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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날 – 여강에서 샹그릴라까지
(2014. 7. 2 : 여강-수허고성-장강제1만-샹그릴라-송찬림사)
7시에 모닝콜, 여유 있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8시 40분에 호텔을 출발하여
서북쪽으로 4km 떨어진 수허고성(束河古镇)에 9시에 도착했다.
관광객들이 편의상 ‘여강고성’과 짝을 지어 ‘수허고성’이라 부르지만, 이곳은 사실 고성이 아니라 ‘고진’이라 불리는 나시족 전통마을이다.
지명으로서의 ‘진(鎭)’이란 지난날 한 지역을 지키던 군대가 있던 진영이란 뜻에서 유래한다.
이 수허고진은 옥룡설산의 산발치에 나시족 선조들이 처음 뿌리 내리면서 형성된 차마고도의 중요한 거점마을이며, 삼강병류(三江竝流)의 하나인 금사강으로 넘어가는 지름길이 되는 첫 관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강 일대에서 가장 이른 문명발생지역이라는 점이다.
전편(대리의 창산 이야기 참조)에서 가볍게 언급한 『‘산해경’지리고(山海經地理考)-신주의 발현(神州的发现)』을 번역(역서명: 『신주의 발견』)한 오정교 선생의 운남 현장답사기를
뉴스사이트인 위키트리(WikiTree)가 5회에 걸쳐 연재하였는데,
핵심은 조선(고조선)이 중국 운남성 여강에 있었다는 놀라운 주장을 고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세히 언급하기는 지면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궁금한 분은 위크트리에 접속해서 꼭 한번 필독하시길 권한다.
결론만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라 우왕 때 쓰여졌다는 설이 통설인 『산해경』은 ‘조선(朝鮮)’이란 국명이 나타나는 최초의 문헌이다.
우리 쪽 기록인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통감』 등과 일치하는 한국고대사의 “흑수(黑水) · 삼위(三危) · 태백(太伯) · 신시(神市)”는 오늘날의 여강 옥룡설산(玉龍雪山)과 금사강(金沙江) 일대다.
『산해경』에 나오는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 해북(海北)의 산 남쪽에 있다.”거나,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과 천독(天毒)이라 말하는 나라가 있는데,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 다른 사람을 아끼고 사랑한다.”와 같은 구절을 고증하고,
조선은 “일 년 내내 눈이 쌓여 있는 고관산(옥룡설산)이 남쪽으로 뻗은 산맥의 가장 아래에 있는 화산의 남쪽 기슭에 도읍했다”는 것은 바로 오늘날 속하촌(束河村) 곧 수허고성이 조선의 도읍지란 놀라운 결론을 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옥룡설산이 옛 삼위산이며, 또한 만년설산 태백이다.
그리고 이 산을 둘러싸며 흐르는 금사강이 옛 흑수(河水)다.
사실 ‘三危’라는 말은 북방에서 흘러든 흑수에 의해서 삼면이 위태롭게 둘러싸여 있다는 뜻이다.
『산해경』의 <해내동경>에 기재한 조선이 오늘날 여강의 옥룡설산(三危山) 남쪽 속하촌에 도읍했고,
옥룡설산의 서 · 북 · 동 삼면을 금사강(黑水)이 위태롭게 둘러싸며 흐른다는 이 고증은
『산해경』에 기재된 ‘조선’과 삼국유사 등에 기재된 ‘왕검조선’이 같은 곳에 도읍했다는 방증이다.
▲ 글씨가 잘 보이지 않으니, 본문을 참고해서 보셔야겠다.
이러한 주장을 접하면서, 단군이 세운 조선을 지나, 이성계가 세운 조선, 그리고 오늘날 북조선까지,
지구상에 이렇게 오래된 국명을 가지고 지금까지 역사를 유지해 온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는 자긍심이 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착잡해지기도 한다.
중국에서도 이 책이 나오자,
중국 역사의 출발은 황하문화가 아니라 장강문화라는 주장(즉 운남이 ‘산해경’의 중심 무대이기 때문)에
기성학자들에게 많은 고통을 받았다는 원저자 부여발 선생의 말과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한일 · 중일 · 중-티베트 등의 역사인식과 정치적 역학관계가 설핏 뇌리를 스치기 때문이다.
더불어 흥미로운 것은 운남과 부근의 소수민족 중 나시족・라후족・묘족 등의 언어와 생활풍속에
의외로 우리와 일치되는 공통점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이곳으로 많이 유입되었고,
이민족과 교류가 적은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그들 고유한 특성을 지켜올 수 있었다는 유민설과
구한말 조선독립군의 후예 등 다양하지만,
어쨌든 운남은 그리고 이들 민족은 특별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분야의 연구에 많은 인적 물적 투자가 쌓여가기를 바라며,
우리처럼 짧게라도 운남의 길 위를 서성거려본 이들의 마음에도 이곳에 대한 사랑이 고인다면
앞으로 큰 울력이 될 지도 모른다.
마을로 들어서자 朝鮮(이른 아침의 고운)의 아침 햇살이 정갈한 돌길에 반사되어
모든것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새것과 옛것이 잘 어울리는 상가의 예쁜 현관문에도 아침햇살이 눈부시다.
어젯밤 여강고성의 번잡함에 정신 줄을 놓았던 기억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호젓한 느낌을 주는 기분 좋은 곳이다.
2시간쯤 머물렀다. 역시 천천히 구석구석 둘러보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거기에다가 우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수시로 비가 찔끔거려 사진에도 비옷을 입거나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후줄근한 모습이 많이 잡힐 수밖에 없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게 출입문들.
마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말이다. 어제 여강고성 광장의 말은 사진촬영용이었다면
이곳은 2~30원의 요금으로 직접 말이나 마차를 타고 마을을 둘러볼 수 있다.
마을로 걸어들어 가니 제일 먼저 사방청음(四方聽音) 광장이 나타난다.
규모도 크고 시원하게 열려있는 광장이다.
귀퉁이에 고전적 건물의 파출소가 깜찍하다.
시간이 되면 광장의 건물 앞 무대에서 공연도 한단다.
건물 처마 밑에는 ‘四方聽音’ 네 글자가 커다랗게 걸려있고,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12개의 큰 문짝의 문살이다. 나시족의 손재주가 느껴지고, 은은하고 기품 있게 낡아있어 사진에 담아본다.
한 골목을 돌아나가니 어느 집 앞에 어른 키보다 큰 잘 생긴 옥돌 하나가 서 있다.
녹색으로 ‘옥출운남(玉出云南)이라 쓴 거대한 옥덩어리. 모르는 눈에도 좋은 옥 같다.
어젯밤 여강고성에서도 옥돌원석을 파는 가게가 많아 들어가 만져봤지만 전혀 옥 같지 않았다.
우리나라 옥은 너무 강해 조각을 할 수 없는데, 중국 옥은 무르고 질겨 조각하기 좋다는 말은 들어 알고 있지만, 옥돌은 수석이 아니다.
그러나 이 정도면 정원석으로 인정하여 수석의 범주에 넣을 수 있겠다.
수석인(壽石人)으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쓰다듬고 한 바퀴 돌아보기도 하며 한참을 감상하니,
옆에서 “왜 또 살려구?’하면서 놀린다.
▲ 합파설산에서 저를 따라온 이 나시노파의 큰언니 한 분.
아직은 한산한 카페와 식당이 밀집된 주파가(酒吧街)를 지나니,
수로가 시원하게 틘 비화촉수(飞花触水)가 나타났다.
그 물가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많고, 부스스한 얼굴을 한 주민들도 여럿 물을 길어가고 있다.
대리와 여강에서 만난 수로는 오밀조밀 고성을 거미줄처럼 얽고 있었지만 규모가 작고 은밀한데 비해,
여기에서는 옥룡설산에서 흘러드는 풍부한 수량이 탁 트인 개방적인 공간에서 더 맑고 시원하게 흐르고 있다.
오랜 세월 여러 지역으로부터 받아들인 건축술을 잘 융합한 아름다운 건축물들과
매우 복잡하고 독창적이면서도 효율적인 물 공급체계가 잘 보존되어 있어,
마을 어디에서나 기분 좋은 물소리가 귓가를 찰랑거리는 것 같다.
특히 ‘삼안정(三眼井)’에서는 안내문을 꼼꼼히 읽었다.
나시족의 ‘삼안정 문화’는 일수삼용(一水三用)의 자연친화적인 자연경외 사상의 오랜 전통인데,
한 샘물을 반드시 삼당정수(三塘井水)로 나누어 쓴다고 한다.
제일안(第一眼)은 음용수요 제이안은 채소씻기용이요 제3안은 생활용수다.
3단으로 나누어 제일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용도에 맞게 쓰고 있지만
상가 밀집지역에서는 나누어지지 않은 곳도 많았다.
하지만 문만 열면 수로에 물이 흐르고,
그들은 그 물을 식수로도 쓰고 허드렛물로도 쓰는데 생각보다 너무 깨끗하다.
아침나절이라 채소를 씻는 여인들의 모습이 여러 번 목격되었다.
운남의 고성들은 이처럼 물의 문화가 빚어낸 고도의 도시공학적 주거공간이다.
마을 북쪽으로 큰 시내가 흐르고, 윗동네로 넘어가는 다리 부근에는 큰 시장과 많은 말들이 쉬고 있었다.
일행 몇이 말린 송이버섯을 구입하는 동안, 나는 다리를 건너
촌로의 환담 장면과 개울물에서 긴 장대로 청소를 하는 노인의 모습을 한가롭게 즐기며 셔터를 눌렀다.
짝꿍이 송이를 구입하고 나서 같이 다리를 건너니
다리 옆에 허리 굽은 나시족 할머니가 동상으로 서있어
다가가 손도 덥석 잡아보고 옆에 서서 기념사진도 찍으면서 이것저것 혼자말로 물어보기도 했는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행동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수허고진의 기분 좋은 인상과 단군의 후손일지도 모르는 나시족에 대한 호감
그리고 이틀 후 호도협 트래킹 때 나를 따라온(?) 할머니 한 분 등,
그 순간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신비로운 정신적 혼돈상태를 경험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미스터리한 경험은 오래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인리로(仁里路) 부근을 걸으며 다시 소녀가 채소를 씻고 있는 삼안정을 사진에 담기도 하며,
오래된 주택들 사이의 좁은 골목길과 고급스러운 식당들의 내부를 기웃거리기도 하며
조용한 윗동네를 산책하고 다시 다리를 건너왔다.
▲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상형문자인 나시족의 동파문자, ㅎㅎ, 이해하기 참 쉽죠!
시간이 넉넉지 못해 어느 길이든지 끝까지 가보지 못한 아쉬움을 지닌 채,
11시에 버스에 올라 이제 꿈에 그리던 샹그릴라로 간다.
버스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으니 수허고진의 아침햇살과 수로의 청량한 물소리가 따라온다.
나시족 여인들의 텃밭과 마을 입구의 장터 모습, 나시족의 미적 감각이 돋보이는
격조 높은 상가의 아름다운 출입문들이 오래전에 본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지나온 칠채운남의 길 위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다.
한 사흘 머물며 수로와 돌다리를 거닐고, 수로 옆 찻집에 앉아 한나절 음악이나 듣고,
독한 백주 한 잔 들고 근교로 나가 설산을 쳐다보며 산책도 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옥룡설산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는 곳인데도, 우기의 여행이 주는 이 지독한 불운이라니!
또 하나 스스로 만든 불운은
버스가 출발한 후 ‘차마고도박물관’이 마을 안에 있다는 걸 뒤늦게 관광안내도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 활기찬 아침풍경(上), 한류를 느끼게 하는 식당 한국관(中), 윗마을의 고요한 골목길(下)
고속도로 IC 부근에는 가로등마다 밑부분에 붉은 바탕에 흰 글씨 5자로 관광지를 자랑하고 있는데
총총하고 가지런해서 눈길을 끌지만
차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기 때문에 몇 종류나 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 내용은 ‘丽江千古情’ ‘宋城千古情’‘三亚千古情’ ‘九寨千古情’ ‘茶馬古城’ 같은 것이다.
버스는 1시간 넘게 달려 처음으로 금사강을 만나는 ‘장강제일만(長江第一灣)’ 전망대에 닿았다.
이곳은 청해성(靑海省)의 청장고원(青藏高原)에서 발원하여 서장의 창뚜(昌都)를 거쳐
운남으로 들어오는 누강(怒江)-난창강(澜沧江)-금사강(金沙江)인 3강이
남으로 나란히 흐르는 ‘삼강병류(三江竝流)’ 지역이 막 끝나는 지점이다.
‘삼강병류’의 특징은 운남의 북쪽 샹그릴라 근처에서 대협곡과 고산준령 사이를 파고 씻어내리며
약 170여 km를 합류하지 않고 평행하게 흘러,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일대장관을 이루어놓은 곳인데,
중국정부는 이곳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하였다.
이 웅장한 태고의 혼을 지닌 원시적인 풍광은
또한 중국 최초의 ‘보타초(普达措)국립공원’으로도 지정되어 희귀 동식물의 낙원이 되고 있다.
이중 제일 서쪽의 누강은 운남성 보산을 남으로 흘러 미얀마를 관통하며 살윈강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벵골만으로 들어간다.
란창강은 운남의 남북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며 운남의 차밭을 길러내고
메콩강이 되어 미얀마-라오스-태국-캄보디아-베트남을 스치며 보르네오해로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금사강만이 동으로 흘러 사천성 이빈(宜賓)에 이르러 장강 또는 양자강이란 이름을 얻고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상해에서 동중국해로 들어간다.
이 장강제일만이 중요한 것은 남쪽으로 흐르던 강이 이곳에서 절벽에 부딪쳐 처음으로 V자형으로 휘굽어져
동북쪽으로 방향을 튼 곳이라는 의미이고,
이는 곧 중화문명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황하가 세계 4대 문명발상지로 꼽히지만 실은 장강이야말로 중국문명의 어머니다.
중원의 가장 긴 강이 되어 무려 6천여 km를 유유히 흐르는 동안,
그 비옥한 강기슭마다 찬란한 문명과 문화를 꽃피워낸 주 무대이지 않은가.
모든 강의 근원은 그 지역의 문명발상지라는 문화인류학적 의의를 지닌다.
또 장강이란 이름을 얻기까지 금사강의 길이 또한 2308km나 되고,
상류는 해발 5천m의 고산지대로 계곡이 깊고 험하여 항공기운항조차 불가능하다고 한다.
금사강이란 이름도 상류에서 사금이 채취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이 장강제일만은 여강에서 서쪽으로 약40km
떨어진 석고진(石鼓鎭)에 위치하는데,
금사강이 급격하게 꺾이며 물살이 약해지고 강유역이 넓어져 강을 건너기 적합하였기 때문에
역사적 도강지로 널리 회자되고 있다.
즉 제갈량의 남방정벌 때,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대리국 정벌 때
그리고 1935년 모택동의 홍군이 대장정 도중 장개석 부대와 벌린 ‘금사강 전투’ 때의 도강 무대였다.
전망대 휴게소는 상당히 넓지만 별 시설도 없어 황량한 느낌까지 든다.
강이 휘돌아나가야 ‘만(灣)’인데 강을 사진에 담으려니 전혀 만의 느낌이 없다.
아마 저 위쪽 어디에선가 이미 휘어진 것이리라.
더 이상 볼 것이 없어 멀리 차도 옆에 진열된 커다란 나무뿌리가 조각품처럼 보여
광장을 가로질러 다가가보니 뿌리가 아니라 나무 밑둥치들이었다.
아마 인근 산을 개간하거나 산불 지역에서 옮겨다 놓은 것 같다.
재질도 단단하고 상당히 모양새가 좋아 몇 장 사진에 담았다.
버스로 돌아오다 보니 상당히 공들여 세워놓은 붉은 벽돌 선전판이 보여 가까이 가보니,
고도수향(古道水鄕) 여강의 자랑거리 여섯 종류가 정겨운 손글씨로 한가득 열거되어 있다.
그중 두 번째가 ‘원조삼경(遠眺三景)’으로 옥룡설산 • 합파설산 • 장강제일만을 나란히 꼽고 있다.
여강이 자랑하는 원경에 꼽히는 이곳이 전혀 역사의 흔적이 없는 걸 보니
아마 도로가 새로 닦인 곳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설핏 든다.
그리고 다섯 번째가 ‘채운삼최(彩雲三最)’였는데
채운제일천(彩雲第一泉) • 납서제일장(納西第一庄) • 중국제일류림(中國第一柳林)이 열거되어 있다.
한 곳도 들어본 바 없지만 상상의 즐거움이 크다.
제일천이 어떤 샘인지, 나시족 제일장이 얼마나 운치있는 건물인지,
버들숲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전혀 짐작도 되지 않지만
배경에 운남의 눈부신 채운이 걸리니 참 멋들어진 풍경으로 느껴진다.
버스로 돌아와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았다.
이제는 생각날 때 메모하지 않으면 영원히 내 것이 아닌 나이인 것 같다.
버스가 언덕을 내려가 금사강을 건너니 느낌이 확 달라졌다.
여강에서 장족(藏族)자치주인 디칭(迪庆)으로 들어선 것이다.
다리 끝 왼편에 휴게소인지 사원인지 모를 애매한 건물과 하얀 야크가 인조암반 위에 줄지어 서있고
그 아래 작은 정자 같은 건물엔 ‘香格里拉’란 글자가 보인다.
여기서부터 옛 티베트 땅이란 말인가.
도로변에 ‘香格里拉(샹그릴라)’ ’四川(쓰촨)‘ 같은 간판이 자주 나타난다.
누런 황토물이 넘치듯 가득 차서 느리게 흘러가는 금사강을 따라가며,
강 건너 구름 사이로 이따금 모습을 드러내는 옥룡설산에 탄성을 지르다보니
어느새 버스는 길가 식당으로 들어섰다.
호도협 입구인 차오토우(桥头)가 저만큼 보이는 외딴집인데,
입간판에 ’강하연농가락(江河緣农家乐)‘이라고 쓰여있다.
'농가락'이 '농촌민박'인 것 같은데, 중국어를 모르니 문자해독만으로는 읽기도 어렵고 뜻도 애매하다.
우리 테이블에는 서울에서 온 애주가 두 분이 있어 늘 반주가 곁들여진다.
기름진 중국음식에는 술이 잘 어울려서인지,
특히 중국여행 때는 아침을 제외하곤 술 없는 식사를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점심으로서는 상당히 푸짐한 식사를 끝내고 나오니, 멀리 흰 구름 사이로 옥룡설산이 살짝 얼굴을 드러내
서둘러 카메라를 끄집어내었지만 어느새 구름이 심술을 부러 좋은 장면을 놓치고 말았다.
다시 샹그릴라를 향해 출발한다. 오전에 2시간 버스를 탔고 앞으로도 그 정도 시간이 걸린단다.
버스는 샹그릴라대협곡을 넘어가야 한다.
그래서 출발할 때 우리 버스도 수냉식 장치라 호스로 물을 넉넉히 보충했다.
운남은 워낙 고지대라서 자동차 브레이크에 물 분사장치가 되어있고, 도로변에 ‘加水’라는 글자가 자주 보인다. 길은 편도 1차선이고 커브가 많아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다.
이내 양수발전소를 만나고, 자전거로 산을 넘는 젊은 배낭족을 만나고,
맞은편 산에 크레용으로 흰 선을 그어놓은 것 같은 또다른 차마고도를 만나고,
어느 모롱이에서는 만년설이 유난히 빛나는 설산을 구름 사이로 잠깐 만나고,
먼 구름과 가까운 안개가 수시로 차창의 커튼 노릇을 하는 사이,
버스는 천천히 고도를 높여가며 구불구불 재를 넘어 고원지대로 들어섰다.
차가 멈춘 곳은 해발 3200m의 전망 좋은 간이휴게소였고, 시간은 2시 30분이었다.
점심을 먹은 호도협 입구 차오토우에서 약 1000m나 올라온 것이다.
심호흡을 해봤으나 고산증은커녕 상쾌하기만 하다.
대협곡 위로 잘 가꾼 밭과 마을 그리고 그 너머 구름에 감싸인 고산준령이 장관이다.
다시 차에 올랐을 때는 화장실 얘기로 시끌벅적하다.
정 대장까지 거든다. 시골길 화장실은 대부분 유로인데, 재미있는 것은 10명이 들어가며 10원을 주면 싫어하고 각각 1원씩 주면 좋아한단다. 10원짜리 1장보다 10장이 더 풍성하고 많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란다.
문명의 때가 끼지 않은 그들의 순박함이 이해된다.
다시 출발하니 이제 완연히 티베트 풍경이다.
원시림을 베어내고 초지를 형성한 목장지대가 녹색 카펫을 펼쳐놓은 듯 곱고,
장강제일만 휴게소에 장식된 나무뿌리의 정체가 밝혀진 것 같아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붕에 돌을 얹은 농가들이 지나가고, 노란 완두화가 핀 초원의 들판에 말과 양 그리고 야크들이 한가롭고,
양봉하는 텐트와 벌통들이 아무렇게나 펼쳐져있고,
먼 설산 위의 눈부신 구름에서도 티베트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버스가 샹그릴라 입구의 휴게소에 들어선다.
자외선이 강해 피부에 와 닿는 햇볕이 따갑지만 멀리 보이는 풍경은 더 선명하다.
휴게소 마당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샹그릴라를 대표하는 관광 상품이 대형 브로마인드로 걸려있다.
매리설산・호도협・보타초국립공원보다는
‘대형민속무도시화(詩畵) SHANGRI-LA’와 ‘장족민가방문’이 눈길을 끈다.
상그릴라문박극장( 香格里拉文博剧院)에서 밤 8시부터 한 시간 반 동안 열리는 ‘SHANGRI-LA’가 연극인지 뮤지컬인지 모르겠으나 한번 볼만할 것 같고,
특히 장족민가방문을 환영하는 광고판 오른쪽 하단에는 가격표까지 붙어있어 확대해보았다.
광고판을 세운지 불과 두 달밖에 되지 않았으니 가장 따끈따끈한 정보인데,
먼저 입장료 180원에는 영빈의식과 다과(쌀보리과자와 술, 차), 장족전통춤이 포함되고,
말린 고기 종류는 마리당 소 특대품이 2400원(38만원 상당), 보통이 1500원, 양이 2800원, 돼지는 1300원, 닭은 50원(야생버섯등이 들어가면 300원)인데, 건조된 것들이라 그 양이나 가격이 비싼지 싼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다만 우리 일행 정도의 여행단이라면 식사 한 끼를 이런 데 가서 하면
그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현지식 코스가 될 것 같다.
다시 출발하자 이내 티베트풍의 커다란 백탑이 방문객을 환영한다는 인사말을 안고 서있는
샹그릴라의 관문 로터리가 나오고, 조금 더 들어가니 기마인물상이 높이 서있는 로터리가 또 나온다.
여강에서 샹그릴라로 들어오면 반드시 만나야 하는 두 상징물이다.
여강에서는 한자 위에 상형문자인 동파문자가 장식처럼 얹혀있어 간판들이 미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는데,
여기는 한자 위에 반드시 티베트어가 쓰여 있는데 아름답다기보다 완강한 고집 같은 게 느껴진다.
방금 통과한 기마동상의 두 면에서도 큼지막하게 한자 없이 티베트어만 새겨져 있었다.
어쩌면 티베트와 중국의 정치적 관계를 의식한 내 지나친 선입견에서 나온 편견일지도 모른다.
좀 남루해 보이는 카센터의 간판이 ‘汽車美容中心’이라고 붙어있어 웃다보니 기분이 좀 밝아졌고,
‘활불지가(活佛之家)’라는 글자가 붙어있는 전통가옥을 보고는
장족의 활불에 대한 경외심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떠오른다.
긴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버스는 이내 송찬림사 매표소 주차장에 멈췄다.
전에는 고개를 넘어 사원까지 가서 입장권을 끊어 바로 들어갔는데, 많은 관광객들이 사원 앞에서 사진만 찍고 그냥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 매표소를 이렇게 시내로 옮겼단다.
티켓팅을 하고 나가니 셔틀버스가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시내를 벗어나 언덕을 하나 넘자 포핑산(佛屛山) 기슭 언덕 위에 황금빛 사원이
샹그릴라 특유의 투명한 하늘 아래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전경을 담으려고 이리저리 움직여봤지만 너무 넓어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다.
할 수없이 황금지붕들을 중심에 두고 몇 장 찍고 급하게 일행을 따라잡았다.
참, 여기서는 절대 뛰지 말라고 했다.
샹그릴라 시내가 평균 3200m이고 여기는 3500m 가까이 되니 저 중앙계단도 쉬어가며 천천히 오르라고 했다.
내 몸이 어느 정도일지 은근히 시험해보고도 싶었지만,
덜컥 한계에 부딪치면 민폐가 클 것이기 때문에 참는 수밖에 없다.
사원 입구의 현판은 생각 외로 소박하다.
주위의 화려한 채색에 묻혀 겸손하고 단정하게, 붉은 바탕에 금박으로 ‘喝丹松贊林寺’다.
[갈단송찬림사]로 읽으니 너무 딱딱하고 발음도 꼬여, 옆 사람에게 중국어로 읽어보라니 [거단 숭잔린스]다.
참 부드럽고 발음도 쉽다.
17세기 말 달라이라마 5세와 청나라 강희제가 합심해서 건립한 사원으로 라싸의 포탈라 궁을
그대로 본떠 만들었기 때문에 ‘작은 포탈라 궁’으로도 불린다.
중국정부에 의해 강제 분할되어 운남성에 속하게 되었지만,
불교가 티베트로 들어와 밀교형식으로 정착된 라마불교 사원이다.
가장 흥성했던 시기는 1600여명의 승려가 수도를 하였으며 8명의 활불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600여명이 수행하고 있다.
티베트인들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수도승을 거쳐야하고, 사원에 들어와 있는 동안은
사원근처에 작은 집을 지어놓고 출퇴근하듯이 수도승기간을 갖다가 다시 환속하거나 계속 승려가 되거나 한다.
정면 중앙 108계단을 몇 번이나 나누어 쉬며 사진도 찍고,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기도 하며 꼭대기 대전(大殿)까지 올랐다.
날씨는 약간 흐려서 전형적인 샹그릴라의 맑은 하늘은 아니지만 그래도 쾌청하다.
▲ 주차장 뒤 언덕 너머 샹그릴라 시내 전경
멀리 노란 유채밭이 펼쳐진 전원풍경이 그림 같다. 돌계단과 흙벽과 지붕들,
그 어디에 카메라를 들이대도 각이 잘 집힌 기하학적 선분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
제일 높은 곳에는 황금지붕을 가진 커다란 법당이 3채 나란히 서있다. 왼쪽은 종카바(宗喀巴)대전・가운데는 지창(扎仓)대전・오른쪽은 석가모니(釋迦牟尼)대전이다. 사원을 순례할 때나 마니차를 돌릴 때는 반드시 시계방향으로 돌아야한다고 한다.
먼저 왼쪽 종카바대전에 들어서니 노승이 앉아 축복을 해주고 있었다. 시주를 하고 예배를 드리니 손목에 묵주를 하나 채워주고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의 기도문을 왼다. 일어서서 합장을 하고난 뒤 사진을 찍으려하니 안된단다. 시계방향으로 법당을 한 바퀴 돌아보니 내부는 너무 어둡고 연한 오렌지빛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이 붉은 벽과 어울려 온화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중앙의 지창(扎仓)대전은 가장 규모가 큰데, 앞마당에는 당간지주 같은 게양대가 하나 까마득한 높이로 세워져 있고, 법당 출입문에는 역시 검은 휘장이 치렁치렁 드리워져 있어 무거운 분위기를 풍긴다. 법당 안에는 정면에 엄청나게 큰 불상이 앉아있는데, 3층쯤 되는 통건물로 트여져 있어 더욱 위압적으로 느껴진다. 내부모습은 중앙 불상을 향해 108개 기둥이 열을 지어 서있고, 통로를 따라 수도승들이 자리를 잡고 앉도록 방석이 깔려 있다.
지금은 텅 빈 법당 안에 스님 한 분이 불상 앞을 정리하고 있고, 끝부분으로 돌아가니 어린 수도승이 혼자 몸을 앞뒤로 크게 흔들며 불경을 소리 내어 암송하고 있다.
아마 큰 스님 눈치를 힐끔힐끔 보는 게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아 귀엽다.
마지막 석가모니대전으로 가는 길은 입구에 대문이 따로 하나 더 있고, 짧은 계단을 올라 그 문으로 들어서니 대전의 화사한 출입구가 나타난다. 입구부터 앞의 두 대전과는 색상과 모양이 상당히 다르다. 검은 휘장도 없고, 밝고 화려한 채색화가 사방 벽면과 천장에까지 가득하고, 각종 천과 끈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신다면 우리의 대웅전 같은 곳인데 너무나 달라서 당황스럽다. 역시 불상은 높고 큰데
사바세상을 심판하시려는지 칼을 쳐들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위압적이다.
법당 우측에는 따로 방이 하나 더 있고, 화려한 불상들이 여럿 모셔져 있는데 그 중에는 동물 형상의 불상도 있어 이채롭다. 또 법당 옆에는 뜻밖에 주방이 하나 붙어있다. 주로 차 마시는 데 필요한 자잘한 주방용구들이 선반에 얹혀있고 불 피우는 데 사용되는 소형 풍로도 여럿 보인다.
입구의 난로가에는 둘러앉을 수 있는 자리도 있어,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한참 앉아있다 나왔다.
전체적으로 법당의 창문이나 출입구는 불교적인 내용을 그린 두꺼운 천으로 가렸으며, 내부는 너무 어두워 일일이 살펴볼 마음이 일지 않아 건성으로 보았기 때문에 기억조차 뒤죽박죽 헝클어져 버렸다.
밀교 계통의 라마사원이라서 우리의 현교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고, 특히 건물 구조가 우리나라의 법당은 문만 열면 탁 트여 안과 밖이 하나인데 비해 문이 거의 없는 폐쇄적 공간이라 단조롭기 짝이 없다.
거기다가 우리의 방문시간이 스님들 휴식시간과 겹쳐, 스님 보기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 세상에서 가장 엄숙하면서도 온화한 빛!!!
구경거리가 너무 없어 심심하다고 그냥 내려갈 수도 없어
마을 오른쪽으로 대전과 여러 캉삼 사이의 낡고 허물어져 가는 토담집 사이의 좁은 길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어수선하게 느껴졌지만 허물어져 가는 빈집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출입문 위에 황금색 새 커튼이 쳐진 집과 낡아 찢어진 커튼이 대조를 이루는 집 앞에서는
오래 발길을 멈추고 서서 새로 들어온 어린 수도승과 훌쩍 자라 환속한 눈썹 짙은 장족청년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연립주택 형 어느 집 2층 난간에서 수도승이 큰 소리로 휴대폰 통화를 하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기도 하면서 이들의 삶과 마을 형성의 내력이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되기도 했다.
토담길에 취해 돌다보니 어느새 마을 아래까지 내려와 버렸다.
올려다보니 왼쪽을 가보지 않았다는 걸 느꼈지만 다시 올라갈 시간도 없다.
안내도를 찬찬히 훑어보니, 대전 좌우와 아래에 자디캉삼(吉迪康參)을 비롯한 8개의 커다란 캉삼이 배치되어 있고, 가보지 못한 왼쪽 끝에 흔히 백탑이라고 부르는 보리탑(菩提塔)과 자라국(扎拉菊)이 있다.
그 나머지 건물들은 방금 돌아 나온 것처럼 모두 수도승들의 집이거나 작은 사묘들이다.
이들이 모여 ‘송찬림사’라는 불교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도 대전 뒤편에는 새 건물을 짓기 위해 거대한 크레인이 흉물스럽게 서 있고,
캉삼 사이에는 토담집들이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시나브로 허물어져 가고 있다.
이게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인간의 삶이고, 인간을 끌어안는 자연의 모습이다.
문화대혁명 때 파괴된 상처의 흔적까지 그대로 끌어안고, 불교라는 믿음의 울타리 속에서 가장 자연과 일치되는 선한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티베트인들이 모두 성자 같아 보인다.
아, 송찬림사는 하나의 절이 아니라 거대한 불교마을이며,
눈 덮인 수미산 아래 세워진 아름다운 불교나라의 행복한 고성이다.
▲ 빛바랜 커튼과 황금빛 새 커튼 사이에서.
샹그릴라 시내로 돌아와 찰서륵덕(扎西勒德)호텔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니
아직 어두워지기 전이라 고성 구경에 나섰다.
고성의 광장은 역시 춤판이다. 곤명 취호에서는 이족이, 여강고성 광장에서는 나시족이 주인공들이었는데, 이번에는 장족이다. 인물이나 체격이 제일 돋보이는 것 같다. 우리 일행들도 여러 명이 함께 어울렸는데 여성들이 역시 잘 따라했다. 단순한 동작이라 따라 해보았으나 역시 몸치답게 엇박자를 몇 번 내고는 머쓱해져 포기하고 대불사(大佛寺)로 올라갔다. 니르바나(열반)로 가는 계단 양옆에는 오색 깃발 타르초가 휘날리고,
숨이 가빠 멈춰서니 광장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숨을 고르며 문득 타르초의 오색을 생각해본다. 파란색은 하늘, 노란색은 땅, 빨간색은 불, 흰색은 구름, 초록색은 바다이니 우리의 오방색과 마찬가지로 우주를 상징하지만, 검은색 대신에 초록이 들어가
전체적으로는 환하고 가벼워 축제의 장소에 나부끼는 만국기 같다.
그 타르초에 경전이나 소망을 써서 탑이나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생활하는 이들은
물질적으로 궁핍하더라도 낙천적일 수밖에 없다고 느껴진다.
법당 안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고 옆에 있는 마니차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세상에서 가장 크다는 황금 마니차(瑪尼車:중국식으로는 經筒)는 샹그릴라의 명물이다. 불교의 경전을 넣어둔 통이기 때문에 한번 돌리면 경전을 한번 읽는 것과 같다고 해서 작은 경통을 들고다니며 돌리는 티베트인이 많다.
이 대불사 마니차는 적어도 6명이 동원되어야 겨우 돈다고 하니 남들이 돌릴 때 끼어드는 게 상책이다.
세 바퀴를 돌리면서 소원을 빌어야한다는데, 분위기에 들떠 소원 비는 걸 깜빡 잊어버렸다.
젊은 어머니와 아들이 계단에 앉아 마니차 돌리는 아빠를 진지하게 지켜보는 모습을 슬쩍 카메라에 담았는데,
장족은 대부분 이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잘 생겼다.
저녁 7시까지는 꼬치구이 포장마차들이 가득했다는 광장은 그 이후에는 모두 철거하여 단체로 댄스를 즐긴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춤판이 벌어졌으니,
길거리음식을 기피하는 짝꿍을 설득해 맥주 한 병과 꼬치 몇 개를 맛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다.
광장 옆 장족 박물관에도 들어가 봤지만 문을 닫아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올해 초의 화재로 볼 것이 별로 없다고 했지만 시간이 남아 고성 쪽으로 갔다.
입구는 온전해 분위기가 괜찮았지만 골목을 꺾어들자 왼편으로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다.
전소된 곳은 터만 남았고 벽과 기둥만 남은 곳도 많아 더 이상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돌아서니,
아 하늘에 무지개가 떠있지 않은가.
폐허 위의 무지개라니, 참담했던 마음이 봄눈처럼 녹아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고원지대라서 그런지 저녁 8시가 넘었는데도 이직 어둡지 않다. 광장의 상가를 어슬렁거리다 버스에 오르니 정대장의 주의사항이 갑자기 많아졌다. 두통 같은 고산증이 없는지 물어보더니, 오늘밤은 샤워를 자제해달라거나 내일은 1박2일의 트레킹을 위한 짐을 가볍게 따로 꾸리고 캐리어는 버스에 두어야 한단다.
이내 4성 호텔인 금사국제주점(金沙國際酒店)에 닿았고, 그래도 가볍게 샤워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송찬림사 관광이 생각 외로 피곤했던 모양이다.
▲ 붉은 가사와 고단한 남루와 세속의 화사함, 여래는 어디에 머무실까.
잠깐 보던 책과 안경을 벗어놓으려다 침대등 아래 파란 포장지가 보여 만져보니 고무장화 같았다. 그것도 두 켤레가 정답게 붙어있다. 돈을 넣어야하는 자판기도 아니고 객실 침대 머리맡에 그냥 서비스로 얹어두는 호텔은 이직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기호품 아닌가. 모든 기호품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품질과 가격이 천차만별이니, 이건 친절한 건지 만용을 부리는 건지 납득하기 어렵다. 아니, 기호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서 그런가. ㅋㅋ. 하기야 여기는 검문을 거쳐야 들어올 수 있는 중국의 가장 예민한 정치적 성감대(?)인 디칭장족자치주의 중심인 중텐(中甸)이다. 뭐든지 하나라도 더 챙겨주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슬그머니 책 속에 끼워두고 소등했다. 어둠 속에서 혼자 유쾌하여 한참 웃다가 잠들었다. (♣)
첫댓글 오늘도 힘들게 올리신 글과 사진을 아주 편안한 자세로 잘 감상했습니다.고맙습니다.
중여동회원 명신님이 올린 글중에 沙发(싸파)는 소파인데,제일 빨리 댓글을 남긴 사람을 말한다 하고,
두번째 댓글을 남긴 사람은 板凳(반떵)긴 걸상이라 부르고 세번째는 地板(띠반)바닥이라고하네요.
첫번째 사람은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서 글을 볼수 있고, 두번째 사람은 걸상에 앉아서 글을 읽어보고
세번째 사람은 자리가 없어서 할 수없이 바닥에 앉아서 글을 본다는 의미다고 합니다. 그럼 전 소파네요. 하하
아직 공사중인데 벌써 방문하시다니, 소파에서 일어나시지요. 잘 지내시지요?
여행스케치를 가는곳 마다 잊지 않고 많은 자료를 활용하여 곰꼼하게 설명해 주셔서 편하게 보았습니다. 몽석님의 여행기가 또한 감칠나게 설명을 잘해주어서 현장감이 더해지는군요 저도 3년전 갔던 곳인데 감회가 새롭고 미쳐 알지 못한 역사적 사실들을 이야기 해주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젯 늦은시간에 졸리운 눈으로 얼핏 살펴본 글은 작업 중이었던 모양입니다.
오늘 접속하여 보다보니 어제와는 무언가 달라진 느낌 들었었는데.. 그랬었군요.
여행후기의 표본을 보고있네요.
장편소설을 기고한다 한들 이보다 더 힘들까요.
역시 글을 다루시는 분은 다르십니다.
힘들여 작성하신 글 너무쉽게 보고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화재의 현장은 언제 내려 가셨는지...
무지개가 아름답습니다.
송담님의 내몽고 기행 조금전에 다시 한번 보고왔습니다. 주로 오지쪽으로 관심이 더 가는걸 보니, 저도 송담님과 취향이 비슷한가 봅니다.
송월산님, 잘 지내시지요. 늘 같은 장소에서 카메라를 들고있었지만 보는 각도가 다를 때가 많아, 한편에 한두 장은 가져다 쓰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스마일님, 그렇습니다. 고생 꽤나 했습니다. 서툴러서 밤새 한 작업을 통째로 날린 적도 두어 번 있습니다.
정말 컴이란 놈 믿을 게 못 되더군요. 이제 좀 익숙해질려고 하니, 작업 종료입니다. ㅎ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