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펜 서울문학탐방-청와대 사랑채 외
일시:2017년 7월 6일 목요일
장소:경복궁 고궁박물관, 영추문, 보안여관(시인부락 창간장소), 이상의 집, 노천명 집터, 윤동주 하숙집터, 수성동계곡, 우당기념관, 송강생가터, 김상헌 집터, 청와대사랑채
* 경복궁 국립고궁 박물관
오늘은 2017년 국제펜 서울문학 탐방 마지막 날이다. 하반기 9월에 경주에세 세계한글작가대회가 있어서, 문학탐방 하반기 일정을 당겨서 마치게 되는 것이다. 전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로 나가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회원들을 만났다. 고궁박물관은 종로구 경복궁 내에 위치하고 있다. 날씨가 장마로 인하여 흐리고 무더운 날이다. 오후 늦게 또는 밤에 비 예보가 있어서 다행이다. 고궁박물관 2층에서 만나서 김경식 사무총장의 설명를 들으며 관람했다.
이 박물관은 조선왕실 및 대한제국 황실 문화유산의 종합적인 조사, 연구, 수집, 보관 및 전시를 통해 왕실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역사관 정립에 기여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국권피탈부터 8·15 광복, 한국전쟁 등 굴곡 많은 근현대사 속에서 조선왕실과 대한제국 황실의 유품은 그 동안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관리를 받지 못했다. 조선왕실의 유품은 일제에 의해 ‘이왕직의 재산’으로 격하되었고, 8·15 광복을 맞으면서 미군정은 구황실사무청을 발족시켜 이왕직의 재산을 인수받아 문화재관리 업무를 관장케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구황실재산사무총국으로 개편되었으나 왕실 및 황실유물들은 총체적으로 관리되지 못하고 관계 기관으로 뿔뿔이 이양되었다. 즉 황실 박물관의 미술공예품은 덕수궁 소장품이라는 이름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규장각과 장서각의 방대한 고문서들은 서울대학교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나머지 생활용품들은 고궁의 행랑채에서 보관되었다. 이에 문화재청은 1992년 4대궁·종묘·능·원 등에 흩어져 있던 궁중의 문화재를 모아 덕수궁에 궁중유물전시관을 개관하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왕실유물의 관리·전시·연구·보존이 시작되었는데 덕수궁 석조전은 전시 공간과 수장 공간이 협소하여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1993년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용산으로 옮겨 가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옛 건물에 조선왕실역사박물관을 건립하기로 결정하고, 광복 60주년인 2005년 8월 15일 역사적인 개관을 맞이한 후 다시 2007년 11월 28일 3개층 전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2층에는 사진과 문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고 지하에는 고종이 탔던 자가용이 전시되어 있다. 모두 관람을 마치고 다시 2층에 모여 손해일 이사장님의 말씀을 듣고 고궁박물관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다음 일정을 따라 이동했다.
* 경복궁 영추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경복궁 영추문으로 나왔다. 경복궁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문이 있다. 동은 건춘문, 서는 영추문, 남은 광화문, 북은 신무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나온 이 문은 경복궁의 서문이다. 오늘 우리는 주로 서촌을 탐방하기 때문이다. 연추문(延秋門)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문무백관들이 주로 출입했던 문이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고종 때 경복궁이 재건되면서 다시 건립하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인 1926년 석축이 무너지면서 철거되었다. 당시 영추문 앞에 전차의 종점이 있었는데 전차가 오가면서 발생한 진동 때문에 무너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영추문은 석축을 쌓아 홍예문을 만들고 그위에 설치한 단층의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이다. 문루에 출입할 수 있도록 옆면에 벽돌을 쌓아 만든 홍예문을내었고, 경복궁 동쪽 문인 건춘문(建春門)과 규모와 형태가 같다. 1975년 원래의 위치보다 남쪽에 다시 건립하였다. 영추문 바로 앞은 청와대 진입로다. 진입로의 길을 건너서 보안여관으로 갔다.
* 보안 여관(시인부락 창간 장소)
경복궁 영추문을 나오니 청와대 진입로 효자로 도로변에 보안여관이라는 간판의 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문인들의 자취가 서린 곳이다. 여기은 서촌 마을이다. 서촌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을 일컫는 별칭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 사이,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대를 뜻한다. 관광 명소로 유명세를 탄 북촌과 달리 서촌 골목은 이정표가 없다. 서촌 골목은 중후한 한옥이 모여 있는 북촌 같진 않지만 실핏줄처럼 이어진 골목에서 정겨운 개량 한옥을 만나기도 한다. 통의동 보안여관은 아담하고 옛날의 모습에서 발전되지 않은 향수가 배여 있다. 간판은 부착되어 있지만 숙박은 할 수 없는 여관이다. 대신 예술가들의 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1930년대에 문을 열어 80여년 동안 여관으로 운영되었다. 서정주 시인도 이곳에 묵으며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었다. 보안여관은 돈 없는 예술가들이 무작정 상경해 자리를 잡기 전 장기 투숙하던 공간이었다. 재개발 붐을 타고 사라질 뻔했으나 언젠가 예술가들을 품었던 공 덕분인지 예술가들이 힘을 합해 그를 구했다. 이름만 여관인 보안여관은 2010년부터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보안여관은 현대문학의 산실이다. 시인부락을 만든 문인들은 모두 떠났지만 그 족적은 덩그러니 남아 그날을 부르고 있다.
* 통의동 백송 터
보안여관에서 골목길을 따라 온 곳에서 백송터를 만났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에 있었던 백송 터다. 통의동의 백송은 지면에서부터 2갈래로 갈라졌는데, 남쪽 줄기는 가슴높이 둘레가 1m 정도이고, 높이 2.5m에서 다시 4갈래로 갈라졌다. 동쪽 줄기는 비스듬히 누워 옆집 울타리를 넘어서 10m 정도 자랐다. 한국의 백송 중에서도 굵은 편이었다. 이미 일제강점기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바 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뿌리목 줄기둘레 약 5m, 높이 15m로서 땅 위에서 바로 6갈래로 갈라졌다고 되어 있다. 1990년 7월 폭풍으로 쓰러졌고 고사(枯死)하였다.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제4호로 지정되었으나 1993년 3월 23일 지정이 해제되었다. 죽은 백송의 밑둥치만 남아있다. 그 바로 앞에는 백송을 다시 심어 기르고 있다. 비록 자연재해로 죽었지만 그 남은 존재를 보존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 이상의 집
이곳은 전에도 왔던 곳이다. 이상이 운영하던 제비 다방이다. 그때는 문을 열어 주어서 안에 들어가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문이 닫혀 있다. 밖에서 주변을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상(1910~1937)은 시인이자 소설가로서 1930년대 초현실주의 문학의 선구자이다. 단명으로 끝난 천재 작가다. 그의 천재적 문학성은 31~32년 사이에 무려 2000여 점이라는 경이적인 숫자의 시작을 토해냈다. 하지만 무질서한 독서와 밤샘은 결국 그를 폐결핵으로 몰고 갔다. 식민지 예술가들의 모임 터였던 다방을 출입하게 된 것도 이즈음부터였다. 종로2가의 「멕시코」「낙랑」등을 드나들면서 꼽추화가로 유명한 구본웅을 비롯하여 이태준, 박태원, 이무영, 조지훈, 이서구 등의 문인들과 사귀게 되었다. 다방과 카페와 술집을 순회하며 문학과 미술을 논하고 인생과 세상을 향해 냉소와 독설을 내뿜었다. 그의 시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풍기면서 인간의 모순됨을 유희와 역설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난해시 '오감도'는 독자들의 항의 때문에 연재가 모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이상은 대표적인 작품은 「오감도」와 「날개다. 1911년부터 1934년까지 이곳 서울 통인동에서 살았다. 나는 고교시절 그의 난해한 시를 읽으며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시대와 주변환경이 그런 작품을 탄생시킨 것 같다는 생각이 이제 와서야 알듯하다. 사업도 망하고, 생활고로 시달리고, 거기에 질병까지 얻어 고통스런 상황에서 일찍 생을 마감하였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노천명의 집터
서촌의 막다른 골목에서 보수하는 듯한 기와집을 한 채 만났다. 이곳이 노천명의 집터란다. 옛모습은 사라지고 누군가 집을 사서 고치는 중인 것 같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이런 집이 아니었다고 하니, 예전의 집은 보존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노천명(盧天命, 1912~1957)은 1912년 황해도에서 출생했다. 부친 사망 이후 1919년 경성으로 이사하여 진명보통학교를 거쳐 1930년 진명여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했고 재학 당시 '밤의 찬미'를 신동아 1932년 6월호에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33년 조선아동예술연구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4년 졸업 이후 조선중앙일보에 입사, 학예부 기자로 근무했다. 같은 해부터 1938년까지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35년 시원(詩苑) 동인으로 활동했다. 1937년 조선중앙일보사를 사직하고 잡지 여성(女性)(조선일보사 발생)의 편집을 담당했다. 1938년 대표작인 「사슴」을 비롯한 「자화상」 등이 실린 시집 『산호림(珊瑚林)』을 출간했고, 잡지 『신세기(新世紀)』 창간에 참여했다. 1930년대는 가부장제를 비롯한 봉건 잔재와 유교 전통에 옥죄어 있던 이 땅의 여성들에게 비로소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고 사회적 진출의 기회와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한 연대다. 그럼에도 아직 여성 문인들은 대중의 호기심 충족의 대상으로서 작품보다는 출신 배경이나 사생활이 더 눈길을 끌곤 했던 게 사실이다. 노천명은 독특한 향기와 함께 당시 시끄럽던 문단에서 다른 시인이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낸다. 그의 시 자화상에서 '대처럼 꺾어질망정 구리모양 휘어지지 않는다'는 꼿꼿한 성격의 소유자 노천명이다. 그러나 천명은 일제 말기에 다른 많은 문인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대륙 침략정책에 동조함으로써, 문학과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다. 1939년 ‘황국위문사절단원’으로 중국의 북부 지방)를 순회하고 돌아온 데 이어 1942년 그는 모윤숙, 최정희 등 다른 여성 작가들과 함께 일제가 우리 문인을 회유하기 위해 만든 조선문인회에 가입한다. 일제강점기에 그가 남긴 행적 가운데 더욱 결정적인 오점은 1943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문화부에 들어가 일본어로 된 ‘가정란’의 편집을 맡고, 해방을 코앞에 둔 1945년 2월 매일신보에서 발행한 제2시집 <창변>에 ‘승전의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노래하자 이날을’, ‘흰 비둘기를 날리며’ 등 다수의 친일 시를 수록한 일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노천명이 친일 시만 쓴 것은 아니다. 노천명도 그로인하여 어려움을 껶은 시인 중 한 사람이다. 홀로 독신으로 살다가 죽어간 여류시인이다. 시대가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일 텐데 참으로 슬픈 역사의 한 도막이다.
* 윤동주 하숙집 터
효자동에서 중식을 마치고 한낮의 더운 열기를 마시며 약간 오르막의 힘든 수성도 길을 따라 올라온 곳에서 정겨운 이름의 '윤동주 하숙집 터'를 만났다. 여러 채의 집들이 연결된 빌 중 하나의 대문 곁에 '윤동주 하숙집터'라는 안내판과 태극기가 부착되어 있다. 전에 가족여행으로 중국 용정에 가서 그의 모교 대성중학교를 보았다. 그곳에서도 애국의 족적을 보았는데 오늘도 이곳에서 그의 애국과 문학을 본다. 이 집은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다. 윤동주는 이 집에서 6개월간 하숙을 했는데 일생에서 이곳 생활이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그것은 골목 끝에 보이는 인왕산을 매일 오르내릴 수 있어서였단다. 윤동주(1917~1945)는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견주어 노래한 민족시인이다. 그는 1917년 중국 길림성 명동촌 마을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인 관립학교를 거쳐 이듬해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 졸업하였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였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귀향 직전에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송몽규와 함께 일경에 검거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을 앞둔 1945년 2월 28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생을 마쳤다. 교우 관계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함께 하숙 생활을 하였으며 윤동주의 자필 시집을 보관, 출간한 정병욱, 초간 시집에 추모시를 쓴 유령, 연희전문학교 후배 장덕순, 고향 후배 문익환 등이 있다. 처녀작은 15세 때 쓴 시 「삶과 죽음」·「초한대」이며, 이 두 편의 수준이 상당한 것으로 미루어 습작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광복 후에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하여 다른 유고와 함께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20세를 전후하여 10여 년간 전개된 시의 여정은 청년기의 고독감과 정신적 방황, 조국을 잃음으로써 삶의 현장을 박탈당한 동일성의 상실이 그 원천을 이룬다. 초기 시에서는 암울한 분위기와 더불어 동시에 깃들인 유년적 평화를 지향하고자 하는 현실 파악 태도를 볼 수 있다. 후기 시로 볼 수 있는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에 쓰여진 시들은 일제 말기의 암흑기를 살아간 역사 감각을 지닌 독특한 자아성찰의 시세계를 보여준다.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등이 이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 작품들이다. 윤동주의 시는 한마디로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의 명령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노래하였다.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함으로써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였다. 동시에 특정한 사회·문화적 상황 속에서 체험한 것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에 관련지음으로써 보편적인 공감대에 도달하였다. 유해는 고향 용정에 묻혔고, 1968년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 그가 오르내리던 수성동 골목길 하숙집 터에서 잠시나마 그의 숨결을 느끼며 행복했다.
* 수성동 계곡
매우 더운 날씨다. 윤동주 시인이 5개월간 이곳 수성동에서 하숙할 때 오르내리며 행복했다는 그 수성동 계곡으로 갔다. 바위가 아름다운 인왕산 자락 아래 웅장한 바위 사이로 계곡물이 흐른다. 수성동 계곡은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에 속하며 인왕산 동쪽 능선 아래에 있는 계곡이다. 수성동 계곡은 조선시대 때 이 일대에 흐르는 계곡물의 소리가 맑아 수성동(水聲洞)으로 불렸으며 서울근교 명승지로 알려졌다. 특히 겸재 정선이 그린 산수화 [수성동]에 등장하면서 더욱 알려졌다. 정선의 산수화에 등장하는 당시의 모습과 비교하여 현재는 이 일대 주택가가 형성되면서 변모하였지만 당시 계곡에 걸쳐놓은 돌다리는 현재도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여름이면 선비들의 탁족회가 열리는 등 여름이면 휴양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근래에 이곳에 옥인아파트가 들어섰다가 철거된 이후 예전의 모습을 복원하는 사업이 진행되었고 현재는 자연 계곡의 모습을 되찾았다. 서울시에서는 수성동계곡을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하였다. 국제펜 우리 문인들은 바위에 걸터 앉아 물 속에 발을 담그고 더위를 식혔다. 우리 부부는 국제펜 이사로서 문인부부다. 남편과 마주앉아 물을 만지고 쥐어보고, 던지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충주에서 온 김영희 시인은 우리 부부에게 이런저런 포즈를 주문하며 아주 재미있는 사진을 많이 찍어 주었다. 참으로 고마웠다. 먼 훗날 오늘을 추억하며 김영희 시인에게 고마음을 느끼며 참 행복할 것이다. 어느새 주어진 자유시간 1시간이 흐르고 떠나야 할 시간이다. 나는 더 머물고 싶은 마음으로 일어서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물속에 하체의 몸을 담그고 주저앉아 물을 옷에 묻혀기기로 했다. 우레탄 고무 재질의 신발도 신은 채 물숙에 담가 물을 가득 담았다. 김영희 시인은 내게 오늘 옷을 참 잘 입고 오셨단다. 여름의 시원한 특수재질의 옷이어서 물에 젖어도 표가 나지 않아서다. 윤동주 시인도 이렇게 맑고 청정한 계곡에서 여름시간을 보냈으리라. 그날을 그려보며 ,윤동주 시인이 행복했다던 그 길을, 그의 걸음처럼 행복하게 걸어 수성동 계곡을 내려왔다.
* 박노수 가옥
이곳은 우당 기념관에 가는 길에 잠시 들렀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고가다. 1991년 서울특별시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건립 연대는 1937년경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 주거가옥의 형태를 보이는 2층 건물이다. 한식·양식의 절충식 가옥인데, 주로 한식으로 지어진 주택으로 1층은 온돌과 마루, 2층은 마루방 구조이고, 3개의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다.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박노수가 소장 ·관리하고 있다. 한말에는 개항을 통한 외국문물의 도입으로 주택양식도 크게 변화하였다. 이 시대의 서구양식 주택은 대부분 일본을 통해서 여과된 양식주거가 일본식 주거와 결합하였으며, 특히 국권피탈 이후에는 일본의 목조양식이 수입되었다. 이들은 양식의 접객부분을 채용하고, 다다미방과 온돌방에 양풍의 개폐창을 사용하여 서양풍의 외관을 하는 등 일본 양식과 절충식 주택양상을 보였다. 집안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관리인이 지키고 있다. 큰 마무와 함께 아름다운 구조의 가옥이다.
* 우당 기념관
국제펜 서울문학 탐방으로 인하여 서울 소재의 유적을 참 많이 찾아가서 보고 배웠다. 서울에서 몇십 년을 살았는데도 몰랐던 문학과 역사의 유작지들이다. 이곳 우당 기념관도 마찬가지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애국정신을 영상으로 사진과 글로, 설명으로 보고. 듣고 배웠다. 이 기념관은 독립운동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기념관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교동에 있다. 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심한 고문 끝에 순국한 이회영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우당은 이회영의 호이다. 1985년 10월 우당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1990년 9월 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에 우당기념관을 준공하였고, 2001년 6월 15일 지금의 위치에 기념관을 신축, 이전하여 개관하였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자취를 기념하는 전시관은 모두 6개 코너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물은 이회영의 흉상과 사진, 연보를 비롯하여 여섯 형제가 독립운동을 위하여 망명 직전 결의를 다지는 모습을 그린 그림, 이회영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던 신채호·조완구·김좌진·이동녕 등 애국지사 34명의 초상화, 망명 전에 소장하였던 장서들, 이회영이 그린 묵란(墨蘭), 경학사(耕學社) 설립 취지문,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가지고 간 고종의 신임장, 백범 김구(金九)가 쓴 민족정기 휘호, 이회영이 중국 정부로부터 받은 혁명열사 증명서, 이회영이 직접 조각한 낙관과 도장, 대한독립단의 모금 영수증, 아나키스트 운동 관련 자료, 독립운동 활동 사진 등이다. 의복과 모자, 신발 등의 유품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이 기념관 2층에는 전에 국회의원이었던 이종찬 가족이 살고 있다. 이종찬은 우당 선생의 손자뻘 되는 사람이다. 우당의 큰 형의 세째 아들의 장남이 이종찬이라고 한다. 현재 82세로 이곳에서 강의도 하신단다. 벽면에 김구 선생에게 꽃다발을 걸어주었다는 아동시절의 사진도 있다. 그의 어머니 사진도 보았다. 그의 어머니는 고종의 여동생의 딸이라고 한다. 명문가문 집안이다. 이종찬이 101살까지 살다가신 그의 어머니께 드리는 친필 글도 있다. 선조의 애국정신을 배운 소중한 기념관이다.
* 송강 정철 생가 터와 작품비
송강의 생가터였다는 청운초등학교에 왔다. 전에도 왔던 곳이다. 지금은 집이 사라지고 청운초등학교가 크게 자리하고 있다. 정철은 1536년(중종 31)∼1593년(선조 26)까지 살다간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문인이다. 그는 이곳 청운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인종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간 숙의였던 누이와 계림군 이유의 부인이 된 막내누이로 인해 궁중에 자주 출입했다. 이때에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훗날 명종)과 친숙해졌다. 계림군이 을사사화에 연루되자 아버지를 따라 유배 생활을 해야했다. 이후 학문을 익혀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다. 26세 때 진사시 1등을 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서 장원급제를 했다. 이후 함경도암행어사·좌랑·종사관·전라도암행어사·직제학 성균관 사성 등을 역임했다. 45세 때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 때 '관동별곡'과 '훈민가' 16수를 지었다.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 4년 동안 은거 생활을 했다. 이 때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작품을 지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1552년(명종 7) 17세에 문화유씨(文化柳氏)유강항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560(명종 15) 25세 때 「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 노래는 성산 기슭에 김성원이 구축한 서하당과 식영정(息影亭)을 배경으로 한 사시(四時)의 경물과 서하당 주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나는 담양의 식영정에 가 보았다. 그곳에서 그림자도 시름을 내려놓고 쉰다는 그 정자에 앉아서 감동을 받아 '식영정'이라는 졸시도 지었다. 도로변에는 송강의 작품비가 줄지어 서 있다. '정철 선생 나신 곳'이라는 표지석도 있다. 훈훈한 문향이 서린 거리다.
* 김상헌 집터와 시조비
김상헌의 유적지에 왔다. 그가 살던 집터라는 표지석과 '가노라 삼각산아~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학창시절에 배웠던 시조비도 크게 서 있다. 김상헌(1570 선조 3∼1652 효종 3)은 한국사에서 절개와 지조의 한 상징이다. 그 상징의 핵심은 ‘숭명배청(崇明排淸)’일 것이다. 그의 생몰년은 그가 조선시대의 가장 험난한 격동기를 통과했음을 알려준다. 82년에 걸친 긴 생애동안 김상헌은 왜란과 호란을 모두 겪었다. 전쟁으로 목숨까지 잃은 수많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가 특별히 혹독한 고통을 겪었다고 확언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노령에 청의 심양까지 압송된 것을 포함한 여러 사실은 그가 적지 않은 육체적ㆍ정신적 역경을 거쳤음을 수긍하게 만든다. 그 시대에 그의 판단과 처신이 옳았는가 하는 측면은, 거의 모든 사안이 그렇듯이, 여러 의견이 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그가 명료한 이념을 철저히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 이념과 실천은, 그뒤 ‘북학’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정계와 사상계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리고 뒤에서 보듯이 조선후기의 대표적 세도가문인 안동(장동) 김씨는 실질적으로 김상헌에서 출발했다. 또한 이곳은 청와대와 가까운 안가였던 곳이란다. 총성으로 대통령이 스러져간 슬픈 역사도 서린 곳이란다. 소슬한 곳에서 역사의 한 장면을 배우며 떠났다.
* 청와대 사랑채
오늘의 마지막 일정으로 온 곳이다. 전에도 왔었다. 한국문화와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의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다. 1층에는 연중 다양한 특별전이 열리는 기획전시실, 한국문화전시실 및 한식홍보관이 있고, 2층에는 청와대 및 역대 대통령을 소개하는 청와대관, 정부가 지향하는 비전을 보여주는 행복누리관 등이 있다. 본래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호를 위해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이 통행 금지된 후 오랫동안 이 지역은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1996년 2월 청와대 앞길을 개방하며 국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시설로 개조하여 '효자동 사랑방'으로 개관하였다. 기존의 효자동 사랑방을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개축하여 '청와대 사랑채'로 2010년 1월 개관하였다. 1층에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위인·문화유산·세계 속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인·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화폐 속 인물 등을 소개하는 국가홍보관과 서울의 사적과 음식·전통 및 현대문화·쇼핑정보 등 서울의 다양한 관광정보를 제공하는 하이서울관 등이 있다. 2층에는 대통령 60년의 역사와 역대 대통령들이 국빈에게서 받은 선물과 방명록 등을 소개하고,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도 재현해 방문객들이 직접 집무실을 체험할 수 있는 대통령관, 2010년 서울에서 개최된 G20 정상회의장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G20휴게관, 국정홍보관 등이 있다. 전시관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되며(월요일은 휴무), 관람료는 무료이다. 1층을 둘러보고 2층으로 갔다. 경호원 차량을 타고 실제로 경호를 받는 체험을 했다. 대통령 집무실 책상에서는 내가 대통령이 된듯한 체험도 했다. 청와대 대형사진 앞에서는 내가 청와대에 선듯한 체험도 있다. 많은 것으 보고 배우고 나왔다.
* 청와대 진입로
청와대 사랑채에서 나와 청와대 진입로인 효자로를 따라 걸어왔다. 효자로는 이 길이 지나는 효자동에서 유래되었다. 조선 선조 때 이곳에 살던 조희신, 조희철 형제가 나라로부터 효자 정려(旌閭)를 받았기 때문에 효자골이라고 불렸다. 효자로는 종로구 적선동 경복궁역에서 효자동을 거쳐 궁정동 칠궁에 이르는 폭 30m, 길이 1,300m의 6차선 도로이다. 이 길은 경복궁 서쪽 담을 끼고 있으며, 1960년대까지 전차가 운행되었다. 이 길은 조선시대부터 개설되어 있었으며, 1928년 주요 가로의 계획노선으로 적선동~궁정동~청운동 간의 830간(1,510m)의 도로를 폭 21.8m로 정했다. 1952년 3월 25일 내무부고시 제23호로 적선동~효자동간 850m를 폭 25m로 정하였다. 효자로는 1966년 서울특별시고시 제1093호에 의해 중앙청에서 효자동까지의 구간이었으나, 1972년에 중앙청에서 효자동을 지나 세검정삼거리까지 길이 3,400m로 연장되었다. 그 후 1984년 가로명의 연계성과 노폭의 차이 등을 감안하여 칠궁을 기준으로 효자동 방면과 자하문 방면을 구분하여 폭 15m, 길이 2,100m의 자하문로와 폭 30m, 길이 1,300m의 효자로로 나누었다. 청와대와 대통령들의 복된 날과 애환의 날이 겹쳐 보이는 길이다. 나무 가로수 싱그런 길 곳곳에 고운 꽃화분이 걸려있다. 길의 끝에서 경복궁을 만나고 전철역으로 가서 전철을 타고 귀가하였다. 날씨는 더웠지만 비도 오지 않고 국제펜 서울문학 탐방 마지막 날의 일정을 잘 마쳤다. 흐뭇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