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햇살, 고흐를 다시 피우다
― 아르브뤼 인 고흐를 찾아서
제주를 여행한다는 것은 자연을 만나는 일이라 생각했다. 푸른 바다와 오름, 검은 현무암과 바람이 이 섬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조금 달랐다. 바다를 향하던 발걸음이 한 미술관 앞에서 멈추었다. 제주시 조천읍에 자리한 아르브뤼 인 고흐. 그곳에는 제주의 자연과 빈센트 반 고흐의 예술이 한 공간에서 조용히 어우러지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초록 식물로 완성한 고흐의 얼굴이었다. 살아 있는 이끼와 식물은 거친 붓질처럼 얼굴을 채우고 있었다. 생명을 잃지 않는 초상. 그것은 한 화가를 기념하는 조형물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시들지 않는 예술을 상징하는 듯했다.
건물 외벽에는 거대한 해바라기가 피어 있었다. 푸른 벽면 위에 활짝 핀 노란 꽃은 여름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해바라기를 바라보는 순간, 프랑스 아를의 들판과 제주의 햇살이 한 장면으로 겹쳐졌다. 예술은 국경을 모르고, 감동은 시간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했다.
전시장으로 들어서자 벽면에 적힌 고흐의 말이 발걸음을 붙잡았다.
“삶은 결코 슬프기만 한 것이 아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오래 마음에 남았다. 평생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사람의 언어였기에 더 깊게 다가왔다.
전시는 단순히 그림을 걸어 놓는 데 그치지 않았다. 영상과 빛, 음악이 함께 어우러져 관람객을 작품 속으로 이끌었다. 정지된 그림은 천천히 움직였고, 캔버스 속 풍경은 살아 있는 시간으로 되살아났다.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 안을 산책하는 경험이었다.
가장 오래 머문 곳은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앞이었다. 수없이 책에서 보았던 그림이었지만 눈앞에서 마주한 얼굴은 전혀 달랐다. 푸른 눈동자에는 절망보다 고요함이 먼저 깃들어 있었다. 세상은 그의 삶을 비극으로 기억하지만, 그림 속 그는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던 예술가의 의지를 품고 있었다.
벽면에는 그의 삶을 소개하는 연보가 이어졌다. 짧은 생애 동안 남긴 수많은 작품, 그리고 생전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시간들. 그는 성공한 화가가 아니라 끝까지 그리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그림보다 먼저 그의 삶에 감동하는지도 모른다.
한편에는 증강현실(AR) 체험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스마트폰을 비추자 평면 속 그림이 살아 움직였다. 기술은 예술을 대신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술을 더욱 가까이 다가오게 했다. 아이들은 신기한 눈빛으로 그림을 따라다녔고, 어른들은 잊고 있던 감성을 다시 꺼내 들었다.
전시장을 모두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니 다시 해바라기가 눈에 들어왔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꽃. 문득 고흐 역시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세상의 평가보다 자신의 빛을 따라 살았던 사람. 그래서 그의 그림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선명해졌는지도 모른다.
여행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일만은 아니다. 때로는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제주에서 만난 고흐는 화가 이전에 삶을 사랑하려 애썼던 한 인간이었다. 그의 붓끝은 밀밭과 별, 해바라기만 그린 것이 아니라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을 함께 그려 넣고 있었다.
미술관을 떠나며 뒤돌아보았다. 초록빛으로 만들어진 고흐의 얼굴은 여전히 환하게 서 있었다. 제주의 바람이 그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살아 있는 식물로 피어난 초상처럼, 예술도 사람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새잎을 틔우는 존재임을 그곳에서 배웠다.
그날 제주의 기억은 바다의 푸른빛만으로 남지 않았다. 한 화가가 끝내 놓지 않았던 붓과, 그 붓끝에서 지금도 피어나고 있는 희망의 색으로 오래도록 마음속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