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5월 17일(수)
* 시작 기도
주님...
하나님과 본체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의 모양으로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내 안에 그 마음을 품으라 하셨는데 내 안에는 그 마음을 품는 항상성이 없습니다.
품은 것 같다가도 어느새 세상의 것들을 품고 있는 나를 보면서 나는 역시 답이 없다는 것을 새삼 확인합니다.
오늘도 나는 없음으로 시작합니다.
나를 부인하는 자리인 죽은 흙으로 시작하오니 주의 긍휼을 베푸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덮으사 덮으심의 은혜가 이 하루도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나를 덮으신 주님의 피에만 소망이 있음을 믿습니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기 원합니다.
날 받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삼하 19:1-8
제목 : 인간적 친밀감이 능사가 아니라, 넘어질지라도 성령 안에서 아들을 힘입어 담대하게 아버지께로 나아가자.
1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2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3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4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5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6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7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8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신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
* 나의 묵상
다윗과 압살롬의 전쟁은 압살롬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전쟁에 승리했음에도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 있으며 계속 운다.
군 사령관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인하여 심히 슬퍼하며 울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다윗의 군대는 전쟁에 승리하였지만 왕의 슬픔으로 인하여 승리로 이끈 모든 군사들 역시 슬픔에 잠기게 된 것이다.
하여 군사들은 기뻐하기는커녕 마치 패잔병처럼 숨을 죽이며 성으로 들어왔다.
다윗 왕은 여전히 자기 얼굴을 가리고 압살롬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하였다.
이에 요압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왕에게 나아간다.
왕에게 이르기를 오늘 왕은 왕과 왕의 자녀들과 왕비들과 후궁들의 목숨을 구해준 군사들에게 부끄러움을 안겼다고 한다.
그것은 왕을 미워하여 대적하던 자는 사랑하고 왕을 사랑하는 군사들은 미워하는 태도를 취하여 그 군사들에게 수치를 안겨주었다는 것이다.
그것 곧 죽은 압살롬 때문에 왕이 계속 슬퍼하는 것은 왕의 군사들을 멸시하는 행동이라고 직격탄을 날린다.
그러면서 압살롬이 살고 왕의 군사들이 다 죽기를 바란 것과 똑같은 것이 아니냐고 확인 사살까지 한다.
이제 요압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면서 다윗을 겁박한다.
만일 왕이 지금 일어나서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으면 오늘 밤에 단 한 사람도 왕의 곁에 남아 있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왕이 지금까지 당한 어떤 재앙보다 더 심한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에 다윗은 요압의 말을 듣고 일어나 성문 곁에 있는 광장으로 나간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왕을 보았고 압살롬을 따랐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다윗은 자기를 반역하고 적의 무리 곧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버린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알고 심히 애통해 한다.
그로 인하여 전쟁의 승리가 완전히 바뀌어 슬픔이 되고 말았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사들마저 성읍으로 들어올 때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아무도 모르게 숨을 죽이며 들어온 것이다.
요압은 이러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 다윗을 겁박한다.
이에 다윗은 자신의 슬픔을 거두어들이고 요압의 말대로 백성들 앞에 공개적으로 드러낸다.
전쟁의 승리는 군사들의 승리이며 궁극적으로는 다윗의 승리이다.
하지만 다윗은 그 승리를 만끽할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아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압살롬의 죽음과 예전에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죽음을 대하는 다윗의 태도는 너무나 상이하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공의로 받아들였고 이를 증명하는 듯이 슬픔 대신 예를 갖추어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삼하 12: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하지만 압살롬을 잃은 후에는 슬픔에 잠겨 승리를 슬픔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물론 아버지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결국 그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는 꼴이다.
다윗은 완전한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의 모든 태도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모든 백성들의 승리의 기쁨을 슬픔으로 바꿔버리게 하는 자가 되었다.
물론 요압의 겁박에 의해서 억지 춘향이처럼 마음을 돌이키기는 했지만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다.
다윗 왕과 같은 이스라엘의 민속 메시야로 오셔서 당신에게 있는 능력을 발휘하여 모든 악의 세력들을 그 힘으로 물리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 제삼일에 살아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갑자기 예수님을 붙들고 저항을 하며 꾸짖기까지 한다.
그가 꾸짖은 이유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 역시 3년씩이나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했음에도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진짜 목적을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일반 유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수님의 힘과 능력을 이용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자기들도 한 자리씩 꿰차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때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런 생각과 가치에 빠져 있던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을 다 떠나갔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적 연민에 굴복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그렇게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주를 믿는 우리에게 공의와 구원의 옷을 입혀주셨다.
그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에게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주신 것이다.
3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동고동락했던 예수님과 제자들, 그들의 친밀감이야 두 말해 무엇 하랴?
하지만 그 친밀감이 인간적 욕심과 사욕에 붙들릴 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다.
다윗이 자신을 반역한 아들 압살롬의 죽음과 그 슬픔에 묶여서 헤어나지 못할 때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모든 군사들의 기쁨을 앗아간 것과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압살롬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었다.
그런 하나님의 심판을 공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연민에 빠져 하염없이 슬퍼하고만 있는 다윗의 인간적 연민과 친밀감은 하나님의 뜻을 어그러지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인간적 친밀감이나 연민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그대로 이어가신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신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친밀감이나 연민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주님과 더욱 친밀해져야 한다.
하지만 그 친밀감이 우리의 정욕과 탐욕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 그런 인간적 친밀감을 자신의 탐욕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님의 뜻을 거스르려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공의로 심판하셔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뱀과 하와가 서로 교제를 하였다.
그들의 친밀함은 아주 돈독하였다.
심지어 하나님 이야기까지 할 정도로 친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친밀함 사이에 뱀의 음흉한 목적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이야기 하면서 너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꾐에 빠진 하와는 결국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의 남편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하였다.
이를 보면 인간적으로 친하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정말 친한 것 안에 육신의 정욕과 탐욕이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죄다.
나는 죄에 대하여 너무나 약한 자이다.
순간순간 죄에 넘어지고 자빠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 연약한 죄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신다.
(롬 6:6-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카타르게오, 불구가 되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내가 죄를 이길 힘은 없다.
하지만 내 안에 주신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 죄를 이기게 하신다.
십자가의 능력은 내가 무엇을 하는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으로 나를 못 박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부인이다.
그렇게 나를 부인하는 자리에 내가 불구자가 되고 그 불구자 됨을 왕의 명령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의롭게 되어 영생의 자리에 들어간다.
하지만 여전히 구속받지 못한 육신이 있다.
그래서 넘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담대함이다.
넘어지는 횟수에 연연하지 말 것이다.
그렇게 내가 연약하여 넘어지는 자라는 것을 알고 나에게는 답이 없음과 예수만이 나의 온전한 답임을 인정하고 고백할 것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다윗은 아들에 대한 연민으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거부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실행된 압살롬과의 전쟁의 승리를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바꾼 장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3년 넘게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육신적 유익을 추구할 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실 정도로 단호하셨습니다.
나 같으면 인정상, 우유부단하게 행했을 것인데 주님은 칼로 무를 자르듯이 하신 것을 보며 내가 바로 심판받을 자임을 깨닫고 인정합니다.
이런 나를 주의 공의로 심판하소서.
오늘도 내가 어떠하든지 아무 것도 아님을 배우며 없음의 존재로 낮아질 따름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곡해하지 않고 십자가에 나를 못 박아 죽이는 자기부인이 진짜 십자가의 능력임을 알아 오늘도 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내 안에 끓어오르는 정욕도 십자가로 못 박습니다.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요 십자가의 능력으로 감당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