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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다해 12월4일 금요일 [(자)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수도회] 믿음에 뒤따르는 자유와 해방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이사 29,17-24
† 복음 마태 9,27-31
◈ 오늘의 묵상
“다윗의 자손이시여!” 하면서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러
옵니다. 메시아 대망 사상에 따라 “다윗의 자손”은 이스라엘이 오래
전부터 기다려 온 메시아를 가리키는데, 평범하게 길을 가시는
예수님께서 바로 그분이심을 그들은 알아봅니다. 오늘 독서 말씀대로,
귀먹은 이들이 듣게 되고 눈먼 이들이 보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완성을 나타내는 표지이기에, 그분께서 다윗의 자손 메시아시라면
자기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요한이
예수님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도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 하고
대답하셨습니다(마태 11,2-6 참조).
이제 더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이미 성취되고 있습니다. 대림 시기에
우리는 이미 오신 그분을 기억하고 장차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눈멂, 우리의 가난함, 우리의 어리석음, 그 모든 것은 다른 어떤
이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됩니다. 그분을
알아보았던 두 눈먼 이들처럼,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오직 그분께만 매달리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 매일 미사 -
◈ [인천] 믿음은 마음의 눈으로
2015년 다해 12월4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제1독서
<그날, 눈먼 이들의 눈도 보게 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9,17-24
복음
<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7-31
어떤 청년이 새벽 6시에 집을 나서서 직장으로 향합니다. 집에서
직장까지의 거리가 멀어서 2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전철로 이용해서
다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보니 아침식사를 거르기가 일쑤입니다.
더군다나 박봉이기에 늘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이 월급으로 어떻게
돈을 모아 결혼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니 절망에 빠집니다. 이런
상태로 직장에서 기쁘게 일할 수 있을까요?
어느 날, 친구들과 만나서 술 한 잔 기울이면서 이런 자신의 비참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너는 직장이라도 있잖아. 나는 매번 이력서를 내도 받아주는
회사가 없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더랍니다. 내가 일할 공간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안에서
내 꿈을 펼칠 수도 있는데,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다보니 가지고 있는
것도 제대로 누리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갖다보니 직장에서의 모습이 바뀌었습니다. 열심히 업무를
하게 되었고 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지요. 이런 그를 보고 직장
상사에게 열심히 일을 한다고 칭찬받고, 그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관점으로 객관적으로 자신의 현실을 평가했었고 그래서
절망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관점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자기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었고,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됨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많은 이들이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 절망을 봅니다. 그러다보니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이런 불행은 자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의 사람들, 즉 가족, 친구, 직장 동료들에게도 전달되어
불행의 모습을 체험하게 만듭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눈먼 사람 둘이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표징을 직접 보았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치유의 기적을 직접 보았지만 믿지 못해서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눈이 멀었지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나의 두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내 귀로 들었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마음의 귀로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저 너머의
희망을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떤 믿음을 원하고
있었을까요? 혹시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만을 믿음으로 내세웠던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출생에 대해 그 사람보다 내가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이광호).
눈이 많이 왔습니다.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언젠가 어떤 부부와 이야기를 하다가 아내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그이가 어제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왔는데 얼마나 코를 심하게
골고 또 이를 가는지 통 잠을 자지 못해서 지금 너무 피곤해요.”
그런데 이 말에 남편은 곧바로 반박을 합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물 좀 마시려고 중간에 깼는데, 당신 코까지 골면서
잘만 자던데?”
과연 아내는 잠을 잘 잔 것일까요? 아니면 아내의 말처럼 못 잔
것일까요? 남편이 보기에는 잘 잔 것처럼 보이지만, 남편을
신경쓰다보니 사실은 밤을 꼬박 샌 것처럼 아침에 일어나도 개운치가
않은 것입니다.
불안, 부정적 생각이 자리를 잡으면 편할 수가 없습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느끼는 감정은 평소의 편안할
때와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그런
감정을 거짓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그리고 사랑으로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서 생활한다면 과연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그리고
함께 하지 못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하느님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시며 함께 해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오늘 강의하러 호주에 갑니다. 사진은 제가 갈 호주에 있는 한인성당.
◈ [수도회] 믿음에 뒤따르는 자유와 해방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5년 다해 12월4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마태 9,27-31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마태 9,30)
믿음에 뒤따르는 자유와 해방
이사야 예언자는 해방을 가져다주는 메시아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라.”(29,18-19)
예수님께서는 가혹한 고통 중에 있는 소경 둘을 보게 해주시면서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 시대, 구원의 때를 알리십니다. 그분은 치유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인 ‘다윗의 아들’로 온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유다교 지도층을 소경이라 지적하십니다(23,16-26). 여기서 유다
지도층 인사들도 믿음으로써 눈을 떠야 함을 가르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눈먼 사람 둘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 그들은 집 안에까지 따라
들어가 예수님께 다가갑니다(9,27-28).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믿었으며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가진 이들을 보게 해주십니다. 두 소경은 눈을 뜨게 되어 믿은
것이 아니라 믿었기에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소경들은 보게 해달라고 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청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삶의 묶인 매듭을 푸는
가장 강한 힘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눈먼 이들은 확고한 믿음의 바탕
위에서, 눈을 뜨게 되는 신체적 치유 그 이상을 희망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모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으로부터 눈먼 소경으로 질타를 받았던 유다의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와 같은 이들은 누구일까 생각해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무관심하고, 고통 받고 소외된 이들과 무관하게 살아가며,
사회 불의 앞에서 꿈쩍도 않고, 사회적 약자들을 무시하고 냉대하며,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사람이나 사회, 교회공동체가 바로
소경이 아닐까요? 이들을 보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눈을 뜬 사람이겠지요.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는 이미 오셨고 또 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다양한 차별과 불평등, 배척과 탄압, 빈곤, 생명 경시,
자본의 우상화에 따른 인간 존엄성의 상실이라는 가슴 저린 현실 안에서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까? 내 이익만 챙기고, 내 앞의 일에만 몰두하며,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절규에는 나 몰라라 하는 눈먼 소경은 아닌지
살펴야겠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은 그분의 자비를 부르고, 하느님의 자비 안에 머물 때
우리는 다른 이들의 아픔과 불편, 소외와 상실, 억울함과 의로운 분노를
보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생명을 회복시켜주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눈뜬 소경으로 살아가는
것을 수치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이요 모든 선(善)이신 하느님을 굳건히 믿음으로써 세상
한복판에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형제자매들 안에서 예수님을
알아보는 자유와 해방을 체험하길 기도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다해 12월4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 (이사 29,18)
복음, 기쁜 소식이란 어떤 걸까요?
귀머거리가 듣게 되면 얼마나 기쁠까요?
눈먼 이가 보게 되면 또 얼마나 기쁠까요?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해요.
메시아가 오면 그리 된다고 해요.
사실 예수님이 오셔서 그런 일을 몸소 보여주셨지요?
성탄은 바로 구세주 다시 우리에게 오시길 기다리며
그분을 맞이하는 축제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잘 못 알아듣고
내가 하느님 나라를 못 보고 있다면 성탄을 기다리면서
내 귀를 열어 주시고 내 눈을 보게 해 주시도록 청해야 하지 않을까요?
에이 그게 가능할까요?
그럼요.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 이에게는 그런 축복이 온다고
오늘 복음이 증명하고 있잖아요?
이번 성탄 선물은 잘 듣고 잘 보는
귀와 눈을 주시도록 청해 보면 어떨까요?
그보다 더 기쁜 소식이 없겠지요.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다해 12월4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마태오 9,27-31)
하얀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믿음이 깊을수록 선명해지는 우리의 가난한 모습입니다.
믿음은 가난한 우리의 아픔을 견딜 지혜를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주님뿐임을 믿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이끄실 분 또한 주님뿐임을 믿습니다.
주님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예, 주님!"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진심으로 믿습니다.
예수님 앞에 서면 다시금 우리가 믿음이 필요한
피조물임 겸손되이 깨닫게 됩니다.
믿음의 기쁨이 생명의 기쁨이고 믿음의 의미가
생명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믿음은 올바른 전환점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자신과 화해하는 바탕이 믿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고통을 치유하는 유일한 치유제임을 믿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진리또한 주님을 향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시기는 우리를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대림 제1주간 금요일
2015년 다해 12월4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 마태오 9,27-31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습니다. 드라마는 27년 전
한국 사회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바쁘게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전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잠시, 추억 여행을 하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응답하라는 1997년, 1994년에 이어서
1988년까지 제작 되나 봅니다. 누군가 이야기 했습니다. ‘시간이 햇빛을
만나면 역사가 되고, 시간이 달빛을 만나면 신화가 된다.’ 일상의 삶에서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를 말하고 싶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실의 아픔을 이겨내고, 새로운 꿈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직선의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회상을
통해서 순환하는 시간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전을 읽고,
지나간 사진을 들춰보고,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1988년은 변화의 시간이었습니다. 3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를 하는 해였기 때문입니다. 축제의 시간이었습니다. 88 올림픽을
볼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도약의 시간이었습니다. 복학할
때까지 ‘돈보스코 청소년 센터’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였고, 틈틈이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1988년은 어떤 의미였는지요?
이사야 예언자는 ‘응답하라 다윗의 시대!’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강대국에 의해서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를 떠나야 했던 백성들입니다.
성전은 파괴되고, 율법은 지킬 수 없고, 희망이 없던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는 백성들입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던 시대를 이야기 합니다.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이 다스리던 시대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한 시대를 아름다운 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눈이
먼 사람은 보게 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되고, 깊은 골은
메워지고, 만군의 빛이 비추어지는 때입니다. 그래서 참된 자유와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는 날을
기억합니다.
복음에서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현실이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묶인 이는 자유를 얻게 되고, 갇힌 이는 해방을 맞게 되고, 눈이 먼
사람은 보게 되고, 아픈 사람은 치유되고, 굶주린 이는 배불리 먹게 되는
세상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응답하라 하느님의 나라’를 이야기 했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표징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로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의 눈’을 뜨라고 하십니다. 신앙의
눈을 뜨면 새로운 것들이 보일 거라고 하십니다. 신앙의 눈을 뜨게 되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 인내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기다림은 지루함이
아니라 설레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좌절과 절망 속에서, 시련과 아픔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에게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때, 기다림은 나와 만나는 모든
것들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천당에서 왔다가 지옥으로 가버려요.
2015년 다해 12월4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품안에 있을 때가 귀엽지 커버리면 미워지고 멀리 가버리고 맙니다.
개구리는 올챙이 적 생각 못해도 알 낳으려면 그런 자리 찾아갑니다.
장어도 연어도 크면서 멀리 갔다 알 낳으려면 돌아와 낳고 죽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건데 자식 덕 보려고 맡기고 가지요.
눈을 떠 봐봤자 허무임을 깨닫고 아무 말 말고 돌아오길 바라셨고요.
예수님은 초심의 그 자리에서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마태오 9,28)”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그들의 눈이 열렸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다해 12월4일 대림 제1주간 금요일
<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 마태오 9,27-31
그들의 눈이 열렸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생각지도 않게 소망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정성과 사랑을 쏟았을 때 더 큰 기쁨을 누리게
되고 보람을 차지하게 됩니다.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다른 것과 비교하니까 행복은
사라지고 맙니다.
어떤 눈먼 사람 둘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눈을 뜨는 것입니다. 눈을 뜨려면 눈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들은 마침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9,27)하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입어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눈을 뜨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어 주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믿음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매일의 묵상을 통하여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의
성장을 이루고 마침내 주님의 능력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그림은 밀라노의 어떤 백작의 요청에
따라 3년 동안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은 예수님께서 중앙에
앉아 계시고 제자들이 양 옆에 앉아서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처음그림은 예수님께서 오른손에 잔을 들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림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한 사연이 있습니다. 다빈치는 작품이 완성될 무렵에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대뜸 “다빈치, 여기
예수님께서 든 잔은 꼭 진짜 같은데” 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다빈치는 그림을 수정하였답니다. 진짜같이 보이는 잔을 지워 버리고
예수님의 팔이 가만히 탁자 위에 올라가 있는 지금의 모습대로 말입니다.
그것은 그의 믿음이 그렇게 했습니다. 결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나이가 43살
이었답니다. 저는 그 동안 무엇을 했나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돈도
벌어야 하고요, 취미생활도 해야 하고요. 친구도 만나야 합니다. 때 맞춰
여행도 해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하며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기도는 물론 미사도 소홀히 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보다도 세상 것을 즐기고 찾고 있으니 어찌 보면 우리는
눈뜬장님입니다. 육적인 눈 뿐 아니라 영적인 눈, 믿음의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9,39).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눈을 어루만져 참으로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영적인 시각을 회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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