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글라스
송은일
-지진 해일, 12월
인도양 연안에 몰아닥친 지진 해일 뉴스를 보던 밤, 텔레비전에서 푸켓이란 이름을 직접 듣지는 못했다. 들었어도 다를 건 없었을 터였다. 우리 식구가 그 섬에 가서 놀고 온 건 그 전 해였다. 바다가 퍼렇게 내려다보이는 호텔에 묵으면서 호텔 아래 펼쳐진 파통 해변에서 맨발에 핫팬츠 차림으로 놀았다. 호텔에서 해변까지의 가파른 오솔길엔 판자와 통나무로 만들어진 긴 계단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었다. 계단 주변에 온갖 꽃들이 피어 그늘을 드리워 주었다. 그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아이와 끝도 없는 가위바위보 놀이를 했다. 아이가 잠든 밤에는 남편과 야외 라운지에 나가 맥주를 마시며 가수들의 라이브 공연을 즐겼다. 라운지 아래에 펼쳐진 검은 바다가 해변에서 뻗어나간 불빛들에 이따금씩 무지개 빛으로 일렁였다.
저 멀리 텔레비전 속 다른 나라들에 무슨 난리가 나든 나와 무관했다. 내 남편과 내 아이는 고작해야 덕유산에 가 있었다. 산에 다녀온 남편한테서는 언제나 맑은 바람이 불었다. 아이도 그처럼 맑은 바람을 풍기면서 돌아와 나를 안아줄 터였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딸아이는 활달하고 명랑했다. 계집애들이 사춘기를 겪으며 부릴 법한 신경질 같은 것도 없는 아이였다. 공부도 제 학급에서 으뜸이었다. 의사가 되어 ‘국경없는 의사회’에 들어가 세계를 주유하며 사는 게 아이의 꿈이었다. 지금 아니면 다시 못해 볼 겨울 야영 경험이라고 아이가 제 아버지를 졸라 부녀가 산행을 떠난 밤. 집에 혼자 남은 나는 혼자 강 건너에 난 불을 구경하듯, 심란하면서도 흥미롭게 수십 만 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난리를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그 잠이 기점이었다. 자고 일어난 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 속에 처박혀 있었다. 그날 밤 이후 나는 누워서 잠들지 못한다.
-1층 여자, 사월
폭우가 쏟아졌다. 유리벽에 부딪쳐오는 빗발이 어찌나 거세든지 가게 안이 흐릿하고 멍한 침묵에 휩싸였다. 그 흐릿한 시야 속에 느닷없이 샛노란 우산이 나타났다. 우산대 중심을 잡아보려고 기를 쓰는 것 같은 여자의 목적지가 처음부터 내 가게였는지는 알 수 없다. 여자는 태풍에 쫓긴 쪽배처럼 내 가게 안으로 들어와 닻을 내리듯 우산을 접었다. 1층 여자였다. 그네가 든 우산에서 물이 줄줄 흘렀다. 길고 헐렁한 남색 치마와 손으로 뜬 붉은 스웨터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졌다. 머리에 파머 캡을 쓰고 바깥의 폭우를 지켜보던 단골손님 둘이 1층 여자를 기이한 동물 만난 듯 건너다보았다. 골목 모퉁이 꼬치구이 전문점을 하는 여자와 그의 친구였다. 그들의 시선을 흩트리듯 나는 수건을 가져다 1층 여자한테 건네주었다.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넉 달 동안 그네는 몸이 더 분 듯했다. 자신에 쏠린 시선은 아랑곳없는 듯 그네가 비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마구 헤집어 까치집으로 만들다가 소리쳤다.
“난로 없어요?”
비가 쏟아지고 있긴 해도 며칠 째 한여름 날씨였다. 실내에서는 민소매 옷을 예사로 입게 된 때인데 비에 젖은 그네는 몹시 떨었다. 보조 미용사인 미애한테 내실에 들여놨던 전기난로를 내다 켜주게 했다. 소파에 앉은 그네는 난로를 더 가까이 당겨놓고 멍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곧 낡은 쿠션 같은 모습으로 깊은 잠이 들었다.
내가 여자를 처음 본 건 지난 해 성탄일 전날 저녁참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라 해도 초저녁 낡은 아파트 단지에는 건조한 바람만 휘뚝거리듯 불 뿐 조용했다. 내가 사는 동의 내 집 입구만 소란했다. 계단 입구에 이삿짐 트럭이 선 채 짐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일층 1호가 실내 개조 공사를 하고 있었던 게 생각났다. 오래된 저층 아파트라서 이사 올 사람들은 흔히 그 공사를 했으므로 그런가 보다 했다. 베란다를 터 거실을 넓힌 것 같은데 새로 설치한 창으로 내부가 일체 들여다보이지 않는 게 기이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데다 1층이어서 짐은 현관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때 아닌 이삿짐이라 짐이 비키기를 기다리다 여자를 보았다. 키 160센티 가량, 몸무게 70킬로그램쯤, 원래는 갸름했을 터이나 불어난 체중으로 곰인형처럼 둥그러진 얼굴, 마흔 서너 살 정도……. 그렇게 인상착의를 살폈던 건 21년 차 미용사의 직업병 탓이었을 터이다. 제 몸에 너무 작은 코트를 억지로 꿴 듯한 차림새로 짐꾼들을 지휘하던 여자 목소리는 지나치게 높았다. 아이, 아저씨 조심 좀 해요. 그거 얼마나 비싼 소파라고요. 흠집나면 어쩌려고 그래요? 아닌 게 아니라 주황빛 도는 가죽 소파가 낡은 21평형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턱없이 고급스러웠다. 고급 소파 대신 몸에 맞는 옷이나 사 입을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삿짐을 지나쳐 내 집으로 올라가곤 1층을 잊었다.
잠든 여자한테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화장기 없는 낯빛이 미농지처럼 창백하다. 파머 캡을 쓴 채 매니큐어와 페디큐어를 하고 있던 손님들이 거울 속에서 눈으로 자꾸 물었다. 누구야? 몰골이 왜 저러니? 나는 그들에게 입 다물라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1층 여자한테서 난로를 약간 떼어놓으며 보니 이마가 참 예쁘다. 속눈썹도 성냥 서너 개는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길다. 눈썹 집게로 걷어 올려놓기만 해도 눈이 깊어 보이면서 생기가 돌 것 같다. 여자들 몸만 쳐다보며 살아온 20여 년 동안 제 몸을 이렇게 방치한 손님은 만난 적이 없었다. 모두들 살을 빼느라 전쟁이라도 치르는 듯했고 눈썹이며 속눈썹에 문신하기는 예사였다. 쌍꺼풀수술과 콧대 세우기도 보통이고 주름살 부위마다 보톡스를 맞는 것도 당연해졌다. 요새는 음부에 콜라겐 주사를 맞는 일도 흔해진 듯했다.
“태풍 온다는 소리 못 들었는데, 소나기겠지?”
꼬치구이 전문점을 운영하는 여자가 매니큐어 바른 손가락을 입으로 불다가 하품을 하며 거울 속에서 혼잣말을 했다. 꼬치구이와 함께 온 여자도 발가락에 손부채질을 하다가 하품을 늘어져라 하더니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화장 지워지지 않게 조심스레 찍어낸다. 얇은 시폰 원피스 속에 갑옷처럼 튼튼한 보정 속옷을 받쳐 입어 온몸의 볼륨이 탱탱하게 살았다. 쌍꺼풀 수술과 속눈썹 문신을 하고 콧대를 세운 그네는 금방 세수를 하고 나도 화장한 듯 보이는 여자였다. 그들에 비하면 1층 여자는 스무 해 전쯤에서 이쪽으로 느닷없이 부려진 짐 같다.
두 단골의 머리 손질을 마쳐 내보내고 나니 비가 잦아들었다. 그 사이에 들어온 세 여중생 머리를 차례로 만지는 동안에도 1층 여자는 내도록 앉아서 잤다. 모로 쓰러져 잘 법한데도 목이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만 살짝 숙인 채 이따금 짧은 한숨을 쉬어가며 잔다. 그 한숨이 몹시 언짢다. 한숨소리가 날 때마다 여자를 깨워서 내쫓고 싶어진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어떤 식으로든 아는 체하고 나서는 순간 감당하고 싶지 않는 일에 휘말릴 수 있다.
마흔 살까지만 이 짓을 하리라, 고 작정한 게 서른 살 때였다. 마흔 한 살부터는 산 밑 마을에다 자그만 찻집을 열고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살 예정이었다. 땅은 진작 구입해 두었다. ‘전통차 연구회’에 들어가 차에 대한 공부도 짬짬이 했다. 요즘은 집을 어떻게 지을지 궁리해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올해가 내가 정한 내 정년이었다. 여름 지나면 미용실을 내놓을 것이므로 내 은퇴는 여덟 달 후가 아니라 서너 달 뒤일 수도 있었다. 가게를 접으면 우선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더 이상 돌아다니고 싶지 않으면 그때 돌아와 궁리해놓은 대로 집을 지으며 얼마나 될지 모를 내 남은 삶을 다시 시작하자. 계획은 단순했다. 그 단순함을 복잡하게 만들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와도 얽히고 싶지 않았다.
-5층 여자, 6월
장은심. 40세. 미혼. 미용사 된 지 22년째. 미용사라기보다 수녀나 비구니처럼 보이는 여자. 새벽마다 아파트 옆 삼각산을 한 시간 반쯤 걷다 내려와 미용실에 출근한다. 일이 끝나는 시각은 대개 오후 여덟시쯤. 여섯 딸과 막내아들로 이루어진 칠남매 중 셋째 딸이며 실업학교를 다니면서 취득한 미용사 자격증으로 손아래 동생들을 돌보며 나이가 들었다. 한 달에 한번 미용사들로 이루어진 자원봉사회 사람들과 미용 봉사를 다니고 특별한 취미는 없다. 단골손님이 많은 미용실 ‘화니 헤어 컷’을 보조 미용사 한 명 데리고 꾸리고 있다. 단골손님들은 은심을 환희나 화니로 부른다. 은심의 흰색 중형차는 만날 내 창 앞 화단 앞에 세워져 있다. 그 차가 움직이는 일은 일주일에 한번쯤이나 될까. 내가 아는 한 그동안 밤을 새고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까 현재 은심에게 남자가 없을 확률이 높다. 예상했던 바다.
새벽 여섯시면 어김없이 계단을 내려온 은심이 삼각산으로 가면 나도 집을 나서서 그네 뒤를 따른다. 삼각산은 사방에서 먹혀들어 옹색한 도시 안의 야산이지만 정작 올라보면 굴곡이 꽤 심했다. 산에서건 평지에서건 은심의 보폭은 일정하고 움직임은 고요하다. 산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입구에서 나는 수시로 은심을 놓쳤다. 애초에 그네 걸음을 따를 수 있을 거라고 여기지도 않았으므로 나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반시간쯤 산길을 걷다가 은심보다 먼저 돌아서 내려온다. 그렇게만 따라다녔음에도 내 체중은 서서히 내리고 있다.
사실 거의 평면처럼 보이는 은심을 관찰하고 있노라면 살이 저절로 빠지는 것만 같았다. 개와 고양이가 붙어 자라면 개는 자신을 고양이처럼 느끼고 고양이는 저를 개처럼 느낀다던가. 지금은 내 일방통행이지만 나중에는 혹 모른다. 은심도 저를 나처럼 보게 될지. 물론 은심은 내가 저를 뒤따라 산에 다닌 걸 모르고 내가 날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유리를 통해 제 출입을 살피는 것도 모른다. 모르는 게 좋을 것이다. 저와 나, 둘 다에게. 십년쯤 이만큼의 거리로 붙어살다가 불현듯 제 단 하나의 남자와 내 남편이 같은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이미 우리는 누가 개이고 고양이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어 있지 않을까.
내 남편과 내 딸. 눈이 내려 밤에 산을 내려오다 계곡으로 추락해 절명한 것 같다는 그들의 주검을 나는 보지 못했다. 시아버지와 시숙들이 그들을 수습해 화장하고 뼛가루를 선산에 묻고 남편의 가게를 처분하는 동안 나는 내도록 잠만 잤다. 겨울이 깊어졌다 물러가고 봄이 왔다가 가는 동안에도 제정신이었던 적이 없었다. 제정신 아닌 정도가 아니라 뇌의 기억장치를 마구 헤집어놓은 것처럼 반년 정도의 시간이 흐리마리했다. 까맣게 빈 곳도 많았다. 흐리거나 빈 내 머릿속에 들어앉은 건 쓰나미니 지진 해일이니 인도양이니 하는 단어들이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인도양으로 여행을 갔다가 지진 해일에 휘말려 사라진 것 같았다. 주검을 찾지 못한 죽음들이 부지기수라 하지 않았는가. 꼭 내가 표를 끊고 짐을 싸 그들 부녀를 비행기에 태워 보낸 듯했다. 금세라도 그들이 여행 가방을 들고 들어와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 것 같아 나는 누울 수가 없었다. 허기져 들어올 그들을 위해서 끝없이 음식을 만들어야 했고 그들을 기다리며 먹다가 앉아서 졸곤 했다.
작년 여름 더위와 함께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나를 못 알아보았다. 팅팅 불어난 몸통에 긴 머리를 뒤집어쓰고 유령처럼 서성이는 여자. 『제인 에어』에 나오는 로체스타의 미친 여편네가 그 순간 어떻게 떠올랐는지 모른다. 그 여자의 웃음소리를 들은 적 없음에도 꼭 그 여자인 듯 킬킬 웃으면서 내가 미쳐 지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여자를 가둔 사람은 그의 남편이지만 나를 가둔 건 나였다. 그 여자는 진짜 미쳤지만 나는 맘만 먹으면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는 살아갈 핑계나 이유만 찾으면 되는 여자였던 것이다. 비로소 남편과 아이의 물건들을 정리했다. 그들이 나가고 난 아침이면 오후나 밤에 돌아올 그들을 위해 청소를 했듯 차곡차곡 씻고 말리고 다려서 제자리에 놓았다. 와중에 남편이 속했던 산악회원들의 2000년 주소록을 발견했다. 쉰 세 명이나 적힌 이름들은 대개 남자들이었고 여자는 예닐곱 명 정도였다. 회원들 거주지도 거의 전국적이었다. 내가 아는 이름은 눈에 띄지 않았다. 사실 나는 남편이 산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관심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아는 이름이 있을 리 만무했다. 장은심이라는 이름을 눈여겨보게 된 것은 순전히 집 주소 대신 주소록에 적어놓은 ‘환희 헤어 컷’이라는 미용실 이름 때문이었다. 머리를 만지기는 해야 하는데, 싶어서.
주인들은 절명했는데 저희들은 멀쩡히 살아 내게 돌아온 두 대의 전화기도 정리하기로 했다. 아이 전화에는 수십 통의 문자 메일이 기록돼 있었다. 제 아버지를 따라 나섰을 때 친구들한테 아빠와 산에 간다고 자랑을 많이 했던가. 아이 친구들 여럿이 그 날 메시지를 보내놓았다. 아빠하고 무슨 재미로 산엘 가냐는 비아냥이거나 부러워하는 내용들이었다. 아이 전화기만 가지고도 하루를 울었다. 남편 전화기는 다음 날 열었다. 컴퓨터를 파는 사람답지 않게 남편 전화기 속은 단조로웠다. 백통 가까운 통화기록은 수신과 발신 표시만 달랐을 뿐 숫자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아이 전화기를 붙들고는 울었지만 남편 전화기를 붙들고는 욕설을 퍼부었다. 왜 산 따위를 다녀가지고……. 애를 왜 데리고 나가……. 혼자 죽을 일이지……. 제 새끼 하나를 못 살리는……. 내가 하루 종일 퍼붓고도 남을 욕설을 알고 있으리라곤 스스로도 몰랐다. 그러다 발견했다. 끝자리 네 숫자가 산악회원 주소록의 화니 헤어 컷과 같은 핸드폰 번호를. 섬광처럼 휙 지나간 그 느낌은 이미 예감이 아니었다.
내가 왜 은심 근처로 옮겨오기로 했는지 그때는 몰랐다. 질투는 물론 아니었다.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에 없는 남편의 여자한테 무슨 질투를 느끼랴. 미움도 아니었다. 나는 남편을 미워해 본 적이 맹세코 한 번도 없으므로 그가 산에서 만났을 여자도 밉지 않았다. 그렇다고 설마 애정이기야 했을까만, 굳이 핑계를 찾아야 한다면, 은심이 남편과 아이가 남긴 모든 흔적들의 살아 있는 집합체 같은 존재로 느꼈으니 애정 쪽에 더 가까울 터이다. 그래서 이 아파트 단지 근방 부동산 소개소들에다 이 단지 안에, 이왕이면 은심과 같은 동에 집이 나오면 알려 달라고 전화를 해두고 일주일이 멀다 하고 내 쪽에서 확인했다. 들고 나는 집이 많은 아파트 단지였다. 5개월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은심과 같은 계단을 쓰는 1층에 아파트가 나왔다는 연락이 왔다.
이사를 와서도 은심과 안면을 트기까지 나한테는 몇 달이 필요했다. 친해지기까지는 두어 달이 더 걸렸다. 아니 아직 친해졌다고 하기 어렵다. 그저 익숙해졌다고나 할까. 은심은 좀체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여자지만 이제는 나를 경계하지 않는다. 외려 나를 가여워하고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나만큼 가여운 여자가 또 어디 있으려고. 남편과 딸을 동시에 잃어버리고 무주공산에 남겨진 여자. 고통에도 지수가 있다 했다. 고통 체감도도 있을 것이다. 면역지수도 있겠지. 나한테 주어진 고통지수는 내 체감도로 겪기에는 너무 높았다. 나는 일체의 면역성이 없었다. 지금 나는 이제야 겨우 면역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중이다. 물론 은심은 그것도 모른다. 제 말을 하는 대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속내를 주절주절 털어놓게 하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그네지만 나도 남편과 딸에 대해 말하지는 않는다. 각기 혼자 산다는 사실 한 가지로 은심과 나는 이미 동족이었다.
베란다를 높여 거실에다 잇고 통유리를 매직글라스로 설치하느라 돈은 좀 더 들었다. 대신 오래 된 저층 아파트의 일층 창 안에서 내가 맨몸으로 춤을 추든 포르노 프로그램을 켜놓고 자위를 하든 거리낄 게 없다. 내가 매직글라스 안쪽에서 주로 하는 일은 뜨개질이다. 하루 두 번 산에 잠깐씩 다녀오고 하루 두 번 밥 먹고 한 번 시장 나들이를 겸한 화니 헤어 컷 순례를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뜨개질을 한다. 지난달에는 연쑥색 레이스 실로 엘리컨트 스타일의 카디건과 둥근 모자를 떴다. 진녹색의 큼직한 단추로 카디건을 마무리하고 모자에도 같은 단추를 하나 달아 악센트를 주었다. 그걸 종이상자에 담아 건넸을 때 은심은 몹시 당황했다. 예상했던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는 은심이 내 예상 범위 안에서 반응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장차 뜨개질 가게를 해 볼 참이라 연습 삼아 뜬 거라고, 그때 손님 소개 많이 해 달라고 주는 뇌물이라고 했더니 은심은 마지못해 받았다. 그러고는 일주일 만에 최고급 기초 화장품 세트를 나한테 안겨주었다. 너무 깍듯한 그 되갚음이 서운하다 못해 화도 났다. 물론 화를 내지는 않았다. 나는 약간 정상에서 벗어나 있는지 모르지만 바보는 아니니까. 은심은 내가 떠준 카디건을 입지 않은 채 계절을 지나쳐버렸다. 하긴 철에 비해 좀 늦은 감이 있긴 했다. 그래서 새로 시작한 옷은 모자 달린 감색 반코트다. 가운데 트임 선에다 금박 단추를 달면 예쁠 것이다. 가을이 되면 은심에게 입힐 참이다. 은심은 아침저녁으로 내 집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내 집 문을 두드릴 줄 모른다. 나를 제 집으로 청하지도 않는다. 가게에 손님이 드물 시간을 어림해 내가 찾아들면 반갑게 맞아주고 밥 먹었냐며 걱정도 해 주지만 나를 제 안으로 들여놓지는 않는다. 나를 제 안에 들이지 않는 건 괜찮았다.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도 참을 수 있다. 제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나를 밀어내게 할 수는 없다. 연민이든 동정이든, 방법은 나를 버릴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내가 그네에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움직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한테 질리게 해선 안 되므로. 은심에게 버려진다면 나는 갈 데가 없지 않은가. 이건 병적이다. 아니 병이다. 하지만 나는 아픈 여자다. 그런 일을 겪었는데 아픈 게 당연하지 않는가? 아픈 사람은 누군가 돌봐야 하고 나를 돌볼 사람은 이 세상에 은심뿐이다.
-기다림, 8월
1층 여자는 마흔 두 살로 이름이 하홍연이다. 홍연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갓 핀 연분홍 연꽃을 연상했다. 자식은 누구나 귀하다지만 누군가의 이름을 듣노라면 그의 존재의 척도가 달리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내 큰언니는 영심이고 작은 언니는 주심이었다. 내 여동생들은 성자, 혜란, 순영이다. 일곱 남매 중 호적에 생년월일이 제대로 기재된 아이는 막내인 국원뿐이다. 놈은 여섯 누나가 싸안아 키운 값을 하느라 대학도 못 가고 스물두 살까지 어정거리다가 지금은 군대 가 있었다. 놈이 군대에서 아주 살아 주었으면 싶었다. 그도 안 될 거라면 놈이 제대하기 전에 내가 사라지고 싶었다.
날마다 시장 길에 들러 차 한 잔씩 마시고 가는 홍연은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 저녁 무렵이면 내 손님으로 찾아온다. 아이들이 둘인 미애가 퇴근하고 손님이 끊겨 가게 문을 닫을까 말까 망설이는 시각에 홍연은 외출할 차림새도 아닌 채 찾아와 머리를 손질했다. 약간씩 다듬거나 파머를 하거나 스카치를 넣거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곧게 펴거나. 올 때마다 별 말은 없다. 그저 지나가는 투로 질문을 툭 던지는데 그게 대개 내 신상에 관한 것이었다. 몇 살이냐. 몇 살에 미용사가 됐느냐. 형제가 어떻게 되느냐. 결혼은 했냐. 왜 결혼을 하지 않았냐. 밤에는 혼자 뭐하냐. 취미는 뭐냐. 당신 머리는 누가 손질해 주냐. 홍연이 심상하게 물으면 나도 심상하게 그네 식으로 단답형으로 대답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홍연은 제 얘기는 하지 않았다. 나도 굳이 묻지 않았다. 한 자리에서 미용실을 십년쯤 하다 보면 인근 동네 여자들의 별의별 신상을 다 듣게 마련이었다. 다 다르면서도 다 같은 이야기들. 굳이 캐어물을 필요가 없거니와 솔직히 홍연에 대한 유다른 관심도 생기지 않았다. 홍연이 넉 달 남짓 토요일 밤마다 찾아오니 오늘도 오려나, 궁금해 하는 얕은 습관이 생기기는 했다.
지난 늦봄에 홍연이 레이스 실로 뜬 카디건과 모자를 건네 오는 바람에 나를 놀라게 했다. 황당하고 미안했다. 잘라낸 머리털들이 들러붙기 쉬워 편물 옷을 입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샤워하고 난 뒤에도 내 손발의 땀구멍에는 손님들의 머리카락이 선인장 가시처럼 박혀 있을 때가 있었다. 가시 같은 머리카락을 핀셋으로 뽑거나 바늘로 후빌 때마다 그것들이 어느새 내 몸에 뿌리를 내린 듯한 착각이 생기곤 한다는 걸 설명하기도 싫었다. 남의 털이 내 몸에서 자라는 상상이 얼마나 소름 돋는지.
남의 옷을 뜨는 대신 제 옷이나 떠 입으면 좋겠다 싶은 홍연은 그 사이 제법 야위었다. 여전히 통통하기는 해도 처음 이사 왔을 때에 비하면 다른 사람이다 싶을 만치 살이 내렸다. 눈매가 또렷해졌고 산발하고 있던 긴 머리카락도 단정해진 채 윤기가 흘렀다. 여전히 요새 여자답지 않기는 하다. 오늘 입고 온 때 아닌 흰 재킷은 유행이 한참 지난 것이었다. 그나마 몸에 작아 단추를 채우지 못했고 머리에는 레이스 실로 뜬 흰 모자를 썼는데 어울리지 않았다. 그네 몸에 덮인 모든 게 하나도 자기 것 같지 않게 겉돌았다. 뜨개질 솜씨로 보자면 자기 몸에 맞는 옷 한 벌 떠내는 정도야 일도 아닐 것 같고, 뚜렷한 일 없이 혼자 지낸다는 걸 보면 형편이 궁색해 보이지 않았다. 몸에 맞는 옷을 사 입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홍연은 꼭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해 고집을 부리고 있는 듯했다.
“비엔날레가 열린다면서?”
오늘은 머리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마주 보인 거울 속에서 홍연이 생뚱맞게 되물었다. 비엔날레 전시장이 동네에서 가깝기는 했다. 걸어서 이십분쯤 걸릴까. 국립박물관과 민속박물관과 문예회관과 시립미술관 등이 죄 포진한 공원 한 쪽에 비엔날레 전시장도 있었다. 며칠 후 비엔날레가 개막될 거라고 했다. 〈열풍 변주곡〉이라는 이번 비엔날레의 타이틀이 도시 곳곳에서 나부꼈다. 열풍 변주곡이 무슨 뜻일까. 열풍이 뜨거운 바람이라는 뜻이라면 변주곡과는 어떻게 이어지는 것인지. 우리 아파트 단지 게시판에도 나붙은 포스터를 보면서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내겐 의미가 와 닿지 않았다. 두 해 전 비엔날레의 타이틀은 〈물 한 방울, 먼지 한 톨〉이었다. 물이 방울방울 모여 도랑을 이루고 내를 이루고 강이 되고 바다에 닿는다? 먼지 한 톨이 모여 태산을 이룰 수도 있다? 반대로 바다가 물 한 방울로 나누어질 수 있고 태산이 먼지 한 톨로 흩어질 수도 있다는, 그런저런 의미들인가 보다고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그때는.
그 비엔날레 막바지 즈음에 도시락을 싸 가지고 전시장에 나가 김종상을 만났다. 종일 그와 손잡고 다니며 미술작품들과 갖가지 공연들을 구경했었다. 사실 비엔날레에 전시된 작품들이 물과 먼지와 어떻게 이어지는지 몰랐다. 관심도 없었다. 그때 내 관심은 김종상뿐이었다. 늘 산에서만 만나다 산 밑에서 만난 그가 새로워 그를 쳐다보기만도 바빴다. 몇 년을 함께 산에 다녔지만 산 밖에서 그를 만난 건 그날 단 하루뿐이었다.
“여기서 가깝다던데, 자기는 비엔날레에 가 봤어?”
미용실에 처음 찾아온 날부터 홍연은 몇 년 묵은 단골손님들처럼 나를 향한 말꼬리를 잘라먹었다. 그리고 단골들처럼 나를 자기라 지칭했다.
“못 가봤어요.”
“나도 비엔날레, 아직 한 번도 못 봤어. 여기로 이사 온 지 몇 달 안 됐잖아.”
아홉 달이나 지났는데 몇 달 안 됐다는 표현이 맞나 싶지만 나는 입을 다물고 홍연의 머리를 빗겼다. 두피 마사지를 마친 뒤 트리트먼트를 듬뿍 짜내 머리카락에다 골고루 바른다. 파머머리는 수시로 손질해 줘야 하는데 홍연은 일주일에 한 번 나한테 들르는 이외에 머리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내가 사라지면 홍연이 미용실에 오는 시간을 달리 할까. 다른 미용실로 옮겨가기 쉬울 것이다. 반경 오십 미터만 따져도 미용실이 수십 군데니까. 다음 달로 미애한테 미용실을 넘기기로 결정하고 나서 홀가분하기만 한데, 유일하게 이 여자 홍연이 마음에 걸렸다. 보지 않아야 할 홍연의 뭔가를 훔쳐본 것 같은 미안함이랄까. 자식을 낳아보지도 않았는데, 흔들리는 자식 보듯 안쓰럽다고 할까. 그렇다고 가게 넘겼으니 다음 달부터 미애한테 머리 손질 받거나 새 미용실을 찾으라고 미리 알려주기도 우스웠다. 집을 복덕방에 내놨다고 알려주는 것도 주제넘을 것이다.
“기다림은 그저 습관 같애. 그리움은 관성이고.”
뜬금없는 말을 혼잣소리처럼 내뱉은 홍연은 거울 속으로 내 손의 움직임을 좇고 있다. 응대를 바란 말이 아닌 것 같다. 기다림과 습관, 그리움과 관성. 그에 대해 응대할 말도 나한테는 없다. 머리나 만질밖에. 이 단계를 손님들은 즐긴다. 시간이 있을 때는 최대한 길게, 시간 없을 때라도 손님이 시원함을 느낄 수는 있을 만치 두피와 머리카락을 아울러 어깨까지 매만진다. 최소한 몇 명의 단골손님은 내가 만져주는 그 느낌 때문에 몇 년째 계속 나한테 온다. 섹스 전의 애무보다 훨씬 근사하다고 말하는 손님들도 있었다.
홍연은 또 잠이 든다. 제 머리를 만질 때 피곤에 겨워 잠깐씩 조는 손님은 있어도 고작해야 일분 정도였다. 곧게 앉아 고개도 떨어뜨리지 않고 자는 홍연을 볼 때면 문득문득 이 여자는 집에서도 앉아 자는 게 아닐까 상상하게 되었다. 그건 내 몸에서 타인의 털이 자라는 듯한 상상만큼이나 무서웠다. 그 때문에 홍연의 짐짓 모자란 듯한 남다름이 꺼림칙했고 나를 향해 뻗는 자신의 손을 애써 감추는 것 같은 조심성도 사막스러워 보였다. 홍연을 그리 여기는 나는 또 짓쩍고 징그러웠다. 그런 내 자신을 숨기기 위해 홍연의 머리에 더 공을 들이는지도 모른다. 잠든 여자의 머리카락을 손질하고 마무리를 짓는다. 구불거리는 모발이 어깨선에 자연스럽게 내려뜨려져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화장을 가볍게 한다면 몇 살은 더 젊어 보일 터였다. 머리 손질이 다 끝나도 홍연은 일어날 줄을 모른다. 머리를 감겨줘야 할 텐데, 싶으면서도 나는 그네 옆 의자에 몸을 부린다.
밤 아홉시, 지금쯤 지리산 중산리 매표소 앞에는 천왕봉에서 일출을 맞이하기 위한 등산회 회원들이 모여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100여 기의 장승들이 한밤중에 모여드는 인간들을 갖가지 표정으로 맞이할 것이고. 새벽 한 시쯤에나 출발하겠지. 칼바위까지 반시간 남짓, 유암 폭포를 지나 장터목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제석봉을 거쳐 천왕봉에 이르면 다섯 시쯤 될 터이다. 시간이 냉엄한 추위처럼 절절하게 흐르는 한밤중 그 길에선 풍경이 보이지 않으므로 사람만 볼 수밖에 없다. 한 때 그 길에서의 나는 김종상만 보았다. 아니 내 안에서 점점 커지는 김종상의 방만 보았다. 내 안에 들었던 수백 개의 방들이 좁아지고 쪼그라들거나 형체가 사라지면서 점점 커지던 그의 방. 네 해 전 제야의 그 길에는 온통 눈꽃이 피어 밤중임에도 눈이 부셨다. 김종상을 발견한 지 일 년째 되던 날이었다.
그날 이후 산행은 주로 둘이서만 했다. 한 달에 한 번 등산로 입구에서 만나 길이 덜 난 등산로를 타고 다녔다. 인적 없는 곳에다 2인용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곤 했다. 야생화가 곱게 핀 숲 속이거나 능선들이 발아래 펼쳐진 산등성이 나무 밑이거나 상수리 잎이 담요처럼 뒤덮인 골짜기거나 눈이 멀 것처럼 눈이 쌓인 산마루 바위 밑이거나. 산 밖에 있을 때는 산이 그립고 산 안에 있을 때는 산 밖의 세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무렵 그는 나의 산이었다. 내가 그의 산임을 느꼈다. 그쯤에는 어쩌면 습관처럼 산행을 기다리고 관성인 듯 그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 김종상이 물 한 방울 스러지듯 가뭇없이 내 곁에서 사라진 지 두 해가 되어간다. 작별에 대한 어떤 기미라도 있었더라면 달랐을까. 징후는 일체 없었다. 두 해 전 막바지에 이른 비엔날레를 보고 난 뒤, 제야의 밤 산행 때 보자는 약속을 했을 뿐이었다. 약속한 제야에 그는 지리산 중산리 매표소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새해 일출을 맞으려는 야행객들이 줄줄이 산으로 올라갔지만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주차장 차 안에서 홀로 새해 아침을 맞았다. 그날로 십년 가까운 나의 산행이 끝났다. 산을 잊으니 그의 얼굴도 잊혀졌다. 그의 사진을 보아도 그가 생각나지 않았다. 기다림도 그리움도 잊었다. 기다리거나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는 산들이 세상에는 많았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산을 찾지 않는다. 그저 집 근처 야산을 운동장 트랙 돌듯 돌 뿐이다.
-은퇴, 10월
은심이 산에 다녀와 제 집으로 올라간 지 한 시간이 지났으니 출근을 위해 내려올 때가 되었다. 늘씬한 은심은 늘 단화를 신으므로 계단을 오르내릴 때 소리를 내지 않는다. 내 앞집 101호 여자의 방정맞은 발걸음, 202호 남자의 무거운 구두소리, 302호 아이의 공이 튀는 듯한 걸음 등 계단을 같이 쓰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거의 파악했어도 은심의 발걸음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은심이 내려와 2층 정도에 이르면 느낄 수 있다. 은심의 기척을 느끼면 내 심박수가 빨라진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고 아무도 없음에도 혼자 부끄럽다. 남편과 연애할 때 이랬다. 느린 듯 빠르고 가벼운 듯 무겁게 걷는 은심은 늘 난간을 애무하듯 잡고 계단을 오르내린다. 나는 어쩌면 은심을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은심의 걸음, 소리 없는 웃음. 사람 말을 찬찬히 들어주는 버릇. 듣고는 잊어버리는 직업 정신. 길고 날씬한 몸. 가늘고 힘센 손가락. 은심은 남편이 사랑할 만한 여자였다. 내 남편의 사랑을 받을 만한 은심의 품성이 나도 사랑스럽다.
지금쯤 내 집 앞을 지나 바깥으로 나가려니 싶어 거실에서 화단 쪽을 내다보고 있는데 은심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상하다? 내가 착각했나? 기계적으로 움직이던 손끝이 엉켰다. 코가 여러 개 빠졌다. 빠진 코를 바늘에 꿰는데 통통,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망설이듯, 금세 응답하지 않으면 자는 사람 깨우는가 보다 단정하고 얼른 달아나려는 것처럼 약하게 두드리는 소리였다. 통통.
조금 전 산에 다녀왔으면서 또 등산복을 입고 내려온 은심을 보자 왈칵 불안해진다. 오늘은 토요일인데. 내가 미용실에 가는 날인데 제가 미용실을 비우면 나는 어쩌라고?
“잠깐 들어 올 테야? 아침은 먹었어?”
“아침은 원래 안 먹잖아요. 아홉시에 동생을 만나기로 했어요.”
“어디 가?”
“시골집에 가요. 내일이 엄마, 아버지 기일이에요. 비워뒀기 때문에 청소부터 하고 제사 지내거든요.”
“언제 오는데?”
“모레 저녁쯤에요.”
“가게를 사흘이나 비워둬도 돼?”
“미애 있잖아요. 그리고 사실은 가게, 그 친구한테 넘겼어요. 이번 달까지는 내가 같이 하다가 월말에 빠지려고요.”
가게를 넘겼다는 말은 팔았다는 뜻이다. 그 쉬운 말을 되새기느라 대답을 못하고 있으려니 은심이 종알댄다.
“마흔 살을 정년으로 혼자 정해뒀었어요. 오래 전에요. 이제 은퇴하려고요.”
“은퇴하고 뭐 하는데?”
“사십년 동안 나무 같이 한곳에서만 산 것 같아서 음, 우선 실컷 돌아다녀 보려고요. 제 뿌리를 등에 지고요.”
어디서 숱하게 들었음직한 말을 내뱉고 나서 객쩍은 듯 씩 웃는다. 입매에서 번진 주름이 몹시 거슬린다.
“집은?”
“나갔어요. 내달 둘째 주까지 비워주기로 했어요. 심심하시면 이따가 가게 나가 보세요. 그 친구 솜씨가 저보다 훨씬 좋아요. 그럼 다녀올게요.”
어제 오후 차 마시러 들렀을 때도 찍소리가 없더니 식전 댓바람에 찾아와 하는 말이 정년, 은퇴, 이사다. 그리고 총총 제 볼일 보러 나가버린다. 내 창 앞에 허구한 날 서 있던 은심의 차가 스르르 후진을 하더니 내 시야를 빠져나갔다. 멍하니 창에 머리를 대고 서 있다가 부엌으로 향한다. 사십년을 나무처럼 산 것 같다고? 은심을 뒤따라 건너 산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끼니를 하루 두 번으로 줄였고 아침 겸 점심을 먹는 게 습관이 되었던 참이었다. 대여섯 달 만에 체중이 20킬로그램 가까이 줄어 남편과 아이와 함께 살 때 입던 옷들이 전부 맞게 되었다. 아직 배고플 시간이 아닌데 허기가 졌다. 은심이 내 창 앞을 지나 출근하면 청소를 하고 쌀을 안치는 버릇을 들여와서 밥이 한 톨도 없었다. 열한 시가 나의 식사 시간이었다. 저와 같아지기 위해 얼마나 철저하게 그 습관을 지켜왔는지 제가 알랴. 쌀을 씻다가 내려놓았다. 나는 아직도 누워서 못 자는데, 은퇴를 한다고? 뿌리를 등에 지고 실컷 돌아다녀? 제 맘대로?
5층 1호, 은심의 집 안에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날마다 두 번씩 5층까지 오르내린 것은 순전히 다리 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은심의 집은 네 자리 숫자로 열리게 돼 있었다. 화니 헤어 컷 전화번호 끝자리들로 이루어진 은심의 비밀번호는 나한테 비밀이 못 되었다. 그저 올라왔다가 아무렇게나 눌렀던 숫자가 열쇠가 되어 툭, 자물쇠가 풀렸을 때 어이가 없어 도로 닫아버렸다. 너무 쉬워 시시했다. 시시하면 재미없지 않은가. 집에 들어가 보고 싶지도 않았다. 손끝이 닳게 일해서 모은 돈으로 동생들 돕고 남은 돈을 차곡차곡 모아 마련했을 21평형 아파트. 그 안에서 내도록 혼자 살았을 여자의 집, 보지 않아도 뻔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예상했듯 은심의 집은 단조롭다. 미색 벽지, 밝은 원목 무늬 바닥. 거실엔 25인치 텔레비전이 뎅그러니 놓였고 그 곁 창 쪽에는 키 큰 남천 화분 한 개가 서 있을 뿐이다. 소파 대용의 쿠션 두 개가 놓인 벽에 숲 그림의 4인용 식탁보만한 패브릭 한 장이 걸려서 그나마 삭막함이 덜 하다. 2인용 식탁이 놓인 부엌은 내 부엌보다 단조롭다. 가게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은심이므로 당연하다. 싱크대에 나와 있는 것이라곤 간밤에 사용했을 머그잔 한 개 뿐이다. 두 방 중 한 방은 드레스 룸인데, 양 벽에 행어를 걸고 접이식 격자문을 달아 옷을 수납했다. 걸린 옷들은 내 예상보다 많은 편이다. 내가 저한테 선물한 두 벌의 옷은 상자에 담긴 그대로 옷장 안에 그대로 있다. 한번 걸쳐보지도 않은 것이다. 까닭을 듣긴 했다. 머리카락이 들러붙을까 봐 조심스러워 아껴두고 있었다던가. 직업에서 비롯됐을 그 결벽을 미리 몰랐던 건 내 불찰이었다.
일체의 꾸밈을 거부한 듯한 화장실은 그야말로 깨끗하다. 흰 타일에 흰 세면대와 변기와 벽에 걸린 수납장조차 흰색이다. 수납장 안 맨 위 칸에 예비 칫솔이며 치약과 세수 비누가 올려졌고 중간에 수건 넉 장이, 아래쪽에 기초화장품이 든 바구니가 들었다. 이 정도면 깔끔한 게 아니라 게으르다고 봐야 한다. 신경 쓰기 싫어 모든 걸 통일해 버렸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정말 볼 것 없는 여자다. 침실이라고 다를까. 오래 묵은 원목 침대에 옥장판이 깔렸고 그 위에 색동무늬의 흰 차렵이불 한 장이 네모나게 놓였다. 흰 갓을 쓴 스탠드가 놓인 협탁도 원목이다. 보통은 화장대가 놓이는 침대 반대쪽 벽에 좁고 긴 앤티크 풍의 탁자가 있어 그나마 볼 만하다. 상판 아래 양쪽에 두 단씩의 서랍이 달렸는데 제법 큰맘을 먹고 샀을 법한 수제품이다. 그 탁자 위에 자그만 액자 하나가 놓여있다. 가을 풍경이다. 커다란 감나무 밑에 할머니를 가운데 둔 일곱 남매가 감처럼 천연색으로 열렸다.
화창한 사진이지만 내가 기대했던 풍경은 아니다. 액자를 엎어 사진 고정 핀을 세우고 겹친 사진이 있나 살피니 역시나 있다. 지나간 사람이라 이거지. 그리 쉽게 지나가 버리면 안 되는 거 아냐? 세상이 아무리 초고속으로 흐른다지만 저나 나나 홀로 천천히 흘러가는데 왜 좋았던 것들을 애써 처박아. 사진은 흐리다. 아니 흐린 날에 찍은 사진이다. 수피가 남김없이 사라진 흰 주목나무 밑에서 등산복 차림새로 여자가 남자 팔짱을 끼고 남자를 쳐다보고 있고 남자는 여자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환히 웃고 있다. 당연히 여자는 지금보다 젊은 은심이다. 그리고 남자는, 이상하다? 내 남편 권재용이, 아니다. 아닌 것 같다. 아니 모르겠다. 나는 그 사이 내 남편의 얼굴을 잊은 게 틀림없다.
(tanb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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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해와 집착이라는게...참 사람잡는 거네요.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