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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海東繹史) 제8권 / 세기(世紀) 8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강의방에서 발췌
2018.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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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麗)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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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 고조 무덕(武德) 2년 영류왕(榮留王) 2년 고구려 왕 고건무(高建武)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고건무는 바로 전왕 고원(高元)의 이모제(異母弟)이다.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으로, 그 나라는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였으니, 바로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으로, 경사(京師)에서 동쪽으로 5천 1백 리
떨어져 있다. 《구당서》
○ 5년 영류왕 5년 고조가 수나라 말기에 전사(戰士)들이 고구려에 많이 함몰하였음을 생각해서
고건무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조서는 예문지에 상세히 보인다.
“수나라 말년에 연이어 군사를 발하여 각자 그 백성을 잃어 마침내 골육(骨肉)이 서로 헤어지도록 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이제 두 나라가 화의를 통하였으니 의리에 있어서 서로 막힐 것이 없다. 이곳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은 이미 조사하여 찾는 즉시 돌려보내라고 영을 내렸으니, 고구려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왕은 풀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고건무가 중국 사람을 모두 찾아내어 예를 갖추어 돌려보냈는데, 전후로 돌아온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자,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상동》
○ 7년 영류왕 7년 2월 정미에 형부 상서(刑部尙書) 심숙안(沈叔安)을 보내어 고구려로 가서 고건무를
책봉하여 상주국 요동군왕 고려왕(上柱國遼東郡王高麗王)으로 삼게 하였다. 이어 천존상(天尊像) 및
도사(道士)를 데리고 고구려로 가서 《노자(老子)》를 강(講)하게 하니, 왕과 도가(道家), 속가(俗家)들 가운데
청강하는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고조가 일찍이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명분과 실제 사이에는 이치가 서로 부합되어야만 하는 법이다. 고구려가 수나라에 대해 신하를 칭하였으나
마침내 양제(煬帝)에게 맞섰으니, 이 어찌 신하를 칭하였다고 하겠는가. 짐(朕)은 만물(萬物)에 대해 경건히
대하여 교만을 부리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서 다만 국토를 지켜 사람들을 편안케 하기에 힘쓸 뿐이다.
그러니 어찌 고구려에게 칭신하라고 하여 스스로 존대한 체하겠는가. 즉시 짐의 이러한 뜻을 조서로
지으라.”
하였다. 시중(侍中) 배구(裴矩), 중서 시랑(中書侍郞) 온언박(溫彦博)이 아뢰기를,
“요동(遼東) 땅은 주(周)나라가 기자(箕子)의 나라로 삼았고, 한(漢)나라의 현도군(玄菟郡)이었으며, 위진(魏晉)
이전에는 가까이 봉역(封域)의 안에 있었으니, 신하를 칭하지 않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랑캐에 대해서 중국은 열성(列星)에 대한 태양의 지위와 같은바, 이치상 존귀한 지위를 낮추어
번복(藩服)과 같아질 수는 없습니다.”
하니, 고조가 이에 그치었다. 《상동》
○ 9년 영류왕 9년 신라와 백제가 모두 사신을 보내어 고건무를 헐뜯으면서, 고구려에서 길을 막아 입조할
수가 없으며 또 서로 틈이 벌어져 자주 침략해 온다고 하였다. 이에 원외산기상시(員外散騎常侍)
주자사(朱子奢)에게 조칙을 내려 가서 서로 화해시키게 하였다. 그러자 고구려 왕 고건무가 표를 올려
사죄하고 신라와 더불어 사신끼리 회맹(會盟)할 것을 청하였다. 《상동》
○ 태종 정관(貞觀) 2년에 영류왕 11년 돌궐(突厥)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격파하자, 고건무가 사신을
보내어 하례하고 봉역도(封域圖)를 올렸다. 《상동》
○ 5년 영류왕 14년 광주도독 부사마(廣州都督府司馬) 장손사(長孫師)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로 가서
수나라 때 전사한 자의 해골을 거두어 파묻고 고구려에서 세운 경관(京觀 적의 시체를 한 데 높게 쌓아
무덤을 만들어 놓은 것임)을 헐어 버리게 하였다. 이에 고건무가 고구려를 칠까 두려워하여 장성(長城)을
수축했는데, 동북쪽의 부여성(扶餘城)으로부터 시작해 서남쪽의 바다에까지 이르니, 무릇 1천여 리였다. 《상동》
○ 14년에 영류왕 23년 고구려에서 태자 고환권(高桓權)을 보내어 입조하고 방물을 바치니, 황제가 후하게
보답하였다. 그러고는 사자(使者) 진대덕(陳大德)에게 조서를 내려 부절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는 동시에
고구려의 실정을 살피게 하였다. 진대덕이 고구려의 경내로 들어가서는 이르는 성읍(城邑)마다 지키는
관리에게 후하게 뇌물을 주어 고구려의 실정을 자세히 파악하였으며, 수나라 때 종군하였다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중국 사람들을 보면 친척들의 존망(存亡)에 대해 말해 주자, 그를 보는 사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러므로 그가 이르는 곳마다 사녀(士女)들이 길을 메우고서 그를 보았으며, 고건무는 성대히 군용(軍容)을
펼치고 사자(使者)를 만나 보았다. 진대덕이 돌아와서 모든 사실을 진달하니, 황제가 몹시 기뻐하였다.
진대덕이 또 아뢰기를,
“고구려에서 고창(高昌)이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두려워하여 고구려의 대대로(大對盧)가
세 번이나 숙소로 찾아와서 예를 베풀었습니다.”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고구려는 본래 사군(四郡)의 지역이다. 내가 군사 수만 명을 발하여 요동(遼東)을 공격하면 나머지 여러
성들이 반드시 구원하러 올 것이다. 그때 내가 별도로 주사(舟師)를 보내 동래(東萊)에서 바닷길을 따라
평양(平壤)으로 향하게 하면 참으로 쉽게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천하가 겨우 태평해졌기에
사람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다.”
하였다. 《신당서》 ○ 《자치통감》 주에는, “태종의 이 말을 보면 이미 고구려를 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 16년에 영류왕 25년 서부대인(西部大人)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섭직(攝職)을 하면서 불법을 저지르니,
여러 대신들이 고건무와 비밀히 의논하여 죽이려 하였는데, 그 일이 누설되었다. 이에 연개소문은
부병(部兵)을 다 불러 모으고는 열병한다고 하면서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려 놓고 대신들을 불러
참관하게 하니, 대신들이 모두 와서 보았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군사들을 시켜 그들을 모두 죽였는데,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고는 창고를 불태우고 궁궐로 쳐들어가 고건무를 죽이고 고건무의 동생인
고대양(高大陽)의 아들 고장(高臧)을 왕으로 세웠다. 그런 다음 자신은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는데, 막리지는
중국의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중서령(中書令)을 겸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로부터 연개소문은 국정을
전횡하였다. 태종이 고건무가 죽었다고 듣고는 거애(擧哀)하였으며, 사신을 파견해 조제(弔祭)를 지냈다.
《구당서》
○ 《규염객전(虬髥客傳)》에는, “규염이 말하기를, ‘지금부터 10년 뒤에는 동남쪽으로 수천 리 떨어진 곳에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일을 성사시킨 때이다.’ 하였다. 정관(貞觀) 10년에 공(公
이정(李靖)을 말함)이 좌복야 평장사(左僕射平章事)로서 남만(南蠻)에 갔는데, 그곳 사람이 들어와서
아뢰기를, ‘배 1천 척과 군사 10만 명이 부여국(扶餘國)으로 들어가서 그곳의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는데, 나라가 이미 안정되었습니다.’ 하였다. 공은 마음속으로 규염이 일을 성공한 것을 알았다.”
하였다.
○ 17년 보장왕 2년 6월 정해에 태상 승(太常丞) 등소(鄧素)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회원진(懷遠鎭)의 수병(戍兵)을 증원하여 고구려를 핍박하자고 청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이르기를,
“먼 나라 사람들이 복종하지 아니하면 문덕(文德)을 닦아서 오게 할 것이다. 1, 2백 명의 수병으로 능히 먼
곳에 있는 나라를 위협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하였다.
○ 윤달에 황제가 이르기를,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정사를 제 마음대로 하니, 참으로 내버려 둘 수 없다. 오늘날 병력으로
고구려를 취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겠으나, 다만 백성을 괴롭히고 싶지 않다. 내가 거란(契丹)과
말갈(靺鞨)로 하여금 치게 하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였다. 《신당서》에, “사공(司空) 방현령(房玄齡)이 아뢰기를, ‘폐하께서는 사졸들이 용감하고 힘이
남아도는데도 이를 억제하고 쓰지 않으시니, 이는 이른바 전란을 쉬어 무기의 사용을 그치는 것이 진정한
무공(武功)이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아뢰기를,
“개소문이 스스로 죄가 큰 것을 알고 있으므로 대국의 토벌을 두려워하여 반드시 수비를 엄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우선은 더 참고 계십시오. 저들이 스스로 편안함을 얻으면 반드시 다시
교만해져서 그 포악함을 더욱 방자히 할 것입니다. 그런 뒤에 그들을 토벌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신당서》에, “장손무기가 ‘고구려가 일찍이 한 번도 어려움을 호소해 온 적이 없으니, 조서를 내려
위로하면서 그들의 환난을 불쌍히 여기고 생존한 자를 어루만져 준다면, 그다음부터는 중국의 명을 따를
것입니다.’고 아뢰었다.”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좋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태종의 웅대한 뜻이 일찍이
하루도 고구려에서 떠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무진에 조서를 내려 고구려 왕 고장(高藏)을 상주국
요동군왕 고려왕(上柱國遼東郡王高麗王)으로 삼고는, 사신을 보내어 절부를 가지고 가서 책봉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신당서》에는, “어떤 자가 황제에게 고구려를 토벌하라고 권하였는데, 황제는 상을 당한 틈을 타
정벌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에 장을 왕으로 제수한 것이다.” 하였다.
○ 9월 경진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글을 올렸는데, 거기에,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침입해 올 것 같기에 삼가 천자께 귀명(歸命)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사신에게 어떻게 하면 그를 모면할 수 있겠는가를 물으니, 사신이 답하기를,
“계책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이르기를,
“내가 약간의 군사를 보내어 거란과 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요동으로 들어갈 경우, 그대 나라가 한 1년은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계책이다. 내가 그대 나라에 강포(絳袍)와 단치(丹幟) 수천 개를
주어 그들이 올 때 진열하여 세우게 하면 그들이 보고서 우리 군사가 온 것으로 여기고 반드시 다 달아날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계책이다. 백제가 바다가 험한 것을 믿고 병기를 수리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수군
수만 명을 이끌고 습격하고, 그대 나라가 여인을 임금으로 삼은 탓에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있으니,
내가 친척을 한 사람 보내어 그대 나라의 임금으로 삼고 그 뒤에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려 그대들이
스스로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계책이다. 그대는 어떠한 계책을 쓰겠는가?”
하니, 사신이 답하지 못하였다. 《신당서》
○ 황제가 사농 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에게 명하여 새서(璽書)를 싸 가지고 가 고구려에게 주게
하였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신라는 우리 당나라에 인질을 맡기고 조공을 끊이지 않고 바치고 있다. 그러니 그대 나라는 백제와 함께
각기 병기를 거두어야 할 것이다. 만약 다시 신라를 침공한다면, 내년에 군사를 내어 그대 나라를 칠
것이다.”
하였다. 《자치통감》
○ 18년 보장왕 3년 정월에 상리현장이 평양에 이르렀다. 이때 막리지 연개소문이 이미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여 두 성을 격파하였는데, 고구려 왕이 그를 불러들이도록 하여 돌아왔다.
상리현장이 신라를 공격하지 말도록 달래니, 막리지가 말하기를,
“지난날 수(隋)나라가 우리나라를 공격하였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우리 땅 5백 리를 빼앗았다.
그러니 우리에게 침략한 땅을 돌려주지 아니하면 싸움은 중지할 수 없다.”
하였다. 상리현장이 말하기를,
“지나간 일을 어찌 추론(追論)한단 말이오. 지금 요동(遼東)의 모든 성은 본래 다 중국의 군현(郡縣)인데도
고구려의 땅은 한나라나 위나라가 모두 군현으로 삼았으며, 진씨(晉氏)의 난리에 비로소 중국과 단절되었다.
지금 중국은 오히려 아무말 않고 있는데, 고구려는 어찌하여 반드시 옛 땅을 찾는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나 막리지는 마침내 따르지 않았다. 2월 초하루 을사에 상리현장이 돌아와서 그 상황을 모두
아뢰었다. 그러자 황제가 이르기를,
“개소문이 그 임금을 죽이고 그 대신을 해치고 그 백성에게 잔학하게 하면서 이제 또 조서를 어기고
이웃 나라를 침공하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러자 간의대부(諫議大夫) 저수량(褚遂良)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지휘하시면 중국이 평안하고 뒤돌아보시면 사이(四夷)가 습복하니, 위엄과 명망이 아주
대단합니다. 지금 바다를 건너 원정할 경우 작은 오랑캐를 즉시 쳐부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길 경우 위엄과 명망이 손상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시금 분노하여 군사를 일으킬
경우 안위를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이세적(李世勣)은 아뢰기를,
“지난번에 설연타(薛延陀)가 침입해 왔을 적에 폐하께서 군사를 일으켜 끝까지 토벌하고자 하다가
위징(魏徵)이 간하자 그만두어 지금까지 걱정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폐하의 계책대로 하였더라면
북쪽 변방이 안정되었을 것입니다.”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그렇다. 그 일은 참으로 위징이 잘못한 것으로, 짐이 몹시 후회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을 진달하는 것을 막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하였다. 황제가 몸소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자, 저수량이 상소하기를,
“고구려가 큰 죄를 지었으니 참으로 토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단지 두서너 명의 맹장에게 명하여 4,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폐하의 위령(威靈)이 떨치게 하면 고구려를 취하기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도 더
쉬울 것입니다. 이제 천하의 임금으로서 가벼이 원정길을 떠나는 것이 신으로서는 몹시 걱정스럽습니다.”
하였으나, 황제가 듣지 않았다. 이때 신하들 가운데 고구려를 정벌하기를 간하는 자가 많았다.
황제가 이르기를,
“아무리 많은 요 임금이나 순 임금이 있더라도 겨울철에 씨를 뿌려 싹트게 할 수는 없으나, 들판에 사는
농부나 나이 어린아이라도 봄철에 씨 뿌려 싹트게 할 수 있는 법이니, 이는 제때에 알맞게 해서 그런
것이다. 무릇 하늘에는 적당한 시기가 있고 사람에게는 그에 따른 공이 있는 법이다. 지금 개소문이 위를
능멸하고 아랫사람을 괴롭히고 있어 백성들이 목을 길게 빼고 와서 구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고구려를 멸망시킬 적당한 시기이다. 의논하는 자들이 분분하게 떠들어 대는 것은 이러한 점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상동》
○ 7월에 고구려의 막리지가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침공함에 신라가 자주 사신을 보내어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신묘에 칙령을 내려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 괄주 자사(括州刺史)
조원해(趙元楷), 송주 자사(宋州刺史) 왕파(王波)에게 명하여 홍주(洪州)ㆍ요주(饒州)ㆍ강주(江州) 등으로
나아가서 군량을 싣고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전선(戰船) 4백 척을 만들어 오게 하였다.
갑오에 조서를 내려 영주 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 수좌종위솔(守左宗衛率) 고리행(高履行) 등을 보내어
유주도독부(幽州都督府)와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의 병마 및 거란(契丹)ㆍ해(奚)ㆍ말갈(靺鞨)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요동(遼東)을 공격하여 그 정세를 살피게 하고, 태상 경(太常卿) 위정(韋挺)을 하북의 여러
주에 보내어 군량을 징발해 영주(營州)에다가 저장하게 하였으며, 《구당서》에, “황제가 사람을 뽑아 군량을
저장하게 하려 하니, 마주(馬周)가 위정(韋挺)을 천거하였다. 황제가 위정에게 ‘유주 북쪽은 요수(遼水)가 2천
리를 흐르면서 주현들을 아우르고 있어서 군대가 행진할 때 군량을 취해 올 곳이 없다. 경이 이번에
나가서 군량이 떨어지지 않게만 해도 그 공이 작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하였다. 민부시랑(民部侍郞)
최인사(崔仁師)를 시켜 그를 돕게 하였다. 또 태복 소경(太僕少卿) 소예(蕭銳)를 하남도(河南道)의 여러 주에
보내어 군량을 싣고 바다로 오게 하였다.
8월에 소예가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바다 한 가운데 있는 고대인성(古大人城)은 서쪽으로는 황현(黃縣)에서 23리 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고구려까지 4백 70리입니다. 섬 안에 샘물이 많고 산과 섬이 잇닿아 있어서 군량을 저장하기에 아주
편합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그대로 따랐다. 이에 하남도로부터 군량을 운반해 왔는데, 육로와 수로로 잇달아 실어와
모두 이곳에다가 저장하였다. 《책부원귀》
○ 9월 을미에 고구려의 막리지가 사신을 보내어 백금(白金)을 바쳤다. 저수량이 태종에게 아뢰기를,
“막리지가 그의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구이(九夷)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폐하께서는 이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장차 이를 정벌하여 고구려 사람들을 위해 그들 임금이 욕을 당한 수치를 갚아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임금을 시해한 역적을 토벌할 때 역적이 보내는 뇌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송독(宋督)이 노(魯)나라 임금에게 고정(郜鼎)을 보내자, 환공(桓公)이 이를 태묘(太廟)에서 받으려고
하였는데, 장애백(臧哀伯 장손달(臧孫達)을 가리킴)이 받지 말라고 간하였습니다. 무릇 《춘추》라는 책은
모든 왕이 법받아야 할 책입니다. 만약 신하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는 나라에서 보내는 선물을 받는다거나
임금을 시해한 자의 조공을 받으면서 그를 허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를 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고구려의 막리지가 보낸 것은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태종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구당서》
○ 고구려의 사신이 또 아뢰기를,
“막리지가 관인(官人) 50명을 보내어 숙위(宿衛)하려 합니다.”
하니, 황제가 노하여 사신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다 고무(高武)를 섬겼으면서도 절의를 지켜 그를 따라 죽지 못하였고 지금 또다시 시역한 자를
위해 꾀를 내고 있으니, 용서할 수가 없다.”
하고는 모두 하옥하였다. 황제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고자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몸소
출정하지 말 것을 권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취하며, 높은 곳을 버리고 낮은 곳을 취하며, 가까운 곳을 버려두고 먼 곳으로 가는
것, 이 세 가지의 일은 상서롭지 못한 일인데,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이 그에 해당된다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또 대신을 죽였으므로 온 고구려 사람들이 내가 와서 도와주기를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바, 의논하는 자들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신당서》
○ 10월 계묘에 옹주(雍州)의 부로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황제가 이르기를,
“요동의 몇몇 성은 중국의 옛 땅이며, 고구려의 막리지가 이리와 같은 야심으로 제 임금을 시해하였다.
짐이 고구려를 보존해 주고 고구려의 백성들을 위로해 주고자 한다. 이에 장차 낙양(洛陽)으로 가
경략(經畧)에 나서서 삼한 지역을 안정시키고 한두 해 뒤에는 돌아올 것이기에, 부로들을 불러서 이별하는
것이다. 출정에 따라가는 아들과 손자들은 짐이 잘 돌보아 줄 것이니,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아라.”
하였다. 《책부원귀》
○ 11월 임신에 황제가 낙양에 이르렀다. 전 의주 자사(宜州刺史) 정원숙(鄭元璹)이 이미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그가 일찍이 수 양제(隋煬帝)를 따라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므로 정원숙은 수나라 때 벼슬하여
우무후장군(右武侯將軍)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하는 데 따라 갔었다. 행재소(行在所)로 나오도록 불러
물으니, 대답하기를,
“요동은 길이 멀어 군량을 운반하기가 어려우며, 동이(東夷)들은 성을 잘 수비하므로 쉽사리 함락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이르기를,
“오늘날은 수(隋)나라 때와는 비교가 안 되니, 공(公)은 나의 명령대로만 하라.”
하였다. 황제가 말한 것은 국가가 크고 군사가 강성하며, 승리를 취할 계략이 충분함을 믿고 적에게
성대함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장검(張儉) 등이 요수(遼水)가 넘쳐서 오랫동안 건너지 못하고 있자, 황제가
겁을 내어 건너지 않고 있는 것이라 여겨, 낙양으로 불러들였다. 장검이 낙양에 이르러서 산천(山川)의
험하고 평이한 것과 수초(水草)의 좋고 나쁨을 모두 아뢰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자치통감》
○ 갑오에 형부 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상하(常何)와
좌난당(左難當)을 부총관으로 삼았으며, 염인덕(冉仁德), 유영행(劉英行), 장문간(張文幹), 방효태(龐孝泰),
정명진(程名振)을 행군총관(行軍摠管)으로 삼아 장량에게 예속시킨 다음 강회(江淮)와 영협(嶺硤)의 강한
군사 4만 명,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에서 모집한 병사 3천 명, 전함(戰艦) 5백 척을 거느리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나가게 하였다. 또 태자첨사 좌위솔(太子詹事左衛率)
이세적(李世勣)으로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을 삼고,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으로 부총관을
삼았으며,
장사귀(張士貴)ㆍ장검(張儉)ㆍ집실사력(執失思力)ㆍ계필하력(契苾何力)ㆍ아사나미사(阿史那彌射)ㆍ
강덕본(姜德本)ㆍ국지성(麴智盛)ㆍ오흑달(吳黑闥)을 모두 행군총관으로 삼아 이세적에게 속하게 한 다음,
보기(步騎) 6만 명 및 난주(蘭州)ㆍ하주(河州) 두 주의 항복한 호병(胡兵)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나아가 두
군(軍)이 합세하게 하였다. 《책부원귀》
○ 경자에 제군이 유주(幽州)에 모두 모였다. 행군총관(行軍摠管) 강행본(姜行本)과 소부 소감(少部少監)
구행엄(邱行淹)을 보내어 먼저 공인(工人)들을 독촉하여 안라산(安蘿山)에서 운제(雲梯)와 충차(衝車)를
제조하게 하였다. 이때에 원근에서 응모하는 용사(勇士)와 성을 공격하는 기계(器械)를 바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는데, 황제가 몸소 손익을 따져 편리하고 좋은 것을 취하였다. 《자치통감》
○ 황제가 조서를 내리기를,
“짐이 지나가는 곳에는 진영(陣營)을 꾸미지 말고 음식도 사치스럽고 풍성하게 하지 말라. 쉽게 건널 수
있는 물에는 다리를 놓지 말고, 행재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주현에서는 학생과 노인들을 보내
영알(迎謁)하는 것을 하지 말라. 짐이 지난날 직접 창을 잡고 난을 평정할 적에는 한 달 먹을 양식조차
없었지만 가는 곳마다 모두 승리하였다. 지금은 다행히도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다. 이에 단지
군량을 운반하는 수고로움이 있을까만이 염려되므로, 소와 양을 몰고 가서 군사들을 먹일 것이다. 그리고
이번 출정에서 짐이 반드시 승리할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치는 것이고,
둘째는 순리로써 역리를 치는 것이고, 셋째는 다스려진 나라로써 어지러운 나라를 치는 것이고, 넷째는
편안한 군사로 피로한 적을 치는 것이고, 다섯째는 백성들이 반기는 군사로 원망하는 군사를 치는 것이
그것이니, 어찌 이기지 못할까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신당서》
○ 12월 신축에 무양공(武陽公) 이대량(李大亮)이 졸하였는데, 죽으면서 표문을 올려 고구려를 정벌하는
군사를 파하기를 청하였다. ○ 갑인에 조서를 내려서 제군 및 신라ㆍ백제ㆍ해(奚)ㆍ거란에게 길을 나누어
진격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19년 보장왕 4년 2월 경술에 황제가 몸소 제군을 거느리고 낙양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을묘에
울지경덕(尉遲敬德)을 좌일마군총관(左一馬軍摠管)으로 삼아 따라오게 하였다. 이달에 이세적의 군사가
유주(幽州)에 도착하였다. 낙양에서 유주까지는 1천 6백 리이다. 3월 정축에 거가가 정주(定州)에 이르렀다.
낙양에서 정주까지는 1천 2백 리이다. 정해에 황제가 시신(侍臣)들에게 이르기를,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인데 수씨(隋氏)가 네 차례 출병을 하였으나 차지하지 못하였다. 짐이 지금
동정(東征)하는 것은 중국을 위하여는 자제(子弟)들의 원수를 갚고, 고구려를 위하여는 임금의 치욕을 씻어
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사방이 크게 평정되었는데, 오직 이곳만 평정하지 못하였으므로, 짐이 늙기
전에 사대부(士大夫)들의 남은 힘을 써서 취하려는 것이다. 짐이 낙양을 출발할 때부터 오로지 맨밥만
먹으면서 채소조차 올리지 못하게 한 것은 번거롭게 할까 염려해서이다.”
하였다. 황제가 병든 군졸을 보고는 어탑(御榻) 앞으로 불러서 위로하면서 주현(州縣)에 맡겨 치료하게
하니, 사졸들이 모두들 감격해 하면서 기뻐하였다. 임진에 거가가 정주를 출발하였는데, 황제가 몸소 활과
화살을 차고 손수 안장 뒤에 우의(雨衣)를 매달았다.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는 우복(雨箙)으로 되어 있다.
이세적(李世勣)의 군사는 유성(柳城)을 영주(營州)의 치소(治所)이다. 출발해 형세를 크게 펼치고
회원진(懷遠鎭)으로 영주에 회원수착성(懷遠守捉城)이 있다. 나가는 것처럼 하면서, 북쪽으로 용도(甬道)를
따라 군사들을 몰래 나가게 해, 고구려가 생각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나가려 하였다.
4월 초하루 무술에 이세적이 통정진(通定鎭)으로부터 통정진은 요수의 서쪽에 있다. 수나라 대업(大業)
8년에 요동을 정벌할 때 설치하였으며, 용도(甬道)는 수나라가 부교(浮橋)를 만들어 요수를 건너면서 쌓은
것이다. 요수(遼水)를 건너 현도(玄菟)에 이르니, 고구려에서는 몹시 놀라서 성읍(城邑)이 모두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은 채 굳게 지켰다. 임인에 요동도 부대총관(遼東道副大摠管)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新城)에 이르고, 《통감고이》에, “당력(唐曆)에, ‘장검(張儉)이 적군을 두려워하여
감히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강하왕 도종이 몇백 기를 거느리고 들어가서 적군의 형세를
살펴보고 오겠다고 굳이 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허락하면서 며칠이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가는 데 10일, 살펴보는 데 10일, 돌아오는 데 10, 합하여 한 달이 지나서는 돌아와 폐하를
알현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말에게 재갈을 물리고 군사들을 단속하여 험난한 길을 거쳐
곧바로 요동성의 남쪽으로 나아간 다음 지형의 험이와 진영을 친 곳을 살펴보았다. 돌아올 때 고구려의
군사들이 귀로를 차단하였는데, 도종은 이들을 격파하여 모두 죽이고 장수를 목 벤 다음 돌아와 처음에
약속한 날짜에 맞춰 황제를 알현하였다. 이에 황제가 탄복하면서 「맹분(孟賁)과 하육(何育)의 용맹도 어찌
이보다 낫겠는가.」 하고는 금 50근과 비단 1천 필을 하사하였다.’고 하였다.” 하였다. 이제 실록(實錄)을
따른다. 절충도위(折衝都尉) 조삼량(曹三良)이 10여 기(騎)를 이끌고 곧바로 성문으로 달려드니, 성중이 놀라
동요되어 감히 나오는 자가 없었다. 《상동》
○ 계묘에 황제가 군사들에게 크게 음식을 먹였다. 그런 다음 유주(幽州)의 성 남쪽에 장막을 쳤다. 조서를
내려 장손무기(長孫無忌)에게 명하여 서사(誓師)하게 한 뒤, 이어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갔다. 《신당서》
○ 영주 도독(營州都督)인 행군총관(行軍摠管) 장검(張儉)이 여러 번병(藩兵)의 기병을 이끌고 대군의
전봉(前鋒)이 되었다. 이때에 어떤 고구려후(高句麗侯)를 사로잡았는데, 막리지(莫離支)가 장차 요동으로 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장검에게 조서를 내려 신성(新城) 길에서 맞아 치게 하니, 막리지가 마침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장검이 이 틈을 타서 진격해서 요수를 건너 곧장 건안성(建安城)으로 《자치통감》 주에,
“요동성에서 서쪽으로 3백 리를 가면 건안성에 이르는데, 한나라 때 평곽현(平郭縣)의 지역이다.” 하였다.
달려들어가 고구려 군사를 궤멸시키고 수천 급을 참수하였다. 임자에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蓋牟城)을 《자치통감》 주에, “개모성은 요동성의 동북쪽에 있다. 당나라가 그 성을 취하고는
개주(蓋州)로 삼았으며, 원(元)나라 때에는 요양부로(遼陽府路)에 개주요해절도(蓋州遼海節度)가 있어서
건안(建安)ㆍ양지(陽地)ㆍ웅악(熊岳)ㆍ수암(秀巖) 네 현을 거느렸다.” 하였다. 공격하였다.
좌둔위장군(左屯衛將軍) 강확(姜確)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을 공격하다가 유시에 맞아 졸하였다. 계해에
이세적 등이 개모성을 함락하고 2만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10만 석의 양곡을 노획하였다.
○ 위정(韋挺)이 면직되었는데, 황제가 백의종군하게 하였다. 전군(前軍)이 개모성을 격파함에 미쳐서
조서를 내려 위정으로 하여금 병사들을 거느리고 개모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위정은 개모성이 대군(大軍)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고구려의 신성(新城)과 가깝게 접해 있어 밤낮없이 전투를 벌여 북소리와 함성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걱정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이상 모두 구당서》
○ 장량(張亮)이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로부터 바다를 건너 비사성(卑沙城)에 이르렀는데, 그 성은 사면이 깎아지른 듯하고 오직 서쪽 문만 공격할 수가 있었다. 이에 아장(亞將) 정명진(程名振)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야밤에 습격하였는데, 부총관 왕문도(王文度)가 먼저 성 위에 올라가고 사졸들이 계속해서 진격하니, 성안이
궤산되었다. 5월 기사에 드디어 그 성을 함락하고 남녀 8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총관(摠管) 구충효(邱忠孝)
등을 나누어 보내어 압록수(鴨綠水)에서 유격 활동을 하게 하였다. 이날 이세적이 진군해서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책부원귀》
○ 경오에 거가가 요택(遼澤)에 이르렀는데, 진흙 수렁길이 2백여 리나 되어 인마(人馬)가 통과할 수
없었다. 이에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뿌려 다리를 놓으니, 군사들이 쉬지 않고 행군하여
임진에 요택을 건너 동쪽으로 갔다. 《자치통감》
○ 황제가 요택을 건너면서 조서를 내리기를,
“지난번에 수나라 군사가 요수를 건널 적에 시기를 잘못 타서 출정 나온 군사들이 모두 죽어 해골이
들판에 널리게 되었으니, 참으로 애통하고 한탄스럽다. 해골을 파묻어 주는 의리가 무엇보다도 급하니,
모두 찾아서 파묻어 주라.”
하였다. 을해에 고구려에서 국내성(國內城)과 신성(新城)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출동해서 요동성을 구원케
하니,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행군총관 장군예(張君乂)의 기병 4천 명을 거느리고 이들을 맞아 싸웠다.
고구려 군사와 마주쳤을 때 군사의 숫자가 너무나 차이 나자, 군사들이 모두 참호를 깊이 파고 험준한
곳에 의지해 있으면서 황제의 군사가 이르기를 기다려 서서히 진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도종이 말하기를,
“그래서는 안 된다. 적은 먼 길을 급히 달려왔으니, 군사들이 반드시 피곤할 것이며, 숫자가 많음을 믿고
우리를 깔볼 것인바, 이때 공격하면 반드시 꺾을 수 있을 것이다. 옛날에 경엄(耿弇)은 임금에게 적들을
남겨 주지 않았다. 우리가 이미 전군(前軍)의 임무를 맡고 있으니, 마땅히 길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어가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니, 이세적(李世勣) 역시 그렇다고 하였다. 과의도위(果毅都尉) 마문거(馬文擧)가 도종에게 말하기를,
“이 장사(壯士)가 강한 적병을 만나지 않으면 어떻게 호걸임을 뽐내겠습니까.”
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하여 적진으로 달려가니,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너짐에 군사들이 비로소
안심하였다. 이미 싸움이 전개되었는데, 장군예(張君乂)가 후퇴해 도망쳐서 당나라 군사가 불리하였다.
도종이 흩어진 군졸을 모아 높은 곳에 올라가 고구려 군진(軍陣)이 어지러운 것을 바라보고는, 장사 수십
명과 함께 적진으로 돌격하여 좌우로 넘나들었다. 그러자 고구려 군사들이 두려워하여 퇴각함에 드디어 다리를 빼앗았다. 이때 이세적이 군사를 이끌고 쳐서 크게 격파하여 1천여 급을 참수하였다. 《구당서》
○ 장군예를 참수하여 조리돌렸다. 정축에 거가가 요수(遼水)를 건너와서 다리를 철거하여 사졸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주둔하였다. 황제가 몸소 요동성 아래에 내려가 사졸들이 흙을 져다가 참호를
메우는 것을 보고, 무거운 것을 진 자의 짐을 친히 나누어 말 위에 실어 옮기니, 뭇 신하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 앞 다투어 흙덩이를 날랐다. 《신당서》
○ 이세적이 요동성을 공격하면서 밤낮 12일을 쉬지 않았다. 고구려에서 당나라에 3백 근의 돌을 1리
밖까지 날리는 포거(抛車)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성 위에다 나무를 쌓아 전루(戰樓)를 만들고 새끼줄로
엮어 날아오는 돌을 막았다. 이세적이 포거를 벌여 놓고 돌을 쏘아 성을 공격하니, 돌에 맞는 곳마다 모두
무너졌다. 또 충거(衝車)로 누각을 때려 부수니 누각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이때 백제에서
금휴개(金髹鎧)를 올렸으며, 또 현금(玄金)으로 산오문개(山五文鎧)를 만들어, 이를 군사들에게 입혀 따르게
하였다. 황제가 친히 기병 1만여 명을 이끌고 와서 이세적과 합세하여 성을 포위하였는데, 갑옷의 광채가
빛나 눈이 부시었고 북소리와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갑신에 남풍이 세차게 불자 황제가 날랜 군사를
보내어 충차(衝車) 끝의 장대에 올라가서 서남루(西南樓)에 불을 지르게 하니, 불이 성안으로 번지어 붙어
집이 모두 불탔으며,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군사들이 성을 오르니 고구려 군사가 방패를 들어
막았는데, 당나라 군사들이 긴 창으로 쳐서 이를 떨구었다. 돌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으며, 성이 드디어
크게 무너졌다. 고구려 군사 1만여 명과 남녀 4만 구(口)를 포로로 잡고, 창고에 있는 곡식 50만 석을
획득하였으며, 그 성을 요주(遼州)로 만들었다. 당초에 황제가 정주(定州)로부터 수십 리마다 봉수(烽燧)
하나씩을 설치하여 요동까지 이어지게 하고는 요동성을 격파하면 봉화를 올리기로 태자와 약속하였는데,
이날 봉화를 올리라고 명하였다. 《책부원귀》
○ 을미에 군사를 백애성(白崖城)에 주둔시키고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이사마(李思摩)가 화살에 맞았는데, 황제가 친히 피를 빨아주었다. 장사들이 그 사실을 듣고는 모두들
감격해 하며 흥기하였다. 백애성은 산을 등지고 물가를 임해 있어 사면이 아주 험하고 가파랐다. 이세적이
충거(衝車)로 때려 부수면서 돌과 화살을 성안으로 비 오듯 퍼부었다. 《신당서》
○ 고구려의 오골성(烏骨城)에서 군사 1만여 명을 보내어 백암성(白巖城)을 성원하니, 계필하력(契苾何力)이
8백 기(騎)로 이들을 쳤다. 계필하력이 몸을 날려 적진으로 들어갔다가 허리에 창을 맞았는데,
상련봉어(尙輦奉御) 설만비(薛萬備)가 단기로 달려가서 구원해 고구려 군사가 우글거리는 틈에서
계필하력을 구해 돌아왔다. 그러자 계필하력이 더욱 분발하여 창을 꼬나 잡고 나아가서 싸웠는데, 기병을
따라 돌진하여 드디어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였다. 수십 리를 추격해서 1천여 급을 목 베었으며, 마침 날이
저물어서 파하였다.
○ 6월 정유에 이세적이 백암성(白巖城)의 서남쪽을 치고 황제가 서북쪽에 임하니, 성주(城主)
손벌음(孫伐音)이 몰래 심복(心腹)을 보내어 항복할 것을 청하면서, 성 위에서 도월(刀鉞)을 던지는 것을
신호로 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면서 또 말하기를,
“노(奴)가 항복하려고 하나 성중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하니, 황제가 깃발을 사자(使者)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반드시 항복하려거든 이 깃발을 성 위에 세우라.”
하였다. 손벌음이 그 깃발을 세우자 성중 사람들이 당병(唐兵)이 벌써 성에 오른 것으로 알고 모두 그의
뜻을 따랐다. 황제가 요동성을 함락하고 나자, 백암성이 항복할 것을 청하였는데 얼마 뒤에 후회하였다.
이에 황제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에 노하여 군중에 영을 내리기를,
“성을 얻으면 사람과 물건들을 다 전사(戰士)들에게 상으로 주겠다.”
하였다. 이세적이 황제가 장차 항복을 받아들이려는 것을 보고 갑사(甲士) 수십 명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사졸들이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앞 다투어 나가 죽음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노획물을 탐내서입니다. 지금
성이 함락되려는 때에 어찌 다시 항복을 받아들여서 전사들의 마음을 저버리려 하십니까?”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풀어놓아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짐이 차마 할 수
없다. 장군 휘하에 있는 공이 있는 자에게는 짐이 창고에 있는 물건으로 상을 주겠으니, 장군은 이 한 성의
죄를 속(贖)하여 주라.”
하니, 이세적이 이에 물러났다. 성중의 남녀 1만여 구와 군사 2천 4백 명을 획득하였다. 황제가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았다. 이어 음식을 주고 80세 이상된 사람에게는 포백(布帛)을 차등 있게
주었다. 백암성에 와 있던 다른 성의 군사들도 다 위로하고 양곡과 병기 등을 주어 그들 마음대로 가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요동성의 장사(長史)가 부하들에게 죽었는데, 그의 성사(省事)가 성사는 이직(吏職)이다.
장사의 처자를 받들고 백암성으로 달아나 있었다. 황제가 그 의리를 측은히 여겨 포백 5필을 준 다음,
장사를 위하여 영여(靈輿)를 만들어 주어 평양으로 돌려보냈다. 백암성을 암주(巖州)로 삼고 손벌음을
자사(刺史)로 삼았다. 계필하력의 상처가 깊어지자, 황제가 몸소 약을 발라 주었으며, 계필하력을 찌른 자인
고돌발(高突勃)을 찾아내어 계필하력에게 보내 직접 죽이게 하였다. 그러자 계필하력이 아뢰기를,
“그는 자신의 임금을 위하여 칼날을 무릅쓰고 신을 찌른 것이니, 바로 충성스럽고 용감한 용사입니다.
그와 신과는 애당초 서로 모르는 사이였으니, 원수가 아닙니다.”
하고는 그를 놓아주었다. 처음에 고구려의 막리지가 가시성(加尸城)의 군사 7백 명을 파견하여
개모성(蓋牟城)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이 이들을 모두 포로로 잡았다. 이들이 종군하여 자신들의 죄를
씻게 해 주기를 청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너희들의 집은 모두 가시성에 있는데 너희들이 우리 편이 되어 고구려와 싸운다면 막리지가 반드시
너희들의 처자식을 모두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고자 일가족을 몰살시키는 짓을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무술에 이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준 다음 모두 놓아 보냈다. 기해에 개모성을 개주(蓋州)로 삼았다.
정미에 거가가 요동을 출발하여 병진에 안시성(安市城)에 안시성은 한나라의 옛 현(縣)으로, 요동군에
속하였다. 《구당서》 설인귀열전(薛仁貴列傳)에는 안지성(安地城)으로 되어 있다. 도착하여 군사를 내어
공격하였다. 정사에 고구려의 북부 누살(北部耨薩)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이 살펴보건대,
《신당서》와 《구당서》에는 모두 북부 누살 고연수, 남부누살 고혜진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와 말갈(靺鞨)의
군사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황제가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고연수를 위한 계책에는 세 가지가 있다. 군사를 이끌고 곧장 전진하여 안시성을 연하여
보루(堡壘)를 만들고, 높은 산의 험한 곳에 웅거한 다음, 성중의 식량을 날라다 먹으면서 말갈의 군사를
풀어 우리의 우마(牛馬)를 약탈하여 갈 경우,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여도 빨리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가고자 하더라도 진흙 수렁에 막히게 되어, 가만히 앉아서 우리 군사를 곤궁에 빠뜨릴 수 있으니,
이것이 상책(上策)이다. 만약 고연수가 이 상책을 쓰면서 나왔다면 태종이 어떻게 대응했을지 모르겠다.
오로지 강하왕 도종의 계책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성중의 군사를 빼내어 그들과 함께 밤중에 도망치는
것이 중책이요, 지모와 능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와서 우리와 싸우는 것이 하책이다. 경들은 두고 보라.
반드시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사로잡히는 것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 고구려에 나이가 많고 매사에 익숙한 대로(對盧)가 있었는데, 설거정(薛居正)이 말하기를,
“고구려의 관직 가운데 높은 자를 대대로(大對盧)라 하는데, 1품직으로 국사를 총괄한다.” 하였다. 그가
고연수에게 말하기를,
“진왕(秦王)은 안으로 군웅(群雄)을 베어 없애고, 밖으로 이적(夷狄)들을 굴복시켜 홀로 황제가 되어 우뚝
섰으니, 이는 하늘이 명한 뛰어난 인물이다. 지금 중국의 모든 군사를 몰아 왔으니, 맞상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 생각 같아서는,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지 않은 채 오래도록 날짜를 끌면서 기병(奇兵)을 나누어
보내, 그들의 군량 운반하는 길을 끊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 양식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하여도 돌아갈 길이 없어서, 곧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것이 바로 당 태종이 말한 상책(上策)이다. 그러나 고연수가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전진하여 안시성 40리 지점까지 갔다. 황제는 그들이 머뭇거리며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아사나사이(阿史那社爾)에게 명하여 돌궐(突厥)의 군사 1천 기를 거느리고 이들을
유인하도록 하였다. 아사나사이가 싸움이 시작되자 거짓 도주하니, 고구려의 군사들이 서로 상대하기가
쉽다고 하면서 다투어 달려 나와 안시성 동남쪽 8리까지 와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그러자 황제가 여러
장수들을 불러 계책을 물었다.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적군과 마주쳐 싸우려 할 때에는 먼저 사졸들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신이
마침 여러 군영을 돌아다니면서 사졸들의 기색을 살펴보니, 고구려의 군사들이 싸우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들 칼을 뽑아 들고 깃발을 묶으면서 얼굴에 기쁜 기색이 돌았습니다. 이는 반드시 이길
군대입니다. 오늘의 싸움은 폐하께서 직접 지휘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황제가 이에 장손무기 등과 함께 수백 기를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 산천의 형세에 있어
복병하고 출입할 만한 곳을 살펴보았다. 고구려와 말갈이 군사를 합하여 진을 쳤는데, 길이가 40리나
되었다. 《수당가화(隋唐嘉話)》에, “황제가 그것을 바라보고는 두려운 기색이 있었다.” 하였다. 강하왕 도종이
아뢰기를,
“고구려가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서 왕사(王師)에 대항하니, 평양의 수비는 반드시 약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에게 정예병 5천 명을 빌려 주시어 그들의 본거지를 뒤엎게 하소서. 그러면 수십만 군사를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황제가 응하지 않았다. 황제가 도종의 계책을 쓰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된 근저가 되었다.
황제가 고연수에게 사신을 보내어 속여 이르기를,
“내가 그대 나라의 강포한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기 때문에 죄를 물으러 왔다가 싸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는 나의 본심이 아니다. 그대 나라에 들어왔다가 말먹이가 충분치 못하므로 몇 개의 성(城)을
취한 것이다. 그대 나라가 신하로서의 예를 제대로 갖추기만 한다면 빼앗은 성은 반드시 돌려주겠다.”
하니, 고연수가 그것을 믿고 다시 방비를 하지 않았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태종이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들여 직접 지휘하였다. 이세적을 파견하여 보기(步騎)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군의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는 우진달(牛進達) 등이 거느린 정병(精兵)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기병(奇兵)이 되어 산 북쪽에서 좁은 골짜기로 나가 고구려 군의 뒤를 치도록 하였으며,
황제는 친히 보기(步騎)를 거느리고 고각(鼓角)을 숨기고 기치(旗幟)를 뉘고 고구려 군영의 북쪽 높은 산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제군(諸軍)들로 하여금 고각이 울리면 일제히 내달아 치게 하였다. 인하여
유사(有司)에게 명해 항복받을 막사를 조당(朝堂) 곁에 치도록 하고 이르기를, “내일 오시에 이곳에서
고구려의 항복을 받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신당서》에, “이날 밤에 유성(流星)이 고연수의 군영(軍營)에 떨어졌다.” 하였다. 무오에 고연수 등이
이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는 군사를 내어 싸우려고 하였다. 태종이 멀리 장손무기의 군영에서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고는 고각(鼓角)을 일제히 울리고 기치를 일제히 들게 하였다. 그러자
고구려 군사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군사를 나누어 당나라 군사를 치려고 하였으나, 대오가 이미 흐트러져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자치통감》에, “이때 마침 우레와 벼락이 쳤다.” 하였다. 이때 이세적이 긴 창을 가진 보병 1만 명으로
치니, 고연수의 군사가 드디어 패하였다. 장손무기가 고구려 군사의 뒤편에서 군사를 풀어 치고,
태종이 또 산으로부터 내려와 군사를 이끌고 들이닥쳤다.
○ 처음에 용문(龍門) 사람 설인귀(薛仁貴)가 군사의 모집에 응하여 종군하였다. 안시성에 이르렀을 때 마침
낭장(郞將) 유군앙(劉君昻)이 고구려 군에 포위되어 매우 위급한 처지였는데, 설인귀가 말을 타고 달려가
구원하면서 앞을 막는 고구려 장수를 참수한 다음, 그 머리를 말안장에 매달고 돌아오니, 고구려 군사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 설인귀의 이름을 기억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설인귀가 스스로 날래고 용맹한 것을
믿고는 기공(奇功)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에 복색(服色)을 특이하게 해 흰옷을 입고 창을 잡고 긴 활을
허리에 찬 다음 크게 소리치며 앞장서서 돌진하니, 가는 곳마다 상대가 없어 고구려 군사가 흩어지고
쓰러졌다. 이에 대군이 승세를 타고 진군하였다. 대총관(大摠管) 유홍기(劉弘基) 역시 힘껏 싸워 고구려
군을 함몰시키고, 양홍례(楊弘禮)가 마병과 보병 24군(軍)을 거느리고 불시에 나아가 치니, 향하는 곳마다
모두 꺾어 참획한 것이 아주 많았다. 고구려 군이 이로 인해 크게 궤멸되어 1만여 급이 참수되었다. 고연수
등이 남은 군사를 이끌고 산을 의지해서 지켰다. 이에 장손무기와 이세적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 군을
포위하고,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그들이 돌아갈 길을 끊었다. 황제가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서 고구려
군의 진영을 살펴보고는 시신들에게 이르기를,
“고구려가 온 나라의 힘을 다 기울여서 왔으니, 존망이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깃발 한 번
흔들어서 패퇴시켰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를 도운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말에서 내려 두 번 절해 하늘에 감사하였다.
○ 《수당가화(隋唐嘉話)》에는, “주필(駐蹕)한 뒤에 이미 육군(六軍)이 싸움이 붙었는데, 고구려 군사에게
눌려서 위세를 떨치지 못하였다. 태종이 흑기(黑旗) 영공(英公 이세적을 말함)의 깃발을 보게 하니,
바라보고 있던 자가, 흑기가 고구려 군사들에게 포위당하였다고 하였다. 그러자 태종이 크게
두려워하였는데, 얼마 뒤에 다시 포위가 풀렸다고 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돌격하는 함성이 산골짜기를
뒤흔들었으나, 이세적의 군대가 대승하여 수만 명을 참수하였다.” 하였다.
○ 또 《통감고이》에는, “실록(實錄)에 이르기를, ‘이세적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폐하께서 친히 치지
않았다면, 신과 도종(道宗)이 수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공격하였어도 이기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고연수 등 10여 만 명이 창을 꼬나들고 일제히 달려 나오고, 성안에 있던 군사들이 이에 다시 호응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 신이 앞쪽을 구원하면 뒤쪽이 패하고, 뒤쪽을 구원하면 앞쪽이 패하였는바, 반드시
고연수 등에게 포로가 되어 평양성으로 보내져서 막리지에게 비웃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오늘 신은 감히
폐하께서 다시 살려 주시는 은택을 베푸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하였다. 황제가 평소에 이세적과 친하게
지내었으므로 빙긋이 웃기만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이세적은 뒤에 혼자서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그러니 어찌 반드시 태종이 친히 쳤겠는가. 이것은 사관(史官)이 태종을 아름답게 수식한
것이거나, 아니면 이세적이 아첨한 것이다. 이에 지금은 취하지 않는다.” 하였다.
○ 기미에 고연수와 고혜진이 그의 무리 15만 6천 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태종이 그들을
군문으로 들어오게 하니, 고연수 등이 무릎걸음으로 나와 절하면서 명(命)을 청하였다. 《신당서》에, “황제가
‘이 뒤로도 감히 천자의 군대와 싸울 것인가?’ 하자, 고연수가 두려워 떨면서 아무 말도 못하였다.” 하였다.
태종이 누살(耨薩) 이하 추장(酋長) 3천 5백 명을 뽑아 융도(戎徒)를 주어 내지(內地)로 옮기고, 말갈(靺鞨)의
군사 3천 3백 명을 거두어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자치통감》 주에, “말갈의 군사가 진을 침범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평양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말 5만 필과 소 5만 마리와 명광갑(明光甲) 1만 벌을 획득했고, 그 밖의 다른
병기(兵器)도 이와 맞먹었다. 고구려는 온 나라가 크게 놀랐는데, 후황성(后黃城)과 은성(銀城)은 다 스스로
도망가 수백 리의 사이에 다시는 밥 짓는 연기를 볼 수가 없었다.
《신당서》에, “황제가 역서(驛書)로 태자에게 알리고, 여러 장수들에게 글을 내려 이르기를, ‘짐이 장수
노릇하는 것이 이러하니, 어떠한가?’ 하였다.” 하였다. 인하여 행차한 산을 이름하여 주필산(駐蹕山)이라
하였다.
《자치통감》 주에, “《구당서》를 살펴보건대, 그 산의 본래 이름은 육산(六山)이다.” 하였다. 장작(將作)으로
하여금 파진도(破陣圖)를 만들게 하고, 중서 시랑 허경종(許敬宗)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돌에 새겨 공적을
기록하게 하였다. 《이상 모두 구당서》
○ 7월 신미에 황제가 안시성의 동쪽 고개로 군영을 옮기었다. 기묘에 전사한 자의 시신에 표시를 하게
하고 군사들이 돌아갈 때 그들에게 주어 함께 돌려보냈다. 무자에 고연수(高延壽)를 홍려 경(鴻臚卿)으로
삼고, 고혜진(高惠眞)을 사농 경(司農卿)으로 삼았다. 장량(張亮)의 군사가 건안성(建安城) 아래에 이르러
벽루(壁壘)를 완전히 만들지 못하여 사졸들이 밖으로 나가 나무를 하고 꼴을 베었는데, 고구려 군사가
갑자기 이르자, 군중(軍中)이 놀라 동요하였다. 장량은 본래 겁 많은 사람이라 호상(胡床)에 걸터앉은 채
똑바로 응시하고 말을 못하였는데, 장사(將士)들이 그것을 보고는 도리어 용맹스럽게 여겼다. 총관
장금수(張金樹) 등이 북을 울리면서 군사를 단속해 고구려 군사들을 쳐서 격파하였다.
8월 갑진에 후기(候騎)가 막리지의 첩자(諜者) 고죽리(高竹離)를 잡았는데, 손을 뒤로 묶은 채
군문(軍門)으로 데려 갔다. 그러자 황제가 불러 보고는 결박을 풀어 주면서 묻기를,
“어째서 그렇게 수척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몰래 샛길을 택하여 오느라 며칠 동안 먹지 못하여서 그렇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먹을 것을 주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그대가 첩자가 되었으니 속히 복명(復命)해야 할 것이다. 나를 대신해서 막리지에게 ‘군중의 소식을 알고
싶으면 사람을 곧바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보낼 것이지, 어찌하여 샛길로 보내어 고생시키느냐.’고 말하라.”
하였다. 고죽리가 맨발이었는데, 황제가 신을 주어 보냈다.
병오에 안시성의 남쪽으로 군영을 옮기었다. 황제가 요동성 밖에 있으면서 군영을 설치할 때 척후(斥候)만
분명하게 할 뿐 참호와 성루(城壘)를 만들지 아니하였는데, 비록 성에 가까이 다가가도 고구려 군사들이
끝내 감히 나와서 노략하지 못하였다. 군사들을 뽑아 단신으로 나가 노숙하게 하기를 중국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황제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 설연타(薛延陀)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는데,
황제가 그에게 이르기를,
“너의 가한(可汗)에게 가서 ‘우리 부자(父子)가 지금 동쪽으로 고구려를 정벌하고 있으니, 네가 능히 침략할
수 있을 것인바, 속히 중국으로 나와 치라.’고 말하라.”
하였다. 그러자 진주가한(眞珠可汗)이 두려워서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으며, 또 군사를 내어 돕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고구려의 군사가 주필산에서 패함에 미쳐서, 막리지가
말갈을 시켜 진주가한을 달래면서 후리(厚利)로 꾀었는데, 진주가한이 두려워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 9월에 황제가 백암성(白巖城) 싸움에 이기자, 이세적에게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안시성은 험하고 군사들이 강하며, 그 성주(城主)는 재주와 용맹이 있어 막리지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굴복하지 않았는데, 막리지가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서 그대로 맡겼다.’ 한다.
건안성(建安城)은 군사가 약하고 군량이 적다고 한다. 만약 불시에 나아가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니, 공은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라. 건안성이 떨어지면 안시성은 우리의 뱃속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병법에 이른바 ‘성 가운데는 치지 않아도 되는 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이세적이 대답하기를,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량은 다 요동에 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지나서
건안성을 치다가 적이 우리의 군량 보급로를 끊으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치는 것만
못합니다. 안시성이 함락되면 북을 울리며 나아가 건안성을 취할 것입니다.”
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공을 장군으로 삼았으니, 어찌 장군의 계책을 쓰지 않겠는가. 일을 그르치지 말라.”
하였다. 이세적이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황제의 깃발을 바라보고는 문득 성에
올라가 북을 울리며 욕을 하니, 황제가 노하였다. 그러자 이세적이 성을 함락시키는 날에 성중의 남녀를
다 묻어 버리도록 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는 더욱 굳게 지켜, 오랫동안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고연수와 고혜진이 황제에게 청하기를,
“저희들이 이미 몸을 대국에 맡겼으니 감히 성의를 다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빨리 큰 공을
이루어야만 저희들도 처자와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안시성 사람들이 자신들의 처자식을 아끼고
염려하여 스스로 싸우고 있으니, 쉽사리 함락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저희들이 고구려의 10만이 넘는
군사로써 폐하의 깃발을 바라만 보고도 무너졌으니, 고구려 사람들의 간담(肝膽)이 서늘할 것입니다.
오골성(烏骨城)의 누살(耨薩)은 늙어서 굳게 지키지 못하니, 군사를 옮기어 그곳으로 가면 아침에 이르러
저녁에 이길 것이며, 그 나머지 길가의 작은 성(城)들은 반드시 바람에 쓰러지듯 무너져 달아날 것입니다.
그런 뒤에 그곳의 군량과 물자를 취하여 북을 울리며 전진한다면 평양성도 반드시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뭇 신하들이 또 아뢰기를,
“장량(張亮)의 군사가 사성(沙城)에 있으니, 사성은 바로 비사성(卑沙城)이다. 그를 부르면 이틀 안에
올 수가 있습니다. 고구려 군사들이 두려워하는 틈을 타 힘을 합쳐 오골성(烏骨城)을 함락하고,
압록수(鴨綠水)를 건너서 곧바로 평양성을 취하는 것이 이번 싸움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을 따르려 하였다. 그런데 유독 장손무기(長孫無忌)만은 말하기를,
“천자께서 친정(親征)하시는 것은 제장(諸將)들이 공격하는 것과는 다르니,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지금 건안성(建安城)과 신성(新城)의 오랑캐가 오히려 10만이 넘는데, 만약 오골성으로
향한다면 다 우리의 뒤를 추격할 것입니다. 그러니 안시성을 격파하고 건안성을 취한 뒤에 거침없이 몰아
나가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
하니, 황제가 중지하였다. 제장들이 급히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황제가 성중에서 닭과 돼지 소리가
요란하게 나는 것을 듣고, 이세적에게 이르기를,
“성이 포위된 지 오래되었으니, 밥 짓는 연기가 날로 줄어들어야 할텐데, 지금 닭과 돼지 소리가 크게
들리고 있다. 이것은 필시 그것을 잡아 군사들에게 먹이고 밤을 틈타서 우리를 엄습하려는 것이니,
병비(兵備)를 엄하게 해야만 될 것이다.”
하였다. 이날 밤에 고구려 군사 수백 명이 줄을 타고 성을 내려왔다. 황제가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성 밑에
이르러 군사를 불러 급히 쳐 고구려 군사 수십 명을 참수하니, 고구려 군사들이 퇴주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강하왕 도종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안시성 동남쪽에 토성(土城)을 쌓으니, 고구려에서도 또한 성의
담장을 높게 증축하여 높이가 같게 하였다. 사졸을 교대로 나누어 교전하였는데, 하루에 6, 7번씩이나
싸웠다. 이세적이 안시성의 서쪽을 공격하면서 포거(抛車)로 돌을 쏘고 충차(衝車)로 성을 부수게 하여
누첩(樓堞)을 파괴하면 성중에서는 무너지는 즉시 목책(木柵)을 세워 무너진 곳을 보완하였다. 도종이
나뭇가지와 흙을 담은 부대로 토둔(土屯)을 만들어 산과 같이 쌓고는 그 가운데에다 다섯 갈래의 길을 만든
다음 그 위에다가 나무를 얽어 놓고 흙을 입혔는데, 밤낮으로 쉬지 않고 60일 동안 쌓으면서 50만 명을
동원하였으며,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도 두어 길이나 높아 성중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도종이 과의도위(果毅都尉) 부복애(傅伏愛)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토산 위에 진을 치고 적을 수비하게
하였는데, 토산이 높은 곳에서 무너져 내려 성을 누르자, 성이 무너졌다. 그때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자리를 비웠으므로, 고구려 군사 1백 인이 성이 무너진 곳을 따라 나와 싸워 마침내 토산을 빼앗아
웅거하였다. 그러고는 참호를 파 길을 끊은 다음 빙 둘러서 불을 놓고 막아 굳게 지켰다. 태종이 크게
노하여 부복애의 머리를 베어 진중에 조리돌린 다음, 제장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3일이 되어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에 나와 죄를 청하니, 황제가 이르기를,
“그대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개모성(蓋牟城)과 요동성(遼東城)을 격파한 공이 있으므로 특별히 용서한다.”
하였다. 《책부원귀》
○ 황제가, 요동은 일찍 추워져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병사와 군마가 오래 머무르기가 어렵고 또 양식이
장차 떨어지려 하므로, 계미에 군사를 돌리라고 칙명을 내렸다. 먼저 요주(遼州)와 개주(蓋州) 두 주의
호구(戶口)를 뽑아서 요수(遼水)를 건너게 하고, 이어 안시성 아래에서 군사를 시위하고 돌아가니,
성중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안시성의 성주(城主)가 성 위에 올라가 배사(拜辭)하니,
황제가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백 필을 주면서 임금을 잘 섬기라고 격려하였다.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에게 명하여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후군이 되게 하였다. 《자치통감》
○ 기왕부참군(紀王府參軍) 교보명(喬寶明)이 행재소(行在所)로 나오자, 태종이 이르기를,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평양성은 아직 멀리 있다. 내가 삼군(三軍)이 얼어 죽을까 염려되어
이미 회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지금 경이 멀리까지 나왔는데, 무슨 계책을 진달하려고 왔는가?”
하니, 교보명이 아뢰기를,
“신은 명을 받들고 평양성으로 가서 고구려를 회유하고자 합니다. 고구려는 폐하께서 출정하신 뒤로 간담이
서늘해져 있을 것이니, 신이 가서 달래면 반드시 두 손을 묶고서 스스로 올 것입니다. 만약 고구려가
불손한 마음을 품는다면 신은 흉노의 임금을 죽인 부개자(傅介子)처럼 개소문의 머리를 자른 다음 고구려에
항복하겠습니다.”
하니, 태종이 그 말을 장하게 여겼다.
○ 을유에 요동성에 주둔하였다. 이때 요동성에는 아직도 군량이 10만 석이나 있었는데 군사들이 다
가져올 수가 없었다. 병술에 요수를 건너 발착수(渤錯水)에 이르렀는데, 진흙탕이 80리나 되어 수레와 말이
통과할 수가 없었다. 이에 장손무기와 양사도(楊師道) 등에게 명하여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 풀을 베어
길을 메우고 수레를 연결해 다리를 만들게 하였는데, 황제가 친히 나무를 말채찍에 매어 달고 역사(役事)를
도왔다.
10월 초하루 병신에 황제가 포구(蒲溝)에 주둔하였다. 《자치통감》 주에, “발착수(渤錯水)와 포구(蒲溝)는
모두 요택(遼澤) 가운데 있다.” 하였다. 황제가 말을 세우고 길 메우는 것을 독려하였다. 제군(諸軍)이 건널
때 사나운 눈보라가 몰아쳐 사졸들이 많이 죽었다. 이에 조서를 내려 길에다가 횃불을 피우고 군사들이
건너오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다. 이 출정에서 고구려를 정벌하여 현도(玄菟)ㆍ횡산(橫山)ㆍ개모(蓋牟)ㆍ
마미(磨米)ㆍ요동(遼東)ㆍ백암(白巖)ㆍ비사(卑沙)ㆍ맥곡(麥谷)ㆍ은산(銀山)ㆍ후황(後黃) 등 10성(城)을
함락하고, 10만 호(戶)에 18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통감고이》에, “실록에, 상이 이르기를,
‘요주ㆍ개주ㆍ암주 등 세 주(州)의 호구로서 내지로 들어온 것이 전후로 7만 명이었다.’ 하였다. 계축에 내린
조서에는, ‘10만 호에 18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중국으로 옮기지 않은 자까지
아울러서 말한 것이다.” 하였다. 신성(新城)ㆍ주필(駐蹕)ㆍ건안(建安) 세 곳의 큰 싸움에서 전후로 참수한
것이 4만여 급이었고, 대장 2명, 비장(裨將)ㆍ관인(官人)ㆍ추수(酋帥)ㆍ자제(子弟) 3천 5백 명, 군사 10만
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말과 소 각 5만 마리, 관곡(館穀) 10순(旬)을 노획하였다. 처음에 출정할 때에는 군사
10만 명에 말이 1만 필이었는데, 돌아옴에 미쳐서는 군사가 겨우 수천 명이었고 전마도 십중팔구는 죽었다.
수군은 7만 명 가운데 수백 명이 죽었다. 《이상 모두 책부원귀》
○ 병오에 영주(營州)에 도착하였다. 조서를 내려 싸움에서 죽은 군사의 시신을 모아 유성(柳城)에서 장사
지내고, 태뢰(太牢)로 제사 지내게 하였다. 황제가 임하여 곡을 하니, 시종하는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병진에 황제가 말을 타고 임유관(臨渝關)으로 들어갔다. 황태자가 길옆에서 맞이하였다. 처음에
황제가 태자와 이별할 적에 갈포(褐袍)를 입고 임어하여 이르기를, “너를 다시 보게 되는 날 바꾸어 입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두 철이 지나도록 바꾸어 입지 않아 옷에 구멍이 났는데, 여러 신하들이 바꾸어
입기를 청하자, 황제가 이르기를, “사졸들이 모두 떨어진 옷을 입고 있는데, 내가 새옷을 입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태자가 깨끗한 옷을 올리자, 바꾸어 입었다. 요동에서 사로잡은 고구려
백성 1만 4천 구(口)를 적몰하여 노비로 삼았는데, 먼저 이들을 유주(幽州)에 모아 놓고 장차 장사들에게
상으로 나누어 주려 하였다. 황제가 그들 부자와 부부가 떨어져 흩어지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유사(有司)에
명하여 포백(布帛)으로 그들의 몸값을 치르어 주고 용서하여 백성이 되게 하니, 늘어서서 절하면서 즐거워
외치는 소리가 3일 동안 그치지 않았다. 고연수는 항복한 뒤에 근심하다 죽었고 고혜진만 장안(長安)으로
왔다. 《신당서》
○ 11월 신미에 거가가 유주에 이르니, 고구려의 백성들이 성의 동쪽에서 맞이하였다. 절하고 환호하다가는
땅바닥에 구르면서 흙먼지가 이는 것을 멀리 바라보았다. 《자치통감》
사신(史臣)은 논한다. 북쪽 오랑캐가 중국과 가까이 있으면서 변경을 침범해 오는 일은 종종 있었으며,
동쪽 오랑캐가 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 불손한 짓을 하는 일이 가끔씩 있었다. 이것은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천성에서 타고난 것으로, 태평산(太平山)에 사는 사람은 순하고
공동산(空同山)에 사는 사람은 드세다는 말이 참으로 믿을 만하다. 태종이 친히 요동을 정벌하였는데,
손실된 것이 역시 많았다. 태종이 개선하던 날에 좌우의 신하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짐에게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반드시 이번 출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군사를 출동한 것을 후회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어째서 그런가. 오랑캐의 나라는 돌밭과 같다. 그것을 얻더라도 이익될 것이 없으며,
잃더라도 무슨 손해가 있겠는가. 헛된 이름을 구하기에 힘써서 유용한 것을 수고롭힐 필요가 없는 법이다.
다만 문덕(文德)을 닦아서 오게 하고, 교화를 입혀서 복종하게 하며, 믿음직한 신하를 택해서 어루만져
주고, 변경의 방비를 튼튼히 해 침입을 막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멀리서 여러 나라를 거쳐 중국
조정에 오게 하고 바다를 건너 조공을 바치게 하면, 오랑캐에 대처하는 방도를 제대로 한 것이다.
《구당서》
정관(貞觀) 연간에 천하가 다스려지고 사방의 오랑캐가 복종하여 천자의 위덕(威德)이 몹시 성대하였다.
태종은 군사를 조련하고 공명을 숭상하여 그 뜻이 몹시 날카로웠다. 이러한 게을리 하지 않으려는 뜻을
가지고 천하에 임하면, 환난을 미리 예방하고 태평스러운 왕업을 보존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먼 오랑캐
땅에 사는 신하 하나가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며 주변의 국가를 침입하자, 조서를 내려
침략하지 말도록 하였으나 오랑캐가 듣지 않았다. 오랑캐가 비록 죄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중국의 일에야
관계되겠는가. 한두 장수에게 명해서 군사를 거느리고 국경으로 가 토벌하여 구원하려는 형세만 보여, 그로
하여금 위엄을 두려워하고 감싸 주기를 바라는 마음만 품게 하면 족히 천자의 능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친히 정벌할 계획을 한단 말인가. 충신과 현인들이 다투어 간쟁하면서 충고하였으나,
이세적(李世勣)의 한마디 말에 뜻을 굳혀 바꾸지 않았다. 이에 드디어 수만 명이나 되는 중국의 군사를
동원해 먼 외국 땅으로 내몰았으니, 이는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긴 것으로, 잔인한 마음인 듯하다.
더구나 존귀한 천자의 몸으로 멀리 있는 오랑캐와 승부를 다투었으니, 이는 또한 자신을 가볍게 여긴
것이다. 비록 요동의 몇 성을 평정하고 고연수(高延壽)의 대군을 격파하기는 하였으나, 어찌 천자의 위덕을
보이는 데 보탬이 되겠는가. 만약 고연수가 대로(對盧)의 계책을 받아들였다면, 그 위태로움을 어찌 헤아릴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대개 태종이 스스로 영웅으로 자부하여 심사숙고하지 않은 것이다. 이세적은 그런
태종의 뜻에 영합해 일을 만들어 내어 드디어 잘못된 계책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당초에 요동의 정벌을
의논할 때 저수량(褚遂良)이 간언을 올려 그 일을 중지시키자 태종이 그 말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세적이 “설연타(薛延陀)가 변경을 침입해 왔을 적에 성상께서 본래 추격하려고 하였는데, 위징의
간언으로 말미암아 시기를 놓쳤습니다.”는 말을 하면서 태종을 충동질하여, 드디어 친정할 의논이 정해졌다.
고연수의 군대를 격파함에 미쳐서는 태종이 말에서 내려 하늘에 사례하였으니, 태종의 위태로운 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출정 도중에 전사한 군사들에 대해 훈작(勛爵)을 더해 주고 분향소를
세웠으니, 중국의 군사가 먼 오랑캐 땅에서 많이 죽었음을 알 수가 있다. 천자는 중한 종묘와 사직을 맡고
있어 천하 백성들의 주인인 것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중국에 관계되지도 않는 일로 인해 위태로운 일을
벌이고 인명을 가볍게 여겼으니, 천자의 위덕을 손상시킨 것이 아닌가. 이세적은 위징이 설연타를 추격하는
일에 대해 간언을 올린 것을 뒤늦게 허물하면서, 그것을 실책이라고 하였는데, 설연타가 변경을 침범하였을
적에는 태종이 장수에게 명해서 설연타의 군사를 대파시켰다. 그러니 중국의 위엄을 보임에 있어서는
추격하지 않더라도 역시 실책이 아닌 것이다. 고구려는 본디 중국을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는데, 어찌하여
친정하기까지 한단 말인가. 이세적은 황제의 뜻에 영합해 사단을 만들어 내었으니, 그 죄를 면할 길이
없다. 방현령(房玄齡)과 교보명(喬寶明)은 죽음을 무릅쓰고 표문을 올려 요동 정벌을 중지하라고 간절하게
간언하였으니, 어질다. 《당사논단(唐史論斷)》
○ 20년에 보장왕 5년 황제가 이정(李靖)에게 묻기를,
“내가 천하의 군대를 거느리고 갔다가 작은 오랑캐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정이 아뢰기를,
“그에 대해서는 도종(道宗)이 알 것입니다.”
하자, 황제가 도종을 돌아보고 물었다. 강하왕 도종이 주필(駐蹕)에 있을 때에 허술한 틈을 타서 평양을
공격하자던 말로 갖추어 진술하니, 황제가 서글픈 목소리로 이르기를,
“당시에는 몹시 급해서 내가 살피지 못했다.”
하였다. 이 출정에서 빈틈을 타 평양성을 취하자는 계책을 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승세를 타고
오골성(烏骨城)을 취하자는 계책도 쓰지 않았다. 무술에 요주도독부(遼州都督府)와 암주도독부(巖州都督府)를
고구려를 정벌하여 얻은 두 주이다. 혁파하였다. 《자치통감》
○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 5월 갑인에 사신을 보냈다고 하였다. 사죄하고
아울러 두 미녀를 바쳤다. 그러자 태종이 사신에게 이르기를,
“돌아가서 너희 임금에게 말하기를, ‘어여쁜 계집은 사람들이 중하게 여기는 것이며, 그대가 바친 바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그들이 본국에 부모 형제들을 남겨 두고 떠나온 것이 불쌍하다. 그들을 여기에
남게 해 부모를 잊게 하고, 여색을 아껴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내가 할 수가 없다.’고 하라.”
하고는 그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구당서》
○ 황제가 고구려에서 돌아온 뒤로 연개소문이 더욱 교만 방자하여 《신당서》에, “처음에 군사들이 돌아올
때 황제가 활과 옷을 연개소문에게 하사하였는데, 연개소문이 그것을 받고도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지
않았다.” 하였다. 비록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기는 해도 그 말이 모두 궤탄(詭誕)하였다. 그리고 또
당나라의 사신을 대접하는 것도 거만할 뿐더러, 항상 변경의 틈을 엿보았으며, 누차 칙령을 내려 신라를
치지 말라고 하였는데도 침략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10월 임신에 조칙을 내려 그 조공을 받지 말라고
하고, 다시 고구려 토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자치통감》
○ 21년 보장왕 6년 2월에 황제가 장차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조정에서 의논을 올리기를,
“고구려는 산을 의지해 성을 쌓아 공격하더라도 쉽사리 함락시킬 수가 없습니다. 전에 폐하께서 친히
정벌하였을 적에 고구려 사람들이 농사를 짓지 못한 데다 함락시킨 성의 곡식을 모두 가지고 왔으며,
계속해서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대부분 식량이 부족합니다. 지금 자주 소규모의 군대를 내보내 번갈아
가면서 고구려의 변경을 소요시켜 고구려로 하여금 이에 대항하느라 피곤하게 하며, 쟁기를 놓고 보루
속으로 들어가 몇 년 동안을 사방에서 농사짓지 못하게 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저절로 이반되어
압록강의 북쪽을 싸우지 않고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황제가 그 말에 따랐다.
3월에 조서를 내려서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 행군대총관(靑邱道行軍大摠管)
으로 삼고 우무후장군(右武侯將軍)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은 다음, 군사 1만여 명을 징발해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고구려로 가게 하였다. 또 태자첨사(太子詹事)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 손이랑(孫貳郞)
등을 부총관으로 삼은 다음, 3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營州都督府)로부터 신성(新城) 길을 경유해
들어가게 하였다. 두 군에 모두 수전(水戰)에 익숙한 자를 뽑아 배치하였다.
○ 5월에 이세적의 군사가 이미 요수(遼水)를 건너 남소성(南蘇城) 등 몇 성을 거치는 동안 고구려에서는
대부분 성을 등지고 막아 싸웠다. 이세적이 이들을 쳐서 격파하고 그 성곽을 불지르고서 돌아왔다.
○ 7월에 우진달ㆍ이해안이 고구려의 경내로 들어가 무릇 1백여 차례를 싸워 모두 이기고, 석성(石城)을
쳐서 빼앗고 나아가 적리성(積利城) 밑에 이르렀다. 고구려 군사 1만여 명이 나와 싸웠으나, 이해안이 쳐서
격파했으며 2천여 급(級)을 베었다.
○ 8월 무술에 황제가 조칙을 내려, 송주 자사(宋州刺史)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명해 강남(江南) 12주의
공인(工人)을 징발해 큰 배 수백 척을 만들게 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이상 모두 상동》
○ 12월 을해에 고구려 왕이 둘째 아들인 막리지 고임무(高任武)를 사신으로 보내어 조하(朝賀)하고, 인하여
사죄하였다.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책부원귀》
○ 22년 보장왕 7년 정월 병오에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 행군대총관(靑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우위장군 배행방(裴行方)으로 부총관을 삼은 다음,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신당서》
○ 4월 갑자에 오호 진장(烏胡鎭將) 고신감(古新感)이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는 부장(部將)
고신감(古神感)으로 되어 있다.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보기(步騎) 5천 명을 만나 역산(易山)에서 살펴보건대, 역산이 《신당서》에는 갈산(曷山)으로 되어 있다.
싸워 격파했다. 그날 밤 고구려 군사 1만여 명이 고신감의 배를 습격하였는데, 고신감이 복병을 설치하여
또 그들을 격파하고 돌아왔다. 《자치통감》
○ 6월 병자에 설만철이 갑사(甲士) 3만 명을 거느리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압록수(鴨綠水)에서
1백여 리 떨어진 곳으로 들어가 고구려의 박작성(泊灼城)에서 40리 되는 곳에 머무르니, 고구려 사람들이
두려워서 모두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박작성의 성주 소부손(所夫孫)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맞아 싸웠다. 설만철이 배행방(裴行方)을 파견하여 보병을 거느리고 별도의 군대가 되어 계속 전진하게
하고 설만철과 제군(諸軍)이 그 뒤를 따라 치니, 고구려 군사가 대패하였다. 1백여 리를 추격하여 진중에서
소부손을 참수한 다음, 진격하여 박작성을 포위하였다. 박작성은 산세를 따라 성을 쌓고 압록수로 가로막혀
튼튼하기 그지없었으므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고구려에서 장수 고문(高文)을 파견해
오골성(烏骨城)과 안지성(安地城)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이
도착하여서는 두 진으로 나누어 설치하자, 설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대적하였는데,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고구려 군사가 대패하였다. 《구당서》
○ 황제가 장손무기와 함께 계책을 세우면서 이르기를,
“고구려가 우리 군사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호구가 줄고 수확이 없다. 그런데도 연개소문은 성을 쌓아
늘리기만 하여 백성들이 굶주려 구렁텅이에 나뒹구는 등 너무도 피폐해졌다. 내년에 3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고 공이 대총관(大摠管)이 된다면, 일거에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어 검남(劒南)에 조서를 내려 배를 만들게 하였다.
《자치통감》에, “7월에 우령좌우부장사(右領左右府長史) 강위(强偉)를 보내어 배를 만들게 하였는데,
큰 배는 길이가 1백 척이고, 폭은 그 반이었다.” 하였다. 촉(蜀) 땅 사람들이 재물을 강남으로 실어
보내기를 원하였으므로, 값을 헤아려서 배를 만들었다. 배 한 척당 비단 1천 2백 필을 거두니, 파촉(巴蜀)
지방이 크게 소란하여 공주(邛州)ㆍ미주(眉州)ㆍ아주(雅州) 세 주의 만족(蠻族)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농서(隴西)와 섬내(陜內)의 군사 2만 명을 징발하여 정벌해 평정하였다. 일찍이 황제가 이미 고구려를
정벌하기로 결정하고는 섬주 자사(陜州刺史) 손복가(孫伏伽)와 내주 자사(萊州刺史) 이도유(李道裕)에게
조서를 내려서 삼산포(三山浦)와 오호도(五胡島)에 군량과 병기를 저장하게 하는 한편, 월주
도독(越州都督)에게 큰 배와 우방(偶舫)을 만들어 대기하게 하였다. 《신당서》
○ 9월 계미에 설만철 등이 고구려를 격파하고서 돌아왔다. 《자치통감》
○ 23년 보장왕 8년 5월 기사에 태종이 붕(崩)하였다. 유조(遺詔)로 요동 정벌하는 일을 파하게 하였다.
고구려 왕 고장(高藏)이 사신을 보내어 와서 위로하였다. 《신당서》
○ 고종(高宗) 영휘(永徽) 4년 보장왕 12년 장군(將軍) 신문릉(辛文陵)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 고구려를
위무(慰撫)하였다. 행군하여 토호진수(吐護眞水)에 이르렀을 때 방비하지 않는 틈을 타 고구려 군사가
이들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이때 위대가(韋待價)가 중랑장(中郞將) 설인귀(薛仁貴)와 함께 조서를 받들고
동쪽 변경을 경략(經畧)하고 있었는데, 이를 인해 부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였다. 신문릉이 악전고투하자,
고구려 군사들이 점차 후퇴하여 보전할 수가 있었으며, 위대가는 중상을 입었다. 《구당서》
○ 5년 보장왕 13년 10월에 고구려 왕이 장수 안고(安固)를 파견하여 말갈의 군사와 함께 거란을 공격하니,
거란의 송막도독(松漠都督) 이굴가(李窟哥)가 이를 방어하였다. 신성(新城)에서 싸울 때 바람이 세차게 불어
고구려 측에서 쏜 화살이 모두 되돌아 가므로, 거란이 이 틈을 타 공격하여 고구려를 크게 패배시켰다.
거란이 들판에 불을 놓고 다시 싸웠는데, 고구려 군사들이 서로 뒤엉켜 죽으니, 시체를 한곳에 쌓아 놓고
무덤을 만들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승리를 고하자, 고종이 조정에 이를 포고하였다.
《신당서 및 자치통감》
○ 6년 보장왕 14년 정월에, 고구려가 백제,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국경을 침략하여 33개 성을
빼앗았다.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가 사신을 보내어 도와주기를 청하였다. 2월 을축에 영주 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파견하여 군사를 징발해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5월 임오에 정명진 등이 요수(遼水)를 건넜다. 고구려 군사들이 그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귀단수(貴端水)를
살펴보건대, 《신당서》를 보면, 정명진이 신성(新城)에 이르러서 고구려를 취하였으니, 《구당서》
정명진열전에 나오는 귀단수는 마땅히 신성의 서남쪽에 있어야 한다. 건너와 맞아 싸웠는데, 정명진 등이
분투하여 크게 격파하고, 수천 명을 쳐 죽였으며, 그 외곽(外廓)과 촌락(村落)을 불태우고 돌아왔다.
《자치통감》
○ 현경(顯慶) 3년 보장왕 17년 6월 임자에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營州都督兼東夷都護) 정명진과
우령군중랑장(右領軍中郞將) 설인귀(薛仁貴)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 고구려의 적봉진(赤烽鎭)을 쳐서
함락시키고, 4백여 급(級)을 참수(斬首)하였으며, 수백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고구려가 대장
두방루(豆方婁)를 파견하여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정명진이 거란의 군사로써 역습하여
크게 깨뜨리고, 2천 5백 급을 참수하였다. 《상동》
○ 《통감고이》에는, “《구당서》 유인궤열전(劉仁軌列傳)에 이르기를, ‘현경 2년에 유인궤에게 정명진을
딸려서 요동을 경략하게 하였는데, 고구려를 귀단성(貴端城)에서 격파하고 3천 급을 참수하였다.’ 하였다.
이제 실록(實錄)을 따른다.” 하였다.
○ 5년 보장왕 19년 12월 임오에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
행군대총관(浿江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소정방(蘇定方)을 요동도 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고,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신당서》
○ 용삭(龍朔) 원년 보장왕 20년 정월 을묘에 하남(河南)ㆍ하북(河北)ㆍ회남(淮南)의 67 주 군사를 모집해서
4만 4천여 명을 얻은 다음, 평양(平壤)과 누방(鏤方)의 행영(行營)으로 나아갔다. 무오에 홍려 경(鴻臚卿)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 행군총관(扶餘道行軍摠管)으로 삼은 다음 회흘(回紇) 등 여러 부(部)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했다. 《자치통감》
○ 4월 경진에 조서를 내려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 행군총관으로 삼고, 계필하력(契苾何力)을 요동도
행군총관으로 삼고, 소정방(蘇定方)을 평양도 행군총관으로 삼고, 소사업(蘇嗣業)을 부여도 행군총관으로
삼고,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 정명진(程名振)을 누방도 총관(鏤方道摠管)으로 삼고,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을 보면, 현경(顯慶) 5년 12월에 정명진이 포주 자사(蒲州刺史)로서 이미 누방도 총관이 되었다.
이제 《신당서》를 따른다. 좌효위장군 방효태(龐孝泰)를 옥저도 행군총관(沃沮道行軍摠管)으로 삼아,
번호(蕃胡) 35군(軍)을 거느리고 수륙(水陸)으로 길을 나누어 진격해서 먼저 고구려의 빈틈을 살피게 하고,
황제는 스스로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그들 뒤를 이으려 하였다. 그러자 울주 자사(蔚州刺史)
이군구(李君球)가 건의하기를,
“고구려는 작은 오랑캐인데 어찌 중국의 온 힘을 기울여 이를 도모하신단 말입니까?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반드시 군사를 동원하여 지켜야 하는데, 적게 동원하면 위엄이 떨쳐지지 못하고, 많이 동원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편치 못할 것입니다. 이는 군비(軍費)로 천하를 피폐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은 정벌하는
것이 정벌하지 않는 것만 못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마침 또 무후(武后)가 반대하므로, 이에 중지하였다. 8월 갑술에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을 보면
7월 갑술로 되어 있다. 소정방과 고구려가 패강(浿江)에서 싸워 고구려를 격파해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드디어 평양을 포위하였다. 《신당서》
○ 소정방이 양건방(梁建方)ㆍ계필하력(契苾何力)과 함께 요동으로 갔는데,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溫沙門)을
만나 횡산(橫山)에서 싸웠다. 설인귀(薛仁貴)가 필마로 돌진하면서 고구려의 군사들을 쏘아대자, 쏘는
곳마다 모두 쓰러졌다. 고구려 군사 가운데 활을 잘 쏘는 자가 있어 성 아래에서 수십 명을 쏘아 죽였는데,
설인귀가 단기로 달려가 곧장 돌진하자, 활과 화살을 모두 잃어버린 채 손을 들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이에 생포하였다. 살펴보건대, 《신당서》 설인귀열전을 보면, 이 일이 현경 4년의 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현경 4년에는 계필하력이 고구려를 정벌한 사실이 없다. 이에 이해에다 넣어 기술하였다.
9월에 계필하력이 압록수(鴨綠水)로 나아갔는데, 그곳은 바로 고구려의 요새지이다. 막리지(莫離支)가 아들
연남생(淵男生)을 보내어 정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지키게 하였으므로 군사들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계필하력이 이곳에 이르자 마침 얼음이 합해졌으므로, 즉시 군사들을 건너게 한 다음 북을
울리면서 진격하니, 고구려 군사가 크게 무너졌다. 이에 수십 리를 추격하여 3만 급을 참수하니, 나머지
병사들이 모두 항복하였으며, 연남생은 겨우 살아 도망쳤다. 《구당서》
○ 2년 보장왕 21년 2월 갑술에 패강도 대총관 임아상(任雅相)이 군중에서 죽었다. 무인에 좌효위장군
백주자사 옥저도총관(左驍衛將軍白州刺史沃沮道摠管) 방효태가 고구려와 더불어 사수(蛇水) 가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패하여서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신당서》에, “방효태가 영남(嶺南)의
군사를 거느리고 사수(蛇水)에 진주하였다가 개소문의 공격을 받아 전 부대가 몰살했다.” 하였다. 소정방이
평양성을 포위하였으나, 오랫동안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런데 마침 눈이 많이 내려서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 12월 무신에 조서를 내려, 고구려와 백제를 토벌하려다가 하북(河北)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렸다는
이유로 정지하였으며, 태산(泰山)을 봉하는 것과 동도(東都)에 행차하는 것도 아울러 정지하였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건봉(乾封) 원년 보장왕 25년 정월에 고구려 왕 고장이 아들 고남복(高男福)을 보내어 천자가
태산(泰山)에 가서 봉선(封禪)하는 데 따라가게 하였다. 《신당서》
○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을 보면, 용삭(龍朔) 2년 8월에 고남복이 와서 천자가 봉선하는 데 따라갔다.
○ 5월에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으니, 큰아들 연남생(淵男生)이 그 대신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연남생이 처음에 국정을 맡고 있다가 여러 성을 순무(巡撫)하러 나가면서, 그의 아우인
연남건(淵男建)과 연남산(淵男産)에게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뒷일을 맡게 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두 아우에게 말하기를,
“연남생은 그대들이 자신을 핍박하는 것을 미워하여 그대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러니 먼저 계책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니, 두 아우가 처음에는 믿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이 연남생에게 고해바치기를,
“두 아우는 형이 돌아오면 그 권한을 빼앗을까 두려워서 형에게 항거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한다.”
하니, 연남생이 몰래 친한 사람을 평양에 보내 그들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다. 두 아우는 그를 체포하고
이어 왕명(王命)으로 연남생을 부르니, 연남생은 두려워서 감히 서울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이에 마침내
연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고는 군사를 내어 연남생을 공격하니, 연남생은 보별성(保別城)으로 달아났다.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는 국내성(國內城)으로 되어 있다. 그러고는 그의 아들 연헌성(淵獻城)을 시켜
당나라의 대궐에 나아가 구원해 주기를 청하게 하였다. 《자치통감》
○ 《신당서》에는,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淵淨土) 역시 땅을 떼어 바치고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하였다.
○ 6월 임인에 조서를 내려,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을 요동도 안무대사
(遼東道安撫大使)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가 연남생을 구하게 하고 《자치통감》에, “연헌성을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으로 삼아 향도(嚮導)하게 하였다.” 하였다. 좌금오위장군(左金吾衛將軍) 방동선(龐同善)과
영주 도독(營州都督) 고간(高侃)을 요동도 행군총관(遼東道行軍摠管)으로 삼고, 좌무위 장군
설인귀(薛仁貴)와 좌감문장군(左監門將軍) 이근행(李謹行)을 후속 부대로 삼아 따라가게 하였다. 《신당서》
○ 9월에 계필하력이 요동에 이르렀다. 고구려 군사 15만 명이 요수(遼水)에 주둔하고, 또 말갈(靺鞨)의
군사 수만 명이 와 남소성(南蘇城)에 주둔하였는데, 계필하력이 온 힘을 다해 쳐서 모두 크게 격파하였다.
1만여 급을 참수하였으며,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7개 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마침 방동선도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였는데, 연남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방동선과 합군(合軍)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연남생을
특진요동대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特進遼東大都督兼平壤道安撫大使)에 제수하고 현도군공(玄菟郡公)을
봉하였다.
○ 12월 기유에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사열소상백(司列少常伯) 학처준(郝處俊)을
부총관으로 삼아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또 계필하력과 방동선을 모두 부대총관 겸 안무대사
(副大摠管兼安撫大使)로 삼고 나머지 관직은 전대로 두게 하였다. 또 조서를 내려 독고경운(獨孤卿雲)에게
압록도(鴨綠道)를 경유하고, 곽대봉(郭待封)에게 적리도(積利道)를 경유하고, 유인원(劉仁願)에게
비렬도(卑列道)를 경유하고, 김대문(金待問)에게 해곡도(海谷道)를 경유하게 한 다음 이들 모두를
행군총관으로 삼았으며, 두의적(竇義積)을 운량사(運粮使)로 삼았다. 그런 다음 이들을 모두 이세적에게
붙여 그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으며, 연(燕)과 조(趙) 지방에 있는 곡식을 운반해 요동으로 모으게 하였다.
《이상 모두 책부원귀》
○ 2년 보장왕 26년 정월에 이세적이 각도(各道)의 군을 이끌고 신성(新城)으로 진격하였다. 《신당서》
○ 9월 신미에 이세적이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다음 계필하력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세적이 처음에 요수를 건너고서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해처(要害處)여서 먼저 이곳을 얻지 못하면 나머지의 성들은 취하기가 쉽지
않다.”
하고, 드디어 이를 공격하였다. 그런데 성안에 있던 사부구(師夫仇) 등이 성주(城主)를 포박하여 문을 열고
항복하니, 이세적이 군사를 이끌고 진격해서 16개 성을 모두 항복시켰다. 이때 방동선(龐同善)과
고간(高侃)이 아직 신성에 있었는데, 연남건(淵男建)이 밤중에 군사를 보내 이들 진영을 엄습하였다. 그러자
설인귀(薛仁貴)가 이들을 격파하였다. 고간이 진군하여 금산(金山)에 이르러 고구려의 군사와 싸웠는데,
전세가 불리하였다. 고구려가 승세를 타서 고간을 추격하였는데, 설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여
고구려의 군사를 대파하고 5만여 급을 참수하였으며, 남소(南蘇)ㆍ목저(木底)ㆍ창암(蒼巖) 등 세 성을
함락시키고 연남생의 군사와 합하였다. 《자치통감》
○ 고종이 직접 칙서를 지어 이세적을 위로하기를,
“금산(金山)에서의 큰 싸움에서 흉당들이 아주 많았었다. 그런데도 경은 사졸들의 앞장을 서서 목숨을
돌보지 않은 채 좌충우돌하여 향하는 곳마다 가로막는 자가 없었다. 이에 사졸들이 용기를 얻어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니 앞으로 공적을 잘 세워서 아름다운 이름을 보전하라.”
하였다. 《구당서》
○ 곽대봉(郭待封)이 수군(水軍)을 이끌고 다른 길로 나아가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이세적이 별장(別將)
풍사본(馮師本)을 보내 군량과 병기를 대 주게 하였는데, 풍사본이 파선(破船)을 당하여 기일 안에 대 주지
못하였다. 이에 곽대봉은 군사들이 주리고 군색하자, 글을 지어 이세적에게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에게 편지를 빼앗겨 그 허실(虛實)이 알려질까 두려워서 이합시(離合詩)를 지어 이세적에게 보냈다.
글을 받아 본 이세적은 성내어 말하기를,
“군사의 일이 한창 급박한 때에 어찌 시를 지어 보내는가. 내가 꼭 참수하고 말겠다.”
하였다. 그러자 행군관기통사(行軍管記通事) 사인(舍人) 원만경(元萬頃)이 그 뜻을 풀이해 주니, 이세적이
이에 다시 군량과 병기를 보내 주었다. 그런데 원만경이 지은 격고려문(檄高麗文)에, “압록의 험지(險地)를
지킬 줄 모르는구나.” 하였는데, 연남건이 “삼가 명령대로 따르겠다.”고 회보(回報)하고는, 곧바로 군사를
옮겨 압록진(鴨綠津)을 점거하니, 당나라 군사가 건너지 못하였다. 황제가 이 사실을 듣고 원만경을
영남(嶺南)으로 귀양 보냈다. 학처준(郝處俊)이 고구려의 성 아래에 있었는데, 진을 치기 전에 고구려
군사들이 엄습하자, 군중(軍中)이 크게 놀랐다. 그런데 학처준은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마른 양식을 다
먹은 다음에 몰래 정병(精兵)을 뽑아서 이를 격파하니, 병사들이 그의 담략에 모두 감복하였다. 《자치통감》
○ 총장(總章) 원년 보장왕 27년 정월 임자에 유인궤(劉仁軌)를 요동도부대총관 겸 안무대사 패강도
행군총관으로 삼았다. 《신당서》
○ 2월 임오에 설인귀가 고구려 군사를 금산(金山)에서 격파하고 나서 승세(勝勢)를 이용하여 2천 명을
거느리고 부여성(扶餘城)을 공격하려 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군사가 적다는 이유로 말리니, 설인귀가
말하기를,
“장수가 군사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숫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선봉이 되어 달려 나갔다. 고구려 군사들이 와서 막았으나 이를 맞받아쳐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1만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에 마침내 부여성을 함락시키니, 부여천(扶餘川) 주변의 40여
성이 모두 풍문만 듣고도 두려워하여 한꺼번에 항복을 청하였다. 설인귀가 곧바로 바다를 아우르고 땅을
경략하여 이세적의 군대와 평양에서 만났다. 《구당서》
○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요동에 가서 일을 살펴보고 돌아오자, 황제가 군중(軍中)의 일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옛날에 선제(先帝)께서 고구려를 정벌하였을 때 이기지 못한 것은 그들 내부에
틈이 없어서입니다. 속담에, ‘군(軍)은 길잡이가 없으면 중도(中道)에서 돌아온다.’ 하였습니다. 지금 남생의
형제가 서로 싸워 우리의 향도가 되었으므로 고구려의 실정과 거짓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
데다가 우리의 장수들은 충성스럽고 사졸들은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이긴다고 말한
것입니다. 또 고구려의 비기(祕記)에, ‘9백 년이 못 되어 80의 대장(大將)이 이를 멸할 것이다.’ 하였는데,
고씨(高氏)는 한(漢) 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백 년이 되었고 이세적의 나이가 지금 80입니다. 고구려는
지금 연이어 굶주려서 사람들은 서로 약탈하고,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며, 이리와 여우가 성으로 들어오고,
두더지가 성문에 구멍을 내어 인심이 흉흉하니, 이번에는 꼭 이겨 다시는 거병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연남건이 군사 5만으로 부여성을 공격하자, 이세적이 살하수(薩賀水) 가에서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설하수(薛賀水)로 되어 있다. 그들을 격파하였는데, 머리 5천 급을 베고 3만 명을
사로잡았으며, 병기와 우마 역시 그만큼을 빼앗았다. 그런 다음 진격해서 대행성(大行城)을 함락시켰다.
《신당서》
○ 4월 병진에 혜성이 오거성(五車星)에 나타나자, 허경종(許敬宗)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으니 고구려가 곧 망할 징조입니다.” 하였다.
○ 8월 신미에 비열도총관(卑列道摠管)인 우무위 장군(右武衛將軍) 유인원(劉仁願)이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머뭇거리고 진격하지 않은 데 좌죄(坐罪)되어 요주(姚州)로 귀양 갔다. 《이상 모두 자치통감》
○ 이세적이 대행성(大行城)을 함락시키고 나서 계필하력과 설인귀 등이 모두 이세적과 더불어
압록수(鴨綠水)에 모였다. 고구려가 항거하여 오자, 이세적 등이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2백여 리를
추격하여 욕이성(辱夷城)을 함락시키니, 모든 성이 도피하여 잇달아 항복하였다. 계필하력이 번호(蕃胡)와
중국군 50만 명을 이끌고 먼저 평양성에 이르니, 이세적의 군사가 뒤이어 와 평양성을 7개월 동안이나
포위하였다.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한 달 남짓으로 되어 있다.
9월 계사에 고구려 왕 고장이 연남산(淵男産)을 보내어 수령(首領) 1백 명을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98명으로 되어 있다. 거느리고 흰기를 들고 와서 항복하고, 또 입조(入朝)하기를 청하니, 이세적이 예로서
대접하였다. 그런데도 연남건은 오히려 성을 굳게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고구려의 대장인 중[浮屠] 신성(信誠)이 몰래 첩자(諜者)를 보내 내응(內應)하기로 약속하였는데, 5일이
지나자 신성이 과연 성문을 열어 놓았다. 이에 이세적이 군사를 풀어 들어가게 하고, 성 위에 올라가
북 치고 소리 지르면서 성문과 누각에 불을 지르게 하니, 사방에서 불이 일어났다. 연남건이 다급하여
스스로 자신을 찔렀으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에 고구려 왕 고장과 연남건 등을 사로잡았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서 먼저 소릉(昭陵)에 고구려의 포로를 바치고, 개가(凱歌)를 울리면서 돌아오게 하였다.
12월 정사에 황제가 함원전(含元殿)에 앉아서 이세적 등을 인견하고 뜨락에서 포로들을 받았다.
고장(高藏)에 대해서는 평소에 협박을 당하여 스스로 정사(政事)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사면(赦免)하여
사평태상백 원외동정(司平太常伯員外同正)으로 삼았으며, 연남산(淵南産)은 먼저 항복하였다는 이유로
사재 소경(司宰少卿)을 제수하였다. 연남건은 검주(黔州)로 유배 보내고, 백제 왕(百濟王) 부여융(扶餘隆)은
영외(嶺外)로 유배 보냈다. 연헌성(淵獻城)을 사위경(司衛卿)으로 삼고, 신성(信誠)을 은청광록대부
(銀靑光祿大夫)로 삼고, 연남생(淵南生)은 중국 군사를 향도한 공이 있다는 이유로 우위대장군에 제수하고
변국공(卞國公)을 봉하였으며, 특진(特進) 등은 예전대로 주었다. 이세적은 태자태사(太子太師)를 겸하게
하고, 계필하력은 행 좌위대장군(行左衛大將軍)으로 삼고, 설인귀는 위위대장군(威衛大將軍)으로 삼았다.
고구려는 본래 나라 전체가 오부(五部)로 나뉘어져 있으며, 성이 1백 76개에, 호구가 69만 7천 호였다.
이에 그 지역을 9개 도독부(都督府), 42개 주(州), 《자치통감》 주에, “신성주(新城州)ㆍ요성주(遼城州)ㆍ가물주(哥勿州)ㆍ위락주(衛樂州)ㆍ사리주(舍利州)ㆍ거원주(居袁州)ㆍ월소주
(越素州)ㆍ거조주(去朝州)ㆍ건안주(建安州) 등 9개 도독부가 있으며, 42개 주 가운데 지(志)에 있는 것은
남소(南蘇)ㆍ개모(蓋牟)ㆍ대나(代那)ㆍ창암(倉巖)ㆍ마미(磨米)ㆍ적리(積利)ㆍ여산(黎山)ㆍ연진(延津)ㆍ목저(木底)
ㆍ안시(安市)ㆍ제북(諸北)ㆍ식리(識利)ㆍ불열(拂涅)ㆍ배한(拜漢) 등 14개 주뿐이다.” 하였다. 1백 개의 현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통괄하였으며, 고구려의 장수 가운데 공이 있는
우두머리를 택해 도독(都督)ㆍ자사(刺史)ㆍ현령(縣令)을 제수해 중국 관리와 함께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어 좌무위 장군 설인귀(薛仁貴)를 파견하여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가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평양에
머물러 다스리게 하였다. 그 뒤에 설인귀에게 겸검교안동도호(兼檢校安東都護)를 제수해 신성(新城)으로
옮겨 가서 다스리면서 고아와 늙은이를 돌보아 주고, 재능이 있는 자는 재주에 따라 등용하며, 충효(忠孝)와
절의(節義)가 있는 자를 모두 정표(旌表)하게 하니, 고구려의 군사와 백성들이 모두 다 기뻐하여
감화되었다. 이해에 교제(郊祭)를 지내었는데, 이는 고구려를 평정한 것에 대해 하늘에 감사를 표한 것이다.
《신당서 및 구당서》
○ 2년 4월에 고구려 사람들 가운데 이반(離反)하는 자가 많자, 칙명을 내려 고구려의 민호 3만 8천 2백
호를 강남(江南)ㆍ회남(淮南) 및 산남(山南)ㆍ경서(京西) 등 여러 주의 비어 있던 땅으로 옮기고,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은 그대로 두어 안동(安東)을 지키게 하였다. 《자치통감》
○ 함형(咸亨) 원년(670) 4월에 고구려의 대장(大長) 겸모잠(鉗牟岑)이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검모잠(劒牟岑)으로 되어 있다. 백성들을 이끌고 반란하여 고장(高藏)의 외손인 안순(安舜)을 왕으로 삼았다.
조서를 내려 좌감문위대장군(左監門衛大將軍) 고간(高侃)을 동주도 행군총관(東州道行軍摠管)으로 삼고,
우령군위대장군(右領軍衛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 행군총관(燕山道行軍摠管)으로 삼아 토벌하였다.
그리고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양방(楊昉)을 보내 도망치고 남은 고구려 사람들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안순이 겸모잠을 죽이고 신라(新羅)로 달아났다. 《신당서》
○ 2년에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7월 초하루 을미로 되어 있다. 동주도 총관 고간(高侃)이 안시성에서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을 격파하였다. 고간이 “어떤 고구려의 중이 중외에 재이가 있을 것이라고 떠들어
대니, 주벌하소서.” 하고 상주(上奏)하니, 황제가 학처준(郝處俊)에게 이르기를,
“하늘에서 재이를 내리는 것은 임금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다. 그 재이가 사실이라면 말한 자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그 말을 듣고서 스스로 경계하면 되는 것이다. 순 임금이
비방(誹謗)하는 말을 기록하도록 나무를 세운 것이 참으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천하의 입을 막으려고 한들
되겠는가. 이는 죄를 줄 것이 없으니, 특별히 용서하게 하라.”
하였다. 《책부원귀》
○ 3년 12월에 고간이 고구려의 남은 백성들과 백수산(白水山)에서 싸워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는
천산(泉山)으로 되어 있다. 격파하였다. 신라가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를 구원하였는데, 고간이 격파했다.
《자치통감》 ○ 《신당서》에는, “신라의 구원병 2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하였다.
○ 4년 윤5월에 연산도총관 우령군대장군(燕山道摠管右領軍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이 고구려의 반란군을
발로하(發盧河)에서 격파하였다.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발로하가 호렴하(瓠簾河)로 되어 있다. 다시
싸워서 1만여 명을 포로로 잡거나 죽였다. 이에 평양성의 패잔병들이 쇠약해져서 다시는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신라로 도망해 갔는바, 4년 만에 평정이 된 것이다. 처음에 이근행이 아내인 유씨(劉氏)를
벌노성(伐奴城)에 머물려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유씨가 갑옷을
입고 무리를 거느리고 성을 지켰다. 이에 고구려 군사가 물러가니, 황제가 가상히 여겨
연군부인(燕郡夫人)으로 봉하였다. 《신당서 및 자치통감》
○ 의봉(儀鳳) 원년(676) 2월 갑술에 안동도호부를 요동(遼東)의 고성(故城)으로 옮겼다. 《통감고이》에
이르기를, “실록(實錄)에, ‘함형(咸亨) 원년에 양방(楊昉)과 고간(高侃)이 안순(安舜)을 토벌하여 비로소
안동도호부를 함락하고 평양성에서 요동주로 옮겼다. 의봉 원년 2월 갑술에 고구려의 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겼다.’고 하였는데, 대개 함형 원년에 안동도호부를 옮겼다고 한 말은
결과를 두고 말한 것이고, 의봉 원년에 고구려의 유민이 반란하였다고 한 말은 안동도호부를 옮기게 된
원인을 말한 것이다. 또 《당회요(唐會要)》에는 함형 원년에 안동도호부를 옮겼다는 사실이 없고 의봉
원년에 요동 고성(故城)으로 옮겼다고 하였기에, 이제 그를 따른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신당서》에도 “함형 원년에 고간이 도호부의 소재지를 요동주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이에 앞서서 동관(東官)으로 있던 당나라 사람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자치통감》
○ 2년에 고장(高藏) 에게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2월 정사에 공부 상서(工部尙書) 고장에게’라고
되어 있다. 개부의동삼사 요동군도독(開府儀同三司遼東郡都督)을 제수하고 조선 왕(朝鮮王)을 봉한 다음,
안동(安東)에 거주하면서 본번(本蕃)을 진압하고 군주 노릇을 하면서 유민들을 안집시키게 하였다. 이에
앞서서 내주(內州)에 편입되어 있던 교민(僑民)들을 모두 용서하여 보내고, 안동도호부를 신성(新城)으로
옮겼다. 《자치통감》 주에, “지난해 봄에 안동도호부를 요동 고성으로 옮겼다가, 지금 또다시 신성으로 옮긴
것이다.” 하였다. 고장이 안동에 이르러서 몰래 말갈과 내통하여 모반하였는데, 사전에 발각되어 그를 도로
소환하여 공주(邛州)로 유배하였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각각 흩어서 하남(河南)과 농우(隴右)의 여러 주로
옮겼으며, 가난하고 허약한 자들은 안동성 주위에 머물려 두었다. 《구당서 및 신당서》
○ 영순(永淳) 초에 고장이 졸하였다. 위위 경(尉衛卿)에 추증하고, 힐리가한(頡利可汗)의 묘 왼쪽에 장사
지냈으며, 주위에 비석을 세워 주었다. 예전의 고구려 성들은 왕왕 신라에 편입되고 유민들은 돌궐이나
말갈로 흩어져 도망갔다. 이로 말미암아 고씨(高氏)의 군장(君長)이 모두 끊어졌다. 《신당서》
○ 무후(武后) 수공(垂拱) 2년(686)에 고장의 손자 고보원(高寶元)을 봉하여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았다.
《구당서》
○ 성력(聖曆) 원년(698)에 고보원을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으로 올려 제수하고,
충성국왕(忠誠國王)에 봉하였다. 그러고는 그에게 안동을 맡겨 고구려의 옛 백성들을 통섭하려 하였으나,
일이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상동》
○ 2년 말에 고장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를 안동 도독으로 삼았다. 그 뒤로 조금씩 나라의 모양이
이루어졌다. 《신당서》
○ 헌종(憲宗) 원화(元和) 13년(818) 4월에 고구려국에서 악공(樂工)을 보내왔다. 《책부원귀》
○ 살펴보건대, 《당서》를 보면 이는 바로 고덕무의 후손이다.
고구려는 삼국(三國) 시대 이래로 역사에 나타난 나라이다. 구려(句麗)가 그 국호(國號)이고, 고(高)가 그
성씨(姓氏)이다. 그런데 수나라가 구(句) 자를 빼어 버렸기 때문에 당나라 이래로 단지 고려(高麗)라고만
칭하였다. 《오대사기(五代史記)》에 “후당(後唐) 동광(同光 장종(莊宗)의 연호임) 원년(923)에 한신(韓申)이
왔는데, 그 왕의 성이 여전히 고씨였다.” 하였으니, 삼국 시대부터 오대에 이르기까지 한 성으로만 전해져
온 것이다. 장흥(長興 후당 명종의 연호임) 연간에 이르러 비로소 ‘권지국사 왕건(權知國事王建)’이라
칭하였으니, 왕씨가 고씨를 대신한 것은 동광과 장흥 사이에 있을 것인데, 역사에서는 실전(失傳)되었다.
《석림연어(石林燕語)》
살펴보건대, 고구려가 망한 것은 당나라 현경 원년이다. 역사에서 영순(永淳)이나 수공(垂拱) 이후에 고씨
성을 가진 군장(君長)이 이미 끊어졌다고 칭하였으니, 다시 중국에 통하지 못한 것이다. 왕씨(王氏)가
일어난 것은 후량(後梁)의 정명(貞明) 4년(918)이었으며, 한신(韓申) 역시 왕씨의 사신이었다.
섭소온(葉少蘊)은 구려의 성이 고씨라는 것만 믿고 왕씨가 이미 흥한 것은 상고하지 않은 채 왕의 성씨가
여전히 고씨라고 하였으니, 틀린 것이다.
[주-D001] 상주국(上柱國) :
공이 큰 공신에게 주는 최고의 칭호이다. 주국(柱國)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우리나라 왕에게 관직을
제수할 때 이 칭호를 붙였다.
[주-D002] 천존상(天尊像) :
도교(道敎)의 신상(神像)이다. 도교에서는 천신(天神)을 천존(天尊)이라 한다.
[주-D003] 도사(道士) :
도교의 승려를 말한다. 원래 도사라는 칭호는 전한(前漢) 시대 이전에는 없었으나 후한의 장릉(張陵)이
오두미교(五斗米敎)를 개창하자, 후대 사람들이 비로소 그 무리를 도사라고 칭하였다. 방사(方士)라고도
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9쪽》
[주-D004] 힐리가한(頡利可汗) :
계민가한(啓民可汗)의 셋째 아들로, 이름이 아사나돌필(阿史那咄苾)이다. 당 고조 때 군사가 강한 것을 믿고
중국의 변경을 침입하였는데, 정관(貞觀) 연간에 이정(李靖)에게 토벌당했으며, 보철산(保鐵山)으로 도망쳐
있다가 장보상(張寶相)에게 체포당하여 경사(京師)로 잡혀 와 있다가 죽었다. 그의 시신은 돌궐의 풍속에
따라 패수(㶚水) 가에서 불태웠다.《舊唐書 卷194上》
[주-D005] 대대로(大對盧) :
고구려의 최고 관직의 하나이다. 초기의 대로(對盧)가 뒤에 대대로(大對盧)ㆍ태대대로(太大對盧) 등으로
되었다.
[주-D006] 연개소문(淵蓋蘇文) :
이병도는, “개소문에 대하여는 《신당서》 고려열전(高麗列傳)에 ‘개소문이란 자가 있는데, 혹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성은 천씨(泉氏)이고, 스스로 물속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켰다.’라
한 한 구절이 있는데, 이에 의거하면 소문의 완칭은 천개소문(泉蓋蘇文)이요, 다른 한 이름은
개금(蓋金)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6년 및 10년 조에 보이는 고구려 대신
연정토(淵淨土)가 《당서》의 ‘소문의 동생 정토’와 같은 사람임을 보면 천씨(泉氏)는 본래 연씨(淵氏)였던
것이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의 휘를 피하여 소문의 아들 남생(男生)이 당나라에 투항한 뒤 천(泉) 자로
대신한 것이 아닌가 함이 통설(通說)이다. 《삼국유사》 보장봉노조(寶臧奉老條)에 적힌 ‘스스로 성은
개(蓋)이고 이름은 금(金)이라고 칭하였으며, 지위가 소문(蘇文)에 이르렀는데, 바로 시중의 직책이다.’라
하여 소문을 관직명이라 한 것은 고려할 가치도 없다고 본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21쪽 주》 이하
본 번역에서는 모두 연개소문(淵蓋蘇文)으로 표기하였다.
[주-D007] 고장(高臧) :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寶臧王)의 이름이다. 보장왕은 나라를 잃은 탓에 시호(諡號)가 없으며,
보장은 그의 또 다른 이름이다.《三國史記 卷21 高句麗本紀 第9 寶臧王上》
[주-D008] 막리지(莫離支) :
고구려의 최고 관직이다. 막리지의 호칭은 수ㆍ당 이전부터 있어 오던 것인데, 최초로 막리지가 되어
군권(軍權)과 정권(政權)을 한꺼번에 잡은 사람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이다. 막리지는 기무(機務)ㆍ조명(詔命)
뿐만 아니라 군사권까지 한 손에 쥐어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어원(語源)은 확실하지가 않다.
《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81쪽》
[주-D009] 진씨(晉氏)의 난리 :
사마염(司馬炎)이 위(魏)나라를 찬탈하여 진(晉)나라를 세운 것을 말한다.
[주-D010] 설연타(薛延陀) :
종족의 이름으로 흉노의 별종이다. 처음에는 설부(薛部)와 연타부(延陀部)로 나뉘어져 있다가 설부가
연타부를 합병하고는 설연타라 칭하였다. 처음에는 연말산(燕末山)에 웅거해 있다가 이남(夷男)이 부족장이
되어 돌궐에 귀부하였으며, 그 뒤 돌궐을 배반하고 자립(自立)하였다. 당 태종 때 진주비가가한
(眞珠毘伽可汗)으로 책립(册立)되었으며, 정관(貞觀) 말에 몽고의 울독군산(鬱督軍山) 즉 지금의
항애산(杭愛山) 부근에 웅거해 있으면서 여러 부족을 통솔하였다. 진주비가가한이 죽은 뒤
국내가 어지러워지자 당나라에서 이세적(李世勣)을 파견하여 토벌하였다.
[주-D011] 해(奚) :
4세기경부터 몽고 동부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면서 거란족(契丹族)과 인접해 있던 선비족(鮮卑族)의
한 부족으로, 처음에는 고막해(庫莫奚)라고 불렸다. 뒤에 흉노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주-D012] 고정(郜鼎) :
고정은 고나라에서 만든 솥이다. 춘추 시대 때 송나라의 태재(太宰) 독(督)이 상공(殤公)을 죽이고
정(鄭)나라에서 풍(豐)을 맞아다가 옹립하였는데, 주위에 있는 나라들이 이를 규탄할까 두려워하여
먼저 노(魯)나라 환공(桓公)에게 고정을 뇌물로 주었다. 이로부터 고정은 비리(非理)로 받는 뇌물을 뜻하게
되었다.
[주-D013] 개모성(蓋牟城) :
지금의 무순(撫順) 서쪽에 있는 탑산산성이다. 심양(瀋陽)과 요양(遼陽)의 중간 지점인
십리아반(十里阿畔)이라는 설과 대련(大連)의 북쪽인 개평(蓋平)이라는 설도 있다.
[주-D014] 개주(蓋州) :
지금의 요령성(遼寧省)에 있었던 주의 이름이다. 본래 고구려의 개모성이었으나 당나라에서 빼앗아 개주를
두었다. 뒤에는 발해의 영토로 편입되었다가 원나라 때에는 개주로(蓋州路)가 되었고, 명나라 때에는
개주위(蓋州衛)를 설치하였으며, 청나라 때에는 개평현(蓋平縣)을 설치하였다.
《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82쪽》
[주-D015] 국내성(國內城) :
고구려 전기(前期)의 수도로, 만포진(滿浦鎭) 대안(對岸)의 집안현성(輯安縣城)과 그 배후의 산성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제2대 유리왕 때 이곳으로 천도하여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고구려의
근거지가 된 곳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83쪽》
[주-D016] 이세적(李世勣) :
원문에는 ‘李勣’으로 되어 있는데, 이적의 본명은 이세적(李世勣)으로,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휘를
피하여 이적(李勣)으로 표기한 것이다. 본 번역에서는 모두 이세적으로 표기하였다.
[주-D017] 백애성(白崖城) :
《신당서》와 《삼국사기》에는 백암성(白巖城)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요령성 요양현(遼陽縣) 동북쪽에 있는
연주성(燕州城)이다. 당나라에서 이곳을 빼앗은 다음에 암주(巖州)를 설치하였다.
[주-D018] 손벌음(孫伐音) :
《통감》과 《삼국사기》에는 손대음(孫代音)으로 되어 있다.
[주-D019] 북부 누살(北部耨薩) :
누살은 욕살(褥薩)을 말한다. 욕살은 군(郡) 규모의 여러 성을 통괄하는 커다란 행정 구역인 대성(大城)의
장관이다.
[주-D020] 대로(對盧) :
고구려 왕실 직속의 최고 벼슬로 패자(沛者)와 같이 왕을 보좌하며 국정을 총리(總理)하는 수상격이며,
후대에는 대대로(大對盧)ㆍ태대대로(太大對盧)라는 관직까지 생겼다. 대로는 왕이 직접 임명하는 벼슬이
아니라 여러 부족 가운데 우세한 부족에서 선출하였던 것으로, 타부족의 대변자 역할을 하면서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1쪽》
[주-D021] 진왕(秦王) :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처음 봉군(封君)되었을 때의 칭호이다.
[주-D022] 주필산(駐蹕山) :
지금의 요령성 요양현(遼陽縣) 서남쪽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 일명 수산(首山)이라고도 한다.
[주-D023] 진주가한(眞珠可汗) :
설연타(薛延陀)의 부족장인 이남(夷男)이 당나라로부터 받은 칭호이다.
[주-D024] 안시성의 성주(城主) :
성주의 이름은 정사(正史)에는 전하지 않아 상세하게 알 수가 없으나, 야사(野史)에는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이라 전한다.《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 권6 경연일기(經筵日記) 기유년 4월 26일
조에, “상이 이르기를,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누구인가?’ 하니, 송준길(宋浚吉)이 아뢰기를,
‘양만춘(梁萬春)입니다. 그는 당나라 태종의 군대를 막았으니, 참으로 성을 잘 수비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하였으며,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도강록(渡江錄) 6월 28일 을해 조에,
“세상에 전하기를,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이 당나라 황제의 눈을 쏘아 맞히자, 황제가 성 아래에서
군사들을 시위하게 하면서 비단 1백 필을 하사하여 그가 자신의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킨 데 대해
상 주었다.’고 한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35쪽 주》
[주-D025] 부개자(傅介子) :
한나라 소제(昭帝) 때의 무신(武臣)으로, 대완국(大宛國)에 사신으로 가서 조령(朝令)으로 누란국(樓蘭國)과
구자국(龜玆國)을 책하여 모두 복종시켰다. 뒤에 누란국과 구자국이 배반하자, 누란국으로 가서 왕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와 의양후(義陽侯)에 봉해졌다.
[주-D026] 박작성(泊灼城) :
지금의 안평(安平) 하구(河口)에 있으니, 단동현(丹東縣) 동쪽의 구련성(九連城)이다.《조선전사 제3권, 124쪽》
[주-D027] 거란의 …… 방어하였다 :
거란은 수나라 개황(開皇) 말기에 부족이 점차 불어나자, 목축을 하기 위해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찾아
요서(遼西) 2백 리 되는 곳에 이르러 회흘(回紇)에 의지하여 살았다. 당 태종 정관(貞觀) 22년(648)에 추장인
굴가(窟哥)가 당나라에 내부(內附)하자, 당 태종이 거란부(契丹部)를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로 만들고
굴가를 도독으로 임명하여 송막과 요락(樂樂) 지방을 통치하게 하였으며, 이씨(李氏) 성을 하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신성(新城)에서 고구려와 싸운 것이다.《東史綱目 第4下》
[주-D028] 귀단수(貴端水) :
지금의 혼하(渾河)이다.
[주-D029] 회흘(回紇) :
종족의 이름으로, 외올아(畏兀兒)ㆍ회골(回鶻)이라고도 한다. 본디 흉노족의 후예로, 돌궐족에 복속되었었다.
위(魏)나라 때에는 고거(高車)ㆍ원흘(袁紇)ㆍ오호(烏護)라 칭해졌고, 수나라 때에는 위흘(韋紇)이라 칭하다가
당나라 때 이르러 비로소 회흘이라 칭하였으며, 당나라 곽자의(郭子儀)와 함께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을 평정하여 회골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처음에는 내몽고와 외몽고의 지역에
거주하다가 내란으로 인해 서쪽으로 가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동남부 지역에 거주하였다.
송나라와 원나라 때에는 외올아(畏兀兒)라 칭하였으며, 천산(天山) 남로(南路)의 지역에 거주하였다.
[주-D030] 고남복(高男福) :
《삼국사기》에는 복남(福男)으로 되어 있다.
[주-D031] 금산(金山) :
《성경지(盛京誌)》에는 지금의 영해현(寧海縣) 서남쪽 1백 27리 지점에 있는 황금산(黃金山)이 이곳이라고
하였다.
[주-D032] 연남생의 …… 합하였다 :
이병도는, “연남생은 이때 당나라 군대와 행동을 같이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말한 연남생의 군사는
그가 당나라에 내부(內附)할 때 본래의 근거지인 국내성(國內城)에 머물러 있게 하였던 군대인 것 같다.”
하였다.《國譯三國史記 343쪽 주》
[주-D033] 이합시(離合詩) :
시를 지으면서 상대방이 쉽게 알아보지 못하도록 자획(字劃)을 떼어서 지은 것으로, 그것을 합하여
보아야만 원뜻을 알 수가 있다. 곽대봉(郭待封)이 지은 이합시는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주-D034] 고구려의 성 :
《삼국사기》에는 학처준이 안시성(安市城) 아래에 있었다고 하였다.《三國史記 卷22 高句麗本紀 第10》
[주-D035] 소릉(昭陵) :
당나라 태종(太宗)의 능으로, 섬서성(陜西省) 예천현(醴川縣) 동북쪽에 있다.
[주-D036] 부여융(扶餘隆) :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셋째 아들이다. 의자왕 4년(644)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백제가 망하면서 당나라로
압송되어 갔다. 665년에 당 고종(唐高宗)의 명으로 웅진 도독(熊津都督)이 되었다가 얼마 뒤 당나라로
돌아가 낙양(洛陽)에서 죽었다. 중국 측의 사서(史書)에는 부여융이 의자왕의 태자라고 되어 있는데,
의자왕의 태자는 부여효(扶餘孝)이다.
[주-D037] 그 뒤에 …… 다스리면서 :
이병도는 이에 대해 “설인귀는 다음 해에 도호부를 평양에서 신성으로 옮겼다. 도호부를 옮긴 것은
검모잠(劒牟岑) 등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운동이 평양 부근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였다.
《國譯三國史記 345쪽 주》
[주-D038] 고구려의 …… 겸모잠(鉗牟岑) :
《삼국사기》와 《동사강목》에는 검모잠(劒牟岑)으로 되어 있으며, 관직도 대형(大兄)으로 되어 있다.
《三國史記 卷22 高句麗本紀 第10》 《東史綱目 第4下》
[주-D039] 고장(高藏)의 …… 안순(安舜)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왕의 외손인 안순(安舜)’으로 되어 있으나, 신라본기에는 ‘안승(安勝)’이라
하였으며, 《동사강목》 제4에는 ‘왕의 아들 안승(安勝)’으로 되어 있다. 이병도는 “안승의 신분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함형(咸亨) 원년 4월 조의 기사에서는 ‘왕의 외손’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신당서》나 《자치통감》의 기사와 일치한다. 한편 《삼국사기》 권6 문무왕 10년 6월 조의
기사에는 ‘연정토(淵淨土)의 아들’이라 하였다. 그러나 문무왕이 안승을 고려국왕에 봉할 때의 책명(册命)에
‘高句麗嗣子安勝公’이라고 한 것을 보면 서자(庶子)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다.” 하였다.
《國譯三國史記 345~346쪽》
[주-D040] 발로하(發盧河) :
《삼국사기》에는 호로하(瓠瀘河)로 되어 있다. 《동사강목》 제4에 “지금의 마전(麻田) 징파도(澄波渡) 하류에
호로하가 있는데, 그 남쪽이 바로 칠중성(七重城)이다.” 하였다. 지금의 임진강(臨津江)이다.
[주-D041] 동관(東官) :
고구려와 백제의 지역을 통치하는 도독부의 관원을 말한다.
[주-D042] 섭소온(葉少蘊) :
섭몽득(葉夢得)을 말한다. 소온(少蘊)은 그의 자(字)이다. 송나라 오현(吳縣) 사람으로,
《석림연어(石林燕語)》를 저술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6
여기까지 고구려입니다.
다음은 백제입니다. 그냥 해동역사는 이렇다 하는 것을 올렸습니다. 참고로 보시라고
[출처] 101. 해동역사(海東繹史) 제8권 / 세기(世紀) 8|작성자 집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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