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90
5월14일[부활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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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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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ydaCsNRUl0E
(한승주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100009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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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현존 방식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늘 아래 펼쳐지는 세상만사 모든 것은 유한하며 속절없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내내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만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끝도 없이 지루하게 반복되며, 언젠가 맞이하게 될 끝은 너무나도 허망하고 부질없습니다.
한때 목숨바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지던 가치나 이데올로기도, 영원불변할 것 같았던 불같은 사랑도, 매력적이고 찬란하게만 비춰지던 선망의 대상들도, 지극히 한시적입니다. 다 지나갑니다. 다 떠나갑니다. 다 우리 눈앞에서 사라집니다. 인간적인 것들, 세상적인 가치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인가 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고 목말라하는 영원성, 불변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복음 14장 16~17절)
10년, 30년, 50년이 아닙니다. ‘영원히!’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곧 떠나 가시지만 당신과 하나이신 분, 당신과 일심동체이신 분, 보호자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실 터인데, 그분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때로 우리네 인간 존재라는 것 ‘밤에 우는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어깨에 힘을 주고 내가 누군 줄 알아? 하고 외치지만 실상 우리는 말도 할 줄 모르고 그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우는 것뿐인 갓난아기와 같습니다.
어찌할 바 몰라 마냥 울고 있는 우리를 위해, 때로 어머니처럼 우리 곁에 앉아 계시며,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우리를 보살펴주시며, 우리를 양육해주시는 분이 바로 보호자 성령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대신해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켜주시기 위해 파견되신 분, 곧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누차 강조하신 바지만 조만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현존 방식으로 제자들 안에 사실 것입니다. 당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거룩한 성찬례 속에서 영원히 살아계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의 도움으로 인해 제자들은 곧 영적인 눈을 뜨게 될 것이고,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자신들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사이에 머무시는 동안에 제자들은 아무래도 스승님께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떠나신 후에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터득해야 마땅합니다.
제자들은 스스로 서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고, 제자들끼리 더 사랑하고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을 떠나보냄으로써 또 다른 예수님이자, 예수님의 분신과도 같은 성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뿐만 아니라 또 다른 특별한 선물을 주실 것인데, 그것은 평화입니다. 그분이 주실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로마 제국은 군사력으로 평화를 가져왔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각자가 충만하게 살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함께 성장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은혜로운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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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3J58UUcYgp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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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려 할 때 벌어지는 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 그 의미를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곧 당신이 우리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발을 씻어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라고 하시고, 그러면 아버지께서 “진리의 영”(요한 14,17)을 보내주신다고 하십니다. 이는 마치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사랑하여 방문하려고 하시니 성령으로 아드님을 잉태하게 하셨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느님은 성령님을 사랑하려는 사람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께서 아드님 안에 계시고 아드님이 아버지 안에 계신 것처럼,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됩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할 때 당신의 인사말과 함께 성령께서 엘리사벳에게 가는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 마니피캇을 부르며 찬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방식입니다.
하느님은 초월자이십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인간이 자신을 초월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수준에 있으면서 천상의 분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성체를 영할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제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분께서 그러한 도움을 주실 수 있으셨을까요?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에 계속 거름을 줄 이유는 없습니다. 성령님은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가지에 오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시지 않아 하느님의 계시를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원할 때, 초월자의 도움을 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도움이 나오는 것을 볼 때 그분을 뵈옵는 것과 같이 됩니다. 이는 마치 공포영화에서 인형이 움직이는 신기한 장면을 목격했는데 인형 안에 배터리가 없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의 그런 느낌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만나고자 하는 초월자는 사랑이신 하느님입니다. 가장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할 때 사랑이신 하느님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게 됩니다.
노숙인들의 친구 김하종 신부가 『사랑이 밥 먹여 준다』라는 책에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던 순간’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1992년 맑고 화창한 계절의 어느 날 당시 30대 초반의 신부님은 성남 상대원동과 은행동에서 가난한 이웃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도움을 주는 빈민 사목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생활이 어려운 장애인 한 분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어 종이에 적힌 주소를 보며 집에 찾아갔습니다. 도착한 곳은 아주 오래되고 낡은 집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창문도 없는 어두운 방에 흐릿한 전등 하나만이 보였습니다. 너무 어둡고 덥고 냄새가 나서 몇 초 동안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방바닥에 누워 있는 오십 대 아저씨를 발견했습니다. 아저씨는 이십 대 시절, 사고로 크게 다쳐 하반신이 마비되어 그때부터 30여 년을 이 지하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식사는 이웃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다주면 먹고 아니면 굶는다고 했습니다.
신부님이 “아저씨,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했더니, 방을 정리해달라고 했습니다. 방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었고 요강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냄새가 너무 심해 우선 요강부터 닦았습니다. 방 청소와 설거지를 한 후 다시 바닥에 앉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아저씨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안아드려도 될까요?”라고 물었고 아저씨는 흔쾌히 “네 신부님, 좋습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아저씨를 안는 순간 코를 찌르는 독한 냄새에 구역질이 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신부님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그 순간, 어떤 음성이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노력해 봅시다. 사실 나의 힘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지만, 그 일을 하려고 할 때 용서의 하느님, 기쁨의 하느님, 행복의 하느님, 생명의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기를 청했습니다. 그럴 때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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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이어령 선생님의 글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00 矯導所(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죄수들에게 물었답니다. "세상에서 누가 가장 보고 싶냐?"고 그랬더니 두 개의 대답이 가장 많았답니다. "엄마"와 "어머니"라는 답이. 왜 누구는 '엄마'라고 했고, 왜 누구는 '어머니'라고 했을까요? 둘 다 똑같은 대상인데. 그래서 또 물었답니다. 엄마와 어머니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랬더니, 나중에 한 죄수가 이렇게 편지를 보내왔답니다. "엄마는 내가 엄마보다 작았을 때 부르고,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보다 컸을 때 부릅니다!" 즉, 엄마라고 부를 때는 자신이 철이 덜 들었을 때였고, 철이 들어서는 어머니라고 부른다는 겁니다. 그런데, 첫 면회 때 어머니가 오시자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를 부여안고 "엄마~!" 하고 불렀다고 합니다. 세상 어디에도 엄마와 어머니의 정의를 명확하게 한 곳은 없겠지만,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불가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에 따르면, 엄마는 우리를 낳을 때 3말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시고, 낳아서는 8섬 4말의 혈유(血乳)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주민등록증 외에 또 하나의 증을 가지고 계십니다. '骨多孔症'” 오늘 Mother's Day를 지내면서 어머니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등급에 익숙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비행기도 등급이 있고, 기차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등급의 기준은 금액에 따라서 정해집니다. 우리가 먹은 음식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즐겨먹는 ‘한우’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등급의 기준은 금액에 따라 정해집니다. 등급은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됩니다. 등급의 기준은 성적입니다. 사는 장소에 따라서도 등급이 정해집니다. 아파트는 평수에 따라서 등급이 정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입는 옷도 등급이 있습니다. 등급의 기준은 상표에 있지만 역시 금액에 따라서 정해집니다. 우리는 ‘의식주’도 등급이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등급이 있다는 것은 장점이 있습니다. 경쟁을 통해서 문화와 문명이 발전하였기 때문입니다. 더 열심히 일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가 숭고한 이상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은 일당 독재에 의한 부정과 부패도 있었지만 경쟁이 없는 구조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저 역시도 높은 등급에 있는 사람이 부럽기도 했고, 그런 곳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세상의 등급은 그 기준이 ‘재물, 명예, 권력’에 있습니다.
신앙에도 등급이 있을까요? 저는 신앙에도 등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열매를 맺는 등급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지만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자라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길가에 떨어진 씨앗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지만 고통과 갈등 때문에 자라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자갈밭에 떨어진 씨앗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라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가시밭에 떨어진 씨앗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와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기름진 땅에 떨어진 씨앗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등급을 말씀하셨습니다. 등잔에 기름을 잘 준비한 처녀들은 신랑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등급을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맡겨준 달란트를 잘 관리했던 사람은 더 많은 달란트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주인이 맡겨준 달란트를 소홀히 했던 사람은 가진 달란트도 빼앗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한다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예수님 등급의 기준은 ‘회개’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회개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좋은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사람 아흔아홉도 좋지만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는 더욱 기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등급의 기준은 ‘회개와 실천’에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회개는 하지만 실천은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꾸짖었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회개는 받아들이지만 그들의 위선은 배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것을 실천으로 옮겼던 자캐오를 칭찬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등급의 기준은 ‘순명’에 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요셉 성인도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하였지만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최고의 등급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한다면, 회개한 것을 삶을 통해서 실천할 수 있다면 이제 나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참된 평화, 참된 행복, 참된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 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사람은 오너라.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 그렇다. 내가 곧 간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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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15-21: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는 성령에 관한 주제와 성령강림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의 친밀한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체험할 수 있는 기쁨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오늘 복음은 사랑의 주제로 시작하여 사랑의 주제로 끝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이 떠나시는 것에 대해 걱정할(14,1)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위로를 주시고 계시다. 즉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하셨다(21절 참조).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행동을 통하여 입증되는 참된 것이어야 한다. 즉 계명을 지킴으로써이다. 그분의 계명이 실현됨으로써 바로 그분이 현존하시며, 그분이 더욱 친밀하게 드러나고, 그분이 계신 곳에 ‘아버지’도 함께 계시기 때문에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21절). 그러므로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들을 더 사랑하고, 그분들의 뜻을 즉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우리가 너무 소홀히 해서, 그분과 신비로운 만남을 못 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 외에 또한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신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16절). 그러나 세상은 그 성령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17절). 요한복음에서 보다(theorèin)는 동사의 의미가 현상을 넘어 하느님의 현존 표지를 알아보는 의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세상은 이러한 자세를 갖고 있지 못하다.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과 같다. 빛을 보려면 먼저 눈이 치유를 받아야 하듯이, 세상이 성령을 받아들이려면 세상이기를 그쳐야 한다. 빛과 어둠의 대결에 대한 사건이 요한복음 전체를 덮고 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성령을 협조자(Paraclito)라고 한다. 이는 요한복음 사가 고유의 용어이다(14,16.26; 15,26; 16,7 참조). 본래는 변호사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신앙인들을 도와주는 기능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기운을 돋우어 주다, 협조하다의 의미가 생기게 된다. 그러기에 성령은 우리가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때, 위로해주고 보증해 주시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일을 계속하는 협조자이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친히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기신 사람들을 지켜주셨고(17,12) 그분이 떠나가시면 성령께서 그 양 떼를 보호해주실 것이다. 이제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충실할 수 있도록 내면으로부터 그들을 도와주고 위로해주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터득하도록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더 잘 깨달을 수 있게 한다. 사도들 역시 성령이 임하신 다음에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 오늘의 교회도 성령의 빛을 충만히 받아들여야만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된다. 그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진리이다. 즉 성령은 그리스도를 더 잘 인식시키고 더욱 강하게 그리스도와 더욱 친밀해진 새로운 현존을 생활화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18절) 하신다.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9절).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신앙으로 느끼는 것은 실제적 접촉과 같이 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항상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20절). 이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개입이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이루어지고 있다. 믿는 이에게는 하루하루가 모두 그날일 수 있으며 또한 그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부활 시기를 지내는 우리는 이제 진정, 세상에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래서 매 순간 우리의 삶이 부활을 체험하는 삶이 됨으로써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바라시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어떤 박해에도 굴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한다. 그 시련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진정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가장 참된 예배이며 진실한 찬미의 행위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1베드 3,18). 이 옛 신앙고백에서 파스카의 배경이 드러나고 있다. 그 성령은 우리의 부활도 이루어 주실 것이다(참조: 로마 8,11). 이 육적인 죽음과 영적인 삶 사이의 체험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매일매일 자신 안에서 되풀이하는 부활 체험이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설명해 주어야 할 ‘희망’의 신비이다. 사랑은 적개심이나 중상모략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에게 그의 삶을 통해 신앙인들이 지닌 “희망”(1베드 3,15)에 대해서 답을 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생활 전체로써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죽여 죽음의 어둠 속에 영원히 매장하려 했지만, 그분은 그 죽음의 감옥을 막았던 바윗돌을 굴려내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부터 희망의 선포자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듯이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봉사를 위해 자신을 무상으로 내어 주는 사랑의 힘에 맡길 수 있다면 불의, 부정, 폭력, 고문 그리고 죽음까지 모든 것이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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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15-21)
여기서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고아’ 라는 말은, 부모가 없는 자녀들, 스승이 없는 제자들, 목자가 없는 양들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뒤부터 부활하셔서 제자들(신자들)에게 나타나시기 전까지 제자들(신자들)은 실제로 고아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들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었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은 짧았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그런 막막한 처지에서 금방 벗어났습니다.
이 말씀은, 뒤의 16장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이 말씀들에서 ‘근심’이라는 말은 ‘슬픔’으로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인들의 ‘큰 슬픔’을 ‘큰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두려움을 행복으로 바꿔 주신 일입니다.
<박해자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눈엣가시 같은 예수님을 제거했다고 좋아했겠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에는 두려워했을 것입니다.(사도 2,43)
예수님께서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20)라는 말씀을 하신 일이 있는데, 온 세상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되는 은총이 주어졌는데도 그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기쁨을 거부하고 절망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고, 그 일 자체가 곧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같은 일입니다. 반대로, 그 ‘큰 기쁨’에 동참해서 함께 기뻐하는 것은구원에 동참하는 일이 됩니다.>
누구나 살다보면 몹시 외로워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우주 한가운데에서 혼자만 있는 것 같은 심정이 될 때, 그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나를 외면하더라도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지켜 주신다.”라는믿음이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밀어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 손길이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사랑’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외롭게 할 때가 많지만, 반대로 사람이 사람을 그 외로움에서 건져 줍니다.>
또 반대로, 누군가가 몹시 외로운 처지에 있음을 본다면, 그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기꺼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하고,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직접 그를 도와주실 때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 주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바라십니다.
내가 바치는 기도와 내가 실천하는 사랑이 곧 그 외로운 사람을 지켜 주는 주님의 보호와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고아 같은 처지를 혼자서는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는데, 함께 사는 방법이 바로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여기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는, “사랑한다고 말만 하지 말고”입니다.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는 말은, “진짜 사랑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이다.”라는 뜻입니다.
<‘보호자’라는 말의 그리스어 원문 단어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사랑과 계명의 관계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든지 사랑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고 실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일인데, 우리는 그 사랑을 우리의 ‘삶의 실천’으로 증명하고 증언해야 합니다. 사랑 실천 없는 복음 선포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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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보호자”로 옮긴 그리스 말 ‘파라클레토스’는 요한계 문헌의 고유한 낱말로, ‘곁에 있도록(보호나 변호를 위하여) 부름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파라클레토스’는 요한의 서간에서는 우리 죄를 변호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1요한 2,1 참조), 요한 복음서에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일컫습니다.(14,16.26; 15,26; 16,7 참조) 곧 예수님과 성령께서는 한 분이신 우리의 보호자 ‘파라클레토스’이십니다.
이제 아버지께 가시는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제자들에게 보내시겠다고 하신 “다른 보호자”는 성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다시 돌아오시어 영원히 함께 사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거나 만질 수는 없지만 그분을 잃은 “고아”가 아닌 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지금도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늘 희망을 품고 선하게 살라고 권고합니다.(제2독서 참조)
오늘 복음의 시작과 끝에서 ‘주님 사랑’과 ‘계명 준수’의 상호적 인과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게 되고, 계명을 지키면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1독서는 신앙과 동떨어져 이방인처럼 살던 사마리아인들이 주님의 복음과 계명을 받아들였을 때 넘치는 기쁨을 누렸고, 사도들로 말미암아 성령을 충만히 받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성령 안에서 사는 기쁨을 잊어버리면, 세상이 주는 안정과 평안에만 더 집착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려고 행동하는 이라야 부활하신 주님을 성령 안에서 매 순간 만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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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우연히 읽게 된 진은영 시인의 시 <청혼>의 일부이자 시집의 제목입니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마음이 참 따뜻해졌어요. "오래된 거리"가 주는 의미가 온전히 느껴졌기 때문이지요.
저의 오래된 거리를 떠울려봅니다. 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어린 시절의 거리. 추운 새벽 복사를 서기 위해 어머니의 손을 꼬옥 잡고 걷던 거리. 유학 시절 공부에 지쳐 터벅터벅 걸어가던 거리. 언제 다시 찾아가도 저를 따뜻하게 반겨줄 것 같은 오래된 거리랍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저를 사랑해 주는 가장 오래된 거리는 예수님이에요. 저의 허물도 부족함도 알고 계시지만 단아한 불빛을 밝히며 실제로 그 자리를 지키고 계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은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남기신 예수님의 마지막 약속들이에요. 그중 첫 번째는 '성령 파견에 관한 약속'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제자들이 필요한 모는 것을 알게 해 주실 것이고. 당신의 말씀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두 번째는 '제자들에게 다시 돌아오리라는 약속이에요. 비록 세상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예수님을 계속해서 보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들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치지 않는 사랑을 의미한답니다.
그런데 좀 의아하지 않나요? 성경의 제자들은 게으르고 예수님을 의심하며, 심지어 십자가 수난 앞에서 거짓말까지 동원해 당신을 모르는 척까지 하는데도 이렇게 소중한 약속들을 해 주신다니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계셨던 거지요. 결국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개인의 허물이나 한계가 아닌. 회개하고 돌아오는 모습이랍니다. 이렇게 주님은 마치 오래된 거리처림 제자들을 기다리시며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실망스러울 때가 있지요. 때로 우리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며 개인의 욕심을 추구하곤 하니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고요.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보이셨던 예수님의 시선을 기억하면 우리는 다시금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됩니다. 다만 명심할 것은 이러한 은총과 사랑이 거저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오래된 거리를 찾아가 추억을 확인하고 싶다면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듯, 우리는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 사랑을 고백해야 해요. 바로 그때 주님은 우리를 다시금 품에 안아주실 것입니다. 그곳에는 주님과 나의 추억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오래된 거리처럼 나를 사랑해 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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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김병운 야고보 신부님]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오늘 복음은 한 최후의 부분입니다. 만찬 때에 예수님계서 제자들에게 이르신 말씀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이 식사를 마치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제 되니.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홀로 남을 제자들이 얼마나 걱정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한 가지를 당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놀 복음으로 들은 말씀을 하시기 조금 전에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않게 합니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 (탈출 19.5ㄱ) 따라서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더라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과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명을 지키기가 정말 쉽지 않음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계명을 지키고 싶고. 계명을 지쳤을 때의 뿌듯함과 기쁨도 아는데, 세상의 시선과 기준에 영향을 너무 많이 받기 때문에 선뜻 계명을 선택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과 우리에게 한 가지롤 약속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바로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그분을 세상은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머무르시는 우리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세상과 달리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세상이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예수님께서는 사실 죽음을 이기고 살아 계십니다. 이는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영원히 삶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깨닫습니다.
성령을 모시면 그 전과 완전히 다른 차원을 살아가게 됩니다. 부활을 완전히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때 세상의 무게에 짓눌려 계명을 지키기 어렵던 문제가 해결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삶의 지향점이 달라지기에 기쁘게 계명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우리 안에 있는 성령께 집중하고,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주도권을 내어 드립시다. 또 그런 마음으로 전례적으로도 성령을 기다립시다. 성령을 사랑하며 성령의 도움으로 계명을 지킴으로써 에수님께 사랑을 드러내는 우리를 예수님께서는 디육 사랑하시며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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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주보》 주일의 말씀
[대구대교구 권병일 요한 신부님]
<신앙 공동체의 근원이신 성령>
개별적 인간은 공동의 목표를 완성하기 위해 공동체를 이룹니다. 예컨대 교육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 학교가, 치료를 위해서 병원이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 콩동체의 구성원들이 목표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 목표를 잃어버린다면 더 이상 그 공동체는 존속할 수 없게 됩니다. 학교가 교육의 장이 되지 않기나, 병원이 더 이상 환자를 낫게 할 수 없다면 그곳은 더 이상 학교도, 병원도 아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는 어떠한 목표로 만들어진 것일까요? 교회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부활이라는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구원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따라 살아가면,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드러내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는 각자 삶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살아갑니다.
하지만 최근 방송 미디어에 비친 신앙인들의 보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신이다'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드러난 여러 사이비 종교의 폐해들, 드라마에서 마치 악의 근원인 것처럼 그려지는 교회의 보습은 적어도 우리의 목표인 구원과는 멀어 보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보여주는 삶의 모범이 더 이상 세상 사람들에게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를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목표를 잃어버리면 그 공동체는 존속할 수 없다는 진리는 신앙 공동체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우리를 지켜 주시는 보호자를,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영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 신앙 공동체가 여타의 공동체와 다른 것은 우리의 목표를 깨우쳐주고 이끌어 주는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을 따라서 우리 신앙인은 옳은 것을 판단할 수 있고,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있으며,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가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우리 신앙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가 부활이라는 목표를 잊지 않도록, 우리 삶에서 신앙의 가치를 용기 있게 실천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 신앙을 깎아내리는 사람들 속에서도 우리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데 지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그분께서는 우리를 끊임없이 신앙의 삶으로 종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따라 신앙의 삶을 굳건히 살아가는 신앙인, 세상 사람들에게 보범이 되는 신앙인이 되도록 다 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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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부산》 강론
[부산교구 오창일 요아킴 신부님]
<성령은 사랑입니다>
주님 승천과 성령 강림율 앞두고 있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수난을 앞두고 세족레를 통해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긴 이별의 담화로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라는 새 계명과 성령 파견'이 주된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겐 당혹스러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 사건 이후 놀랍게도 제자들은 기억하게 하시는 성령의 도움(요한 14,26 참조)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기억해 냈습니다. 성령에 의한 제자들의 기억의 전달이 복음을 기록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이해와 체험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호자, '진리의 성령'을 약속해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16) 그분이 곧 '진리의 영'(요한 14.17)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 사실 자체를 잘 모르는 이도 있습니다. 더 확실하게 성령 체험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우리의 무관심이 결국 성령을 멀리 계신 분으로 만들고 맙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불같이 뜨거운 체험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이 함께 매일 살아가듯이 성령께서도 그냥 그렇게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성령을 체험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 줍니다. 제자들이 성령 안에서 기억해 낸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성령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성령은 사랑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이 모든 이름-보호자, 협조자, 동반자, 함께 있는 자-은 '사랑'이라는 말로 대치될 수 있습니다. 결국 성령과 사랑은 같은 말입니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 사람을 사람으로 불 수 있게 하는 마음의 눈이 됩니다. 그리고 이 눈율 통해서 우리는 더 넓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라는 이유는 남을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마음을 더욱더 크게 하는 은총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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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랑은 세상에 대한 책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사제는 독신입니다. 그래서 힘든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이라도 둘이 하나 되어 사는 게 더 힘들 걸.” 어느 노사제의 말입니다.
독신생활이나 결혼생활이나 제대로 살려 하면 어렵긴 마찬가집니다. 사실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합니다. 무인도에 산다 해도 따지고 보면 혼자 사는 게 아닙니다. 먹고 쓰고 입고 마시는 것,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고 그럴듯한 좋은 생각이라도 누구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익명의 수많은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사는 겁니다. 청구서는 받지 않았지만 갚아야 할 책무입니다. 사회적 책임일 수도 있지만, 한 인간으로서 피조물로서 갚아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주님은 온 인류공동체를 하나로 보시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갚아야 할 책무를 상기시키십니다.
1. 성자와 성부의 온전한 관여(關與)
심리학자, 스텐버그(Sternberg)는 사랑에는 세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열정과 친밀감 그리고 관여입니다. 처음 사랑하기 시작할 땐 열정이 치솟고, 시간이 지나면서 친밀감이 높아집니다. 생소하게 여겨지는 요소는 관여(關與)입니다. 헌신(獻身)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관여로 보는 것도 재밌습니다.
상대방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요구하고 참견하는 겁니다. 헌신을 전제로 한 관여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하라. 그리고 네 맘대로 하라”고 했는데 사랑에는 관여가 뒤따른다는 말로 들립니다. 이 관여는 사랑 초기에는 낮지만, 점차 높아지고 결혼 등을 통해 높아집니다. 부부는 서로의 삶에 깊이 관여하면서 나중엔 닮게 되나 봅니다.
성자와 성부는 서로의 삶에 관여하여 닮다 못해 온전히 하나가 되십니다. 성자는 성부의 염원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성부 역시 당신의 모든 것을 성자에게 넘기십니다. 성자는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는 필립보에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한 14,11)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첫마디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15절)입니다. 사랑한다면 내 말(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상거래 식 요구가 아니라 역시 사랑에 따른 관여(關與)입니다.
2. 예수님 방식의 사랑의 새 계명
사랑은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꼭 해야 하는, 그래서 계명입니다. 사실 사랑만큼 흔한 주제는 없습니다. 우리 삶은 온통 이런저런 사랑 얘기입니다. 주님은 이 사랑에 새 계명이라 이름 붙이십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보여준 사랑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요한 13,14)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결론처럼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고 하십니다.
이렇게 들립니다. ‘내 사랑에 응답하려거든 내 쪽이 아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고 내 양들을 돌보는 것이다.(요한 21장 참조) 배신자,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고 끝 간 데 없이 사랑해야 한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보여라.’(요한 13,33 참조)
이것이 당신 방식에 따른 새로운 사랑의 계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의 시작은 감미로울 수 있으나 마무리는 쉽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 속성상 고통을 감내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언제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마무리라면 마무리입니다.
새 계명, 사랑을 위해 주님은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선 우리를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세계로 접속(access)시켜 줍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주님의 그 사랑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삼위일체 사랑의 그 신비로 온 세상을 덮고자 하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요 깨달음의 영입니다. 또 다른 보호자 하느님이십니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
그날은 바로 성령이 임하는 그날입니다. “오소서 성령이시여! 주님의 그 사랑에 접속되어 끝 간데없는 사랑으로 나아가 사랑의 책무를 다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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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오남한 루카 신부님]
“사도들이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사도행전 8,17)
피부가 트면 무엇을 바르죠? 로션. 허면 우리네 마음이, 영이 트면 무엇을 발라야 하겠습니까? 성령을 바르십시오. 성령을 청하란 얘기입니다. 성령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느끼게 하며,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합니다. 영원히 살도록 하늘을 꿈꾸게 하고, 당장 죽을 것 같은 것을 살게 하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이제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 두고 떠나려 하니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이제 스승이 떠나면 제자들은 오합지졸이 될 것이고, 교회는 풍비박산이 날 것입니다. 당신의 업적도 말씀도 이제 끝장이 날 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도 없고 확신도 없는 제자들에게 보호자이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 다른 협조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라고.
성령은 그 자체로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능력이 시기에 약한 제자들을 강하게 해주셨으며 또 어리석은 그들을 지혜롭게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성령은 제자들이 어떻게 선교하며, 교회를 성장시킬 것인지를 직접 도와주셨습니다. 사실 성령과 함께라면 안 되는 것이 없고 또 못할 일도 없습니다.
믿는 이들은 그래서 성령의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늘상 성령을 청해야 하며 희망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 안에 성령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는 실로 기름 없는 자동차요, 알맹이 없는 빈 깡통과도 같이 생기 없고 무기력한 사람이 됩니다.
성령을 받으면 제자들처럼 부족한 사람들도 위대한 인생으로 빛나게 됩니다. 아무리 무지하고 천한 사람도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실로 하느님의 선물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그릇이 깨끗해야 은혜의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가 필요하고(사도 2,38), 또한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요한 20,23).
더러운 내 몸이 썩을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는 하느님께서 아무리 소나기 같은 은혜를 내려주신다 해도 담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네 마음의 문의 손잡이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기에, 내 손으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혀야만 진리의 영께서 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는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을 받고 새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가득 찬 사람, 확신에 힘이 넘치는 사람,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보호하고 협력하러 오실 분이기에 보호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어서 불러주기를 기다리십니다. 마치 119대원들처럼 주야 24시간 대기하며 그렇게 기다리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성령께 얼마나 기도하고, 얼마나 매달리고 얼마나 청하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로 성령을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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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버지 하느님께로 왔고 그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사랑이며 십자가에 목숨을 내놓기까지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 시간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일까요? 쌍방 통행일까요? 예, 좋습니다. 사랑은 일방통행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베풀고 또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이 없으니까 서운함에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자녀에게, 배우자에게 이웃에게 온갖 정성을 다했는데 남는 것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주고받는 것, 곧 쌍방통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사랑하면 상대방이 알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채워줄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수고와 땀의 보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어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너도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지’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일방통행’이지만,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죄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으시고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사랑입니다. 오히려 죄가 클수록 은총도 넘치는 사랑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고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쳐라.” 하시며 죄인이 잃었던 권위를 회복시켜주는 사랑입니다. 고개를 숙여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시며 그의 처지로 내려가 주시는 연민의 사랑입니다. 우리도 내어주는 사랑에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계명은 구속적이거나 억압적인 규범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상대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을 행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실천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을 바라고, 주님께서 주신 계명과 가르침을 지킴으로써 삶 안에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해 드려야 합니다. 진실한 사랑은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정서적 사랑이 아니라 아낌없이 내어주는 행위로 이루어지는 실질적 사랑입니다. 말로 충분한 사랑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주일미사참례, 기도를 의무로 생각하면 부담이 큽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을 돈독히 하는 사랑의 관계로 생각하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히 함께하실 보호자를 보내주시는 것은,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 보호자는‘파라클레토스’ 곧 성령으로 의미는‘옆에 있도록 부름 받은 이’입니다. 연약한 우리들을 위해서 옆에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살 때 영을 알아보게 되고, 육적으로 사는 사람은 영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보호자를 만나고자 한다면 우리의 육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 천상을 갈망하는 삶으로 바꿔야 합니다. 아니, 천상을 여기서부터 살아야 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말합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36,26). 우리는 새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주님 앞에 서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고, 성령께서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신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도 많은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사랑의 결과입니다. 사랑을 하면서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것은 많은 경우 내가 이만큼 베풀었으니 너도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느냐는 보상심리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방식의 이기적인 사랑으로 상대방을 소유하고 지배하며 마음속에 묶어두면 사랑을 빌미로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상대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며 그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기적인 마음을 절제할 줄 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보상은 사랑입니다. 사랑함으로써 주어지는 기쁨과 평화, 보람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상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지속시켜주는 힘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조건 순종하는 것으로 실현됩니다. 그것은 동시에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베푸신 무조건 사랑에 대한 응답이기도 합니다”(이현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은 우리의 밥이 되어주신 사랑입니다. 모두를 내놓는 사랑입니다. 목숨까지도. 오늘도 미사성제를 통해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십니다. 우리도 다른 이를 더 행복하게, 더 나은 길로 나아가길 바라는 열린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 옛말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설사 자식에게 업신여김을 받아도 부모는 자식을 미워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랑이란 내리사랑이므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을 능가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윗사람이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랑이 전수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해야지 내 방식의 사랑을 고집하여 상처를 키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 일서 3장 1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우리 인생이 기계라면, 미움은 모래이고, 사랑은 기름입니다.” 기계에는 반드시 윤활유가 필요합니다. 우리 삶에는 사랑이 필수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하느님과 이웃의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힘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14,18).하셨습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오셔서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영원히 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오신 성령을 무시하고 고아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결코 떠나 본 적이 없다.’ 네가 나를 원망하는 그 순간까지....부디 성령을 보내주시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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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몇 년 전, 속도위반 범칙금 통지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과속을 잘 하지 않는 저입니다. 내비게이션을 보면 안전 운전 점수가 나오는데, 그 점수가 95점이 넘습니다. 그만큼 과속을 잘 하지 않고, 또 급정거나 급가속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속도위반 법칙금 통지서는 너무 낯설었습니다. 그래서 어디서 속도위반했는지 살펴보니 너무 잘 아는 곳입니다. 자주 지나가는 곳이어서 그곳에 과속 카메라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운전할 때, 늘 내비게이션을 켜놓으니 요란한 경고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속도위반을 왜 했을까요?
아마 익숙한 곳이었으니, 그 순간 다른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카메라의 존재도 잊어버리고, 경고음 소리도 듣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또 조금만 신경을 썼다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겠지요.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때로는 분심으로 주님을 잊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 뜻에 맞게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주님께 제대로 집중하지 않고 다른 세상의 것에 집중해서 죄에 빠지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겠다면서도, 순간적으로 자기 안에 있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사랑의 반대편으로 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안에 살고 있기에 세상 것에 집중할 때가 더 많습니다. 또 세상의 것이 보여주는 화려함과 안락함으로 인해 주님이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떠올린다면,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 좀 더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집중할수록 죄로부터 멀어지고 대신 주님과 더욱 가까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친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친밀 관계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계명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표시가 되고, 참다운 삶으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문제는 매 순간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 힘들기에, 사랑의 계명을 잊어버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나약함과 부족함을 잘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커다란 선물을 주십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을 진리의 영으로 선포하십니다. 진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큰 도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이라는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곧 진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고, 이런 마음을 계속 간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 계명을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 안에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달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하느님 나라에 잘 들어갈 수 있도록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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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저 사랑해요>
요한 14,15-21 (성령을 약속하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그저 사랑해요>
사랑이
함께 계시니
그저 사랑해요
사랑을
할 수 있으니
그저 사랑해요
사랑을
하고 싶다면
그저 사랑해요
사랑을
받고 싶다면
그저 사랑해요
사랑을
알고 싶다면
그저 사랑해요
사랑을
보고 싶다면
그저 사랑해요
사랑이
되고 싶다면
그저 사랑해요
사랑 안에
있고 싶다면
그저 사랑해요
사랑이
함께 계시니
그저 사랑해요
사랑을
할 수 있으니
그저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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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믿음으로, 희망으로, 사랑으로 -
어제 참 오랜만에 종신봉헌자 10차 연례피정지도차 제 영혼의 고향집같은 왜관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2014년 요셉수도원이 자치수도원이 된 후, 아마 두 번째 방문일 것입니다. 동대구역까지 갔다가 무궁화호를 타고 왜관수도원에 도착했습니다. 무궁화호를 타고 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예나 이제나 한결같은 믿음의 삶도 이런 것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궁화호처럼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불끈들어 즉시 그 느낌을 적었습니다.
“무궁화호가 좋다
ktx가 아닌 무궁화호 기차가 좋다 무궁화호처럼 살고 싶다
‘부산-서울’ 멀기도 하다
ktx와 비교할 일이 아니다
‘무궁화호’대로 살면 되지 않겠나 속도도 모양도 아랑곳 없이 넉넉한 공간에
느린 속도 자기 페이스대로 여유있게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끝까지 달리는 편안하고 넉넉한 무궁화호가 좋다
빨리가서 무엇할 건가
음미하며 바라보며 누리는 순간순간이 행복인 것을
무궁화호가 좋다, 무궁화호처럼 살고 싶다
이런 어른이 되고 싶다”-
그대로 믿음의 삶을 상징합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이 내 페이스대로 하느님 불러 주신 늘 거기 정주의 제자리에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왜관 수도원에서 저녁기도 성무일도 시간에 만난 선배, 동료, 후배 수사님들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정말 믿음으로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우리 수사님들 모습이 한없이 든든해 보였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수도자의 삶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저절로 답이 나옵니다. 셋으로 나눠 묵상했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필리포스와 예루살렘의 베드로와 요한이 그 모범입니다. 사마리아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믿음의 제자, 믿음의 전사 필리포스입니다. 그리스도의 선포, 바로 믿음의 선포입니다. 들어야 알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독점물이 아니라 나눠야 합니다. 믿음의 기적이요 이런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경청합니다. 말씀을 경청하며 믿음을 보고 듣고 배우는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믿음의 기적, 믿음의 치유, 믿음의 신바람, 믿음의 기쁨입니다. 새삼 믿음이 답임을 깨닫습니다. 개인의 믿음은 약해도 교회공동체의 믿음은 강합니다. 공동체에 뿌리둔 믿음일 때, 성장하는 튼튼한 믿음입니다. 예루살렘 사도공동체는 믿음의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하여 필리포스를 지원합니다. 파견된 베드로와 요한은 이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고 이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을 받습니다.
믿음도 나눠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안수하자 이들은 성령을 받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강복의 안수를 참 좋아합니다. 고백성사후는 물론 참으로 뭔가 주고 싶은데 줄것이 없으면, 진짜 가장 좋은 강복을 드리곤 합니다. 말그대로 믿음으로 드리는 믿음의 강복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이 형제(자매)에게 축복을 내리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둘째, 희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에 이러 ‘희망으로’입니다. 어제 피정 두 번째 강의 주제도 희망의 여정, 희망의 순례자로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희망이, 꿈이, 비전이 있어야 비로소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희망의 힘이요 희망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희망 역시 주님의 선물이자 우리의 선택입니다, 역시 희망의 선택, 희망의 훈련, 희망의 습관화입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희망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제 말이 아니라 제2독서에서 베드로 사도의 간곡한 당부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 생생한 희망을 두고 희망으로 살아갈 때 바른 양심, 온유하고 겸손한 삶, 선한 처신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시려고 의로우신 분, 그리스도께서 불의한 자들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희망을 두는 분은 이런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받는 참 좋은 희망의 선물이 영으로 다시 생명을 받아 생명 충만한 영적 삶을 살게 합니다.
셋째,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그의 규칙에서 강조하는 바,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여기에 바탕하여 어제 흥겹게 노래한 저녁성무일도 마리아 후렴이 생각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와함께 머무를 것이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보호자 성령입니다. 예수님의 자상한 설명이 고맙고 힘이 납니다. 바로 보호자 성령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모르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히시는 보호자 성령, 사랑의 성령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성령뿐임을 깨닫습니다. 영혼의 영혼이 성령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우리에게는 결정적 도움이, 힘이 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주님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본질적이요 중요한지 새삼 깨닫습니다. 사랑의 계명을 지킬 때 하느님 아버지도, 그리스도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주님은 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을 통해 입증되는 주님 사랑이요 바로 이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 사랑 안에 머물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믿음으로 시작하여 희망으로 살다가 사랑으로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 희망의 여정, 사랑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입니다. 살아갈수록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믿음, 주님과의 희망, 주님과의 사랑이면 소원이겠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의 주님께 대한 신망애(信望愛)의 관계를 깊이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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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14,15)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세례성사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때문에 사람들의 의해 나의 믿음과 신앙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사람 때문에 하느님과 공동체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습니다. 눈에 보이는 그 너머의 것을 바라봅니다. 때문에 눈에 보여지는 현상들 앞에서, 내 눈 앞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앞에서 성모님처럼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 너머의 것을 보려고. 그 너머에 숨겨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으려고.
어제 배둔공소 성전 봉헌식이 잘 끝났습니다. 많은 형제자매님들께서 기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날씨도 어느 신부님의 예언처럼 봉헌식 전에 비가 그쳤답니다.
"하느님 감사!"
많은 신부님들(30명)이 오셨고, 수사님들, 수녀님들과 가깝고 먼 곳에서 오신 많은 형제자매님들께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전체 참석하신 인원이 300여명이 넘었습니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저와 배둔공동체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보내주신 사랑을 꼭 기억하면서 배둔공동체가 다시 부활할 수 있도록 신자들 모두가 노력할 것입니다.
배둔공소는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배둔신자들과 이곳을 찾는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힘을 얻고 다시 부활하는 곳입니다. 이곳에 있는 배둔신자들은 하느님의 집을 관리하는 관리인 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집이고,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하십니다.
오늘 복음(요한14,15-21)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요한14,16)
진리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참되게 믿고 희망하고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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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FIV8E_wb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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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 15)
사랑으로
거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온통
초록빛의
오월입니다.
순간순간들이
모두 아까운
시간들입니다.
장미꽃들이
끓어오르며
피어납니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사랑의 숭고함을
깨닫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삶의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성장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사랑은 사랑을
따릅니다.
사랑은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없는
여정이
가장 아픈
여정입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
바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사랑의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는
예수님과 맺는
관계로 더욱
깊어집니다.
늘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인격적인 관계로
머물게 하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무너지지 않는
새로운 관계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참된 사랑은
무너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으며
새로워질 뿐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있음을 믿게 됩니다.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시는
성령이십니다.
머무르시고
다가오시고
열어주시는
성령께
이 사랑의
시간들을
봉헌합니다.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는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생명을 일깨우는
참된 사랑이
우리를 충만하게
하고 있음을
믿는 은총의
주일입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계명과
말씀을 따릅니다.
사랑 가득한
기쁜
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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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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