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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사長遊寺
유형분야
요약 경상남도 김해시 불모산(佛母山)에 있는 삼국시대 승려 장유가 창건한 사찰.
개설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梵魚寺)의 말사이다.
역사적 변천
우리나라 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입증하는 사찰로,
사찰측의 기록에 따르면 48년에 인도 아유타국의 태자이자 승려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이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후가 된 누이 허씨를 따라 이곳으로 와서 최초로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그 뒤 선찰(禪刹)로 일관해 오면서 많은 수도승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지만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가락국 제8대 질지왕이 세운 장유화상 사리탑은 현재에도 이 절에 남아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탑을 헐어서 부장품을 훔쳐갔으며, 그 뒤 파손된 탑을 복원하였다.
조선시대 후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운파(雲坡) · 영담(映潭) · 우담(雨潭) · 만허(萬虛) 등이 이 절에 머물면서
중건 · 중수하였으나 6 · 25전쟁 이후에 점차 퇴락하였다.
1980년부터 주지 화엄(華嚴)을 중심으로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현재는 규모 있는 사찰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내용
현존하는 당우로는 인법당(因法堂)과 관음전(觀音殿) · 칠성각(七星閣), 장유선원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는 응향각(凝香閣),
요사채 · 객실 등이 있다. 국가유산으로는 198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장유화상 사리탑과 가락국 장유화상 기적비가 있다.
장유화상 사리탑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며, 방형의 지대석 위에 연화대석을 놓고 그 위에 탑신을 얹었다.
장유화상 기적비는 가락국의 불교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절에서 오른쪽으로 60m 아래에는 장유화상이 최초로 수도했다는 토굴이 있다.
골짜기 끝에 높이 5m, 길이 15m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대지를 마련했는데, 이 축대는 허왕후와 함께 온 아유타국 사람들이 쌓았다고 전한다.
장유사 입구에는 조선시대 후기에 폐사가 된 왕후사지(王后寺址)가 있다.
왕후사는 질지왕이 허왕후의 공덕을 기리고 명복을 기원하기 위한 원찰(願刹)로서 김수로왕과 왕후가 합환한 전설이 깃든 곳에 세운 사찰이라고 하며, 두 줄기의 계곡물이 합쳐지는 풍수지리상의 길지(吉地)라고 하여 현재는 묘소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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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의 장유화상은 인도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가 가야 땅으로 올 때 같이 온 허보옥(許寶玉)으로 허황옥의 오빠이다. 보옥선인(寶玉仙人)이라고도 부른다.그는 김해 불모산에 들어가 부귀를 뜬구름 같이 보고 불도를 설명하면서 산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장유화상(長遊和尙)이라 부른다. 그의 흔적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김해 용지봉 장유사> 조선 초기 주세붕이 쓴 시문집인 『무릉잡고』 속에 서기 1544년에 쓴 「장유사 중창기」가 있다. 그 속에 장유사를 처음 창건한 사람은 장유화상이라 밝히고 있다. 조선 후기에 간행한 김해읍지 「비판」 조에 보면, 서기 1708년에 명월사의 승려인 증원(證元)이 찬술했다는 「김해 명월사 사적비」에도 장유화상이 등장한다. 이 비문에서는 장유화상이 서역으로부터 불법을 전하여 가락국에 불교의 신봉이 융성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장유화상을 기리기 위해 처음 지은 장유사는 원래 왕후사 경내에 있었다. 장유화상을 기리기 위해 절을 창건한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입증하는 사찰이다. 장유사를 품고 있는 불모산의 이름도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 불모(佛母)라는 뜻은 불교에서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 번째는 부처의 생모인 마아 왕비를 뜻하고 두 번째는 불상을 만드는 사람, 세 번째는 불교가 처음 시작된 곳이라는 의미다.현재의 장유사는 김해시 불모산 용지봉 아래에 있다. 김해시 남서부에 있는 장유2동 포장된 대청 계곡 길을 약 4km 올라가면 장유사 주차장이 반긴다. 바로 커다란 일주문이 나오고 일주문 오른쪽 언덕에는 황금빛을 발산하는 커다란 지장보살이 있다. 지장보살은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인자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일주문은 절 마당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마당에는 온통 잔자갈로 깔려 있어 다른 절과는 색다른 느낌이다. 잔자갈은 한 발자국씩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뽀드득거린다. 성급한 내 마음이 저절로 속도가 느려진다. 대웅전을 바라보니 화려하고 웅장하다. 합장하고 기도하는 순간 저절로 나를 돌아보게 된다. 대웅전 안 오른쪽에는 장유화상의 초상이 있다. 이역만리 가야 땅까지 와서 불도를 전하다니 고개가 숙어진다. 자기 몸을 불살라 남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은 성인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대웅전 뒤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장유화상 사리탑」과 「가락국사 장유화상 기적비」가 평온한 모습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리탑 속에 있는 장유화상의 사리를 생각하니 불심의 정도를 들여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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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성을 이루는 김해 김씨. 대한민국 국민 열 사람 중 한 명 꼴인 김해 김씨의 시작점은 김해 구지봉(龜旨峰)이다.『삼국유사』<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수로왕 탄강 이야기를 자세히 전한다.
구간(九干)이 백성을 다스리고 있던 어느 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라는 물음에 9간이 “우리가 있습니다”라고 답하자, 또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라고 물었고 9간 등이 “구지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하늘의 명으로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 이 봉우리의 흙을 파면서 노래하고 춤추라’고 주문한다.
거북아 거북아(龜何龜何)
머리를 내놓아라(首其現也)
내놓지 않으면(若不現也)
구워 먹으리(燔灼而喫也)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 구지가(龜旨歌)가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9간으로 대표되는 김해 지역 지배 세력이 문화 능력이 더 우수한 수로 집단에 의해 통합돼 가락국이 출현하는 것이 반영된 설화다. 수로는 서기 42년 가락국 왕이 되어 15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구지봉은 분산(또는 분성산)에서 서남쪽으로 흘러내린 산자락 끝에 있는 해발 35m의 봉우리다. 거북이 머리처럼 고개를 살짝 내민 야트막한 동산이다. 정상은 아무것도 없는 빈 땅에 야트막한 높이의 돌들로 둥글게 테를 조성했는데, 그 주변을 큰 소나무들이 도열하듯 에워싸 신령한 느낌이다.
가운데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금함과 6개 알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었으나 부자연스럽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에 따라 2000년대 초 철거돼 수로왕릉 연못 근처로 옮겨갔다. 조잡하게 있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없는 게 상상력을 동원하는 데 더 큰 힘이 된다.
김수로왕 탄강을 알리는 비와 구지가를 적은 기념비
수로왕 탄생지이고 구지가의 무대임을 알리는 안내가 시원찮다. 수로왕이 태어났다는 ‘대가락국태조왕탄강지지(大駕洛國太祖王誕降之地)’ 비석만 덩그렇게 서 있다. 구지가를 한자로 적은 ‘영대왕가비(迎大王歌碑)’라도 아래 큰길 가에 둘 게 아니라 정상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 한글로 풀어서.
그런데 궁금하다. 이들이 구지가를 부르면서 새 임금을 맞이한다고 기쁘게 노래했는지? 수로왕이 오기 전부터 정상에서 묵묵히 지켜보았던 고인돌은 알고 있겠지.
2019년 대가야 지배 계층 무덤이 있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아이 무덤에서 가야 건국설화 그림을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흙구슬이 나와 구지봉에서 가야 시조가 탄생했다는 이야기가 김해 중심의 금관가야뿐만 아니라 대가야에서도 전래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단서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이자 집단 무가(舞歌)이고, 고대 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구지가에 대한 연구가 더 진전을 이루기를 기대할 뿐이다.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후와 파사석탑
허왕후의 등장은 수로왕 신화를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수로왕이 등극하고 6년이 지나자 신하들이 왕에게 왕비를 얻을 것을 청한다. 그러자 왕은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나의 배필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이니 염려 말라”라며 해안 쪽으로 사람들 보낸다.
그때 갑자기 붉은 돛과 붉은 기를 휘날리며 배 한 척이 다가왔다. 왕이 신하를 보내어 맞이하려고 했지만 여인은 모르는 이를 따라갈 수 없다 했다. 왕이 대궐 밖에 장막을 치고 기다리자 여인도 배를 대고 내려와 가야에 오게 된 연유를 이야기한다.
자신은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인데, 부모님 꿈에 상제님이 “가락국왕 수로가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라고 하여 오게 됐다며, 도중에 수신(水神)의 노함으로 못 오게 되자 돌아가 파도를 잠재우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을 배에 싣고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파사석탑과 허왕후릉
16세에 바다를 건너온 수로왕비의 능은
분성산에서 내려온 구릉지가 구지봉과 맞닿는 곳에 있다.
허황옥이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은 능 앞에 마련된 파사각(婆娑閣) 안에 있다.
당초 김해 객사 동쪽 호계사(虎溪寺)에 있던 것을
김해 부사 정현석이 허왕후 곁에 두어야 한다면서 1873년 옮겼고,
1993년 파사각을 만들면서 이전했다.
안내판에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로 닭 벼슬의 피를 떨구면 굳지 않는다고 하는데,
김해시의 향토사학자가 이를 학인하였다고 한다’고 되어 있다.
향토사학자가 확인한 게 파사석이 우리나라에 없는 돌이라는 건지,
닭 벼슬의 피를 떨궈도 굳지 않더라는 건지 알아먹기 어렵다.
두 사람의 결혼은 초기 가야국이
남쪽 나라들과의 해상 무역 활동을 보여주는 증거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김해에 터를 잡고 살아온 원주민들과 흘러들어온 세력이
연맹을 결성하는 과정를 미화한 이야기라는 견해도 있다.
왕비가 처음 배에서 내린 나룻가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
비단 바지를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陵峴),
붉은 깃발이 들어왔던 해변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고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수로왕릉과 쌍어문, 태양문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은 황금알에서 났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 했다고 한다.
김해의 지리적인 입지 조건과 철을 매개로 한 해상 교역 세력이라고 볼 때
수로왕도 거북으로 표현되는 해양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김해에 뒤늦게 온 탈해가 수로왕에게 패해 물길을 따라
계림(鷄林․신라)으로 달아났다는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
수로왕릉과 정문 좌우 화반에 그려진 쌍어문.
이 문양은 아유타국이 있던 인도 아요디아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수로왕릉은 구지봉에서는 1km,
대성동고분에서는 400m 떨어진 거리에 있다.
수로왕릉은 납릉(納陵)이라고도 부른다.
납릉 정문에서 추녀를 받치는 화반(花盤)*을 유심히 봐야 한다.
파사석탑과 비슷한 흰 석탑을 사이에 두고 물고기가 좌우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다.
쌍어문(雙魚紋) 또는 신어상(神魚像)이라고 하는
이 문양은 수로왕비의 나라인 아유타국이 있던 인도 아요디아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닿아 있다.
왕릉 주변 비석에도 머리[螭首․이수]에 바람개비나
태양으로 보이는 태양문(太陽紋)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아요디아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김해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 지역의 집단 형성 과정에
해양을 통한 교류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물론 납릉 정문이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지고, 비석은 이보다 훨씬 뒤에 조성됐으므로
사실과는 먼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문양의 유래는 그 이전부터 시작됐을 수 있다.
수로왕릉은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16세기 후반 후손인
영남관찰사가 능을 수축하여 지금의 왕릉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 화반: 꽃모양으로 꾸민 받침목이라는 뜻으로 서까래를 받치기 위해
기둥과 기둥 사이에 놓이는 장여 등을 받치는 받침대.
허왕후는 정말 인도에서 왔을까?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 등
건국 신화의 주인공 중에는 알에서 나온 이들이 많다.
이름하여 난생신화(卵生神話)다. 수로왕도 난생신화의 주인공이지만 2000년 전 국제결혼을 한 인물이라는 데에서 특별한 조명을 받을만하다.
허왕후는 정말 인도 사람일까?
일연은《삼국유사》〈가락국기〉에서
‘고려 문종 때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로 있던 문인이 쓴 것을 간략하게 싣는다’라고
출처를 밝혔다.
금관지주사는 김해지역을 다스리던 관리이다.
〈가락국기〉에 실린 내용은 얼마나 사실일까? 사실은 검증을 필요로 한다.
문헌 사료와 관련 유적, 유물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허왕후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이에 앞서 고려대 산학협력팀이 국립중앙박물관의 의뢰를 받아
파사석탑의 산지를 추정한 결과 “파사석탑에 사용된 암석의 산출지는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잠정 결론을 참고해야 한다.
석탑 재질이 엽랍석(葉蠟石)을 함유한 사암인데 경남 밀양이나 전남 완도에서 산출된
엽랍석은 화산암 계통이고, 파사석탑은 퇴적암(사암)으로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2010년 KBS 역사스페셜 ‘최인호의 역사추적 제4의 제국 가야’를 제작했던 취재진은
한반도에서는 파사석탑의 재질을 찾지 못한 반면
인도에서 동일한 재질을 확인하기도 했다.
허왕후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크게 세 가지 의견이 있다.
첫째 공주가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고향 아요디아에서 가락국까지 오려면 하안과 해안의 파트너 도시를 경우하면서 여러 번 쉬어 가면서 올 수 있는데,
중간 기착지가 태국의 아유티야였다는 견해이다.
두 번째는 허왕후 능비에 나오는 보주태후(普州太后)에 주목해 허왕후 일행이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난을 피해 중국의 옛 보주(普州) 일대로 이주했다가 추방당한 후
양자강을 따라서 상해로 갔다가 해류를 타고 가락국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남해로부터 왔으니
가야가 일본 큐슈에 설치한 분국에서 왔다”는 의견도 제시됐다고 한다.
신화 더 맛보기
김수로왕과 허왕후는 왕자 열 명과 공주 두 명를 두었는데,
첫째는 왕위를 물려받아 거등왕(居登王)이 되었고
둘째, 셋째는 멀리 아유타국에서 시집온 어머니의 외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어머니 성인 허(許)씨를 따랐다.
그로 인해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혼인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어머니의 오빠이자 외삼촌인 장유화상(長遊和尙) 허보옥(許寶玉)을
따라 수도의 길에 올라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서 성불했다고 한다.
수로왕은 성불 소식을 듣고 기뻐 친히 지리산까지 들어가
아들들이 수도한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현재의 칠불사(七佛寺) 자리에
칠불선원(七佛禪院)을 세워 왕자들의 득도를 기렸다.
칠불사 입구에 있는 연못인 영지(影池)에는 허왕후가 수도하는 아들들이 보고 싶어 지리산을 자주 찾아왔으나 장유화상이 방해가 된다며 못 만나게 했는데,
일곱 왕자가 부처가 되어 하늘에 오를 때 잠깐 모습을 비춰줬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일대 범왕(凡王)마을과 대비촌(大妃村) 등도 수로왕과 허왕후와 관련된 이름이다.
장유화상은 허왕후가 배를 타고 올 때 일행을 감독하고 보호하는 책임자로,
이 땅에 불법을 처음 전한 스님으로 전해 오고 있다.
김해 대청동 불모산(佛母山) 용지봉에 있는 장유사(長遊寺)를 비롯해 장유동,
장유산 등은 모두 그와 연관된 이름이다.
장유사 사리탑 옆에 세워진 가락국사장유화상기적비(駕洛國師長遊和尙紀蹟碑)에는 장유화상과 일곱 왕자들의 행적이 적혀 있다.
김해 더 즐기기
●분산성과 해은사
분산 정상에 있는 해은사에서 바라본 낙동강 하구와 분산성. 장쾌하다.
분산성은 분산(해발 310m) 정상부를 감싸는 산성으로 김해는 물론이고
낙동강 하구와 남해안 일대가 한눈에 보이는 해안 방어의 중요 시설이다.
김해 시내와 낙동강 하구, 김해평야, 장유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은사는 분산성 정상에 있다.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가락국까지 무사히 항해할 수 있도록 풍랑을 막아준 용왕님께 감사하는 뜻에서 창건했다고 한다. 대왕전에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대성동고분과 고분박물관
고분은 수로왕릉과 김해박물관 사이의 구릉지대에 있다.
길이는 약 280m, 너비는 약 50m에 이른다.
1990년부터 2020년까지 모두 10차례 발굴 조사가 진행됐다.
지석묘, 옹관묘, 목관묘, 목곽묘, 석곽묘, 수혈식 석곽묘 등 여러 종류의 무덤이 확인됐다. 지배층과 피지배층 묘역이 별도로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박물관에서는 개별 고분의 다양한 묘제 형식을 복원하고
부장품을 통해 사회, 생활상을 보여준다.
[출처] 신화의 도시 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