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역 {代役}
김광한
청량리 역에서는 중앙선 열차가 종점이 됩니다.퍽 오래전의 이야기라서 요즘의 세태와는 조금 맛이 덜할 것입니다.80년대 초, 군부 사람들이 정권을 장악했을때 그분들이 눈에 가시같은 언론출판을 모조리 없앴습니다. 제가 근무한 잡지사는 그런 정치성향이 있는 것도 아닌 연예인들 등장 시키는 허드레 대중 잡지였는데 덤으로 없어졌지요. 그래서 한동안 실업자 생활을 이골나게 한적이 있습니다.그 당시 저는 가끔씩 청량리 역으로가서 중앙선 완행열차를 타고 목적지 없는 여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목적지 없다는 것은 열차안에서 만나는 사람, 말이 통하고 정이 가는 사람,쩨쩨하지 않고 화날 때 참지 못하고, 삿대질 하는 사람 객기 있고 남의 슬픔에 함께 울어주는,마음이 따뜻한 사람들과 술잔을 나누다가 마음이 맞으면 아무역에서 내려 그들과 또 한잔 걸치고 미래가 불확실한 만남 속에 정담을 나누다가 또 거슬러 올라가는 중앙선열차를 타고 오는 것 이지요.
그러니까 굳이 여행이라고 할것도 없지요.완행열차에는 경제적, 학식적 중하 사람들이 많이 타고 내리는데 잘만 하면 진국되는 사람과 대폿잔도 기울이는 행운을 잡을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서울,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등 여러 도를 골고루 통과하는 중앙선 열차는 무수한 굴을 빠져 나가는데 이때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 면 그 기분이 말할 수가 없지요. 곁에 말 상대가 되는 사람과 주거니 받거니 객기있는 말을 제볍 호기 있게하는 말들은 그리 생산성은 없지만 참 시간이 아깝게 재미가 있지요. 완행열차의 잡상인들도 남같이 보이질 않고요. 삶은 달걀 한개만 더 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내줄 수 있는 충청도, 경상도 사람들, 그들에게 가진 것은 없지만 물건보다 더 소중한 마음 씀씀이가 있지요. 그해 가을이었습니다.
안동에서 청량리 까지 가는 중앙선 열차를 타고 오는데 바로 제 옆자리에 어떤 늙수구레한 아주머니 (한참 늙어가는)가 걱정꺼리가 많은 얼굴로 앉아 계셨습니다. 그리다 곁의 내게 삶은 계란 한개를 제게 주면서 삼국지 같은 신세타령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럴때 서방이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꼬, 이년의 신세도..." 하면서 제게 슬슬 말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그 아주머니의 이야기 인즉, 외동 딸이 하나 있는데 서울로 돈벌이 간다더니 원주에서 술 집 접대부하다가 어떤 군인(하사관)과 눈이 맞아 오늘 결혼식을 올린다고 기별이 와서 부랴부랴 간다는 것이었습니다.아마도 부대 근처 술집에서 작부노릇을 하 다가 어떤 하사관과 정분이 나서 부대내에서 간단한 결혼식을 올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말이오,누구하나 그년 손잡고 데리고 나갈 화상딴지 없으 니...." 하면서 제 아래위를 유난히 훑어보는 것이었습니다.그 아주머니는 그것이 걱정이었던 것이지요..그리고 제게 어디서 내리냐고 그래서 제가 원주라고 그랬지요.원주는 제가 군대시절 있었어요."
60년대중반 원주 1군 사령부 근처의 통신부대에 근무한적이 있었지요. 그러자 그 아주머니가 반색을 했습니다. "그럼 아주 잘됐네유.사람하나 살려주는 셈치고 딸년 좀 데려 나가주세유"하면서 넝삿일에 거칠어진손으로 내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시죠" 제가 선선히 답하지자그 아주머니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그 딸이 무단 가출을 해서 동리에서 눈에나 누구하나 올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두어시간 후인 오전 12시에 원주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입고 나갈 옷이 문제였습니다.그래서 부대 근처의 세탁소에가서 세탁이 끝난 옷을 빌려입고 결혼식이 있다는 부대의 장교 식당으로 갔습니다.
옷이 맞질 않아서 금방이라도 뒤가 터질 것같아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체구가 왜소한 사람의 옷이라서 제게는 기장도 짧고 손이 올라가지 못할 아주 우스운 꼴이었습니다.결혼식은 오후 3시, 토요일 이었습니다.남의 옷과 남의 맞지 않는 구두를 신고 저는 그 아주 머니의 딸 삼촌 행세를 했습니다.마침내 오후 3시 정각, 주례는 중대장이고 신랑은 육군 하사, 물론 직업군인이었습니다.신부의 드레스가 어쩐지 어색해서 잘 보니 한군데가 뚫어져 있었습니다.장교 식당이라 구두를 벗고 신랑이 먼저 입장을 했는데 제법 체구가 늠름해서 믿음이 가는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양말 뒤꿈치를 보니 맨살이 보일정도로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양말이나 기어 신거나 아니면 새것으로 갈아신지... 저는 생전 처음 보는 신부를 삼촌인양 팔을 낀채 부대의 유일한 나팔수 가 부는 트럼펫 연주를 들으면서 입장을 했는데 엉덩이 쪽에서 실밥터 지는 소리가 빠지직빠지직하고 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신랑신부 양옆 으로 착검을 한 사병 둘이서 허니문을 만들고 있었고 그 사이를 빠져 나오는데 이번에는 북!하는 엄청난 소리가 엉덩짝에서 났습니다. 땀이 솟더군요. 이러다가 대망신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저는 마치 뒤마려운 사람처럼 엉덩이를 배배꼰채 간신히 위기를 넘겼 습니다
.빨리 끝났으면 싶었습니다.중대장이 절도있게 애국심이 곁들인 주례사를 간단히 마치고 신랑은 대답 대신 씩씩하게 충성!하고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결혼식은 끝났는데 중대장이 제 곁으로 오더니 귓속 말로 "옷이 적지요?" 하며 빙긋이 웃는 것이었습니다. 알고보니 그 옷은 체격이 작은 중대장의 사복이 었습니다.저는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 그러나 신랑 과 신부에게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제 책임을 완수해야하니까요. 신랑인 하사를 불렀습니다. 하사가 제 앞에 부동자세로 서있었습니다. "나도 군대시절 하사였네. 비록 일반 하사지만, 그리고 월남도 갔다 왔어.앞으로 내 조카 고생시키지 말게. 술 좀 덜마시고..."
그러자 그가 벽력같은 소리로 복창을 했습니다. "잘알겠습니다!충성!'
이번에는 신부를 불렀습니다. "네 어머니가 신신당부를 하는데 제발 딴 마음 두지 말고 잘 살아." 딴마음이란 속된 말로 고무신 바꿔신지 말라는 뜻이지요. "예, 삼촌." 그리고 예식장을 바쁘다는 핑계로 얼른 빠져 나왔습니다.이때 그 아주 머니가 따라오면서 "선상님 이렇게 고마울데가...뉘신지 알면 한번 이 은혜를 갚아야하 는데..." 하면서 속곳에 꼭 묻어둔 고약한 냄새가 나는 오천원 짜리 두장을 제 손에 쥐어주는 것이었 습니다.그 돈에서 생선 비린내가 났습니다.시장에서 좌판 생선장사를 하는 분 같았습니다. "얼마 안되지만 여비에 보태고 남는건 소주값이나 하시소복받을끼요" 저는 도로 드릴까하다가 성의로 생각하고 받아 넣고 6시 청량리 행 열차를 탔습니다. 그때 비가 내렸습니다.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리는 저녁, 웬일 인지 무척 기분이 좋았습니다.곁에 또 이런 분 없을까 두리번 거리다 가 하느님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뭐 잘못한 것은 없지요?' 열차는 서서히 청량리 역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지금 그 친구들 잘 사는 지 궁금합니다.벌써 40년이 흘렀으니 그분들에게도 생로병사가 있었겠지요
.그 늙수구레한 50대 아주머니도 아직 살아계신지... 산다는 게 다 그런 건데..가족이란 남들과 만나서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천당이란 어느 특정 구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는 착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것같습니다.
약력 1944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과대 국문학과 69년졸업 한국문인협회회원 2021년 9월 문예춘추 문학상 수상 2023년 12월 중앙대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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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보기 드문 좋은 일 하셨습니다. 천당은 사랑과 평화가 강물처럼
넘치는 착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는 말씀 새겨봅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