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펌입니다. 특별한 대비를 안했군요. 하긴 저라도 그랬겠지만...ㅡㅡ;
200년동안 난리다운 난리가 없었다면 누군들 안그랬겠습니까?
天下雖安 忘戰必危라는 말은 고금을 막론하고 맞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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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의 대략적인 정치적 상황
조선 왕조은 개국 후 백여년 동안 창업을 주도했던 개국 공신과 이후 세조의 집권을 도왔던 공신집단과 그 후손들로 형성된 훈구파 세력과 더불어 왕조의 안정과 융성을 유지할 수 잇었다.
그러나 훈구 세력은 정권이 안정됨에 따라 점차 부패화가 심화되었고 이런 변화 속에서 이른바 사림 세력이 등장하여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 사회 질서의 재정립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 결과 신진 사림 세력과 기존의 훈구 세력과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이러한 마찰은 성종이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삼사의 청요직에 등용하면서 표면화되었다.
그 결과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근 반세기 동안에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네 차례에 걸친 사화가 일어나 신진세력은 큰 타격을 받고 정국은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 영향으로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나 신분 제도와 군역 제도가 무너지면서 권문세가에 의한 농장의 확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공납 제도도 문란해져서 민생이 도탄에 빠지는 등 사회 전반이 동요의 기미를 보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조정은 왕위 계승을 둘러썬 왕실 척신들의 정권쟁탈전인 을사사화가 발생하였으며 사림 역시 내부 분쟁으로 인해 상호 대립하는 새로운 정쟁의 양상이 나타났다.
그 후 명종이 모후의 대리 정치에서 벗어나 직접 왕권을 행사하게 되자 외척세력이 정치의 중심에서 제외되고 명종의 개혁 의지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신진 사림세력이 국정 운영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신진 사림 세력은 선조 연간에 이르러 다시 동, 서 양대 세력으로 분열되어 대립을 거듭함으로써 국정의 효율적 운용에 장애를 끼쳤다.
2. 조선과 일본의 관계
1)조선 초의 대일 관계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를 개국한 직후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 세력인 무로마치 막부와 교섭을 통해 왜구의 조선 침임을 금해주도록 요청하였고 일본과의 교린 외교를 성립시켜 평화적인 국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도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왜구의 조선 침입을 막아 줄 것을 약속하고 포로를 돌려 보내는 대신 조공과 회사의 형식에 의한 관무역을 행하여 양국의 우호관계 유지에 협력하였다.
2)삼포개항 이후의 대일 관계
조선이 일본에 통상의 편의를 제공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횡포는 여전히 근절되지 않았다. 이에 조선은 세종 1년에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를 정벌하고 일본과의 국교를 단절하는 등 강경한 조치을 취하였다.
조선의 쓰시마 정벌을 계기로 조일 양국의 교역이 중단됨에 따라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된 쓰시마의 도주 소오 사다모리(宗貞盛)은 여러 차례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를 재개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세종 8년에 부산포, 염포(울산),제포(웅천)을 개항하여 일본인의 왕래와 교역을 허락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3포가 개항되고 조일 양국의 교역이 재개된 후 교역을 위한 일본 선박과 일본인의 조선 출임이 급격히 증가되었으므로 조선 조정은 이에 대한 통제에 부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대책의 일환으로 세종 25년에 쓰시마 도주와 계해조약을 맺어 엄격한 제한 조치를 취하였다.
세종대 이후로는 왜구의 침입이 크게 감소되어 조,일 양국간에 평화적인 관계가 계속되었으나 점차로 3포에 거주하거나 왕래하는 일본인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조선측에서 통제를 더욱 엄격하게 하였으며, 이에 불만을 품은 일본인의 도발행위도 비번해지기 시작하였다.
중종 5년의 삼포왜란, 중종 39년의 사량진 왜변 및 명종 10년의 을묘왜변 등이 모두 이러한 일본의 욕구 불만에서 비롯된 무력도발이었다.
그러나 을묘왜변 이후 30여 년간은 일본측의 별다른 접촉요구가 없었기 때문에 양국간에는 대체로 평화가 유지되었다.
이러한 쓰시마와의 관계와는 반대로 일본 중앙 정부와의 관계는 그보다 훨씬 이전인 성종 때부터 사신 교환이 중단되어 별다른 접촉이 없었다.
성종은 일본과의 관계을 유지하기 위해 통신사 이형원과 서장관 김흔을 파견하였으나 이형원이 쓰시마에 도착하였을 때 풍토병으로 사망하여 중간에 되돌아 오는 일이 있었다.
그 이후 조선에서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오는 사신에게는 예에 따라 접대하여 돌려 보냈다고 한다.
한편, 일본은 일본대로 자국내의 사정으로 인하여 스스로 조선과의 접촉을 중단함으로써 조,일 간의 외교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전국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도요토미의 지배하에 통일을 이룩하게 되었다.
3)선조 대의 대일 관계
도요토미는 일본 국내의 통일이 진전됨에 따라 조선 및 중국을 정복하여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하나롵 통합한 대제국을 건설하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요토미는 1586년(선조19)에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와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등을 보내어 국서를 조선 조정에 전달하고 통신사를 일본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이들이 가지고 간 국서에는 '지금 천하가 짐의 손아귀에 들어왔다'는 식의 거만한 내용들이었다. 조선 조정은 이를 두고 논의를 거듭하였으나 '바닷길이 험하여 사신을 보내지 못한다'라며 이를 거부하였다.
야스히로는 한양으로 가던 도중 몇 가지 유명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하나는, 조선에서는 일본 사신이 지나갈 때 지방 백성들이 창을 들고 길 좌우에서 위엄을 보이는 관례가 있었는데, 야스히로가 안동 지방을 지나갈 때 그 모습을 보고는 "당신들의 창자루가 매우 짧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원래 일본의 창이 좀 길긴 긴 편이다)
두번째는 서울에 도착하자 예조판서가 잔치를 열어 그를 접대하였는데, 술에 취한 야스히로는 호초(후추)를 한 주먹 꺼내어 자리에 뿌렸다. 당시 조선에서는 후추가 매우 귀한 것이었으므로 기생들과 악사들이 다투어 주우려 하여 잔치상이 금세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이를 지켜본 야스히로는 숙소로 돌아와 통역사에서 "너희 나라가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의 기강이 이 모양이니 이러고서 어찌 나라가 온전키를 바라겠느냐"라고 했다고 한다.
어쨌든 본래의 임무를 실패한 야스히로는 귀국 후 도요토미의 노여움을 사서 일족이 멸문 당했다고 한다.
1589년(선조22) 5월에 일본은 쓰시마 도주 소오 요시토시(宗義智)와 야나가와 시게노부, 겐소(玄蘇)를 조선에 보내어 조,일 간의 사절을 교환하여 국교를 맺자고 다시 요청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덕형을 이들을 접대할 선위사로 임명하여 부산으로 보내어 영접하여 서울까지 데리고 왔다.
서울에 도착한 일본 사신은 공작새와 조총 등의 예물을 진상하였다.(공작새 한 쌍은 선조의 명령에 의해 남양의 섬에서 기르게 했다.)
일본 사신은 약 9개월 간 동평관에 머물면서 조선에서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해 줄 것을 끈길기게 요청하였다. 이들이 이처럼 끈질기게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는 이유는 히데요시는 조선의 항복을 원하고 있었으나 조선이 이에 응할 리 없기 때문에 통신사의 파견을 조선의 항복으로 히데요시를 적당히 속여 전쟁을 피할 볼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속셈을 모르는 조선 조정은 그 당시 다른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통신사 파견 요청은 귀에 들리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조선 조정을 발칵 뒤집어 엎은 사건이란 바로 이른바 '정여립의 역모 사건'이었다. 요즘에 드러나는 정황을 보면 그다지 역모 사건 같지도 않은 이 사건의 뒷수습으로 인해 정신 못차리던 조선 조정은 대충 마무리가 되어 가자 그제서야 다시 귀찮은 일본 사신을 해결하고자 했다.
조선 조정은 일본의 진의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는 일본 사신에게 3년전에 발생하였던 전라도 흥양의 손죽도의 왜구 침입 때 이들의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인 사화동과 당시 왜구들의 두목을 잡아 보내면 통신사를 파견하였다고 조건을 붙였다.
조선측의 요구사항을 들은 소오 요시토시는 즉시 야나가와를 쓰시마에 보내어 사화동과 왜구 두목이라면서 일본인 3명을 잡아왔다. 그리고 왜구들이 사로잡아 갔던 조선인 80여 명도 송환하였다.
이렇게 되자 조선 조정에서는 별다른 수도 없고, 이번 기회에 일본 조정의 정세도 함께 살펴보는 것도 나쁠 것이 없다는 판단하고 통신사 파견을 결정하였다.
선조 23(1590) 조선 조정은 정사에 황윤길을, 부사에 김성일, 서장관에 허성, 수행 무관에 황진을 임명하여 100여 명 규모의 통신사를 편성하여 일본에 파견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7월 일본 쿄토에 도착하였으나, 11월에야 도요토미를 만나 국서를 전달한 뒤 답서를 받아 귀국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선조 24년(1591)에 복귀한 통신사 정사와 부사가 복명한 내용의 진실성 여부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유명한 이야기죠). 정사인 황윤길과 서장관인 허성은 모든 정황으로 보아 일본의 도발 가능성이 농후하는 것이었으나, 부사인 김성일만이 일본의 도발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갑론을박하고 있었을 때 통신사와 함께 다시 온 겐소가 선위사의 전한(典翰) 오억령에게 '내년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으로 쳐들어가겠다'라는 이야기를 했고, 오억령은 이 말을 다시 조정에 보고하였으나, 조정은 허위 보고라며 그를 해임시켜 버렸다.
소오 요시토시와 겐소등은 계속 조선의 대신들을 만나 일본의 침공 가능성에 대해 경고를 하였으나 하나같이 이를 무시하였다.
한편 조선 조정에서는 또하나의 문제를 가지고 논란이 일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일본의 명나라 '침공' 의사를 명에게 알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다.
유성룡등은 이 일을 알려야 된다는 입장를 가지고 있었지만 일부에서는 자칫 명이 조선을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만약 명이 먼저 이 사실을 다른 경로를 통해 알게 된다면 조선의 입장이 더욱 난처해 질뿐만 아니라 일본의 농간으로 인해 다른 오해까지 생길지도 모른다는 의견에 따라 김응남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이 사실을 명에 알리게 되었다.
하지만 명은 이미 일본의 '불순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다. 무역상인 진신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도요토미가 중국을 침범할 조짐이 보이며, 또한 조선을 앞세우려 한다'는 정보를 복건성 순무에게 알렸고 순무는 다시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유구국의 중상왕부장사(中上王府長史) 정동과 왕세자 상령 또한 이러한 사실을 명나라 조정에 알려 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에서 아무런 말이 없자 명나라 조정 안에서도 조선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던 실정이었다.
그러던 차에 김응남이 하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들어가 일본의 실상과 조선이 처한 입장을 밝힘으로써 명나라 조정의 의심을 풀 수 있었다. 그리고 10월에 다시 한응인을 진주사(陳奏使)로 보내어 해명을 하였다.
3. 조선의 군사력
1) 조선 초기의 국방 체계
조선 왕조의 기본적인 병역 원칙은 양인개병(良人皆兵)과 병농일치(兵農一致)제로 노비를 제외한 16세이상 60세에 이르는 양인의 정남(正男 : 장정)은 누구에게나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 이 경우 정남은 정병(正兵 : 현역군인)으로서 실역을 마치거나, 보인(保人 : 보충역)으로서 실역 복무에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 하는 두가지 중의 한 가지로 구분되었다.
이와 같은 원칙을 전제로 하여 군은 크게 중앙군인 경군(京軍)과 지방군인 향군(鄕軍)으로 구분 편성되었다.
중앙군은 태조 3년(1394)부터 세조 초년까지 약 60년간에 걸쳐서 여러 차례의 개혁을 거쳐 5위 체제(의흥위(義興衛), 용양위(龍?衛), 호분위(虎賁衛), 충좌위(忠佐衛), 충무위(忠武衛))의 편제가 확립되었다.
5위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중앙군은 의무병인 정병을 비롯하여 시험으로 선발된 정예부대와 왕족, 공신 및 고급관료들의 자제들로 편성된 특수병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복무 연한에 따라 품계와 녹봉을 받았다.
지방군인 향군은 육군과 수군의 두 가지 병종으로 구분되어 국방상 요지인 영(營), 진(鎭)에 주둔하면서 변방 방어에 종사하거나 일부 병력은 교대로 수도에 상경하여 도성 수비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영진군은 주로 해안 및 북방 변경지대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내륙 지방에는 거의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병력 부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향리, 관노, 무직백성, 공노비등으로 구성된 예비군인 잡색군(雜色軍)을 편성하여 해당 지역의 수령 지휘하에 두었다.
지방군의 방어개념은 각 도에 주진으로서 병영(병마절도사가 지휘)과 수영(수군절도사가 지휘)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각 처의 요충지에 거진(첨절제사가 지휘), 진(동첨절제사가 지휘) 등 대소의 진영을 두어 유사시에 주진 진장의 지휘하에 지역 방어에 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진을 중심으로 한 방어 체제는 신속한 병력 집결이 이루어지지지 않는 취약점이 노출되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세조 1년에 거진을 독립된 방어 편성 단위로 하고 그 아래에 군, 현의 병력으로 제진을 관할하게 하는 진관 체제가 채택되었다.
그 후 을묘왜변을 전후로 한 시기에 조선의 군사적 환경이 급변하면서부터 근 1백여년 동안 고수해 오던 진관 체제는 변모를 가져와 제승방략의 분군법으로 방위 체제가 전환되었다.
분군법은 지역 수령들에게 사전에 작전 지역을 배정해 주고 유사시에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진관지역에서 작전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작전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유사시 최전방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갖추고 있는 반면에 작전 지역에 집결한 병력은 중앙에서 파견되는 경장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그 지휘를 받아야 하는 시간상의 문제점이 있었다. 또한 최전방에 대한 과도한 병력 집중으로 말미암아 후방지역이 공백화 될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위 체제는 왜구와 야인의 소규모의 침입을 자행하던 시기에 방어병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큰 전란을 겪지 않은 조선 조정으로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2) 국방력의 와해
조선왕조는 건국 후 2백여 년간 이렇다 할 외환을 겪지 않은 가운데 평화가 계속됨과 동시에 문치를 국가 정책의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국가의 기풍을 문약에 빠짐과 동시에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국방체제도 점차로 이완되기에 이르렀다.
국방의식이 희박해지고 군정이 이완되어 감에 따라 각종 국방 제도도 그 자체가 형식화되어 남해안과 북방의 변경 지역에서 근근이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전국 각지에서는 군역을 부과하지 않거나 대역인을 세우고 군포를 납부하도록 하는 방군수포와 대역납포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미 병력은 장부상으로만 존재하였으며 군은 실제로 무력한 대역인으로만 편성되어 병력 부제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결국 임진전쟁을 치러야 할 선조 때에 와서는 경군(중앙군)과 향군(지방군) 모두 병부에 편제 상의 정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실병력은 거의 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3. 조선의 전쟁 대비 태세
옛날부터 국가를 수호하는 데는 군비가 필요한 것이지만 군비의 증강은 국력의 변화에 따라서 결정되기 마련이다.
조선은 고려말 전국토가 전장화 되었던 것을 교훈삼아 전국토의 자전 자수의 국방체제를 만들었으나 약 2세기간에 걸친 평화 속에서 이 방위체제는 유명무실화해졌다.
물론 이 기간에도 북방의 4군 6진의 개척을 위한 여진과의 충돌은 있었으나, 국가의 사활을 건 전쟁은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은 북방의 여진과 남방의 왜구관계에 있어서 군사적 대결보다는 회유의방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더욱이 통치정책이 유학의 문치를 숭상했기 때문에 군사력는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던 것이며 특히 일본과는 피동적인 평화유지를 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의 국내사정에는 어두웠고 일본이 전쟁 준비를 진행하여 '입도가명'을 빙자한 침략의 뜻을 밝히고 있었음도 적극적인 외교나 방위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일본과의 통신사 교섭 과정에서 일본의 내침이 분명히 예견되는데도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고 다만 소극적으로 대처했을 뿐이다.
선조 24년 정월 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갔다 돌아와 정사 황윤길이 일본의 침략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보고가 있자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했다.
우선 북방의 야인방어에서 실전 경험이 있었던 평안병사 신립과 함경남도병사 이일을 모두 경직(京職)으로 교체하여 경성으로 오게 하였다. 또한 전투용 무기로는 효용이 높은 화약무기의 경우 그 사용법을 알고 있는 자가 화포장 약간 밖에 없으므로 출번의 제읍 군사 전부는 물론 병조와 군기시제조 일동도 교습케 하였으며 그리고 전라도 해변의 제읍 수령을 교체케 하였다.
유성룡은 연로한 경상우병사 조대곤을 교대하도록 요청하였으며, 경상, 전라도에 행해지던 제승방략은 대규모 적의 내침에 대비한 군사력 배치로서는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대로 내려오는 진관 체제로 복귀토록 상주하였다.
유성룡이 건의한 내용을 정리해 보면...
1. 전라좌수사, 경상우병사 등 일선 지휘관의 교체.
2. 제승방략을 폐지하고 진관체제로 복구하는 방위체제의 개편
3. 조총훈련 및 주전무기의 보강
4. 남방 요충지 축성 및 방어시설의 구축
하지만 이 중 제대로 받아들여 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축성등의 방어책도 강구하였으나 외형적인 설비에만 힘쓰고 극히 비전술적이었으며 피폐한 백성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원망만을 크게 하였다.
결론적으로 조선은 이미 전쟁이 일어나기 적어도 3,4년 전부터 막연하나마 적의 침입 의도를 간파하여 그 나름대로 방어 준비를 계속하여 왔지만 군사, 즉 백성을 피폐케하는 문제점을 제거하고 문란한 군정을 바로잡아 국방력을 정비하려는 근본적 개혁조치가 없었기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다만 임란 발발하기 직전에 수차에 걸쳐 왕래한 일본사신과 통신사 일행의 보고를 통하여 일본의 도발 가능성을 인식하고 김수, 이광, 윤선각 등을 각각 경상, 전라, 충청 삼도의 감사로 임명하여 성벽 수축과 군기의 수리등을 독려하도록 하는 소극적인 조치를 취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부분적인 군인사의 개편을 단행하여 남해연안의 국방요위지에 유능한 군사지휘관을 새로이 배치하였다.
수군의 경우 주력선이 조선 초기에는 맹선체제였으나 명종 대에 이르러서 판옥선 체제로 변경되었는데 그 후 변경된 체제에 대한 정확한 관련 법규가 남아 있지 않아 그 정확한 규모를 판단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맹선 규모로 판옥선을 유지하도록 되어 있다고 하나 역시 정확한 기록은 현재 없는 상태이다.
경국대전 및 기타 법규 상으로는 보유해야 할 전함과 병력수는 다음과 같다.
종 류
규정 배치수
대맹선(정원 80명)
82척
중맹선(정원 60명)
190척
소맹선(정원 30명)
202척
무군맹선(근무지원 및 수송선)
248척
전함 총수
722척
병력 총수
48,800여 명
그러나 조선은 화기 분야에 있어서는 비교적 우수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초기부터 서북 변방의 야인 집단과 남해 연안에 침입하는 왜구를 격토하는 과정에서 화기 개발과 개량에 치중한 데에 힘입는 결과로서 천,지,현,황자 총통 등 우수한 성능의 중화기들을 다양하게 보유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수군의 경우 편제상으로는 대맹선 82척(隻). 중맹선 190척, 소맹선 202척, 근무지원 및 수송선인 무군맹선 248척과 병력 48,800여명을 보유하게 되어 있었으나, 편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조선은 국방부재 속에서 일본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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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인데 여기는 가감없이 그대로 옮겨온 내용입니다.
위에 보면 몇가지 대책을 강구하기야 했지만 대부분이 탁상공론으로 매듭지어집니다. 유일하게나마 우세했던 화기가 나중에 이순신의 신화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군요.
처참하게 진거지 그럼 그게 이긴겁니까? 결국 명나라가 들어오고 일본이 철수하고 해서 이기게 된 셈이지만, 18일만에 도성이 넘어가고 백성들이 어육이 된 것이 처참한 패배가 아니면 어떤것이 처참한 패배에요?? 군사학? 국방대학교 다니십니까? 어차피 다 아마추어들인데. 무신소리를 하는겨??
허 참. 우기기 명수네. 수도를 뺏기고 패배를 하다가 이긴거라고 하니까 패배라는 단어만 붙들고 말을 하네. 초창기에 패배한 것은 사실아닙니까? 결과적으로 이긴거지. 그럼 한국전쟁 초기부터 우리는 패배한 것이 아니고 작전상 후퇴로 서울을 내준겁니까? 밀리던 패배든 결과적으로 진거지.
그리고 일본에서는 인조이제팬(혐한류로 유명한 곳이죠)에서는 임진왜란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무승부...더 나아가서 일본기록은 무의미한 전쟁으로 기록합니다 더 나아가 아마 1980년대 책같은데(책이 너덜너덜합니다)일본인이쓴 소설 임진왜란이라는 책을 보면 일본이 패했다고 말합니다
싸울만한 문제가 아닌듯 싶은데여 200년간 전쟁이라곤 생각도 못해온 나라가 나름대로 전쟁준비를 했다고 하지만 마음먹고 공격해온 쪽에(그것도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초반 밀리는건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초반 6개월 정도 이후엔 비등하게 싸웠으니 애시당초 상대가 안 됐던 것도 아니구여
그리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말을 전시에 타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기병훈련을 받은 기병이 그만큼이나 존재했다는 것은 그만큼 한반도 지형에서도 기병이 중요했다는 것일 텐데요 지금 이 글의 논쟁의 원래 초점은 님이 서양사에 올렸던 그 글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처참하게 진거지 그럼 그게 이긴겁니까? 결국 명나라가 들어오고 일본이 철수하고 해서 이기게 된 셈이지만, 18일만에 도성이 넘어가고 백성들이 어육이 된 것이 처참한 패배가 아니면 어떤것이 처참한 패배에요?? 군사학? 국방대학교 다니십니까? 어차피 다 아마추어들인데. 무신소리를 하는겨??
수도 뺏긴게 패배라면 그럼 6.25전쟁에서 남한군은 패전이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명나라 군대는 벽제관 전투이후부터 거의 제 역활을 하지도 못합니다 6.25전쟁당시 미군보다 훨씬 못합니다
그리고 거점만 뺏은 일본군은 그 이후 어떻게 되는줄 아십니까??그 제대로 점령하지도 못한 지방에서 의병이 일어납니다 참고로 곽재우가 활동했던 지역은??경상도입니다
허 참. 우기기 명수네. 수도를 뺏기고 패배를 하다가 이긴거라고 하니까 패배라는 단어만 붙들고 말을 하네. 초창기에 패배한 것은 사실아닙니까? 결과적으로 이긴거지. 그럼 한국전쟁 초기부터 우리는 패배한 것이 아니고 작전상 후퇴로 서울을 내준겁니까? 밀리던 패배든 결과적으로 진거지.
일본의 전쟁방식이 그래요. 두목만 잡으면 쌈이 끝나거든. 그런데 조선은 안그러니 일본으로서는 꼬인게죠. 그정도는 나도 알아요. ㅡㅡ;
그리고 일본에서는 인조이제팬(혐한류로 유명한 곳이죠)에서는 임진왜란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무승부...더 나아가서 일본기록은 무의미한 전쟁으로 기록합니다 더 나아가 아마 1980년대 책같은데(책이 너덜너덜합니다)일본인이쓴 소설 임진왜란이라는 책을 보면 일본이 패했다고 말합니다
저기... 내공 딸리면서 끼어들어서 죄송하지만... '기습'의 효과 아닐런지요.. 조선군의 강력한 제식병기도 수년간의 전란으로 단련된 일본군을 초전에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겠죠. 세험절단(勢驗節短)이란 말이 있듯이 강력한 일본의 단련된 예봉을 견뎌내지 못한듯 합니다.
조선군도 거렁뱅이나 술주정이나 일삼는 군기빠진 군대는 아니었겠지요. 하지만 오랜 기간의 평화로 굉장히 허약한 상태였을 것이라는 의견에는 저도 찬성합니다.
밑에도 섰습니다만..... 전쟁준비를 했냐 않했냐하는 이분법적인 내용으로 볼 것은 아닙니다. 분명 제가 볼때도 나름대로 대비를 한다고 한 건 맞습니다. 문제는 그게 손발이 제대로 않맞은 거죠. 싸움도 늘 하던 넘이 능숙한 것 입니다.
싸울만한 문제가 아닌듯 싶은데여 200년간 전쟁이라곤 생각도 못해온 나라가 나름대로 전쟁준비를 했다고 하지만 마음먹고 공격해온 쪽에(그것도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초반 밀리는건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 초반 6개월 정도 이후엔 비등하게 싸웠으니 애시당초 상대가 안 됐던 것도 아니구여
그냥 간단하게 몸 덜풀린 상태에서 고생 좀 하다 서로 박터지게 싸운걸로 하자고 하면 너무 건성건성인걸까여??^^;;
누가 일본이 이겼답니까? 난 승패를 논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초반에 패배했다고 했고, 사실이면서 준비부족이라는 점을 말을 한겁니다. 승패논쟁까지 하자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