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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씨의 영어
현 기 영
쉰댓 나이에 중학교 교장이 된 임상규 씨는 교장 초년생이 으레 그렇듯이 갑자기 지체 높아진 자신의 위용에 현혹되어 흥분과 긴장으로 충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교장이란 워낙 수많은 경쟁자 가운데서 발군의 실력으로 솟아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희소가치인지라, 그 자리에 취임한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쾌거요, 경사였다. 물론 사돈이 논 사면 배 아프다고 야간대학 출신이니, 아부 운운하면서 뒷전에서 험구하는 자들도 있긴 했지만 그런 시시한 구설에 외눈 하나 꿈쩍할 그가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그것을 오히려 자신의 지체를 돋보이기 위한 후광으로 공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니, 취임식 날 강당의 단상에다 몇몇 친지가 보낸 화환, 화분 가운데 모 의원의 이름자가 적힌 화분을 끼워 넣은 것도 바로 그런 속셈에서였다. 연줄이라는 것이 벌린 입에 홍시감 떨어지길 바라듯 해서 생기나? 그걸 눈밝혀 찾아낼 줄 아는 것이 바로 실력이요, 감탄고토가 아닌, 그야말로 쓴 것도 눈 딱 감고 꿀꺽 삼킬 줄 아는 끈덕진 인내와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능소능대, 가볍게 몸 실릴 줄 아는 운신술이 있어야만 연줄을 봅잡을 수 있는 것이었다. 서른아홉 나이에 일선 교사직을 떠나 관청의 눈칫밥 먹기를 5년, 다시 학교로 돌아와 교장과 평교사 집단 사이에 끼여 늘 앉은 자리가 바늘방석이던 교감 노릇 하기를 또 5년, 마지막으로 다시 관청에 다시 들어가 3년을 지냈으니 그의 장년기는 철두철미 상명하복으로 일관한 고달픈 삶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교장 취임은 그야말로 고진감래요, 쥐구멍에 볕 들기요, 죽은 나무 꽃피기인 셈이었다. 오랜 세월 죽어지내지 않으면 피울 수 없는 야릇한 꽃, 그는 부임 첫날 교장실의 안락의자에 전임 교장이 깔고 앉았던 낡은 방석을 내쫓고 모란꽃 세 송이 화려하게 수놓인 새 방석을 깔았다.
그가 정년퇴임한 전임 교장의 뒤를 이어 그 학교에 취임한 것은 학기 도중인 6월 중순께였다. 그때는 이미 학교 연간계획이 수립되어 나름대로 굴러가고 있는 터라 새 교장이 가슴 부푼 소신을 펴나가기엔 적잖은 애로가 가로놓여 있는 듯했다. 그러나 상규 씨는 이에 개의치 않고 부임 초부터 교내 분위기를 일신시켜 보려고 대단한 의욕을 과시했다.
관료의식이 몸에 밴 그의 눈에는 학교 전체가 전임 교장의 노추한 체취가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어 ‘무사안일’과 ‘무질서’의 표본장같이 보였다. 그의 부임 초 첫 직원회의에서, “병들어 누워 있는 이 학교를 끝내 일으켜 세우고 말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첫 주임회의에서는, “나는 집에서도 현관에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지 않으면 밖으로 내던져 버리는 성미요” 하는 둥 몇 마다 단도직입적인 언사를 구사하여 좌중을 놀라게 하더니, 취임식에 이어 두 번째로 전교생과 운동장에서 만나는 월요 의식조회 때에는 고상한 말은 아예 생략해 버린 채 다짜고짜로, “너희들 입은 그 옷 꼬라지들이 뭐냐! 불량하게시리! 당장 잠바 쟈크를 목까지 올리고 소매 단추를 채워! 쟈크는 잠그고 단추는 채우라고 있는 거야” 하고 으름장을 놓아 어린 계집아이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다른 여학교와 마찬가지로 그 학교 아이들도 대개 값싸고 간편한 캐주얼이나 점퍼 차림이었는데, 그런 복장은 지퍼를 내리고 소매를 한 겹 접어야 제멋이 난다는 것을 상규 씨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리고 원래 그는 교복자율화에 대해 아무런 이의가 없는 사람이었다. 일정 때부터 반세기 가깝게 제복과 더불어 살아온 그인지라, 처음에는 배우는 학생이 제복 대신 ‘아무렇게나 입는 옷’이란 뜻의 캐주얼을 입는 것이 도시 못마땅했으나, 그것이 당대 이념인 개방주의의 한 표현임을 깨달은 후로는 한 번도 그런 편견을 지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영문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그렇게 더럭 성질낸 데는 학기 도중 부임한 새 교장 보기를 의붓아비 대하듯 잔뜩 의심하여 흘끔거리는 학생들에게 한번 심술부리고 싶은 충동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관료체제의 상충부에 이를수록 후임자가 전임자를 고의적으로 폄하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작태는 흔히 있는 일로서, 사실 상규 씨는 어질기로 정평난 전임 교장이 아직도 교사들과 학생들의 머릿속에 그리운 얼굴로 자리잡고 있을 생각을 하면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어질다는 것이 무슨 잘나빠진 미덕인가. 교사들 사이에 어질다고 평판난 교장치고 무능력자 내지는 무사안일주의자가 아닌 경우를 별로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전임 교장은 교사, 아이 들 할 것 없이 모두 풀어 놓아 먹였던 모양이다. 쉬는 시간만 되면 떠드는 아이들로 4충 교사 건물이 온통 떠나갈 듯이 시끌벅적 북새통을 이루고, 조회 때 단 40분을 못 참아 대열이 비뚤비뚤해져 버리고, 거울 같아야 할 복도에 휴지가 떨어져 있질 않나, 수업 중에도 교사들이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지 아이들이 책상까지 두들기며 박장대소 웃음보 터뜨리는 소리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리질 않나, 도대체 이런 따위가 무슨 얼어죽을 놈의 어진 교육이란 말인가. 한번은 교실 복도로 순시 나갔다가 뒤에서 잰걸음으로 추월하는 아이한테 슬리퍼 뒤꿈치를 밟혀 휘청거린 적이 있었는데,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입에서 그 흔한 욕도 나오지 않았다. 제자가 스승의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된다는 옛말은 고사하고 도대체 다른 누구도 아닌 교장의 뒤꿈치를 밟다내! 그날 의식조회 때 있었던 그 기상천외의 발언은 단지 이러한 불만에서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것만은 아니었다. 원래 급한 성미이긴 해도 십여 년 여러 상사들을 바꿔 모시면서 죽어지내 온 그인지라 제 성미를 능히 다스리고도 남았다. 그러니까 그것은 충동적인 발언이라기보다는 의도적인 것이었다. 취임 벽두에 기상천외의 발언을 함으로써 교사, 학생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 주자는 게 그 발언의 주된 목적이었다. 다스리는 일에는 무엇보다도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믿는 상규 씨는 시무에 들어가기 전에 충격요법에 의한 강인한 이미지 구축이 급선무라고 보았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물불을 가리지 않는 직선적인 성격이니 알아서들 기라구!
아마도 그 학교 교사들이 대부분 남자였더라도 감히 그런 만용을 부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교사물이 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학교의 남교사들이란 대개 물러터져 다루기 쉬운 것이 통례였다. 학교에 나와 있어도 집의 가장과 자식들에게 종속되여 마음은 늘 콩밭에 가 있는 여교사들이야 그런 약점 때문에 눈 한 번 흘겨도 깜빡 죽게 마련이었다. 아무튼 상규 씨의 이렇게 몇 번의 극적인 연출을 통한 카리스마적 이미지 조작은 그의 큼직한 체구와 뻑시게 생긴 두상, 괄괄한 음성과 잘 맞아떨어져 무리 없이 성공해 보이는 듯했다. 그는 나이 같지 않게 앙가슴이 딱 벌어진 다부진 체격에다 술 실력 또한 대단했다. 주임들이 베푼 환영 술자리에서 그는 술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좌중을 또 한번 놀라게 했는데, 주임들이 이튿날 교무실에 소문 내기를 술보 교장을 당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마냥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더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런 평판 역시 상규 씨가 의도한 바였다. 술 대여섯 잔을 연거푸 받아먹고는 즉시 화장실 가는 체하여 목까지 차오른 그 생술을 손가락 넣어 적당히 뽑아 버리는 비법이 있음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상규 씨는 교사들간에 ‘체격 좋고 술이 센 불 같은 성격의 교장’이라는 카리스마가 확립되어 갔다. 교사들은 결재판을 들고 교장실 문 앞에 다가설 때마다 그 안에서 제 성깔에 못 이겨 전신에 부르르 털바늘을 곤두세운 왕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을 생각을 하면 가슴이 떨려 심호흡한 다음에야 노크를 하곤 했다. 계―주임―교감―교장. 위계질서를 단속하는 데 결재과정만큼 좋은 장치가 또 있을까? 상규 씨의 공직생활은 한마디로 무수한 결재서류의 집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결재판 들고 다니면서 갖은 수모를 겪었던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참으로 금석지감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최종 결재자가 된 상규 씨는 서류를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들여다보며 붉은 사인펜으로 휙휙 능숙하게 휘갈겨 기안문의 자구를 수정해 보이는 것이었다. “기안문이 이래 가지고 되나! 책 사다가 정식으로 기안 요령을 익히시오!” 그는 자기 방에 불려오거나 결재서류를 들고 온 교사들에게 이삼십 분씩 말을 시킬 경우에도 앉으라는 말을 결코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와 낫살이 비슷한 교감도 한참 앞에 세워놓고 얘기하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거기 앉으세요” 하고 능청떨고는 했다. 직원회에서는 말수를 적게 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대신 교감을 세워 대부분의 지시가 그 입에서 나가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침묵이 웅변 이상의 효과를 거두기를 노렸다. 교장의 눈 밖에 난 자는 비담임으로 따돌려지고 주임 승진도 가망이 없는 법. 짭짤한 촌지봉투는 두고라도 담임반이 없이 겉도는 자가 어찌 선생이며, 교감은커녕 주임도 못 된 채 늙어 가는 평교사란 또 얼마나 불쌍한 인생인가. 다행히도 교무실 한구석에는 평교사로 늙으면 어떤 몰골이 되는가를 실중해 주는 산 증거가 있었다. 정년을 이 년 앞둔 지리 담당 노교사가 바로 그 양반인데, 백발이 성성한 나이에 출석부 끼고 4충 꼭대기까지 숨을 헉헉대며 올라다니는 꼴이라든지, 짬만 나면 의자에 기댄 채 자울자울 조는 궁상을 보고 있으면 젊은 교사들이 뭔가 깨우치는 바가 있을 테지.
모든 지시가 일사불란하게 착착 관철되어 갔다. 교무실 책상의 책꽂이에는 책 한 권 비뚜로 꽂혀 있는 법이 없이 두부모 잘라 놓은 듯 규격 있게 정돈되고 아이들은 복도에서 발뒤꿈치를 들고 좌측통행을 지켰다. 각 부서의 기존 서류대장은 새로운 체제로 바뀌고 전에 없던 대장이 신설되었다. 꼭 있어야 할 대장은 진작에 있었던 것이고 새로 신설된 것은 없어도 좋은 것, 있으면 조금 편리한 것, 있어서는 불편한 것들이 전부였다. 복도의 게시물도 새것으로 바뀌었다. 2분 이상 결리는 교사의 입실시간도 1분으로 단축해 놓았다. 상규 씨는 간밤의 숙취로 자기 방 소파에 기대어 혼곤히 낮잠에 취해 있다가도 수업시작종만 나면 흠칫 놀라 깨어 수업 들어가는 교사들의 동작이 얼마나 신속한지 시간을 재곤 했다. 교장실 복도로 떼몰려 지나가는 슬리퍼 소리는 대개 일 분 안에 끝났다.
학급 회보들도 자진 폐간되었다. 회보를 내는 반이 모두 네 반이었는데, 회보라고 해봐야 중학생 솜씨이니 오죽하랴만 팔절지 안팎에다 아이들이 직접 제 글을 제 글씨로 깨알같이 써넣은 다음 전자복사하여 반 아이들끼리 나눠 보는 일은 그들에게 퍽 정겹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상규 씨는 만화, 별명, 은어 사용 둥 저열한 내용이 많다는 가당찮은 이유를 들어 복사하기 전에 반드시 결재를 받으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담임교사의 조언을 받으며 아이들이 자율로 하는 작업을 결재 아닌 검열을 하겠다니, 아이들이나 선생들이나 무슨 초친 맛에 회보를 더 만들겠는가. 자진 폐간은 오히려 상규 씨가 바라는 바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유인물에 대한 그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학원사태와 관련하여 고둥학교에는 이미 학생들이 임의로 제작하는 유인물을 단속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있었다. 설마 중학생이 어쩌랴마는 그래도 학교 안에 아이들이 제작한 유인물이 나온다는 것은 별로 탐탁한 일이 아니었다. 벌써부터 유인물 만들어 버릇하면 장차 상급학교에 진학해서 그런 방면에 선수가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상규 씨의 통치 판도는 비단 교내에만 국한되지 않고 교문 밖까지 연장되었으니,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잡행상 단속이 그것이었다. 군고구마, 아이스크림, 손거울, 지갑, 액세서리 같은 것들을 파는 그 행상들 가운데는 학부모도 적잖이 끼여 있어 단속하기가 여간 민망스럽지 않은 처지인데도 상규 씨는 우물쭈물하는 교사들을 마구 다그쳐 멀리 큰길까지 내몰아 붙이곤 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원리원칙에 입각하여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행해졌기 때문에 교사들이 비록 뒷전에서 불평을 할지언정 정면으로 대들만한 허점은 남겨 두지 않고 있었다. 몇몇 젊은 축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될 수 있으면 빨리 새 체제에 적응하는 편이 상책이라고 퍽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다.
교장이 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지만 상규 씨는 오색 구름에 싸여 공중에 붕 뜬 기분으로 여전히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여 여기저기 전화질로 자신의 출세를 알리고 이틀이 멀다 하고 술자리를 벌이곤 했다. 그렇게 술 마신 이튿날이면 조회가 끝나는 즉시 포니차를 몰고 나와 이발관을 찾기 일쑤였는데 길게 드러누워 면도사 아가씨의 서비스를 받으며 한숨 자는 것도 남모를 각별한 즐거움이었다. 눈을 감고 반수상태에 빠져 면도 서비스를 받노라면 면도사 아가씨는 얼굴은 없고 손가락만 가진 포근한 기계처럼 느껴진다. 눈을 감고 아가씨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면도날이 가죽혁대에 쓱쓱 스치는 소리가 부드럽게 들리고 곧 아가씨가 다가온다. 눈을 감고 있어도 다가오는 그녀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동작에 밀린 공기층이 혼들리면서 러닝셔츠 바람의 벗은 팔을 미미하게 간지럽힌다. 눈썹의 윤곽을 다듬던 아가씨는 귀밑과 구레나룻 자국을 면도하기 시작한다. 간밤에 먹은 술이 비료가 되었는지 수염은 까칠까칠 솟아 있다. 뽀드득뽀드득 털 깎이는 자디잔 소리가 그녀의 손부리 밑에서 감미롭게 들려 온다. 그녀의 손목에서 초침 돌아가는 시계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은 묵살하고 그녀의 육감적인 손부리에다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 손톱이 바투 깎인 엄지와 검지의 손부리는 아주 통통하다. 비눗물이 묻어 매끄럽기도 하다. 엄지와 검지에 꼬집힌 볼살이 붉은 꽈리처럼 동그랗게 빠져나오고 그 위로 면도날이 가볍게 스쳐간다. 두 손가락은 계속해서 볼살을 여기저기 꼬집는다. 간지러운 쾌감이 일어나고 살갗 밑에서 모세혈관이 붉게 충혈된다. 드디어 기다리던 것이 왔다! 여자의 부드러운 살집이 왼쪽 어깨에 와 닿더니 지그시 눌러 댄다. 어깨 신경이 온통 거기로 쏠린다. 젖가슴일까 배일까? 숙인 여자 얼굴과의 거리는 불과 한 뼘, 숨소리까지 다 들린다. 이때 아가씨의 전자 손목시계가 삑 하고 경고의 신호를 보낸다. 상규 씨는 정신이 번쩍 난다. 10시 정각 신호로군! 지금 이 순간 학교에서도 어김없이 수업종이 울릴 것이다. 긴장된 교무실 광경이 눈에 선하다. 종소리에 맞춰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 교사들이 출석부꽂이 앞으로 급히 몰려간다. 초침 소리가 계속 들려 온다. 짹, 짹, 짹…… 20초. 교사들은 비상 걸린 병사들이 총가에서 총을 나꿔채 달리듯이 저마다 민첩한 동작으로 출석부를 빼 옆에 끼고 꾸역꾸역 출입문을 빠져나간다. 짹, 짹, 짹…… 35초. 이제 그들이 슬리퍼 끄는 소리가 시끌짝하게 교장실 앞 복도를 울리며 지나간다. 잇달아 일어나는 슬리퍼 소리는 아가씨의 손목시계의 초침이 둥근 문자판 위를 한 바퀴 채 돌기로 전에 뚝 끊기고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한 달 반쯤 지나고 나니까 차츰 교사들의 불평 소리가 구체적인 양상을 띠고 상규 씨의 귀에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주임교사들 외에도 평교사 중에 믿을 만한 채널을 서넛 확보하여 교무실과 젊은 축들이 잘 가는 시장 근처 소줏집에 잇대어 놓고 있는 터라 교사들의 동청은 대체로 장중에 넣고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채널을 통하여 들리는 바로는 입실시간 단축으로 교감이 그만 애꿎은 별명을 얻고 말았단다. 사환아이가 잠깐 방심하여 정각에 종을 안 치면 득달같이 교감의 입에서 “종 쳐라!” 하는 소리가 떨어지곤 했는데 그 ‘종 쳐라’가 방정맞은 젊은것들의 입에서 ‘총철아’로 바뀌어 김교감은 그만 이름 갈아 ‘김종철’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뭐, “김종철, 종 쳐라!” 하고 저희들끼리 히죽거린다고 했지? 고얀 것들. 그러나 어느 분야 어느 계충에서든 제 못난 성미 탓에 찬밥 먹기로 작정한 극소수 불평불만자는 있는 법, 구더기가 무서워 장 안 담글 수 있나. 당장은 국민에게 욕먹더라도 소신껏 밀고 나가는 강한 권력만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고 피력한 어느 여당 의원의 발언에 상규 씨는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뚝 박듯이 때려박은 이 요지부동의 체제에 최초로 행동으로 반발한 것은 매점일 보는 미스 황이었다. 골목 구멍가게보다 못한 학교 매점에 밤사이 좀도둑이 들어 현금 5만 몇천 원을 훔쳐갔는데 이 사건을 놓고 상규 씨는 그야말로 호떡집에 불난 듯이 길길이 날뛰었다.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보안망에 구멍 뚫렸다고 숙직교사에게 시말서 써내라고 으름장 놓았다. 그러나 숙직자는 이튿날 수업은 하게 되어 있어 숙직(宿直)의 말 그대로 잠자면서 근무하는 게 원칙인지라, 꾸중이라면 또 모를까 근무평점에 누가 되는 시말서를 쓰라고 한 것은 애당초 부당한 처사였다. 숙직교사가 끝까지 버티자 상규 씨는 할 수 없이 매점의 미스 황에게 시말서를 쓰게 했다. 정식 직원도 아닌, 올해 여상을 졸업하고 취직할 마땅한 데가 없어 임시로 와 있는 그 처녀에게 아무런 법적 구속력도 없는 시말서를 쓰게 함은 문서행정 만능의 그의 굳은 사고방식을 단적으로 보여 준 예였다. 그러나 미스 황은 휴지나부랭이나 다름없는 그것마저 쓰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그날로 당장 보기 좋게 매점 일을 집어치우고 떠나 버렸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학생들도 교사들 못지않게 경직된 학교 분위기에 차츰 넌덜머리내기 시작했다. 한번은 ‘쥐소동’이 있었다. 3학년 2반은 교장실 바로 위에 위치한 학급이라 아이들이 떠들지 못하도록 담임이 각별히 신경쓰고 있었는데 바로 그 반에서 어느 날 무슨 사고라도 난 듯이 갑자기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낭자하게 터지고 금방 교장실 천장이 내려앉을 듯이 우당탕탕 발 구르는 소리가 우락하게 났다. 상규 씨가 크게 놀라 단걸음에 이층으로 뛰어올라간 것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헐레벌떡 교실 앞에 달려가 보니 아이들도 물론 선생까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침 뚝 떼고 공부를 하고 있지 않은가.
사연인즉,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한 아이가 느닷없이 “쥐다, 쥐!” 하고 날카롭게 소리지르며 책상 위로 황급히 뛰어오르자 그 뒤를 따라 반 전체 아이들이 일제히 “에이구머니나!” 하고 비명지르며 책상 위로 우당탕탕 뛰어오르는 소동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이 ‘쥐소동’은 젊은 총각선생을 곯려 주기 위한 조작극으로만 상규 씨는 이해했지만 거기에는 아래층 교장실 때문에 늘 죽어지내야 하는 갑갑증을 한번 그런 식으로 터뜨려 교장을 놀려 주려는 의도가 다분히 숨겨져 있었다. 이미 아이들과 선생들 사이에는 다 같이 피해자라는 동류의식이 암암리에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선생님들 보면 너무 불쌍해요.” “너희들은 어떻고?”
이렇게 주위로부터 암암리에 도전을 받기 시작한 상규 씨는 하품에다 딸꾹질까지 겹친 격으로 부지중 제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월요 의식조회 때 아이들이 열중쉬어 자세에서 몸을 자꾸만 움직이고 뜨거운 햇빛에 어질증이 난 아이들이 두어 명 열 중에서 업혀 나가는 걸 보고 상규 씨가 몇 마디 싫은 소리를 불쑥 던졌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있었다. “학생이라면 좀 참을 줄 알아야지. 우리 때는 애국조회에 이러지 않았어요. 한겨울 영하 추위 속에서 벌겋게 상체를 벗고 건포마찰했는데……”라고 개탄한 것인데 민감한 여학생들이라 다른 뜻은 제쳐놓고 상체를 벌겋게 벗었다는 말에 질색하며 전교생이 일시에 “어마!” 하고 소리를 질러 버린 것이었다. 실수는 거기에 그친 게 아니라 무심중에 내뱉은 그 몇 마디 말로 인해, 상규 씨는 젊은 교사들 간에 일제 소학교의 조회를 ‘애국조회’라 칭하고 건포마찰로 상징되는 일제 식민지 교육을 찬미하는 교장으로 판단이 나버렸다. 그 판단을 확인해 주는 증거가 그 뒤에 잇따라 나타났다.
시달리기로 말하면 평교사보다, 교장과 늘 접촉해야 하는 주임들이 더 심했는데 그들이 교장을 무마해 보려고 또 한차례 술 한판 걸게 냈던가 보다. 일행은 취흥이 도도한 나머지 이차로 가라오케 술집까지 진출했는데 거기에서 그만 그의 입에서 왜가요가 새어나오고 만 것이다. 이튿날로 당장 교장의 십팔번은 ‘아카시아노 하나’라는 소문이 왜자하니 나돌았다. 구리고 얼마 뒤에는 아예 ‘나카무라데스네’라는 왜식 별명이 붙어 버렸다. 그것은 그가 상대방을 호되게 나무랄 때 부지중에 입버롯처럼 “당신 정말 형편이 영 나카무라데스네” 한데서 나온 별명이었다. 교장이 내린 일련의 지시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가 ‘나카무라데스네’라고 된통 욕을 먹은 젊은 교사 몇 명이 그 욕이 무슨 뜻이냐고 일부러 나이 많은 교사들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묻는 시늉을 하면서 별명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그것이 ‘형편 없는 사람’이란 뜻으로 밝혀지긴 했지만 왜 그 많은 왜성 가운데 하필 나카무라(中村)가 형편없는 성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상규 씨 자신도 어느 날 우연히 ‘나카무라데스네’를 듣기는 했지만 그것이 차마 자기 별명인 줄은 몰랐다. 변소간에 쪼그리고 앉아 용변을 보고 있을 때였다. 그때 수업종 소리가 나고 본능적으로 시계에 눈이 갔다. 잠시 시계 초침의 운행을 눈으로 좇고 있는데 변소 앞 복도에 수업 들어가는 교사들의 발짝 소리가 왁자하니 일어나더니 그 중에 서너 명이 변소 안으로 몰려 들어오는 눈치였다. 그들은 변기에 오줌을 요란하게 내깔기며 저마다 한마디씩 툭툭 내뱉는 것이었다.
“허허, 이 사람들 보게. 제때 수업 안 들어가고 변소부터 들러? 나카무라데스네가 보면 좋겠네.”
“난 말이야, 아예 오줌을 질끈 참았다가 수업 들어갈 때 누기로 했어. 요렇게 변소에서 일 분 까먹는 게 아주 깨소금 맛이거든.”
“난 멀쩡하다가도 수업종만 나면 찔끔찔끔 오줌이 지리니 이게 무슨 병이지? 허허허!”
“조건반사지, 뭐야. 제기럴, 우리가 뭐 자동인형인가. 종만 치면 온 교무실이 놀라 발딱발딱 일어나야 하니, 원. 정말 해도 너무 사람 볶아치는군.”
“종, 발딱. 종, 발딱. 그것 참 ‘산토끼’ 노래에 맞춰 부르면 좋겠네.”
그들은 이런 식으로 한바탕 떠들고는 이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 말을 엿들은 상규 씨는 욱하고 부아가 치밀었으나 바지를 까내리고 앉아 있는 처지라 어찌할 수 없었다. 도대체 저것들이 어떤 놈들일까? 그놈들 낯짝을 알아 두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 상규 씨는 워낙 장소가 장소인만치 똥물이 몸에 튀겨진 것처럼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카무라’가 저희들끼리 무슨 해괴한 은어인 줄로만 생각했으니 망정이지, 그게 자기 별명인 줄 알았더라면 그 급한 성미에 아마도 바지춤 쥐고 벌컥 밖으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도 그가 짐작조차 못 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람의 버릇이란 남이 일깨워 주지 않으면 평생 모르고 지낼 수도 있낳 것이니, 만시지탄이긴 해도 상규 씨가 이세 교육의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할 위치에 오른만큼 주위에서 날카롭게 그 허물을 지적하여 일깨워 주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시장 근처 소줏집에서 입방아를 찧어 대는 젊은 교사들이 언젠가 정련으로 대들 날이 반드시 오게 마련이었다. 물론 그러한 허물은 비단 상규 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년 전에 한일의원연맹 소속 어느 선량이 일본 의원들과 어울린 술자리에서 한번 원없이 왜말을 지껄이고 흘러간 엥카를 불렀노라고 자랑했다가 신문 가십거리가 된 적도 있지만 일제 때 청소년기를 보낸 사회 지도층 인사들치고 일제 교육의 해독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각계각층의 상좌에 버티고 앉아 그들이 유포하는 권위주의와 친일 성향은 사회 발전에 큰 장애요인이 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면 화날 때 상규 씨의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오는 ‘나카무라’, 그 무의식의 배경은 무엇일까? 단기로도 서기로도 따져 본 적 없이 그저 소화(昭和) 몇 년이라고만 알고 있는 이른바 ‘국민총동원령’이 떨어진 그해에 소학교에 들어간 상규 씨는 7년 후 중학 2년에 해방을 맞을 때까지 성장기의 어린 혼과 몸이 전시체제 교육의 용광로 속에서 분쇄되고 용해되고 주조되는 혹독한 시련의 과정을 거친 사람이었다. 그 체제교육이 어찌나 파괴적이었던지 자신을 피해자로 여겨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상규 씨였다. 피해자이기는커녕 이렇게 높이 영달까지 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교장 초년생이 된 그가 장차 어떤 교장이 바람직할까, 그 모델을 머릿속에 그려 볼 때 도요시 교장 얼굴이 자연스럽 게 떠올랐다.
그 사람은 상규 씨가 다니던 소학교 분교의 교장 겸 5,6학년 때 담임으로 한겨울 영하의 추위 속에서도 아이들에게 건포마찰을 강행하던 장본인이었다. 그는 단상에 떡 버티고 추위에 입술이 시퍼래진 아이들에게 웃통을 벗으라고 명령하고는 자기도 국민복 상의를 벗었다. 웃통을 벗으면 신문지로 오려 만든 종이조끼 한 장이 알몸에 걸쳐져 있었는데, 그가 한 손으로 종이조끼를 거칠게 북 찢어발기면서 검도로 단련된 우람한 상체를 드러내는 순간은 군신(軍神) 노기 대장의 화신처럼 실로 두렵고도 짜릿한 전율을 일으키는 장면이었다. 얼어붙은 허공을 쩌렁쩌렁 울리는 구령 소리, “이찌, 니(하나, 둘), 이찌, 니.” 동조동근(同祖同根), 내선일체, 창씨개명, 조선어 박멸, 황국신민, 신사참배, 부국충성, 그 모든 명령이 그 사무라이 교장 입에서 나왔다. 신사 입구에 심은 벚나무에 올라가 버찌를 따먹다가 들킨 동급생이 신성모독했다고 그 이튿날 조회 때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앞으로 끌려나와 도요시 교장이 사정없이 휘두르는 목검에 까무러친 일도 있었다. 그 아이는 목검이 연약한 몸에 떨어질 때마다, “아이고, 아이고” 하고 비명을 질렀는데 일본말로 ‘아이따, 아이따’ 하지 않는다고 매를 더 맞았던 것이다. 그 아이는 공부도 못하고 조행 성적도 형편없었다.
그렇게 무서운 교장도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눈여겨보고 다독거릴 줄 알았다. 봄과 가을에 석차순으로 10명까지 두 명씩 자기 관사로 불러 하룻밤 재우며 일본 예절을 가르쳐 주기도 했는데 상규 씨도 한 번 그 자리에 낀 적이 있었다. 사모님이 세숫대야에 떠다 준 따뜻한 물로 때가 까맣게 앉은 까마귀발을 깨끗이 씻고 쌀 공출로 기장밥, 콩깻묵 먹던 입에 흰 쌀밥 먹는 맛이라니! 거기에 초대되었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도 그 흐뭇한 기억을 잊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일제가 반도에 저들의 수족인 매판 계층을 형성시키려는 방편인 줄은 상규 씨는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깨닫지 못했다. 강경과 유화는 동전 안팎의 관계로 식민지 경영의 표리를 이루는 정책이었다.
더구나 도요시 교장은 상규 씨에게 한 가지 중요한 기술을 가르쳐 준 고마운 은사이기도 했다. 검도 유단자인 그는 글라이더 제작 솜씨도 좋아 검도반 외에도 공작시간에 글라이더 만들기를 자주 시켰다. 상규 씨가 만든 것이 그중 모양이 멋고 멀리 날았다. 공부는 10등 안팎을 오르내렸지만 자기가 만든 글라이더가 히노마루 붉은빛도 선명하게 운동장을 가로질러 누구 것보다도 더 멀리 활공할 때면 가슴 뿌듯한 우월감이 느껴지곤 했다. 그는 차기가 만든 글라이더를, 진주만 공격 때 공훈을 세운 전투기 이름을 따 ‘제로생’이라고 명명했었다.
이렇게 배운 기술은 훗날 교직에 나가서도 요긴하게 쓰였으니 글라이더 공작반을 운영하여 양날개의 히노마루가 있던 자리에 태극 마크 혹은 미군을 상징하는 별표를 그려 넣은 글라이더를 제작했다. 안보교육과 과학교육이 중요한 교육적 슬로건으로 고창되고 있을 때 이러한 글라이더반 활동은 곧 주목을 끌어 전국대회에 두 번 입상하고 그 공로로 상규 씨는 근무평점에 귀중한 2점을 가산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상규 씨만 도요시 교장을 은사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굴욕외교라고 대학생들이 아우성치던 한일회담이 타결되고 양국간에 국교가 재개된 지 삼 년 후에 도요시 교장이 한국을 방문하여 옛 제자를 찾았을 때, 20여 명의 분교 선후배가 옛 스승을 맞아 뜻깊은 동창회를 벌였던 것이다. 여기서 유독 상규 씨네 동창회만 트집 잡고 따질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 동창회가 한때 서울 장안에 유행이다시피 했거니와 도도한 취흥에 겨워 연방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는 내지인 은사를 둘러싸고 반도인 제자들이 유창한 왜말로 옛 추억을 더듬는 그 술자리의 정경을 상상해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해방 후 급격히 일어난 영어 봄에 편승하여 콘사이스깨나 뒤적거리긴 했지만 매양 영어에는 자신이 없는 그들이라 한일회담 결과로 일어가 영어에 버금가는 외국어로 격상될 판이니 얼마나 기뻤을까. 매 맞아 가며 공들여 배운 일어를 이십여 년간이나 써보지 못한 채 억울하게 주눅들어 온 그들은 이제 내지인을 맞아 목에 목은 때를 벗겨 보려고 서로 앞다퉈 왜말을 지껄이고 취기가 더욱 오르면 ‘나카무라데스네’ 씨의 십팔번인 ‘아카시아노 하나와 같은 엥카도 부르고 심지어 개중에는 제 기억을 뽐내려고 ‘황국신민선서’를 육조려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 자리가 취흥이 낭자하여 태평양전쟁 때희 별의별 구호가 다 튀어나왔다고 해도 ‘미영귀축(米英鬼畜) 격멸’이야 하마 입 밖에 나왔을까?
그러고서 수년 후 평지돌출의 기적처럼 ‘10월유신’이 우뚝 솟아났을 때 상규 씨는 그것이 제정 때 ‘국민총동원령의 모태에서 탄생한 체제임을 은몸으로 실감하고 흥분으로 몸을 떨었다. 그 반가움이란 물 본 기러기에나 비할까. 노랫말을 빌린다면 그야말로 ‘내 놀던 옛 동산’이요, ‘옛날의 금잔디동산’이었다. ‘한국적 민주주의 우리 몸에 맞는 옷’이라는 구호대로 유신이야말로 그의 몸에 딱 맞는 ‘국민복’이었다. 그는 교사로서 도요시 교장처럼 체제교육에 멸사봉공했다. 명령과 지시, 그리고 복종. 자율도 어색하고 재량도 부담스럽다. 그저 명령만 내려주시오. 골수를 후벼 내는 강력한 명령만이 복종자를 짜릿한 희열에
떨게 한다. 상규 씨는 유신 중에 교감으로 승진되었다.
유신이 몰락하기 직전에 상규 씨는 용케 연줄 잡아 연구관으로 승진, 다시 관청으로 들어갔다. 유신은 끝났지만, 그 틀은 그대로 남아 상규 씨는 상황에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그가 몸담고 있는 관청이나 그 감독을 받고 있는 일선학교나 여전히 상명하달의 수직계통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교복자율화’가 있었지만 그것도 일체의 왈가왈부 ‘비생산적’ 논의를 배제하고 위에서 수직으로 뚝 떨어진 지시였지 자율의 허용은 아니었다. 다만 외형상의 변화가 있었으니 개방주의가 그것이었다. 개방주의 정신에 따라 학교에 영어회화 교육이 의무화되면서부터 사회 전반에 영어 붐이 크게 일었다.
영어 봄 조성에 TV들이 앞장서고 카세트 출판사들이 재벌 소리 들을 정도로 영어산업은 크게 번창했다. 초보자를 위한 성인영어, 주부영어도 성시를 만나고 영어 조기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어 국민학생, 심지어 유치원생까지 영 어 바람에 휘말렸다.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영어 봄이었다. 영어는 이제 전 한국인이 갖추어야 할 필수 교양이요 상식이었다.
영어 붐에 발맞춰 각종 개방조치가 폭죽처럼 화려하게 펑펑 터져올랐다. 86. 88의 대서특필, 그에 따른 엄청난 스포츠 붐, 각종 국제대회, 사사 여행자·공무 여행자·해외 유학생·해외 연수자의 급격한 양적 팽창, 로열티 붙은 외국 상품의 범람, 수입자유화 둥둥 허공에 씽씽 돈 바람이 영어 바람과 함께 섞어쳐 불어 대는 소리가 상규 씨 아둔한 귀에도 들려 올 지경이었다. 특히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아동, 청소년의 급격히 달라진 의복 풍속이 눈에 거슬렸다. 학교와 길거리는 각양각색의 블루진, 캐주얼 물결이 흥청대고 가슴팍에도 궁둥짝에도 가방에도 신발에도 낙인처럼 영문자가 박히고, 그들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게걸스럽게 씹어 대고 빨아 대는 과자류, 청량음료치고 영어 발음식 상표가 안 붙은 게 없었다. 위에서 하자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꿈보다는 해몽격으로 좋게 생각하자는 주의인 상규 씨도 과연 이 개방 바람을 공자로 풀어야 할지, 맹자로 풀어야 할지 난감했다. 그렇다고 개방주의의 즉흥성, 맹목성을 꿰뚫어본 것은 아니고 다분히 영어 콤플렉스에서 나온 심정적 반응일 뿐이었다. 영어에 못지않게 일어도 중요한데, 하는 것이 그의 소견이라면 소견이었다. 그러나 죽은 송장까지도 영어 하겠다고 꿈지럭거릴 지경으로 천하대세를 이루어 불어닥치는 영어 바람을 도저히 모면할 도리는 없었다. 영어를 못 하면 죄인처럼 주눅들어야 할 시대가 온 것이었다. 더군다나 소년 시절에 왜말로 ‘미영귀축 격멸’이라고 수없이 외쳐 댄 경력이 있는 상규 씨인데 왜 영어에 대한 죄책감이 없겠는가. 그리고 종합상사에서는 승진하는 데 영어가 필수라는데 혹시 교장 나가려면 영어실력을 문제삼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규 씨는 곧 정신을 수습하고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으로 몸을 실었다. 옛날에 일 년 남짓 배웠던 구닥다리 영어를 밑천삼아 TV영어강좌를 떠듬떠듬 듣기 시작하다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논 해외연수명목으로 한 달간 국비로 미국을 관광하고 온 후로는 영어에 대한 감각이 사뭇 달라졌다. 일단 시각을 조정하고 나니까 모든 개방 풍속들이 퍽 우호적으로 보였다. 영어공부를 따로 할 것 없이 사방에 지천으로 널린 것이 영어였다. 상품치고 영문 상표 안 붙은 게 없고 점포치고 영어 발음식 상호를 안 단 게 드물지만 우선 눈요기하기는 사람이 제일이라 그것도 젊은 여자의 의복, 신발, 가방, 액세서리 등의 영문자들이 그 중 생동감 있는 영어 학습자료였다.
유명상품 중에 상당수가 세를 내고 빌려 오는 외국 상표들이지만, 이른바 그 로열티란 것도 어지간히 비딱한 눈에나 문제성 있게 보이지 상규 씨 같은 정상적인 눈에는 별게 아니었다. 로열티가 붙은 무슨 도넛과 무슨 햄버거가 국내에 처음 선보였을 때 우연찮게도 어느 TV에서 햄버거 센터와 도넛 하우스를 무대로 한 코미디 연속극을 꽤 오랫동안 방영하여 그 영업을 크게 선전해 준 적이 있었는데 그러한 문맥을 전혀 읽을 줄 모르는 상규 씨는 그 코미디를 볼 때마다 미군모를 쓴 주방장이 미 본토 발음이라고 연상 ‘햄버얽’ ‘도우넛’ 하는 소리를 재미있게 따라 발음해 보곤 했었다. 햄버거가 ‘햄버얽’, 도나쓰가 ‘도우넛’이라고 발음되는 것은 그에게 하나의 경이였다.
하여간 상규 씨는 영어 배우는 방법이 특이해서 항시 소형 사전을 넣고 다니면서 사람의 몸(그것도 젊은 여성!)에 붙은 영어 단어를 하나 둘 주워모으는 걸 취미로 삼았다. 한번은 어떤 발랄한 처녀의 찰싹 달라붙은 티셔츠의 등짝에 씌어진 ‘One Wild'n Crazy Girl’의 글 뜻을 사전을 꺼내 새겨 보고는 혼자 쿡쿡 웃음을 흘린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신촌 로터리에서 두 여대생의 축제용 티셔츠에 씌어진 ‘민족과 현실’이란 걸 보고 얼마나 기분이 잡쳤던지! 한마디로 백주에 망령 본 듯이 가슴이 섬뜩했다. 아직 대학의 삼민주의가 정치문제화되기 전이었지만 상규 씨는 직감적으로 거기에 내포된 신랄한 공격성, 과격성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것은 대세에 rj역이요, 대명에 불복이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젊은 여자에게 한눈팔기를 서너 달 하고 나니까 제법 영어상식이 는 듯했다. 그런데 영어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 생겼다. ‘차 없는 사람=못난 사람’이란 등식이 일반상식처럼 통용되는 마이카 봄이 그것이었다. 마이카야말로 교장의 자격요건이었다. 교장이 되려면 기동성과 품위와 무게를 갖춰 두는 게 급선무였다. 홀몸 무게 75㎏만 가지고는 불충분하고 거기에 6백kg의 차 무게를 합쳐야 비로소 사람의 체중이라고 일컬을 만했다. 차 있어야 사람 취급하는 세상에 차 없이 무슨 승진운동을 하나. 그래서 그는 작년 여름에 좀 무리해서 포니차를 구입해서 오너 드라이버가 되었다.
차를 산 후로 상규 씨는 자신의 존재를 한시라토 차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게끔 되었다. 차와 연결되어야만 자신의 존재가 완결되었우니 핵들을 잡으면 언제나 실린더 속의 단속적인 폭발음이 온몸에 충일하고 축전지 전류가 체내에 홀러들어오곤 했다. 소년 시절에는 그가 만든 제로생 글라이더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더니 이제는 포니가 그의 떼어놓을 수 없는 분신이었다. 그는 자기 포니를 “마누라보다 더 아낀다”고 농담 아닌 진담을 곧잘 하곤 했다. 포니를 얼마나 속속들이 사랑하고 싶었던지 부속 이름도 일일이 영어 철자로 쓸 수 있도록 익혀 놓기까지 했다. 그 오죽잖은 영어실력에 50개 가까운 부속 이름을 역어로 왼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영문자로 된 포니 부속 이름들이, 글라이더 제로생 부속 이름들, 도타이, 호코다, 스이추쿠, 스이헤이 등등 일어 단어들과 나란히 그의 머릿속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제 상규 씨의 전력을 대충 훑어보았거니와 이러한 사고와 행동의 틀을 가진 교장이고 보니 젊은 교사특과의 정면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서른 살 안팎의 고만고만한 또래의 젊은 교사들 예닐곱은 거의 매일이다시피 시장 근처 소줏집에서 어울렸는데, 새 교장을 안주삼아 씹다 보니 자연히 교육이념의 문제라든지 지시 명령의 전도체로 전락해 버린 평교사들이 다시 교육의 추체로 부상되어야 한다, 영문 상표가 밖에 붙은 옷 종류는 되도록 입지 말게 학생들을 설득해 보자는 둥 참으로 많은 교육적 논의가 중구난방으로 열띠게 벌어졌다. 그런 식의 술자리 대화는 사람 좋은 저번 교장이 있을 때는 별반 없었던 일이거니와, 강압의 본질인 파괴성이 오히려 이러한 참된 씨앗을 배태시킨다는 역설은 아마도 만고의 진리인가 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맨 먼저 포문을 연 것은 63세의 그 노교사였다.
학생부 교사들을 시켜서 교문 밖 잡행상을 단속해 온 상규 씨가 인원을 더 늘린다고 그 노교사를 포함한 비담임 다섯 명을 끼워 넣은 것이었다. 평교사로 늙어 정년을 2년 앞둔 노인을 그런 고역을 시킨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교무실 구석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 그림같이 조용히 앉아 있던 그 노교사가 어느 날 적막을 깨뜨리며 분연히 일어났다.
“옛날 왕조시대에도 수령이 지방에 도임하면 먼저 그곳 촌로들을 돌아보고 무마하기를 도리로 삼았소. 그런데 교장 당신은 그러기는커녕 평교사로 늙은 나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주었소. 그것은 단지 나에게만 그치는 게 아니라 전 평교사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기에 이렇게 일어난 것이오. 노인 대접을 해달라는 요구가 아니오. 늙은이를 부려먹으려면 좀 일 같은 일을 가지고 부려먹으라 이 말이오. 잡행상 단속이라니! 도대체 우리가 경찰이오, 뭐요? 그들도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 중에 우리 학부모도 적잖은데, 어떻게 박정히 내몰란 말이오? 혹 불량식품이 염려된다면 유인물 같은 것을 돌리면서 좋은 말로 계몽시키는 게 우리 선생이 할 일이지.”
이렇게 격렬한 어조로 시작된 교장에 대한 공박은 무려 20분간이나 계속되었는데 그간의 교장의 방침을 조목조목 따져 꾸짖는 그야말로 준열한 일장 훈시였다. 노교사는 교장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는 것으로 발언을 끝냈다.
“교장이라는 것이 별거요? 외부에 대해 학교를 대표하고 예산이나 많이 따오도록 노력하는 게 교장이 할 일이지 교사 업무에 일일이 간섭하여 심지어 수업하는 교실에 쥐새끼 풀방구리 드나들듯 드나들며 무례를 범하는 것이 교장이 할 짓이오? 앞으로는 주의하시오!”
너무 뜻밖에 당한 봉욕이라 상규 씨는 한마디 대꾸도 못 했다. 그는 나중에 노교사의 발언을 중간에 잘라 버리고 맞받아치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했지만 사실 그때는 어리벙벙해서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노인의 목소리가 어찌나 카랑카랑하고 매서웠던지 옛 상사가 나타나 꾸짖는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였으니까.
이렇게 꼼짝없이 당해 심술보가 부풀 대로 부푼 상규 씨는 여러 날 분을 삭이느라고 머리가 다 벗겨질 지경이었다. 이왕 망신당한 바에 사정 두지 않고 마구 해대고 싶었지만 이제는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을 교사들이 아닌 것 같았다. 사실 교무실은 그 사건을 계기로 전과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주눅들었던 분위기가 아연 활기를 띠고 고질적인 상명하달의 일방통로를 하의상달로 올라가자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돌아다녔다.
과연 상규 씨에게 망신살이 뻗쳤는지 그 사건이 있은 지 일 주일이 채 못 되어 폐품수집 건으로 이번엔 젊은 축들로부터 또 한차례 훈계를 듣고 말았다. 그 학교의 폐품수집은 폐휴지모으기였는데, 상규 씨는 형식에 치우친 새마을운동을 보다 내실 있게 한다는 취지 아래 폐휴지 대신 알루미늄 깡통을 수집하라고 지시했는데 ‘깡통’ 소리 낭자한 그 ‘깡통논쟁’을 소개하면 이러했다.
“휴지는 부피만 커 아이들이 들고 오기도 불편할 뿐더러 팔아 봐야 몇 푼 받지도 못하지 않습니까. 알루미늄 깡통은 발뒤꿈치로 콱 밟아 납작하게 찌그러뜨리면 일 주일에 다섯 깡통 가져오는 거니까 부피가 얼마 안 돼요. 필히 알루미늄 깡통이라야 합니다. 오렌지 주스 같은 양철 깡통은 소용없어요. 클라, 환타, 맥주 깡통 같은 것이라야지.”
교장의 이 지시는 당장 반대의견에 부딪혔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생물교사였다.
“그건 아무래도 곤란한 것 같은데요. 중산층 아파트촌에 있는 학교라면 그런 깡통이 많이 나오니까 그게 가능할 테지만 우리 학교는 워낙 변두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점 감안해서 많이도 아니고 일 주일에 일 인당 다섯 깡통으로 하자는 것 아니오! 다, 교사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집에 없으면 밖에서 수집해야지. 그것이 오히려 폐품수집의 의의를 살리는 올바른 태도요, 알겠소? 부존자원이 부족한 나라이므로 폐품이라도 버리지 않고 재생 활용해야 한다는 근검절약정신 말이오!”
상규 씨가 이렇게 상투적인 어투로 답변하자 젊은 교사 세 사람이 번갈아 일어나며 파상공세를 벌였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장선생님, 폐품의 재생활용 건이라면 별로 걱정할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알루미늄 깡통이 그중 값나가는 쓰레기라 우리 학생들이 줍지 않아도 착실히 수집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벌이로 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데 자칫 그들의 생업에 지장을 주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더구나 여학생들인데 설사 길거리에 빈 깡통이 뒹굴고 있다 하더라도 선뜻 주우려 할까요? 보나마나 가게에서 빈 깡통을 사오거나, 핑겟김에 돈 타다 콜라 사먹을 게 뻔합니다. 이러다간 근검절약이 아니라 오히려 못된 소비풍조를 조장하는 우를 범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건 조선생이 맞습니다. 깡통 수집한다 하면 당장 학부모로부터 항의 전화가 들려 올 게 틀림없어요. 그러한 사례는 강남의 어느 중학교에서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 학교에 제 친구가 근무하는데요, 그 학교는 중산층 아파트촌에 있어 빈 깡통 모으기가 훨씬 수월한데도 학부모로부터 항의 전화를 받고 중단했다는 겁니다. 아이들이 깡통 핑계 대고 콜라 사먹겠다고 자꾸 돈 달라는 거예요. 심지어 선생들이 코카콜라 회사로부터 얼마나 돈 받아먹었길래 그런 식으로 판촉활동을 벌이느냐는 비난까지 있었답니다. 환타도 코카콜라회사 제품이라는 겁니다.”
“정말 그래요 다른 것 놔두고 하필 코카콜라입니까? 코카콜라를 놓고 세칭 GI 문화의 첨병이니, 경제적 공세의 첨병이니, 뭐니 하는데 말입니다. 구강에 말초적 자극만 주는 무용의 식품, 우리의 풍속을 해치는 더러운 음료인 코카콜라의 빈 깡통을 놓고 우리가 이렇게 운운한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이렇게 무참히 공격당한 상규 씨는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너희들은 집안에 어른도 없는 개불쌍놈이냐! 그런 말버릇이 어디 있어!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 깡통을 가지고 침소봉대해서 교장을 능멸하다니!” 하고 소리지르긴 했지만 역시 망신은 망신이었고 그 계획은 결국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두 차례 연거푸 얻어맞은 상규 씨는 슬며시 교무실이 두려워졌다. 기왕에 벌인 일들은 추호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지만 앞으로 내놓을 새 계획들이 문제였다. 예산이 한정되어 있는 마당에 새로운 계획이라고 해봐야 기껏 아랫돌 빼다 윗돌 괴는 식의 허망한 것들뿐이었다. 하기는 가만있어도 중간치 평가를 들을 것을 공연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사람이 어디 상규 씨뿐일까. 뭔가 일 벌여 놓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미인 상규 씨는 얼마 후에 학생 명찰 건을 내놓았다가 파리한 약골 체질의 젊은 영어교사에게 봉욕을 당하고 말았다.
상규 씨는 학생들이 학교에서만 패용하는 아크릴 명찰을 달리 바꿔 볼 계획이었는데 그 착상이 매우 기발한 것으로 자부하긴 했으나 혹시 어떨지 몰라 교무실에 발표하기 전에 미리 영어과 선생들을 불러 자문을 구하는 형식을 취했다. 상규 씨는 득의만면한 웃음을 지으며 “여러분은 영어 전공이니까 다 알 테지만, 연전에 내가 미국 시찰 갔을 때 보니까 그곳 학교에서는 1, 2, 3학년을 프레시맨, 주니어, 시니어라고 합디다. 그렇죠?” 하고 말을 꺼내더니 명찰의 학년 표시를 그렇게 영문으로 바꿀 계획인데 어떠냐고 물어 왔다. 학교 개성을 살릴 수 있어 좋고, 영어 배우는 분위기에도 합당해서 좋고 다정다감한 여학생들인만큼 프레시맨, 주니어, 시니어 하고 발음해 보는 잔재미도 있지 않겠느나는 것이었다. 영어교사들은 역시 좁쌀이라 별거 다 생각하는구나 하고 시답지 않게 여기면서도 그렇게 불러서 의논해 주는 것이 전에 없는 태도변화라 대견스러웠던지 대개가 군소리 않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영어선생들에게 인정받은 상규 씨는 여간 기쁜 게 아니었다. 이제는 명찰 건이 아무도 탈 잡을 수 없는 기발한 착상임이 입증된 것은 물론 중2 수준도 못 되는 자기의 영어실력을 훨씬 사실 이상으로 선전한 소득도 얻은 것 같았다.
그런데 영어교사들이 나간 지 일 분도 채 못 되어 그 중 한 교사가 불쑥 다시 나타나는 게 아닌가! 그가 ‘쥐소동’ 때 그 반 수업 들어갔던 장본인이었다. 저놈이 그때 꾸지람 좀 들었다고 분풀이하려고 저러나? 그러나 젊은이는 의외로 말씨가 공손했다.
“저, 실은 여러 사람들 앞이라 말씀드리기 실례될 것 같아서 이렇게 혼자 들어왔습니다. 다롬아니라…….”
그는 입을 열긴 했으나 뭔가 켕기는지 뒷말을 흐렸다.
“오선생, 뭔데요? 얘기해 보시오.”
“그 명찰 건은 다시 한번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반대한다, 이건가? 하기사 무슨 일에나 반대 의견은 있게 마련이지. 그 정도 갖고 실례될 것 있나. 다들 좋다고 해서 결정난 일이지만 심심파적삼아 오선생의 반대 이유를 들어 봅시다. 하하하.”
상규 씨가 이렇게 빈정거리면서 큰 소리로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젊은이는 약간 질린 듯 어깨를 움찔했다. 심약한 기질인 모양이었다.
“그대로가 좋지, 영문으로 고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합니다. 그것은…….”
상규 씨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나꿔챘다.
“어색할 리가 있나. 다른 선생이라면 몰라도 영어선생이 영어가 어색해 보인다니, 거 알고도 모를 소릴세! 영어를 갓 배우기 시작한 우리 아이들 눈에는 오히려 신기하게 보일 텐데, 안 그래요? 장차 우리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은 맨 먼저 배우는 영어단어가 ‘프레시맨’ ‘주니어’ ‘시니어’가 될 거요. 애쓸 필요가 없이 그냥 덤으로 배우는 거지. 영어는 쉽게 배워야 되지 않겠소? 교과서만 가지고는 애들이 금방 싫증을 느낀다구. 우리 생활 주변에 영어단어가 오죽 많은가! 영문자 안 붙은 게 없잖아. 그것들이야말로 영어 학습에 좋은 동기유발이 될 뿐만 아니라 정말 살아 있는 영어학습교재들이지. 우리 아이들 교실도
그렇지 않소? 옷, 가방, 신발, 필통, 공책, 책받침 둥둥 영문이 안 쓰인 게 없는데 그게 다 영어 배우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시청각 자료가 아닌가. 내가 학년명을 영문으로 바꾸자는 것도 이런 영어학습 분위기에 일조를 하기 위한 것이야 영어를 처음 배우는 중학생들에겐 생활 주변의 살아 있는 영어로 동기유발시키는 게 절대 중요하다고 봐요. 실제로 구런 방법을 쓰는 영어교사들이 많다는 걸 들었소. 물론 오선생도 그러겠지만.”
그야말로 공자 앞에 문자 쓰는 격이었다. 젊은이는 아연실색하며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이내 표정이 일그러졌다.
“교장선생님! 정말 잘못 생각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교실에 득실거리는 그 쓰레기 영어들, ‘나이키’니 ‘프로스펙스’니 ‘아식스’니 ‘아디다스’니 하는 유명 상표들이 병균처럼 퍼뜨리는 저질 영어들은 마땅히 교실에서 추방해야 옳지, 도리어 그걸 배우라니요? 영어공부는 교과서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런 저질 영어는 우리 아이들이 배울 영어가 아니에요!”
젊은이의 말투가 ‘프로스펙스’가 ‘프로섹스’로, ‘아식스’가 ‘아섹스’로 들릴 지경으로 거칠어지자 상규 씨는 화를 불끈 내면서 대들었다.
“뭐여? 교과서만으로 영어가 충분하다니! 그럼 회화는 안 가르쳐도 돼? 무슨 소릴 하나? 정말 영어교육 망칠 소리 하네, 이 사람! 그럼, 자넨 교과서만 가르치고 교과서 외에 회화교육을 전혀 안 가르친다는 고백이군, 그래!”
“왜 안 하겠습니까? ‘영어듣기’ 평가가 고입 시험에 필수로 되어 있는데…… 그러나 좋아서 가르치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필요한 것은 글영어이지 말영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회화가 필요없다니! 씨도 안 먹는 소리 작작 해! 아니,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하는데 영어 십 년에 말하는 것이 미국 거지만도 못해서 되겠어? 그게 영어교육이여? 엉?”,
이때 젊은 교사가 눈을 부릅뜨면서 도전적으로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미국 거지는 미국인이지만 우린 미국인이 아니에요! 한국인이 미국말 못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요. 제 말 끝까지 들어 보세요. 그 동안 글영어만 해도 우리에게 과중한 부담이었어요. 이제 말영어까지 짊어졌으니 그야말로 안팎 곱사등이 이중고 신세가 아닙니까. 사회에 나와서 영어회화가 필요한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됩니까. 천에 한 사람, 백에 한 사람, 극히 미미한 숫자에 불과한데 어째서 만인을 대상으로 무차별로다 회화교육을 시키는 겁니까. 정말 그런 교육력 낭비가 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낭비에만 그치는 게 아니죠. 언어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예요. 영어에 의한 오염은 자라는 이세를 정신적 무국적자로 만들어 버릴 공산이 커요. 그래도 글영어는 나은 편이죠. 후진국에서 영어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말영어가 아니라 글영어예요. 글을 통해서는 바람직한 선진문물이 들어올 수 있지만 말을 통해서는 민족혼을 좀먹는 저들의 저급 문화, 저질의 풍속이 들어와요. 아니, 벌써 들어와 있지 않아요. 우리 주변 도처에 그 얼마나 쓰레기 영어, 저급한 양풍이 범람하고 있습니까. 88에 세계 각처에서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이러한 국적불명의 삶의 모습을 보고, 또 유창한 영어회화를 듣고 과연 무엇을 느낄까요? 그런 현상을 과연 선진이라고 불러 줄까요? 영어는 수단은 될지언정 목적 그 자체는 아니잖아요.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세상, 대학입시에서 국어보다 영어를 더 높게 배점 매기고 있는 게 우리나라예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제가 명찰 건에 반대하는 것은 다름아닌 여기가 미국이 아니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이렇게 단숨에 총알같이 쏘아붙이고 난 젊은 교사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상규 씨는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반박할 어휘가 그에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외마디소리라도 버럭지르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맥이 빠져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앞에 앉은 젊은이는 그의 천적이었던 것이다. 상규 씨가 살아온 전 생애를 부정하는 천적.
“교장선생님, 죄송합니다. 너무 당돌하게 말씀드려서…… 그러나 명찰 건은 반드시 철회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고 직원회에 발표하시면 금방 제가 한 말과 조금도 다름없는 말로 선생님을 공박할 교사들이 여럿 생길 겁니다.”
충고인지 위협인지 젊은이는 이렇게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말을 남기고는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영어교사의 발언을 곰곰이 씹으며 한참 생각에 잠겼던 상규 씨는 갑자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그자의 과격한 언사는 일 년 전 두 여대생의 축제용 티셔츠에 씌어 있던 ‘민족과 현실’ 바로 그것이고 ‘깡통사건’ 때 벌떡벌떡 일어났던 그자들도 모두 그 한통속이 분명했다. 과격과 급진, 그것은 결코 그냥 넘어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교장 앞에서 그런 과격한 내용의 발언을 할 정도라면 같은 말을 학생들에게는 수십 번도 더 했을 것이다. 얼마나 불온한 작태인가! 바로 그것, 저 젊은것들을 침묵시키는 길은 안보적 차원에서 문제삼는 것뿐이었다.
그 후 열흘쯤 뜸을 들이던 상규 씨는 어느 날 점심시간에 느닷없이 교무실에 비상을 걸어 회의를 소집하고는 흥분된 어조로 비장의 각본을 연출했다.
“잘 들으시오! 지금 막 한 학부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소. 어느 선생이 학생들 앞에서 우리와 혈맹관계에 있는 우방을 헐뜯는 소리를 했다는 것이오. 그 내용을 들은즉, 과연 우리 선생이 그런 황당한 소릴 했을까 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어요. 그 학부모는 그런 위험한 선생한테 어떻게 자식을 맡기겠느냐고 노발대발하면서 교장은 교사가 수업 중에 무슨 짓 하는 줄도 모르고 놀고만 있느냐고 합디다. 그것 보시오! 내가 정말 쥐 풀방구리 드나들듯 교실출입을 않게 생겼나. 이것은 실로 중대한 문제, 안보차원의 문제란 말이오! 설사 본인은 대단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린 학생들에겐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는 거요. 하여간 그 학부모가 딴 데 전화 걸지 않고 학교로 했으니 망정이지, 정말 큰일날 뻔하지 않았나! 나는 문제의 그 선생이 누군지, 그리고 무슨 말을 했는지를 알고 있소. 그 선생은 자숙하는 뜻에서 내가 부르기 전에 오늘 퇴근시간 안으로 필히 내 방으로 찾아 주시오. 이번만은 더 문제삼지 않고 본인의 얘기를 듣는 것으로 끝낼 작정이오. 별거 아닌 것이 침소봉대되었을 수도 있으니 얘기해서 시원하게 풀어 버립시다. 만약 오늘 중으로 찾아오지 않으면 부득불 문제삼을 수밖에 없으니 명심하시오.”
‘별거 아닌 말이 침소봉대될 수도 있다’는 미끼에 뜻밖에 대어 여러 마리가 결렸으니, 그날 오후 중에 교장실을 찾아온 교사는 그 영어교사를 포함해서 모두 세 명이었다. 상규 씨는 따로따로 찾아온 그 교사들에게 한참 이야기를 시켜 듣고 난 후 다음과 같이 똑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문제가 된 사람은 자네가 아닌데…… 자네도 그런 말 했다면 앞으로는 각별히 언동에 조심해야겠어.”
(『아스팔트』, 창작사, 1986)
2016년 4월 30일 읽음
348 현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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