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성바오로 사제
이탈리아의 오바다 태생인 바오로 프란치스꼬 다네이는 부모의 신앙 유산을 물려받은 탓인지,
15세 때에 이미 까스텔라조의 자기 집에서 엄격한 고행과 보속을 행하였던 것이다.
1714년, 그는 터키인들과 사우는 베니스군에 입대하였으나, 기도와 보속생활에 이끌려 명예 제대를 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몇해를 은거하던 중,
1720년에 예수의 성명과 흰 십자가가 그려진 고난의 뺏지를 검은 옷에 다신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성모님께서 발현하셔서 검은 복장의 가슴에 심장이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 십자가와 예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수도복을 보여 주셨다고한다. 고통의 어머니 마리아의 신심이 깊었음.)
이때 그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교하는 수도회 창설을 명하셨다고 한다.
그의 환시가 올바른 사실임을 인정한 알레산드리아의 주교로부터 수도회 창설에 관한 허가를 받게 된 바오로는
40일간의 피정을 통하여 회칙을 초안하였다.
그는 자기 동생인 요한 밥띠스따와 함께 로마로 가서 교황청의 허가를 신청했으나, 처음에는 거절당하였지만,
1725년의 방문에서는 교황 베네딕또 13세로부터 수련자를 받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1727년에는 자신이 사제로 서품(교황 베네딕도 14세에게)되었다.
그들은 몬떼 아르젠따리오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규칙이 너무 엄격했던 탓으로 많은 수련자를 잃었다고 한다.
1737년에는 첫 수도원의 문을 열였고, 1741년에는 교황 베네딕또 14세로부터 개정 회칙을 승인받고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십자가와 고난의 맨발 성직 수도회"(예수 고난회)가
전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하였다.
바오로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초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 전역을 누비며 선교 여행을 하였고, 그의 설교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또한 그는 초자연적인 은혜로써 축복을 내렸고, 치유의 기적과 원거리에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기적 등이 나타났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설교가였다. 사도적 열성과 엄격한 극기에서 뛰어났다.
고난회의 최종 승인을 1769년, 교황 끌레멘스 14세로부터 받았다.
또한 그의 노력에 의하여 고난회 수녀들이 꼬르네또에 첫 수도원을 갖게 된 것이다.
3년 동안의 병고로 고생하시다가 로마에서 1775년 10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1867년 6월 28일 비오 9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