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雪)
눈
김병연(金炳淵, 1807~1863)
천황씨가 죽었는가 인황씨가 죽었나
온 산과 나무가 상복을 입었네
만약에 내일 아침 해님이 조문 오면
집집에서 처마마다 눈물을 흘리겠네
天皇崩乎人皇崩(천황붕호인황붕)
萬樹靑山皆被服(만수청산개피복)
明日若使陽來弔(명일약사양래조)
家家檐前淚滴滴(가가첨전루적적)
많은 사람이 한시를 어렵게 생각한다. 사실 그렇기도 하다. 한시뿐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나라건 원래 문학에는 약간 폼을 잡는 경향이 있다. 시인들의 자신의
지식과 생각의 깊이를 정제된 언어로 표현해거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다 조선
시대에는 한글을 언문이라 비하하며 주로 민중이 사용했고 공식 문서에는 한자
를 썼다. 지배층은 사적인 편지나 일기도 한자를 사용했다. 김삿갓이라 불렸
던 김병연은 딱딱한 이미지를 가진 한시에 민중의 정서를 담았다. 지식인의 어
려운 문학이 아니라 가난하지만 정 많고 한 많은 민중의 현실을 반영했다. 쌍놈
과 양반, 한글과 한자가 뒤섞이는 19세기 조선의 아이콘이 바로 김삿갓이다.
[작가소개]
김병연[ 金炳淵 ]
출생-사망 : 1807 ~ 1863
본관 : 안동
호 : 난고
본명 : 병연
속칭 : 김삿갓, 자 : 성심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경기 양주
주요저서 : 《김립시집》
조선 후기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이다.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고도 부른다. 아버지는 김안근(金安根)이며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의 의해 집안이 망하였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다.
그러나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 익균(翼均)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계속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영월군 태백산 기슭에 있으며, 1978년 그의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에 시비를 세우고, 1987년에는 영월에 시비가 세워졌다. 작품으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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