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화사
용화사 법당 상량문』에 의하면 용화사는 1902년 고종의 비인 순빈(淳嬪) 엄(嚴)씨의 명에 따라 청주군수 이희복(李熙復)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현재 용화보전과 석불 보호각에 봉안되어 있는 7존불을 봉안한 내용과 절 이름의 유래에 대한 내용이 함께 전한다.
엄비가 1901년 어느 날 일곱 미륵이 각각 무지개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이에 엄비가 절을 하니 일곱 미륵은‘우리는 청주의 한 늪에 있는데 어려움에 처해 있다. 절을 짓고 구해 달라’고 하였다. 이에 청주의 지주(知州) 이희복(李熙復)에게 명하여 늪 속에 빠져 있던 불상 7위를 찾아내고 상당산성(上黨山城) 안에 있던 보국사(輔國寺)를 옮겨 절을 짓고 용화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용화사는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의 건강과 축복을 비는 원찰이 되었다.
창건 당시의 사찰규모는 미륵전 15칸, 산신각․칠성각을 합하여 3칸, 설교전 15칸, 행랑 4칸 등으로 비교적 큰 규모였다. 그러나 1907년 재판소 지부로 잠시 사용되기도 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 때 불에 타 버리고 말았다. 그 뒤 노천에 방치 되다시피 했던 칠존불을 1972년 10월 신도들이 시주하여 미륵보전을 중건하고 다시 그 안에 봉안하였다.
1985년에는 관음전을 지었으며, 1989년에는 범종루를 지었다. 그리고 1996년에는 미륵보전을 용화보전으로 고쳐 짓고 아울러 팔각오층석탑을 조성하였다. 1999년에는 적묵당을, 2006년에는 석불 보호각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용화사 범종루
용화사 입구
용화사 관음전과 종무소
용화사 적묵당
용화사 팔각구층석탑
용화보전 앞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용화보전과 같이 1996년에 세워졌다. 탑은 팔각 모양의 지대석 위에, 팔각모양의 2중 기단을 쌓았으며, 그 위에 팔각의 탑신과 옥개석을 5층으로 쌓았다. 기단에는 각 면에 사천왕과 주악비천이 조각되었고, 초층 탑신에도 역시 여래좌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옥개석의 처마 끝에는 금동풍경을 달았는데 바람이 불 때면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용화사 수조
용화사 용화보전
용화보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로, 1972년에 지은 콘크리트 법당을 헐고 199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래서 밖에서 보면 2층 규모이지만 안에는 위로 뚫려 높은 천장을 하고 있다. 건물의 정면에는 「용화보전(龍華寶殿)」과 「삼불전(三佛殿)」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으며, 외벽에는 양 측면과 뒷면에 미륵불이 도솔천에서 내려는 장면, 수기를 받는 장면, 지상에서 3회 법회를 하는 장면 등과 원광법사가 화랑들에게 세속오계를 가르치는 장면, 익산 미륵사에 미륵이 출현하는 장면, 용화정토의 모습,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성불하는 삼국유사의 이야기 등이 돌아가면서 그려져 있다.
용화사 석불장군
보물제 985호
5좌(座)의 불상과 2(座)의 보살상으로 되어있는 이 석불들은 모두 거대한 불상이라는 점이 주목되는데 최고 5.5m, 최저 1.4m이다.
조선말 엄비(嚴妃)의 꿈에 청주에서 7체석불(七體石佛)이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자, 엄비가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니, 청주 서북쪽의 냇가에서 이들 석불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현재 용화보전에는 이 칠존불 가운데 삼존불만 봉안되어 있다. 먼저 중앙의 석조여래입상은 칠존불 가운데 가장 큰 불상으로 하체 일부가 결실되어 부분적으로 보수를 해 놓았다. 특히 이 석불의 머리 위에 솟아 있는 상투 모양의 육계가 유난히 큰 편이다. 그리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신체는 전체적으로 양감이 풍부하며 가슴 부위에 卍 자가 양각되어 있다. 왼쪽의 석불입상은 용화사 칠존불 가운데 두 번째로 규모가 큰 불상으로, 나발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가 표현되었고, 이마에는 백호가 있다. 상호는 원만하나 두 볼은 두툼하여 살이 찐 듯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 밑으로 물결처럼 흘러내린 옷주름의 표현이 특이하다. 수인은 왼손은 아래로 내렸으며, 오른손은 어깨 밑에서 손가락을 오무린 채 밖으로 향하고 있다. 특히 뒷면에는 거대한 나한상이 조각되었는데,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른쪽의 석불입상은 나발의 머리 꼭대기에는 반구형의 커다란 육계가 있고 이마에는 백호가 있다. 방형에 가까운 얼굴에는 반원형 눈썹과 반쯤 뜬 듯한 두 눈, 입술 위에는 인중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수인은 왼손은 가슴 아래에서 약합과 같은 물체를 받들었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보병을 잡고 있어 특이함을 보여준다.
이 칠존불들은 모두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 입상과 좌상으로 얼굴과 세부기법, 특히 옷주름 표현과 손모양 등을 감안할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용화사 전각
용화사 부자재 석
용화사 전경
용화사 찾아가는 길
중부고속도로 서청주IC를 나와 좌회전하여 계속 직진한다. 서청주교4거리, 봉명4거리와 흥덕사지입구 등을 지나면 흥덕4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고가도로를 오르지 말고 바깥 차선을 따라 고가 밑으로 난 길을 가면 흥덕주유소가 나온다. 그러면 이 주유소를 끼고 우회전 하여 400m 정도 가면 용화사에 닿는다.
첫댓글 용화사.
달랑 돌부처만 있던 곳,,,,법당 신축후에는 한 번도 못 갔으니 어디 고향땅이라 할까?
보광 형님 생각이 나는군요..여기서 충청도 번개도 한번 했었는데..전화나 한번 해봐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