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황현선생을 잊으면 안됩니다. 아니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친일논란이 빚어지는 시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황현선생은 114년전인 1910년 오늘 (9월 10일) 자결했습니다. 1910년 8월 29일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고 나라가 없어진후 비탄속에 하루하루를 연명하다가 13일만인 9월 10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선생이 남긴 유서입니다.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한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슬퍼하지 말라"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라는 대목에서는 그가 가진 조국에 대한 책임감이 깊이 느껴집니다. 사람이 태어나 목숨을 스스로 끊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비통하고 처참한 일입니다. 인간은 대단한 슬픈 경험을 할 경우 애통해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스스로도 그런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대체로 그런 기억이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처절한 경험을 할 경우 상황은 달라집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경우가 생깁니다. 물론 개개인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있겠지만 말입니다. 황현선생은 대다수 한반도인들이 참고 견디었던 그런 상황에 그는 그런 참음과 견딤에 대해 처절하게 고뇌하고 결국 스스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평생 올곧게 살아온 선비이기에 나라가 강제로 일제에 빼앗기고 조국이 갑자기 사라지게 된 것에 지극히 비참한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는 것은 이 한반도인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자 일제에 대한 분연한 저항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망국에 대해 선비라는 사람중 그 누구도 몸으로 표현을 하지 않으면 일제가 한반도인을 얼마나 우습게 알 것인가라는 의미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황현선생은 지금의 전남 광양시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매천야록> 등 저서를 남겼습니다. 고향인 광양시에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황현로와 호에서 유래한 매천로가 있습니다. 황현선생은 1888년 과거시험에 당당히 급제해서 성균관에 입학했지만 과거를 둘러싼 부패 상황을 알고 나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합니다. 황현선생은 그야말로 당시 대표적인 재야인사였습니다. 황현선생은 일제에 빌붙은 친일파들을 조롱하는 시들을 지어 그들의 망국적 태도를 질타하기도 했습니다. 1907년부터는 전라남도 구례에 학교를 지어 신학문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려 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나라를 다시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1905년 을사 늑약으로 한반도의 외교권을 빼앗기자 이에 항의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병세 항일 운동가의 죽음을 목놓아 애도하기도 했습니다. "대신이 국난에 죽는 것은 여러 벼슬아치들 죽음과는 다르네. 큰 소리내어 지축을 흔드니 산악이 무너지는 것 같아라.....인생은 늦은 절개를 중히 여기고 수립하는 일은 진실로 어려운 일이라. 낙락장송은 오래된 돌무더에서 송진 향기 천 년을 가리라" 조병세 선생의 죽음 소식을 듣고 쓴 글입니다.
황현선생의 기일을 맞아 여러 생각이 듭니다. 왜 2024년 8월부터 한국은 친일세력이 대거 등장해 혼란을 일으키는가와 왜 이 정권은 유래가 없는 친일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가 등입니다. 또한 과거사 청산 또는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없는 한일 양국의 우호관계는 존립하기 불가능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그냥 묻으려하는 상황을 바라보면서 황현선생의 자결이 갖는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됩니다. 황현선생의 제 114주기 기일을 맞아 황현 선생을 포함해 자신의 생명을 초개처럼 여긴 의사와 열사들 그리고 민족 독립 운동가들의 숭고한 희생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2024년 9월 10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