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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지애] 08
#1. 호텔 앞 (밤)
인철, 힘없이 호텔을 빠져나오다가 우뚝 걸음을 멈춘다. 타쓰지도 얄밉지만 공주가 괘씸하다.
인철, 다시 홱 돌아서 안으로 들어간다.
#2. 호텔 - 타쓰지 거실 (밤)
공주, 굳은 얼굴로 창 밖을 보고 서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타쓰지, 공주의 뒷모습을 보며 술 한 잔을 따라 들고 공주에게 다가온다.
타쓰지 : 내일은 어디 갈까?
공주 : ...
타쓰지 : 어디 또 가고 싶은데 없어?
공주 : ... 나한테 사비를 보여준 이유가 뭐냐?
타쓰지 : 니가 살던 데니까... 보고 싶어 했잖아.
공주 : ... 내가 정말 과거에서 왔다고 믿는 거냐? ...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타쓰지 : ...
공주 : (힘없이 피식 웃으며) 나 자신도 나한테 일어난 일들을 믿을 수가 없는데, 어느 누가 믿을 수 있겠느냐...
타쓰지 : ... 상관없어. 나도 니가 내 눈 앞에 나타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니가 누구냐가 아니라 니가 내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이야.
공주 : (그제야 타쓰지의 눈을 똑바로 본다) ...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타쓰지 : (공주의 눈을 맞받아 보며, 일어로) ... 널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으니까.
공주, 타쓰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타쓰지, 공주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마치 키스할 것처럼 다가가는데
공주, 타쓰지의 손을 쳐낸다.
공주 : (빤히 보며) 아리한테 가겠다. 아리를 불러다오.
타쓰지, 자존심 상한 얼굴로 픽 웃는다.
타쓰지 : 걘 아리가 아니야. 그리고 아마 오지 않을 거야.
공주,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공주 : 아니야. 분명히 날 데리러 올 거다.
이때 현관벨이 울린다.
공주와 타쓰지, 놀라 돌아본다.
타쓰지, 현관으로 가 문을 열면 집사가 서 있다.
타쓰지, 안도하고 공주는 실망하여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집사 : (공주에게 들리지 않게) 강인철이가 아래에 와 있답니다.
올려 보내도 되겠냐고 지배인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타쓰지 : (공주를 힐끗 돌아보고) 바에서 기다리라 그래.
집사 : 예. (돌아간다)
타쓰지, 문을 닫고 공주의 곁으로 다시 돌아온다.
타쓰지 : 일단 오늘은 쉬고 그 친구한테 가는 건 천천히 생각해 봐.
공주 : ...
타쓰지 : 연락은 해볼께..
타쓰지, 돌아서 나간다.
혼자 남은 공주, 닫힌 문을 빤히 보다가 힘없이 소파에 주저앉는다. 하염없이 눈물만 흐른다.
잠시 후 집사가 들어온다.
집사 : 목욕물 받아 드리겠습니다.
집사, 욕실로 들어간다.
#3. 바 (밤)
인철, 맥주를 단숨에 들이키고 잔을 탁 내려놓으며 입구를 본다.
인철, 다시 맥주를 잔에 따르는데 타쓰지가 다가온다.
타쓰지 : (인철의 앞에 앉으며) 왜?
인철 : (본다) 왜?
타쓰지 : 그래, 왜?
인철 : 오늘 어디 갔었어?
타쓰지 :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인철 : 어디 갔었냐구?
타쓰지 : 내가 그런 거까지 너한테 일일이 보고해야 돼?
종업원이 다가온다.
타쓰지 : (인철을 빤히 보며) 위스키 언더락스.
인철 : (타쓰지를 빤히 보며) 난 맥주 하나 더.
종업원, 돌아간다.
타쓰지 : 할 얘기가 뭐야?
인철 : 걘 뭐하냐?
타쓰지 : 아마 샤워하고 있을 거야.
인철 : (샤아워? 속이 뒤집힌다) 걔, 여기서 살겠대?
타쓰지 : 글쎄...
인철 : (맥주를 다시 벌컥벌컥 마신다)
타쓰지 : 궁금하면 직접 물어볼래?
인철 : (자신이 없다) 아니, 뭐. 나야 잘 됐지. 여기서 살겠다면.
타쓰지, 남몰래 안도하는데 종업원, 술을 갖고 온다.
인철, 맥주가 오자마자 다시 잔에 철철 넘치게 따라 막 마신다.
인철 : 근데 너, 휴가는 왜 냈냐?
타쓰지 : 옆에 누가 있어야 된다면서?
인철 : 그래서 휴가를 낸 거야? 잘하면 회사도 때려치겠다?
타쓰지 : 그럴 용의도 있어.
인철 : (점점 불안해져서 타쓰지를 다시 본다)
타쓰지 : 또, 궁금한 거 있어?
인철 : ... 없어.
타쓰지 : 그래? 그럼, 나. 가도 되지? (일어난다)
인철 : 아니, 잠깐.
타쓰지 : (다시 앉는다)
인철 : ... 저 번에 그 패션쇼 있잖냐?
타쓰지 : 안 하겠다며?
인철 : 아, 그땐 그랬는데, 그거 나 주라. 내가 한 번 해볼께.
타쓰지 : (피식 웃는다) 나는 회사 일에 관심 없는데?
인철 : 니가 거기 실장이라며?
타쓰지 : (픽픽 웃는다)
인철 : (자존심 상하지만) 어떻게 안되겠냐?
타쓰지 : 내가 한국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가 몇가지 있어.
인철 : ...
타쓰지 : 그 중에 하나가 무슨 끈이라도 찾아서 인정으로 엮어보려는 거야. 학연이 됐든, 지연이 됐든, 아니면 혈연이 됐든.
하긴 실력이 딸리니까 도리가 없겠지만...
인철 : (쪽팔리다)
타쓰지 : 나중에 연락할게. (계산서를 집어들고 일어나 가버린다)
인철, 어이가 없다.
#4. 벤치 (밤)
멀리 초고층 아파트의 불빛이 보인다.
그 불빛을 등 뒤로 하고 고개를 숙인 채 벤치에 굳은 듯 앉아있는 인철. 눈물이 핑 돈다.
#5. 옷공장 (밤)
공장 안이 대충 치워져 있고 혁, 바쁘게 책도 들여다보고 디자인 구상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원단도 고르고
하여튼 뭔가 해보려고 애쓰며 전화를 받고 있다.
혁 : 수석 디자이너로? 아, 이거 어떡하지? ... 어제만 해도 내가 상황이 좀 그랬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말이야...
아니, 뭐, 작품 발표회가 있어. (으쓱으쓱) ... 아, 뭐, 대단한 건 아니고. 잘 나가는 휴대폰 회사에서 같이 한 번 해보자 그래서.
... 에이, 뭐, 성공은... 그래, 신경써줘서 고맙다.... 미안해. ... 그래, 우리 정상에서 만나자. (끊는다)
이때 인철, 힘없이 들어선다.
혁 : 어, 왔냐? 어떻게 됐어?
인철 : 뭐가?
인철, 혁을 보지도 않고 지나쳐 소파에 가서 푹 쓰러진다.
혁 : 뭐가라니? 패션쇼 말이야!
인철 : (피식 웃고) 내가 생각해 봤는데, 그냥 강북이나 지방 업소들 뚫어서 다시 시작해 보는 게 어떠냐?
혁 : ... 이 자식이 지금 장난하나? 나, 방금 수석디자이너 자리 거절했어! 너, 어떡할 거야?
인철 : (자조적으로 픽픽) 너, 미쳤구나. 그런 자릴 왜 거절해?
혁 : 뭐?
인철 : 다시 전화해서 그냥 간다 그래.
혁 : 너, 지금 뭐하자는 거야?
인철 : 다 관두자.
혁 : 뭘 관둬? 너, 왜 이래, 정말?
인철 : 사는 게 지긋지긋해서 그래. 전화해. 가.
혁 : 내가 가면? 넌 뭐 할 건데?
인철 : 어떻게 되겠지, 뭐.
혁 : 뭐가 어떻게 돼?
인철 : (짜증) 갈 거면 빨리 가! 말 시키지 말고.
혁 : (화를 참으며) 뭐가 어떻게 되는데?
인철 : 아, 증말!
혁 : ...(폭발 일보직전이다) 니가 책임진다며?
인철 : (갑자기 버럭) 내가 왜? 내가 왜 니 인생까지 책임을 져야 되는데? 니 인생, 니가 알아서 해!!!
좋은 자리 있으면 가!! 가면 될 거 아냐! 안 말려! 가! 가! 다 가!!!
혁 : 이 자식이, 정말!
혁, 멱살을 확 잡아 일으켜 세우며 때릴 듯이 주먹을 치켜든다.
인철, 무방비 상태로 때릴 테면 때려라 하는 듯이 맥없이 끌려올라오는데
혁, 인철을 잠시 보다가 소파에 그냥 확 밀어버린다.
혁 : 그래, 간다.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라, 새끼야!
혁, 화난 얼굴로 가방을 챙겨들고 밖으로 확 나가면
인철, 피식피식 웃다가 울기 시작한다.
#6. 강남컨설팅
커다란 캔버스 화면에 타쓰지의 사진이 비추고 있다.
준하, 레이저 볼펜을 들고 타쓰지의 눈, 코, 입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춘추와 다른 부하들, 심각하게 설명을 듣는다.
준하 : 후지와라 타쓰지, 그는 누구인가? 먼저, 후지와라라는 가문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후지와라의 시조는 서기 645년, 소가씨를 타도하고 코오또꾸 천황을 세운 다이까 개신의 주역,
나까또미노까마따리입니다. 소가씨는 백제에서 건너 간 목만치의 후손으로 당시 일본 제일의 가문이었고
그 소가씨를 친 나까또미노까마따리는 신라계로 알려져 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신라파가 백제파를 친 거죠.
춘추 : 걔네도 조직이야?
준하 : 어쨌든 이 일로 천황에게서 후지와라라는 성을 하사 받은 이후 이 가문은 일본 최대의 가문으로 성장하여
한때 일본 전국 장원의 12분의 1을 소유하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날 때까지 천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정부요직을 장악했습니다.
춘추 : 일본을 다 먹은 조직이군.
준하 : 그래서 지금도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귀족 중의 귀족이랍니다.
춘추 : (기분 나쁘다) 그래서?
준하 : 안 건드리는 게 좋겠다고.....
춘추 : 누가?
준하 : 그 야마구찌파에 계신 형님들이...
춘추 : (피가 끓어 오른다) 니들이 아직 나, 김춘추를 잘 모르는구나. 건드리지 말라면 더 건드리고 싶어지는 게 나 김춘추야.
부하들, 순간, ‘건드렸다. 어쩔래?’ 하며 인철을 건드리고 공주에게 얻어터지던 춘추가 생각난다. 불안하다.
#7. 호텔 앞 (밤)
춘추네 세단 두 대가 현관에 서고 코트를 어깨에 걸친 춘추, 부하가 열어주는 문에서 내려 호텔을 올려다본다.
#8. 로비 (밤)
춘추와 부하들, 주위를 살벌하게 둘러보며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간다.
#9. 엘리베이터 (밤)
춘추와 부하들, 우르르 엘리베이터에 탄다.
준하, 버튼을 눌러보지만 불이 들어오질 않는다.
춘추 : 고장 났잖아!
#10. 계단 (밤)
춘추와 부하들, 숨이 턱에 차서 계단을 오르고 있다.
마침내 17층. 그러나 비상구 문이 열리질 않는다.
부하들, 춘추를 주시한다.
춘추 : 계단으로 올라가자 그런 놈 누구야?
종성, 하얗게 질린다.
#11. 로비 (밤)
춘추와 부하들, 숨을 헐떡이며 비상구 문으로 우르르 나온다.
춘추 : (엘리베이터를 노려보며) 내려올 때까지 기다린다. 각자 위치로.
춘추와 부하들, 앉을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남자 둘이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간다.
준하 : 좀 같이 앉읍시다.
남자들, 돌아보는데 닌자들이다.
춘추와 닌자들, 서로 깜짝 놀라 외면하고
춘추와 부하들, 춘추를 중심으로 뭉치며 닌자를 두려운 눈빛으로 본다.
춘추 : 오늘은 일단 철수한다.
춘추파, 한 덩어리로 뭉친 채 회전문으로 나간다.
#12. 타쓰지 방 (밤)
공주, 심하게 앓고 있다.
타쓰지, 침대 옆에 딱 붙어 앉아서 지켜보고 있다.
집사 : 좀 쉬시지요. 제가 있겠습니다.
타쓰지 : (일어로) 괜찮아.
집사 : 어제밤부터 한 숨도 못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타쓰지 : 괜찮다니까.
집사 : ...
타쓰지 : 그건 알아봤어?
집사 : 네. 아무래도 일본에서 온 닌자들 같습니다.
타쓰지 : 닌자?
집사 : 누가, 왜 보냈는지는 좀 더 조사를 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만 일단 제 직감으로는 가문에서 보낸 자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타쓰지 : 가문에서 왜?
집사 : 처음엔 미인도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미인도를 돌려보낸 이후에도 그 자들이 나타난 걸 보면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타쓰지 : ... 다른 목적?
집사 : 가문의 핵심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섣불리 알아보려 하다가는 큰 문책을 당할 수도 있구요.
타쓰지 : ...
집사 : 아무튼 행동을 조심하셔야 될 거 같습니다. 도련님을 해칠 의사는 없는 것 같아도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니까요.
타쓰지 : ...
집사 : 이 아가씨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타쓰지 : ...
집사 : 왜 집착하시는지는 알겠지만 특별한 감정으로 발전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타쓰지 : 어떡하지? 벌써 특별한 감정인데?
집사, 걱정스럽게 타쓰지를 보다가 밖으로 나간다.
공주 : 으... 아리... 아리...
공주가 뒤척이자 타쓰지, 공주의 손을 꼭 잡아준다.
#13. 옷공장 (밤)
인철, 찌그러져서 누워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인철, 반갑게 받는다.
인철 : 여보세요? ... 아닌데요.
인철, 전화를 끊고 다시 소파에 쪼그려 눕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난다.
인철 :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한 푼이라도 벌어야지.
인철, 흩어진 옷들을 쓸어 모아 커다란 가방에 담다가 공주가 꿰매다만 반짝이 옷을 본다.
인철, 공주가 유모한테 배운 솜씨라고 말하며 눈물짓던 모습을 떠올린다.
인철, 머리를 흔들어 애써 공주의 생각들을 지우고 다시 옷들을 가방에 마저 싼 다음
깊숙이 숨겨놓았던 공주의 목걸이를 꺼내 들고 나간다.
#14. 다방 (밤)
인철, 다방 안으로 들어선다.
종업원 : 어서 오세요.
인철, 괜히 자리 하나 잡고 앉아 테이블 위에 가방을 올린다.
종업원 : 뭘로 드시겠어요?
인철 : 아, 차 마시러 온 게 아니라 (가방의 지퍼를 쫙 열며) 옷 좀 구경하시라구.
종업원 : 우리 거래하는 아줌마 있어요. (가버린다)
인철, 다시 지퍼를 닫고 밖으로 나간다.
#15. 다른 술집 입구 (밤)
인철, 기도에게 떠밀려 밖으로 쫓겨나온다.
인철 : 아 알았다구, 안 팔면 될 거 아냐?
인철, 머리를 뒤로 시원하게 넘기고 가방을 둘러메고 씩씩하게 걷는데 눈물이 핑 돈다.
#16. 거리 (밤)
전당포가 있는 거리.
인철, 가방을 둘러메고 전당포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인철, 주머니에 든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전당포를 올려다본다.
#17. 타쓰지 방 (밤)
타쓰지 공주의 손을 잡은 채 침대에 머리를 올려놓고 잠이 들었다.
공주, 잠에서 희미하게 깨어나다가 타쓰지가 자기의 손을 꼭 잡은 채 자고 있자 깜짝 놀라 손을 뺀다.
타쓰지도 그 바람에 잠에서 깬다.
타쓰지 : 일어났네? 좀 어때?
공주 : ...
타쓰지 : 괜찮아?
공주 : 아리한테 데려다다오.
타쓰지 : (굳는다) ...
공주 : 부탁이다.
타쓰지, 기분이 확 상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공주를 잠시 보다가 벽장에서 공주의 겉옷을 꺼내 거칠게 홱 던진다.
타쓰지 : 나와.
타쓰지, 먼저 밖으로 나가버리고 공주, 힘겹게 일어난다.
#18. 인철이네 아파트 앞 (밤)
타쓰지의 차가 끼익 선다.
타쓰지, 운전석에 앉은 채 앞만 보고 있다.
공주, 혼자 안전벨트도 풀고 차문도 열고 타쓰지를 잠시 본다.
공주 : 고맙다. (내린다)
타쓰지,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있다가 공주가 차 문을 닫자마자 요란한 출발음을 내며 떠나버린다.
공주, 괜히 미안해져서 가는 타쓰지의 차를 잠시 보고 아파트를 올려다보는데
가방을 메고 터덭터덜 집으로 돌아오던 인철, 혼자 서 있는 공주를 보고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선다. 반갑다. 이러면 안 되는데.
공주, 느낌이 이상해 돌아보면 인철이 서있다.
공주, 반갑게 활짝 웃는데
인철, 천천히 다가오더니 공주를 그냥 지나쳐 버린다.
공주 : (당황하여) 아리.
인철 : (서서 돌아보지도 않고 한숨을 팍 내쉬고 화를 꾹 참으며) 너, 자꾸 아리, 아리 할래? 나, 아리 아니라 그랬지?
공주 : (눈물이 핑 돈다)
인철 : 너, 왜 또 왔냐?
공주 : (눈물이 주르륵 흐른다)
인철 : 가라. 응?
인철, 끝까지 돌아보지 않고 그냥 안으로 확 들어가 버린다.
공주, 다리의 힘이 쭉 빠져 그 자리에 굳은 채 움직이지 못한다.
#19. 인철이네 집 앞 복도 (밤)
인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문을 열쇠로 열려다가 아래를 내려다본다.
공주,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인철, 잠깐 망설이다가 후닥닥 뛰어간다.
#20. 아파트 앞 (밤)
인철, 아파트 현관에서 나온다.
공주, 인철을 보자 참았던 울음이 터져 소리내서 엉엉 울어버린다.
인철, 공주의 손목을 잡아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인철 : 애가 왜 그렇게 멍청하냐? 좋은 데 데려다놨으면 못 이기는 척하고 그냥 있지. 거기 좀 좋아? 청소해주지, 빨래해주지,
먹을 거 많지. 근데 어떻게 왔어? 그 자식이 데려다 줬냐? 아니, 너, 쫓겨난 거냐? 또 무슨 사고 쳤어? 아, 증말.
저만치 아파트 입구에 그때까지 가지 않고 서있던 차 안에서 룸미러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보는 타쓰지.
참을 수 없는 질투의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21. 인철이네 집 (밤)
인철, 자고 있다.
#22. 인철이네 공주 방 (방)
거실에서 인철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공주, 인철이 쪽을 야속한 눈빛으로 보다가 돌아눕는다. 타쓰지의 말이 떠오른다.
타쓰지 : 널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으니까.
공주, 잠이 안 온다.
#23. 은비네 집 앞
타쓰지의 차가 세워져 있고 타쓰지, 차에 기대 서 있다.
은비, 출근하다가 깜짝 놀란다.
은비 : 어머, 실장님. 여기 웬일이세요?
타스지 : (슥 돌아보고 일어로) 타.
은비 : 네?
타쓰지, 먼저 차에 타버린다.
#24. 비행기 안
타쓰지, 눈을 감고 자고 있고
은비, 두근두근 하는 마음으로 자는 타쓰지를 훔쳐보고 있다.
#25. 은비네 집
채여사, 골프채를 휘두르고 있고 순자, 위험을 무릅쓰고 그 주변에서 걸레질을 하고 있다.
순자 : 그 때 그 남자하고 일본에를 가요?
채여사 : (자랑하듯) 둘이 굉장히 가까워진 모양이야? (홱 휘두르고) 왜 요새 자꾸 슬라이스가 나지?
순자 : 아무리 그래도 거기가 어디라고 따라 가요? 하여튼 요즘 젊은 것들은 웃겨.
채여사 :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순자 : 제가 뭐요?
채 : 웃기다니? 뭐가 웃겨. 웃기긴?
순자 : 아니, 웃긴다기보다 저는 옛말 그른 거 하나도 없다고 봐요.
채 : 그건 또 무슨 얘기야?
순자 : 왜, 옛말에도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 그랬잖아요?
채 : 그래서 우리 은비가 고양이라는 거야, 뭐야?
순자 : 이게 누구꺼지? 이거 사장님 거 아니에요?
순자, 테이블 밑에서 핸드폰을 집어 올려놓는데 벨이 울린다.
채여사, 불길한 예감에 날카롭게 전화를 본다.
순자 : 아, 받아 봐요.
채 :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끊긴다)
채여사, 정말 이상하다.
채 : 아줌마. 바깥양반이 점 본다 그랬지?
순자 : 그런데요?
채 : 용해?
하는 순간 봉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거실을 둘러본다.
채 : 어? 당신 왜 들어왔어?
봉수 : 어, 아니야.
봉수, 소파 밑도 들여다보고, 소파 뒤도 넘겨다보고 소파 쿠션도 들춰본다.
채 : 뭐 찾아?
봉수 : (채여사 손에 있는 휴대폰을 발견하고 탁 뺏는다) 이거 왜 당신이 갖고 있어. 한참 찾았잖아. (다시 나간다)
채와 순자, ???
#26. 인철이네 집
인철과 공주, 밥을 먹고 있다.
공주, 타쓰지가 사준 옷을 입고 있다.
인철, 공주가 입고 있는 옷을 못마땅한 얼굴로 보며 밥상 앞에서 전화를 받고 있다.
인철 : 아, 정말 왜 이러세요? 우리가 하루 이틀 거래해요? ... 좀 늦어질 수도 있지. 정말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 원단 도로 가져가요, 그럼. ... 배째라가 아니라 지금 상황이 그렇다니까...
단골 좋다는 게 뭡니까, 어려울 때 서로 편의 좀 봐주자구요. ... 맘대로 하세요.
인철,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는데 다시 벨이 울린다.
인철, 발신자번호를 들여다보고 배터리를 확 빼버린다.
인철 : 에잇! (다시 밥을 막 먹는데)
공주 : 왜 그러느냐?
인철 : 넌 몰라도 돼.
공주 : 오늘은 바느질하러 안 가느냐?
인철 : 안 가도 돼.
공주 : 그럼, 부탁이 하나 있다.
인철 : ...
공주 : 배를 한 척 구해 줄 수 있겠느냐?
인철 : (미치겠다) ... 배? 배는 뭐하게?
공주 : 아무래도 왜로 건너가 천황을 만나야겠다.
인철 : ... 천황은 또 왜?
공주 : 듣자니 왜에서는 황통이 이어지고 있다는데 거기서라면 내 말이 통할지도 모르겠다.
인철, 심각한 얼굴로 공주를 본다.
공주 : 구해줄 수 있겠느냐?
인철 : ... 너, 그 자식한테 그래서 쫓겨났구나?
공주 : (화가 난다. 내 마음을 이렇게 몰라주다니) 됐다. 관두자.
인철 : 이 자식 웃기는 자식이네? 아무리 그렇다고 아파트 앞에 버리고 가?
공주 : 버리고 간 게 아니다. 내가 데려다 달라 그랬다.
인철 : ... 왜?
공주 : 말하지 않았느냐, 그 자는 나의 원수였다고.
인철 : 거기가 맘에 든다며?
공주 : ... (슬프게 바라보며) 너는 내 마음을 모른다.
공주, 눈에 눈물이 핑 돈 채 다시 밥그릇에 고개를 박고 밥을 먹는다.
인철, 괜히 숙연해지는데.
공주 : (밥을 먹으며 불쑥) 배를 구하는 것이 정 어렵다면 역사서를 좀 구해주겠느냐?
인철 : (잠시 보다가) ... 그래. 구해보자.
#27. 엄박사네 집
엄박사와 숙희, 밥을 먹고 있고 공주, 엄박사 서가의 책들을 훑어보고 있고
인철, 숙희의 젓가락을 빼앗아 한 입씩 집어 먹고 있다.
인철 : 죄송해요. 식사하시는데. (공주에게 신경질) 야! 빨리 골라! (엄에게) 신경 쓰지 말고 드세요.
엄 : 아니, 무슨 책이 필요한데?
인철 : 역사책 좀 보여달라는데요?
숙희 : 한글도 모르잖아?
인철 : 한문은 읽어.
엄 : 그래?
숙희 : (갑자기 생각났다. 인철에게) 참, 내 국사책 어떡할 거야?
인철 : 혁이가 너, 언제 한 번 놀러오라더라.
숙희 : 정말?
인철 : 근데 넌 고 3이 이 시간에 집에 있냐?
숙희 : 시험이야.
엄 : (인철에게) 그 친구 생년월일이 어떻게 돼? 그날 내가 경황이 없어서 미처 못 물어봤어.
이때 순자, 채여사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다.
순자 : 들어오세요,
채여사 :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온다)
순자 : 여보! 여보! (인철을 보며) 어, 왔어? (공주를 보고 놀란다) 저 아가씨는 또 언제 왔어?
엄, 누구? 하는 얼굴로 일어나고
채여사, 억지로 웃으며 집 안을 둘러보다가 비싼 옷을 입고 있는 공주가 눈에 확 들어온다.
공주, 슥 돌아보고 다시 책만 고르고,
순자, 밥 먹는 숙희를 발로 뻥 찬다.
순자 : (공주의 눈치를 슥 보고) 밥상 들고 저짝으로 가.
인철과 숙희, 밥상을 들고 부엌으로 쫓겨난다.
순자 : 여보, 우리 사모님.
인철 : (그렇다면, 고은비 엄마?)
채 : (우아하게) 안녕하세요.
엄 : (고상한 여자가 좋다. 점잖게) 아, 예. 안녕하십니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채 : (남편에 비해 어딘가 무게가 있어 보인다) 아, 네. 듣던대로 미남이시네요.
엄 : 아, 별 말씀을. 세월의 풍상에 많이 바래긴 했습니다만. 앉으시죠.
채 : (앉는다)
엄 : (자기를 째려보고 있는 순자에게) 거 차래도 좀 내오지.
순자 : (엄을 째려보며) 차, 뭐?
엄 : 거, 있잖아. 귀한 거.
순자 : 귀한 게 어딨어? 우리 집에.
채 : (순자를 말리며) 됐어. 됐어. 그냥 앉아 있어.
엄 : (순자와 채여사를 번갈아보며) 근데 무슨 일로...
채 : 그저 사는 게 답답해서 이것저것 좀 여쭤 볼려구요.
엄 : 아니, 이렇게 미인께서 뭐가 그렇게 답답하십니까?
채 : (순자의 눈치를 보며) 어머, 어머, 호호호... 별 말씀을,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이때 공주, 서가 귀퉁이에서 한문으로 된 삼국사기를 뽑아든다.
공주 : (엄에게) 이 삼국은 어떤 삼국을 말하는 겁니까?
채 : 네?
엄 : (당황한다) 아, 예. 그게 백제, 고구려, 신라를 말하는 거지.
공주 : 고구려?
엄 : 옛적에는 가우리라고 했다던데.
공주 : 오... 그렇다면 이게 바로 내가 찾던 책입니다. 이런 책이 더 있습니까?
엄 : 우리나라 사서가 지금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어서...
공주 : (무섭게 화를 내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백제의 사서만 해도 고흥 박사께서 편찬하신 서기를 비롯해서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 등등 한두 종이 아닌데, 없다니요?
채여사, 무서워서 몸을 움츠리고
엄박사네 식구들, 난감해하고 인철, 식은땀이 흐른다.
#28. 도쿄의 그때 그 째즈 바 (밤)
타쓰지와 은비, 술집 안으로 들어서면 친구들, 반갑게 맞이한다.
은비, 바짝 긴장해서 두리번거린다. 이하 전부 일어로.
친구들 : (번갈아 끌어안으며) 우와! 이게 누구야! 타쓰지!!!
친구1 : 웬일이냐, 연락도 없이.
친구2 : 다시 돌아온 거냐?
친구3 : (은비를 슬쩍 보며 농담으로) 이번엔 또 무슨 사고치고 쫓겨 왔냐?
친구1 : 누구야?
타쓰지 : (일어로) 고은비씨. 인사해. 내 친구들이야.
은비 : 안녕하세요, 고은비라고 합니다.
친구1 : 한국분이세요?
은비 : 네.
친구2 : 우와. 엄청난 미인이시네요.
은비 : 고맙습니다.
친구3 : 한국 여자들이 예쁘다더니 정말이네.
은비 : (으쓱으쓱)
시간경과
은비, 혼자 뒤테이블에 버려져 있고 스탠드에 앉은 타쓰지와 친구들한테서는 쉴 새 없이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은비, 점점 기분 나빠져 혼자 술을 홀짝홀짝 마시는데
타쓰지, 친구들에게 떠밀려 술이 취해 약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무대로 올라간다.
바 안이 조용해지고 은비, 놀란 눈으로 보면
타쓰지,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한다. Misty가 감미롭게 흐른다. Errol Garner의 연주처럼 ...
은비, 타쓰지를 빤히 보는데 타쓰지, 은비와 눈을 마주치고 씨익 웃는다.
바 안에 있던 준꼬를 비롯한 여자들, 은비를 째려본다.
#29. 동경의 그때 그 호텔방 (밤)
타쓰지, 은비의 손목을 끌고 안으로 들어와 침대 옆 벽에 세워놓고 아무 말도 없이 은비의 옷을 벗기기 시작한다.
은비 : 어머, 왜 이러세요? 왜 이러세요, 실장님?
타쓰지, 풀린 눈으로 보며 피식 웃고 계속 옷을 벗기려 하지만 너무 취해 잘 안된다.
타쓰지 : (일어로) 왜 이러다니? 몰라서 물어?
은비 : 이건 아니죠. 이러시면 안되죠.
은비, 타쓰지를 확 밀친다.
타쓰지, 뒤로 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은비 : 어머, 괜찮으세요?
타쓰지 : (앉은 채로 픽 웃더니 일어로) 안 괜찮아.
은비 : ...
타쓰지 :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따라왔어?
은비 : ... 하, 차!
타쓰지 : 여기까지 와놓고 왜 튕겨?
은비 : 허, 차!
타쓰지 : 난 피곤한 스타일은 딱 질색이야.
타쓰지, 벌떡 일어나 비틀거리며 방문을 꽝 닫고 나가 버린다.
은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시간경과 - 아침
은비, 침대에서 부스스 눈을 뜨다가 화들짝 놀라 일어난다. 아무도 없다.
은비, 여기저기를 둘러봐도 타쓰지는 간 데 없다. 황당하다.
#30. 타쓰지네 서재
타쓰지, 미인도를 찾아 서재를 뒤지고 있는데 지에꼬가 나타난다.
지에꼬 : (이하 일어) 서울에서 죽은 듯이 있으라 그랬지? 왜 멋대로 돌아온 거야?
타쓰지 : ....휴가에요.
지에꼬 : 네가 무슨 개선 장군이라고 계집애까지 데리고 돌아와. 당장 돌아 가.
타쓰지 : .....미인도 주세요.
지에꼬 : 집사한테 얘기 들었을텐데.
타쓰지 : 주세요.
지에꼬 : (느닷없이 뺨을 갈기며) 정신 차려. 아버지 눈에 띄기 전에 빨리 돌아 가.
지에꼬, 홱 돌아서는데.
타쓰지 : 왜 날 감시하는 거죠?
지에꼬 : 누가 널 감시한다는 거냐?
타쓰지 : 어머니가 잘 아실 텐데요.
지에꼬 : ... 난 모르는 일이다. (나간다)
타쓰지, 잠시 나가는 지에꼬의 뒷모습을 보다가 엄청 비싸 보이는 장식(도자기)을 들어 벽에 집어 던진다.
#31. 동경 호텔
타쓰지, 힘없이 방으로 들어오는데 은비가 없다.
거울에 립스틱으로 메모가 남겨져 있다. ‘먼저 돌아갑니다-은비’
타쓰지, 픽 웃는다.
#32. 강남컨설팅
춘추와 부하들, 심각한 얼굴로 회의를 하고 있다.
춘추, 마네킹 쪽을 향해 앉아 있다.
준하 : 호텔 진입에 실패한 뒤로 호텔과 회사 근처에 잠복하면서 집중적으로 감시했습니다만
공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있는 야마구치파에서 뜻밖의 정보를 전해왔습니다.
춘추 : (날카롭게 돌아본다) 어떤 정보?
준하 : 어제, 오늘, 후지와라가 극비리에 일본을 다녀갔답니다.
춘추 : ...
준하 : 그런데 일본에 올 때는 미모의 여인과 동행이었는데 한국으로 돌아갈 때는 혼자 떠났다는 겁니다.
춘추 : ... 그럼, 일본으로 빼돌렸단 말이야?
준하 :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어 보입니다.
춘추, 몸이 덜덜덜 떨리고 부하들, 침통해진다.
춘추, 마네킹을 보며 다시 가슴 아파하다가 눈을 번뜩인다.
춘추 : 모가지.
모 : 네, 회장님.
춘추 : 쭈구리.
쭈 : 네, 회장님.
춘추 : 대가리.
대 : 네, 회장님.
춘추 : 너희들은 지금 즉시 일본으로 떠나라.
부하들 : 네?
춘추 : 공주를 못 찾으면 돌아올 생각하지 마라.
준하 : 안됩니다, 회장님. 얘네들은 지금 출국금지 상탭니다.
춘추 : 원양어선 하나 수배해.
준하 : (무릎을 꿇으며 비장하게) 회장님. 제가 목숨을 걸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그만 단념하십시오.
이대로 가다간 자칫 조직마저 와해되지나 않을까 정말 걱정됩니다. 이제 이자 받는 일에도 신경을 좀 쓰시고,
조직관리에도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춘추 : 너희들은 모른다. 이 중년의 로망스를...
춘추의 눈에 눈물이 핑 맺힌다.
부하들, 서로 돌아보며 난감해한다.
#33. 모처
한갈,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다.
한갈 : (일어로) .....예......예.......예.............예!!
우슈, 복사본을 펴 들고 전화하는 한갈을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다.
#34. 타쓰지네 서재
전화를 받고 있는 지에꼬.
지에꼬 : (일어로) 목걸이를 손에 넣으면 처치해.
지에꼬 전화를 끊고 미인도를 주욱 펴 본다.
#35. 호텔 - 타쓰지 방
타쓰지, 문을 열고 들어와 가방을 침대 위에 홱 집어던지고 겉옷을 벗는데
집사가 화난 얼굴로 따라 들어온다.
집사 : 고은비양은 왜 데려가신 겁니까? 어머님께 밉보이기로 아주 작정을 하셨습니까?
타쓰지 : (대답없이 셔츠의 단추를 푼다)
집사 : 정말 왜 이러십니까? 적어도 저한테는 말씀을 하셨어야죠.
타쓰지 : (일어로) 미인도는 나한테 말하고 보냈어?
타쓰지, 집사를 찬바람 나게 지나쳐 욕실로 들어간다.
집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36. 욕실
타쓰지, 셔츠의 나머지 단추를 푼 다음 세면기의 물을 틀어 세수를 하며 머리를 뒤로 넘기다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본다.
그 얼굴 위에 공주의 얼굴이 떠오른다.
공주 : 아리한테 가겠다. 아리를 불러다오. ... 분명히 날 데리러 올 거다.
타쓰지, 거울 속 자신을 조롱하듯 씩 웃는다.
타쓰지 : (일어로) 넌 내꺼야. 이 후지와라가 반드시 널 내 여자로 만들겠다.
#37. 옷공장 앞
인철의 차가 서고 인철, 차에서 내린다.
인철 : 내려!
공주, 삼국사기외 몇 권의 책을 들고 차에서 내린다.
공주, 아직도 타쓰지가 사준 옷을 입고 있다.
인철, 공주를 데리고 공장으로 들어간다.
멀리 전봇대 뒤에서 불쌍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는 혁.
혁의 바로 옆에 닌자들의 차가 서 있다.
혁, 무심코 돌아보는데 차 안에 있던 닌자들, 갑자기 신문을 펴든다.
혁, 어디서 봤지? 하는 얼굴로 갸우뚱하다가 다시 입구를 본다.
#38. 옷공장
공주, 소파에 앉아 책을 펼치려는데
인철, 공주의 손에서 책을 탁 빼앗아 멀찌감치 던져버리고 패션잡지들을 공주의 무릎에 던진다.
인철 : 골라봐.
공주 : 뭘 고르라는 거냐?
인철 : 마음에 드는 거 골라보라고.
공주, 마지못해 책장을 넘기는데.
인철 : (사진 하나를 찍으며) 이거 괜찮겠다.
인철, 서슴없이 원단 한 롤을 꺼내 공주에게 대본다.
공주 : 뭐하는 거냐?
인철 : 그 옷 꼴 보기 싫어서 옷 하나 만들어 줄라 그런다, 왜?
공주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인철, 괜히 민망해서 원단을 세워두고 부산스럽게 뭔가를 찾는다.
인철 : 줄자 어디 간 거야? 아, 짜식, 줄자까지 가져갔네. 줄자까지. (서랍을 막 뒤지는데)
혁 : (소리) 줄자는 왜 찾는데?
인철, 공주, 놀라 돌아본다.
혁이 가방을 들고 불쌍한 얼굴로 서 있다.
인철 : (반갑지만) 너, 줄자는 왜 가져갔어, 자식아!
혁 : 내꺼니까 가져가지.
인철 : 좀 빌려줘.
혁 : 알았어. (얼른 가방을 뒤져 줄자를 찾는다)
인철 : (혁이가 뒤지는 동안 가방 안을 들여다보며) 우와 쪽가위까지 전부 챙겨갔네?
혁 : 다 내 돈 주고 산 거니까. (줄자를 건넨다) 야.
인철 : (받으며) 근데 너 왜 왔냐? 수석 디자이너는 어떡하구?
혁 : 여기서도 수석이잖아.
공주 : 오랜만이구나.
혁 : 안녕. 근데 줄자는 왜?
공주 : (좋아하며) 내 옷을 만들어 준다는구나.
혁 : (갑자기 신나서, 인철에게) 팔다리 있는 걸루? 내가 잴께.
혁, 인철에게서 줄자를 탁 빼앗고 수첩 볼펜을 집어들고 공주에게 온다.
혁 : 일어나 봐요.
공주, 일어나면 혁, 공주의 팔, 등, 다리 등등을 전문가처럼 능숙한 솜씨로 치수를 재 기록하기 시작한다.
혁 : 팔 벌려봐요.
혁이 공주의 가슴을 재려하자 혁을 노려보고 있던 인철, 혁을 확 밀어내고 줄자를 빼앗아 자기가 잰다.
인철 : 32!
인철, 다시 공주의 허리에 줄자를 두른다.
공주와 인철, 기분이 이상해진다.
#39. 인철이네 집 (밤)
인철, 드르륵드르륵 재봉질을 하고 있고
공주, 스탠드불빛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며 책을 읽고 있다.
인철, 재봉질을 하다가 한문책을 막힘없이 읽어 내려가며 눈물을 흘리는 공주를 힐끗힐끗 돌아본다.
공주 : (독백)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복신장군마저, 나에게 목걸이를 선물했던 풍오라버니에게 죽임을 당하고,
융오라버니는 당의 앞잡이가 되어, 형제와 민족에게 칼끝을 들이대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이...
아리만 살아 있었어도... 아리만 살아 있었어도...
공주, 눈물을 지으며 인철의 얼굴을 빤히 본다.
공주, 죽기 직전 아리와 입맞춤을 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공주,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펑펑 운다.
공주 : (속으로) 아리... 아리... 보고 싶구나, 아리...
인철, 하품을 하며 힐끗 돌아보다가 그런 공주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외면하고 다시 재봉질을 한다.
시간경과
인철, 눈을 뜨는데 뭔가 이상하다. 자기는 재봉틀 옆에서 잠들어 있고 공주는 그런 인철의 팔을 베고 품에 엎어져 자고 있다.
인철, 깜짝 놀라 일어나려다가 공주가 깰까봐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누워 있다.
인철, 팔이 저려 죽겠으면서도 나쁘지만은 않다.
스탠드불빛에 비친 공주의 눈가에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반짝인다.
인철, 살며시 몸을 돌려 공주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고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40. 인철이네 거실 (밤)
인철, 공주방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밖으로 나온다.
인철, 창가에 앉아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 들여다본다.
문득, 공주의 말이 떠오른다.
공주 : 그 목걸이만 찾을 수 있다면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텐데...
‘그 말이 무슨 뜻일까, 돌려줘야 하나?’ 인철, 방 쪽을 돌아보며 고민한다.
#41. 마케팅 사무실
은비,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다.
은비 : 안녕하세요.
은비, 자기 자리로 가 앉는데 이대리와 다른 직원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이대리 : (은비를 째려보다가 다가온다. 다른 직원들 눈치를 보며 작게) 어떻게 된 거야?
은비 : 뭐가요?
이대리 : 회사에 소문 쫙 났어.
은비 : 무슨 소문이요?
이대리 : 그렇게 노골적으로 그래도 되는 거야?
은비 : 제가 뭘요?
이대리 : 도대체 어디 갔다 왔어?
은비 : 어딜 가다뇨?
이대리 : 이틀이나 안 나왔잖아?
은비 : 병가 냈잖아요? 몸이 아파서 좀 쉬었어요.
이대리 : 전화했더니 어머니께서 일본 갔다고 자랑하시던데?
은비, 난감해 하는데 이때 타쓰지가 들어온다.
타쓰지 : 안녕하세요?
이대리 : 어머, 실장님. 아직 휴가 안 끝나셨잖아요?
타쓰지 : 이대리 보고 싶어서 나왔어요.
타쓰지, 자기를 뚫어져라 보는 은비를 무시하고 사무실로 쏙 들어가 버린다.
이대리 : (좋아하며) 어머, 어머. 아이, 참 실장님도. 아, 참.
이대리, 얼굴이 벌개져 자리로 돌아가 서류뭉치를 들고 타쓰지 방을 노크한다.
은비, 기분 나쁜 얼굴로 째려본다.
#42. 타쓰지 사무실
이대리, 안으로 들어와 타쓰지 책상에 모델 포트폴리오를 올려놓는다.
이대리 : 어제 대행사에서 다녀갔는데요, 새로운 모델들 사진이거든요. 한 번 골라보실래요. 급하다고 빨리 결정해달라 그러던데.
타쓰지 : 이대리가 알아서 하세요.
이대리 : 제가 보니까 신선한 얼굴이 하나 있던데.
이대리, 사진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내놓는다.
이대리 : 이 모델 어때요?
타쓰지, 힐끗 보면 공주다. 타쓰지, 눈이 똥그래진다.
이대리 : 괜찮죠?
타쓰지 : (피식 웃는다)
이대리 : (꼬리 내리며) 아니에요? 아닌가 보네?
타쓰지 : 프레젠테이션 어떻게 됐어요?
이대리 : 몇 군데 얘기하고 있어요.
타쓰지 : 강인철씨한테도 들어오라 그러세요.
이대리 : (반색하며) 아, 예.
타쓰지, 말없이 사진을 들여다본다.
이대리, 안나가고 뭉갠다.
타쓰지 : 뭐, 더 볼 일 있어요?
이대리 : 아뇨. 그럼... (타쓰지 손에서 사진을 탁 빼앗아 서류에 끼워 들고 나간다)
타쓰지, 의자에 뒤로 기대며 혼자 씩 웃는데
은비, 밖에서 그런 타쓰지를 째려보고 있다.
#43. 휴게실
은비, 차를 뽑아 마시는데 타쓰지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가와 차를 뽑는다.
은비, 기가 막혀 타쓰지가 하는 양을 지켜보는데.
타쓰지 :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해요?
은비 : 허, 차!
타쓰지 : 같이 갔으면 올 때도 같이 와야지.
타쓰지, 커피만 들고 돌아가 버린다.
은비, 돌아버리겠다.
#44. 호텔 앞 (밤)
타쓰지의 차가 호텔 앞에 선다.
타쓰지, 차에서 내리는데 은비의 차가 바로 뒤에 서고 은비가 내린다.
은비 : 실장님!
타쓰지,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돌아본다.
은비 :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45. 타쓰지 거실 (밤)
타쓰지, 은비에게 술을 한 잔 건넨다.
은비 : 고맙습니다.
타쓰지, 은비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 빤히 본다.
타쓰지 : 무슨 얘기?
은비, 잠깐 보다가 갑자기 술을 꿀꺽꿀꺽 다 비우고 잔을 탁 내려놓으며 입을 슥 닦는다.
타쓰지, 재밌다.
은비 : 먼저 저한테 사과하세요.
타쓰지 : 왜?
은비 : 몰라서 물어요?
타쓰지 : 내가 특별히 사과할 행동을 한 기억은 없는데?
은비 : (끓는다) ... 한 잔 더 주실래요?
타쓰지, 말없이 일어나 얼음, 술, 안주거리까지 한 아름 챙겨 은비 앞에 펼쳐놓고 은비 잔에 술을 따라준다.
은비, 마치 죽을 결심을 하고 독약을 마시는 사람처럼 벌컥벌컥 마셔버리고 입을 슥 닦는다.
타쓰지 : 그렇게 마시면 취할 텐데?
은비 : 남이야 취하든, 말든.
타쓰지 : (피식 웃고 빤히 본다)
은비 :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모욕감은 처음이에요. 사람을 우습게 봐도 분수가 있지, 이렇게 갖고 놀아도 되는 거예요?
타쓰지 : ... 원해서 같이 간 거 아니야?
은비 : (자존심 상한다)
타쓰지 : 난 강요한 적 없어.
은비 : 지금 그런 얘길 하는 게 아니잖아요.
타쓰지 : 그럼, 뭐?
은비 : 왜 내 마음을 갖고 노냐구요?
타쓰지 : ...난 그런 적 없는데... 고은비씨 마음은 고은비씨가 알아서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은비, 씩씩대다가 술을 잔에 따라 마치 타쓰지한테 뿌릴 것처럼 들더니 차마 뿌리진 못하고 다시 쭉 들이킨다.
은비 : 그래, 내가 너 돈도 좀 있고 허우대도 멀쩡해서 어떻게 한 번 해 볼라 그랬는데 너, 정말 재수 없어.
너두 알지? 너 재수 없는 거.
은비, 벌떡 일어나 나간다.
타쓰지, 피식피식 웃는다.
타쓰지 : (일어로) 쎈데?
#46. 옷공장
인철, 공주의 옷을 계속 만들고 있고 혁은 전화를 받고 있고 공주는 책을 읽고 있다.
혁 : 네, 세계적인 브랜드 강남어패럴인데요, ... 누구요? 디자이너 강이요? (인철을 째려본다) ....누구시라고 전해드릴까요?
... 이대리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송화기를 가리고) 뭐? 디자이너 강? (비웃는다) 푸하! 이 여잔, 또 누구냐?
인철 여자?
인철 : (공주의 눈치를 슬쩍 보고) 누구지? (받는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 네? 아 난 또 누구시라고. 안녕하세요?
... 웬일로 전화를 다 주시고. ... (깜짝 놀란다) 예? ... (얼굴에 미소가 퍼지다가 굳는다) ... 실장이요?
... 예, 한 번 생각해보구요, 연락드리겠습니다. ... 예, 수고하세요. (끊는다) 웃기는 자식이네?
혁 : 뭔데, 뭔데? 뭘 생각하고 뭐가 웃긴데?
인철 : 학연이 어떻고, 지연이 어때? 차!
혁 : 뭐가?
인철 : 내가 하나 봐라.
혁 : 뭘?
인철 : (짜증스럽게) 아, 패션쇼 말이야! 우리가 뭐, 그거 안 한다고 굶어 죽겠냐? 짜식이 사람을 뭘로 보고.
혁 : (인철의 뒤통수를 갈긴다) 그거 안 하면 굶어 죽어, 이 자식아! 빨리 전화해.
인철 : 아, 됐어. 내가 강북 업소, 지방 업소, 뚫는다니까!
이때 공주, 보고 있던 삼국사기를 거칠게 집어던진다.
인철과 혁, 깜짝 놀라 본다.
공주 : (이를 갈며) 뭐? 가우리가 수나라, 당나라에 불손해서 멸망을 당했다고? 백제가 대국에 거짓말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망한 게 당연하다고? 으아!!! 도대체 이 책을 쓴 자가 누구냐?
인, 혁 : ...
공주 : 누구냐니까!
혁 : (인철에게) 김부식 아니냐?
공주 : 그 놈이 당나라 놈이냐?
혁 : (인철에게) 우리나라 사람 아니냐?
공주 : 그렇다면 신라의 후손이 틀림없겠구나. 내 이 신라놈들을 그냥!
공주, 옆에 세워져 있던 마네킹을 날려버리는데
타쓰지가 들어오다가 날아오는 마네킹을 받아든다.
타쓰지 : 실례합니다.
일동, 날카롭게 돌아본다.