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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칼럼] 악의 세력은 아니지만 무능력한 지도층
이들의 우유부단한 태도 탓에 '폭정' 탄생
1979년 보안사령관과 2021년 검찰총장
서로 연결돼 있다는 느낌이 영화 흥행 요인
김종대 연세대 통일교육원 객원교수
영화 ‘서울의 봄’ 흥행몰이가 계속되고 있다. 1979년 12월 12일 밤 7시부터 9시간에 걸쳐 진행된 군사 반란을 겪은 적이 없는 2030 세대가 이 영화를 주목하는 이유는 뭘까? 악이 선을 짓밟는 불편한 서사가, 정의와 공정이 사라진 지금 우리 시대의 일상과 왠지 비슷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크게 세 개의 캐릭터가 대비된다. 첫 번째는 연줄과 정보, 수사권을 무기로 삼아 국가의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반란을 도모하는 악의 세력이다. 전두환을 필두로 한 하나회 일당은 불법적으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고 전방의 전투 병력을 빼돌려 반란에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순수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료 군인들을 향해 무력을 행사했다.
적당히 선한 사람들의 회색지대에서 탄생하는 폭정
두 번째는 악의 세력은 아니지만 무능력한 국가 지도층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악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적당히 선한 사람들의 무능력 때문이다. 반란을 막을 많은 기회를 날려버린 최규하 대통령과 노재현 국방장관, 정승화 계엄사령관,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 등은 전두환과 하나회 일당의 집요하고 치밀한 계획에 무너져 버렸다. 반란 초기에는 반란군에 비해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이들은 스스로 무장 해제하면서 민주주의가 붕괴되는 걸 속수무책으로 방관했다. 세 번째는 악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항전을 선택한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군 헌병감이다. 시류에 편승하기보다 죽기를 각오하고 자신의 원칙을 지키고자 한 이들은 결국 거대한 악의 세력으로부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폭정이 등장하는 배경에 항상 등장하는 캐릭터다.
1933년에 바이마르공화국의 제1당인 나치는 의회 과반수를 넘지 못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의 당수이자 총리로서 그해 봄에 있을 총선을 준비하다가 제국 국회의사당이 불타는 사건을 맞이한다. 히틀러와 괴벨스는 이 화재가 공산당의 소행이라며 대대적인 공산당 소탕 작전에 돌입했다. 히틀러는 당시 대통령인 힌덴부르크를 찾아가 공산당의 음모를 척결하겠다며 자신에게 전권을 달라고 했다.
무능한 힌덴부르크를 압박해 전권을 수임받은 히틀러는 의회의 승인 없이도 법률을 공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까지 움켜쥐게 된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였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수치스러운 희대의 전체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전두환이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를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전권을 탈취했듯이 히틀러는 공산당에 대한 수사를 명분으로 최규하 대통령과 비슷하게 우유부단한 힌덴부르크로부터 권력을 탈취한다. 폭정이 등장하는 배경에는 항상 적당히 선한 사람들이 만드는 회색지대가 있다. 승부는 그곳에서 결정된다. 이 회색지대야말로 인간의 가장 나약한 정신이 무너져 악이 선으로 둔갑하는 공간이다.
12·12 군사반란을 소재로 한 영화 '서울의 봄'이 누적 관객 수 500만명 돌파를 앞둔 지난 5일 오후 서울 시내 한 영화관의 모습. 연합뉴스.
강한 자가 선하다는 논리
“반역은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공하면 아무도 감히 그것을 반역이라 하지 못할 테니까.” 존 해링턴의 말이다. 영화에서 전두환은 이렇게 외친다. “(반란이) 실패하면 반란이지만 성공하면 혁명이다” 전두환에 따르면 정의란 도덕이 아니라 힘으로 달성된다. 법학에서 통치행위 이론이란 국가 통치의 기본에 관한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 행위는 사법부에 의한 법률적 판단의 영역이 아니라는 이론을 말한다.
1993년에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시민들 사이에서는 12·12 군사 반란의 주범을 처벌하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시민단체의 고소와 고발이 잇따르자 1995년 7월 18일 이 사건을 맡게 된 서울지검 공안1부장 장윤석 검사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했다. 장 검사는 전두환 일당을 기소하지 않은 이유를 국력 소모 예방, 역사를 통한 평가, 국가 발전에 세운 공, 국론 통일 등의 이유를 열거했지만 정작 핵심적인 이유는 성공한 쿠데타는 성공했기 때문에 사법적 처벌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논리가 악을 용인하는 적당히 착한 사람들의 변명이다. 역설적으로 이 발언이 너무 강력했던 여파로 시민사회는 분노와 지탄으로 들끓었고, 결국 그 해에 전두환과 노태우를 법정에 세우기에 이르렀다.
한국 민주주의는 1979년 12월에 치명적 일격을 당했으나 1995년에 군사 반란 주모자들을 법정에 세움으로써 비로소 회복했다. 이렇게 정리가 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최근 다시 퇴행적 해석을 시도하는 세력이 있다. “12·12가 군사 반란이 아니”며 “박정희 서거로 인한 공백에서 나라를 구하려고 나선 (신군부의) 불가피한 조치”라고 말하는 사람이 현 윤석열 정부의 국방장관으로 일하고 있다.
검찰 특수통은 전두환식 통치에 향수 느끼는가
1988년에 국회에 출석한 전두환이 12·12는 “반란이 아니었다”며 늘어놓은 변명이 있다. 만일 그게 쿠데타였다면 본인이 12·12 직후 곧바로 대통령이 되지 왜 1년 가까이 지난 1980년 10월 27일에 대통령이 되었겠느냐는 거다. 그런데 전두환이 밝히지 않은 것은 군사 반란이 6개월 정도 지난 1980년 5월 7일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전두환은 이미 대통령보다 더한 초법적 권력자였다는 점이다. 5월에 그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 상임위원장으로서 어떤 대통령도 엄두를 내지 못할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과 삼청교육대 설치, 언론인 해직과 같은 강압 통치를 하고 있었다. 국회를 해산한 전두환은 자신이 대통령선거의 시기와 절차를 마음대로 정해서, 자신이 편리한 때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이 되었다.
이 과정 전체가 쿠데타가 아니라 나라를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게 현재 국군을 지휘 감독하는 국방장관의 사고방식이다. 이는 적당히 착한 사람들의 변명과도 다른 확실한 악의 편이다. 마치 전두환이 윤석열 정부에서 국방장관으로 환생한 것 아니냐는 느낌을 줄 정도다. 최근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이 대통령의 국회 해산권을 정한 전두환 시절의 8차 개정헌법의 부활을 언급한 일이라든지, 한동훈 장관의 위헌 정당 탄핵 발언 등은 전형적인 5공화국 식 통치 스타일이다. 과거 군의 하나회에 비견되는 검찰 특수통들은 전두환식 통치에 향수를 느끼는 것 같다.
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에 성공하는 이면에는 수사권을 앞세워 전복을 시도했던 1979년의 보안사령관과 2021년의 검찰총장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막연한 느낌이 있다. 이 실낱같은 맥락은 영화를 관람한 이후에 새록새록 살아나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 가며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지향하게 된다. 이 성찰이 윤석열 정부에서의 노동운동과 언론에 대한 탄압, 안보 지상주의와 이념 논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시야를 확대해 준다면 이 영화는 제 소임을 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궁극적인 질문은 우리가 적당히 착한 사람들 영역에 안주할 것인지, 아니면 용기를 내서 악을 척결할 것인지다. 이 질문에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1979년에 겪은 어둠의 시대를 다음 세대가 겪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피해 가기 어려울 것이다.
출처 : ‘적당히 착한 사람들’을 고발하는 영화 ‘서울의 봄’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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