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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05월14일(수요일) [무계원&윤동주문학관&청운문학도서관] 관람일정
탐방지 : 무계원 기획전시 한국의 미(美) 16 [머무름에 빛을 담다]
[종로문화재단] 2025 무계원 기획전시 한국의 미(美) 16 《머무름에 빛을 담다》
장소 : 무계원(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5가길 2) 안채, 사랑채, 별채
기간 : 2025-05-16 ~ 2025-07-13
시간 : 10:00 ~ 17:00
대상 : 누구나
요금 : 무료
문의 : 02-379-7132
전시 안내
무계원 기획전시 한국의 미(美)《머무름에 빛을 담다》전시를 개최합니다. ‘한국의 미(美)’전시는 한국의 무형문화유산을 계승하고 예술적 가치를 알리고자 기획되었습니다. 올해는 지속 가능한 천연 도료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공예 기법인 '옻칠'에 주목하여, 서울시 무형문화유산 옻칠장 제1호이자 대한민국 나전칠기 명장 제1호인 수곡(守谷) 손대현 장인의 작품 40여 점을 선보입니다. 60여 년간 옻칠에 전념해 온 손대현 장인의 작품을 통해 우리 전통문화유산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탐방코스: [부암동주민센터.무계원 정류장~무계원~무계원 기획전시 한국의 미(美) 16 [머무름에 빛을 담다]를 관람~윤동주문학관(尹東柱文學館)~윤동주 시인의 언덕~청운문학도서관~자하문고개.윤동주문학관 정류장]
탐방일 : 2025년05월14일(수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종로구 부암동 최저기온 15도C, 최고기온 26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2시간17분 소요)
12:00~12:05 연신내역에서 3호선을 타고 불광역으로 가서 불광역 2번 출구로 나옴 [5분 소요]
12:05~12:11 불광역.불광1동주민센터 정류장까지 도보로 이동 [6분, 270m 이동]
12:11~12:25 불광역.불광1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부암동주민센터.무계원 정류장으로 가는 7022번 버스 승차 대기
12:25~12:41 7022번 버스를 타고 불광역.불광1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부암동주민센터.무계원 정류장으로 이동 [16분, 10개 정류장 이동]
12:41~12:44 부암동주민센터.무계원 정류장에서 탐방출발하여 서울시 종로구 창의문로 5가길 2 번지에 있는 무계원으로 이동 [3분, 169m 이동]
[무계원(武溪園)
종로구 부암동에 개원한 도심 속 전통문화 공간이다.
고즈넉한 풍광 속에서 한옥을 체험하며, 전통과 문화를 통해 한국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부암동 전통문화공간, 머물고 싶은 곳”
무계원의 건물은 과거 종로구 익선동에 있었던 서울시 등록음식점 1호 오진암의 건물 자재를 사용하여 지어졌으며 무계원의 대문을 비롯해 기와, 서까래, 기둥 등에 쓰였다.
조선말기 서화가 이병직의 집이기도 하였던 오진암은 1910년대 초 대표적인 상업용 도시한옥으로서 그 희소성과 함께 보존가치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남북 냉전체제를 대화국면으로 이끈 7.4 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해 낸 역사적인 장소였다.
무계원이 위치한 무계정사지는 안평대군이 꿈을 꾼 도원과 흡사해 화가 안견에게 3일 만에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했고 정자를 지어 시를 읊으며 활을 쏘았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장소이다.
무계원의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는 세미나, 강연, 회의실, 전시실 등으로 사용 가능하며, 안채 마루, 안마당과 뒷마당 등 부대시설에서는 다양한 전통문화 행사도 진행한다.]
[안평대군의 별서 무계정사의 옛 활터에 세워진 ‘무계원’
K스피릿 기사 입력 2024.04.25. 10:40, 업데이트 2024.05.22. 11:56
기자명 강나리 기자
[여행자의 눈으로 본 서울] 서울 종로구 부암동 ‘무계원’
[편집자 주] 익숙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풍광도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뜻밖의 특별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 건국 초부터 600년이 넘는 동안 수도 역할을 해온 서울의 숨은 명소와 보물,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인왕산 자락 시간의 층이 켜켜이 쌓인 부암동의 한 골목 봄철 철쭉이 핀 담장길을 따라가면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무계원(武溪園)’이 나타난다.
무계원은 조선 4대 세종대왕과 소헌황후 심씨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아들 안평대군 이용李瑢이 당대 문신, 학자들과 교류하던 별서인 무계정사의 활터 자리에 세워진 한옥형태의 문화체험공간이다.
무계원 인근에는 불과 몇 미터 위쪽에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로 ‘운수 좋은 날’을 쓴 현진건 선생의 집터가 나오고, 그 위로 ‘몽유도원도’를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두어 칸 무계정사를 세우고 1천 그루의 복숭아나무를 심은 안평대군의 집터가 나온다.
무계원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계단을 따라 올라간 경사진 부지 위에 팔작지붕에 홑처마로 소박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가장 큰 건물인 사랑채를 따라 오른편으로 돌아서면 숨은 듯 작은 공간이 펼쳐진다. 꽃들과 여러 종류 나무로 가꾼 작은 정원에 놓인 낮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사랑채의 툇마루가 있다.
이 툇마루에 앉아 눈을 감으면 숲속인 듯 새소리와 고요함이 밀려오고 책을 읽다가 기대어 깜빡 졸음에 빠지면 더없이 평안해지는 곳이다. 비 오는 날 들른다면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에 복잡한 뇌 속, 가슴 속이 씻겨나갈 수도 있겠다.
다시 대문 앞쪽으로 돌아와 계단 위 핵심 공간으로 들어서면 왼쪽 행랑채 상설전시관에서 무계원 이름의 기원이 되는 조선 초기 산수화 ‘몽유도원도’의 영인본과 디지털 아트를 만날 수 있다. 몽유도원도는 대표적인 해외 반출 문화재로 진품은 현재 일본 덴리대학 부속 덴리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현재 무계원은 조선 초 안평대군 당시의 한옥 형태가 아니다. 어린 임금 단종을 둘러싸고 권력의 대척점에 있던 형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역모죄로 사사된 안평대군의 집터는 그 누구도 살지 않고 폐허로 남았다.
조선 시대 역모죄 죄인의 집터는 반역의 기운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하여 그 누구도 살지 못하도록 파훼하여 저수지를 만들거나 수풀로 만들었다. 일례로 양반, 상놈, 노비, 스님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시대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여립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선조는 정여립을 반역으로 몰아 기축옥사를 일으켰고 조정에서는 혈맥을 끊어 버린다고 정여립의 집터를 파헤치고 숯불로 지졌으며, 이후 제비산에 어떤 건물도 지을 수 없도록 했다.
그런데 무계정사를 지은 안평대군은 시와 글씨, 그림에 능한 예술가로 조선은 물론 명나라 황제와 사신들에게서 명필로 칭송받았다. 게다가 아버지 세종의 명으로 북방개척을 통해 확보한 4진 중 회령을 맡아 함경도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야인들을 토벌한 문무에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그런 이유로 안평대군이 머문 무계정사 터에는 왕기가 서렸다는 이유까지 덧붙여져 오랫동안 다 허물어져 가는 흉가로 남았다. 남은 흔적은 무계정사 안 바위에 ‘무계동’이라고 새긴 것인데 현재는 안평대군의 집터가 사유지되어 그 안에 있는 바위를 쉽게 볼 수 없다.
지금 무계원 건물은 1910년대 종로구 익선동에 지어진 유서 깊은 한옥으로, 조선말 서화가이자 미술애호가였던 송은 이병직의 집 ‘오진암’을 이축한 것이다. 오진암은 1970년대 삼청각, 대원각과 더불어 제3공화국 정치사의 중요 장소로 한 시대를 풍미한 한정식 요정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7.4 남북공동성명을 도출한 논의가 이루어진 역사적 장소이기도 했다.
2010년 오진암 자리에 관광호텔이 신축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김영종 종로구청장의 노력과 각 분야 장인들의 참여로 현재 무계원 자리로 옮겨 복원했다. 무계원을 찾은 이들 중 옛 오진암을 기억하는 이들도 있어 “예전 오진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가 영화 ‘장군의 아들’을 촬영한 곳이다”라며 추억했다고 문화해설사는 설명한다.
안평대군의 꿈 속 무릉도원 무계정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지만, 그가 당시 왕실 최고의 화원 안견을 통해 구현하고자 한 세계는 ‘몽유도원도’에서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2편 계속)
▶ 대중교통으로 무계원(종로구 창의문로 5가길 2)을 가려면 지하철 1호선 종각역 3-1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부암동주민센터 또는 무계원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부암동 주민센터 오른편 골목으로 3분 정도 걸어 오르면 무계원에 도착한다.]
[“꿈에 본 이상향이런가?” 몽유도원도 속 안평대군의 무릉도원
K스피릿 기사 입력 2024.05.22. 15:26
기자명 강나리 기자
[여행자의 눈으로 본 서울] 무계원에서 엿보는 안평대군의 꿈 & 살생부가 된 ‘몽유도원도
[편집자 주] 익숙해서 눈에 들어오지 않던 풍광도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뜻밖의 특별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 건국 초부터 600년이 넘는 동안 수도 역할을 해온 서울의 숨은 명소와 보물,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풍류 남아 안평대군 이용은 꿈에서 어떤 무릉도원을 만났을까? 종로구 부암동 무계원 사랑채에서 디지털 아트로 생동감 넘치게 구현된 ‘몽유도원도’를 따라 잠시 그의 세계로 떠나보자.
안평대군은 1447년 4월 20일 자신이 꿈에 거닐던 무릉도원을 당대 왕실 최고의 화원 안견을 통해 3일 만에 세상에 내놓았다. 그 3년 후인 1450년 9월 그는 유람하다가 창의문(자하문) 밖 계곡에서 물에 떠내려오는 국화를 보고 다래 덩굴과 석벽을 잡고 올라 ‘몽유도원도’ 속 풍광과 닮은 터를 찾아냈다.
“풀과 나무가 우거진 모습과 냇물과 산세의 깊숙하고 한적한 모습이 조금은 흡사했다.” 대군은 그곳에 두어 칸 집을 짓고 ‘무계정사武溪精舍’라 편액을 걸고 다섯 편의 시를 지었는데 그 서문에 이처럼 기록했다. 그는 이곳을 ‘정신을 휴양하면서 은거하기 위한 곳’이라 했다.
인적 없는 산속에서 결국 찾아낸 꿈속 무릉도원은 안평대군에게 무척 중요한 의미였던 듯하다. 안평대군이 쓴 ‘몽유도원기’와 ‘몽유도원도’ 속에 답이 있다.
‘몽유도원도’는 독특하게 왼쪽 아래 현실 세계에서 출발해 오른쪽 위 무릉도원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끝에 안견의 낙관이 찍혔다. 수많은 그림을 그린 안견의 작품 중 유일하게 본인의 작품임을 나타낸 것이다. 수묵화 대부분 오른쪽에서 시작해 왼쪽에 낙관을 찍는 것과 다르다.
왼쪽 현실 세계는 정면에서 바라본 풍광이지만, 이상향으로 향하는 길부터 도원까지는 위에서 내려다 본 부감법으로 그려 구도를 달리했다. 디지털 아트로 감상하면 구불구불 백 번이나 꺾인 길, 깎아지른 절벽과 기암괴석, 폭포수가 펼쳐지는 시냇물, 그리고 신비롭고도 쓸쓸한 도원을 마치 하늘 위를 나는 드론에서 촬영한 듯 역동적이다.
‘몽유도원기’를 요약하면 안평대군은 오솔길에서 산관야복 차림의 나그네가 알려준 길을 따라 인수(仁叟, 박팽년)와 말을 달려 험준한 산을 넘어 골짜기에 들어섰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며 복숭아나무 숲에 햇빛이 비쳐 연기 같은 노을이 일렁이는 곳이었다.
그리고 대나무 숲에서 사립문이 반쯤 열려 있고, 흙으로 만든 섬돌은 거의 부서져 있는 띠풀집을 만났다. 마을 앞 시내는 조각배 한 척이 물결 따라 흔들릴 뿐이어서 그 쓸쓸한 정경이 마치 신선이 사는 곳인 듯싶었다고 한다.
마침 옆에 몇 사람이 뒤따르고 있었는데 정부(貞父 최항), 범옹(泛翁, 신숙주) 등이 운을 맞춰 시를 짓기도 했다.
안평대군이 바라본 무릉도원은 소담하고 쓸쓸한 곳이었다. 그 다음 글에서 안평대군이 전하고 싶었던 마음을 짐작케 하는 이야기가 드러난다.
‘오색 찬란한 의복을 몸에 걸친 자는 발걸음이 산속 숲에 이르지 못하고, 바위 위로 흐르는 물을 보며 마음을 닦는 자는 또 꿈에 솟을대문과 고대광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길을 달리하는 까닭이니 필연의 이치이기도 하다.
옛사람이 “낮에 행한 바를 밤에 꿈을 꾼다”고 했다. 나는 궁궐에 몸을 기탁하여 밤낮으로 일에 몰두하고 있는 터에 어찌하여 산림에 이르는 꿈을 꾸었단 말인가? 그리고 또 어떻게 도원에까지 이를 수 있었단 말인가? 내가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많거늘, 도원에 노닐 적에 나를 따른 사람이 하필 이 몇 사람이었는가?
생각건대 본디 그윽하고 궁벽한 곳을 좋아하며 마음에 전부터 산수 자연을 즐기는 생각을 하고, 아울러 이들 몇 사람과 교분이 특별히 두터웠던 까닭에 함께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안평대군을 비롯해 당대 21명 문인들의 친필 찬시가 담긴 몽유도원도, 결국 살생부가 되었다
몽유도원도에는 대군의 몽유도원기를 듣고 그림을 감상한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등 당대 21명 문인들의 찬시, 그 앞뒤로 안평대군의 서화 감상록인 발제(題跋)가 실려 긴 두루마리 형태로 남았다.
몽유도원도에 글을 남긴 이들은 대군의 꿈을 치세의 좋은 징조로 해석해 나라의 앞날을 축복하고 대군을 칭송했다. 또 다른 이들은 신선의 세계로 해석해 안평대군이 장수의 복을 누릴 것이라 축원하고 영원한 태평성대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그래서 ‘몽유도원도’에서 안견의 그림도 매우 뛰어나지만, 걸출한 문인들이 친필로 쓴 시와 글이 어우러져 회화와 서예, 문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작품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형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안평대군이 36세 나이로 사사된 후 ‘몽유도원도’는 살생부로 불렸다. 수양대군의 편에 선 신숙주를 제외하고 이 그림에 찬시를 적은 이들 대부분 계유정난과 단종복위운동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학문과 예술에 뛰어나고 서예가로 명망이 높았던 안평대군이 꿈에 무릉도원을 보았을 때는 아버지 세종이 왕위에 있을 때이고, 무계정사를 완성했을 때는 형 문종의 재위 시절이었다.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문종이 어린 임금을 지켜달라고 고명대신으로 임명된 김종서에 의해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다.
몽유도원기에 나타난 그의 뜻을 보면, 안평대군 본인은 늘 권력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서 있지만 정작 고요함 속에 안빈낙도를 꿈꾸는 풍류남아로 남고 싶었다고 토로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12:44~13:40 무계원(武溪園)에서 [몽유도원도] 영인본을 관람
[대한민국 1호 나전칠기 명장 손대현···세계가 주목하는 그날까지
나전칠기 외길 손대현 명장 무지개처럼 빛나는 자개에 매료
스승 민종태 선생의 호 '수곡' 그대로 물려받아 '자긍심' 높아
엘리자베스 여왕 보석함·이병철회장 선물 납품 등 고급화에 주력
기자명 이가은 기자
우리in터뷰 입력 2024.04.06. 08:00
(서울=우리뉴스) 이가은 기자 = 그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것들이 있다. 누구라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곤지암에 자리 잡고 있는 수곡공방 2층 전시장에는 그런 멋진 공예품들이 가득하다.
자개가 내뿜는 영롱한 빛깔과 살아 숨쉬는 듯 생동감 넘치는 문양, 머리카락 한 가닥의 흠조차 찾을 수 없는 반질반질한 검은 옻칠.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이라도 매료될 설명이 필요 없는 아름다움. 나전칠기이다.
그렇지만, 나전칠기는 보고 즐기기만 하는 예술품이 아니다. 직접 만지고 사용하면서 세월의 흔적이 묻어 또다른 멋을 만드는 귀한 생활의 동반자이다.
수곡공방 주인장 손대현 명장은 나전칠기와 평생을 함께 한 장인이다. 대한민국 1호 나전칠기 명장으로, 60년 가까이 나전칠기를 만들고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는데 몰두해왔다. 작품 한 점 한 점 모두 예술성과 실용성을 갖춘 전통 문화재일뿐 아니라 생활용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나전은 소라와 전복의 겉껍질을 갈아 내고 그 속에 조개 빛을 문양화한 공예품이고 칠기는 어떤 형태의 기물에 옻칠을 반복해 마감하는 것을 말하는데 나전칠기는 나전과 칠기의 장점을 딴 우리의 전통 공예품이다.
손대현 명장은 1949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1·4 후퇴 때 홀어머니와 월남해 전국 각지를 떠돌며 살았다. 피난민의 삶은 척박했다. 어려서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고 열여섯 되던 해 나전칠기와 인연을 맺게 됐다. 다니던 사무실 건물 2층에 나전칠기 작업장이 있었던 것이다.
"시간 날 때마다 작업하는 걸 구경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어느 날인가 한번은 완성품을 포장하는 걸 봤는데, 자개가 박힌 보석함과 쟁반을 상자에 넣고 있더라구요. 자개가 무지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고는 그 매력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죠. 그때 이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결국, 그 작업장에 들어가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 여를 보내면서 평생의 스승 수곡 민종태 선생을 알게 됐다. 제자가 되기로 하고 무작정 그 분을 찾아가 막무가내로 매달렸다. 처음부터 잘 될 리가 없었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히 찾아다닌 끝에 간신히 허락을 받아냈다.
선생은 일본 고객과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주문을 도맡아 할 정도로 걸출한 장인이었다. 공방 직원도 서른 명이나 됐다. 일을 제대로 배우려면 그저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온 힘을 다한 노력 끝에 스물여섯이 되어서 마침내 스승님께 인정을 받게 됐다.
"하고 싶은 일을 해서였는지 정말 즐겁게 열심히 배웠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칠 솜씨 좋다고 소문이 났는지 다른 유명 공방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었어요. 하지만, 스승님의 사랑이 워낙 각별했습니다."
손 명장은 1978년 가정을 꾸렸고 독립을 결심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해보고 싶었다. 스승님도 흔쾌이 허락했고 심지어 당신에게 들어온 주문의 7할을 맡기기까지 하셨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손 명장은 계속 주문받은 작품만 만들어왔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집이 경매에 넘어가도, 월세로 살아가야 해도 작품에만 열중했다. 그 때 많은 작품을 만들었고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스승의 작품을 좋아했던 이병철 삼성 그룹 회장도 그의 고객이었다. 회장실 집기나 외국으로 나가는 선물들을 주로 맡았다. BMW 7 시리즈의 내장 데코레이션과 대형 PDP나 태블릿 PC 등의 외장을 꾸미는 일도 했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의 유럽 6개국 순방 당시 나비 문양 서류함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할 때 기쁠 희(喜) 자와 학 네 마리를 나전으로 박은 보석함을,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국을 찾았을 때 십장생 문양을 끊음질로 잔잔하게 꽉 채운 보석함을 만들었다.
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한 일본인 고객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1994년 70대의 일본인 노신사에게 가보인 보검의 칼집과 칼자루를 나전칠기로 장식해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 일을 하는 8개월 동안 네 번이나 직접 찾아오시는 등 정성을 쏟았습니다. 완성된 날 무릎을 꿇고 완성품을 받으시더군요. 아주 근엄했던 양반이었는데, 작품을 보는 순간 소년처럼 기뻐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보상을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손 명장은 스승과 같은 수곡(守谷)이라는 호를 쓴다. 원래는 다른 호를 썼지만 스승의 호를 물려받았다. 스승님도 당신의 스승이셨던 전성규 사조(師祖)로부터 물려받아 평생 사용했다. 돌아가시기 여섯 달 전에 이런 내력을 일러주시고는 그에게 물려주셨다. 나전칠기의 종손임을 공인받은 셈이다. 곤지암에 차린 공방 이름도 당연히 수곡이라 지었다.
손 명장은 후학 양성에 진심이다. 여러 곳에서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고 문화재보호재단에서 운영하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옻칠반 교육을 맡았는데 제자들과 남다른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제자들이 '옻빛모임'을 만들어 늘 교류하며 전시회도 열고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있다. 그들이 함께하는 '옻빛전 손대현과 제자들 展'은 지난여름 15회째를 맞았다. 지난 2월에는 서울 강남구 삼성2동에 '2024 희망온돌 따뜻한 겨울나기' 성금을 전달하는 등 자선사업도 하고 있다.
많은 것들을 이룬 손 명장이지만 아직도 잠자리에 들 때면 '빨리 내일이 와야 또 일할 수 있는데'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을 정도로 일에만 매달린다. 나전칠기는 옻칠을 해나가면서 자개를 붙이고 다시 옻칠해 갈아내는 과정이다. 긴 시간 끈기 있게 작업에만 집중해야 한다. '겉칠을 번드르르하게 해놓으면 속이 보이지 않지만, 속이야말로 절대로 속이면 안 되는 것'이라는 스승의 가르짐을 지금도 금과옥조처럼 지키고 있다.
손 명장의 바람은 우리의 전통 나전칠기가 좀 더 발전하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디자인이나 문양은 바뀔 수 있어도 제작과정이나 기법은 바뀌면 안 됩니다. 빨리 하려 하고 쉽게 하려고 하면 근본을 잃게 돼요.
그리고 디자이너와 협업해 새로운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면 한국 최고의 전통 공예인 나전칠기를 세계가 주목하는 날이 올 거라고 믿습니다. 뒤를 이을 아들도 있고 좋은 제자들도 많으니 이제 우리 전통 기술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손대현 장인은
2004.02 서울특별시무형문화재 제1-3호 칠장 나전칠기 보유자
1980.02~ 수곡공방 옻칠장인
2018 전시회수곡 손대현 옻칠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2018 전시회그 천년의 빛으로 평화를 담다
2017 전시회무형문화재 6인 특별기획전 (남한산성아트홀 갤러리, 서울)
2015 전시회한일 국제 칠예전 (극재미술관, 대구광역시)
2014 전시회서울의 솜씨, 서울의 장인전 (서울역사박물관 제1실, 서울)
2013 전시회한국공예의 법고창신 (밀라노 트리엔날레 디자인 전시관, 이탈리아)
2010 전시회천명전 (현대백화점 울산점, 울산광역시)
2001 전시회장인의 명품 특별초대전 (무형문화재전수회관, 서울)]
13:40~13:48 서울 종로구 창의문로 119 번지에 있는 윤동주문학관으로 이동 [8분, 482m]
13:48~14:10 윤동주문학관(尹東柱文學館)을 관람
[윤동주문학관(尹東柱文學館)
윤동주문학관(尹東柱文學館)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문학관이다. 종로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으며 폐기된 상수도 가압장을 리모델링하여 만들었다. 2012년 7월 25일 개관하였다.
배경
윤동주는 연희전문에 재학하던 시절 기숙사에 들어갔다가 1941년 5월 벗이자 후배인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의 소설가 김송 집에서 하숙하였다. 후일 국문학자가 된 정병욱은 윤동주로부터 증정받은 자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고를 보존하여 해방 후 출간하였으며 누상동 하숙 시절을 추억하며 동주 시의 여러 명편들이 이곳에서 씌어졌음을 증언하였다. 종로구는 윤동주가 잠시 거처하였던 인연을 살려 문학관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윤동주 문학관이 들어선 곳은 원래 청운아파트를 위한 상수도 가압장이었다. 청운아파트는 서울 도시 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로, 1969년 서울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주택난 해소를 위해 11동 557가구 규모로 지어졌다. 1995년부터 아파트의 구조가 안전하지 않다는 진단이 있었고, 재건축을 시도하였다가 포기하여 철거하기로 하였다. 아파트를 철거한 자리에는 청운공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청운아파트는 2005년 9월 완전 철거되었고 공원 조성 사업이 진행되었다. 청운공원 조성은 서울의 낙산공원을 비롯해 총 8개 지구 63개동의 아파트 철거 및 녹지 환원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사업으로, 이로서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철거만 된 도봉시민아파트를 제외하곤 모두 공원화가 완료되었다.
청운공원의 조성 후에도 가압장은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리모델링을 통해 윤동주문학관이 지어지게 되었다.
건축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로 홀로 찾아가선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 윤동주, 자화상(自畵像)
윤동주문학관은 가압장의 원형을 되도록 그대로 살리면서 윤동주의 주요 시어인 "우물"을 주제로 리모델링하였다. 문학관은 윤동주 시인의 친필원고와 사진이 전시된 시인채, 가압장 물탱크를 활용한 열린우물과 닫힌우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열린우물은 아무런 설비 없이 우물 안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느낌을 주고 닫힌우물은 윤동주 시인의 생애를 다루는 동영상을 상영한다.
리모델링 설계는 아뜰리에 리옹 서울의 이소진이 진행하였고, 기존의 풍경을 존중하여 주어진 여건의 잠재성을 살리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았다. 대지 면적은 1,104.1 m2, 건물 면적은 173.85 m2로 문학관으로서는 매우 작은 크기이다. 특히 35년간 가압장으로 사용되면서 물이 채워졌다 비워지기를 반복하면서 남은 물자국을 살려 시인의 삶에 비유하였다. 펌프가 있던 기계실은 제1전시관 시인채로, 두개의 콘크리트조 물탱크는 하나는 천정을 열어 제2전시실 열린우물로, 다른 하나는 그대로 두어 제3전시실 닫힌우물로 개조하였다.
수상
윤동주문학관은 공공건축 재사용의 훌륭한 모범사례로 꼽히며 여러 건축관련 상을 수상하였다.
2012년 대한민국 공공건축상 국무총리상
한국의 현대 건축 베스트 20
2014년 서울시 건축상 대상
2015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지정
시설 및 전시물
윤동주문학관의 시설 및 전시물은 다음과 같다.
시인채: 친필 원고, 생애 사진, 서명 등 영인본 총 133점
열린우물: 천정을 해체한 가압장 물탱크를 원형 그대로 보전
닫힌우물: 윤동주의 시와 생애를 소개하는 영상 상영
시인의 언덕: 계단을 통해 청운공원과 서울 성곽까지 연결되는 자리에 서울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시비를 세웠다.]
14:10~14:13 서울 종로구 청운동 7-3 번지에 있는 윤동주시인의언덕으로 이동 [3분, 171m]
14:13~14:35 윤동주시인의언덕에 있는 [서시]의 시비를 비롯해 가수 이승환과 그의 팬들이 기증한 소나무 10그루, 시인의 주옥같은 시를 새겨 넣어 눈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한 돌계단 등을 사진촬영
[윤동주시인의언덕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청운동 7-3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일제 강점기 저항 시인 윤동주(1917~1945) 시인을 기리는 이 언덕은 서울 종로구 청운동 인왕산 자락 청원공원 내에 자리해 있다. 시인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1941년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후배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했었는데 그는 이때 청운동과 누상동 일대를 산책하며 시상을 가다듬으면서 <서시>, <별 헤는 밤>, <또 다른 고향> 같은 대표작을 썼다고 한다. 청운동에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들어선 이유이다. 저녁 무렵 하숙집 근처 이 언덕에서 해지는 서울 풍경을 바라보며 조국의 어두운 현실에 가슴 아파하면서 시상을 떠올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시의 시비를 비롯해 가수 이승환과 그의 팬들이 기증한 소나무 10그루, 시인의 주옥같은 시를 새겨 넣어 눈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한 돌계단 등으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서시의 시비 앞에는 ‘서울 밤 경’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데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야경 보기 좋은 곳임을 안내하고 있다. ‘윤동주 소나무’로 불리는 소나무가 위치한 곳도 해넘이 구간으로 일몰을 감상하며 사색하기 좋은 곳으로 이름나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도 찾는 곳이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2012년 7월 용도 폐기된 청운 수도가압장을 리모델링해서 조성한 윤동주문학관과도 이어져 있으며, 맞은편에 창의문이 있다.]
[윤동주의 [서시(序詩)]
목차
1. 개요
2. 전문
2.1. 1941년 원문
3. 해석
4. 기타
1. 개요
윤동주가 1941년 11월 20일에 지은 시로, 그의 유고(遺稿)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된 작품이다. 시인 본인의 삶과 가치관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함과 동시에 개인적 회고를 넘어선 인간 본연의 고뇌를 단순한 언어로 아름다운 자연에 비추어낸 윤동주의 대표작으로 여겨지며 국문학을 대표하는 명시(名詩) 중 하나이다. 본래 제목이 없는 작품이라 적당히 '무제(無題)'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부분을 장식한 만큼 서문(序文)격인 시였으므로 사람들이 서시(序詩)라고 칭했는데 그것이 오늘날에 이르러 제목으로 정착하였다.
2. 전문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2.1. 1941년 원문
※ 창작 당시에는 현행 한글 맞춤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상기한 현대어 표기와는 차이가 있으며 세로쓰기로 작성된 작품이므로 세로쓰기용 문장 부호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원문에는 제목이 없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3. 해석
기본적으로 시라는 게 개인마다 주관적 해석을 얼마든지 허용하는 분야이니 후술된 내용들도 주관적인 해석 중 하나라는 것을 고려하며 보자.
일단 '별, 바람' 등의 자연물을 통해 지은이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별은 천상세계에 속하고 바람은 지상세계에 있는데 시 마지막에 가서 별이 바람에 스치는 것은 두 세계가 만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바람'은 시인의 불안과 고통을 상징하기도 한다. 실제로 시인의 생애를 살펴보면 시국에 대한 불안, 가정에 대한 걱정, 하숙집을 옮겨야 하는 상황 등으로 괴로워했다.
'한 점 부끄럼 없기를 ~ 괴로워했다'라는 구절을 통해 시인의 결벽성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도 윤동주는 결벽성이 있었다고 한다. 읽는 책에 좀처럼 줄을 치지 않았고 마음속에서 시를 다듬는 과정에서 시어 한 구절 때문에 몇 달씩 고민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나에게 주어진 길'은 내가 걸어갈 길로, 인생, 운명, 미래의 소명 등을 떠올려 볼 수 있으며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을 통해 시인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성품임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윤동주는 생전 남을 헐뜯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윤동주가 크리스천이었다는 점과 연계해서 추정해 보면 우선 '나에게 주어진 길'이라는 어구는 소명을 받은 자임을 드러내는 기독교적 메타포를 사용한 것 아니냔 해석도 있다.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어구는 기독교의 가장 큰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7]를 인용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범인류애적인 부분은 상당수 종교 혹은 철학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긴 하지만. 실제로 후술되어 있듯 윤동주는 서시에 맹자 구절도 인용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소속 신학과 김학철 목사는 서시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4. 기타
-마지막 행의 '스치운다'는 시적 허용으로 당시 한글 맞춤법상으로는 '스친다'로 쓰는 것이 맞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은 한자 문화권의 오랜 관용구로 「맹자」를 인용한 것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孟子曰 君子有三樂而王天下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 三樂也
맹자께서 이르시길, "군자에겐 세 가지 기쁨이 있는데, 천하를 다스리는 것과는 상관없다. 부모님이 모두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기쁨이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사람을 굽어봐도 거리낌이 없는 것이 두 번째 기쁨이다. 천하의 영재들을 얻어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기쁨이다."
-떳떳한 삶을 살겠다는 윤동주의 다짐이 그 어떤 작품보다 잘 드러나는 명시다. 죽음이라는 시어가 직접 언급된 때문인지 통상적으로 불리는 제목은 서시지만 윤동주를 다룬 다큐멘터리나 창작물에서는 극적인 효과를 위하여 결말부에 삽입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영화 〈동주〉.
-한국의 싱어송라이터 조영남이 1994년 「서시」에 곡조를 붙여 본인 노래로 앨범에 수록한 바 있다. 곡 자체는 시에 잘 어울리는 나름 서정적인 분위기지만 하필 이 노래를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이후 KBS에서 주최한 성금 모금회에서 불렀다가 욕을 먹기도 했다. 일본 돕자는 행사에서 굳이 독립운동하다 옥사한 윤동주의 시를 읊어야 겠냐는 것. 덕분에 2011년 1월 놀러와에서 방영한 쎄시봉 특집 방송이 재조명되기도 했는데 여기서도 조영남이 이 곡을 불렀고, 노래를 들은 윤동주의 육촌 동생 윤형주는 "시도 노래다. 절대 네 잘난 작곡으로 시의 본래 의미를 해치지 말라."며 반대하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자신은 차마 곡을 쓰지 못했다던 에피소드를 공개했다.
-2016년에 무한도전에서 방영한 '무한도전 위대한 유산' 특집에서 개코X황광희 그룹이 노래를 만들 때 서시를 인용했다.
-한국의 인디 싱어송라이터 혜화동소년이 2017년에 「서시(윤동주)」라는 제목으로 시를 가사로 사용한 곡을 발표했다.
-연세대학교에는 서시를 가사로 한 응원곡이 있다. 멜로디는 흔히 비창으로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8번(베토벤) 3악장을 편곡한 「Beethoven Virus」를 사용한다. 윤동주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문학과 졸업생이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수학한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도시샤대학 이마데가와 캠퍼스엔 윤동주를 기념하는 「서시」가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한글로 쓰여진 시임에도 오늘날 일본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2016 교육개정)에도 실릴 정도로 일본에서도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으로 여겨진다. 일본 문단에 전래된 것은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여류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のり子)가 윤동주의 작품을 일본 문단에 소개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이를 반영하는 모습으로 Production I.G가 제작한 일본 애니메이션 〈하이큐!!〉에선 학교 배경의 소품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2기 4화 니시노야가 들고 있는 답안지에 일본어로 적혀 있는 시가 바로 일본어로 옮겨진 「서시」.
-2016년, 기아자동차의 K7 광고에 인용됐다.
-수능엔 1995년, 2001년 두 번 출제되었다. 글쓴이는 현실에서 오는 번뇌와 시련 속에서, 자기 성찰의 자세를 보이며 신념을 다지고 있다. 2005년 대학수학능력고사 필적확인란 문구로도 쓰였다.[10] 선정된 행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인데 부정행위 사건에 대해서 반성하는 의미로 선정됐다.
-Project Moon의 인디 게임 〈Library of Ruina〉의 배드 엔딩 중 하나에서 인용되었다.]
14:35~14:40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36길 40 번지에 있는 청운문학도서관으로 이동 [5분, 261m]
14:40~14:50 청운문학도서관을 사진촬영
[청운문학도서관 - 종로구 최초 한옥공공도서관
청운문학도서관은 한옥의 고즈넉한 맛이 풍기는 문화특화 도서관이다. 독서와 사색,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고 주민을 위한 다양한 독서·문화예술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시, 소설, 수필 위주의 다양한 문학도서를 소장하고 있다. 또한 청운까치서당, 아빠와 함께하는 1박 2일 독서캠프 등 아이들을 위한 문화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교육을 위한 최적의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건물은 인왕산의 경사 지형과 자연경관을 고려하여 설계되었다. 숭례문 복원에 사용된 지붕기와와 같은 방식으로 제작된 수제 기와를 사용하고, 돈의문 뉴타운 지역에서 철거된 한옥기와 3천여 장을 재사용한 의미 있는 건축물이다. 인근 윤동주문학관, 시인의 언덕 등과 함께 문학 인프라의 중심으로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상세정보
문의 및 안내 070-4680-4032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36길 40 (청운동)
이용시간 - 평일 10:00~21:00
- 주말 및 공휴일 10:00~19:00
휴일 매주 월요일 / 1월 1일 / 설·추석 연휴
주차 불가능
이용요금 : 무료
접근로 : 출입구까지 턱이 없어 휠체어 접근 가능함
출입통로 : 주출입구는 턱이 없어 휠체어 접근 가능함(자동문)
장애인 주차 안내 : 장애인 주차장 있음(1대)
무장애 편의시설 : 엘리베이터 있음
점자 블록 : 점자블록 있음(주출입구)]
14:50~14:58 자하문고개.윤동주문학관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관람 완료 [8분, 366m]
14:58~15:10 자하문고개.윤동주문학관 정류장에서 불광역.불광1동주민센터 정류장으로 가는 7022번 버스 승차 대기
15:10~15:28 7022번 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윤동주문학관 정류장에서 불광역.불광1동주민센터 정류장으로 이동 [18분, 11개 정류장 이동]
15:28~15:35 불광역에서 연신내역으로 가는 3호선 전철 승차 대기
15:35~15:41 3호선을 타고 불광역에서 연신내역으로 가서 6호선으로 환승하여 구산역으로 이동 [6분 소요, 3 정류장 이동]
무계원 위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