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학 金炳學(1922~1983)】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 활동,"
1922년 3월 15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금곡면(金谷面)에서 태어났다.
1944년 중국 쉬저우(徐州)에서 한국광복군 공작대원으로 활동하던 이장식(李張植)과 접선하여 함께 활동하다가 멍청(蒙城) 주둔 유격사령부를 거쳐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편입되었다.
광복군 제3지대는 징모 제6분처로 활동하면서 대원들을 초모(招募)하여 편성되었다. 처음에 징모 제6분처는 공작 지역으로 산둥반도(山東半島)를 선정하였다. 산둥반도는 화베이(華北)의 요충지이자 국내와 만주 지역의 우리 교포들과 상호 연락이 용이한 지점이었다. 당시 그곳에는 김학규(金學奎) 지대장의 지인인 위쉬에중(于學忠) 장군이 이끄는 중국군 제51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과 팔로군의 협공으로 제51군이 푸양(阜陽)으로 철수했기 때문에, 제3지대는 산둥 지역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안후이성(安徽省) 푸양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푸양은 일본군의 포위망 속에 있었기 때문에, 초모공작에 용이한 지역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징모 제6분처는 푸양을 근거로 초모 공작을 전개하며, 벙부(蚌埠)·쉬저우·난징(南京)·궤이더(歸德)·안칭(安慶)·카이펑(開封)·지난(濟南)·칭다오(靑島)·톈진(天津) 등도 주요 공작 지역이 되었고, 멍청(蒙城)도 활동 반경에 포함되었다. 이후 대원 수의 증가에 따라 1945년 3월 광복군 제3지대로 편제되었다.
쉬저우지구(徐州地區) 특파공작원으로 임명된 후, 광복군 제3지대 공작조에서 1주일 동안의 심사를 거친 후, 1945년 4월 학병 탈출 도모, 쉬저우지구의 조직망 강화, 일본군의 작전 교란 밀명을 받고 쥬리거우(九里溝)를 출발하였다. 허류(河溜)에 도착한 후 쉬저우 지역 중국군 유격부대에 밀파된 김국주와 중국군 장교 진짜오(金沼)의 협조를 얻어, 벙부를 거쳐 4월 22일 쉬저우 잠입에 성공하였다.
조직자금책으로 활동하고 있던 대풍공사 박명찬의 집에 숨어서 쉬저우 지역의 일본군 헌병대 통역 박호림·김종순과 왕징웨이(汪精衛) 부대의 소장 판이(范儀), 쉬저우지구 일본군사령부 통역 예명채(芮明彩) 및 중국인 동지 왕시(王熹), 김승조·장이호 등과 연락망을 구축하였다. 이와 함께 멍청지구 유격사령관 순펑즈(孫風之) 중장에게 왕시를 급파하여 활동 사실을 알리며, 박명찬·판이·왕시 등의 집에 잠복하면서 단오절 거사 계획을 추진하였다.
첩보 조직의 박호림·김종순으로부터 1945년 5월 4일 일본군이 한국인 병사들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한 소위 ‘위안회’ 개최 소식을 들었다. 이에 따르면, 쉬저우 공설운동장에서 학병 환영식과 함께 축구경기를 하고, 한국 교민들의 책임하에 이틀 동안 자유시간을 줄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왕시·김승조를 대동하고 5월 4일 10시 쉬저우 공설운동장의 환영식장에 가서, 학병 김재기에게 자신이 광복군 공작원임을 알리며, 임명장도 전달하였다.
그날 저녁 7시, 김재기는 3명의 다른 학병과 이들의 신원을 책임진 삼광양행 사장과 함께 접선 장소로 왔다. 김재기는 ‘5일 저녁 7~8명을 데리고 올 터이니 탈출시켜 달라’라는 정보원의 말을 전하였다. 이에 공작조는 학병들의 탈출 지원 및 쉬저우역 비상경계 방안 등을 세웠다. 왕시와 함께 학병들을 역 구내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거사 당일 김재기만 탈출에 성공하였고, 이후에도 학병의 탈출 공작을 시도했으나 ‘학병위안회 사건’ 이후 일본군의 경비가 강화되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광복 후에는 광복군 벙부지구 특파단 요원으로 광복군 잠편지대의 결성과 한인동포 보호 활동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