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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P&C휴먼스토리 > 박근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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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면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서 우리는 정치인들을 얼마나 알고 있지?” 작년 11월, P&C리포트를 시작한지 얼마 안된 시점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그때 아무도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했고, ‘사람’이 빠진 정치분석이 자칫 평면적으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습니다. 그후 ‘서울디지털창작집단’과 공동으로 4개월 동안 작업한 끝에 ‘P&C 휴먼스토리’ 두권이, 박근혜 대표와 강금실 전 장관의 원고가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정치인들에 대한 책도 기획에 들어갔습니다. 현재 박근혜 대표와 강금실 전 장관 책은 4월17일 출판을 목표로 마무리 작업 중에 있으며, 그 중 일부를 4월7일과 4월14일에 걸쳐 소개합니다. 인간적인 면에 초점을 맞춘 이번 ‘P&C 휴먼스토리’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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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후광효과인가 역사의 희생양인가 ㆍ 아버지는 박정희, 어머니는 육영수 ㆍ 책임, 너무나도 무거운 책임 ㆍ 22살의 어린 퍼스트레이디 ㆍ 바람과 나무의 탄식 속에서 ㆍ 충격과 배신의 법칙 ㆍ 길 위에서 길을 잃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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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하쳅수트 살리기 ㆍ 껍질을 벗고 세상 밖으로 ㆍ 밖으로 향한 길을 꿈꾸다 ㆍ 바른 생활 소녀 박근혜 ㆍ 랩을 부르는 정치인 ㆍ 박근혜는 말을 못한다? ㆍ 엘리자베스 1세를 닮고 싶은 여자 ㆍ 안녕하세요 박근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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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 그들은 왜 박근혜에 열광하는가 ㆍ 비판을 감싸안아라 ㆍ 너무나 매혹적인, 그러나 치명적인 ㆍ 박근혜 리더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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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인생의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 정치인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지만 본래 그의 꿈은 대학 교수였다. 그에게는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만큼의 재능이 있었고 실제로 꿈의 실현을 위한 준비도 착착 진행되어갔다. 그리하여 그는 1974년 봄, 대학을 졸업한 후 바로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박근혜는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유학은 이를 기특하게 여긴 아버지 박정희의 선물이었다. 유학 생활은 청와대 생활에만 길들여진 박근혜가 대통령의 딸이 아닌 20대의 여인으로서 젊음과 낭만을 쌓아나갈 수 있는 기회였다. 만일 그가 유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더 넓은 곳에서 견문을 쌓으며 학자로서의 길을 가기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가 프랑스로 떠난 지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은 그 해 8월 15일, 국립중앙극장에서는 날카로운 총성이 울렸다. 그것은 8. 15기념식에 참석한 육영수 여사의 죽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육영수는 어이없게도 저격 사건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육영수는 박정희 대통령 이상으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아왔던 영부인이었다. 그녀는 우아함과 검소함과 인자한 이미지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그리고 대통령을 보좌하고 나라를 대표하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영부인이었던 육영수에 대해서만큼은 딱히 흠잡을만한 점을 찾지 못한다. 그만큼 육영수는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올바른 처신으로 적을 만들지 않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육영수가 그렇게 비명에 세상을 뜨고 난 후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그녀를 조문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자상했던 영부인을 잃게 된 당시 국민들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째서 육영수님의 서거에 내가 이렇게 슬퍼해야 하나 할 정도입니다.’
육영수 여사의 서거 이후 청와대로 밀려드는 조문 서신 중에는 이런 말도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때 프랑스에 있던 박근혜는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본 신문을 통해서야 어머니의 죽음을 알 수 있었다. 너무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신문에 실린 부모님의 사진과 기사 내용을 보면서 저는 그것이 내 어머니에 관한 일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나의 어머니 육영수” 중에서)
어머니의 죽음. 얼마 전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정말 꿈이라고 밖에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박근혜는 그때 비행기 안에서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린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 갑작스러운 비극으로 인해 박근혜의 짧았던 유학생활은 그 길로 끝이 났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박근혜의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져 버린 것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혼란스럽고 경황이 없는 와중이었지만 비어 있는 퍼스트레이디 자리는 누구라도 대신해야 했다. 어머니의 죽음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시간에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라는 중책까지 함께 짊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또한 혼자가 되신 아버지와 자신보다 더 상처가 컸을 어린 동생들을 토닥이는 것도 맏딸이었던 그가 해야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감당하기에는 박근혜 역시 너무 어린 나이였다. 20살이 넘었다면 이제 어른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기에는 한창 예민한 나이였다. 또한 사회경험이 전무한 당시의 그로서, 나라를 대표하는 퍼스트레이디라는 중책에 떠맡기에 22살의 나이를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박근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불과 엿새 후부터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했다. 가슴에 상장을 단 채였다. 미리 예정되어 있던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퍼스트레이디의 자격으로 참석해 그 역할을 꿋꿋이 수행했던 것이다. 공인이란 그런 것일까. 우리는 기쁘면 마음대로 기뻐하고 슬프면 마음대로 슬퍼할 수 있다. 하지만 박근혜는 어머니의 죽음을 마냥 슬퍼할 여유마저도 없었다. 대통령 딸이라는 책임에 더해 어머니의 역할이었던 퍼스트레이디라는 책임까지 짊어지게 되었으니 그는 더 독해지고 더 단단해져야만 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빈자리 때문에 청와대가 쓸쓸하고 황량하게 보이지 않도록 채우기 위해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박근혜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하지만 22살의 박근혜가 떠맡게 된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또 그때까지 한결같이 공부만 해 왔던 박근혜에게는 너무 생소한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어머니의 이전 행적이 워낙 많은 지지를 받았던 터라 그만큼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을 것이다. 퍼스트레이디가 된 박근혜는 그때부터 정치에 대한 이것저것을 배워나갔다. 아버지 박정희도 안보와 경제발전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틈틈이 들려주었는데, 그때 들은 이야기들은 아마도 박근혜의 가치관과 사상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5년여의 퍼스트레이디 생활로 단련된 정치 감각은 지금의 정치인 박근혜를 만든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의 상원의원 힐러리 클린턴은 “퍼스트레이디란 환상적인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퍼스트레이디의 생활은 분명 유익한 경험이었을 수 있으나 적어도 박근혜에게는 그리 환상적인 경험은 아니었을 듯싶다. 퍼스트레이디는 그저 대통령 옆에서 미소만 지어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당시 퍼스트레이디의 파워란 요즘의 퍼스트레이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만큼 대단했다. 그때까지도 군주제의 잔상이 남아 있던 터라 대통령의 아내인 영부인은 곧 국모이자 왕비라고 생각할 때였다. 민심이 그랬던 만큼 권력을 발휘하려면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육영수가 권력을 남용했다는 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그녀는 퍼스트레이디로서 어렵고 소외된 계층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하고 국민들의 민원을 받아 정리해 대통령에게 조언도 서슴지 않아 ‘청와대 내 야당’으로 통하기도 했다. 또 국내외의 주요 인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그녀만의 우아함과 노련함으로 좋은 인상을 심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고 서민들에게 무작정 잘하는 게 좋은 퍼스트레이디의 조건은 아니다. 페론 시절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에비타는 ‘당신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바친다’며 빈곤층에게 돈을 마구 뿌리고 다녔다. 그래서 서민층에게는 존경과 찬사를 받았지만 반면 경제학자들은 그녀를 나라 경제를 망친 악녀로까지 평가한다. 그만큼 중도를 지켜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퍼스트레이디로서 어디까지가 해야 할 일이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인지 가늠하는 것도 역량이다. 그토록 어렵고 막중한 일이었으니,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생활이 그저 행복하거나 달콤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한층 무거운 짐을 지게 된 박근혜. 그에게는 퍼스트레이디 이외에도 어머니의 빈자리를 힘들어하는 아버지의 위로가 되고, 여전히 어머니의 손이 필요한 두 동생을 이끌어갈 책임이 있었다. 때문에 그때부터 22살 박근혜 개인의 삶은 전혀 존재할 수 없었다. 20대란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다.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시기인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그때껏 계획해 왔던 자신의 꿈을 속절없이 포기했으며, 20대의 젊은이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도 포기해야 했다. 그런 점들이 퍼스트레이디라는 최고의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더욱 애잔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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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청와대에서 보낸 세월은 18년이었다. 그런데 박정희의 서거 후 그곳을 나와 은둔의 시간을 보낸 것도 18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박근혜가 대통령의 딸로 살아왔다는 사실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그 시간만큼의 고통의 세월이 존재했던 것이다. 무려 18년이라는 세월이 말이다. 그 세월은 20대였던 젊은 여인을 50대를 바라보는 중년 여인으로 바꾸어 놓는 긴 시간이었다. 게다가 평범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던 그 시간들은 고통과 슬픔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금세 자신을 추스르고 남겨진 자신의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를 나온 순간부터 정치인으로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박근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슴에 묻고 부모에 관한 일에만 파묻혀 살아왔다. 인터뷰와 추도식이며 기념사업을 하고 아버지 박정희에 관한 영화나 책을 만들고 홍보하는 등 등 18년은 오로지 부모를 위해 쓰인 세월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반드시 모든 이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부모를 잃고 그에게 남은 것은 돌봐야 하는 동생들, 그리고 엄청난 충격과 사람에 대한 불신이 전부였다. 때문에 이후의 시간들을 견디며 그는 때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지 않았을까.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양 극단을 오가며 그를 괴롭혔다. 그리고 그것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박근혜를 비롯한 그 자녀들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되어 날아오기도 했다.
“사실 지금까지 저의 삶은 특별했습니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나랏일을 해야 했고 20대 후반에는 부모를 잃은 가장으로 부모님에게 쏟아지는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1993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중에서)
게다가 그 와중에 동생 지만은 여러 번의 마약 사건에 연루되기도 한다. 아마 그도 완전히 달라진 상황을 적응하지 못하고 내면의 고통을 그런 방법으로 표출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여동생 근영 또한 결혼에 실패하고 만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삼남매의 삶이 온통 틀어져 버린 것이다. 어쩌면 박근혜 역시 동생들처럼 자신을 온통 놓아버리고 망가뜨리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박근혜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막중한 책임과 아버지에 대한 진실과 오해를 밝혀야 할 책임이 있었다. 특별한 부모님으로 인해 안게 된 책임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오히려 더 막중해진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 사후 그와 관련한 논란은 계속되었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박정희의 업적과는 별개로 그가 집권할 당시 미화되고 숨겨진 진실이 있었던 만큼, 잘못된 부분들은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그것은 때로 명백한 진실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과장되고 억측인 부분도 있었다.
그 모든 일이 박근혜가 조금 나이를 먹은 후에 있었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20대 젊은 시절부터 사람들의 냉대와 차가운 시선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했다. 그가 그러한 모든 것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일을 해야 하는 운명이라, 그것도 비범하신 아버지를 모셨고, 생전이나 서거하신 후나 평범하지 않은 관심과 혹독한 비난에 시달리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바로잡는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 자신 또한 평탄하지 못한 길을 가고 있다.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너무나 끊임없이 겪게 되는 어려움들이라 이제는 어느 정도 만성이 되었다. 옛날 같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생각되는 고통일 텐데도 지금은 눈물 한 방울 없이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1989년 11월 5일자 일기 중에서)
항상 폭풍우, 비바람, 번개 등 바람 잘 날 없이 불안하고 위태위태하여 마음 한번 푸근하게 가져보기 힘든 것이 내 운명인가 하고도 생각해 본다. (1989년 11월 29일자 일기 중에서)
스스로 마음의 평정을 얻지 않으면 그는 너무 많은 짐과 고통 속에 짓눌려, 터져 버릴지도 몰랐다. 그래서일까, 그의 일기에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박근혜는 일정한 종교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시기만큼은 불교사상에 많은 부분을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는 것, 아마도 그것만이 그를 지탱해 주는 힘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박근혜의 18년 세월 속에서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이란 조금도 엿볼 수 없다. 그는 행복이나 기쁨과 같은 삶의 요소조차 모조리 비워 버렸다. 그런 감정도 사치라고 느꼈던 것일까, 아니면 그런 감정을 느낄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심지어 자신의 인생에서 사랑도 결혼도 모두 제외시켜 버린 박근혜였다. 그런데 사랑이 빠져버린 삶은 바람 빠진 풍선과도 같지 않을까. 혹여 내보이지 않은 비밀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알려진 바로는 그에겐 그 흔한 로맨스 하나 없다. 하긴 대통령의 딸로 살아가면서 그 흔한 미팅 한번 제대로 했을 리 만무하다. 그도 여자이니 분명 누군가를 좋아한 적은 있었겠지만 평범하지 못한 삶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기회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도 중매를 통한 결혼조차 하지 못했으니 그의 삶은 참으로 팍팍하기 그지없었으리라. 어릴 때부터 평범한 사람으로 살지 못했던 그는 가정을 꾸리고 어머니로서 살아가는 평범한 여자의 삶도 살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혹은 조금만 그 시기가 늦춰졌더라면 박근혜는 결혼한 여자로, 아이의 어머니로 살아가게 되었을지 모른다. 박근혜의 대학 졸업 즈음에 실제로 어머니 육영수에 의해 박근혜의 결혼이 추진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 일은 자연스레 무산되었고 그로 인해 떠맡게 된 퍼스트레이디 생활은 결혼을 생각할 여유를 더더욱 만들어 주지 않았다.
물론 그 이후에도 아버지 박정희를 비롯해 주변사람들로부터 결혼 이야기는 왕왕 나오곤 했다. 우선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시절에도 아버지가 여러 차례 결혼을 권유한 바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한사코 마다했다. 아마도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를 차마 혼자 남겨 둘 수 없었던 맏이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이번엔 친척들이 발 벗고 나섰다. 하지만 정작 결혼한 사람은 박근혜가 아니라 동생 서영이었다. 사촌 오빠 박재홍이 말하길, 박근혜는 결혼 얘기만 꺼내면 난색을 표시하며 말을 잘라버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독신주의를 고수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앞서 여러 번의 결혼 기회는 그때마다 때가 아니었고, 나중에는 잇단 불행의 덫이 가져온 충격으로 결혼 생각은 아예 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지나간 40년을 돌이켜 보면 그 많은 보람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가져다 준 고통과 슬픔이 너무나도 컸기에 고통스럽게 추억될 뿐이다. 그런 생을 다시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 모른다. 지난 세월은 태어났기 때문에, 사명과 의무가 있기 때문에 산 것이다. 태어나서 삶을 누린다는 것에 이런 즐거움도 있구나 하고 느낀 기억이 별로 없다. 보람이 있었다고는 하나 너무나 큰 고통이 그것을 짓눌러 버려 그 보람을 느낄 여유조차 없곤 했다. 내가 왜 태어났을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것이 생이라면 새 생명을 또 탄생시킨다는 일은 그 아기에게 끔찍한 짐을 지워주는 일이 될 것이라고도 생각했었다. (1992년 5월 21일자 일기 중에서)
삶의 고통은 결혼과 함께 이어지는 또 다른 탄생에 대한 두려움으로도 이어졌을 것이다. 굳이 새 생명을 만들어 인생의 고통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을 만큼 그의 삶은 그토록 외롭고 처절했던 것일까. 혹자는 박근혜의 고통을 어찌 서민들이 흘린 눈물에 비할 수 있겠냐고 말한다. 독재자의 자식이면서도 부모가 돌아가신 뒤 6억원 가까이나 되는 재산까지 남겨졌으니 고통이라는 말조차 ‘사치’라는 얘기다. 그러나 한 개인의 고통과 슬픔을 어찌 타인이 측량할 수 있으랴. 그것도 20여 년간이나 지속된 고통을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박근혜는 그 깊은 고난의 시간들을 꿋꿋이 이겨냈고 나아가 그 시간들을 자기 성숙의 계기로 만들었다.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고난도 ‘주어지는 것’이다. 다만 태풍은 자연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배신은 그것을 행한 사람을 통해 전달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축복스런 기간에 인간은 기뻐하고 고난의 기간 동안 인간은 성숙하는 것이다 …… (중략) 슬픔이 와도 기쁨이 와도, 사회적으로 큰 일을 하건 평범한 일을 하건 지위가 높건 낮건 간에 마음을 비운 사람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능히 감당할 수 있다. (1991년 12월 28일자 일기 중에서)
열반이란 자기 안의 모든 감정의 불꽃이 꺼진 상태라고 한다. 이 불꽃들은 인생 고해의 원인이 된다고도 하겠지만 해탈과 열반의 길로 밀어주는 역할도 할 것이고, 하늘의 뜻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을 갈고 닦아 더욱 빛나게 해주기도 하고, 어떠한 삶을 지금 살고 있는가 하는 시금석의 역할도 할 것이다. (1982년 5월 31일자 일기 중에서)
박근혜의 삶은 결코 그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삶이 아니었다. 물론 대통령의 딸에서 퍼스트레이디까지 빛나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로 인한 대가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많은 책임과 희생이 뒤따랐다. 그의 삶은 인간이 과연 얼마만큼의 고통과 외로움을 감수할 수 있을지 지켜보는 시험대에 오른 것만 같았다. 물론 세상?〈? 그보다 더한 고통과 시련을 받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았던 부분들을 되짚어 보면서 우리가 대통령의 딸이라고만 생각해 왔던 박근혜가 결코 평탄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을 지나왔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금의 자리에 설 수 있었던 내공을 쌓아왔다는 것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것은 결코 헛된 작업이 아니었길 바란다. 그 세월을 알아야 박근혜라는 인물을 좀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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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깊은 침묵의 시간을 깨고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1998년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다만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 아버지 박정희의 업적을 복원하는 사업에만 몰두하며 정치권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가 은둔하던 20여 년의 세월 동안 세상은 많이 변해 있었다. 1980년대부터 민주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정권은 몇 차례나 바뀌었고, 보릿고개를 넘나들던 70년대와는 달리 삶의 질도 눈에 띄게 높아졌다. 그러나 1997년 우리나라는 IMF라는 커다란 경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멀쩡하던 회사들이 속속 쓰러지고 그 가운데 생긴 수많은 실업자들은 생존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박근혜는 정계에 첫 발을 조심스레 들여놓았다. 이번에는 대통령의 딸이 아닌 박근혜라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선 세상이었다. 1997년 대선을 8일 앞둔 시점에 한나라당에 입당한 그는 그 이듬해인 1998년 4월,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사람들은 오랜 칩거를 접고 나온 박근혜에게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박근혜는 왜 느닷없이 정치인이 되려고 한 것일까. 혹시 아무도 모르게 정치 입문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이 그의 등장과 동시에 수많은 억측이 난무했다. 박근혜는 그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지난 97년 IMF경제 위기 때 수많은 회사가 도산하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리던 모습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어떻게 일으켜 세운 나라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쓰러질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이 울컥하고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나라의 경제적 위기가 18년이라는 공백을 깨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그가 꾸준히 추진해 오던 아버지의 명예회복이라는 과제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진의가 무엇이든 최소한 권력에 대한 야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 듯싶다. 권력에서 비롯된 암투를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 안에서 양친의 죽음을 목도한 박근혜가 아니던가. 어쨌든 그의 등장으로 IMF로 무너진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경제대통령 박정희’가 희망의 불씨처럼 되살아났다. 사람들이 그를 보는 시선은 우선 ‘박정희의 딸’이라는 데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박근혜에 대한 지지파와 반대파도 극명하게 갈라졌다. 그런데 지지도 반대도 그 전제는 모두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는 논리에서 출발했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박정희가 경제를 회생시켰듯 그 딸에게도 그만한 능력이 있지 않겠냐는 기대심리가 내재해 있었고 또 반대하는 사람들은 독재자의 딸이니 그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실 둘 다 막연한 생각이었다. 강산이 두 번은 변한다는 세월을 지나오고도 박근혜는 여전히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가 정치권에 자리를 잡는 입문 초기에는 그것이 상당히 이점이 됐던 게 사실이다. 일단 시기가 좋았다. 국민들이 경제문제에 잔뜩 예민해진 가운데 박정희를 떠올리게 하는 박근혜는 상당히 매력적인 뉴 페이스였다. 게다가 박정희에 대한 반감을 누르는 데에는 박정희와 달리 반감이 거의 없는 ‘육영수 효과’가 큰 힘을 발휘했다. 박근혜가 마치 육영수가 다시 살아 돌아온 듯 어머니와 꼭 닮은 외모로 어필했기 때문이다. 국민의 표심은 관심에서 시작되게 마련이다. 이처럼 지지든 반대든 박근혜는 수많은 관심과 말이 나도는 가운데 여성이 뿌리내리기 힘든 척박한 세계 속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박근혜는 놀라울 만큼 쑥쑥 커나갔다. 여타의 여성 정치인들이 반짝 빛을 보다가는 다시 남성들의 들러리가 되고 마는 상황에서 박근혜의 성장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 5년간의 퍼스트레이디 경력도 신인 정치인 박근혜가 보다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해 준 중요한 명분이었다. 과연 퍼스트레이디 경력이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 이에 대해 98년 당시 한나라당 부총재였던 허주 김윤환은 ‘총리를 아무리 한들 퍼스트레이디를 했던 것에 비하면 견줄 것이 못 된다’라고 말한 바도 있다. 그 말은 어느 정도 과장되어 있는 듯하다. 시대 역시 박근혜가 퍼스트레이디를 했던 70년대와는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청와대 생활과 퍼스트레이디 생활이 정치를 하는 사람에게 어느 쪽으로든 도움이 되는 경험임은 분명하다. 어찌 됐거나 박근혜는 15대 국회의원으로 시작해 16대, 17대 국회의원으로 꾸준히 정치생명을 이어왔다. 또 당 내부에서의 박근혜는 97년에 한나라당에 입당한 뒤 고문으로 시작해 현재는 한나라당의 대표최고위원으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암암리에 차기 대권 주자로도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정치경력이 그리 길지 않은 정치인으로서 놀라운 성장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정치권의 여성 역할모델을 갈망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정계의 주요 인물로 등장한 박근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일이었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국회에서 그들의 가부장적인 사고로 이루어지는 형식적인 민주주의 국가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쟁쟁한 남성 정치인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 박근혜의 행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고통과 냉대, 외로움의 시간을 지나 정치인의 모습으로 새롭게 나선 그는 과연 여성으로서 어떤 가능성들을 품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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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은 대부분 남자들이다. 어린이들을 위한 위인전 속에도 100여권 되는 전집 속에 신사임당이나 퀴리 부인 정도만이 위인으로 언급될 뿐이었다. 그것은 여성이 남성보다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래를 꿈꾸는 나이에 소년들에게는 밖으로 향한 길이 열려 있었고 소녀들에게는 안으로 향한 길만이 주어졌다. 그래서 소녀들은 꿈이 있어도 그 꿈을 억누른 채 평생을 살아가야 했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도 박근혜는 밖으로 향한 길을 꿈꾸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70년대에 이공계 학과를 선택했다. 그 당시 여자는 여자대학의 국문과나 가정학과 등 무난한 학과를 나와 좋은 집안으로 시집을 가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할 때였으니 박근혜의 선택은 지극히 ‘예외적’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박근혜가 원했던 학과는 그나마 문과계열도 아닌, 이공계 전자공학과였다. 생각지도 못한 딸의 선택에 어머니 육영수 역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공계에 여풍이 강하게 불고 있는 요즘에도 이공계를 지원하는 여성의 숫자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지금도 그런 상황에서 그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에는 이공계란 남자들만의 성역이라는 의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음은 더 말할 여지도 없다. 제가 대학을 입학할 당시 어머니는 사학 전공을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전자공학을 공부하겠다고 고집했습니다. 우리나라 산업 현실에서 전자산업이라는 분야에 대한 앞으로의 기대가 크고, 전자산업 분야에 참여해서 저도 뭔가를 생산하겠다는 의욕도 있었습니다. (<나의 어머니, 육영수> 중에서) 여중, 여고를 다니던 박근혜가 남자들뿐인 전자공학과를 가겠다고 결심하기까지 스스로도 많은 고민을 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온 딸이었으니 사학을 전공하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마음이 흔들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박근혜는 어머니만큼 아버지를 존경했다. 그가 전자공학과를 지원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국가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자산업이 중요하다고 했던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그래서 나라경제를 고민하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 아니라는 의식이 팽배한 시대에도 박근혜는 자신이 가야할 길이 나라를 위한 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가치관이 형성되는 시점에 대통령의 딸로 살았던 이력은 그의 진로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박근혜의 선택이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처음에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부딪쳤지만 그에게는 이미 확고한 결심이 서 있는 상태였다. 다행히 어머니는 그의 굳은 결심을 믿고 지지해 주었고 그것은 박근혜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박근혜가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입학할 당시 그의 동기는 모두 40명이었는데 그 중에 여학생은 박근혜를 포함해 단 두 명뿐이었다. 그나마도 한 명은 도중에 유학을 떠나 박근혜가 전자공학과의 유일한 홍일점이었다고 한다. 남자뿐인 집단에 여자 한 명, 혹은 여자뿐인 집단에 남자 한 명이 어우러져 지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모든 것이 남성 위주의 시스템으로 굳어져 있는 이공계 학과에서 어려움이 없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누구 못지않게 대학 생활을 잘 해나간 것으로 보인다.
“대학시절 화학실험 한다면서 스타킹 빵구 내고, 제도기 들고 실험하고 한 게 재미있었고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꽤 열성적으로 학과 생활을 했고 이공계에서 유리한 위치에 선점한 남성들을 제치고 수석졸업의 영광까지 안았다. 사실 일류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정치를 잘한다고 볼 수 없는 것처럼 어느 학과를 나왔느냐 하는 점이 정치를 하는데 이득이 되거나 반대로 문제가 될 것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박근혜가 이공계출신이라는 점을 언급하는 이유는 현재 그가 정치인이 되기까지의 인과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당시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삶을 벗어나 더 큰 꿈을 꾸고 싶었다. 그는 대학을 통해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미래가 개인의 삶보다 나라를 위한 삶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인으로 나타난 박근혜의 변신은 전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비록 인생 중반기에 닥친 시련으로 중도에 자신의 꿈을 접어야 했지만 박근혜는 의당 가야할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20대에 나라경제를 위해 전자공학과를 선택했듯이, 조금 다른 길이기는 하나 정치 역시 나라를 위한 길이라는 점에서 같은 지점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박근혜의 마음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 내용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개인적인 행복이 없다고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조국이 있고 일할 수 있는 나이가 얼마 안 남았는데 정치권에 들어와 열심히 일해서 조국이 아름다워지고 든든한 반석 위에 서는 것을 보는 게 가장 큰 행복일 겁니다. 조국이 편치 않으면 자신도 편치 않은 거잖아요.”(2000년 <월간조선>인터뷰)
조국을 위한다는 거창한 발언을 박근혜만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를 위한 길이란, 개인의 삶을 포기하고 아버지와 같은 정치인의 길을 가는 것이라는 다소 고집스러운 박근혜만의 신념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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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채현 |
한림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과정, 방송사 구성작가와 노동문학사 등 취재기자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서울디지털창작집단 작가로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주요 저서는 『우리는 당당한 꼴찌다』 등 다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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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디지털창작집단은 |
‘글쓰기의 컨버전스, 스토리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독자와 작가의 경계를 허물어 지식의 생산과 소비의 자유로운 소통구조를 꿈꾸며, 세상의 모든 낡은 권위와 권력을 거부하는 무정형의 작가그룹이다. 디지털 시대에 인간의 문제, 소통의 문제, 자유로운 상상력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며, 지난 1년 6개월 동안 『광화문에는 촛불이 없다』 『맘껏 뛰어놀게 하라』 『이순신 인간경영 노하우』 『하이브리세일즈』 『CEO장보고 대한민국을 말한다』 『여보 나 힘들어』 『 자녀를 크게 키우는 30분의 지혜』『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등 20여 권을 출간했다. * 서울디지털창작집단 홈페이지 www.ebookstory.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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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기 저기 스크랲!!!.
박대표님 화이팅,,,,,,,,,,,,,,
진실로 진실로 격조높으신 분이시다 !! 우리 대표님 천부적이신가 스스로 닦아쌓은 지성이신가!! 우리대표님 화이팅!!! 이보다 더 심오하게표현할단어 왜 생각 안나는가 나는.... 내 머리 야속하다
근혜님은 대한민국의 희망입니다.
역시 대표님이십니다..화이팅!!!
"그는 꽤 열성적으로 학과 생활을 했고 이공계에서 유리한 위치에 선점한 남성들을 제치고 수석졸업의 영광까지 안았다. 사실 일류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정치를 잘한다고 볼 수 없는 것처럼.."==>모택동이후 중국의 개혁 개방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온 지도자는 모두가 유학파에 이공계 출신입니다.
딩동댕입니다^^
수렁에 빠진 당을 건져올린 여자 ! 힘도쎄셔라 .
부산방으로 가져갑니다^^잠깬사자님 화이팅!!!
비슷한 세대입니다.박근혜님을 정말 존경하고 사랑합니다.힘내시고 홧팅입니다.
대부분 거의 다 팬으로서 당연히 알고 있는 사항들이지만 다시한번 긴 문장을 읽고 나니~많은 생각이 교차되네요! 결코 평범하지 않는 삶을? 올곧게 그리고 수행자 같은 절제된 삶을 살았기에/ 더욱 이뻐 보이는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특별히 정치적인 성향이 다르지 않다면 인간 박근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