조금이라도, 잠시라도 내가 하나님 자리를 넘보거나 하나님처럼의 자리를 엿보지 않도록 나를 죽여주소서.
오늘 이 하루도 나의 옛 사람은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기 원합니다.
나의 심령에 하늘의 평강으로 가득 채워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삼하 18:16-23
제목 : 친히 걸림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16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그치게 하니 그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17 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18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19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20 요압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21 요압이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아뢰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
22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23 그가 한사코 달려가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이르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가니라.
* 나의 묵상
압살롬의 군대와 다윗의 군대가 서로 싸우다가 압살롬의 군대가 패하였다.
이에 압살롬은 나귀를 타고 도망하다가 자기의 자랑거리였던 풍성한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리므로 요압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한편 요압이 나팔을 불어 전쟁을 그치게 하였다.
이에 다윗의 군사들이 죽은 압살롬을 수풀에 큰 구멍을 파고 거기에 넣었다.
그리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높이 쌓았다.
그렇게 전쟁이 그치자 압살롬에 속한 이스라엘 군사들은 각기 장막으로 도망쳤다.
압살롬은 살았을 때 자기 이름을 위하여 비석 하나를 세웠는데 이는 자신의 후계자인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이름을 기념하는 비석을 왕의 골짜기에 세웠고 그것을 당시까지 압살롬의 기념비라 불렀다.
한편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요압에게 요청한다.
자기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를 갚은 소식을 전하게 허락해 달라는 것이다.
이에 요압은 이를 말리면서 왕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기 때문에 네가 그 소식을 왕께 전하지 말고 다음에 하라고 한다.
그러고 난 후에 구스 사람에게 이 사실을 왕께 전하라고 명하자 구스 사람은 곧바로 왕께 달려갔다.
그것을 본 아히마아스는 구스 사람 뒤를 따라갈 수 있도록 요압에게 다시 요청한다.
이에 요압이 아히마아스에게 너는 왜 그렇게 가려고 하느냐? 이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는 결단코 네가 상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히마아스가 그 의지를 꺾지 않자 그도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한다.
이에 아히마아스는 지름길로 달려가서 구스 사람보다 앞서 갔다.
압살롬은 살아생전에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한 비석을 세웠다.
그 비석은 자기의 이름을 빛내줄 아들이 없어서였다.
물론 삼하 14:27절에 보면 압살롬은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었다.
사무엘서 저자가 여기서 그의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고 분명히 기록을 한 반면 아들들의 이름은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는 그들이 어려서 죽었거나 아니면 이 아들들이 무능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낼 만한 능력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그들을 무시했을 수도 있다.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비석을 세웠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의 명예심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의 그런 명예욕은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을 정도로 온 이스라엘 가운데서 흠모할 만한 칭찬을 듣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압살롬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권위를 내세우며 높은 비석을 세웠는데 전승에 의하면 그 비석의 높이가 15m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였고, 윗부분이 뾰족한 원추형으로 되어 있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고 한다.
살았을 적에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이렇게 큰 비석을 세우고 압살롬의 기념비라 칭했던 그가 죽고 난 뒤에 수풀 사이에 파인 큰 구덩이에 묻혀 그 시체 위에 돌로 탑을 쌓는 것처럼 돌무더기가 쌓였던 것이다.
한편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는 다윗의 원수였던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자기가 왕에게 전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강청한다.
그 일로는 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만류하면서 대신 구스 사람을 보냈음에도 아히마아스는 굳이 자기가 그 소식을 전하겠다고 한다.
아히마아스의 불굴의 강청으로 인하여 요압은 어쩔 수 없이 그도 왕에게 보낸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히마아스는 자기의 생각에 좋은 소식이라고 판단해서 그런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찌 됐건 자기가 왕의 원수가 죽은 소식을 전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여기서 영생으로 인도하는 샘물인 복음을 전하는 자 곧 복음전도자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누구나 상대가 듣기에 좋은 소식을 전하기 원한다.
그러나 복음은 그것을 듣기에 어떤 이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듣기 싫은 소식, 듣기에 아주 불편한 소식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복음전도자들은 듣기에 좋은 소식만 취사선택해서 전하면 안 될 것이다.
복음은 그 자체로 기쁜 소식이다.
하지만 그 복음이 우리 육신의 모든 삶을 기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로마서에 이런 말씀이 있다.
(롬 9:32-33)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방인들은 믿음에서 난 의를 따라 구원을 얻었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행위로 의를 얻으려고 하여 결국 율법의 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걸림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어 시온에 서셨다.
유대인들은 결국 그 걸림돌과 거치는 반석에 넘어져야 한다.
그래야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는 다분히 역설적 이야기다.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그 사람은 무릎이 깨졌을지라도 안 그런 척, 안 아픈 첫 하면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골목에 숨어서 깨진 무릎을 살핀다.
왜냐하면 부끄럽고 챙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라는 걸림돌과 거치는 반석에 걸려 넘어진 자는 이 땅에서 부끄러움을 당할지라도 하나님 나라 심판대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한 백성은 그런 돌부리를 주시면서까지 그들의 잘못을 폭로시키신다.
그 폭로로 인하여 차라이 이 땅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라는 것이다.
그 부끄러움은 잠시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의 부끄러움은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죄악의 폭로로 잠시 부끄러움을 당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부끄러움을 면하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그렇게 하셨다.
욥에게 있어 가장 큰 죄는 자기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죄이며 ‘자기 의’의 죄이다.
자기 의가 얼마나 강한지 하나님이 내리신 그 심판 앞에서도 자기 자신을 포장하여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고백을 한다.
(욥 1:20-21)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의 이러한 모습은 그의 진솔한 모습이 아니라 가식과 자기 의로 똘똘 뭉쳐진 모습이다.
그가 자식들의 생일잔치가 끝나면 하나님께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 이유가 다름 아니라 그 모든 소유물들이 날아갈까봐 두려워서였다.
(욥 3:25-26)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이것이 욥의 진솔한 고백이다.
그러면서도 욥은 자기 의를 끝까지 내려놓지 않는다.
(욥 27:5-6,표준새번역) 나는 결코 너희가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나는 죽기까지 내 결백을 주장하겠다. 내가 의롭다고 주장하면서 끝까지 굽히지 않아도, 내 평생에 양심에 꺼림칙한 날은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은 죽을지라도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의 공의를 버릴 수 없다고 강변한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욥의 이런 ‘자기 의’를 깨부수시고자 그처럼 말로 다할 수 없는 심판을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심판을 통해서 자기의 의를 깨고 아들의 생명으로 나오라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내용을 그에게 말씀하시면서, 네가 그렇게 의롭다면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너는 어디 있었느냐고 물으신다(욥 38:4).
내가 바다를 만들 때 그 물을 가둔 자가 누구냐고 물으신다(38:8).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가 봤으며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고 물으신다(38:22).
네가 묘성을 묶을 수 있으며, 삼성의 띠를 풀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38:31).
이처럼 천지창조의 말씀을 하시면서 묻자 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이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라고 고백한다(40:4).
이 때 하나님께서 최후의 일격을 가하신다.
(40:8)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하나님의 이 한 마디에 그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한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을 한다.
(42: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의 이 고백은 자기가 당한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고 자신의 비참함을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한다는 말이다.
그런 장사됨을 통하여 진짜 성소를 짓게 되고 그 성소에서 주를 보게 된 것이다.
나 역시 나의 의로 똘똘 뭉쳐진 자였음을 고백한다.
부교역자로 일할 때나 담임이 되어 목회를 할 때를 막론하고 나의 사역의 열매는 엄청 쏟아질 정도였다.
나는 그것이 내가 잘 해서 일어난 것인 줄 알았다.
그것은 착각도 너무나 큰 착각이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런 사역의 큰 열매 바라시는 분이 아니다.
열매가 크든 작든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는 그런 고백을 원하시는 것임을 나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나는 그런 자기 의로 점점 마음은 굳어갔으며 부해질 뿐이었다.
이런 나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쏟아졌다.
그것은 나의 죽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살려달라고 기도할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치 준비라도 하고 계셨던 것처럼 나를 복음생명캠프로 부르셨다.
거기에 순종하고 나갔을 때 나의 죄를 드러내신 것이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내 죄가 얼마나 극악하고 큰 지를 말이다.
나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서 내가 하나님처럼의 죄를 지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 번 나의 모습을 돌아본다.
여전히 나는 이 죄를 먹고 마시지만, 이제 나는 창세전에 택함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은혜가 내게 너무도 크고 귀하다.
날 택하시고 부르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자칭 복음전도자라고 하면서 내가 전하기 좋은 것만 취사선택하여 전하던 삯군 목자가 여기 있습니다.
성도들이 듣기 좋고 듣기 원하는 것들만 골라서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 다 썩어지고 없어지며 사라질 것들이며 쇠락의 법칙에 적용받을 것이었습니다.
불시험을 받고 살아남아야 하는데 다 불에 타 없어질 것들밖에 없으니 무슨 소용이 되겠는지요?
하나님께서는 욥을 심판하심 같이 이 종도 공의로 심판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으며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그런 기도가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공의로 그 모든 고난을 수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복음을 통하여 알게 하셨습니다.
하여 오늘도 주님의 뜻을 헤아려 더 깊은 교제를 나누기 원합니다.
그것이 곧 영생이오니 들숨을 1분만 막아버리면 그저 고깃덩어리로 전락하고 말 이 육신에 치심하지 않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에 온 맘을 쏟게 하소서.
그마저 나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믿음에 이끌림 받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